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인생 최초 최대 학점
Code Destiny · 5,037자
제39화. 인생 최초 최대 학점
기말고사는 생각보다 조용히 지나갔다.
물론 조용하다는 말이 쉽다는 뜻은 아니었다.
연이는 매일 책상 앞에 앉았다.
강의안을 펼치고.
필기 노트를 다시 정리하고.
교수님이 은근히 강조했던 문장을 별표 치고.
예전 같으면 시험 전날 새벽에야 "이제 시작해볼까" 하며 인간이 아닌 표정으로 커피를 들이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Code Destiny 앱은 거의 매일 아침 시험 운세를 보내왔다.
연이는 처음엔 조금 반항했다.
"계획표 예쁘게 만들면 공부한 기분이 난단 말이야."
그러자 앱이 바로 알림을 띄웠다.
연이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말 심하네."
그런데 맞았다.
연이는 계획표 꾸미기를 멈추고, 틀린 문제부터 다시 봤다.
신기하게도 시험에는 그 부분이 나왔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시험 전날 밤, 연이는 너무 불안해서 새 범위를 더 보려고 했다.
그때 루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연이는 한참 채팅창을 보다가 책을 덮었다.
"내가 공부하는데 팀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네."
테이블 아래에서는 흰 고양이 네오가 꼬리를 말고 앉아 있었다.
그는 연이의 필기 노트를 한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세 번째 단락을 다시 봐라."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전공 내용도 알아?"
"모른다."
"근데 왜 세 번째 단락?"
"네가 거기서 세 번 한숨 쉬었다."
"무섭게 관찰하네."
"집중해라."
연이는 세 번째 단락을 다시 봤다.
시험에 나왔다.
정확히 그 부분이.
연이는 답안을 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오야, 너 진짜 뭐냐.
하지만 시험장에서는 고양이에게 감사할 수 없었다.
대신 답안을 최대한 정성껏 썼다.
그렇게 기말고사가 끝났다.
발표회도 끝났다.
과제도 냈다.
조별 과제는 큰 싸움 없이 마무리됐다.
민지는 마지막 회의에서 말했다.
"이번 조별 과제, 생각보다 괜찮았다."
재훈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연이가 초반에 방향 잡아줘서 살았어."
수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 정리도 깔끔했고. 우리 이 정도면 점수 괜찮을 듯."
연이는 그 말들을 들으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칭찬을 들어도 바로 덧말이 붙었을 것이다.
괜히 하는 말일까.
나중에 문제 생기면 내 탓 하려는 걸까.
내가 진짜 잘한 게 맞나.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들었다.
본뜻 그대로.
고마움은 고마움으로.
칭찬은 칭찬으로.
연이는 웃으며 말했다.
"다들 고생했어."
그리고 방학이 왔다.
정확히는 성적 발표일이 먼저 왔다.
성적 발표일 아침.
연이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다.
침대 위에 앉아 휴대폰을 봤다.
8시 03분.
성적은 10시에 공개된다.
연이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또 들었다.
"와, 이거 사람 피 말리네."
침대 옆 바닥에는 흰 고양이 네오가 없었다.
평소라면 어디선가 나타나 "불안해한다고 성적이 바뀌지는 않는다" 같은 재수 없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
연이는 방 안을 둘러봤다.
"네오?"
대답은 없었다.
당연했다.
네오가 매일 오는 것도 아니었다.
애완동물도 아니고.
연이가 키우는 것도 아니고.
현실 세계에 임시로 나타난 이상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방 안이 조금 비어 보였다.
"뭐야. 나 왜 찾고 있지?"
연이는 괜히 머리를 긁고 책상 앞에 앉았다.
10시.
성적 확인 사이트에 접속했다.
손이 떨렸다.
예전 성적표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슬아슬하게 넘긴 과목.
출석은 했는데 마음은 빠져 있었던 수업.
과제 제출 시간을 놓쳐 감점된 기억.
열심히 했는데도 꼬였던 학기.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클릭.
화면이 잠깐 멈췄다.
"제발."
다음 순간 성적표가 열렸다.
연이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연이는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
다시 봤다.
4.12.
분명 4점대였다.
인생 최초였다.
연이는 의자에 앉은 채 아주 작게 말했다.
"나...... 4점대야?"
목소리가 현실감이 없었다.
그녀는 성적표를 새로고침했다.
여전히 4.12.
다시 로그인했다.
여전히 4.12.
과목별 성적을 봤다.
전공 A.
교양 A+.
발표 과목 A.
조별 과제 과목 A-.
연이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쳤다."
휴대폰이 울렸다.
연이는 그 화면을 보고 웃다가 울컥했다.
정말로.
조금 울컥했다.
"나 진짜 했네."
이번에는 운이 대신 해준 게 아니었다.
운세가 길을 알려줬고, 동료들이 힌트를 줬고, 네오가 잔소리를 했지만.
공부한 건 연이였다.
메일을 보낸 것도 연이였고, 초안을 만든 것도 연이였고, 시험장에서 답안을 쓴 것도 연이였다.
그 사실이 가장 좋았다.
곧 단체 채팅방이 폭발했다.
연이는 웃으며 답장했다.
모카는 바로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두둥.
탁.
"사점대, 사점대, 운명을 읽고 올라간 단계-"
연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얘는 진짜 바로 랩을 하네."
크림은 빵 사진을 보냈다.
빵 위에 삐뚤빼뚤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1이 조금 길어서 4.72처럼 보였다.
연이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오늘은 기뻐해도 돼.
그래.
그래도 된다.
연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오늘 기뻐할 거야."
그리고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두 바퀴 돌았다.
세 바퀴째 돌다가 현타가 왔다.
"혼자 뭐 하지?"
방 안은 조용했다.
네오는 없었다.
평소라면 이런 순간에 어디선가 나타났을 것이다.
흰 고양이 모습으로 창틀 위에 앉아.
"겨우 4점대인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연이는 그 말을 상상하고 피식 웃었다.
"진짜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짜증 나네."
그런데 웃음이 조금 빨리 사라졌다.
네오가 없었다.
휴대폰 채팅방을 열었다.
모카.
치즈 & 크림.
루나.
그리고 맨 아래의 금빛 발자국 아이콘.
연이는 그 방을 눌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잠시 후, 회색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연이는 눈썹을 찌푸렸다.
"불안정?"
다시 눌렀다.
메시지를 적는 칸도 뜨지 않았다.
음성 통화도 없었다.
그저 작은 금빛 발자국 하나만 희미하게 깜빡였다.
연이는 괜히 휴대폰을 흔들었다.
"야. 네오."
대답 없음.
"나 4점대야."
대답 없음.
"놀려도 되니까 와봐."
대답 없음.
연이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상했다.
괜히 허전했다.
그는 애완동물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도 아니라고 계속 주장했다.
현실 현현체.
임시 접속.
감시가 아니라 관찰.
그런 이상한 말을 하던 존재.
그런데 연이는 어느새 그 흰 고양이가 책상 아래나 창틀 위, 카페 테이블 밑에서 나타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과제할 때 잔소리하고.
침대 위에 멋대로 올라가고.
츄르 얘기를 하면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고.
사람들이 쓰다듬으면 품위 있게 참는 척하던 고양이.
"애완동물도 아니면서......"
연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왜 갑자기 사라지고 그래."
말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아니, 생각보다 많이.
방학 첫날.
캠퍼스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연이는 성적표를 확인한 뒤, 괜히 학교로 나갔다.
이유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
도서관 앞 벤치.
카페 벽 쪽 자리.
연구실 복도 창틀.
네오가 자주 나타났던 곳들을 괜히 확인하고 싶었다.
학교는 방학이라 한산했다.
잔디밭은 햇빛을 받아 조용히 반짝였고, 학생들은 드문드문 걸어 다녔다.
기말고사 때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캠퍼스 전체가 느슨하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연이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았다.
네오가 처음 흰 고양이로 나타났던 자리.
벤치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풀숲을 봤다.
흰 꼬리도 없었다.
"진짜 없네."
그때 민지가 지나가다 연이를 발견했다.
"연이야!"
"어, 민지."
민지는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성적 봤어?"
연이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응."
"너 이번에 잘 나왔다며? 교수님이 칭찬하던데."
"운이 좋았지."
민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이번엔 진짜 열심히 했어. 운도 운인데, 네가 잘한 거야."
그 말은 루나가 해준 말과 비슷했다.
네가 쓴 거야.
네가 한 거야.
연이는 조용히 웃었다.
"고마워."
민지는 벤치 아래를 힐끗 봤다.
"근데 네오 없어?"
연이는 멈칫했다.
"어?"
"그 흰 고양이. 요즘 너랑 자주 있던 애."
연이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내 고양이 아니야."
"아니라고 하기엔 되게 붙어 다녔잖아."
"그냥...... 가끔 오는 애야."
민지는 웃었다.
"보고 싶어서 여기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연이는 바로 말했다.
"아니거든."
너무 빨랐다.
민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아니야."
"알았어. 아니라고 해줄게."
연이는 입술을 삐죽였다.
민지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방학 축하. 그리고 4점대 축하."
"고마워."
"이번 방학엔 좀 쉬어. 너 지난 학기 진짜 얼굴에 영혼 없었어."
"그래?"
"응. 요즘은 좀 살아 돌아온 느낌이야."
연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 돌아왔어.
물론 말하지 않았다.
민지가 떠난 뒤, 연이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연이는 마지막 줄에서 손을 멈췄다.
익숙한 빈자리.
"너 지금 나 놀리냐?"
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동료 채팅방이 울렸다.
연이는 그 대화를 보며 웃었다.
동료들은 여전히 있었다.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금빛 발자국 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연이는 손가락으로 그 방을 눌렀다.
이번에도 그것뿐이었다.
연이는 한참 그 문장을 보다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 바쁘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다.
네오가 사라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현실 현현체 유지 시간이 끝난 걸 수도 있고, 운세 세계 쪽에 일이 생긴 걸 수도 있고, 그냥 그의 방식대로 아무 말 없이 움직인 걸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래도.
말 한마디쯤은 해주지.
연이는 벤치 등받이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빛이 따뜻했다.
방학이었다.
인생 최초 4점대.
과제도 끝났고, 발표회도 잘 마무리됐고, 운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좋은 날이었다.
분명 좋은 날인데.
도서관 앞 벤치 아래가 너무 조용했다.
연이는 작게 말했다.
"고양이 주제에 빈자리가 크네."
그 순간 풀숲에서 바람이 불었다.
흰 털 하나가 공중에 떠올랐다.
연이는 눈을 크게 떴다.
그 털은 아주 작았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다가, 연이의 무릎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연이는 그것을 손끝으로 집었다.
"......"
우연일 수도 있다.
진짜 고양이 털일 수도 있다.
네오와는 아무 상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이는 그 털을 버리지 않았다.
노트북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덧말 책갈피처럼.
나중에 다시 읽을 기억처럼.
휴대폰이 아주 작게 울렸다.
연이는 급히 화면을 켰다.
금빛 발자국 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대신 오늘의 운세 아래에 짧은 문장이 하나 떠 있었다.
연이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알았어."
바람이 다시 불었다.
방학의 첫날이었다.
연이는 인생 최초로 4점대를 받았고, 세상은 조금씩 풀리고 있었고, 흰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도 이상하게.
끝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 현실의 시간이 천천히 시작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