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선택의 가격
Code Destiny · 4,019자
제25화. 선택의 가격
황금빛 계약서가 경매장 중앙에 떠 있었다.
글자는 아름다웠다.
구제.
반환.
특별.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단어들.
하지만 연이는 이제 그런 단어를 그대로 믿지 않았다.
인성의 섬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본뜻과 덧말은 다르다.
따뜻한 말도 족쇄가 될 수 있고, 그럴듯한 계약도 함정이 될 수 있다.
연이는 가슴 안쪽의 [壬午]를 느꼈다.
큰 물이 천천히 흐르고, 그 위에 빛이 떠올랐다.
"읽을게."
연이가 말했다.
청토끼는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읽는 것은 고객님의 권리니까요."
그 말이 더 수상했다.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순순히 읽게 해준다는 게 제일 불안한데."
"불안도 훌륭한 판단 재료입니다."
"그 판단 재료에 비용 붙일 생각이면 접어."
청토끼는 웃었다.
"아직은요."
"아직이라는 말 좀 그만해."
모카는 치즈 쪽을 바라봤다.
치즈는 유리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쇠사슬이 그의 발목을 감고 있었고, 목걸이의 숫자는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유리병이 있었다.
병 안에서 작은 크림색 토끼가 빵 반죽을 만지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아직 자신의 꿈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얼굴.
치즈는 이를 악물었다.
"크림......"
연이는 계약서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네오가 낮게 말했다.
"앞으로 너무 가지 마라."
"알아."
"아니. 너 지금 모르고 있다."
연이는 멈췄다.
앞발 바로 아래에 작은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연이는 뒤로 물러났다.
"와. 한 발에도 돈 붙이네."
청토끼는 부드럽게 말했다.
"경매장은 고급 공간입니다."
"고급이 아니라 치사한 거겠지."
작은 문장이 다시 떠오르려 했다.
연이는 바로 덧붙였다.
"개인적 감상입니다."
문장이 멈칫했다가 사라졌다.
모카가 작게 감탄했다.
"연이님, 적응 빠르세요."
"이런 적응 하고 싶지 않았어."
연이는 다시 계약서를 보았다.
문장 자체는 단순했다.
그러나 단순한 문장일수록 위험했다.
壬午의 물빛이 계약서 아래로 흘렀다.
황금빛 글자 아래, 아주 작은 검은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또 다른 문장.
연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내가 사인하면 마지막 기둥 찾는 길까지 네 거가 된다는 뜻이네?"
청토끼는 미소를 유지했다.
"정확합니다. 훌륭한 독해력이군요."
"칭찬하지 말라니까."
계약서 아래로 더 작은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형식상 반환?"
모카가 귀를 세웠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연이는 계약서를 노려봤다.
"크림의 꿈이랑 치즈의 선택권을 돌려준다고 해놓고, 실제로 꿈을 다시 꾸게 하거나 선택하게 만드는 건 따로 계약해야 한다는 뜻이야."
모카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면 병만 돌려주고 안에 든 건 고장 난 채일 수도 있다는 거네요."
"맞아."
치즈의 눈이 흔들렸다.
"그럼...... 사인해도 크림은 다시 빵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청토끼가 부드럽게 말했다.
"고객님. 힘을 되돌리는 일은 아주 섬세한 절차입니다. 당연히 비용이 발생하지요."
연이의 머리 위 꽃이 붉게 흔들렸다.
"진짜......"
네오가 조용히 말했다.
"끝까지 읽어라."
연이는 숨을 삼켰다.
맞다.
화내기 전에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
壬午의 물빛이 다시 계약서 아래를 흘렀다.
이번에는 가장 아래쪽, 거의 보이지 않는 위치에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청토끼는 웃었다.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이 계약 자체가 협박으로 만든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
경매장 안이 조용해졌다.
청토끼의 미소가 아주 얇아졌다.
연이는 계약서의 마지막 문장을 가리켰다.
"강박, 긴급상황, 제3자 담보 위협. 네가 지금 치즈랑 크림을 걸어놓고 나한테 선택하라고 하는 상황이잖아."
모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네요."
연이는 말을 이어갔다.
"그걸 무효 주장 못 하게 미리 막아놨어. 그러니까 네가 지금 하는 게 정상 거래가 아니라는 걸 너도 아는 거야."
청토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회중시계를 열었다.
찰칵.
그 소리에 경매장 위쪽의 VIP석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부유한 동물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입찰판을 내렸다.
어떤 이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연이를 보았다.
청토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상냥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상냥해졌다.
그게 더 무서웠다.
"훌륭합니다."
그가 말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고객님은 읽을 줄 아는군요."
연이는 계약서를 노려봤다.
"그러니까 이 계약은 안 해."
"그렇습니까?"
"응."
연이는 앞발을 들었다.
"그리고 치즈랑 크림도 안 넘겨."
청토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경매장 중앙의 유리병 두 개가 위로 떠올랐다.
치즈의 몸이 더 세게 끌려갔다.
"윽......!"
"치즈!"
모카가 달려가려 했지만, 바닥에서 황금빛 선이 솟아올랐다.
모카의 발이 멈췄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움직이면 비용이 붙는 게 아니라, 아예 막히네요."
네오가 그 선을 바라보았다.
"계약 영역이다."
연이가 물었다.
"못 깨?"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불안했다.
연이는 네오를 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냉정했다.
하지만 눈빛이 달랐다.
매우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위험해 보였다.
청토끼는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의 구두가 경매장 바닥에 닿았다.
또각.
또각.
걸음마다 금빛 계약서가 바닥에 피어났다.
그는 천천히 치즈 옆으로 다가갔다.
치즈는 쇠사슬에 묶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청토끼는 치즈의 목걸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삐빅.
목걸이 숫자가 붉게 깜빡였다.
"치즈 고객님은 이미 여러 차례 계약을 위반하셨습니다."
"저는......"
치즈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제 동생 꿈을 돌려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청토끼는 다정하게 말했다.
"감정은 계약을 흐립니다. 사랑은 판단을 흐리고, 가족은 비용 계산을 망치지요."
그가 고개를 돌려 연이를 보았다.
"그래서 저는 감정을 숫자로 바꿉니다. 그러면 공정해지니까요."
연이는 낮게 말했다.
"공정한 게 아니라 차갑게 만드는 거지."
"차갑기 때문에 정확합니다."
청토끼는 웃었다.
"뜨거운 꿈은 쉽게 타버립니다. 하지만 숫자는 남습니다."
그는 손을 들었다.
치즈의 몸에서 다시 빛이 빠져나왔다.
작은 갈색빛.
빵 냄새가 섞인 따뜻한 빛.
모카가 귀를 세우고 비명을 삼켰다.
"치즈의 기억이에요."
"기억?"
"크림이 처음 빵을 구웠을 때 소리예요. 반죽 실패하고, 둘이 같이 웃었던 소리......"
치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건...... 가져가지 마......"
청토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채무자의 감정 자산은 담보 보강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연이의 안쪽에서 丁未가 뜨겁게 타올랐다.
불이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유리병을 깨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경매장 시설 훼손.
담보 손상.
추가 비용.
계약 채권 보호.
청토끼는 그 모든 것을 계산해뒀을 것이다.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모카."
"네."
"저 병 소리 들을 수 있어?"
모카는 눈을 감았다.
유리병 두 개.
하나는 크림의 꿈.
하나는 치즈의 선택권.
그리고 지금 빠져나가는 따뜻한 기억.
그 소리들은 모두 다른 박자를 냈다.
크림의 꿈은 반죽을 치대는 부드러운 소리.
치즈의 선택권은 잠긴 자물쇠 안쪽에서 두드리는 소리.
치즈의 기억은 어린 웃음소리와 오븐 문이 열리는 소리.
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려요. 아직 완전히 들어간 건 아니에요."
연이는 네오를 보았다.
"막을 수 있어?"
네오는 여전히 청토끼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짧게 말했다.
"막는다."
그 목소리는 낮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경매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청토끼의 눈빛이 아주 조금 바뀌었다.
"오."
그가 미소 지었다.
"드디어 직접 움직이십니까?"
네오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작은 앞발이 금빛 바닥에 닿았다.
쿵.
말도 안 되게 큰 울림이었다.
경매장 천장의 유리병들이 일제히 떨었다.
VIP석의 동물들이 숨을 삼켰다.
청토끼의 회중시계가 멈칫했다.
연이는 네오를 바라봤다.
그의 몸은 여전히 작았다.
하지만 그 뒤에 무언가가 일렁였다.
불꽃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니었다.
금빛의 윤곽.
아직 형태가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건 지금껏 보던 네오의 전부가 아니었다.
모카가 아주 작게 말했다.
"네오님......"
네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연이."
"응."
"치즈를 잡아라. 놓치지 마라."
연이는 바로 치즈 쪽으로 몸을 틀었다.
"모카, 병 소리 계속 들어."
"네."
네오는 청토끼를 향해 걸었다.
청토끼는 웃었다.
"그 힘을 사용하면 비용이 큽니다."
네오는 멈추지 않았다.
"내 비용은 네가 계산하지 못한다."
청토끼의 미소가 처음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공중에 수십 장의 계약서가 펼쳐졌다.
네오는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앞발을 들었다.
금빛 발톱이 빛났다.
아주 짧은 순간.
연이는 숨을 멈췄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았다.
청토끼는 강하다.
이 섬의 모든 계약이 그의 무기다.
하지만 네오도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힘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경매장 전체가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흔들렸다.
청토끼가 회중시계를 닫았다.
찰칵.
"좋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럼 특별 경매를 잠시 중단하고, 손해배상 절차부터 진행하죠."
네오의 갈기가 조용히 타올랐다.
"절차는 필요 없다."
공중의 계약서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네오의 금빛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경매장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첫 번째 계약서가 찢어졌다.
쨍!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