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해수의 심연
Code Destiny · 5,171자
제4화. 해수의 심연
연이는 물속으로 떨어졌다.
첨벙.
분명 물이었다.
차갑고, 검고, 끝없이 깊은 물.
그런데 이상하게 숨은 쉬어졌다.
연이는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물속을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몸은 가벼웠다.
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머리 위의 작은 꽃만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이는 앞발을 꽉 쥐려 했다.
역시 잘 안 됐다.
그래도 앞발 안쪽에 남은 따뜻한 기운은 느껴졌다.
조금 전 비겁의 섬에서 얻은 첫 번째 글자.
작은 새싹 같은 힘.
연이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네오!”
대답은 없었다.
검은 물결만 천천히 움직였다.
연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위도 아래도 어두웠다.
멀리에는 오래된 기억 같은 빛들이 떠다녔다.
읽지 못한 메시지.
보내지 못한 문장.
삼켜버린 말.
울컥했지만 웃어넘긴 순간들.
그것들이 작은 물고기처럼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연이는 입을 벌렸다.
“뭐야…… 여긴 진짜 내 흑역사 저장소야?”
말은 물속에서도 나왔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말끝에 작은 기포가 올라갔다.
뽀글.
기포 안에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연이는 그걸 보고 멈칫했다.
그 기포는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아래로 가라앉았다.
검은 물속으로.
“괜찮아가 왜 가라앉아?”
그때 다른 기포들이 떠올랐다.
연이는 얼굴을 굳혔다.
다 자기가 했던 말이었다.
정확히는, 진짜 괜찮지 않을 때 했던 말들이었다.
기포들은 하나둘 연이 주변으로 모였다.
그리고 갑자기 무거워졌다.
연이의 몸이 아래로 끌려갔다.
“잠깐, 잠깐!”
연이는 허우적거렸다.
짧은 다리가 물속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니, 이 몸은 수영도 안 돼?”
그 순간 머리 위 꽃이 작게 빛났다.
앞발 안쪽에서 초록빛 덩굴이 뻗어 나왔다.
乙의 힘이었다.
덩굴은 물속을 헤치고 뻗어나갔다.
하지만 검은 물은 너무 깊었다.
덩굴은 뻗다가 멈췄다.
어디에 뿌리내려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그때 물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연이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물결 사이로 거울 속 연이가 나타났다.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젖지도 않았다.
머리카락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소름 끼쳤다.
“여긴 네가 못 들어온다고.”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너는 왜 물속에서도 헤어 스타일 유지되냐? 너무 불공평한데?”
거울 속 연이가 피식 웃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으니까.”
“아, 진짜 재수 없어.”
“그것도 네 말투야.”
“그 말 이제 금지.”
거울 속 연이는 천천히 연이 주변을 돌았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움직였다.
“여긴 亥의 심연이야.”
“알아. 네오가 말했어.”
“그럼 알아야지.”
그녀가 손가락으로 연이의 머리 위 꽃을 가리켰다.
“乙은 물이 있어야 살아. 그런데 네가 제일 못 하는 게 뭔지 알아?”
연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 속 연이가 말했다.
“깊어지는 거.”
검은 물속에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연이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답장이 오지 않는 채팅방.
보내려다 지운 문장.
한참 입력하다가 결국 지워버린 말.
그 문장은 보내지지 않았다.
기포가 되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연이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만해.”
“왜?”
거울 속 연이는 웃었다.
“네 기억인데.”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친구들 앞에서 웃고 있는 연이.
“아, 괜찮아.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던 얼굴.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다음 장면.
과제 파일이 날아간 밤.
연이는 혼자 화면을 보며 웃었다.
“와, 레전드. 내 인생 진짜 예능이다.”
그리고 몇 초 뒤, 웃음이 사라졌다.
다음 장면.
면접 취소 문자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
하지만 보내지 못한 문장이 그 아래에 남아 있었다.
연이는 눈을 감았다.
가볍게 넘긴 줄 알았다.
웃어서 지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전부 여기 있었다.
검은 물속에.
가라앉은 채로.
“너는 항상 말끝을 웃음으로 막아.”
거울 속 연이가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면 되는데, 꼭 드립을 쳐.”
“그게 나쁜 거야?”
“나쁘진 않지.”
거울 속 연이가 연이 가까이 다가왔다.
“근데 네가 네 마음을 안 들어주잖아.”
그 말에 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은 물이 다시 무거워졌다.
기포들이 연이의 몸에 달라붙었다.
기포 하나하나는 가벼워 보였지만, 붙을수록 무거웠다.
연이는 아래로 끌려갔다.
“아, 진짜……!”
그녀는 앞발을 휘저었다.
“나 괜찮은 척 좀 했다고 이렇게까지 끌고 내려가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거울 속 연이가 말했다.
“괜찮은 척은 물에 잘 가라앉아.”
“명언처럼 말하지 마. 짜증 나니까.”
그때 멀리서 네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았다.
마치 수면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연이!”
연이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물 위쪽에 금빛이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네오였다.
그는 물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수면 위에서 발톱으로 물결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해수의 심연은 닫힌 물이었다.
바깥의 힘이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네오!”
연이가 외쳤다.
“나 지금 완전 침수됐거든!”
네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물을 밀어내려고 하지 마라!”
“그럼 뭐 해? 물에 감사 인사라도 해?”
“乙은 물을 먹고 자란다!”
“아까도 그 말 했잖아!”
“이번엔 진짜로 이해해야 한다!”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검은 물이 계속 그녀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 아래에는 거대한 문양이 보였다.
둥근 물결.
그 안에 숨어 있는 글자.
해.
하지만 글자는 아직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거울 속 연이가 말했다.
“못 가.”
연이는 그녀를 노려봤다.
“너 그 말밖에 못 해?”
“못 하니까 못 한다고 하지.”
“아, 진짜 내 얼굴로 저렇게 말하니까 킹받네.”
“그럼 증명해.”
거울 속 연이가 손을 뻗었다.
연이의 앞발 안에 있던 [乙]의 빛이 흔들렸다.
“네가 乙을 붙잡아도, 亥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을해는 완성되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꽃은 물 없이 살 수 없어. 그런데 너는 네 물을 싫어해.”
“내 물?”
“네 깊은 마음.”
검은 물속에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어두운 방.
연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은 꺼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 장면 속 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제일 아팠다.
연이는 그 장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 저때…….”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거울 속 연이가 대신 말했다.
“외로웠지.”
검은 물이 출렁였다.
“무서웠고.”
또 출렁였다.
“근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
기포들이 한꺼번에 연이를 감쌌다.
연이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물속인데도 숨이 들어왔다.
하지만 가슴은 답답했다.
“그래.”
연이가 말했다.
기포들이 멈췄다.
거울 속 연이도 멈췄다.
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 안 괜찮았어.”
그 말이 물속에 퍼졌다.
기포 하나가 터졌다.
퐁.
사라졌다.
연이는 다시 말했다.
“별일 아니라고 했는데, 별일이었어.”
또 다른 기포가 터졌다.
퐁.
사라졌다.
연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신경 안 쓴다고 했는데, 신경 썼어.”
퐁.
사라졌다.
검은 물이 조금 가벼워졌다.
연이는 앞발을 가슴에 댔다.
“그리고…….”
말하기 싫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진짜로 인정하게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계속 가라앉을 것 같았다.
연이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서웠어.”
그 순간 검은 물이 크게 흔들렸다.
거울 속 연이가 처음으로 표정을 잃었다.
연이는 계속 말했다.
“계속 안 풀릴까 봐 무서웠고,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어서 무서웠고, 웃고 넘기면 진짜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 괜찮아서 더 무서웠어.”
기포들이 하나둘 터졌다.
퐁.
퐁.
퐁.
물속이 조금 맑아졌다.
검은 물 아래에 있던 [亥] 글자가 더 선명해졌다.
거울 속 연이가 급히 손을 뻗었다.
“그만해.”
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앞발 안쪽의 [乙]이 따뜻하게 빛났다.
초록빛 덩굴이 다시 자라났다.
이번엔 물을 밀어내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덩굴은 검은 물속으로 천천히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마치 물을 마시는 것처럼.
연이는 그 감각을 느꼈다.
차가운 물이 전부 적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외로움도 있었고, 무서움도 있었고, 말하지 못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죽이는 물만은 아니었다.
그 물이 있었기에, 새싹도 자랄 수 있었다.
네오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그래. 그거다.”
이번엔 더 선명했다.
“亥는 너를 가라앉히는 물이 아니다. 네 뿌리를 숨겨둔 물이다.”
연이는 [亥]를 바라봤다.
“내 뿌리…….”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닿았다.
그녀는 늘 밝은 척했다.
가벼운 척했다.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사실 자기 안에는 깊은 물이 있었다.
그 물은 귀찮고 무겁고 차가웠다.
그래도 그 안에 뿌리가 있었다.
연이는 앞발을 뻗었다.
[乙]의 덩굴이 [亥]를 향해 뻗어갔다.
거울 속 연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 네가 그걸 받아들이면—”
“내가 더 진짜 같아지나?”
연이가 물었다.
거울 속 연이가 입을 다물었다.
연이는 피식 웃었다.
“오케이. 정답이네.”
덩굴이 [亥]에 닿았다.
그 순간, 검은 물속에서 거대한 파문이 일어났다.
차가운 물이 연이를 감쌌다.
하지만 이번엔 끌어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받쳐 올렸다.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검은 물이 깊은 남색으로 바뀌었다.
그 안에서 작은 별빛들이 켜졌다.
연이는 숨을 삼켰다.
“예쁘다…….”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무섭기만 했던 물이, 조금 달라 보였다.
차갑지만 맑았다.
어둡지만 비어 있지 않았다.
그 안에 뭔가가 많았다.
기억.
감정.
상처.
그리고 살아남은 마음.
[亥]가 연이의 앞발에 닿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 차가움은 이상하게 안정적이었다.
깊은 물속에 발을 담근 것처럼.
연이의 머리 위 꽃이 환하게 피어났다.
두 글자가 그녀의 앞에서 나란히 빛났다.
을해.
연이는 작게 말했다.
“을해일주.”
그 순간 두 글자가 하나의 빛으로 이어졌다.
초록빛 새싹이 깊은 물 위에 뿌리를 내렸다.
작은 꽃이 피었다.
검은 물속에서.
말도 안 되게 작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꽃.
연이는 그 꽃을 보며 숨을 멈췄다.
그건 자기 같았다.
아직 약하고.
아직 작고.
아직 많이 무섭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것.
위에서 네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이!”
금빛 발톱이 수면을 찢었다.
빛이 쏟아졌다.
연이는 위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물이 끌어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밀어 올렸다.
거울 속 연이는 물 아래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네가 亥를 찾았다고 끝난 줄 알아?”
연이는 위로 올라가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끝은 아니겠지.”
거울 속 연이가 웃었다.
“비겁의 섬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네가 네 뿌리를 찾았다고 해도, 네 자리를 지키는 건 또 다른 문제야.”
연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올라가서 또 하면 되지.”
거울 속 연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연이는 덧붙였다.
“나 이제 튜토리얼 좀 익숙해졌거든.”
말끝에 작은 소리가 섞였다.
“꿀.”
연이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 이건 아직 안 익숙함.”
그 순간 빛이 터졌다.
연이는 해수의 심연을 빠져나왔다.
쏴아아아!
그녀는 비겁의 섬 위로 튀어 올랐다.
네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는 바닥 위로 데굴 굴렀다.
“아야…….”
네오가 다가왔다.
“괜찮나?”
연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 위 꽃이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꽃 아래로 푸른 물결 문양이 감돌았다.
네오가 조용히 말했다.
“乙亥가 연결됐다.”
연이의 앞에 두 글자가 떠올랐다.
을해.
그것은 이제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작은 꽃과 깊은 물.
흔들리지만 죽지 않는 마음.
밝게 웃지만, 깊은 곳에 많은 것을 품은 자신.
연이는 그 글자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내가 생각보다 복잡한 타입이었네.”
네오가 말했다.
“이제 알았나?”
“응.”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복잡하다고 가짜한테 자리 내줄 생각은 없어.”
그때 섬 전체의 거울들이 다시 빛났다.
거울 속 연이가 천천히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녀의 발밑에 검은 거울 조각들이 모이고 있었다.
눈빛은 더 차가워졌고, 목소리는 낮아졌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제 진짜 시험을 시작하자.”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시험이 남았어?”
네오가 낮게 말했다.
“乙亥는 찾았다. 하지만 비겁의 섬은 네가 그 글자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려 할 것이다.”
거울 속 연이가 손을 들었다.
수많은 거울 조각들이 그녀 뒤로 떠올랐다.
그 조각들마다 다른 연이의 얼굴이 비쳤다.
질투하는 연이.
포기하는 연이.
비교하는 연이.
억지로 웃는 연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연이.
거울 속 연이가 말했다.
“어서 와.”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이번엔 네가 이긴 줄 아는 너희들 전부랑 싸워야 해.”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라면 겁부터 났을 것이다.
지금도 겁은 났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앞발 안쪽에는 乙의 따뜻함이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는 亥의 물이 있었다.
연이는 작게 말했다.
“오케이.”
네오가 그녀를 봤다.
연이는 거울 속 자신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 방금 심연 다녀왔거든?”
머리 위 꽃이 빛났다.
“멘탈 조금 업그레이드됐어.”
거울 속 연이가 웃었다.
비겁의 섬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