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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Destiny제18화. 첫 울림과 덧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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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제18화. 첫 울림과 덧말

Code Destiny · 6,676자

제18화. 첫 울림과 덧말

검은 잉크가 바닥을 덮었다.

처음에는 물처럼 번졌다.

하지만 곧 종이처럼 굳었다.

연이의 발밑에 하얀 페이지가 펼쳐지고, 그 위로 검은 글자들이 빠르게 적히기 시작했다.

[판단 보류]
[보호 필요]
[해석 불가]
[기억 신뢰도 낮음]

연이는 앞발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페이지들이 발목을 감쌌다.

종이였지만 단단했다.

잘 찢어질 것 같으면서도, 막상 힘을 주면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뭐야, 이거…….”

백문은 방 중앙에 서 있었다.

흰 올빼미였던 그의 깃털은 이제 절반 이상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말투는 여전히 정중했다.

그게 더 불쾌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문이 말했다.

“저는 당신의 기억을 빼앗지 않습니다.”

“그럼 이건 뭔데?”

연이는 바닥의 글자들을 노려봤다.

백문은 부드럽게 웃었다.

“정리입니다.”

“정리?”

“네. 사람은 기억을 있는 그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해석이 필요하지요.”

그가 펜을 들었다.

검은 펜촉 끝에 잉크가 맺혔다.

“저는 그 해석을 도와드릴 뿐입니다.”

루나가 낮게 말했다.

“거짓말.”

백문은 루나를 보았다.

“작곡가라면 알 텐데요. 첫 울림만으로는 음악이 되지 않습니다. 편곡이 필요하지요.”

루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편곡은 첫 울림을 살리는 거야. 네 건 덮어씌우는 거고.”

백문의 미소가 얇아졌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그가 펜을 허공에 그었다.

그러자 방 한쪽 벽이 책장처럼 열렸다.

안쪽에 연이의 기억이 펼쳐졌다.

그것은 화면이 아니었다.

책도 아니었다.

비 오는 창가였다.

낮은 책상.

작은 의자.

식지 않는 차.

흔들리는 커튼.

그리고 아주 어린 연이처럼 보이는 작은 그림자.

연이는 숨을 멈췄다.

“저게…… 나야?”

기억 속의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에는 색연필이 들려 있었다.

종이 위에는 뭔가를 그리다 만 흔적이 있었다.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노래 가사인지 모를 작은 선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연이야.”

그 목소리였다.

첫 번째 목소리.

부드럽고, 오래되고, 이상하게 익숙한 목소리.

“괜찮아.”

기억 속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다시 말했다.

“천천히 해도 돼.”

그 순간 연이의 가슴 안쪽이 울렸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백문의 펜이 움직였다.

기억 옆에 검은 덧말이 달렸다.

[덧말 1: 천천히 하라는 말은 결국 늦어도 된다는 허락이다.]

연이의 표정이 굳었다.

또 다른 덧말이 붙었다.

[덧말 2: 이 말 때문에 너는 늘 늦어졌다.]

“아니야.”

연이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다.

백문은 듣지 못한 척했다.

세 번째 덧말이 붙었다.

[덧말 3: 괜찮다는 말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 있다.]

연이의 머리 위 꽃이 흔들렸다.

기억 속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옆에 달린 덧말 때문에, 말의 색이 바뀌는 것 같았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그 말이 위로인지.

포기하라는 뜻인지.

기다려주겠다는 말인지.

아무 기대도 없다는 말인지.

분간이 흐려졌다.

백문은 조용히 말했다.

“보십시오. 기억은 하나지만, 해석은 여러 개입니다.”

그는 연이를 바라봤다.

“당신은 어떤 해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연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선택할 수 없었다.

선택하는 순간, 그 목소리의 의미가 영원히 정해질 것 같았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모카는 뒤에서 노트를 붙잡고 있었다.

그의 눈도 흔들리고 있었다.

백문은 이번엔 모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카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방 한쪽에 또 다른 장면이 열렸다.

식신·상관의 섬 무대.

모카가 “나는 모카”라고 외치던 순간.

DEST1NOVA가 그를 바라보던 순간.

SOLV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던 순간.

모카의 얼굴에 빛이 떠올랐다.

백문이 펜을 움직였다.

그 장면 옆에도 덧말이 달렸다.

[덧말 1: 그들은 상황 때문에 너를 격려했을 가능성이 높다.]

모카의 손이 떨렸다.

두 번째 덧말.

[덧말 2: 인정이 아니라 위로였을 수 있다.]

세 번째 덧말.

[덧말 3: 다음 줄을 기대한다는 말은 부담을 준 것일 수도 있다.]

모카의 귀가 축 처졌다.

“그럴 수도…….”

연이는 고개를 돌렸다.

“모카, 아니야.”

백문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왜 아니라고 단정하십니까?”

연이의 말이 막혔다.

백문은 천천히 걸었다.

“가능성입니다. 저는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 말이 제일 교활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확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모카의 마음에 가장 깊게 박혔다.

모카는 노트를 꽉 쥐었다.

“그러면…… 제가 들은 인정도, 사실은 제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걸까요?”

백문이 웃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네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만해라.”

백문은 네오를 보았다.

“그만하라니요. 질문은 인성의 핵심입니다. 묻지 않는 배움은 죽은 배움이지요.”

“질문은 길이어야 한다.”

네오의 갈기가 희미하게 타올랐다.

“너는 질문을 늪으로 만들고 있다.”

백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늪이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가 펜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네오의 주위에 책들이 펼쳐졌다.

표지는 전부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글자가 나타나려다가 사라지고, 그림이 떠오르려다가 흐려졌다.

백문은 그 책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의 기록은 참 이상합니다.”

네오의 표정이 굳었다.

“건드리지 마라.”

“이상하지요. 오래된 존재라면 기록이 무거워야 하는데, 당신은 무겁지만 읽히지 않습니다.”

책장들이 네오 주위를 돌았다.

[왜 감추는가?]
[누구를 속이는가?]
[가디언이라는 말은 진짜인가?]
[왜 인간의 스마트폰을 알고 있는가?]
[왜 봉인자들이 네 존재를 알아보는가?]

질문은 네오를 공격했다.

하지만 네오를 직접 찌르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돌며, 연이와 모카에게 보이도록 떠 있었다.

백문은 연이를 보았다.

“당신의 동료는 질문이 많군요.”

연이는 네오를 바라봤다.

질문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더 문제였다.

네오는 분명 수상했다.

인간 세계의 스마트폰을 이상하게 잘 알았고, 사주의 강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며, 봉인자들에게도 인식되고 있었다.

기록은 흐렸다.

정체는 말하지 않았다.

연이는 그동안 그냥 넘겼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질문들이 떠오르자, 마음 한쪽이 흔들렸다.

백문이 조용히 물었다.

“믿으시겠습니까?”

정인의 담요가 연이 쪽으로 다가왔다.

[무조건 믿어라.]

“의심하시겠습니까?”

편인의 질문들이 반대편에서 반짝였다.

[전부 의심해라.]

백문은 미소 지었다.

“아니면 판단을 보류하시겠습니까?”

세 번째 책이 펼쳐졌다.

[아직 결정하지 마라.]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또 세 선택지였다.

믿어라.

의심해라.

미뤄라.

세 가지 모두 그럴듯했다.

그리고 모두 멈추게 만들었다.

무조건 믿으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전부 의심하면 함께 갈 수 없다.

계속 미루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백문은 정말 싸우지 않았다.

대신 길을 세 개만 보여줬다.

그 세 길이 모두 늪이라는 걸 숨긴 채.

연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가슴 안쪽에서 [乙亥]가 조용히 흔들렸다.

작은 새싹과 깊은 물.

그 아래로 [丁未]의 불과 흙도 있었다.

자기 자리.

자기 목소리.

자기 무대.

그렇다면 이번에는.

자기 판단.

연이는 조용히 말했다.

“너 되게 똑똑하네.”

백문의 미소가 잠깐 멈췄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칭찬 아니야.”

연이는 앞발로 바닥의 페이지를 눌렀다.

“너는 거짓말을 안 해서 더 나빠.”

백문의 눈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연이는 계속 말했다.

“기억을 지우지도 않아. 목소리를 없애지도 않아. 그냥 옆에 이상한 덧말을 달아.”

그녀는 자신의 기억 옆에 붙은 검은 덧말을 보았다.

[천천히 하라는 말은 포기하라는 뜻일 수 있다.]

연이는 그것을 노려봤다.

“그럴 수도 있지.”

백문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근데 그럴 수도 있다는 게 정답은 아니잖아.”

백문의 눈빛이 멈췄다.

연이는 모카를 봤다.

“SOLV가 너를 위로했을 수도 있어.”

모카의 눈이 흔들렸다.

“네…….”

“그런데 그게 네 첫 줄이 가짜였다는 뜻은 아니야.”

모카는 숨을 멈췄다.

연이는 네오를 보았다.

“네오가 수상한 것도 맞아.”

네오의 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근데 지금까지 나를 구해준 것도 맞아.”

그녀는 루나를 보았다.

“루나가 낯선 것도 맞고, 우리가 다 믿기엔 이 섬이 이상한 것도 맞아.”

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는 다시 백문을 보았다.

“그러니까 믿을 건 믿고, 물을 건 물을 거야.”

백문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모순입니다.”

“아니.”

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판단이야.”

방 안의 책들이 흔들렸다.

정인의 담요가 멈췄다.

편인의 질문들도 잠깐 빛을 잃었다.

백문의 펜끝에서 잉크가 떨어졌다.

뚝.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판단은 고통스럽습니다.”

“알아.”

“틀릴 수 있습니다.”

“알아.”

“누군가를 믿었다가 배신당할 수 있고, 의심했다가 좋은 사람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

“그렇다면 왜 굳이 선택합니까?”

연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질문은 날카로웠다.

정말 그랬다.

판단은 무서웠다.

믿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시작하는 것도 전부 무서웠다.

하지만 연이는 이미 두 개의 섬을 지나왔다.

비겁의 섬에서, 자기 자리를 남에게 맡기지 않기로 했다.

식신·상관의 섬에서, 완성되지 않아도 꺼내기로 했다.

그렇다면 인성의 섬에서는.

배운다는 이름으로 판단을 포기하면 안 된다.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내 인생이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내 기억이고, 내 선택이고, 내 다음 줄이니까.”

모카의 노바 링이 작게 빛났다.

모카는 천천히 노트를 펼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빈칸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그는 백문의 덧말을 보았다.

[인정이 아니라 위로였을 수 있다.]

모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어요.”

백문이 모카를 보았다.

모카는 이어 말했다.

“SOLV 형이 저를 그냥 위로했을 수도 있어요. 제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근데…… 그래도 제가 무대에서 말한 건 진짜였어요.”

노트 위에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모카의 눈이 커졌다.

루나가 작게 웃었다.

“좋은 두 번째 줄이네.”

모카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노트에 직접 적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엔 백문의 덧말도 그 글자를 덮지 못했다.

백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쓸데없이 애매한 문장이군요.”

루나는 조용히 류트를 들었다.

딩.

한 음이 울렸다.

“애매함을 견디는 것도 인성이야.”

그 소리에 편인의 질문 하나가 흔들렸다.

[정말?]

그 질문 옆에 루나의 음표가 붙었다.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날카로움이 줄었다.

모카가 눈을 떴다.

“질문을 없애는 게 아니네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은 편인은 질문을 없애지 않아. 질문 때문에 멈추지 않게 도와.”

백문은 펜을 세게 쥐었다.

“그런 느슨한 해석은 위험합니다.”

네오가 낮게 말했다.

“위험한 건 네 방식이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질문들을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인가?]
[왜 말하지 않는가?]
[정말 믿어도 되는가?]

네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연이는 그를 보았다.

네오가 말하길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당장 억지로 말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백문의 방식처럼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연이는 조용히 말했다.

“네오.”

네오가 그녀를 보았다.

“나는 네가 수상하다고 생각해.”

모카가 숨을 삼켰다.

루나도 조용히 연이를 보았다.

연이는 계속 말했다.

“근데 지금 말하기 싫다면, 지금은 안 물어볼게.”

네오의 눈동자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대신 언젠가는 물어볼 거야.”

네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그 정도면 된다.”

그 한마디가 나오자, 네오 주변의 질문 사슬이 조금 느슨해졌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목을 조르지는 않았다.

백문은 그 장면을 보고 낮게 웃었다.

“아름답군요. 불완전한 신뢰, 불완전한 의심, 불완전한 판단.”

그의 깃털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하지만 불완전한 것은 결국 흔들립니다.”

그가 펜을 높이 들었다.

“그럼 더 많은 덧말을 드리죠.”

방 전체의 책들이 한꺼번에 펼쳐졌다.

이번에는 한두 개의 기억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장면이 동시에 떠올랐다.

연이가 망설였던 순간.

연이가 포기했던 순간.

연이가 누군가를 믿었다가 실망했던 순간.

누군가의 말을 오해했던 순간.

누군가의 침묵을 멋대로 해석했던 순간.

모카가 가사를 지웠던 밤.

모카가 칭찬을 받았지만 믿지 못했던 순간.

루나가 자기 곡을 찢어버린 기억.

네오가 어딘가를 떠나던 오래된 그림자.

모두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 옆에 검은 덧말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역시 너는 늦었다.]
[역시 너는 부족했다.]
[역시 너는 속았다.]
[역시 너는 의심했어야 했다.]
[역시 너는 믿지 말았어야 했다.]
[역시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연이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무 많아…….”

백문은 차갑게 말했다.

“이것이 지식입니다.”

“아니.”

루나가 말했다.

그녀는 류트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건 지식이 아니라 잡음이야.”

“잡음?”

백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루나는 모카를 보았다.

“모카. 기억해.”

모카가 고개를 들었다.

“너는 소리 뒤의 마음을 들을 수 있어.”

모카의 귀가 떨렸다.

루나는 말했다.

“그럼 지금 첫 울림을 찾아.”

“첫 울림…….”

“백문이 붙인 덧말 말고, 처음 울린 소리.”

모카는 눈을 감았다.

방 안에는 너무 많은 소리가 있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

펜이 긋는 소리.

검은 잉크가 번지는 소리.

수백 개의 덧말이 속삭이는 소리.

그 속에서 첫 울림을 찾아야 했다.

모카의 귀가 떨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 컸다.

모든 말이 그럴듯했다.

그런데 아주 깊은 곳에서.

작은 소리 하나가 있었다.

“연이야.”

그 목소리였다.

덧말이 붙기 전의 소리.

해석이 덧씌워지기 전의 첫 울림.

모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들려요.”

연이가 숨을 멈췄다.

“뭐가?”

모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백문이 바로 펜을 휘둘렀다.

“해석은 제가 하겠습니다.”

검은 덧말들이 모카를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루나가 류트를 튕겼다.

딩!

음표가 방패처럼 펼쳐졌다.

“아니.”

루나는 말했다.

“이번엔 듣는 사람이 말하게 둬.”

모카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목소리는…… 연이님을 멈추게 하려는 소리가 아니에요.”

연이의 눈이 흔들렸다.

모카는 집중했다.

“기다리라는 소리도 아니고, 포기하라는 소리도 아니에요.”

그는 숨을 들이켰다.

“넘어져도 괜찮다고, 다시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소리예요.”

순간 연이의 가슴 안쪽이 울렸다.

첫 번째 목소리가 다시 선명해졌다.

“연이야.”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이번에는 덧말이 끼어들지 못했다.

그 목소리는 연이를 멈추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연이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기다려주는 말이었다.

기억 속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 작은 아이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림을 망친 것도 아니었다.

종이에 삐뚤빼뚤한 글자를 쓰고 있었다.

잘 쓰지 못해 지우고, 다시 쓰고, 또 멈춘 아이.

그리고 그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천천히 해도 돼.

그 말은 늦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었다.

못해도 괜찮다는 포기가 아니었다.

다시 해도 된다는 보호였다.

연이의 머리 위 꽃이 조용히 빛났다.

[해석 오염 저항]

백문의 얼굴이 굳었다.

“불완전한 해석입니다.”

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맞아.”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완벽하게 기억난 건 아니야.”

방 안의 잉크가 흔들렸다.

“근데 이제 당신 덧말은 안 믿어.”

백문의 금빛 눈이 차가워졌다.

“그럼 무엇을 믿지요?”

연이는 모카를 보았다.

모카는 아직 떨고 있었다.

루나는 류트를 들고 버티고 있었다.

네오는 질문 사슬을 끊어내며 앞으로 나왔다.

첫 번째 목소리는 여전히 희미했다.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첫 울림은 들렸다.

연이는 말했다.

“첫 울림.”

백문의 펜이 멈췄다.

“해석은 나중에 해도 돼.”

연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일단 처음 들린 마음부터 볼 거야.”

그 순간 검은 덧말들이 하나둘 타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늦었다.]

치익.

[역시 부족했다.]

치익.

[믿지 말았어야 했다.]

치익.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글자들이 약해졌다.

연이는 깨달았다.

덧말은 없앨 필요가 없었다.

다만 덧말이 본뜻을 덮지 못하게 하면 됐다.

백문이 처음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제법이군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친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본뜻 자체를 펼쳐드리죠.”

루나의 표정이 굳었다.

“안 돼.”

네오도 바로 앞으로 나섰다.

“멈춰라.”

백문은 펜을 양손으로 잡았다.

“첫 번째 목소리의 본뜻. 준비 없이 열면,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가 펜을 내리그었다.

방 바닥이 갈라졌다.

비 오는 창가의 기억이 커졌다.

작은 아이의 손.

삐뚤빼뚤한 글씨.

그리고 그 곁에 있던 누군가의 그림자.

연이는 숨을 멈췄다.

조금만 더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누구였는지.

왜 잊었는지.

왜 지금 자신을 부르는지.

그러나 동시에 알았다.

백문은 도와주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기억을 너무 빠르게 열어, 연이가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루나가 소리쳤다.

“연이, 보지 마!”

백문은 웃었다.

“배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눈이 검게 빛났다.

“기억해야 하지 않습니까?”

연이는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의 기억이 열리고 있었다.

첫 번째 목소리의 얼굴이 드러나려는 순간.

백문은 아주 낮게 속삭였다.

“자, 이제 직접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첫 번째 목소리의 방이 완전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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