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돌아온 섬에 처음으로 저녁이 왔다. 해는 제 시간에 맞춰 수평선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광장 쪽에서는 아직 냄비 뚜껑 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바닷가 언덕은 조용했다. 파도가 모래를 핥고 물러날 때마다 젖은 소금 냄새가 올라왔다.
검은 호랑이가 바위 위에 엎드려 있었다. 앞발 사이에 두꺼운 장부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종이는 낡았는데 글씨는 새것처럼 반짝였다. 빌려준 것과 거둔 것이 한 줄도 어긋남 없이 적혀 있었다.
검은 호랑이—정리하자. 오늘 들어온 것부터.
발톱 끝이 첫 장을 넘겼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파도 소리 사이에 또렷하게 끼어들었다.
검은 호랑이—지하 무대. 빌려준 박수 열두 묶음, 회수 완료.
검은 호랑이—노래꾼 여울. 목소리 한 가닥, 회수 완료.
검은 호랑이—빌린 박수로 무대에 섰으면, 내려올 때 갚는 게 맞아. 누구도 억지로 빌리게 하진 않았어.
장부 사이에서 은빛 실 한 가닥이 저절로 풀려 올라왔다. 실은 바람도 없는데 가늘게 떨었다.
실 끝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누군가 숨을 들이마시고, 첫 음을 고르는 소리였다.
검은 호랑이—쉿. 넌 내 거야. 값은 치렀잖아.
호랑이는 실을 발톱으로 눌러 다시 종이 사이에 끼웠다. 떨림은 한참 뒤에야 멎었다.
그때 수평선에 걸린 해가 한 번 깜빡였다.
빛이 꺼진 자리에서 물결이 거꾸로 일었다. 모래 위에 검은 손가락 자국이 하나씩 찍히며 다가왔다.
수면 위로 검은 손 여러 개가 솟았다. 손들은 호랑이를 둘러싸고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
목소리—해가 돌아왔더구나.
검은 호랑이—…돌아왔습니다. 노래 때문에요.
목소리—노래. 그 돼지의 노래.
목소리—깃털 하나를 잃었다. 그 아이는 쓸 만한 그릇이었는데.
검은 호랑이—까마귀는 제 몫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박수만 맡았어요.
목소리—그래서 박수는 거뒀느냐.
호랑이의 수염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장부 위에 올린 앞발에 힘이 들어갔다.
검은 호랑이—…대부분은요.
오른 앞발의 금 고리가 달아올랐다. 고리는 한 칸 좁아지며 털을 파고들었다.
검은 호랑이—크읏…!
목소리—대부분. 나는 대부분을 맡긴 적이 없다.
호랑이는 고개를 숙였다. 숨을 고르는 동안 고리 아래로 가는 열이 계속 번졌다.
검은 호랑이—다음엔 남기지 않겠습니다.
목소리—너는 약속을 지키는 짐승이지. 그래서 골랐다. 잊지 마라, 네가 왜 여기 있는지.
검은 호랑이—잊은 적 없습니다. 그 아이가 괴물이 되기 전에 막는 것.
목소리—다음 섬은 시간을 사고파는 곳이다. 거기서 그 돼지의 시간을 거둬라.
목소리—한 시간도 남기지 마라. 비어야 담긴다.
검은 호랑이—담긴다니요. 무엇이—
대답 대신 손들이 물속으로 꺼졌다. 노을이 다시 번졌고, 파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래를 핥았다.
고리의 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 호랑이는 앞발을 바닷물에 담갔다가, 한참 뒤에 꺼냈다.
검은 호랑이—비어야 담긴다. 뭘 담겠다는 건지.
검은 호랑이—상관없어. 시키는 대로 거두면 끝나. 그게 계약이니까.
호랑이는 다시 장부를 넘겼다. 식상의 섬 마지막 장, 거기에 꽃돼지의 줄이 있었다.
받은 것은 없었다. 거절한 박수 천 개. 거절한 거래 하나. 그 옆에 붉은 글씨가 저절로 떠올랐다.
[ 꽃돼지 · 미수(未收) ]
검은 호랑이—미수…?
호랑이는 앞발로 글자를 문질렀다. 붉은 글씨는 번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검은 호랑이—내 장부에 미수는 없어. 지금까지 한 번도.
검은 호랑이—거절한 값은 따로 받는다고 했잖아. 그럼 받으면 돼. 간단한 계산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발톱은 그 줄 위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낮에 본 장면이 자꾸 겹쳤다. 목소리도 없이 무대 위에 서서 냄비 뚜껑을 들고 있던 분홍 돼지.
검은 호랑이—바보 같은 녀석. 빌린 박수였으면 훨씬 쉬웠을 텐데.
검은 호랑이—다친 걸 보면 멈추고, 공짜로 주고, 받을 건 안 받고. 그런 녀석은 오래 못 버텨.
검은 호랑이—…그런 녀석이 괴물이 된다고? 계산이 안 맞잖아.
그때 바다 쪽에서 빗소리가 났다. 호랑이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맑았고, 노을만 붉었다.
빗소리는 귀 안쪽에서만 들리고 있었다.
아주 짧은 장면이 스쳤다. 젖은 아스팔트. 버스 정류장의 깜빡이는 불빛. 머리 위로 기울어진 노란 우산.
우산 아래에서 누군가 웃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반쯤 젖은 어깨만 보였다.
검은 호랑이—…뭐야, 지금 건.
빗소리가 뚝 끊겼다. 파도 소리만 남았다. 호랑이는 앞발로 이마를 눌렀다.
검은 호랑이—피곤한 거야. 섬 하나를 통째로 단속했으니까.
호랑이는 장부를 몇 장 거꾸로 넘겼다. 비겁의 섬 장. 거기에는 지워야 할 줄이 하나 남아 있었다.
[ 북 치는 아이 · 이름 — 보관 중 ]
검은 호랑이—이름 하나. 보관 중이 아니라 회수 완료로 고치면 끝이야.
호랑이는 망토 안쪽을 더듬었다. 금실로 꿰맨 작은 주머니 안에서 이름 하나가 따뜻하게 맥박 쳤다.
발톱으로 한 번 긋기만 하면 됐다. 이름은 장부로 넘어가고, 아이의 손목 흉터는 영영 아물지 않을 것이었다.
검은 호랑이—…
발톱은 내려가지 않았다. 호랑이는 주머니를 망토 안쪽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검은 호랑이—나중에. 다음 섬 끝나고.
낮에 광장에서 아이가 북을 치던 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이름도 모르면서 박자는 하나도 틀리지 않던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호랑이는 망토 안에서 회색 깃털을 꺼냈다. 까마귀가 남기고 간 깃털이었다.
깃털 끝은 아직 따뜻했다. 귀를 가까이 대자, 아주 희미한 허밍이 들렸다.
검은 호랑이—같이 부르고 싶었다, 라.
검은 호랑이—누구든 처음엔 그렇게 말해. 그러다 비웃음을 한 번 받으면 끝이야.
검은 호랑이—나도 그랬으니까.
호랑이는 제가 한 말에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그랬다는 건지 자신도 기억나지 않았다.
깃털은 장부에 적지 않았다. 대신 북 대장의 이름 옆, 망토의 가장 안쪽에 함께 넣었다.
금 고리가 다시 한 번 조여 왔다. 호랑이는 이를 악물고 장부를 덮었다.
검은 호랑이—다음 섬. 시간을 파는 곳. 그 돼지의 시간을 남김없이.
검은 호랑이—빚은 남겨 두면 불어나. 그러니까 이번엔, 미수 없이.
호랑이가 언덕을 내려갔다. 젖은 모래 위로 발자국이 이어지다가 물가에서 끊겼다.
바람이 장부 한 귀퉁이를 들춰 올렸다. 덮인 장부 안에서 붉은 두 글자가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
호랑이의 몸이 검은 안개로 풀어져 바다 위로 흩어졌다. 수평선 너머, 시계 소리가 나는 섬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