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결정의 순간
Code Destiny · 1,452자
제94화. 결정의 순간
무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정원의 흐름이 바뀌었다.
끊어졌던 통로들이 하나둘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연이는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느꼈다.
발밑의 안개가 걷히고, 익숙한 실들의 반짝임이 돌아왔다.
“타래.”
“느껴진다.”
타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이 흩어지며 정원의 결이 다시 짜였다. 잠시나마 길이 열렸다.”
“박병하는요?”
“곧 이곳으로 올 것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익숙한 기척이 다가왔다.
인간과 사자의 경계에 선 형체.
“연이!”
“박병하!”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뛰었다.
닿기 직전, 잠시 멈춰 섰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듯이.
“괜찮아?”
“네가 더 걱정이었다.”
박병하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짧게 붙잡았다.
체온이 느껴졌다.
진짜였다.
“무성은.”
연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병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들었다. 타래에게서.”
“……그랬구나.”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겁고, 슬픈 침묵이었다.
이윽고, 저편에서 모카와 치즈, 크림, 루나가 뛰어 들어왔다.
“연이야!”
모카가 제일 먼저 달려와 안겼다.
“다들 무사했구나…….”
“걱정했습니다.”
치즈가 짧게 말했다.
“정말요.”
루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크림은 아무 말 없이 연이의 손을 꼭 잡았다.
작은 온기였지만, 그 무게는 결코 작지 않았다.
타래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이제 저울 앞에 설 시간이다.”
정원 중심, 실들이 가장 촘촘하게 모인 자리에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은빛과 흰빛이 반반씩 섞인 원.
“저게 그 거래의 문인가요.”
연이가 물었다.
“그렇다. 저 문을 지나 손을 얹으면, 저울은 정해진 대로 움직인다.”
박병하가 연이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연이.”
“박병하.”
“나는 여전히 반대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단호했다.
“네가 나 하나 때문에 너 자신을 지우는 것.”
“알아.”
“그럼—”
“그래도.”
연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건 내가 정할 일이야.”
박병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
“너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야. 정확히는, 너 좋으라고 하는 게 맞는데, 그것 때문에만 하는 것도 아니야.”
연이가 웃었다.
애써.
“복잡하지. 나도 복잡해.”
모카가 눈물을 글썽였다.
“연이야, 진짜 괜찮겠어? 우리도 다 잊는 거잖아.”
“그러게요.”
치즈가 조용히 덧붙였다.
“이 계약, 다시 생각해도 너무 불리합니다.”
크림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언니가 후회 안 할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루나가 낮게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우리는 언니 편이야.”
연이는 그 말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다시 문양을 향해 돌아섰다.
박병하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연이야.”
“……응.”
“아까 다 못한 말이 있다.”
연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정원이 찢어지기 전에.”
“기억나.”
“지금 해도 되나.”
연이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그 말, 내가 다 듣고 나서 선택하고 싶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말 때문에 내가 흔들려서 고르는 거 말고, 내가 온전히 나로 고르고 나서 듣고 싶어.”
박병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연이는 천천히 문양 앞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타래가 조용히 지켜보았다.
팀원들도, 박병하도, 숨을 죽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원의 실들이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잔잔히 흔들렸다.
마치 함께 숨 쉬듯이.
연이는 문양 바로 앞에 섰다.
은빛과 흰빛이 섞인 원이 그녀의 눈앞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박병하의 온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무성이 마지막으로 남긴 실의 감촉도.
타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정했느냐.”
연이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
그녀의 손끝이 문양에 닿기 직전.
“나는.”
정원 전체가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