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해석을 바꾸는 자
Code Destiny · 5,479자
제17화. 해석을 바꾸는 자
글자가 떠오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따뜻했던 열람실은 여전히 따뜻했다.
책상 위에는 차가 있었고, 담요도 있었고,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
비 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연이는 이제 그 부드러움이 무서웠다.
너무 편안한 감옥 같았다.
백문은 책상 옆에 서 있었다.
흰 올빼미의 얼굴은 여전히 정중했다.
검은 무늬가 깃털 사이로 번졌는데도, 그는 조금도 급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기억을 지우는 건 하급자의 방식입니다.”
백문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진짜 위험한 기억은 지우면 더 선명해지지요. 사람은 사라진 것을 더 오래 붙잡으니까요.”
연이는 앞발에 힘을 줬다.
“그럼 뭘 하겠다는 건데?”
백문은 펜을 들어 올렸다.
검은 잉크가 펜촉 끝에서 둥글게 맺혔다.
“해석을 바꾸는 겁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연이야.”
부드러운 목소리.
“괜찮아.”
따뜻한 말.
“천천히 해도 돼.”
연이의 가슴이 아프게 흔들렸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런데 그 주변에 검은 문장들이 하나씩 달라붙기 시작했다.
연이의 머리 위 꽃이 떨렸다.
“그만해.”
백문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요? 저는 묻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더 나빠.”
“질문이 나쁜가요?”
백문은 아주 조용히 웃었다.
“아니면 질문에 흔들리는 마음이 약한 건가요?”
연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잊은 이유.
그건 연이도 모르던 것이었다.
왜 잊었을까.
분명 따뜻한 말인데.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왜 그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을까.
백문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질문들은 칼보다 깊게 들어왔다.
네오가 이를 드러냈다.
“연이. 듣지 마라.”
백문은 바로 네오를 보았다.
“듣지 말라니요. 인성의 섬에서 가장 위험한 말이군요.”
그는 웃었다.
“배움은 들어야 시작됩니다. 기억도 들어야 열리지요. 그런데 가디언은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 말은 아주 교활했다.
네오의 경고를, 마치 배움을 막는 말처럼 바꿔버렸다.
연이는 네오를 보았다.
네오는 분명 자신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백문의 말도 묘하게 그럴듯했다.
들어야 하는 걸까?
듣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의심은 아주 작은 틈으로 들어왔다.
백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정인은 받아들입니다.”
그가 펜으로 허공에 글자를 썼다.
“편인은 의심합니다.”
또 다른 글자.
“받아들이지 않으면 배울 수 없고, 의심하지 않으면 속습니다.”
백문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할까요?”
방 안에 책들이 하나둘 펼쳐졌다.
각 책에는 연이의 기억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침대 위에 쓰러져 있던 밤.
휴대폰 화면에 뜬 Code Destiny.
비겁의 섬에서 거울 속 자신과 마주했던 순간.
식신·상관의 섬에서 무대에 올랐던 순간.
그리고 아직 닿지 못한 첫 번째 목소리의 방.
백문은 손가락으로 책들을 가리켰다.
“기억은 사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의미는 해석이 만듭니다.”
그는 연이를 바라봤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됐어.”
“아니요. 필요합니다.”
백문은 펜을 움직였다.
책 한 권이 연이 앞에 펼쳐졌다.
그 안에는 네오가 비겁의 섬에서 연이를 지켜주던 장면이 있었다.
검은 손을 베어내던 작은 사자.
연이 앞에 서 있던 모습.
연이는 그 장면을 보고 잠깐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백문의 펜이 책 위를 스치자, 장면 옆에 덧말이 생겼다.
장면이 흔들렸다.
또 다른 덧말.
연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야.”
백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더 교활했다.
확정하지 않았다.
단정하지 않았다.
그저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런데 가능성은 때로 확신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네오가 낮게 말했다.
“백문.”
백문은 미소 지었다.
“화내지 마십시오. 저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도 말하지 않았지요. 그저 질문을 놓았을 뿐입니다.”
루나가 류트를 조용히 쥐었다.
“그게 네 방식이구나.”
백문은 그녀를 보았다.
“작곡가라면 알겠지요. 첫 울림보다 편곡이 오래 기억될 때가 있습니다.”
루나의 눈이 차가워졌다.
“기억을 편곡한다고?”
“틀린 말인가요?”
백문은 책장을 넘겼다.
“사람은 원래 기억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습니다. 늘 다시 씁니다. 저는 그 과정을 조금 돕는 것뿐입니다.”
루나는 낮게 말했다.
“돕는 게 아니라 훼손하는 거야.”
“해석의 자유입니다.”
“자유는 책임이 있어야 해.”
“책임이라.”
백문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단어는 참 편리하지요. 누군가를 계속 앞으로 밀어내고 싶을 때 쓰기 좋습니다.”
이번에는 모카의 책이 펼쳐졌다.
식신·상관의 섬 무대.
모카가 “나는 모카”라고 외치던 순간.
SOLV가 그를 인정하던 순간.
모카의 얼굴에 빛이 떠오르던 장면.
모카는 그 장면을 보고 숨을 삼켰다.
“그때…….”
백문의 펜이 움직였다.
옆에 덧말이 생겼다.
모카의 귀가 흔들렸다.
두 번째 덧말.
모카의 손이 노트를 꽉 쥐었다.
“아니…….”
세 번째 덧말.
모카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연이가 바로 말했다.
“모카, 듣지 마.”
백문은 즉시 연이를 보았다.
“또 듣지 말라는군요. 참 이상합니다. 친구를 위한다면서, 친구가 고민할 기회는 빼앗는 겁니까?”
연이는 말문이 막혔다.
백문은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공격처럼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을 살짝 돌렸다.
도와주는 말처럼.
생각해보라는 말처럼.
성숙해지라는 말처럼.
그래서 더 위험했다.
모카는 노트를 내려다봤다.
“그럴 수도…… 있나?”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모두가 그냥 위로해준 거라면…….”
루나가 다급히 말했다.
“모카.”
백문은 루나보다 먼저 말했다.
“생각해보세요. 진짜 작사가가 되려면 냉정해야 합니다. 칭찬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모든 말은 검증해야 합니다.”
모카의 손이 떨렸다.
“검증…….”
“더 배우고, 더 의심하고, 더 기다리세요.”
백문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졌다.
“지금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부족하니까요.”
모카의 눈에서 빛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까마귀의 봉인과 달랐다.
강제로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펜을 내려놓게 만드는 힘이었다.
연이는 그걸 보고 몸이 차가워졌다.
이게 인성의 나쁜 부분.
정인은 너무 받아들이게 만들고.
편인은 너무 의심하게 만든다.
결국 둘 다 멈추게 만든다.
모카의 노트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이어 또 다른 글자.
모카의 첫 줄 아래 빈칸이 더 넓어졌다.
그 빈칸은 단순한 여백이 아니었다.
미루는 마음이었다.
모카가 작게 말했다.
“나중에…… 더 배우고 쓰면…….”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모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문은 연이를 보며 말했다.
“그를 흔들지 마십시오. 그는 이제 신중해지고 있습니다.”
“그건 신중한 게 아니야.”
“그럼 무엇입니까?”
연이는 바로 답하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도 질문이 들어왔다.
정말 아닐까?
모카가 지금 쓰는 게 너무 빠른 건 아닐까?
나도 모카에게 무리하게 표현하라고 한 건 아닐까?
그가 상처받으면?
실패하면?
내가 책임질 수 있나?
질문은 순식간에 늘어났다.
연이의 발밑에 검은 잉크가 번졌다.
연이는 숨이 막혔다.
이 빌런은 공격하지 않았다.
선택지를 흐렸다.
판단을 무겁게 만들었다.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네오가 금빛 발톱으로 질문 사슬을 베어내려 했다.
그러나 질문은 잘리지 않았다.
잘라내면 더 작은 질문으로 나뉘었다.
네오의 표정이 굳었다.
“성가신 술식이다.”
백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성은 검토하는 힘입니다. 저는 그 힘을 극대화했을 뿐입니다.”
네오가 이를 드러냈다.
“극대화가 아니라 왜곡이다.”
“왜곡과 해석은 종이 한 장 차이지요.”
백문은 펜을 들어 올렸다.
“자, 연이 님. 다시 묻겠습니다.”
방 전체가 조용해졌다.
그는 연이 앞에 세 권의 책을 띄웠다.
첫 번째 책.
표지에는 따뜻한 담요가 그려져 있었다.
두 번째 책.
표지에는 검은 눈이 그려져 있었다.
세 번째 책.
표지는 비어 있었다.
백문은 부드럽게 말했다.
“셋 중 하나를 고르십시오.”
연이는 책들을 바라봤다.
모두 그럴듯했다.
그냥 믿으면 편할 것 같았다.
모두 의심하면 안전할 것 같았다.
결정을 미루면 실수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세 선택지 모두 연이를 멈추게 만들고 있었다.
믿기만 하면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의심만 하면 누구와도 나아가지 못한다.
미루기만 하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연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이거 다 함정이지?”
백문의 미소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무례한 표현이군요.”
“맞네.”
연이는 책을 보지 않았다.
대신 모카를 봤다.
모카는 아직 노트를 붙잡고 있었다.
눈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루나는 질문 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그녀의 류트 줄 하나가 아주 작게 떨리고 있었다.
딩.
아직 길이 있었다.
네오는 질문에 둘러싸인 채 버티고 있었다.
그의 기록은 흐렸다.
그의 정체는 여전히 수상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버티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연이는 앞발을 가슴에 올렸다.
자기 자리.
자기 목소리.
그리고 아직 찾지 못한 인성의 글자.
연이는 조용히 말했다.
“정답이 세 개밖에 없다고 누가 정했어?”
백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선택을 거부하십니까?”
“아니.”
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내 선택지를 내가 만들려고.”
그 순간 빈 표지의 세 번째 책이 흔들렸다.
백문의 펜이 멈췄다.
연이는 말을 이었다.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고마워할 거야. 하지만 내 판단까지 맡기지는 않을 거야.”
첫 번째 책에 금이 갔다.
“수상한 건 물어볼 거야. 하지만 의심만 하다가 사람을 버리지는 않을 거야.”
두 번째 책이 흔들렸다.
“더 배울 거야. 하지만 배운 뒤에만 시작하겠다고 미루진 않을 거야.”
세 번째 책의 표지가 찢어졌다.
연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쉬어도 내가 정하고, 의심해도 내가 정하고, 시작해도 내가 정할 거야.”
방 안의 검은 잉크가 잠깐 멈췄다.
모카의 노바 링이 희미하게 빛났다.
모카의 눈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내가…… 정한다…….”
루나가 류트 줄을 튕겼다.
딩.
그 소리가 질문 사슬 하나를 흔들었다.
네오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금빛 발톱이 번쩍였다.
쨍!
질문 사슬 일부가 깨졌다.
백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흥미롭군요.”
그의 목소리는 이제 차가웠다.
“그럼 더 깊은 해석을 드리겠습니다.”
그가 펜을 휘둘렀다.
검은 잉크가 공중에 퍼졌다.
계단 아래에서 다시 첫 번째 목소리가 들렸다.
“연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목소리 주변으로 수십 개의 해석이 동시에 달라붙었다.
정반대의 해석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연이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같은 목소리.
같은 문장.
그런데 해석이 너무 많았다.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백문이 말했다.
“기억은 하나지만, 해석은 무한합니다.”
그의 금빛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리고 해석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지요.”
연이는 휘청였다.
네오가 외쳤다.
“연이!”
모카가 노트를 붙잡고 외쳤다.
“연이님!”
루나의 류트 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해석의 잉크는 이미 연이를 감싸고 있었다.
따뜻한 말이 상처처럼 들렸다.
위로가 족쇄처럼 느껴졌다.
기억해야 할 것이 의심해야 할 것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해석에 묻혀 들리지 않게 되고 있었다.
연이는 앞발을 뻗었다.
“기다려…….”
하지만 손끝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백문은 조용히 말했다.
“이것이 인성의 늪입니다.”
그의 날개가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너무 믿어도 가라앉고, 너무 의심해도 가라앉는다. 너무 배우려 해도 시작하지 못하고, 너무 보호받으려 해도 걸을 수 없지요.”
검은 책들이 연이 주변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니 이제 편히 쉬십시오.”
그 말과 함께 방 안의 모든 의자와 담요와 책장이 연이를 향해 다가왔다.
포근했다.
무거웠다.
친절했다.
잔인했다.
연이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모카가 소리쳤다.
“연이님!”
루나는 이를 악물고 류트를 튕겼다.
딩!
네오가 금빛 발톱을 세웠다.
하지만 백문의 질문들이 다시 그를 감쌌다.
네오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
백문은 그 틈을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
정말 교활한 웃음이었다.
그는 아무도 쓰러뜨리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스스로 멈추게 만들었다.
그리고 연이의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연이야.”
이번에는 그 목소리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은…….”
목소리가 끊겼다.
연이는 눈을 뜨려 했지만, 담요처럼 무거운 인성이 그녀를 덮었다.
백문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그 말은 처음 들었던 목소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전혀 달랐다.
“이제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아도 됩니다.”
검은 잉크가 연이의 발밑을 덮었다.
첫 번째 목소리의 방이 완전히 백문의 해석 안으로 잠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