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별빛 계단의 첫 번째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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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별빛 계단의 첫 번째 고장
별빛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는 사주의 강이 있었다.
강물 위에는 비겁의 섬, 식신·상관의 섬, 인성의 섬, 재성의 섬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모두가 함께 막아낸 세계.
연이는 그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바로 후회했다.
“어우.”
다리가 짧은 꽃돼지 몸으로 높은 곳을 내려다보는 건 생각보다 무서웠다.
아니, 사실 그냥 무서웠다.
모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연이는 앞발로 계단 가장자리를 꽉 붙잡았다.
“괜찮아. 그냥 내 몸이 고소공포증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을 뿐이야.”
네오가 옆에서 말했다.
“다리가 짧으면 중심이 낮아 안정적이다.”
연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걸 위로라고 한 거야?”
“사실이다.”
“가끔 네 말은 맞아서 더 짜증 나.”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위쪽을 보고 있었다.
별빛 계단의 끝.
그곳에는 거대한 보라색 안개가 있었다.
안개 속으로 점성술의 원형 차트와 자미두수 성궁의 윤곽이 겹쳐 보였다.
열두 별자리의 고리.
열두 궁의 문.
행성처럼 떠도는 빛.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쪽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검은 고리들.
아직 이름을 모르는 장치.
흑막이 움직이는 도구.
그것은 멀리 있었지만, 존재감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왔다.
둥.
고리가 한 번 울리자 별빛 계단 전체가 흔들렸다.
연이는 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야! 계단이 흔들리잖아!”
크림도 바구니를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별가루빵 쏟아질 뻔했어요!”
치즈는 안경을 고쳐 쓰며 계단 위쪽을 보았다.
“이건 계약 반응이 아니에요.”
“그건 이제 알겠어.”
연이가 말했다.
“이제 돈 냄새는 좀 덜 나.”
치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훨씬 위험해요. 저건 비용을 붙이는 게 아니라, 구조를 움직이고 있어요.”
루나가 류트의 줄을 살짝 튕겼다.
딩.
소리가 계단 위로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너무 커져서 귀를 찔렀고.
하나는 너무 작아져 사라졌다.
루나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힘이 균등하게 흐르지 않아.”
모카도 귀를 눌렀다.
“별소리가 찢어져요. 위쪽에서 누가 소리 크기를 마음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느낌이에요.”
연이는 하늘의 검은 고리를 보았다.
“그러니까 저게 별의 볼륨 조절기를 잡고 있다는 거네.”
네오가 말했다.
“가볍게 말하면 그렇다.”
“그럼 진지하게 말하면?”
“사람의 운 안에 들어 있는 힘의 비율을 외부에서 교란하는 중이다.”
연이는 잠시 생각했다.
“가볍게 말한 게 더 이해 잘 됐어.”
네오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계단 앞쪽에 첫 번째 문이 나타났다.
별빛으로 만들어진 문이었다.
문 위에는 황금빛 태양 문양이 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보라색 궁 문양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연이는 바로 알아봤다.
“태양.”
루나가 말했다.
“점성술의 태양.”
치즈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자미두수 쪽 태양성 반응도 섞여 있어요.”
문 아래쪽에는 작은 방 이름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태양이랑 관록궁이 같이 엮인 거야?”
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의 빛이 관록궁으로 과하게 쏠리고 있다.”
“쉽게.”
“자기 중심이 성과 증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연이는 바로 민지를 떠올렸다.
쉬면 뒤처질 것 같다고 말하던 얼굴.
계획표를 빽빽하게 채우던 손.
“현실에서 봤던 거랑 같네.”
문이 열렸다.
그 안쪽에는 별빛으로 된 회랑이 있었다.
회랑 벽에는 수많은 작은 창이 달려 있었다.
창마다 다른 사람의 작은 우주가 보였다.
현실의 사람들.
운세 세계 주민들.
각자 자기 안의 태양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태양들이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관록궁처럼 보이는 높은 탑 쪽으로.
성과.
증명.
이름.
결과.
“와.”
모카가 작게 말했다.
“다들 너무 밝아요.”
크림이 바구니를 안고 몸을 움츠렸다.
“밝은데 따뜻하지 않아요.”
연이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회랑 안의 태양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뜨겁고 건조했다.
오래 있으면 피부가 아니라 마음이 탈 것 같은 빛.
그때 회랑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더 보여줘.”
“더 증명해.”
“멈추면 사라진다.”
목소리들은 사람들의 작은 우주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현실의 도서관에서 무리한 계획표를 쓰고 있었다.
어떤 운세 세계 주민은 식신·상관의 섬에서 계속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그 주민은 중얼거렸다.
“내가 멈추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을 거야.”
연이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안 돼.”
그녀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태양 문양이 갑자기 커졌다.
회랑 전체가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찼다.
모카가 비명을 질렀다.
“귀가 아니라 눈이 아픈 소리예요!”
크림은 바구니를 품에 안고 주저앉았다.
“빵이 말라가요!”
치즈는 유리 조각으로 빛을 비춰보려 했지만, 유리 조각이 금방 뜨거워졌다.
“너무 강해요. 이건 단순한 태양 과증폭이 아니에요. 관록궁까지 같이 끌려가고 있어요!”
루나가 류트를 들어 올렸다.
“내가 낮춰볼게.”
그녀가 낮은 음을 켰다.
둥.
부드러운 소리가 회랑을 채웠다.
하지만 태양빛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루나의 음이 빛에 타들어갔다.
류트 줄 하나가 툭 끊어졌다.
루나가 작게 숨을 삼켰다.
“안 돼. 너무 세.”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내가 할게.”
네오가 바로 말했다.
“무작정 외치지 마라.”
연이는 멈췄다.
“왜?”
“태양을 부정하면 안 된다. 태양은 필요한 별이다.”
“그럼?”
“방향을 돌려야 한다.”
연이는 회랑 안쪽을 보았다.
태양빛은 관록궁의 탑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성과를 내는 곳.
세상에 자기 역할을 드러내는 곳.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전부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태양은 중심이어야 한다.
관록궁은 역할을 하는 방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태양이 관록궁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연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태양은 관록궁만 비추는 별이 아니야.”
그녀의 머리 위 꽃이 빛났다.
“내가 나를 잃지 않게 하는 중심이야.”
빛이 잠시 흔들렸다.
회랑 안의 목소리들이 작아졌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연이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관록궁은 나를 증명하라고 몰아붙이는 방이 아니야.”
그녀는 민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리한 계획표를 지우던 손.
“내가 세상에서 내 역할을 해보는 방이지.”
그 순간 乙亥의 뿌리가 연이 발밑에서 자라났다.
뿌리는 태양빛을 막지 않았다.
대신 그 빛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땅에 닿게 했다.
흔들리던 태양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치즈가 눈을 크게 떴다.
“빛이 흐름을 되찾고 있어요!”
루나도 끊어진 류트 줄을 붙잡은 채 말했다.
“태양을 꺼버린 게 아니라, 중심으로 돌려보내고 있어.”
연이는 회랑 안쪽을 향해 외쳤다.
“빛나는 건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야!”
목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빛나는 거야!”
쾅!
관록궁의 탑으로 빨려 들어가던 태양빛 일부가 되돌아왔다.
회랑 중앙에 작은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크기는 여전히 컸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을 태우지 않았다.
창 안의 사람들도 조금씩 멈췄다.
계획표를 쓰던 학생은 펜을 내려놓았다.
노래를 계속 만들던 주민은 드디어 숨을 내쉬었다.
“아…… 배고프다.”
크림이 바로 외쳤다.
“그럼 빵 드세요!”
연이가 돌아봤다.
“크림, 지금 거기까지 들리진 않을걸.”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요.”
모카가 웃었다.
“빵의 진심은 멀리 가요.”
네오가 낮게 말했다.
“헛소리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회랑 문 위의 태양 문양이 조금 안정되었다.
그러자 아래쪽에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연이는 그 글자를 보며 숨을 내쉬었다.
“좋아.”
하지만 곧바로 회랑이 다시 흔들렸다.
태양 문이 안정되자, 반대편에서 은빛 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달이었다.
하지만 밝아지는 게 아니었다.
꺼지고 있었다.
문 위에 떠오른 문양은 반쯤 사라진 달.
그 아래에는 자미두수의 태음성 문양과 복덕궁의 문패가 함께 흔들렸다.
모카의 얼굴이 굳었다.
“저쪽 소리는 거의 안 들려요.”
크림이 빵 바구니를 열었다.
그 안의 별가루빵들이 조금씩 식고 있었다.
“아까보다 차가워졌어요.”
연이는 문을 바라봤다.
태양 과증폭은 시끄러웠다.
달 감쇠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더 무서웠다.
네오가 말했다.
“태양을 안정시켰으니 균형이 반대편으로 밀렸다.”
연이는 그를 보았다.
“그러니까 하나 고치면 다음 게 흔들리는 거야?”
“지금 장치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진짜 악질이네.”
치즈가 말했다.
“이건 저 장치 전체의 조율을 멈추기 전까지 계속 반복될 거예요.”
루나가 끊어진 류트 줄을 다시 묶으며 말했다.
“그래도 방금 우리가 한 건 의미 있어. 태양의 길을 찾았잖아.”
연이는 은빛 문을 보았다.
“그럼 다음은 달의 길.”
문이 열렸다.
안쪽은 어두웠다.
무섭게 어둡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했다.
편안해야 할 어둠인데, 비어 있었다.
연이는 한 걸음 내딛으려 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연이는 눈을 깜빡였다.
“감정 기록?”
모카가 노트를 펼쳤다.
“제가 적을게요.”
치즈가 말했다.
“아니요. 이번엔 연이님이 직접 가지고 있어야 해요.”
루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달은 남이 대신 느낄 수 없어.”
연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자기 노트를 꺼냈다.
현실에서 적어온 노트.
앞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연이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오가 그녀 옆에 섰다.
“천천히 가라.”
연이는 그를 흘깃 봤다.
“이번에도 같이?”
“약속했다.”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든든했다.
연이는 은빛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주변 소리가 사라졌다.
모카의 숨소리도.
크림의 바구니 소리도.
치즈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도.
루나의 류트 소리도.
네오의 발소리도.
전부 멀어졌다.
연이는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혼자인지도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어둠은 차갑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좋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고.
그냥 비어 있었다.
연이는 노트를 펼치려 했다.
그런데 앞발이 느리게 움직였다.
생각도 느려졌다.
“이게…… 달이 약해진 거구나.”
목소리도 작게 흩어졌다.
문득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왜 여기 왔지?
뭘 해야 했지?
누가 기다리고 있었지?
그 순간 아주 희미하게, 노트 사이에서 별가루빵 냄새가 났다.
따뜻한 냄새.
조금 탄 냄새.
크림이 울먹이며 건네던 얼굴.
그리고 민지와 나눠 먹던 초코 스콘.
연이는 가까스로 노트를 펼쳤다.
첫 줄.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아주 작은 물결이 마음속에 일었다.
작았다.
하지만 있었다.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달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말했다.
“내가 약해졌다는 증거가 아니야.”
어둠이 흔들렸다.
“내 마음이 쉬었다가 다시 움직이게 해주는 리듬이야.”
멀리서 은빛이 깜빡였다.
연이는 한 걸음 더 나갔다.
“복덕궁은 비어 있는 방이 아니야.”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다.
방학 첫날.
햇빛.
도서관 앞 벤치.
네오가 없어서 이상하게 비어 있던 자리.
그리고 무릎 위에 내려앉았던 흰 털.
연이는 그 기억을 붙잡았다.
“복덕궁은…… 마음이 다시 숨 쉬는 방이야.”
은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잘하고 있다.”
네오의 목소리였다.
연이는 눈을 돌렸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렸다.
이번엔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어둠이 조금 덜 비어 보였다.
연이는 작게 웃었다.
“좀 더 빨리 말하지.”
“너무 빨리 말하면 네 감정인지 내 말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그 와중에 교육적이네.”
“사실이다.”
연이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 웃음이 나오자, 달빛 회랑에 작은 은빛 길이 생겼다.
아주 좁은 길.
하지만 분명한 길.
뒤쪽에서 모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소리 돌아와요!”
크림의 목소리도 들렸다.
“빵이 다시 따뜻해져요!”
치즈의 목소리.
“복덕궁 반응 회복 중!”
루나의 류트 소리.
딩.
이번엔 부드럽게 울렸다.
연이는 은빛 길 위에 섰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달은 여전히 희미했다.
하지만 꺼지지 않았다.
연이는 그 글자를 보고 숨을 내쉬었다.
“둘째 문도 통과.”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회랑 전체가 뒤틀렸다.
태양 문과 달 문이 동시에 흔들렸다.
두 문 사이에 검은 고리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고리는 천천히 회전했다.
위쪽에는 작은 태양.
아래쪽에는 작은 달.
양쪽을 동시에 잡고 있었다.
연이는 몸을 굳혔다.
“저게…….”
네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직 가까이 가지 마라.”
검은 고리는 이름 없는 장치의 일부였다.
그것은 태양을 과하게 키우고, 달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두 힘의 균형을 동시에 흔들고 있었다.
고리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중심이 강해지면 마음은 약해진다.”
연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야?”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은 고리가 한 번 더 돌았다.
둥.
태양 문이 다시 뜨거워지고, 달 문이 다시 어두워졌다.
네오가 앞에 섰다.
“아직 본체가 아니다.”
연이는 고리를 노려봤다.
“그럼 일부?”
“그렇다.”
“그럼 일부부터 맞춰야겠네.”
연이는 노트를 꽉 붙잡았다.
태양.
달.
중심.
마음.
성과.
휴식.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 고리는 수성.
그다음은 금성.
그다음은 토성.
또 자미두수의 다른 성궁들.
연이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말했다.
“와. 방학 커리큘럼 빡세다.”
네오가 말했다.
“불평은 나중에 해라.”
“불평하면서도 할 거야.”
연이는 태양 문과 달 문 사이에 섰다.
검은 고리가 다시 울렸다.
별의 조율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