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기억을 걸겠다는 마음
Code Destiny · 1,391자
제92화. 기억을 걸겠다는 마음
연이가 눈을 뜬 곳은 정원의 다른 구역이었다.
실들이 더 얇고, 더 희미한 곳.
발밑에 안개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박병하?”
대답이 없었다.
성반을 펼쳐보았다.
작은 빛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모카, 치즈, 크림, 루나.
그리고 박병하.
희미하지만, 꺼지지는 않았다.
“살아 있구나.”
연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안개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타래였다.
“괜찮으냐.”
“어떻게 여기 있어요? 무성은요? 다른 애들은요?”
“이곳은 정원의 뿌리에 가깝다.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타래가 조용히 대답했다.
“무성의 소식은 아직 모른다. 묘아가 아직 그를 붙잡고 있는 듯하다.”
연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박병하는요.”
“다른 갈래에 있다. 무사하다.”
“다행이다…….”
연이는 안도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굳혔다.
“타래.”
“말해라.”
“아까 말한 거래. 다시 확인하고 싶어요.”
타래는 잠시 침묵했다.
“정말 알고 싶으냐.”
“네.”
“각오는 됐고.”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연이가 억지로 웃었다.
“그래도 모르는 채로 고르긴 싫어요.”
타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실 한 가닥이 풀려 나왔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실이었다.
“이것이 네 것이다.”
실이 허공에서 천천히 풀리며, 장면들을 비춰내기 시작했다.
흰 고양이가 처음 창틀에 앉아 있던 밤.
카페 테이블 위로 뛰어오르던 순간.
“도망이 아니라 다시 읽으러 가는 거라고” 말하던 목소리.
“약속으로 해두겠다”던 그 말.
연이는 숨이 막혔다.
“이게 다…….”
“전부, 네가 그와 함께 쌓은 시간이다.”
타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묘아를 제압하는 순간, 시공의 저울이 맞춰진다. 박병하는 인간의 몸으로 돌아갈 자격을 되찾는다. 하지만 너는.”
실이 다시 감기기 시작했다.
빛나던 장면들이 하나씩 지워졌다.
“운명 세계에서 있었던 모든 일,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는다. 그를 만난 것도, 좋아하게 된 것도, 함께 웃고 다퉜던 것도.”
“전부요?”
“전부다.”
타래가 단호히 말했다.
“일부만 남기는 방법은 없다. 저울은 반쪽만 받지 않는다.”
연이의 손이 떨렸다.
“그럼…… 내가 그 애를 다시 만나도.”
“낯선 사람일 것이다. 흰 고양이도, 그 이름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연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애는 기억해요?”
“그렇다. 그는 인간이 되어, 너와의 시간을 온전히 기억한 채 살아갈 것이다.”
“그럼 그건 너무……”
연이가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느냐.”
“네.”
“운명은 원래 공평하지 않다.”
타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선택은 언제나 너의 것이다. 나는 그저 저울의 무게를 정확히 알려줄 뿐.”
연이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온갖 장면이 스쳐 갔다.
박병하의 무뚝뚝한 목소리.
그가 처음으로 흔들리던 눈빛.
방금 전 정원에서, 그가 다 끝내지 못한 말.
“연이야, 나는 너를—”
그 뒷말이 무엇이었을지, 연이는 알고 싶었다.
동시에, 그 말을 듣고 나서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타래.”
“말해라.”
“만약에.”
연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그 거래를 받아들이면, 그 애는 행복할까요?”
타래는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모른다.”
“……그렇겠죠.”
연이는 고개를 숙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근데 왜, 이게 꼭 나 혼자 정해야 하는 일이지.”
“왜냐하면.”
타래가 조용히 말했다.
“걸어야 하는 것이 네 기억이기 때문이다.”
연이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은빛 실이 다시 그녀의 손목 위로 감겼다.
지워지지 않은 채로, 다만 조용히.
기다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