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회중시계를 준 자
Code Destiny · 5,192자
제43화. 회중시계를 준 자
청토끼 감염체의 목이 떨어진 뒤.
사주의 강 위에는 잠깐, 아주 낯선 고요가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찢던 먹구름도.
계약서 날개를 단 악마들의 비명도.
별자리 선이 연이의 사주 기둥을 조이던 소리도.
모두 한 박자 늦게 멈췄다.
검은 계약서 조각들이 눈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눈처럼 깨끗하진 않았다.
종이 조각 하나하나가 아직도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연이는 연잎 배 위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목이 아팠다.
검은 선이 조였던 자리에 뜨거운 감각이 남아 있었다.
모카가 거의 울면서 달려왔다.
"연이님!"
"괜찮아."
연이는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괜...... 콜록."
크림이 양손으로 별가루빵을 내밀었다.
"이거 먹어요! 목에 좋을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따뜻해요!"
연이는 빵을 받았다.
"고마워."
한입 베어 물자, 이상한 맛이 났다.
별가루 맛.
구운 밀가루 맛.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탄 계산서 맛.
연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맛이 복잡한데?"
크림이 울먹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 오븐이 감염됐었어요."
"아니, 그래도 따뜻해."
치즈는 청토끼 감염체가 사라진 자리로 다가갔다.
바닥에는 검은 계약서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조각들 사이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작고 둥근 물건.
치즈가 그것을 보고 몸을 굳혔다.
"잠깐만요."
연이는 고개를 들었다.
"왜?"
치즈는 조심스럽게 앞발을 뻗었다.
검은 조각들 사이에서 그것을 집어 올렸다.
회중시계였다.
금빛 회중시계.
하지만 예전 청토끼가 들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겉면은 갈라져 있었고, 시계줄은 끊어져 있었다.
유리판은 반쯤 깨졌고, 안쪽 톱니바퀴는 검은 잉크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도 시계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소리가 이상했다.
시간을 재는 소리가 아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같았다.
사락.
째깍.
사락.
째깍.
루나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평범한 재성의 도구가 아니야."
치즈가 회중시계를 들고 손을 떨었다.
"맞아요. 이건 계약 도구가 아니에요."
연이가 물었다.
"그럼 뭐야?"
치즈는 한참 시계를 바라봤다.
시계 안쪽에는 작은 글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기록.
해석.
권한.
보호.
주입.
기억.
루나가 낮게 말했다.
"인성."
연이는 눈을 깜빡였다.
"인성?"
네오는 조용히 회중시계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루나가 설명했다.
"인성은 배우고,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보호받는 힘이야. 밖에서 들어오는 지식, 기록, 권한, 해석의 힘이기도 하지."
연이는 회중시계를 바라봤다.
그 안에서 깨진 유리 조각 사이로 책장 같은 빛이 흘렀다.
분명 재성의 섬에서 본 물건이었다.
돈.
계약.
시간.
소유.
그런 느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안쪽의 핵심은 달랐다.
그건 돈의 힘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읽고.
기억하고.
해석하고.
남의 권한을 빌려오는 힘.
연이는 천천히 말했다.
"청토끼가 강했던 이유가 이거야?"
치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토끼 본인은......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큰 존재가 아니었어요."
모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 엄청난 계약이랑 경매장이 전부......"
"청토끼의 욕망은 컸어요."
치즈는 회중시계를 꽉 쥐었다.
"하지만 그릇은 약했죠. 원래라면 재성의 섬 일부를 흔드는 정도였을 거예요."
네오가 낮게 말했다.
"주제넘은 욕망뿐인 약한 토끼."
그 말은 차가웠다.
연이는 네오를 보았다.
네오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청토끼를 베었을 때의 차가움이 아직 남아 있었다.
치즈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이 시계가 청토끼에게 기록을 먹였어요. 계약 지식, 원장 접근 권한, 남의 약점을 해석하는 방식, 심지어 사주 세계 밖의 구조까지."
루나가 덧붙였다.
"강한 인성의 힘이야. 제대로 쓰면 배움과 보호가 되지만, 비틀리면 남의 마음을 읽고 조종하는 해석 권력이 돼."
연이는 숨을 삼켰다.
"그러니까 청토끼는 자기 힘으로 강했던 게 아니라......"
네오가 말했다.
"받아먹은 거다."
회중시계가 갑자기 크게 울렸다.
째깍.
그 순간 시계 안쪽에서 검은 빛이 튀었다.
치즈가 놀라 시계를 떨어뜨렸다.
회중시계는 연잎 배 위에 떨어지더니 혼자 굴러갔다.
딸깍.
딸깍.
딸깍.
그리고 멈췄다.
시계 유리 안쪽에 눈 하나가 떠올랐다.
연이는 몸을 굳혔다.
눈.
검은 눈.
동공이 없고, 별처럼 깊은 눈.
그 눈이 잠깐 연이를 보았다.
아니.
연이를 지나쳐, 네오를 본 것 같았다.
네오의 갈기 끝이 희미하게 빛났다.
"뒤로."
그는 짧게 말했다.
연이는 바로 물러났다.
모카와 치즈, 크림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루나는 류트를 품에 안고 조용히 현을 눌렀다.
회중시계의 눈은 곧 사라졌다.
시계는 완전히 멈췄다.
째깍 소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모두 알았다.
방금 뭔가가 이쪽을 봤다.
청토끼가 아니었다.
더 깊고.
더 조용하고.
더 위험한 것.
연이는 낮게 물었다.
"방금 뭐야?"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불길했다.
그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는 회중시계 안쪽의 어둠 너머.
그곳 어딘가.
별빛이 닿지 않는 방이 있었다.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천장도 없었다.
그런데도 검은 하늘이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없고, 대신 수많은 눈이 떠 있었다.
책장들이 벽처럼 둘러서 있었고, 책마다 이름이 없었다.
책장 사이에는 회중시계들이 매달려 있었다.
금빛.
은빛.
검은빛.
어떤 것은 멈춰 있었고, 어떤 것은 거꾸로 돌고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 긴 검은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으로 가려져 있었다.
다만 손만 보였다.
길고 창백한 손.
그 손가락에는 별 모양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존재는 손끝으로 깨진 회중시계 하나를 쓰다듬었다.
청토끼의 시계였다.
실제로는 사주의 강 위에 떨어져 있었지만, 그림자는 이곳에 연결되어 있었다.
"졌군."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먼 별이 꺼지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결국 그 토끼로는 여기까지였나."
어둠 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회수할까요?"
그것은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낡은 종이가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검은 옷을 입은 작은 새 그림자가 의자 옆에 내려앉았다.
의자에 앉은 존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니."
"청토끼는 실패했습니다."
"실패라기보다는 소모지."
그 존재가 조용히 웃었다.
"약한 토끼였지. 욕망만 컸고, 그릇은 작았다."
깨진 회중시계 안쪽에서 푸른 잉크가 흘러나왔다.
그 존재는 그것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시계를 주자, 제법 쓸모가 있었다."
검은 새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 시계에는 인성의 저장고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
존재의 목소리가 느긋해졌다.
"기록을 먹이고, 해석을 빌려주고, 권한을 덧씌웠다. 그러니 주제넘은 욕망뿐이던 토끼도 운세 세계를 망칠 정도로 자랄 수 있었지."
어둠 속 책장들이 흔들렸다.
책등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그 존재는 손끝으로 [편인]이라는 글자를 건드렸다.
"인성은 본래 약한 자를 살리는 힘이다."
그가 말했다.
"배우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보호하고, 길러주지."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비틀면, 약한 자에게 남의 기록을 먹여 괴물로 만들 수 있다."
깨진 회중시계 안에서 청토끼의 웃음소리 잔재가 잠깐 흘러나왔다.
곧 사라졌다.
"그 토끼는 돈을 원했다."
존재가 말했다.
"하지만 돈만으로는 하늘을 망칠 수 없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별 하나가 떠올랐다.
"하늘을 망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해석이다."
검은 새 그림자가 낮게 말했다.
"별의 의미를 가격표로 바꾸는 것."
"그렇지."
존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주의 강은 기둥으로 버틴다. 그러나 별의 세계는 의미로 버틴다. 의미를 바꾸면, 별은 스스로 무너진다."
검은 하늘 위에 점성술의 원이 떠올랐다.
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게자리.
별들이 하나씩 검은 가격표로 바뀌었다.
그 안쪽에는 자미두수의 성궁이 나타났다.
명궁.
재백궁.
관록궁.
복덕궁.
중심에 보랏빛 자미성이 있었다.
그 존재는 자미성을 바라보았다.
"청토끼는 문을 긁었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문은 이미 열리고 있어."
검은 새 그림자가 물었다.
"다음 도구를 내리시겠습니까?"
존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사이로 수많은 회중시계가 동시에 한 번 울렸다.
째깍.
방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어둠 속 깊은 곳에서 다른 물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중시계가 아니었다.
검은 천구의였다.
별자리 원을 본뜬 작은 장치.
금속 고리들이 겹겹이 돌고 있었고, 그 안쪽에는 보랏빛 별 하나가 갇혀 있었다.
검은 새 그림자가 몸을 낮췄다.
"천구의까지 쓰실 생각입니까?"
존재는 손을 뻗었다.
"시계는 토끼에게 시간을 주었다."
그가 말했다.
"천구의는 별에게 방향을 빼앗을 것이다."
검은 천구의가 천천히 회전했다.
그 안쪽 보랏빛 별이 희미하게 떨렸다.
존재는 낮게 웃었다.
"연이라는 아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배웠다."
그는 깨진 회중시계를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사주를 회수했고, 재성을 정화했고, 별의 문법도 벌써 배우기 시작했지."
검은 새 그림자가 말했다.
"위협입니까?"
"아니."
존재는 조용히 말했다.
"흥미롭다."
그 말이 끝나자, 어둠 속 책장들이 다시 흔들렸다.
책 한 권이 스스로 펼쳐졌다.
그 안에는 연이의 모습이 비쳤다.
꽃돼지 모습으로 연잎 배 위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연이.
그 앞에 서 있는 네오.
금빛 사자의 윤곽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네오.
존재의 손가락이 네오의 얼굴 위에 멈췄다.
"그리고 저쪽도."
검은 새 그림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의자에 앉은 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책장 위를 톡 두드렸다.
그러자 글자가 흐려졌다.
네오의 이름은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잉크가 번지고, 다시 끊겼다.
존재는 아주 작게 웃었다.
"아직 이름을 숨기고 있군."
검은 새가 물었다.
"드러낼까요?"
"아니."
존재는 손을 거두었다.
"숨은 이름은 스스로 드러나는 순간이 가장 맛있다."
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모든 회중시계가 동시에 멈췄다.
째깍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 아주 멀리서, 별 하나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
존재는 검은 천구의를 들어 올렸다.
"청토끼의 패배는 문제없다."
그는 말했다.
"그는 충분히 퍼뜨렸다. 욕망이라는 병균을. 가격표라는 덧말을. 하늘을 장부처럼 읽는 방법을."
검은 새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은?"
존재는 천구의 안쪽의 보랏빛 별을 바라보았다.
"자미성."
그 한마디에 방 안의 어둠이 깊어졌다.
"성궁의 중심을 흔들어라. 명궁부터 무너뜨려라. 자신을 브랜드로 보는 자는, 결국 자기 중심을 잃는다."
검은 새 그림자가 날개를 펼쳤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존재는 마지막으로 깨진 회중시계를 손끝으로 눌렀다.
청토끼의 잔재가 작은 푸른 불꽃처럼 튀었다.
"그리고 청토끼의 남은 조각은 버리지 마라."
"쓸모가 남았습니까?"
"좀비는 죽지 않는다."
존재가 말했다.
"죽은 욕망은 살아 있는 욕망보다 끈질기다."
그의 손끝에서 청토끼의 회중시계가 완전히 부서졌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온 검은 톱니 하나가 천구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구의가 한 번 크게 울렸다.
둥.
그 울림은 별의 궁전 쪽으로 흘러갔다.
장면은 다시 사주의 강 위로 돌아왔다.
연이는 아직 숨을 고르고 있었다.
치즈는 깨진 회중시계를 살피고 있었다.
루나는 회중시계에서 흘러나온 인성의 잔재를 조심스럽게 봉인하고 있었다.
모카는 하늘 소리를 듣느라 귀를 세우고 있었다.
네오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연이는 그를 보았다.
"네오."
"왜."
"방금 뭔가 봤어?"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긍정처럼 느껴졌다.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또 혼자 알고 있지?"
네오는 짧게 말했다.
"확실하지 않다."
"확실하지 않은데 표정이 왜 그래?"
그는 아주 잠깐 연이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청토끼에게 시계를 준 자가 있다."
연이는 숨을 멈췄다.
모카도, 치즈도, 크림도, 루나도 일제히 네오를 보았다.
치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청토끼가 시작이 아니었어요?"
네오는 낮게 대답했다.
"아니다."
루나가 회중시계를 봉인하던 손을 멈췄다.
"이 시계 안쪽에 인성의 힘이 남아 있어. 너무 강해. 청토끼 같은 그릇이 가질 만한 힘이 아니야."
연이는 깨진 시계를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청토끼가 강해서 그 모든 일을 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약한 토끼였다.
주제넘은 욕망을 품은 약한 토끼.
그런 그에게 누군가 회중시계를 줬다.
기록을 먹이고, 해석을 주입하고, 권한을 빌려주는 인성의 도구.
그래서 그는 운세 세계를 흔들 수 있었다.
연이는 천천히 앞발을 쥐었다.
"그럼 진짜 적은 따로 있다는 거네."
하늘에서 검은 별 하나가 다시 흔들렸다.
자미두수 성궁 중심에서 보랏빛 자미성이 위태롭게 깜빡였다.
그 빛은 전보다 더 약해져 있었다.
네오가 낮게 말했다.
"그자가 다음으로 노리는 건 성궁의 중심이다."
연이는 하늘을 보았다.
명궁.
자미성.
별의 궁전.
이제 청토끼는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 있는 자가, 하늘 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연이는 목의 통증을 누르며 일어섰다.
"좋아."
모카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진 않은데."
연이는 하늘의 보랏빛 별을 똑바로 보았다.
"가만히 있을 정도는 아니야."
네오가 그녀 옆에 섰다.
루나는 깨진 회중시계를 봉인한 작은 상자를 품에 넣었다.
치즈는 팔찌를 꽉 쥐었다.
크림은 별가루빵 바구니를 다시 들었다.
모카는 가사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하늘 위, 어딘가에서 검은 천구의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흑막이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