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울리기 직전, 해시계 무대. 해는 가느다란 초승달처럼 먹혀 있었다. 무대 위 해시계의 바늘은 그림자를 거의 잃어 가고 있었다.
셋은 무대 뒤 계단을 기어올랐다. 연이의 목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모카의 앞발은 국자를 너무 꽉 쥐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연이—(사람들, 와 줄까.)
영냥이—전단을 몇 장 돌렸지.
연이—(천 장. 그림으로만.)
영냥이—이 그림을 천 장이나 그렸어? 손 아팠겠다.
모카—둘 다 조용히 해. 아니, 한 명은 원래 조용하구나.
모카—고양이. 솔직히 말해 봐. 이거 될 것 같아?
영냥이—모르겠다.
모카—거기선 된다고 해 줘야지!
영냥이—모르는 걸 된다고 하면 네가 믿지 않을 거다. 모르니까 해 보는 거다.
연이—(영냥이 지금 좀 멋있었다.)
종이 울렸다. 첫 번째 종. 섬 전체가 그 소리에 몸을 떨었다. 무대 위 지붕마다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까마귀—정오 금지 구역이다.
까마귀—올라오는 자, 전원 몰수.
금 간 가면은 그대로였다. 금 사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까마귀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모카—고, 고양이. 사람이 하나도 없어.
모카 말대로였다. 무대 아래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바람만 지나갔다.
연이—(역시 무서워서 못 오는 거야.)
모카—그래. 당연하지. 나라도 안 와. 돌아가자.
영냥이—아직 첫 종이야. 서두르지 마.
그때였다. 톡, 톡톡. 광장 끝 골목에서 상자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북 대장이었다. 그 뒤로 할머니가 있었다. 그 뒤로 시장 사람들이 있었다. 지하 무대의 사람들도, 여울 누나도 있었다. 다들 손에 냄비 뚜껑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연이—(뚜껑 축제!)
모카—…진짜로 뚜껑을 들고 왔어.
영냥이—네가 무서워할까 봐 가져온 거다. 보라고 온 게 아니라 같이 하려고 온 거다.
까마귀—해산하라.
까마귀 떼가 광장 위로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누구도 돌아서지 않았다. 할머니가 맨 앞에 서서 뚜껑을 방패처럼 들었다.
까마귀—노래하는 자는 비웃음을 받는다. 그걸 몰라서 왔나.
영냥이—모카, 지금 해!
모카—지, 지금?
영냥이—두 번째 종이 울리기 전에. 첫 소리.
모카는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다리가 나무 막대 같았다. 광장의 백 개가 넘는 눈이 한꺼번에 그를 보았다.
입을 열었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도장도 없는데. 까마귀가 먹은 것도 아닌데.
모카—…안 돼. 안 나와.
모카의 등 뒤에서 연이가 다가왔다. 냄비 뚜껑을 하나 들고 있었다. 뚜껑을 모카의 얼굴 앞에 받쳐 들었다.
연이—(냄비 앞에서는 나온다며.)
모카는 뚜껑을 보았다. 뚜껑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그 뒤로 비치는 돼지의 웃는 얼굴도.
모카—간장 두 숟갈.
작은 목소리였다. 광장 맨 앞의 할머니만 겨우 들었을 것이다.
모카—설탕 한 숟갈. 불은 세게. 마음은 약하게.
북 대장이 상자를 쳤다. 쿵, 톡톡. 모카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모카—꼬치는 돌려, 돌려, 타기 전에 돌려. 할머니가 말했지, 인생도 돌려.
박자가 꼬였다. 마지막 소절에서 모카의 목소리가 삑 하고 뒤집혔다.
광장 어딘가에서 웃음이 터졌다. 한 사람. 두 사람. 웃음소리가 번졌다.
까마귀—보아라. 비웃음이다.
연이—(안 돼. 모카가 멈추면.)
모카가 멈췄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그도 웃었다. 뒤집힌 제 목소리가 너무 웃겨서 웃었다.
모카—아 망했다! 처음부터 다시! 간장 두 숟갈!
연이—(모카가 웃는다. 무대 위에서.)
광장이 따라 외쳤다. 간장 두 숟갈! 웃으면서. 박자도 안 맞게. 뚜껑을 두드리며.
영냥이—비웃음이 아니다. 같이 웃는 거다.
그건 노래였다. 엉망진창이고 음정도 없는 노래. 백 명이 한 박자씩 늦게 따라 부르는 레시피.
까마귀—…왜.
까마귀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면의 금이 한 줄 더 늘었다.
까마귀—왜 아무도 화내지 않지. 틀렸는데. 우스운데.
연이—(우스우니까 좋은 거야.)
연이는 소리 없이 입을 움직였다. 까마귀가 그 입 모양을 보았다.
그 순간 까마귀의 품 안에서 빛나는 실이 풀려 나왔다. 솔과 미의 모양으로 떨리는 실. 실은 광장의 웃음 쪽으로 끌리듯 날아와 연이의 목으로 돌아갔다.
연이—꾸우우울!
솔에서 미로. 재판정에서 비웃음을 산 그 음정이 광장 한가운데 울려 퍼졌다.
모카—그거 우리 후렴으로 하자!
까마귀—돌려준 게 아니다. 실이 제 발로 갔다.
연이—알아. 그래도 고마워.
까마귀—…고맙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두 번째 종이 울렸다. 해시계의 바늘이 마지막 그림자를 붙잡았다. 해는 거의 다 먹혀 있었다.
영냥이—연이야. 해를 밀어 올려. 노래로.
연이—노래로? 나 노래방 사십칠 점인데?
영냥이—그러니까. 사십칠 점의 노래로.
모카—야, 나도 아까 삑사리 났어. 너 혼자 창피한 거 아니야.
연이—그거 위로야?
모카—공범끼리 하는 계산이야.
연이는 숨을 들이켰다. 재판정에서 말이 불이 되던 감각이 떠올랐다. 그때는 화가 났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연이—맛있어져라.
연이의 목소리가 불씨가 되었다. 날카로운 글자 대신 둥근 불빛이 광장 위로 퍼졌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불을 하나씩 받아 들었다.
연이—다 같이! 간장 두 숟갈!
백 개의 불씨가 하늘로 올라갔다. 먹힌 해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검은 그늘이 불에 데인 것처럼 움찔했다.
그늘이 찢어졌다. 그 틈으로 빛이 쏟아졌다. 해시계의 바늘이 짧은 그림자를 바닥에 정확히 꽂았다. 정오였다.
그때 찢어진 그늘 속에서 검은 손이 쏟아져 나왔다. 손가락은 사람들도 해도 아닌, 단 하나만 향했다. 까마귀였다.
목소리—실패했구나, 아이야. 깃털을 거둔다.
까마귀—기다려 주세요. 아직, 아직 저는.
영냥이—누구냐. 모습을 보여라.
목소리—모자 쓴 고양이로구나. 서두르지 마라. 너는 아직 내 몫이 아니다.
검은 손이 까마귀를 감쌌다. 가면이 산산이 부서졌다. 가면 뒤에 있던 것은 마이크를 쥔 소년의 그림자였다.
연이—안 돼!
연이가 몸을 날렸다. 앞발이 소년의 손끝에 닿았다. 따뜻했다. 다음 순간 손끝은 연기처럼 빠져나갔다.
까마귀—나도.
까마귀—나도, 같이 부르고 싶었어.
검은 손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의 앞발 안에는 회색 깃털 하나만 남아 있었다.
해가 섬 한가운데로 올라왔다. 지붕과 골목과 바다가 제 색을 되찾았다. 파도가 철썩,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광장 사람들의 손등에서 회색 도장이 녹아내렸다.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쉰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말이었다.
연이—할머니가 말했어. 방금 할머니가.
영냥이—뭐라고 했지.
모카—맛있었다고. 내 꼬치. 우리 할머니 꼬치랑 똑같다고.
연이—거봐. 별 다섯 개 넘봐도 된다니까.
모카—…다섯 개는 아직이야. 네 개 반.
영냥이—모카야. 너 울고 있어.
모카—기름 튀어서 그래! 눈에!
연이—지금 불도 안 켰는데?
해시계 바늘 끝에서 두 글자가 떠올랐다. 丙午. 한낮의 해와 한낮의 말. 글자는 연이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사주 글자 회수 · 月柱: 丙午]
[ 年 □□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 ] 4/8
연이—반 채웠다! 이제 반만 더!
영냥이—남은 반이 더 어렵다.
연이—그런 말은 좀 이따 하면 안 돼? 지금은 축하 타임이야.
영냥이—월주다. 네 계절의 기운. 丙은 상관, 午 속 丁은 식신. 오늘 둘 다 써 봤지.
연이—응. 하나는 꼬치 태우고 하나는 꼬치 굽고.
영냥이—정확하다.
연이는 앞발을 펼쳤다. 회색 깃털이 그 위에 있었다. 깃털 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
연이—그 애 이름도 모르는데. 같이 부르고 싶었대.
모카—그 녀석, 할머니 가게 간판을 뜯어 간 놈이야.
연이—알아. 그래도.
모카—…그래도, 노래는 같이 부를 수 있었겠지. 오늘처럼.
영냥이—깃털이 남았다. 끝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지는 해였다. 강가에 연잎 배가 떠올랐다. 다음 섬으로 가는 배였다.
연이—모카. 같이 갈래?
모카—왜 내가.
연이—공범이잖아. 공범이 공범 버리면 그게 무슨 공범이야.
모카—남의 대사 훔치지 마.
모카는 불씨 단지를 앞치마로 감쌌다. 할머니의 국자도 챙겼다. 북 대장이 배 앞까지 따라와 상자를 두드렸다. 쿵, 톡톡, 쿵.
모카—불씨는 내가 지켜. 너는 사고만 치지 마.
연이—사고 치는 건 내 특기인데?
모카—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배가 출렁였다. 연이가 난간을 붙잡는 사이 회색 깃털이 앞발에서 빠져나가 바람을 탔다.
연이—아, 깃털!
영냥이—바람이 가져갔다. 깃털은 돌아오는 길을 안다.
연이—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영냥이—방금 지어냈다.
연이는 북 대장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이의 손목에 금실 흉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연이—북 대장. 네 이름, 내가 꼭 찾아올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자를 가장 크게 두드렸다.
배에 오르기 직전, 영냥이는 모카와 눈이 마주쳤다. 모카의 시선이 영냥이의 오른 앞발로 내려갔다.
모카—정오 끝났어.
영냥이—다음 섬에서 말하겠다.
모카—고양이는 약속을 미루는 동물이야?
영냥이는 대답 없이 배에 올랐다. 하얀 털 아래 傷이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언덕 위. 지는 해를 등지고 검은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바람이 광장에서 회색 깃털 하나를 실어 왔다. 연이의 앞발에서 날아간 깃털이었다.
검은 앞발이 깃털을 눌렀다. 호랑이는 한참 깃털을 내려다보다가 망토 안쪽에 넣었다.
검은 호랑이—삑사리 섞인 노래로 해를 띄우다니. 별 다섯 개.
검은 호랑이—비웃음 없는 노래라. 그런 게 있으면, 처음부터 말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