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되찾겠다는 집착
Code Destiny · 1,866자
제89화. 되찾겠다는 집착
숙요의 정원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수천, 수만 가닥의 실이 허공에 떠 있었다.
저마다 다른 빛깔로, 저마다 다른 온도로.
타래는 그 실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명주실로 짜인 몸이 옅게 흔들렸다.
“들었을 것이다.”
타래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묘아를 완전히 제압하면, 박병하는 인간으로 돌아간다.”
연이는 주먹을 쥐었다.
“대신 내가 여기 기억을 다 잃는다는 거고.”
“그렇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모카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조건이 왜 그래요!”
치즈가 조용히 덧붙였다.
“계약서라면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이건 계약이 아니다.”
타래가 고개를 저었다.
“운명의 저울이다. 하나를 채우려면 하나가 비어야 한다.”
크림이 바구니를 꽉 안았다.
“그럼…… 언니는 우리도 다 잊어요?”
타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연이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옆에 선 박병하를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박병하.”
“……”
“지금 그 얼굴, 되게 말하고 싶은 거 참는 얼굴인데.”
박병하는 그제야 그녀를 보았다.
금빛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 마라.”
“뭘.”
“그 거래.”
“아직 아무것도 안 골랐어.”
“고르려는 얼굴이었다.”
연이는 대꾸하려 했다.
그 순간, 정원 전체가 흔들렸다.
우웅一.
실들이 일제히 팽팽해졌다.
타래가 벌떡 일어났다.
“왔다.”
“누가요?”
대답 대신, 하늘이 갈라졌다.
정원의 천장, 무수한 실이 걸려 있던 그 자리에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검은 줄무늬.
황금빛 눈.
그리고 그 눈 안에, 무언가 미쳐 있는 빛.
“묘아.”
타래가 그 이름을 불렀다.
낮고 무거운 음성이 정원을 울렸다.
“오랜만이야, 타래.”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아름답고, 서늘하고, 어딘가 갈라져 있었다.
거대한 검은 호랑이가 실들 사이로 몸을 낮췄다.
몸집은 정원 절반을 가리고도 남았다.
그녀의 발이 닿는 곳마다 실이 툭, 툭 끊어졌다.
“어, 어떡해…….”
모카가 뒷걸음질쳤다.
묘아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연이를 지나쳤다.
타래를 지나쳤다.
그리고 박병하에게서 멈췄다.
“박병하.”
정원 전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연이는 숨을 삼켰다.
그 이름을, 저렇게 부르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애틋함과 원망이 동시에 섞인 목소리.
박병하의 몸이 굳었다.
“……돌아가.”
“싫어.”
묘아가 앞발을 들었다.
발톱 끝에서 검은 실이 뿜어져 나왔다.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인간이 되고 싶어서, 그 조그만 여자애 하나 지키겠다고.”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안 되고?”
박병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그녀를 더 미치게 하는 것 같았다.
“대답해!”
콰앙!
발톱이 정원 바닥을 내리쳤다.
가장 가까운 실 뭉치가 통째로 끊어져 나갔다.
빛이 꺼졌다.
타래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 실은 관계없는 사람의 것이다!”
“관계없어? 여기 있는 모든 게 관계없어. 나한테 필요한 건 하나뿐이야.”
묘아의 발톱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이번엔 여러 가닥이 한꺼번에 끊어졌다.
파스스스—.
빛의 조각들이 눈처럼 흩날렸다.
멀리, 아주 멀리 현실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오래된 사진첩이 이유 없이 바래는 것처럼.
누군가의 첫 기억 하나가 조용히 흐려지는 것처럼.
“그만해!”
연이가 소리쳤다.
“그거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 인생이잖아!”
묘아의 눈이 연이에게로 향했다.
처음으로.
“네가 그 애구나.”
연이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박병하가 미래까지 버리고 지키려던 애.”
묘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날카롭고, 슬프게.
“그럼 너부터 없애면 되겠네.”
“연이!”
박병하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금빛이 폭발하듯 터졌다.
작은 몸이 순식간에 부풀었다.
거대한 흰 사자.
정원의 절반을 채우는 크기로.
콰아앙!
두 짐승의 몸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정원 전체가 흔들렸다.
실들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박병하!”
묘아가 울부짖듯 외쳤다.
“왜 나를 봐주지 않아! 그때도, 지금도!”
박병하의 발톱이 그녀의 앞발을 막아냈다.
으드득.
“나는 널 봐준 적 없다.”
“거짓말.”
“착각하지 마라. 그건 처음부터 없었다.”
묘아의 눈에서 뭔가 무너지는 게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분명했다.
그다음 순간, 그 자리에 더 짙은 광기가 들어찼다.
“그럼 부숴버리겠어.”
그녀가 몸을 크게 젖혔다.
정원 전체의 실이 한꺼번에 팽팽해졌다.
타래가 다급히 소리쳤다.
“안 된다! 그건 정원 전체의 뿌리다!”
“상관없어.”
묘아의 발톱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수백, 수천 가닥의 실이 한꺼번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연이의 성반 안, 팀원들의 작은 빛도 흔들렸다.
모카, 치즈, 크림, 루나.
박병하의 빛까지도.
“다들 물러서!”
연이가 외쳤다.
하지만 늦었다.
묘아가 앞발을 내리쳤다.
“가져가겠다. 내 것으로.”
거대한 검은 빛이 정원 전체를 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