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다시 읽는 마음
Code Destiny · 4,592자
제20화. 다시 읽는 마음
하얀 계단은 천천히 위로 이어졌다.
연이는 한 계단씩 올라가며 계속 가슴을 눌렀다.
그 안쪽에 새로 들어온 글자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임오.
큰 물과 한낮의 불.
비겁의 섬에서 얻은 乙亥와는 달랐다.
乙亥는 깊은 물 위의 작은 새싹 같았다.
丁未는 따뜻한 흙 위에 선 작은 불씨 같았다.
그런데 壬午는 더 컸다.
마음 깊은 곳에 넓은 강이 흐르고, 그 강 위에 해가 떠 있는 느낌이었다.
차갑지도 않고, 뜨겁기만 하지도 않았다.
많은 것을 담고도, 한가운데에 빛을 남기는 기운.
연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임오......."
모카가 뒤에서 물었다.
"어떤 느낌이에요?"
연이는 잠시 생각했다.
"음."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해보자면.
"머릿속에 책장이 생긴 느낌?"
"책장이요?"
"응. 근데 그냥 책장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책이랑 나중에 다시 읽어야 할 책이 구분되는 책장."
모카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뭔가 멋있는데 어렵네요."
"나도 그래."
연이는 앞발로 머리 위 꽃을 만졌다.
꽃잎 아래에 붉은 불빛과 푸른 물결, 따뜻한 흙빛, 그리고 새로 생긴 검푸른 물빛과 한낮의 빛이 희미하게 겹쳐 있었다.
"근데 하나는 알겠어."
"뭔데요?"
"백문이 붙인 덧말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모카의 귀가 움찔했다.
연이는 계단 아래를 돌아보았다.
첫 번째 목소리의 방은 이미 닫히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비 오는 창가가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어린 연이는 여전히 종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도 아직 아주 작게 남아 있었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이제 그 말은 연이를 묶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의미가 완전히 밝혀진 것도 아니었다.
연이는 조용히 말했다.
"덧말은 남아 있어. 근데 이제 본뜻 위에 덮여 있지는 않아."
모카는 천천히 이해한 듯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읽을 수 있는 거네요."
"응."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내가 준비되면."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예전의 나중에는 도망치는 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미루는 게 아니라, 다시 읽을 수 있도록 잘 꽂아두는 것.
도망치는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있을 때 다시 펼치는 것.
그게 인성의 힘일지도 몰랐다.
계단 끝에 빛이 보였다.
루나가 먼저 도서관 중앙 홀로 올라섰다.
이어 모카와 연이, 네오가 올라왔다.
도서관은 변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검은 잉크에 잠겨 있던 책장들이 다시 원래 색을 찾고 있었다.
뒤틀렸던 편인의 서가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계단은 이상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책들은 물고기처럼 허공을 헤엄쳤다.
하지만 어둡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살아 있는 공간으로 돌아왔다.
정인의 서가에도 담요와 차가 남아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담요가 스스로 덮치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의자 위에 조용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연이는 그걸 보고 말했다.
"이제는 좀 얌전하네."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문이 사라지면서 서가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어."
모카가 조용히 물었다.
"백문은 완전히 사라진 건가요?"
루나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책장 사이를 바라보았다.
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아니."
연이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아니라고요?"
"백문이라는 존재는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덧말들은 도서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야."
모카의 얼굴이 굳었다.
루나는 말했다.
"사람이 한 번 들은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다만 그것이 본뜻을 덮지 못하게 하면 돼."
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좀 알 것 같아요."
네오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壬午가 열린 거다."
연이는 네오를 보았다.
"임오는 그런 힘이야?"
"壬은 큰 물이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대로 믿는 물은 아니다."
네오는 연이의 가슴 쪽을 보았다.
"午는 그 물 위에 떠오른 빛이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어디를 봐야 하는지 비춰준다."
모카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그가 말을 고르더니 말했다.
"많이 듣되, 빛을 켜고 다시 보는 힘?"
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해석이다."
모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늘 두 번째 인정이에요."
연이가 웃었다.
"인성의 섬에서 네오 인정 수집하는 수달."
"소중히 보관하겠습니다."
네오는 무표정했다.
그때 루나가 중앙 책상 위에 놓인 검은 유리판을 바라보았다.
유리판은 꺼져 있었다.
화면도 없고, 아이콘도 없었다.
그저 검은 거울처럼 조용히 놓여 있었다.
연이는 그걸 보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저건 이제 꺼진 거죠?"
루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유리판 위에 손을 얹었다.
"응. 지금은."
"지금은이라는 말 하지 마요. 불안하니까."
네오는 유리판을 노려보았다.
"형태를 빌린 문은 한 번 열린 뒤 흔적을 남긴다."
연이가 그를 보았다.
"또 잘 아네."
네오가 무심코 말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작은 문을 연다. 알림을 누르고, 화면을 밀고, 앱을 실행하지."
말이 끝나자 공기가 잠깐 멈췄다.
연이의 눈이 천천히 네오에게 향했다.
모카도 마찬가지였다.
네오의 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연이가 말했다.
"너 진짜 사용자 경험 있지?"
네오가 고개를 돌렸다.
"관찰이라고 했다."
모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오님, 인간 세계 가본 적 있어요?"
"없다고 한 적은 없다."
연이의 눈이 커졌다.
"오."
네오가 바로 덧붙였다.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수상해."
루나는 작은 웃음을 삼켰다.
"네오의 기록은 여전히 흐려."
연이는 루나를 보았다.
"아직도요?"
"응. 도서관이 그를 읽으려고 하면 문장이 중간에서 끊겨."
네오는 불편한 듯 귀를 움직였다.
"쓸데없는 이야기다."
연이는 팔짱을 끼려다 실패하고, 대신 앞발을 당당히 들었다.
"좋아. 지금은 넘어가줄게."
"전에도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기록해둘 거야."
모카가 무심코 노트를 꺼내려다가, 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슬쩍 노트를 다시 넣었다.
"이번엔 마음속에 기록할게요."
"좋아. 성장했네."
루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때 도서관 깊은 곳에서 작은 종이 울렸다.
딸랑.
이번엔 위협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책장들이 천천히 열리고, 한 권의 책이 허공을 날아왔다.
책은 연이 앞에 내려앉았다.
표지는 검푸른색이었다.
그 위에는 붉은 태양 문양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책이 스스로 펼쳐졌다.
첫 장에는 아무 글도 없었다.
대신 물결이 그려져 있었다.
검푸른 강.
그 강 위에 떠 있는 한낮의 빛.
그리고 페이지 아래쪽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는 조용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책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이번 장에는 백문이 붙였던 덧말들이 작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전과 달랐다.
검은 글자가 아니었다.
회색의 작은 글씨였다.
페이지 가장자리.
본문을 덮지 않는 곳.
연이는 그걸 보고 조금 웃었다.
"덧말이 얌전해졌네."
루나가 말했다.
"그게 원래 위치야."
"원래 위치?"
"덧말은 도움이 될 수 있어. 하지만 본문 위에 올라오면 안 돼."
모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가사도 그런가 봐요."
연이가 그를 봤다.
모카는 노트를 품에 안았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가사를 덮어버리는데, 생각이 없으면 가사가 비어 있어요."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깨달음이네."
모카는 조금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럼 다음 줄은...... 바로 쓰지 않을래요."
연이가 장난스럽게 눈을 떴다.
"오. 미루는 거야?"
"아니요."
모카는 고개를 저었다.
"익히는 거예요."
루나는 작게 웃었다.
"정확해."
모카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한 줄은 남길게요."
그는 노트를 꺼냈다.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천천히 한 줄을 적었다.
연이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모카는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연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목 같네."
"그런가요?"
"<첫 울림부터 듣자>. 약간 인디곡 제목 같아."
모카의 눈이 반짝였다.
"저 그거 적어둘래요."
"이번엔 적어도 돼."
모카는 노트에 제목처럼 동그라미를 쳤다.
루나는 모카의 노트를 보며 말했다.
"인성의 섬을 나가기 전에, 너에게 보여줄 곳이 있어."
"저요?"
"응. 작곡가들이 처음으로 자기 기억을 악보에 놓는 방."
모카의 귀가 번쩍 섰다.
"그런 곳이 있어요?"
"있어."
루나는 미소 지었다.
"다만 지금 바로 가지는 않을 거야."
모카의 귀가 다시 조금 내려갔다.
"왜요?"
"지금은 방금 읽은 것들이 아직 마음속에 떠다니고 있으니까. 너무 빨리 잡으면 설명이 되고, 너무 늦게 잡으면 사라져."
모카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네요."
"그래서 작곡이야."
연이는 모카를 보며 말했다.
"너 이제 진짜 고생길 열렸네."
"근데 좋아요."
모카는 노트를 품에 안았다.
"처음으로 다음 줄이 안 나오는 게 실패 같지 않아요."
연이는 그 말을 듣고 조금 흐뭇해졌다.
"그럼 오늘은 성공이네."
네오는 도서관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연이는 바로 한숨을 쉬었다.
"넌 분위기 좋을 때 꼭 그런 말 한다."
"사실이니까."
네오의 시선은 도서관의 가장 높은 책장으로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검은 책 한 권이 꽂혀 있었다.
다른 책들은 모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책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표지도 보이지 않았다.
제목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책 주변만 공기가 무거웠다.
루나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표정이 굳었다.
"저 책...... 원래 없었어."
연이는 몸을 긴장시켰다.
"백문이 남긴 거예요?"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책이 혼자 책장에서 빠져나왔다.
툭.
그것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멈춘 채 천천히 펼쳐졌다.
페이지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검은 잉크가 저절로 번지기 시작했다.
연이의 가슴이 철렁했다.
"전송?"
네오의 갈기가 확 타올랐다.
"누구에게?"
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는 네오를 돌아봤다.
"사주 가디언 후보?"
네오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모카가 아주 작게 말했다.
"후보......?"
루나는 류트를 꽉 잡았다.
"백문은 사라진 게 아니야. 누군가에게 기록을 보낸 거야."
검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책이 불타듯 접혔다.
검은 종이 조각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연이는 그 조각들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인성의 섬 사건은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방금 이 모든 것을 읽었다.
연이가 얻은 글자들.
네오의 존재.
그리고 사주 가디언 후보라는 이상한 말까지.
연이는 네오를 바라봤다.
"네오."
"묻지 마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답해."
네오는 침묵했다.
모카와 루나도 그를 바라봤다.
잠시 후, 네오가 낮게 말했다.
“지금은 도서관을 나가는 것이 먼저다.”
연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하고 있었다.
분명히.
하지만 이번에는 연이도 다그치지 않았다.
임오의 물이 가슴 안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지금은 덧말을 덮을 때가 아니었다.
본뜻을 더 읽어야 할 때였다.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가자.”
네오는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연이는 짧게 덧붙였다.
“도망가는 거 아니야. 너도 나중에 꼭 읽을 거니까.”
연이는 말했다.
"대신 이건 덧말로 남겨둘게."
"무슨 뜻이지?"
"네오 수상함. 나중에 다시 읽기."
모카가 작게 웃었다.
루나도 미소 지었다.
네오는 한숨을 쉬었다.
"불필요한 덧말이군."
"내 책에서는 필요해."
도서관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기억나무 숲의 바람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잎사귀들이 흔들렸다.
사락.
사락.
그 소리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연이는 가슴 안쪽의 壬午를 느끼며 앞으로 걸었다.
기억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읽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