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년주의 기억
Code Destiny · 7,775자
제32화. 년주의 기억
청토끼가 사라진 뒤에도 재성의 섬은 바로 조용해지지 않았다.
쨍그랑!
쨍!
철컥.
툭.
섬 곳곳에서 유리병이 깨지고, 목걸이가 풀리고, 오래된 계약서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황금빛 탑 위에 매달려 있던 병들이 하나둘 열렸다.
그 안에서 빛들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시간.
누군가의 행운.
누군가의 첫 도전.
누군가의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누군가의 꿈.
빛들은 잠깐 하늘 위에서 흩어졌다가, 각자의 주인을 찾아 날아갔다.
모카가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작게 말했다.
"소리가 돌아가요."
연이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무슨 소리?"
"갇힌 소리가 아니라, 집 찾아가는 소리요."
모카의 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조금 울고 있는데, 그래도 가벼워요."
연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재성의 섬을 뒤덮고 있던 황금빛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그 아래에 있던 섬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낡은 집.
작은 시장.
천막 아래 놓인 빵 바구니.
좁은 골목.
문 앞에 쌓인 고지서.
화려한 탑만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보였다.
연이는 작게 말했다.
"돈 때문에 무서운 섬인 줄 알았는데."
네오가 옆에서 말했다.
"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돈이 필요한 마음을 이용했기 때문에 무서운 섬이었다."
연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맞았다.
재성의 섬은 돈을 없애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돈은 필요하다.
재료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약속도 필요하고, 누군가의 꿈을 현실로 옮기기 위한 기반도 필요하다.
문제는 청토끼였다.
그는 필요를 족쇄로 바꾸고, 책임을 착취로 바꾸고, 대가를 소유권으로 바꿨다.
연이는 가슴 안쪽의 [辛未]를 느꼈다.
차갑고 얇은 흰 칼날.
그리고 묵직한 흙.
거짓 조항을 잘라내는 힘.
정당한 책임은 남기는 힘.
"신미."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다른 기운이 울렸다.
乙亥.
丁未.
壬午.
辛未.
네 개의 기둥이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그중 辛未는 가장 위쪽, 가장 오래된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연이는 눈을 깜빡였다.
"어......?"
명리 노트가 저절로 펼쳐졌다.
마지막 빈칸이 완전히 채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 작은 문장이 떠올랐다.
연이는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숨을 멈췄다.
가슴 안쪽의 辛未가 천천히 열렸다.
그것은 방금까지 청토끼의 계약을 자르던 칼날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문 같았다.
차갑고 흰 금속으로 된 문.
그 아래에는 따뜻하지만 오래된 흙이 깔려 있었다.
연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미래를 보는 힘이 아니었다.
과거였다.
잊힌 것.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자신이 모른 채 지나온 것.
연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녀의 운명 주변을 흐르던 어떤 자리.
"년주......"
연이가 중얼거렸다.
"과거의 자리."
순간, 재성의 섬 하늘이 멀어졌다.
주변의 소리가 흐려졌다.
모카가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치즈와 크림의 목소리도 멀어졌다.
연이는 다른 장면 속에 서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검은 비였다.
하늘은 무너진 도시처럼 어두웠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와 젖은 계약서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곳은 재성의 섬 같기도 했고, 전혀 다른 세계 같기도 했다.
낯선 장소.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아픈 장소.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연이는 숨을 멈췄다.
긴 검은 코트.
비에 젖은 어깨.
한쪽 손에 쥔 낡은 문장 조각.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금빛.
남자의 얼굴은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비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옆모습이 스쳤다.
선명한 턱선.
깊은 눈매.
무표정한데도 어딘가 다정해 보이는 얼굴.
연이는 멍하니 생각했다.
뭐야.
잘생겼는데?
그런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잘생겼다.
장면 속 남자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연이는 이상하게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 같다고 느꼈다.
비 사이로 남자의 눈이 아주 잠깐 보였다.
차갑고.
오래되고.
이상하게 익숙한 눈.
그 순간 辛未의 흰빛이 번쩍였다.
장면이 사라졌다.
연이는 다시 재성의 섬 골목에 서 있었다.
"연이님?"
모카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연이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나...... 방금 뭐 봤어."
치즈와 크림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크림이 물었다.
"무서운 거였어요?"
연이는 잠깐 생각했다.
검은 비.
무너진 도시.
낡은 문장 조각.
그리고 그 남자.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서웠는데......"
연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잘생겼어."
모카의 귀가 번쩍 섰다.
"잘생긴 남자요?"
크림의 눈도 반짝였다.
"얼마나요?"
연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상당히."
치즈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중요한 장면이었나요?"
"모르겠어."
연이는 눈을 찌푸렸다.
"근데 너무 선명했어."
네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이는 그를 보려다가 멈췄다.
네오는 재성의 섬 하늘 쪽을 보고 있었다.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조용했다.
연이는 더 묻지 않았다.
아직은.
명리 노트 위에는 문장이 하나 더 떠올라 있었다.
연이는 루나가 준 덧말 책갈피를 떠올렸다.
지금 전부 알아내려 하면 또 백문의 방으로 돌아가는 꼴이 될 것이다.
본뜻만 붙잡고.
해석은 나중에.
연이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나중에 다시 읽자."
그녀가 작게 말했다.
그러자 辛未의 빛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네 기둥이 다시 가슴 안쪽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때 골목 끝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타닥.
"형!"
치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크림!"
크림색 토끼가 달려왔다.
앞치마는 밀가루투성이였고, 양 볼에는 반죽이 묻어 있었다.
머리 위에는 작게 부풀어 오른 빵 모양 모자가 비뚤게 얹혀 있었다.
크림은 그대로 치즈에게 뛰어들었다.
"형!"
치즈는 크림을 꼭 끌어안았다.
작은 몸이 덜덜 떨렸다.
"크림...... 괜찮아?"
"응."
크림은 치즈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갑자기 아무것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방금 다시 냄새가 났어."
"무슨 냄새?"
"내 빵 냄새."
크림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형, 나 다시 만들고 싶어졌어."
치즈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연이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모카도 코를 훌쩍였다.
"이건...... 울 수밖에 없는 장면이네요."
연이는 모카를 힐끗 봤다.
"너 울어?"
"아니요."
"눈가 반짝이는데?"
"소리 뒤의 마음이 눈으로 나오는 중이에요."
"멋진 변명이다."
네오는 치즈와 크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바로 "시간 없다" 같은 말을 했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즈는 한참 뒤에야 크림을 놓았다.
크림은 연이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돼지님이야?"
연이는 바로 반응했다.
"이름은 연이야."
크림은 해맑게 말했다.
"연이 꽃돼지님!"
"더 길어졌잖아."
크림은 배시시 웃었다.
"형 꿈 도와준 분 맞죠?"
치즈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연이님이랑 모카님, 네오님이 도와줬어."
크림은 앞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동그랗고 조금 탄 빵 하나를 꺼냈다.
"이거 드세요."
연이는 빵을 바라봤다.
겉은 살짝 탔다.
모양도 삐뚤었다.
하지만 냄새는 좋았다.
정말 좋았다.
갓 구운 밀가루 냄새.
버터 냄새.
조금 서툰 설탕 냄새.
그리고 누군가 다시 시작하려는 냄새.
연이는 조심스럽게 받았다.
"먹어도 돼?"
크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성공작은 아니고, 첫 재시작작이에요."
연이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했다.
조금 탔다.
안쪽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연이는 잠깐 멈췄다.
"맛있어."
크림의 얼굴이 환해졌다.
"진짜요?"
"응."
연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조금 탄 것도 나쁘지 않아. 성격 있어."
모카도 한 조각 받아먹고 눈을 크게 떴다.
"오. 진짜 맛있어요."
네오도 작은 조각을 받았다.
그는 한입 먹고 잠시 침묵했다.
크림이 긴장해서 물었다.
"어때요?"
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건 더 좋아지겠군."
크림은 활짝 웃었다.
"칭찬이죠?"
연이가 말했다.
"네오식으로는 완전 극찬이야."
네오는 반박하지 않았다.
치즈는 자기 손목에 남은 작은 팔찌를 내려다봤다.
무거운 목걸이는 사라졌다.
하지만 아주 얇은 팔찌 하나가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숫자 대신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크림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
"형, 그거 아직 남아 있어?"
치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어."
연이는 치즈를 보았다.
"괜찮아?"
치즈는 팔찌를 내려다봤다.
처음에는 두려워 보였다.
하지만 곧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그는 말했다.
"이건 제가 갚아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크림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에......"
"아니."
치즈가 크림의 말을 막았다.
"우리 둘이 같이 시작한 꿈이잖아."
그는 크림의 어깨를 잡았다.
"부당한 건 사라졌어. 이제 남은 건 우리가 갚을 수 있는 책임이야."
연이는 그 말을 듣고 辛未의 빛이 조용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재성이었다.
모두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구분하는 것.
치즈의 빚은 더 이상 삶을 잡아먹는 괴물이 아니었다.
앞으로 갚아야 할 현실.
하지만 꿈을 빼앗지 않는 현실.
크림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빵 팔아서 같이 갚을게."
치즈는 웃었다.
"그래. 대신 이번엔 계약서 내가 세 번 읽을 거야."
연이가 바로 말했다.
"그리고 모르는 건 물어봐."
모카가 덧붙였다.
"계약서 소리도 들어보고요."
크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빵도 굽고 계약서도 읽는 제과사가 될게요."
연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강하다."
그때 채무자 구역의 주민들이 하나둘 골목으로 모여들었다.
목걸이가 깨진 동물들.
아직 작은 팔찌가 남은 동물들.
유리병에서 돌아온 빛을 품은 동물들.
그들은 치즈와 크림을 보고, 연이를 보고, 네오와 모카를 보았다.
늙은 고양이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계약서도 다시 볼 수 있을까?"
치즈가 숨을 삼켰다.
그는 잠시 연이를 보았다.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가 알잖아."
치즈는 놀란 얼굴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요?"
"응."
"저 아직 많이 몰라요."
네오가 말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자가 첫 번째로 읽을 수 있다."
연이가 네오를 봤다.
"오. 멋진 말."
"기록하지 마라."
모카는 이미 마음속에 기록한 얼굴이었다.
치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민들을 보았다.
"저...... 전문가는 아니에요."
그는 팔찌를 만졌다.
"하지만 원본을 찾는 법은 조금 알 것 같아요."
주민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치즈는 크림을 한 번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사후 첨부 조항은 조심해야 해요."
크림이 옆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형이 이제 계약서 잘 봐요!"
치즈의 귀가 빨개졌다.
"그 정도는 아니고......"
연이는 작게 웃었다.
채무자 구역 한쪽의 낡은 간판이 바뀌고 있었다.
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글자가 천천히 지워지고, 새 문장이 떠올랐다.
치즈가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네오가 말했다.
"재성의 섬은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균열이 생겼다."
연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황금빛 탑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청토끼의 금융그룹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흩어진 계약서 조각들이 다시 모일 수도 있다.
언젠가 또 다른 청토끼 같은 존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하층에는 원본을 읽는 곳이 생겼다.
치즈가 그 첫 번째 문지기가 될 것이다.
크림은 옆에서 빵을 구울 것이다.
모카가 말했다.
"여기 냄새 좋아질 것 같아요."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빵 냄새 나면 사기꾼 냄새가 좀 덜하겠지."
네오가 말했다.
"냄새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계약서도 읽는 빵집이 되는 거잖아."
크림이 눈을 반짝였다.
"그거 간판으로 써도 돼요?"
연이는 웃었다.
"써도 돼."
크림은 바로 외쳤다.
"계약서도 읽는 빵집!"
치즈가 당황했다.
"그건 너무 직설적인데?"
모카가 진지하게 말했다.
"기억에는 잘 남아요."
네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사주의 강 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연이의 머리 위 꽃이 조용히 흔들렸다.
가슴 안쪽의 네 기둥이 동시에 빛났다.
乙亥.
丁未.
壬午.
辛未.
네 개의 기둥이 하나의 원을 그리듯 이어졌다.
비겁의 섬.
식신·상관의 섬.
인성의 섬.
재성의 섬.
연이가 지나온 길들이 사주의 강 위에 떠올랐다.
그리고 강 저편.
처음 이곳으로 떨어졌던 달빛 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Code Destiny〉
달빛으로 된 문.
타로 카드의 문.
처음에는 연이를 멋대로 끌고 왔던 문.
이제는 조용히 열려 있었다.
연이는 숨을 멈췄다.
"저거......"
네오가 말했다.
"돌아갈 문이다."
모카의 귀가 축 내려갔다.
"벌써요?"
연이는 문을 바라봤다.
현실.
자기 방.
젖은 양말.
꺼져 있던 휴대폰.
알람이 울리지 않던 아침.
엉킨 메시지.
실패한 과제.
그리고 이유 없이 새던 운.
이제는 돌아갈 수 있었다.
아마도.
연이는 가슴 안쪽 네 기둥을 느꼈다.
다 찾았다.
자기 사주의 글자들.
흩어진 운명 코드.
그런데 이상하게 발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모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이님, 가야 하는 거죠?"
연이는 모카를 보았다.
갈색 수달.
무명 래퍼.
첫 줄을 되찾고, 이제 다음 줄을 기다릴 줄 아는 아이.
치즈와 크림을 보았다.
이제 막 다시 시작하려는 형제.
그리고 네오를 보았다.
작은 사자.
정체를 말하지 않는 동행자.
문 앞에서, 이상하게 조용한 눈빛을 한 존재.
연이는 네오에게 물었다.
"너는 같이 안 가?"
네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
하지만 이번엔 연이가 그 침묵을 바로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본뜻을 다 읽을 수 없는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네오가 천천히 말했다.
"너는 네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물어본 게 그게 아닌데."
"안다."
"그럼 대답해."
네오는 그녀를 보았다.
그 눈빛은 복잡했다.
너무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아주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연이는 이상하게 가슴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때 신미의 글자가 다시 빛났다.
辛未.
흰 칼날과 따뜻한 흙.
그 빛이 연이의 눈앞에 잠깐 번졌다.
그리고 아주 짧은 장면이 보였다.
낯선 곳.
무너진 도시의 밤.
검은 비.
그리고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남자였다.
긴 코트가 비에 젖어 있었고, 어깨에는 희미한 금빛이 남아 있었다.
얼굴은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옆모습이 스쳤다.
선명한 턱선.
짙은 눈매.
차가운데 다정해 보이는 분위기.
연이는 멍하니 그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잘생겼는데?
그 순간 장면이 사라졌다.
연이는 눈을 깜빡였다.
"방금......"
네오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연이는 네오를 빤히 보았다.
작은 사자.
짧은 앞발.
금빛 갈기.
건방진 표정.
방금 본 남자와는 전혀 달랐다.
전혀.
그런데 이상하게, 눈빛이 조금 닮은 것 같았다.
연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나 방금 되게 잘생긴 남자 봤어."
모카의 귀가 번쩍 섰다.
"잘생긴 남자요?"
치즈도 눈을 깜빡였다.
크림은 바로 물었다.
"얼마나 잘생겼어요?"
연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상당히."
네오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정말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연이는 봤다.
"어?"
네오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닫힌다."
"방금 너 반응했지?"
"문이 닫힌다고 했다."
"너 지금 화제 돌렸지?"
"돌아가라."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덧말로 남겨둘게. 신미 얻고 본 잘생긴 남자. 네오 반응 이상함."
모카가 진지하게 말했다.
"저도 마음속으로 기록했어요."
"기록하지 마라."
네오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연이는 그걸 보고 작게 웃었다.
이상했다.
돌아가기 직전인데도, 조금 웃음이 났다.
모카는 눈가를 문질렀다.
"연이님, 현실로 가도 저희 잊으면 안 돼요."
연이는 모카를 보았다.
"잊을 수 있겠어?"
"가끔 운세 세계 기억은 현실에서 흐려질 수도 있다던데요."
모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혹시 그러면......"
연이는 앞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톡 쳤다.
"나 이제 인성도 있어."
모카가 눈을 깜빡였다.
연이는 웃었다.
"기억 다시 읽는 힘. 쉽게 안 잊어."
모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럼 다행이에요."
치즈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연이님."
"응."
"고마워요."
치즈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크림의 꿈도, 제 선택권도...... 전부 끝난 줄 알았어요."
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원본을 말해서 가능했어."
치즈는 팔찌를 만졌다.
그는 조금 웃었다.
"이제 제가 할 일을 할게요."
"계약서도 읽는 빵집?"
크림이 옆에서 외쳤다.
"네!"
치즈는 결국 웃어버렸다.
"그래. 그걸로 하자."
연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중에 현실에서도 프랜차이즈 내."
"프랜차이즈가 뭔데요?"
크림이 물었다.
연이는 잠시 생각했다.
"음...... 빚 없이 하면 좋은 거."
치즈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말 같네요."
네오가 말했다.
"이제 정말 가야 한다."
문이 흔들렸다.
달빛의 테두리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연이는 문 앞에 섰다.
발이 떨렸다.
돌아가고 싶었다.
그토록 원했던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것들도 이제 진짜였다.
연이는 뒤돌아봤다.
모카.
치즈.
크림.
네오.
그녀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
"다들 잘 있어."
모카가 외쳤다.
"다음 줄 완성하면 꼭 들려줄게요!"
치즈가 말했다.
"계약서 문제 생기면...... 음, 현실까지 갈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상담해드릴게요!"
크림은 빵을 높이 들었다.
"다음엔 안 탄 빵으로 드릴게요!"
연이는 웃었다.
"기대할게."
마지막으로 네오가 그녀 앞에 섰다.
그는 평소처럼 작은 사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연이는 낮게 물었다.
"네오."
"왜."
"너, 내가 현실로 돌아가도 또 만날 수 있어?"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 침묵.
연이는 한숨을 쉬었다.
"진짜 끝까지 수상하네."
네오는 천천히 말했다.
"네 운명이 다시 새기 시작하면."
연이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불길한 조건 말고."
네오는 그녀를 보았다.
잠깐.
아주 잠깐.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네가 부르면."
연이는 멈칫했다.
"부르면?"
"그래."
"어떻게?"
네오는 작게 웃었다.
"그건 네가 알게 될 거다."
"또 그런 식이야."
"그런 식이다."
연이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문 안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달빛이 몸을 감쌌다.
꽃돼지의 몸이 빛에 녹기 시작했다.
짧은 다리.
동그란 배.
머리 위 꽃.
모두 희미해졌다.
대신 손가락이 돌아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리.
팔.
머리카락.
사람의 몸.
연이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봤다.
네오가 서 있었다.
작은 사자 모습으로.
하지만 그 뒤에, 아주 잠깐.
비 속에서 봤던 그 잘생긴 남자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연이는 눈을 크게 떴다.
"너......"
문이 닫혔다.
빛이 터졌다.
연이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천장.
익숙한 천장.
젖은 양말은 바닥에 있었다.
휴대폰은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배터리는 4퍼센트.
화면은 켜져 있었다.
<Code Destiny>
앱 아이콘은 여전히 홈 화면 한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알림 문구가 바뀌어 있었다.
연이는 천천히 자기 손을 들어 보았다.
손가락이 있었다.
다섯 개.
"돌아왔네."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러다 휴대폰 화면 아래에 작은 알림 하나가 더 떠올랐다.
연이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앱 진짜......"
그때 마지막 줄이 떴다.
연이의 얼굴이 굳었다.
"청토끼 잔재냐?"
바로 다음 줄.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오냐?"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화면 한쪽에 아주 작은 금빛 발자국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연이는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문득, 신미의 빛 속에서 본 남자를 떠올렸다.
비 오는 밤.
긴 코트.
금빛이 남은 어깨.
그리고 잘생긴 옆모습.
연이는 베개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근데 진짜 누구였지?"
휴대폰 화면은 조용했다.
하지만 연이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현실로 돌아온 첫날.
연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