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부서지지 않은 것
Code Destiny · 1,279자
제97화. 부서지지 않은 것
묘아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림자가 사람의 형상과 호랑이의 형상 사이를 오가며 계속 흔들렸다.
연이는 더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성반의 빛을 유지한 채 기다렸다.
기다림은 약한 선택이 아니었다. 스스로 배운 말이었다.
이윽고 묘아가 낮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정원의 실들이 잔잔히 떨렸다.
“거절당한 게 아팠던 게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가 아니라 오래 눌러온 슬픔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로 시간을 다 써버린 게 아팠어.”
“힘을 봉인해가면서까지 이 시간을 건너왔는데, 여기서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래서 부수면, 뭐라도 된 것 같았어.”
박병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이가 천천히 다가갔다.
“당신, 부서진 적 없어.” 연이가 말했다.
묘아가 고개를 들었다.
“계속 뭔가 되려고 했잖아. 그림자 자아까지 만들어가면서.”
“무성 말이야.”
그 이름에 묘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 애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견딜 수 없어서 만든 또 다른 당신.”
“그 애도 마지막엔 스스로 저항했어. 당신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았어.”
“그건 당신 안에 아직 부서지지 않은 게 있다는 뜻이야.”
묘아의 그림자가 크게 떨렸다. 눈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눈물인지 빛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타래가 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조건이 달라졌다.”
박병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거래의 전제는 ‘완전한 제압’이었다.” 타래가 조용히 말했다. “힘으로 억누르고 봉인하는 것.”
“하지만 지금 일어난 건 그게 아니다.”
“묘아는 제압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연이의 눈이 커졌다.
“그럼—”
“연이, 너는 기억을 잃지 않는다.” 타래가 말했다. “그 대가는 정복에게 부과되는 것이었지, 화해에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원 전체가 옅은 빛으로 물들었다.
연이는 순간 말을 잃었다.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박병하도 숨을 삼켰다.
묘아는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입가에 아주 옅은, 처음 보는 표정이 스쳤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오래된 짐을 조금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그럼 나는.”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소멸하는 건가.”
타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두 세계 사이, 실이 아직 다 엮이지 않은 자리로 간다.”
“완전히 여기도, 완전히 저기도 아닌 곳.”
묘아의 형상이 서서히 실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줄무늬가 가느다란 명주실이 되어 하늘로 떠올랐다.
“박병하.”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를 불렀다.
박병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준 대답, 원망하지 않을게.” 묘아의 목소리가 점점 옅어졌다. “다만…… 다음에 어디선가 다시 실이 엮인다면, 그땐 좀 더 일찍 만나고 싶었어.”
박병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의였다.
연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흩어지는 실 한 가닥을 살짝 스쳤다.
따뜻했다.
묘아의 형상이 완전히 실이 되어 하늘 위로, 정원의 다른 실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처단이 아니었다.
소멸도 아니었다.
그저, 놓여난 것이었다.
정원의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