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인간이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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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화. 인간이었던 자리
눈을 떴을 때, 박병하는 비 속에 서 있었다.
검은 비.
소리도 없이 내리는 비였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도, 하늘도 구분되지 않았다.
그저 비와, 자신뿐이었다.
“……연이.”
그가 낮게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성반의 감각도, 정원의 실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끊긴 공간이었다.
“여긴가.”
박병하는 주먹을 쥐었다.
그때, 비 저편에서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긴 코트,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얼굴.
박병하 자신의 얼굴이었다.
다만,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사자의 눈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의 눈이었다.
“오랜만이군.”
그 목소리도 낯익었다.
너무 낯익어서 소름이 끼쳤다.
“……너는.”
“나였던 것.”
인간의 형상이 조용히 웃었다.
“정확히는, 네가 버리고 온 것.”
박병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버렸지.”
인간의 형상이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비에 젖은 손이었다.
체온이 있는, 살아 있는 손.
“이 손으로 무언가를 만질 수 있었던 시간을. 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을. 너는 미래를 바꾸겠다고, 그 전부를 대가로 내놨어.”
“그래서.”
박병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후회하냐고 묻는 거라면, 아니다.”
“정말?”
인간의 형상이 천천히 다가왔다.
“연이 옆에서, 흰 고양이로만 있을 수 있는 게 괜찮아? 손을 잡아도 온기가 다르고, 곁에 있어도 완전히 같은 편은 될 수 없는 게?”
박병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결국 사자로 남을 거다.”
그 말이 비처럼 그를 적셨다.
“인간으로 돌아갈 길이 있다지만, 그 대가로 그 애가 너와의 모든 기억을 잃는다지. 그럼 그 애가 다시 널 만나도, 넌 그냥 낯선 사람이야.”
“……”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사자로, 그 애 곁의 이상한 고양이로 사는 게 나을지도 몰라.”
박병하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인간의 형상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는 진짜 그 애를 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만해.”
“두려운 거야. 인간으로 돌아가서, 또 무언가를 잃을까 봐.”
“그만하라고 했다.”
박병하의 목소리가 커졌다.
처음으로.
빗속에서, 그는 똑바로 그 형상을 마주 보았다.
“나는 사자로 남는 것도,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도 두렵지 않다.”
“……”
“내가 두려운 건 하나뿐이다.”
그의 눈에 금빛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연이가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는 것.”
인간의 형상이 멈칫했다.
“그게 다야?”
“그게 다다.”
박병하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빗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나는 사자든, 고양이든, 인간이든 상관없다. 그건 껍데기다.”
“……”
“나는 그 껍데기를 지키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그가 손을 뻗어, 인간의 형상의 어깨를 잡았다.
놀랍게도, 그 손에는 감촉이 있었다.
“너는 내가 버린 게 아니다.”
박병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는 내가 지나온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형상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처음으로 조롱이 사라졌다.
“……그럼 넌 뭘 원해.”
“연이가 나 때문에 잃는 것 없이, 나도 나 자신인 채로 그 애 곁에 있는 것.”
“그런 선택지는 없을지도 몰라.”
“그럼 찾아야지.”
박병하가 손을 놓았다.
빗속의 형상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너, 많이 변했네.”
그 목소리는 마지막으로, 아주 조금 다정했다.
“원래 이랬어야 했는데.”
형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가서 데려와. 그 애를.”
박병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서서히 그쳤다.
빗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서 있던 그 자리—인간이었던 자리—를 담담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너머,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연이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다려라.”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내가 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