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묘아를 마주 보다
Code Destiny · 1,722자
제96화. 묘아를 마주 보다
검은 균열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호랑이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그 줄무늬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눈은 사람의 눈보다 깊고 서늘했다.
묘아가 완전한 모습으로 정원에 내려섰다.
“기억을 지키겠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사자를 사랑한다고?”
연이는 박병하 앞을 막아섰다.
“당신이 상관할 일 아니야.”
“상관있지.” 묘아의 발톱이 땅을 긁었다. 정원의 실들이 비명처럼 끊어졌다. “나는 이 남자를 위해 시간을 통째로 버렸으니까.”
박병하가 낮게 말했다.
“묘아.”
“부르지 마.” 그녀가 이를 드러냈다. “네가 부르는 내 이름은 이제 아무 의미 없어.”
“가질 수 없다면.” 묘아의 그림자가 부풀어 올랐다. “부숴버리겠다고 이미 말했을 텐데.”
그녀가 앞발을 휘둘렀다.
정원 전체가 뒤흔들렸다. 실들이 무더기로 끊어져 흩날렸다.
연이는 몸을 굴려 피했다. 박병하가 발톱으로 그녀를 감쌌다.
“도망칠 곳은 없어.” 묘아가 웃었다. “여긴 내 시간이 만든 정원이나 다름없으니까.”
연이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묘아는 시간을 건너온 존재였다. 힘의 격차는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연이에게는 힘이 아닌 다른 무기가 있었다.
19화에서 백문을 무너뜨렸던 그 방법.
완벽함이 아니라 진짜였던 음.
“첫 울림.” 연이가 중얼거렸다.
박병하가 그녀를 보았다.
“뭘 하려고?”
“당신을 부수러 온 게 아니야.” 연이가 묘아를 향해 말했다. “당신을 보러 왔어.”
묘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헛소리를—”
“당신은 지금 부서뜨리겠다는 말만 하고 있어.” 연이는 성반을 펼쳤다. 명궁과 부부궁이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근데 그게 진짜 처음 하고 싶었던 말이야?”
“닥쳐.”
“박병하를 사랑했다며.”
묘아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사랑했던 마음이, 어쩌다가 부수겠다는 말이 됐어?”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야!”
묘아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전보다 느렸다. 흔들리고 있었다.
연이의 성반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명궁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방. 부부궁은 상대를 억지로 열지 않고 비추는 방.
두 궁의 빛이 실처럼 뻗어 나가 묘아를 감쌌다.
“하지 마!” 묘아가 소리쳤다. “내 안을 함부로 들여다보지 마!”
“안 들여다봐.” 연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냥 비출 뿐이야.”
빛이 묘아의 그림자를 통과했다.
그리고 그 안쪽, 아주 깊은 곳에서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젊은 여자 하나가, 아직 호랑이도 그림자도 아닌 모습으로, 어느 시간의 끝자락에서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병하였다. 지금보다 훨씬 앳된, 인간이었을 적의 박병하.
그 시절의 묘아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고 있었다. 발톱도 이빨도 없이, 그저 사람의 손으로.
“……그만.” 지금의 묘아가 신음했다. “보여주지 마.”
“이게 처음이었지.” 연이가 말했다. 목소리에 원망이 아니라 안타까움이 섞였다. “부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곁에 있고 싶었던 거잖아.”
묘아의 형상이 크게 흔들렸다. 호랑이의 윤곽이 잠깐 사람의 윤곽과 겹쳤다가 다시 갈라졌다.
박병하가 한 걸음 나섰다.
“묘아.”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번엔 경계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 담겨 있었다. “그때 내가 네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 건, 내 잘못이야.”
묘아의 눈이 그를 향했다. 분노와 서글픔이 뒤섞인 눈이었다.
“거절한 걸 사과하는 건 아니야.” 박병하가 말을 이었다. “그건 내 진심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 뒤로 짊어진 시간을, 나는 너무 늦게까지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묘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금이라도 나를—”
“아니.” 박병하는 고개를 저었다. 단호했다. “그건 내가 줄 수 없어.”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
묘아가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안엔 살기보다 절망이 더 크게 배어 있었다.
“그럼 다 부숴버리는 수밖에.” 그녀가 낮게 신음했다.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부서지지 않으면, 나는 견딜 수가—”
그녀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정원 전체가 다시 흔들렸다.
연이는 두 발로 버티며 성반을 더 넓게 펼쳤다.
“묘아.”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 지금 자기 마음을 못 견디고 있는 거지?”
“......”
“그럼 그거 하나만 인정해. 부수는 것 말고, 진짜 마음.”
묘아의 형상이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호랑이와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듯 흔들렸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나는......”
정원의 하늘이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별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