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Code Destiny · 1,668자
제95화.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정원의 실들이 바람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수천 가닥의 명주실이 하늘에서 늘어져 내려와, 닿을 듯 닿지 않는 높이에서 별빛을 머금고 있었다.
타래가 그 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얼굴은 여전히 흐릿했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결정할 시간이다.”
연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묘아를 완전히 제압하면 시공의 균형이 풀린다. 박병하는 인간으로 돌아간다.”
타래의 실이 천천히 감겼다 풀렸다.
“대신 너는,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기억을 놓아야 한다.”
“박병하라는 이름도.”
“여기서 있었던 모든 시간도.”
연이는 주먹을 쥐었다.
옆에 선 박병하의 옆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받아들여.”
연이는 그를 돌아보았다.
“뭐?”
“거래를 받아들이라고.”
박병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낮음이었다.
“나는 인간으로 돌아가고, 너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게 맞는 결말이다.”
“맞는 결말?”
“너를 여기 붙잡아 둘 이유가 없다.”
연이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화가 나서였다.
“지금 나 걱정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네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박병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둘 다겠지.” 연이가 대신 말했다. “근데 그중에 진짜 이유는 하나야.”
“너는 내가 다치는 게 싫은 거야.”
박병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서 네가 먼저 없어져 주려는 거고.”
“……그게 뭐가 잘못됐지.”
“잘못됐어.” 연이는 한 발 다가섰다. “왜냐면 그건 네 결정이 아니라 내 결정이니까.”
정원의 실들이 술렁였다. 마치 그 말에 반응하듯이.
타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기억을 잃는다는 게 뭔지 알아?” 연이가 낮게 물었다.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다.
“그건 그냥 이름 하나 지워지는 게 아니야.”
“흰 고양이가 창틀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첫날 밤이 사라지는 거야.”
“카페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서 번호 물어보는 애를 막아주던 순간이 사라지는 거야.”
“도서관에서 내가 틀린 음을 내도 된다고, 완벽한 게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던 목소리가 사라지는 거야.”
“이름을 억지로 열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그 밤이 통째로 사라지는 거야.”
연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나 무서워.”
박병하가 숨을 삼켰다.
“그렇게 다 사라지고 나면, 내가 왜 허전한지도 모른 채로 살아야 한다는 게…… 진짜 무서워.”
“그러니까.” 박병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러니까 안 해.” 연이가 그의 말을 잘랐다.
박병하가 멈췄다.
“무서운데 왜 거절해.”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무섭다면서 왜 더 힘든 쪽을 고르는 거야.”
연이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무서운 거랑 포기하는 건 다르니까.”
“......”
“너 내가 겁쟁이인 줄 알아? 나 원래 이런 애야. 무서워도 발부터 나가는 애.”
박병하의 입술이 떨렸다.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 삼켰다.
연이는 그런 그를 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다.
“박병하.”
이름을 부르자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타래도, 정원의 실들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네가 사자여도 상관없어.”
연이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원래 인간이었어도, 지금 사자여도, 흰 고양이여도, 그 셋 다 아닌 무언가여도 상관없어.”
“네 진짜 이름이 박병하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어도 상관없어.”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박병하의 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평생 단단히 쌓아온 벽이 조금씩 갈라지는 걸 느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연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끊기지 않았다. “네가 무엇이든.”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사라지겠다는 말, 그 말 취소해.”
“그리고 나는.”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기억, 절대 안 놓을 거야.”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정원 전체가 크게 진동했다. 하늘에 늘어진 명주실들이 일제히 은빛으로 빛났다.
타래가 낮게 말했다.
“그것이 네 대답이냐.”
“응.”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웃고 있었다. “그게 내 대답이야.”
박병하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사자의 발톱이 아니라, 아주 잠깐 사람의 손 모양으로 일렁이는 손이었다.
그 손이 연이의 뺨에 닿기 직전.
정원의 하늘이 검게 찢어졌다.
낮고 서늘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재미있는 대답이군.”
묘아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