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남기로 한 사람
Code Destiny · 3,141자
제99화. 남기로 한 사람
문이 닫히던 순간과 다시 열리던 순간 사이에는, 아주 짧은 침묵이 있었다.
연이는 그 침묵 속에서 박병하의 앞발 — 이제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거대한 앞발이었지만 —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두 세계의 경계가 복구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자미성은 오랜만에 조용했다.
명궁의 거울은 더 이상 아무것도 저격하지 않고 그저 아침 햇살을 얌전히 반사했다.
관록궁의 탑은 흔들리지 않았다.
복덕궁의 호수는 잔물결 하나 없이 잔잔했다.
부부궁의 문은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는 대신, 그냥 활짝 열려 있었다.
재백궁에서는 낡은 계약서 대신 깨끗한 장부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노복궁에서는 수많은 손들이 더 이상 서로를 찾아 헤매지 않고, 그냥 마주 잡고 있었다.
연이는 그 모든 풍경을 눈에 담다가 중얼거렸다.
“와, 다 고쳐놓으니까 완전 딴 동네네.”
박병하가 낮게 말했다.
“원래 이런 모습이었다.”
“그럼 그동안 계속 개판이었던 거잖아.”
“…부정은 안 하겠다.”
연이는 웃었다.
그때 손목에 찬 성반이 진동했다.
익숙한 알림음이었다.
띠링.
연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이 알림음이 좋은 소식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연이는 눈을 깜빡였다.
“오, 0퍼센트?”
처음 이 앱을 만났던 날, 손상률은 87퍼센트였다.
그날 이후로 숫자는 늘 조금씩 위태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0.
완전한 0이었다.
연이가 그 숫자를 보며 뿌듯해하려는 찰나,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연이는 멈췄다.
버튼은 두 개였다.
그리고 이번엔 — 정말로 두 개였다.
연이는 그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처음 이 앱을 만났던 밤이 떠올랐다.
그때는 삭제하려고 길게 눌렀는데 이런 말이 떴었다.
그리고 [나중에]를 눌렀더니.
그날은 선택지가 아니라 납치 예고였다.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물어보고 있었다.
박병하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낮게 물었다.
“뭐라고 뜨는데.”
“…나더러 이 앱, 지울 거냐고.”
박병하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그 큰 사자 얼굴로도 그 정도 동요는 다 티가 났다.
“지우면.”
“그럼 아마 나는 그냥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가겠지. 여기 일은 다 잊고. 너도, 모카도, 치즈도, 크림도, 루나도.”
박병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침묵이 연이는 오히려 조금 웃겼다.
“야, 표정 봐. 완전 대답 알면서 겁먹은 얼굴인데.”
“…아니다.”
“맞잖아.”
연이는 휴대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눌렀다.
망설임 같은 건 거의 없었다.
화면이 잠깐 멈췄다가, 이렇게 떴다.
연이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처음으로, 이것은 당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고는 픽 웃었다.
“진작 좀 이렇게 물어보지 그랬어. 처음부터 납치를 안 했으면 서로 편했잖아.”
화면 어딘가에서, 마치 대답하듯 짧은 진동이 울렸다.
박병하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커다란 머리를 슬쩍 기댔다.
무게가 상당했다.
“…무겁거든.”
“익숙해질 거다.”
“이거 좀 로맨틱한 타이밍에 이런 몸으로 이러면 반칙 아니야?”
“내가 고른 몸이 아니다.”
“알아. 아는데, 그래도 너무 크다고.”
투덜대면서도 연이는 그 무게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때 허공에서 은은한 빛의 실이 풀리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대화가 다 끝났으면 나도 좀 낄까.”
타래였다.
명주실을 엮어 만든 듯한 실루엣이 허공에 옅게 맺혔다.
“숙요의 정원 안내자로서, 공식적으로 전할 말이 있어.”
연이는 자세를 바로 했다.
“뭔데, 갑자기 격식 차리고.”
“네가 연결을 유지하기로 선택했으니까.”
타래가 손을 들어 허공에 원을 그렸다.
빛이 실처럼 풀려나와 하나의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 정원의 실들이 더 이상 흩어지지 않고, 완전한 하나의 자리로 굳었어.”
문양은 점점 또렷해졌다.
작은 별, 실이 감긴 매듭, 그리고 은은한 달빛.
연이는 그 모양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곧 깨달았다.
그건 자신의 휴대폰 홈 화면 아이콘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타래가 웃었다.
“맞아. 오늘부로 숙요는 더 이상 숨겨진 정원이 아니야.”
문양이 허공에서 빛나며 연이의 손목 성반으로, 그리고 휴대폰 화면으로 옮겨갔다.
홈 화면이 잠깐 흔들리더니, 새로운 탭 하나가 자리 잡았다.
사주.
타로.
자미두수.
그리고, 숙요.
네 개의 탭이 나란히 빛나고 있었다.
연이는 그 화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와, 진짜 4번 탭 생겼어.”
“정식으로.”
타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누구든 문을 두드리면 여기 올 수 있어. 숨어 있을 필요 없이.”
연이는 문득 물었다.
“그럼…… 그릇은?”
무성 얘기였다.
타래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지금은 이 정원의 실 어딘가에서 쉬고 있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완전히 돌아온 것도 아니야.”
“그거…… 괜찮은 거야?”
“적어도 더 이상 누구에게 조종당하진 않아. 그거면 됐다고, 나는 생각해.”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더는 아프지 않은 결말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타래는 그 말을 끝으로 실처럼 풀어져 사라졌다.
연이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몸을 돌렸다.
“가자. 애들 다 기다리고 있을 거야.”
*
자미성 앞뜰에는 이미 다들 모여 있었다.
모카가 제일 먼저 방방 뛰며 달려왔다.
“연이야아아! 나 이번 주에 노바 스테이지에서 단독 콘서트 잡혔다!”
“대박, 축하해!”
“근데 그거 알아? 이제 문이 안정됐다고 관객 중 절반은 현실 쪽에서도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대. 나 완전 양쪽 세계 아이돌 되는 거야.”
연이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돼?”
“타래가 그랬어. 문이 계속 열려 있으니까 신호도 새어나갈 수 있다고.”
모카는 발을 굴렀다.
쿵.
“그니까 너도 종종 보러 와. 대신 이번엔 진짜 표 사서 봐.”
“내가 언제 무단으로 봤다고!”
치즈가 유리 조각이 달린 작은 장부를 안고 다가왔다.
“연이 님. 재백궁 장부는 이제 완전히 정리됐습니다. 부채도, 위조 조항도 없습니다.”
“치즈, 그 말투 좀 풀어도 되지 않아?”
“…노력 중입니다.”
그 뒤에서 크림이 갓 구운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웃었다.
“언니, 이거 가져가요. 이번엔 안 태웠어요.”
“지난번엔 태웠어?”
“조금요. 근데 탄 빵도 다시 구울 수 있으니까 괜찮았어요.”
연이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거 완전 옛날에 루나한테 해준 말인데.”
루나가 류트를 안고 다가오며 씩 웃었다.
“그 말, 나도 요즘 자주 써먹어. 곡 쓸 때도, 틀려도 다시 고치면 되니까.”
루나는 류트 줄을 가볍게 튕겼다.
딩.
완벽하지 않은, 그래서 진짜인 소리였다.
“이번 곡, 너희 이야기로 만들었어. 나중에 들려줄게.”
“지금 들려줘!”
“안 돼, 아직 안 끝났어. 완성하면 제일 먼저 들려줄게. 약속.”
모두가 웃었다.
연이는 그 웃음소리 한가운데 서서 생각했다.
이게 이별이라면, 정말 이상한 이별이었다.
아무도 울지 않고, 아무도 무겁지 않았다.
“얘들아.”
연이가 입을 열었다.
“나 여기 남기로 했어. 진짜로, 완전히.”
잠깐 정적이 흘렀다.
“대신, 문은 계속 열려 있대. 그러니까 이게 마지막 인사가 아니라—”
모카가 말을 잘랐다.
“또 보자는 인사네.”
“어.”
“그럼 뭘 그렇게 심각하게 말해. 진작 그렇게 말하지.”
모카가 연이를 와락 껴안았다.
치즈와 크림도 다가왔다.
루나도 류트를 든 채로 슬쩍 팔을 둘렀다.
넷이 한 번에 안기니 숨이 막혔지만, 연이는 밀어내지 않았다.
“다음엔 내가 놀러 갈게. 콘서트도 보고, 빵도 먹고, 노래도 듣고.”
“약속.”
“약속.”
“약속이에요.”
“…약속으로 해두겠다.”
마지막 말은 박병하의 목소리였다.
모두가 그를 돌아봤다.
연이가 피식 웃었다.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인데.”
“진심을 담아 다시 쓴 거다.”
“어련하시겠어.”
노을이 자미성 지붕 위로 번지고 있었다.
연이는 친구들과 하나씩 손을 마주치고, 등을 두드리고, 웃음소리를 나눴다.
완전한 이별이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문을 열어두는 법을 배운 것뿐이었다.
그리고 연이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