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운은 쓰는 것이다
Code Destiny · 5,247자
제36화. 운은 쓰는 것이다
연이는 요즘 이상할 정도로 일이 잘 풀렸다.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거나 길 가다 돈다발을 줍는 식은 아니었다.
그런 극적인 일은 없었다.
대신 아주 사소한 것들이 제자리에 맞았다.
수업 시간에 필요한 자료를 미리 읽어갔더니 교수님이 딱 그 부분을 물었다.
카페에 사람이 많을 것 같아 10분 일찍 갔더니 마지막 조용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조별 과제에서 말이 꼬일 것 같아 먼저 요약본을 올렸더니, 대화가 부드럽게 흘렀다.
대단한 행운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가 덜 새고 있었다.
운이 바닥에서 줄줄 새는 느낌이 아니라, 손바닥 안에 조금씩 고이는 느낌.
연이는 그것을 느꼈다.
"이게...... 운을 쓴다는 건가?"
도서관 창가가 아닌 벽 쪽 자리.
그곳에서 연이는 노트북을 펴고 앉아 있었다.
물론 오늘도 창가 자리는 예뻤다.
햇빛이 들어오고, 사진 찍으면 감성 있어 보이고, 공부하는 나 자신에게 취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Code Destiny 앱은 아침부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운세는 짧고 선명했다.
작은 기회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날이니, 초안을 숨기지 말고 먼저 보여주라고 했다.
겸손한 척 물러서지 말고, 먼저 제안하면 흐름이 열린다는 말도 붙어 있었다.
연이는 그 문구를 보고 한참 생각했다.
"초안을 보여주라고?"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전공 과제 초안.
어제 밤에 80점짜리로 보낸 것.
아직 완벽하지 않았고, 문장도 덜 다듬어져 있었고, 사례 분석도 조금 비어 있었다.
예전의 연이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걸 보여주는 건 민망했고, 부족한 걸 들키는 건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丁未는 초안을 현실에 세우는 힘이다.
완벽해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 꺼내야 다듬을 수 있다.
연이는 조별 과제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교수님께 보낼 메일 창을 띄웠다.
여기까지 쓰고 멈췄다.
갑자기 손이 굳었다.
"이거 너무 나대는 거 아니야?"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연이는 흠칫했다.
연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곧 루나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연이는 화면을 바라봤다.
그 말이 조용히 들어왔다.
초안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방향을 묻는 지도다.
연이는 다시 메일을 썼다.
첨부.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보냈다."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려다가, 바로 다시 열었다.
"아니지. 도망치지 말자."
그때 벤치 아래에서 흰 꼬리가 스윽 지나갔다.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와."
벤치 아래에서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새하얀 털.
금빛 눈.
건방진 표정.
네오였다.
그는 도서관 구석 벤치 위로 사뿐히 올라와 앉았다.
"숨는 실력은 늘었군."
연이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지금 나 감시하는 거 맞지?"
네오는 앞발을 핥으며 말했다.
"관찰이다."
"그게 감시야."
"단어 선택이 부정확하다."
"고양이 주제에 말이 많아."
지나가던 학생 하나가 흰 고양이를 보고 웃었다.
"어머, 고양이다."
네오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필요한 관심이다."
학생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야옹."
"귀여워."
연이는 웃음을 참으며 노트북 화면을 봤다.
"너 진짜 현실에서 너무 불리하다."
"불리한 건 너다."
"왜?"
"메일 보내고 답장 올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할 얼굴이다."
연이는 반박하려다 멈췄다.
맞았다.
그녀는 벌써 메일함을 세 번 새로고침했다.
네오는 꼬리를 흔들었다.
"운을 쓴다는 건, 신호를 보고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인 뒤에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건 좀 맞는 말이네."
"좀?"
"많이 맞는 말."
"정확히 해라."
연이는 피식 웃었다.
그때 민지가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연이야."
연이는 노트북을 살짝 돌렸다.
"응?"
민지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교수님한테 초안 보냈어?"
연이는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어?"
"나한테도 참조 왔던데?"
"아."
연이는 잠깐 당황했다.
메일을 보내면서 조원들을 참조에 넣은 것이다.
민지는 파일을 열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거 좋더라."
"진짜?"
"응. 목차 잡힌 거 보니까 방향이 보여. 우리 그냥 오늘 이걸 기준으로 나누면 될 것 같아."
연이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초안을 보여주니, 흐름이 열렸다.
오늘의 운세.
정말 그대로였다.
민지가 말했다.
"너 오늘 시간 돼? 교수님 연구실 앞에서 잠깐 피드백 받아볼래?"
연이는 순간 긴장했다.
"지금?"
"응. 교수님 오늘 오후에 시간 조금 있다고 하셨대."
연이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아직 부족한데.
완성 안 됐는데.
질문 받으면 막힐 것 같은데.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연이는 화면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너무 정확하네."
민지가 물었다.
"뭐가?"
"아니야."
연이는 노트북을 챙겼다.
"가자."
네오가 벤치 아래에서 말했다.
"좋은 선택이다."
민지에게는 흰 고양이가 짧게 울었다.
"냐."
민지가 웃었다.
"얘 또 왔네?"
연이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응. 얘 좀 따라다녀."
"키우는 거 아니랬잖아."
"키우는 건 아니고......"
네오가 말했다.
"동행이다."
"야옹."
연이는 얼굴을 감싸고 싶었다.
"비슷해."
민지는 별생각 없이 웃었다.
교수님 연구실 앞.
연이는 노트북을 들고 서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을 피했을 것이다.
메일 보내놓고 답장 기다리는 척.
수정할 시간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미루기.
하지만 오늘은 피하지 않았다.
운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기회는 엄청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교수님이 10분 피드백해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작은 10분이 길을 바꿀 수도 있다.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乙亥.
내 자리.
丁未.
초안.
壬午.
피드백의 본뜻과 덧말 구분.
辛未.
정당한 대가와 책임.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교수님은 초안을 훑어보며 생각보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 괜찮네요."
연이는 멍해졌다.
"정말요?"
"네. 다만 사례 분석이 조금 약합니다. 여기서 비교 기준을 하나만 더 세우면 발표가 훨씬 좋아질 것 같아요."
예전 같으면 '약하다'에 찔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연이는 메모했다.
비교 기준 하나 추가.
교수님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 주제, 학과 소규모 공모전에 내도 괜찮겠는데요."
연이의 손이 멈췄다.
"공모전이요?"
"네. 다음 달에 학생 연구 발표회가 있어요. 엄청 큰 대회는 아니지만, 장학금도 있고 발표 경험도 쌓을 수 있습니다."
민지가 옆에서 눈을 크게 떴다.
"오."
교수님은 연이를 보았다.
"연이 학생이 발표할 생각 있으면, 제가 지도교수로 봐줄 수 있어요."
연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장학금.
발표 경험.
교수님의 지도.
예전의 연이였다면 바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 저는 아직 부족해서요."
그런데 아침 운세가 떠올랐다.
연이는 손가락을 꽉 쥐었다.
"해보고 싶습니다."
말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교수님은 웃었다.
"좋아요. 그럼 이번 과제는 발표회 초안으로도 발전시켜 봅시다."
연이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정말로 길이 열리는 느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연구실을 나오자마자 민지가 연이를 팔꿈치로 쳤다.
"야, 대박."
연이는 아직 얼떨떨했다.
"나 방금 하겠다고 했지?"
"했어."
"내가?"
"응."
연이는 복도 벽에 기대어 숨을 내쉬었다.
"와."
그때 네오가 복도 창틀 위에 앉아 있었다.
언제 따라왔는지 모를 흰 고양이.
그는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운을 잘 썼다."
연이는 그를 보았다.
"지금 내가 한 거야?"
"그래."
"앱이 알려준 거 아니고?"
"알려준 건 신호다. 움직인 건 너다."
그 말에 연이는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네오가 바로 덧붙였다.
"물론 아직 발표 실력은 미지수다."
"감동 파괴하지 마."
"현실 점검이다."
민지는 창틀 위 고양이를 보고 말했다.
"얘 진짜 교수님 건물까지 따라왔네."
네오가 말했다.
"관찰 범위를 확장했을 뿐이다."
"야옹."
민지는 웃었다.
"얘 울음소리 되게 짧고 단호하다."
연이는 작게 말했다.
"성격도 그래."
오후가 되자 Code Destiny 앱이 바쁘게 울렸다.
연이는 답장을 보냈다.
루나가 바로 답했다.
모카도 보냈다.
치즈도 말했다.
연이는 채팅창을 보며 웃었다.
정말 이상한 팀이었다.
수달 래퍼.
달빛 토끼 작곡가.
계약서 읽는 토끼.
간식운 담당 제빵 토끼.
흰 고양이로 나타난 정체불명의 네오.
그리고 현실 세계 대학생 연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인데, 이상하게 든든했다.
그날 저녁, 연이는 공모전 안내문을 열었다.
예전 같으면 대충 제목만 보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辛未.
작은 글씨를 본다.
조건을 읽는다.
연이는 안내문을 천천히 읽었다.
그녀는 중요한 부분을 표시했다.
그리고 치즈에게 보냈다.
치즈의 답장은 생각보다 빨랐다.
연이는 눈을 크게 떴다.
"와, 진짜 재성 담당."
그녀는 바로 조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지의 답이 왔다.
재훈도 답했다.
수아도 말했다.
일이 또 부드럽게 흘렀다.
연이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오늘 하루 동안 운이 거창하게 터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초안을 보냈다.
피드백을 받았다.
공모전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건을 미리 읽었다.
팀과 오해를 줄였다.
이 모든 게 연결되어 있었다.
운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신호가 오고.
그걸 읽고.
작게 움직이고.
그다음 길이 열리는 것.
연이는 처음으로 그걸 몸으로 이해했다.
밤이 되었다.
연이는 책상 앞에 앉아 공모전 준비 파일을 만들었다.
파일명을 적고 잠시 멈췄다.
가슴이 뛰었다.
무섭지만 싫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연이는 화면을 보고 조용히 웃었다.
"운 활용도 상승."
그 말이 좋았다.
행운이 온 것이 아니라, 운을 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한 일이었다.
그때 책상 아래에서 야옹, 하는 소리가 났다.
연이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흰 고양이 네오가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너 어떻게 들어왔어?"
네오는 책상 아래에서 태연하게 말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 열려 있었거든?"
"가능성은 있었다."
"그걸 문이라고 부르지 마."
네오는 침대 위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원래 자기 집인 줄 알 정도였다.
연이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거기 내 침대거든?"
"알고 있다."
"알면 내려와."
"싫다."
"고양이 됐다고 진짜 고양이처럼 구네."
네오는 눈을 감았다.
"현실 적응 중이다."
연이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내쫓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시 노트북을 보았다.
공모전 초안 파일.
아직 빈 문서였다.
그러나 이제 무섭기만 하지는 않았다.
연이는 첫 줄을 썼다.
쓰고 나서 조금 웃었다.
"이거 너무 내 얘기인데?"
네오가 침대 위에서 말했다.
"좋은 발표는 대개 자기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연이는 그를 돌아봤다.
"너 오늘 말이 좀 따뜻하다?"
네오는 눈을 뜨지 않았다.
"피곤해서 판단이 흐려진 것뿐이다."
"응. 그래도 고마워."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꼬리 끝만 아주 살짝 움직였다.
연이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첫 줄.
두 번째 줄.
세 번째 줄.
운은 더 이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림 속에도 있었고.
친구의 말 속에도 있었고.
작은 기회 속에도 있었고.
거절하지 않은 대답 속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을 읽는 자신 안에도 있었다.
현실의 밤은 조용했다.
하지만 연이의 하루는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정말로.
조금씩.
그리고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