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박병하
Code Destiny · 1,580자
제83화. 박병하
실이 풀리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숨소리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노래의 첫 소절 같기도 했다.
풀린 실 안쪽에서 빛이 흘러나와 허공에 글자의 획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획.
희미하게.
두 번째 획.
조금 더 선명하게.
검은 실이 덮으려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
이곳은 숙요의 정원이었다.
무성의 흑천의가 닿지 않는 곳.
세 번째 획이 완성되자, 허공에 온전한 글자 하나가 떠올랐다.
朴.
“박…….”
치즈가 조심스레 읽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획이 이어졌다.
炳.
夏.
세 글자가 나란히 떠올랐다.
빛으로 쓰인 이름.
타래가 낮게 그것을 읽었다.
“박병하.”
정원 전체가 그 이름을 따라 울렸다.
머리 위 스물여덟 개의 매듭이 일제히 아주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네오는, 아니 박병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게 진짜 이름이야?”
모카가 조심스레 물었다.
타래는 실을 조용히 접었다.
“이 실의 첫 매듭에 새겨진 이름이다.”
연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몇 번이고 굴려보았다.
박병하.
박병하.
이상하게 낯설고,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이번엔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박병하.”
그 순간,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정원의 모든 실이 순간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연이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그 소리가 상대에게 들릴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그녀는 앞발을 꼭 쥐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박병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그 짧은 세 음절이 정원 전체보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박병하의 표정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어떤 전투에서도, 어떤 협박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얼굴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부르지 마라.”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그 말에는 예전 같은 단호함이 없었다.
“왜.”
연이가 물었다.
“그거 네 이름이잖아.”
“그 이름은…….”
박병하가 시선을 떨궜다.
“오래전에 버린 이름이다.”
“버렸어도 네 거잖아.”
연이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나는 네 이름을 뜯어내려던 거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부르고 싶었어.”
박병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눈빛은 평소의 건조한 보호자의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오래 참아온 사람의 눈이었다.
“……그 이름, 아무도 부른 적 없다.”
그가 낮게 말했다.
“여기 온 뒤로.”
연이는 숨을 삼켰다.
“얼마나 됐는데?”
“모른다.”
박병하가 짧게 답했다.
“여기는 시간이 그렇게 흐르지 않아서.”
타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긴 시간이다.”
“외로울 만큼.”
박병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모카가 코를 훌쩍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주 불러줘야겠다.”
크림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병하 오빠.”
박병하가 살짝 당황한 얼굴로 크림을 보았다.
“오빠는 아니다.”
“그럼 병하님?”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돼.”
연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박병하가 그녀를 보았다.
“……너부터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어, 그건…….”
연이가 말을 더듬었다.
팀원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참았다.
타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낮게 말했다.
“이름 하나를 되찾았다.”
“하지만 실은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
정원의 공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박병하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연이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더 있어?”
타래는 대답 대신 손끝으로 실의 남은 부분을 가리켰다.
풀리다 만 실 끝에, 아직 어두운 매듭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름 다음엔.”
타래가 말했다.
“이유가 나온다.”
박병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번엔 그리움이 아니라, 두려움에 가까운 흔들림이었다.
“그건.”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직접 말하겠다.”
타래는 실을 쥔 손을 멈췄다.
“정원의 방식이 아니라?”
“그래.”
박병하가 연이를 보았다.
“그건 네가 실로 듣는 게 아니라, 나한테서 들어야 한다.”
연이는 숨을 멈췄다.
그의 눈빛에서,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