제100화. 완결. 읽는 이름, 쓰는 운명
Code Destiny · 2,149자
제100화. 완결. 읽는 이름, 쓰는 운명
연이는 가끔 그날 밤을 떠올린다.
휴대폰 배터리가 4퍼센트였던 밤.
충전기를 꽂으려는데 화면이 혼자 켜지던 밤.
삭제되지 않는 이상한 앱 하나가 인생에 끼어들던 밤.
그때는 그게 인생 최악의 하루라고 생각했다.
알람이 안 울리고, 짝짝이 양말을 신고, 버스 카드가 네 번 만에 찍히고, 삼각김밥이 두 번이나 배신하던 하루.
지나고 보니, 그날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루였다.
연이는 그 사실이 아직도 조금 웃겼다.
가장 이상했던 날이, 가장 소중한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그날 이후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꽃돼지가 되어 사주의 강에 처참하게 빠졌던 일.
갈기 있는 고양이라던 낯선 존재와 “내가 움직이고 네가 막아줘”라는 서투른 계약을 맺었던 일.
비겁의 섬에서 거울 속 자기 자신과 대면했던 일.
모카를 만나고, 치즈와 크림을 만나고, 루나를 만났던 일.
기억의 도서관에서 오염된 해석과 싸우며 “본뜻을 되찾는 법”을 배웠던 일.
재성의 섬에서 청토끼와 부딪히며 “선택의 가격”을 치렀던 일.
별의 궁전에서, 왕좌를 차지한 존재의 이름이 무성이라는 걸 알았던 일.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던 진짜 이야기 — 미래에서 건너온 실 하나와, 그 실이 사랑받지 못해 뒤틀려버린 또 다른 실 하나.
박병하.
그 이름을 처음 소리 내어 불렀던 순간, 연이는 세상이 아주 잠깐 멈추는 것 같았다.
그가 왜 고양이로만, 사자로만 존재해야 했는지.
그가 왜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오래 숨겨야 했는지.
그리고 그가 지키려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 모든 답이 결국 자신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연이는 무섭기보다 먼저 화가 났다.
“진작 말하지, 바보야.”
박병하는 그때도 대답 대신 그저 옆에 있어 주는 쪽을 택했다.
그게 딱 그다웠다.
묘아라는 이름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도, 연이는 알고 있었다.
부수는 것보다 어려운 건, 부서진 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일이라는 걸.
그래서 연이는 싸우지 않았다.
대신 마주 봤다.
그 결과가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아무도 완전히 혼자 남지 않았다.
연이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의 끝에서, 연이는 선택을 했다.
박병하의 손을 놓지 않는 선택.
이 세계에 완전히 뿌리내리는 선택.
동시에, 그 어떤 문도 완전히 닫아버리지 않는 선택.
예전의 연이라면 절대 못 했을 선택이었다.
예전의 연이는 “운명”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망하면 운명.
헤어지면 인연 아님.
늦으면 때가 아님.
그 말들은 항상 연이만 제자리에 남겨두는 주문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운명은 핑계가 아니라, 매일 새로 쓰는 것이었다.
누군가 대신 써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펜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운은 쓰는 거야.”
언젠가 자신이 그렇게 말했던 걸, 연이는 떠올리며 웃었다.
*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여기는 자미성 아래, 숙요의 정원과 가까운 작은 처소였다.
방 안에는 타로 카드 몇 장이 장식처럼 걸려 있었고, 창밖으로는 별자리들이 강물처럼 잔잔히 흐르는 게 보였다.
침대 발치에는 거대한 흰 사자가 늘어져 자고 있었다.
정확히는, 침대 절반을 차지하고 자고 있었다.
연이는 이불을 살짝 잡아당겼다.
당겨지지 않았다.
“야, 이불 좀 놔줄래.”
박병하가 눈도 안 뜨고 대답했다.
“내가 깔고 있는 게 아니다. 네가 못 당기는 거다.”
“그게 그거잖아!”
“다르다.”
연이는 결국 이불 뺏기를 포기하고, 그 거대한 갈기에 등을 기댔다.
따뜻했다.
“…큰 고양이 취급받는 거 아직도 싫어?”
“고양이는 이렇게 안 크다.”
“그럼 큰 사자님이라고 불러줄까?”
“…마음대로 해라.”
창밖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모카가 노래 연습을 하는 소리.
치즈가 아침 배달 장부를 정리하며 뭔가를 중얼거리는 소리.
크림이 갓 구운 빵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발소리.
루나가 어젯밤에 완성했다는 곡을 흥얼거리는 소리.
전부 하나로 섞여 아침의 배경음악이 되어 있었다.
연이는 눈을 감고 그 소리들을 들었다.
“다들 여전하네.”
“여전히 시끄럽다는 뜻이면, 동의한다.”
“여전히 다들 잘 살고 있단 뜻이야, 이 무드 없는 사자야.”
박병하가 짧게 웃었다.
정말로 짧았지만, 분명 웃음이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소리였다.
연이는 그 웃음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소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박병하.”
“말해라.”
“나 후회 안 해. 하나도.”
“…알고 있다.”
“근데 그냥, 한 번 더 말해두고 싶었어.”
박병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 모습이라도.”
“큰 고양이라도?”
“…사자다.”
“어련하시겠어.”
연이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켰다.
홈 화면 한가운데, 네 개의 탭이 나란히 빛나고 있었다.
사주.
타로.
자미두수.
숙요.
연이는 그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옛날 그날처럼, 앱 아이콘을 길게 눌러봤다.
삭제 버튼이 떴다.
이번엔 진짜로 지울 수 있었다.
연이는 손가락을 그 버튼 위에 잠깐 올려놓았다가, 그냥 화면을 껐다.
“…역시 안 지워.”
말할 필요도 없는 대답이었다.
박병하가 눈을 슬쩍 뜨고 그녀를 봤다.
“뭐 하는 거냐.”
“그냥, 예전 생각나서.”
연이는 창밖을 바라봤다.
별자리 강물이 여전히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모카의 노래가 한 소절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치즈의 장부 넘기는 소리.
크림의 웃음소리.
루나의 새 멜로디.
그리고 자기 옆에서 낮게 숨 쉬는, 거대하고 다정한 온기.
연이는 그 모든 것을 눈에, 귀에, 마음에 담았다.
그러고는 아주 오랜만에,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웃었다.
연이는 요즘, 운이 좋았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부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