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그릇
Code Destiny · 1,462자
제86화. 그릇
같은 순간, 정원 밖 어딘가.
무성은 왕좌 없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팀과 갈라진 뒤, 그는 각자의 궁에서 하나씩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워졌다.
타는 듯한 통증이 아니었다.
무언가 안에서 깨어나려는 듯한 통증이었다.
“…큭.”
그는 무릎을 짚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지금까지 무성은 아프다는 감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관찰하고, 조율하고, 필요할 때 손가락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몸 안쪽에서 무언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것은 목소리였다.
무성의 것이 아닌 목소리.
『……돌려줘.』
그 목소리가 그의 안에서 울렸다.
무성의 손이 떨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검은 실이 아주 옅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 아래로, 아주 잠깐 다른 손이 비쳤다.
작고, 여윈, 사람의 손.
무성의 손이 아니었다.
“……뭐야, 이건.”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기억이 아니었던 것이 밀려들었다.
기억이 아니라, 만들어진 자리였다.
거대한 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수천 가닥의 검은 실이 서서히 그를 감싸며, 형태를 빚어내고 있었다.
팔.
다리.
얼굴.
말.
전부 실이 대신 채워 넣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실을 잣고 있는 손.
가늘고 아름다운, 그러나 서늘한 손.
『아프지 않게 해줄게.』
그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가 대신 있어줘.』
『나 대신, 여기서.』
무성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만들어진 순간의 잔상이었다.
그가, 아니 그 실로 빚어진 몸이 처음 눈을 뜬 순간의.
『나는 너무 힘을 많이 잃었어.』
그 목소리가 말했다.
『이대로면 사라져.』
『그러니까 네가 담아줘. 남은 힘을. 남은 나를.』
『그리고 대신, 살아줘.』
무성은, 아니 그 순간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배우기도 전이었으니까.
그저 실로 이루어진 작은 몸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의 무성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때부터 나였던 적이 없었나.”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이 통증만은, 분명 자기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왜 왕좌를 원했지.”
『자리가 필요했으니까.』
그 목소리가 다시 속삭였다.
이번엔 그의 안이 아니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를 채운 힘이 자리 잡을 곳이.』
『넌 그저, 자리였을 뿐이야.』
무성의 눈이 흔들렸다.
“…그럼 자미성을.”
그가 낮게 물었다.
“내가 원한 게 아니라.”
“네가 원한 거였군.”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의 몸을 감고 있던 검은 실이 다시 팽팽해지며 조여왔다.
“말하지 마.”
그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너는 그저 그릇이면 돼.”
무성은 이를 악물었다.
“……싫다.”
그 한마디가 그의 안에서 겨우 새어나왔다.
작았지만, 분명한 저항이었다.
실이 더 세게 조여왔다.
『반항하지 마.』
그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없으면, 나는 사라져.』
『네가 사라지면, 나는 있어.』
『간단한 거야.』
무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 두 개의 존재가 부딪히고 있었다.
그릇으로 만들어진 자신과, 그 안에 봉인된 진짜 주인.
“……나는.”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 여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아이를 막아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보니.”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그냥, 네가 시킨 대로 움직인 거였나.”
대답 대신, 검은 실이 그의 목소리마저 조여왔다.
말이 끊겼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무성의 얼굴이 잠깐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더 앳되고, 더 지친, 낯선 얼굴.
그리고 곧 원래의 무성으로 돌아왔다.
“……흠.”
그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평소의 여유로운 어조로.
하지만 그 눈빛 안쪽에는, 방금 전의 저항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작은 균열.
아직은 아주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