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아직 쓰는 중인 이름
Code Destiny · 7,076자
제21화. 아직 쓰는 중인 이름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기억나무 숲의 바람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사락.
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연이는 가슴 안쪽의 [壬午]를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큰 물과 한낮의 불.
기억을 모두 믿지도 않고, 모두 의심하지도 않는 힘.
본뜻과 덧말을 구분하는 힘.
방금 전까지 그 힘이 자신의 안쪽으로 스며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 이제 좀 똑똑해진 건가?"
연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네오가 바로 말했다.
"그건 별개의 문제다."
"야."
"壬午를 얻었다고 지능이 자동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칭찬 기대도 안 했는데 바로 꺾네."
모카는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식신·상관의 섬에서 무대를 끝낸 뒤의 웃음은 뜨겁고 들뜬 웃음이었다.
지금의 웃음은 조금 더 차분했다.
생각이 안쪽으로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온 얼굴.
모카는 노트를 품에 안고 있었다.
방금 전 새긴 두 줄이 노트 안쪽에서 조용히 빛났다.
연이가 물었다.
"그거 계속 생각나?"
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 줄 나왔어?"
"아니요."
모카는 이상하게 편한 얼굴로 말했다.
"근데 괜찮아요."
연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너 방금 되게 성장한 주인공 같았어."
"진짜요?"
"응. 예전 같았으면 '다음 줄 안 나와요!' 하고 눈물부터 차올랐을 텐데."
모카는 민망한 듯 귀를 살짝 접었다.
"지금도 사실 조금 차오르긴 해요."
"솔직해서 좋네."
루나는 앞에서 조용히 걸었다.
청록색 망토가 책장 사이의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모카를 보았다.
"안 나오는 줄도 줄이야."
모카가 멈칫했다.
"그것도 가사예요?"
"아직은 아니야."
루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가사가 될 수는 있어."
모카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이번에는 노트를 꺼내지 않았다.
그냥 마음속에 넣는 듯했다.
연이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필기 중독 조금 나아졌네."
모카는 작게 말했다.
"루나님이 너무 빨리 붙잡으면 가사가 아니라 설명이 된다고 했잖아요."
"오."
연이는 루나를 보았다.
"선생님 효과 좋네요."
루나는 귀를 살짝 움직였다.
"선생님이라기보다 안내자라고 했어."
"그게 더 멋있어요."
루나는 조금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도서관 가장 높은 책장에서 검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사락.
다른 책장 소리와 달랐다.
너무 날카로웠다.
네오가 즉시 멈춰 섰다.
"멈춰라."
연이와 모카가 동시에 굳었다.
검은 종이는 바닥에 닿지 않았다.
허공에 멈춘 채, 천천히 펼쳐졌다.
종이 위에 흰 글자가 나타났다.
연이의 표정이 굳었다.
"아까 그거......."
루나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백문이 남긴 기록 조각이야."
종이 위에 글자가 이어졌다.
연이는 마지막 줄을 보자마자 네오를 봤다.
"사주 가디언 후보?"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카도 네오를 보았다.
"후보라는 건...... 정식 가디언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네오의 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연이는 바로 말했다.
"움직였어."
"기류다."
"도서관 안인데?"
"책장 바람이다."
"변명 재탕하지 마."
검은 종이는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음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색인?"
루나의 얼굴이 굳었다.
"안 돼."
그 말과 동시에 도서관 바닥 전체에 거대한 목차가 펼쳐졌다.
책장이 스스로 움직였다.
위쪽에서 책들이 날아와 연이 일행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모카가 노트를 끌어안았다.
"왜 책들이 저희를 둘러싸요?"
루나는 류트를 꽉 쥐었다.
"백문의 마지막 함정이야. 기억을 오염시키지 못하면, 살아 있는 존재를 기록물로 만들어버려."
연이의 표정이 굳었다.
"기록물?"
네오가 낮게 말했다.
"색인화다."
그 순간 연이의 발밑에 검은 글자가 떠올랐다.
연이의 눈썹이 치켜올랐다.
"보관 필요?"
모카의 발밑에도 글자가 떠올랐다.
모카는 눈을 크게 떴다.
"연구 가치?"
네오의 발밑에도 글자가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글자는 계속 깨졌다.
검은 글자들이 네오 주변에서 튀며 사라졌다.
도서관이 억지로 네오를 읽으려다 실패하는 것 같았다.
루나의 발밑에도 글자가 생겼다.
루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백문답네."
연이는 주변의 책들을 보았다.
책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책등에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책들이 그들을 삼키려 했다.
연이는 한 발 물러났다.
그런데 발이 바닥에 붙었다.
글자가 발목을 감쌌다.
연이는 당황했다.
"잠깐, 나 지금 책 취급당하는 거야?"
네오가 금빛 발톱을 세웠다.
"움직이지 마라."
그가 바닥의 글자를 베었다.
쨍!
[대출 불가]가 갈라졌다.
하지만 글자는 곧 다시 붙었다.
연이는 황당해서 소리쳤다.
"나 원칙 싫어!"
모카도 발목에 생긴 글자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저도 묶였어요!"
그의 발밑에는 다른 글자가 떠올랐다.
모카의 얼굴이 굳었다.
"초안을 보존한다는 말이 왜 이렇게 무섭죠?"
루나가 낮게 말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보존한다고 하니까."
책장들이 더 가까워졌다.
정인의 서가에서 날아온 따뜻한 담요가 연이와 모카를 감싸려 했다.
편인의 서가에서 나온 질문 책들은 네오와 루나 주변을 돌며 속삭였다.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와. 이거 완전 인성식 감금이네."
네오가 말했다.
"정인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붙잡고, 편인은 검토라는 이름으로 붙잡는다."
"짧게."
"안 보내주겠다는 뜻이다."
"오케이. 제일 싫어."
책 한 권이 연이 앞에서 펼쳐졌다.
빈 페이지 위에 스스로 글자가 적혔다.
연이는 바로 말했다.
"거절."
책은 반응하지 않았다.
연이가 더 크게 말했다.
"거절한다고."
책에 새로운 문장이 생겼다.
연이는 입을 벌렸다.
"아니, 거절도 기록하지 말고 풀어달라고!"
모카는 급하게 노트를 펼쳤다.
"연이님, 이거 말로 해도 안 통하는 것 같아요."
"그럼 뭐로 해야 해?"
모카는 귀를 세웠다.
"첫 울림."
루나가 그를 보았다.
모카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는 책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락.
사락.
사락.
모든 책이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보관.
정리.
분류.
안전.
검토.
하지만 그 아래, 아주 작은 소리가 있었다.
닫히고 싶지 않은 책장이 내는 소리.
끝나고 싶지 않은 문장이 내는 소리.
모카는 작게 말했다.
"저 책들도...... 살아 있는 이야기를 닫는 게 편하지 않은 것 같아요."
루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들리니?"
"네."
모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문의 명령은 남았지만, 도서관 자체는 저희를 완전히 가두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아요."
연이는 바로 도서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럼 도서관아."
네오가 말했다.
"도서관에 말 거는 건-"
"조용히 해봐."
연이는 바닥에 붙은 앞발에 힘을 주며 말했다.
"우리 아직 끝난 이야기 아니거든?"
책장들이 멈칫했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연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정리도 좋고, 보관도 좋고, 덧말도 좋고, 색인도 좋은데."
그녀는 가슴 안쪽의 [壬午]를 느꼈다.
검푸른 큰 물.
그 위의 한낮의 빛.
"아직 쓰는 중인 이야기를 책장에 꽂아버리면 안 되잖아."
책 한 권이 떨렸다.
[연이의 기록]이라는 제목이 흔들렸다.
네오가 낮게 말했다.
"계속해라."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나는 자료가 아니야."
바닥의 [보관 필요]이 흔들렸다.
"나는 아직 가는 중이야."
[대출 불가]가 희미해졌다.
"내 기억은 정리할 수 있어. 근데 내 선택까지 보관할 수는 없어."
그 순간 [壬午]의 빛이 퍼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닥의 글자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글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를 잃었다.
연이는 깨달았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덧말을 없애는 게 아니었다.
색인을 부수는 것도 아니었다.
색인이 본뜻을 덮지 못하게 하는 것.
기록이 살아 있는 현재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
모카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
그는 자기 발밑의 문장을 보았다.
모카는 노트를 꽉 잡았다.
"저는 초안이에요."
문장이 멈췄다.
"근데 초안은 보관만 하려고 쓰는 게 아니에요."
모카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분명했다.
"다음 줄로 가려고 있는 거예요."
노바 링이 빛났다.
[외부 반출 금지]가 갈라졌다.
모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저 아직 쓰는 중이에요."
그 말에 그의 노트에서 작은 박자가 울렸다.
탁.
책들이 흔들렸다.
루나가 류트를 들었다.
딩.
"도서관."
그녀가 말했다.
"책은 갇힌 종이가 아니야."
류트 소리가 책장 사이로 퍼졌다.
"읽히고, 다시 닫히고, 다시 열리고, 누군가의 다음 문장이 되어 나가야 해."
책장들이 더 크게 흔들렸다.
네오는 질문 책들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발톱을 세웠다.
그 문장들이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었다.
연이는 네오를 보았다.
"네오!"
네오는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아니, 지금 네가 제일 수상한 방식으로 묶였거든?"
"원래 그렇다."
"원래 그러면 더 문제야."
네오의 입가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말이 늘었군."
"식상 섬 다녀왔으니까."
네오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기 발밑의 글자를 바라봤다.
도서관은 그를 분류하지 못했다.
기록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세게 붙잡고 있었다.
모르는 것을 보관하려는 힘.
읽히지 않는 것을 열람하려는 욕심.
네오는 조용히 말했다.
"내 기록은 아직 열람 대상이 아니다."
검은 글자들이 흔들렸다.
"하지만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는 분명하다."
그의 발톱에 금빛이 모였다.
"나는 길을 연다."
쨍!
[열람 권한 부족]이 깨졌다.
[기록 오류]가 깨졌다.
마지막으로 [후보 ---]가 흔들리다 사라졌다.
연이는 그걸 봤다.
"후보가 뭔지는 안 알려주고?"
네오는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은 나갈 때다."
"치사해."
"살아 있는 이야기라면 다음 장이 있겠지."
연이는 잠깐 멈칫했다.
"어? 방금 말 좀 좋았다."
"기록하지 마라."
모카가 슬쩍 노트를 꺼내려다 멈췄다.
루나가 웃었다.
네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연이의 壬午가 바닥의 색인을 밀어냈다.
모카의 박자가 책장에 숨을 되돌렸다.
루나의 류트가 닫힌 책들의 잠금을 풀었다.
네오의 금빛 발톱이 출구를 그었다.
도서관 중앙의 책들이 한꺼번에 펼쳐졌다.
사락사락사락.
이번에는 폭풍 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환영에 가까운 소리였다.
책장들이 뒤로 물러났다.
아치형 문이 다시 열렸다.
그 위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는 그 문장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문장은 마음에 드네."
모카도 웃었다.
"저도요."
그들은 기억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문밖에는 인성의 섬 숲이 있었다.
기억나무 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때보다 숲이 조금 더 선명해 보였다.
종이 냄새도, 차 냄새도, 잉크 냄새도 전보다 편안했다.
연이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살았다."
모카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서관에서 탈출했다는 말이 이렇게 어울릴 줄 몰랐어요."
루나는 류트를 품에 안고 도서관을 돌아보았다.
"백문이 남긴 왜곡은 사라졌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니야."
연이가 물었다.
"또 뭐가 남았어요?"
루나는 잠시 침묵했다.
"전송 기록."
연이의 표정이 굳었다.
아까 검은 책이 남겼던 문장.
누군가가 이 정보를 받았다.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읽었다.
네오의 표정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다음 섬에서...... 누군가 이미 우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높다."
연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인성의 섬 하늘은 조용했다.
푸른빛과 잉크빛이 섞인 하늘.
하지만 저 너머 어딘가에서, 검은 책의 조각들이 날아갔을 것이다.
연이는 가슴 안쪽의 글자들을 느꼈다.
세 개의 기둥.
아직 하나가 남았다.
그리고 이제 적들도 연이가 글자를 회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연이는 짧은 앞발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동그랗고 귀여웠다.
하지만 이제 그 앞발로 꽤 많은 것을 해냈다.
거울을 넘고.
무대에 서고.
기억을 다시 읽었다.
"좋아."
연이가 말했다.
네오가 그녀를 보았다.
"뭐가 좋지?"
"점점 빡세지는 건 알겠어."
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요."
"근데 우리도 점점 이상해지고 있잖아."
모카가 눈을 깜빡였다.
"강해지는 게 아니라 이상해지는 거예요?"
"둘 다."
연이는 가슴을 가볍게 쳤다.
"꽃돼지에 사주 글자 세 개 들어 있음."
모카는 자기 노트를 들어 보였다.
"무명 수달인데 첫 줄 있고, 다음 줄 발효 중."
네오는 조용히 말했다.
"작은 사자 가디언."
연이와 모카가 동시에 그를 보았다.
"거기서 끝?"
"그렇다."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일 이상한 애가 제일 짧게 소개하네."
네오는 못 들은 척했다.
루나는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다 모카에게 다가왔다.
"모카."
"네?"
루나는 자신의 노트에서 빈 악보 한 장을 뜯어냈다.
그 종이는 그냥 종이가 아니었다.
빛을 받으면 글자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소리를 들으면 가장자리에 작은 음표가 떠올랐다.
"가져가."
모카의 눈이 커졌다.
"이건......."
"첫 울림 악보야."
루나는 말했다.
"네가 정말 중요한 소리를 들었을 때, 이 종이는 바로 적히지 않을 거야. 대신 그 소리의 자리를 남겨둘 거야."
모카는 조심스럽게 악보를 받았다.
"바로 안 적혀요?"
"응."
"그럼 어떻게 써요?"
"네가 그 소리를 충분히 기억하고, 네 말로 다시 부를 수 있게 되면."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때 적혀."
모카는 악보를 품에 안았다.
"저...... 잘 써볼게요."
"잘 쓰려고 하지 마."
루나는 손가락으로 모카의 노트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듣고, 오래 품고, 네 속도로 꺼내."
모카의 눈이 촉촉해졌다.
"네."
연이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모카, 이제 진짜 작곡가 루트 타는 것 같은데?"
모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오. 또 성장한 답변."
"아직은 아니지만, 안 할 것도 아니에요."
"훌륭해."
네오도 짧게 말했다.
"좋다."
모카는 작게 숨을 삼켰다.
"오늘 세 번째 인정......."
"과하게 의미 부여하지 마라."
"이미 했어요."
루나는 연이에게도 작은 책갈피 하나를 건넸다.
책갈피는 검푸른색이었고, 중앙에 붉은 작은 원이 새겨져 있었다.
"너는 이걸 가져가."
연이는 앞발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이건 뭐예요?"
"덧말 책갈피."
"이름이 좀 수상한데요."
"좋은 의미야."
루나는 말했다.
"어떤 기억을 지금 다 해석할 수 없을 때, 거기에 꽂아둬. 도망치지 않고, 억지로 결론내리지도 않고, 나중에 다시 읽겠다는 표시야."
연이는 책갈피를 보았다.
작은 물빛이 안쪽에서 흔들렸다.
"나한테 딱 필요한 거네."
"응."
루나는 네오를 보았다.
"그리고 너는."
네오가 바로 말했다.
"나는 필요 없다."
루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웃었다.
"줄 생각도 없었어."
연이가 빵 터졌다.
모카도 작게 웃었다.
네오는 조금 굳었다.
"그렇군."
루나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네 기록은 내가 줄 수 있는 책갈피로는 부족할 것 같거든."
네오의 표정이 아주 잠깐 진지해졌다.
연이는 그걸 봤다.
루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서 가."
"루나는 안 가요?"
모카가 물었다.
루나는 기억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 이 섬에서 정리할 악보가 많아."
"나중에 또 만날 수 있어요?"
"네가 첫 울림을 잃지 않으면."
모카는 첫 울림 악보를 꼭 안았다.
"그럼 만날 수 있겠네요."
루나는 미소 지었다.
"좋은 대답이야."
그때 사주의 강 쪽에서 연잎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다음 섬으로 가라는 듯이.
연이는 배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진짜 쉴 틈이 없네."
네오가 말했다.
"방금 쉬었다."
"그건 정신적으로 힘든 휴식이었어."
"그래도 쉬었다."
"너랑 휴식 정의가 달라."
모카는 연잎 배에 올라타기 전, 인성의 섬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기억나무.
잉크빛 호수.
루나.
그리고 조용히 숨 쉬는 도서관.
그는 고개를 숙였다.
"다음 줄, 꼭 써볼게요."
루나는 류트를 들어 짧은 음을 냈다.
딩.
그 소리는 바람을 타고 모카의 첫 울림 악보 가장자리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연이와 네오, 모카가 배에 올랐다.
연잎 배는 천천히 강 위로 떠올랐다.
인성의 섬은 뒤로 멀어졌다.
연이는 가슴 안쪽의 壬午를 느꼈다.
기억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끝내지 않은 기억을 잘 접어둘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강 앞쪽에는 황금빛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번 안개는 따뜻하지 않았다.
반짝였지만 무거웠다.
어딘가에서 동전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철컥.
쾅.
모카의 귀가 움직였다.
"저 소리...... 기분 나빠요."
네오가 낮게 말했다.
"재성의 섬이다."
연이는 황금빛 안개를 바라보았다.
"돈 문제구나."
"돈, 소유, 현실, 책임, 욕망."
네오가 말했다.
"그리고 빚."
연이는 앞발을 꽉 쥐려 했다.
여전히 잘 안 됐다.
하지만 힘은 들어갔다.
"좋아."
그녀는 말했다.
"이번엔 가격표 붙이는 놈들이겠네."
그 순간 황금빛 안개 속에서 거대한 비행선 그림자가 나타났다.
비행선 아래로 검은 쇠사슬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부드럽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십시오."
찰칵.
회중시계 닫히는 소리.
"당신들의 미래 가격을 계산해드리겠습니다."
연이의 머리 위 꽃이 움찔했다.
모카는 노트를 품에 안았다.
네오의 갈기가 희미하게 빛났다.
연이의 세 번째 섬에서의 배움은 끝났다.
그리고 네 번째 섬.
재성의 섬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