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읽히지 않는 이름의 진짜 뜻
Code Destiny · 1,565자
제84화. 읽히지 않는 이름의 진짜 뜻
박병하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는 듯했다.
정원의 실들이 그의 침묵에 맞춰 낮게 흔들렸다.
“연이.”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다.”
“그건 알아.”
연이가 조용히 답했다.
“미래에서 왔다는 것도.”
박병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래에서 왔다.”
“얼마나 먼 미래인데?”
“그건 중요하지 않다.”
박병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중요한 건, 내가 거기서 뭘 봤는가다.”
타래가 조용히 손을 들어 정원 한쪽을 가리켰다.
허공에 물결이 일듯 빛이 번지더니, 흐릿한 장면 하나가 맺혔다.
책 한 권.
낡고 오래된 책.
표지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흐릿했다.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글자가 없었다.
“저게 뭐야.”
연이가 물었다.
“기록.”
박병하가 낮게 답했다.
“모든 사람에겐 자기 기록이 있다. 사주, 별자리, 이 정원의 실…… 형태는 달라도, 결국 다 같은 것.”
“누군가 존재했다는 증거.”
장면 속 책이 서서히 넘어갔다.
페이지마다 글자가 옅어지고 있었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점점 더 많은 페이지가 하얗게 비어갔다.
“이게 누구 거야?”
연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박병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피했다.
“말해.”
연이가 다그쳤다.
“박병하.”
그가 눈을 감았다.
“……너다.”
정원 전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연이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
“내가 온 시간에서.”
박병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너는, 완전히 사라진다.”
장면 속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완전히 하얗게 비었다.
이름이 있던 표지마저 빛이 바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라진다는 게 무슨 말이야.”
연이가 물었다.
목소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자꾸 흔들렸다.
“죽는다는 거야?”
“아니.”
박병하가 고개를 저었다.
“죽음보다 더한 것이다.”
“기억되지도 않는다.”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읽을 수 없게 된다.”
정원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연이는 뒷걸음질쳤다.
“…그게, 읽히지 않는 이름이라는 거야?”
박병하가 그녀를 보았다.
그 눈에 처음으로 눈물 비슷한 것이 맺혔다.
“그래.”
거울 속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이름은 너에게 위험하다.
그 이름이 열릴수록, 네 운명도 바뀐다.
그때는 그 말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말…….”
연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네가 한 말, 그게 내 얘기였어?”
박병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이름이 열리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내 이름이 열리면, 내가 여기 있는 이유도 드러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연이는 숨을 쉬는 법을 잊은 듯했다.
“내가 본 미래에서.”
박병하가 말을 이었다.
“너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게 아니다. 서서히, 아무도 모르게 지워졌다.”
“사람들은 네가 있었다는 것조차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나는 그걸 막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을 건넜다.”
“그 대가로.”
박병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몸을 잃었다.”
연이의 눈이 커졌다.
“몸을 잃었다는 게…….”
“나는 원래 사람이었다.”
박병하가 말했다.
“지금은 아니다.”
“운명의 세계에서는 이 사자의 모습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흰 고양이로만.”
“내 진짜 몸은, 시간을 건너던 순간에 남겨두고 왔다.”
연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럼…… 검은 비 속의 그 사람은…….”
박병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
“그건 나다.”
“내가 잃어버린, 인간이었던 시절의 잔상.”
정원 전체가 침묵했다.
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부서지고 다시 맞춰지고 있었다.
그녀의 운명.
그의 정체.
그 남자의 정체.
전부 하나로 이어졌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원망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 아팠다.
박병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 속에서, 정원의 실들이 낮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