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네가 아니어도 돼
Code Destiny · 1,139자
제90화. 네가 아니어도 돼
검은 빛이 밀려왔다.
파도처럼, 벽처럼.
연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무언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은 천.
흑천의였다.
“무성?”
연이는 눈을 떴다.
무성이 두 팔을 벌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검은 파도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막아라?”
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평소의 여유로운, 철학적인 억양이 아니었다.
거칠고, 다급하고, 낯설게 인간적이었다.
묘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릇 주제에.”
“그릇이라도, 아직은 나다.”
무성이 신음하듯 말했다.
이를 악문 채로.
“나는 네가 시킨 대로만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다.”
“닥쳐. 너는 내가 남는 힘으로 만든 그림자야.”
“그래.”
무성의 몸에서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검은 천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아주 잠깐 다른 얼굴이 비쳤다.
지치고, 슬프고, 인간처럼 여린 얼굴.
“그래서 더더욱, 이건 내가 정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일지도 모른다.”
연이는 숨을 멈췄다.
“무성…….”
“연이.”
무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처음으로 조롱도, 여유도 없었다.
“도망쳐라.”
“하지만—”
“박병하도 데려가라.”
그가 두 팔을 더 크게 벌렸다.
검은 파도가 그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못 보낸다.”
박병하가 거대한 몸으로 다가오려 했다.
“무성, 물러나라. 너 혼자—”
“너는 항상 혼자 다 짊어지려 하지.”
무성이 낮게 웃었다.
“이번엔 아니어도 돼.”
그의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정원의 바닥, 연이와 박병하가 서 있던 자리 밑에서 문양이 떠올랐다.
“이건 뭐야?”
“통로다. 묘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당신은?”
“나는.”
무성이 잠시 멈췄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켰다.
“나는 남는다.”
“안 돼!”
연이가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발밑의 문양이 이미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박병하가 순식간에 사람 형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줄어들었다.
금빛 갈기가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인간과 사자의 경계에 선 모습으로.
그가 연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박병하?”
“……잠깐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로, 떨렸다.
연이는 그의 가슴에 얼굴이 닿는 걸 느꼈다.
따뜻했다.
체온이 있었다.
“연이야.”
“응.”
“그 거래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부서질 것처럼.
“하지 마. 나 때문에 네가—”
바닥의 문양이 순식간에 확장됐다.
빛이 폭발하듯 터졌다.
“나는, 너를—”
콰아앙!
정원의 공간이 통째로 찢어졌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균열 사이로, 연이는 박병하의 손이 자신의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걸 느꼈다.
“박병하!”
“연—”
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세상이 하얗게 뒤집혔다.
연이는 정신을 잃었다.
멀리, 무성이 검은 파도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그리고 묘아의 포효가 정원 전체를 울렸다.
“내 그릇 주제에!”
그 소리를 끝으로, 모든 것이 갈라졌다.
연이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잡았던 온기의 감각만 남아 있었다.
박병하가 끝내 다 하지 못한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