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별 없는 왕
Code Destiny · 4,852자
제54화. 별 없는 왕
복덕궁의 문이 닫혔다.
쿵.
그 소리는 컸지만, 이상하게 울림이 없었다.
연이는 바닥에 엎어진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빛 방.
달빛 호수.
부드러운 담요.
흔들의자.
따뜻한 찻잔.
별빛이 내려앉은 침대.
쉬기에 완벽한 공간.
그런데 아무것도 따뜻하지 않았다.
찻잔에서는 김이 나고 있었지만, 손을 대면 차가울 것 같았다.
담요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덮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침대는 푹신해 보였지만, 누우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복덕궁 맞아?”
루나가 류트를 품에 안고 방 안을 둘러봤다.
“겉모습은 맞아.”
치즈가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유리 조각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치즈의 얼굴이 굳었다.
“이상해요. 복덕궁이면 마음이 쉬는 흐름이 보여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요.”
모카는 귀를 세웠다.
몇 초 뒤, 그의 귀가 축 처졌다.
“소리도 없어요.”
“아예?”
“네. 쉬는 소리도, 숨 고르는 소리도, 잠드는 소리도 없어요.”
크림이 바구니에서 별가루빵 하나를 꺼냈다.
빵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가 울먹였다.
“이건 식은 게 아니에요.”
“그럼?”
크림은 빵을 두 손으로 눌렀다.
빵은 부서지지 않았다.
마치 돌처럼 딱딱했다.
“마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졌어요.”
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달빛 호수가 흔들렸다.
잔물결 하나 없이 조용했던 호수 한가운데에 검은 점이 생겼다.
작은 점.
그 점이 천천히 커졌다.
연이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저거 뭐야?”
네오가 연이 앞에 섰다.
금빛 갈기가 낮게 타올랐다.
“물러서라.”
“또?”
“이번 건 다르다.”
그때 달빛 호수가 갈라졌다.
은빛 물이 양옆으로 밀려났다.
호수 아래에는 바닥이 없었다.
끝없는 검은 하늘.
별 하나 없는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의자가 떠올랐다.
검은 의자.
긴 등받이.
팔걸이에 새겨진 별 문양.
의자 위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검은 관측자.
얼굴 없는 어둠.
창백한 손.
별 모양 반지.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직접 나오네.”
검은 관측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직접?”
그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아직 그렇게 생각하는군.”
연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검은 관측자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가락 끝에 검은 고리들이 나타났다.
그동안 하늘에서 보았던 검은 천문 장치.
태양을 과하게 키우고.
달을 꺼뜨리고.
수성을 폭주시켰던 그 장치.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고리들이 관측자의 손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반대로.
그 고리들이 관측자의 몸을 묶고 있었다.
모카가 숨을 삼켰다.
“저 사람…… 조종하는 게 아니에요.”
연이가 물었다.
“뭐라고?”
모카의 귀가 떨렸다.
“저 사람도 소리가 묶여 있어요. 말은 저기서 나오는데, 진짜 소리는 더 아래에서 나요.”
그 순간 검은 관측자의 얼굴에 금이 갔다.
얼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원래 없었지만, 어둠의 표면이 깨졌다.
쩍.
쩌적.
그 안에서 별빛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완전한 공백.
별도, 빛도, 그림자도 없는 구멍.
검은 관측자가 웃었다.
아니.
그를 통해 무언가가 웃었다.
“관측자는 눈일 뿐이다.”
목소리가 바뀌었다.
더 낮고.
더 오래되고.
더 비어 있었다.
“눈을 흑막이라 생각하다니, 아직 귀엽군.”
연이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너…… 검은 관측자가 아니야?”
의자의 등받이가 갈라졌다.
그 안에서 거대한 검은 원이 떠올랐다.
별자리의 원도 아니고, 자미두수의 성궁도 아니었다.
그것은 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난 구멍이었다.
어둠이 아니라.
별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
루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성…….”
네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이름을 부르지 마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원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나는 별이 아닌 것.”
“너희가 성좌를 세우기 전부터 있던 자리.”
“무성.”
그 이름이 방 안에 울리자 복덕궁의 은빛 달이 완전히 꺼졌다.
찰나.
연이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두려움도.
분노도.
놀람도.
전부 사라졌다.
방 안의 모두가 멈췄다.
모카의 귀가 떨어지듯 축 처졌고, 치즈의 손에서 유리 조각이 빠져나갔다.
크림의 바구니가 바닥에 닿았다.
루나의 류트 줄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네오의 금빛 갈기조차 흐려졌다.
무성이 말했다.
“이것이 완전한 평온이다.”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끔찍했다.
“태양이 너무 강하면 사람은 타오른다.”
“달이 너무 강하면 사람은 울음에 잠긴다.”
“수성이 너무 강하면 말이 끝나지 않는다.”
“금성이 너무 강하면 마음은 끌림에 찢긴다.”
“토성이 너무 강하면 삶은 감옥이 된다.”
검은 원이 천천히 커졌다.
“그러니 별을 꺼라.”
“균형을 찾는 척하지 마라.”
“별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연이는 앞발을 움직이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공격이 아니었다.
무성은 베거나 찌르지 않았다.
그냥 마음의 불을 꺼버렸다.
싸우고 싶다는 감각.
지켜야 한다는 생각.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
그 모든 것을 아주 조용히 지워버렸다.
연이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
힘들지 않네.
무섭지도 않네.
아프지도 않네.
그럼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 순간.
아주 희미한 냄새가 났다.
탄 빵 냄새.
별가루빵.
크림이 울먹이며 건네던 빵.
연이의 앞발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냄새는 약했다.
하지만 있었다.
그다음엔 소리가 들렸다.
통.
아주 작은 박자.
모카가 식신·상관의 섬에서 처음 만들었던 박자.
그다음엔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숨이 들어왔다.
아주 작게.
그녀는 자신의 가슴 안쪽을 보았다.
乙亥.
丁未.
壬午.
辛未.
네 기둥의 빛도 꺼져 있었다.
아니.
완전히 꺼진 건 아니었다.
아주 작게 남아 있었다.
점 하나처럼.
연이는 그 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성의 검은 원이 그녀를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쉬어라.”
“비워져라.”
“별이 없는 곳은 편안하다.”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별이 없는 건 편안한 게 아니다.
비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복덕궁에서 배운 걸 떠올렸다.
복덕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이 아니다.
마음이 다시 숨 쉬는 방이다.
쉬는 건 꺼지는 게 아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연이는 목을 쥐어짜듯 말했다.
“틀렸어.”
무성의 검은 원이 잠깐 멈췄다.
“복덕궁은…….”
연이의 머리 위 꽃이 아주 작게 빛났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방이 아니야.”
달빛 호수 한쪽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다시 느낄 수 있게 쉬는 방이야.”
그 순간 크림의 바구니에서 별가루빵 하나가 아주 작게 갈라졌다.
딱.
따뜻한 김이 한 줄기 올라왔다.
크림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빵…….”
그녀는 힘겹게 빵을 집었다.
“계속 치대면 딱딱해져요…….”
크림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방 안에 퍼졌다.
“쉬어야…… 부풀어요.”
달빛 호수에 두 번째 물결이 생겼다.
모카의 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는 힘겹게 발을 굴렀다.
통.
또 한 번.
통.
“박자…….”
모카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너무 조용하면…… 살아 있는지 몰라요.”
세 번째 물결.
치즈가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집었다.
그는 손을 떨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건…… 안전이 아니에요.”
유리 조각에 작은 빛이 비쳤다.
“위험도 없지만…… 선택도 없어요.”
루나의 손가락이 류트 줄에 닿았다.
처음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낮은 음을 냈다.
딩.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달빛 호수가 반응했다.
네오의 갈기가 다시 금빛으로 타올랐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성.”
목소리가 낮고 차가웠다.
“너는 여전히 비겁하군.”
검은 원이 그를 향했다.
“너는 여전히 별을 붙잡고 있군.”
“붙잡는 게 아니다.”
네오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지키는 것이다.”
무성이 낮게 웃었다.
“너에게 그럴 자격이 남아 있나?”
그 말에 네오의 갈기가 흔들렸다.
연이는 그걸 봤다.
무성이 네오를 알고 있다.
그리고 네오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연이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녀는 앞발을 바닥에 디뎠다.
“네오.”
네오가 그녀를 보았다.
“흔들리지 마.”
그 말에 네오의 눈빛이 아주 작게 변했다.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네 기둥의 빛을 하나씩 불렀다.
乙亥.
작은 새싹이 달빛 호수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丁未.
작은 불씨가 빵의 온기를 받아 살아났다.
壬午.
검푸른 물 위로 한낮의 빛이 떠올랐다.
辛未.
흰 칼날이 고요를 찢지 않고, 그 안의 가짜 평온을 가르기 시작했다.
연이는 무성을 똑바로 보았다.
“사람은 별이 너무 강해도 망가지고.”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별이 너무 약해도 망가져.”
복덕궁의 달이 아주 작게 빛났다.
“하지만 별이 아예 없으면.”
연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건 인생이 아니야.”
검은 원이 크게 흔들렸다.
무성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갈라졌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연이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
“나도 몰라.”
그 말에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연이는 웃지 않았다.
“아직 별도 다 모르고, 자미두수도 다 몰라. 벼락치기한 게 전부야.”
무성의 어둠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하나는 알아.”
연이의 머리 위 꽃이 환하게 빛났다.
“사람마다 자기 안의 우주가 있어.”
복덕궁의 호수에 수많은 작은 별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민지의 작은 태양.
카페 사람들의 달.
모카의 소리.
크림의 빵.
치즈의 선택.
루나의 멜로디.
네오의 숨긴 금빛.
“그걸 네가 마음대로 꺼버릴 권리는 없어.”
그 순간 복덕궁의 달빛이 폭발했다.
차갑지 않았다.
눈부시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은빛.
다시 숨 쉴 수 있는 빛.
무성의 검은 원이 뒤로 밀려났다.
그를 감싸고 있던 검은 관측자의 껍데기가 깨지기 시작했다.
쩍.
쩌적.
얼굴 없는 관측자의 형상이 산산이 갈라졌다.
그 안에서 완전한 무성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무성은 이곳에 완전히 들어온 게 아니었다.
복덕궁을 통해 손을 뻗었을 뿐.
네오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금빛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촤아악!
검은 원의 가장자리가 잘려나갔다.
무성이 낮게 울었다.
처음으로 고통 같은 소리였다.
“네오.”
그 목소리는 어둠 속 깊은 곳에서 울렸다.
“네 별도 언젠가 꺼질 것이다.”
네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전에 네 그림자부터 찢겠다.”
연이는 복덕궁의 달빛을 붙잡고 외쳤다.
“지금!”
모카가 박자를 만들었다.
통.
크림이 빵을 던졌다.
따뜻한 별가루가 은빛 호수 위로 퍼졌다.
치즈가 유리 조각으로 검은 원의 남은 경로를 비췄다.
“왼쪽! 저쪽이 빠져나가는 틈이에요!”
루나가 류트를 켰다.
딩!
은빛 음이 검은 원의 뒤를 묶었다.
네오가 뛰었다.
금빛이 검은 원을 가로질렀다.
쨍!
무성의 그림자가 복덕궁에서 튕겨 나갔다.
방 안의 검은 고요가 깨졌다.
은빛 달이 다시 떠올랐다.
호수 위에는 별들이 비쳤다.
연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정말 힘이 빠졌다.
“와…….”
모카가 달려왔다.
“연이님!”
크림도 울먹이며 연이를 붙잡았다.
“무서웠어요!”
치즈는 유리 조각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그건…… 검은 관측자보다 훨씬 깊어요.”
루나는 복덕궁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관측자는 껍데기였어.”
연이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진짜는 무성.”
네오가 아무 말 없이 검은 원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연이는 그를 올려다봤다.
“너는 알고 있었어?”
네오는 잠시 침묵했다.
“의심했다.”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
연이는 이번엔 뭐라고 하지 않았다.
네오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복덕궁의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검은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하지만 가운데 지름길은 이제 사라졌다.
대신 자미성으로 향하는 길이 더 선명해졌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새로운 문이 생겼다.
검은 문.
문 위에는 아무 별도 없었다.
그저 텅 빈 원 하나.
무성의 흔적.
모카가 작게 말했다.
“소리가 안 나요.”
치즈가 말했다.
“하지만 비어 있지는 않아요.”
크림이 빵 바구니를 꼭 안았다.
“차가워요.”
루나는 낮게 말했다.
“이제 흑막이 누군지는 알았어.”
연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은 아직 떨렸다.
하지만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검은 관측자가 아니라.”
그녀는 검은 문을 보았다.
“별 없는 왕.”
네오가 낮게 말했다.
“아직 왕이라 부르기엔 이르다.”
“그럼?”
네오는 천천히 대답했다.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공백.”
연이는 작게 웃었다.
“그거 더 기분 나빠.”
복덕궁의 달빛이 그들을 비췄다.
조용하지만 살아 있는 빛.
연이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
“좋아.”
그녀는 검은 문을 향해 말했다.
“다음엔 네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게.”
검은 문 안쪽에서 아주 낮은 웃음이 들렸다.
그러나 이번엔 연이가 물러서지 않았다.
무성.
별 없는 존재.
사람들의 우주를 꺼버리려는 자.
이제 진짜 적의 이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