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태양과 달 사이에서
Code Destiny · 4,753자
제49화. 태양과 달 사이에서
검은 고리가 태양 문과 달 문 사이에 떠올랐다.
처음엔 손바닥만 했다.
하지만 한 번 울릴 때마다 커졌다.
둥.
고리가 넓어졌다.
둥.
태양 문이 불처럼 달아올랐다.
둥.
달 문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꺼졌다.
연이는 태양 문과 달 문 사이에 서 있었다.
짧은 꽃돼지 다리.
작은 앞발.
머리 위에 핀 꽃.
누가 봐도 전투용 몸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바로 그 몸뿐이었다.
연이는 앞발로 노트를 꽉 붙잡았다.
“좋아.”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도망치지 않았다.
“태양은 너무 세고, 달은 너무 약하다.”
네오가 옆에 섰다.
금빛 갈기가 낮게 타올랐다.
“검은 고리가 두 힘을 동시에 잡고 있다.”
“그러니까 저걸 없애면 되는 거지?”
“부수면 안 된다.”
연이가 그를 쳐다봤다.
“전투 시작하자마자 제일 중요한 걸 막네.”
“저건 별의 힘을 잇는 고리다. 부수면 태양과 달의 길이 같이 찢어진다.”
“그럼?”
네오의 눈이 고리를 향했다.
“돌려놓아야 한다.”
연이는 검은 고리를 보았다.
고리는 천천히 돌고 있었다.
그 안쪽에는 작은 태양과 작은 달이 박혀 있었다.
태양 쪽은 너무 뜨거웠다.
달 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고리가 한 번 더 돌았다.
이번에는 태양이 위로 치솟고, 달이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태양 문에서 불빛이 폭발했다.
콰아아아!
금빛이 아니라 흰빛에 가까운 빛이었다.
너무 강한 빛.
그 빛은 칼날처럼 계단을 긁으며 연이를 향해 쏟아졌다.
“연이!”
네오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금빛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촤악!
태양빛 칼날이 둘로 갈라졌다.
하지만 잘린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수십 개의 얇은 광선으로 갈라져 연이를 향해 다시 휘어졌다.
“이거 빛이 왜 추적해!”
연이는 몸을 낮췄다.
짧은 다리로 연잎처럼 생긴 별빛 발판 위를 굴렀다.
통.
통통.
자존심은 아팠지만 피했다.
빛줄기 몇 개가 머리 위 꽃잎을 스쳤다.
꽃잎 끝이 살짝 그을렸다.
“야! 내 꽃!”
크림이 비명을 질렀다.
“연이님 꽃 타요!”
모카가 귀를 막으며 외쳤다.
“태양 소리가 너무 커요! 계속 ‘더 보여줘, 더 증명해’라고 밀어붙여요!”
루나는 류트를 들어 낮은 음을 냈다.
둥.
음이 태양빛을 감싸려 했지만, 빛이 너무 뜨거웠다.
루나의 음이 중간에서 말라붙었다.
“안 돼. 달이 너무 약해서 균형음이 안 만들어져.”
치즈는 유리 조각으로 검은 고리를 비춰보았다.
조각 안에 작은 글자가 흔들렸다.
“태양만 낮추면 안 돼요!”
치즈가 외쳤다.
“달을 같이 올려야 해요! 아니면 태양빛을 줄이는 순간 전체가 암흑으로 떨어질 수 있어요!”
연이는 바닥을 굴러 피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럼 둘 다 동시에 해야 한다는 거네?”
네오가 다시 광선을 베어냈다.
쨍!
빛이 금빛 발톱에 부딪혀 별가루처럼 흩어졌다.
“그래.”
“그걸 왜 이렇게 담담하게 말해!”
“당황해도 쉬워지지 않는다.”
“그건 맞는데 짜증 나!”
그때 달 문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아니, 바람이 아니었다.
소리 없는 공백이었다.
달빛이 약해지자 회랑의 색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크림의 별가루빵이 차갑게 굳었다.
모카의 귀가 축 처졌다.
루나의 류트 줄이 소리를 잃었다.
치즈가 유리 조각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음이…… 가라앉아요.”
치즈가 작게 말했다.
“아니,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모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소리가 없어요. 너무 없어요.”
연이의 몸도 느려졌다.
분명 태양빛은 뜨거운데,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무서워야 하는데 무서움도 멀어졌다.
급해야 하는데 급한 감각도 흐려졌다.
왜 싸워야 했지.
뭘 되찾으려고 했지.
연이는 멍하니 검은 고리를 바라봤다.
태양은 너무 밝고, 달은 너무 약했다.
뜨거운 빛과 텅 빈 어둠이 동시에 그녀를 잡아당겼다.
머리 위 꽃이 흔들렸다.
빛은 타오르고 있는데, 뿌리는 얼어붙는 느낌.
네오가 연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연이!”
그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노트를 봐라.”
연이는 멍한 눈으로 말했다.
“노트……?”
“네가 적은 문장.”
“문장…….”
네오가 연이 앞에 서서 태양빛을 막았다.
금빛 발톱이 계속 빛을 베었다.
하지만 그도 밀리고 있었다.
태양빛은 너무 강했고, 달의 빈자리는 모든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네오의 발밑 별빛 계단이 갈라졌다.
쨍!
그는 이를 드러냈다.
“지금 네가 해야 한다.”
연이는 앞발로 품을 더듬었다.
노트가 있었다.
현실에서 적어온 노트.
그녀는 힘겹게 펼쳤다.
첫 장.
그 아래.
다음 장.
연이는 그 문장을 보았다.
눈이 조금 뜨였다.
태양은 증명이 아니다.
달은 비어 있음이 아니다.
중심과 리듬.
빛과 숨.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된다.
연이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목이 아직 아팠다.
하지만 말했다.
“태양.”
태양 문이 번쩍였다.
불빛이 다시 몰려왔다.
연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너는 남보다 더 밝으라고 타오르는 별이 아니야.”
광선이 그녀의 앞까지 날아왔다.
네오가 뛰려 했다.
하지만 연이가 앞발을 들었다.
“가만히 있어.”
네오가 멈췄다.
연이의 머리 위 꽃에서 丁未의 불씨가 피어났다.
따뜻한 불.
무대 위 첫 줄을 밝혔던 작은 불.
그 불씨가 태양빛 앞에 섰다.
거대한 태양빛 앞에서 너무 작았다.
하지만 꺼지지 않았다.
연이는 말했다.
“너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해주는 중심이야.”
태양빛이 흔들렸다.
거대한 광선이 방향을 잃고 갈라졌다.
이번엔 네오의 발톱에 베인 것이 아니었다.
연이의 말에 스스로 힘이 풀렸다.
모카가 눈을 번쩍 떴다.
“태양 소리 낮아져요!”
루나가 바로 류트를 켰다.
이번엔 음이 타지 않았다.
둥.
낮은 소리가 태양빛 아래로 깔렸다.
연이는 바로 달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둠이 조용히 밀려왔다.
달의 빈자리가 그녀의 목소리까지 삼키려 했다.
연이는 앞발로 노트를 더 단단히 붙잡았다.
“달.”
달 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의 꺼져 있었다.
연이는 한 걸음 내디뎠다.
“너는 내가 약해졌다는 증거가 아니야.”
은빛 현이 연이의 손목에서 떨렸다.
딩.
아주 작은 소리.
그러나 어둠 속에서 분명하게 울렸다.
“너는 내 마음이 밤에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리듬이야.”
달 문 안쪽에서 희미한 물결이 일었다.
크림이 바구니를 열었다.
차갑게 굳었던 별가루빵 하나가 아주 조금 말랑해졌다.
“돌아와요!”
크림이 외쳤다.
“반죽도 밤새 쉬어야 다음 날 부풀어요!”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덕궁은 비어 있는 방이 아니야.”
달 문 아래쪽에 흐릿한 문패가 떠올랐다.
“마음이 다시 숨 쉬는 방이야.”
그 순간 연이의 가슴 안쪽에서 壬午의 물빛이 퍼졌다.
검푸른 물 위에 한낮의 빛.
그 물빛은 달 문을 향해 흐르더니, 꺼져가던 은빛을 조심스럽게 받쳐 올렸다.
달빛이 조금 밝아졌다.
아직 약했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치즈가 외쳤다.
“달 감쇠 회복 중! 그런데 고리가 다시 움직여요!”
검은 고리가 거칠게 회전했다.
태양과 달이 동시에 흔들렸다.
이번에는 고리가 두 힘을 억지로 바꾸려 했다.
태양빛을 달 문 쪽으로 밀어 넣고, 달빛을 태양 문 쪽으로 끌어올렸다.
위상 교란.
태양은 감정을 태우고, 달은 중심을 흐리게 만들기 시작했다.
연이의 머릿속이 흔들렸다.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공허가 동시에 밀려왔다.
“와…… 이건 진짜 반칙이지.”
네오가 금빛 발톱을 세웠다.
“고리의 축을 잡아야 한다.”
“축?”
치즈가 유리 조각으로 고리를 비췄다.
“가운데요! 태양과 달을 직접 건드리는 게 아니라, 둘을 연결하는 중심축이 있어요!”
모카가 귀를 세웠다.
“거기서 소리가 나요. 둥, 둥, 둥. 심장 소리처럼!”
루나가 외쳤다.
“그 축이 리듬을 틀고 있어!”
연이는 검은 고리 중앙을 보았다.
작은 검은 축.
거기서 태양과 달을 동시에 잡아당기고 있었다.
네오가 자세를 낮췄다.
“내가 길을 연다.”
그의 몸이 금빛으로 변했다.
작은 사자였지만, 발밑의 별빛이 그를 중심으로 갈라졌다.
금빛 사자의 윤곽이 뒤쪽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완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날카로웠다.
네오는 고리를 향해 뛰었다.
검은 고리에서 태양빛 칼날이 쏟아졌다.
네오는 허공을 밟듯 뛰어올라 첫 번째 빛을 베었다.
촤악!
두 번째 빛이 그의 옆구리를 스쳤다.
금빛 털이 흩어졌다.
연이가 소리쳤다.
“네오!”
“보지 마라. 네 쪽을 해라.”
네오가 차갑게 말했다.
그는 계속 앞으로 갔다.
빛이 쏟아지고, 어둠이 발목을 잡았다.
네오의 움직임이 한순간 느려졌다.
그 순간 검은 고리에서 달의 공백이 튀어나와 그의 몸을 휘감았다.
네오의 금빛이 잠깐 흐려졌다.
연이는 본능적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모카가 외쳤다.
“연이님! 축!”
연이는 멈췄다.
그래.
네오가 길을 열고 있다.
자신이 해야 할 건 중심축이다.
연이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
짧다.
작다.
하지만 그 안에 네 기둥이 있었다.
乙亥.
丁未.
壬午.
辛未.
“태양은 중심.”
丁未의 불씨가 빛났다.
“달은 리듬.”
壬午의 물빛이 흐렸다.
“둘은 서로를 잡아먹는 게 아니야.”
乙亥의 뿌리가 별빛 계단 아래로 뻗었다.
“빛은 마음을 비추고, 마음은 빛이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
辛未의 흰 칼날이 앞발 끝에 맺혔다.
이번엔 베는 칼날이 아니었다.
얇고 정확한 칼.
잘라내기보다, 엉킨 실을 풀어내는 칼날.
연이는 검은 축을 향해 외쳤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
네오가 마지막 빛을 베고 길을 열었다.
“지금!”
연이는 뛰었다.
짧은 다리로.
그러나 이번엔 통통 튀지 않았다.
별빛 계단이 그녀의 발밑에서 리듬을 맞췄다.
통.
통.
통.
연이는 검은 고리 중앙으로 날아올랐다.
앞발 끝의 흰 칼날이 축에 닿았다.
쨍!
고리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금속이 울었다.
태양과 달이 동시에 흔들렸다.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태양은 위로.”
불빛이 중심으로 돌아갔다.
“달은 아래로.”
은빛이 리듬으로 돌아갔다.
“중심은 태우지 않고.”
태양빛이 부드러워졌다.
“리듬은 꺼지지 않는다.”
달빛이 다시 살아났다.
검은 축에 금이 갔다.
쨍!
고리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둥.
태양 문과 달 문 사이에 새로운 빛이 생겼다.
금빛과 은빛이 섞인 길.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았다.
적당히 밝고, 적당히 고요한 길.
루나가 류트를 켰다.
이번에는 소리가 완전했다.
딩.
둥.
모카가 눈을 감았다.
“소리 맞아요. 태양이랑 달이 싸우지 않아요.”
크림의 별가루빵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치즈의 유리 조각도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검은 고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심축이 멈췄다.
고리 일부가 깨져 떨어졌다.
연이는 별빛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통통 튀지도 못했다.
그냥 엎어졌다.
“……끝?”
네오가 옆에 착지했다.
그의 갈기 끝이 조금 그을려 있었다.
연이는 힘없이 그를 보았다.
“너 괜찮아?”
네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기능에는 문제없다.”
“그 말은 몸은 문제 있다는 뜻 아니야?”
“불필요한 해석이다.”
“또 말 돌리지.”
네오는 시선을 피했다.
연이는 피식 웃으려다 목이 아파서 멈췄다.
모카가 달려왔다.
“연이님! 대박이었어요!”
크림도 뛰어왔다.
“별가루빵 다시 말랑해졌어요!”
치즈는 깨진 고리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이건 이름 모를 장치의 일부예요. 구조를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루나는 위쪽을 보았다.
태양과 달의 길 너머.
더 높은 곳에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문에는 작은 날개 달린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수성.
그리고 그 옆에 자미두수의 거문성처럼 보이는 어두운 별이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루나가 낮게 말했다.
“다음은 말의 방이야.”
모카의 귀가 움찔했다.
“소리 엄청 복잡해요.”
연이는 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봤다.
“수성 과증폭.”
그녀가 중얼거렸다.
“거문성 공명 이상.”
네오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쉴 건가.”
연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현명하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무섭네.”
“곧 더 무서운 곳으로 갈 거니까.”
연이는 수성의 문을 바라봤다.
문 안쪽에서는 이미 말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수천 개의 목소리.
질문.
반박.
변명.
의심.
설명.
그 모든 말이 한꺼번에 얽혀 있었다.
연이는 한숨을 쉬었다.
“방학인데 말싸움 던전이라니.”
모카가 가사 노트를 꼭 끌어안았다.
“이번엔 제가 꼭 필요할 것 같아요.”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엔 네 귀가 핵심이야.”
수성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말들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별빛 계단 위로 새로운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