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부서뜨리겠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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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부서뜨리겠다는 말
정원의 어둠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거대한 형체가 걸어 나왔다.
검은 줄무늬.
호랑이의 몸.
그러나 완전한 짐승도 아니었다.
몸의 일부는 사람의 형상으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흘러내렸고, 눈동자는 짙은 보랏빛으로 빛났다.
발끝에서부터 걸어 나올수록, 짐승의 형체가 사람의 형체로 겹쳐졌다.
정원 바닥의 실들이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오랜만이야.”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밑에 날카로운 것이 숨어 있었다.
“박병하.”
박병하의 몸이 굳었다.
“묘아.”
그녀, 묘아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구나.”
“여기까지 와서야.”
연이가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야?”
“계속 우릴 지켜본 게.”
묘아의 시선이 연이에게 옮겨갔다.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네가 그 아이구나.”
그녀가 말했다.
“박병하가 시간까지 건너서 지키려 한.”
연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나야.”
묘아가 낮게 웃었다.
“솔직해서 좋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박병하에게 돌아갔다.
“나는 너를 따라왔어.”
“힘을 거의 다 잃으면서까지.”
“그런데 너는 여기 와서.”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 애를 위해서 몸까지 버렸구나.”
박병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한테는 그런 거 한 번도 준 적 없으면서.”
묘아의 눈에 순간, 아주 짧게 아픔 같은 것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서늘한 웃음이 자리를 잡았다.
“괜찮아.”
그녀가 말했다.
“나도 이제 안 바라.”
“대신.”
그녀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질 수 없다면.”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부숴버리겠어.”
정원 전체가 뒤흔들렸다.
머리 위 스물여덟 개의 매듭이 일제히 요동쳤다.
“너를.”
묘아가 박병하를 보며 말했다.
“이 아이를.”
이번엔 연이를 보았다.
“그리고 너희가 쌓은 모든 실을.”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 발톱이 자라났다.
“전부.”
타래가 재빨리 몸을 넓게 펼쳤다.
정원의 실들이 방벽처럼 얽혔다.
“여긴 파괴가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묘아가 그 말에 웃었다.
“누가 허락을 구했어?”
그녀의 발톱이 실의 벽을 그었다.
촤아악!
실 몇 가닥이 그대로 끊어졌다.
타래의 몸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이건…….”
“정원의 규칙조차 신경 안 써.”
박병하가 낮게 말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실을 다 태웠다.”
“두려울 게 없어.”
묘아의 눈이 연이를 향했다.
“너.”
그녀가 낮게 말했다.
“박병하를 사랑하는구나.”
연이는 흠칫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너도 알아야지.”
묘아가 웃었다.
“사랑은 가지는 게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안다고 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견딜 수 있는 건 아니야.”
연이는 순간 그 말에서 어떤 슬픔을 느꼈다.
아주 짧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슬픔.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것이었다.
“당신, 슬픈 거야?”
연이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묘아의 표정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다시, 차갑게 웃었다.
“건방지네.”
그녀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더욱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먼저 네 세상부터 부숴줄게.”
그녀가 발을 굴렀다.
쿠웅!
정원 전체가 진동했다.
머리 위 스물여덟 매듭 중 몇 개가 깨질 듯 흔들렸다.
박병하가 연이 앞을 막아섰다.
“내가 상대한다.”
“안 돼.”
묘아가 웃었다.
“이번엔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그녀의 시선이 정원 전체를 훑었다.
“이 정원도, 저 애도, 전부 부서질 거야.”
“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 때까지.”
정원의 실들이 사방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투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