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11 · 14 / 73

목소리 없는 돼지

말을 잃은 꽃돼지가 요리와 그림과 몸짓으로 섬을 움직인다. 까마귀 가면 아래 소년의 얼굴이 보인다.

한글 약 2,779자 · 읽는 시간 약 7분

지하 부엌의 불씨 단지 앞에 셋이 둘러앉았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열어도 소리가 나는 쪽은 둘뿐이었다.

영냥이—내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어. 미안해.

모카—고양이 잘못 아니야. 하지 말라는 걸 굳이 한 돼지 잘못이지.

연이—(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얄밉지.)

연이는 입을 크게 벌렸다 닫았다. 바람 빠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목 안쪽이 빈 상자 같았다.

영냥이—까마귀가 가져간 건 목소리만이 아니다. 말로 나가는 길 전체다. 상관의 길.

모카—그럼 정오 공연은 끝났네. 첫 소리 낼 사람이 말을 못 하는데.

연이—(첫 소리는 너라니까!)

연이는 앞발로 모카를 가리켰다. 모카는 고개를 저었다. 연이가 다시 가리켰다. 모카가 더 세게 고개를 저었다.

모카—손가락질하지 마. 나 안 해.

영냥이—연이야, 글로 써 봐.

모카가 벽에 걸린 작은 칠판을 내렸다. 연이는 분필을 입에 물고 글자를 썼다. 모카 너 해.

마지막 획을 긋자마자 글자들이 회색으로 바래더니 먼지처럼 흩어졌다. 칠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연이—(글도 안 돼?)

모카—와. 까마귀 진짜 꼼꼼하네. 세금 걷는 사람 같아.

영냥이—글도 말을 전하는 길이니까. 까마귀가 그 길까지 막아 버렸어.

모카—그럼 이 돼지는 이제 아무것도 못 하는 거야?

연이—(아무것도라니.)

연이는 칠판을 다시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글자 대신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그라미 둘레에 짧은 선을 여러 개 그었다. 해였다.

그림은 바래지 않았다. 분필 가루가 칠판 위에 하얗게 남았다.

영냥이—그림은 아직 되는구나.

모카—해 아래 꼬치. 꼬치 옆에 웃는 얼굴. …또 꼬치 공짜 얘기야?

연이—(정답.)

영냥이—말로 쏟아내는 힘을 상관, 손으로 만들어 내는 힘을 식신이라고 해. 까마귀가 막은 건 말 쪽이야. 만드는 힘은 남아 있어.

연이—(그럼 아직 반은 남았다는 거잖아!)

연이는 칠판에 그림을 더 그렸다. 시장. 석쇠. 줄 선 사람들. 그 사람들 손등의 도장이 조금씩 지워지는 그림.

모카—시장에서 꼬치를 굽자고? 말도 없이?

연이는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림 속 돼지 옆에 수달을 그렸다. 수달은 실제보다 조금 더 잘생겼다.

모카—…왜 나를 잘생기게 그려.

영냥이—아부다.

연이—(아부 아니거든. 미래의 모습이거든.)

모카—좋아, 하자. 대신 조건 있어. 나는 굽기만 해. 손님 앞에는 안 서.

영냥이—손님 앞에는 말 못 하는 돼지가 선다. 공평하군.

연이—(완벽한 팀이다.)

회색 시장 한가운데. 모카는 버려진 수레를 끌어다 석쇠를 올렸다. 연이는 수레 앞에 칠판을 세웠다. 해와 꼬치와 웃는 얼굴.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칠판을 힐끗 보고 지나갔다. 공짜 음식은 이 섬에서 함정이라는 뜻이었다.

모카—봐. 아무도 안 오잖아.

연이는 꼬치 하나를 들고 길 한가운데로 나갔다. 그리고 먹는 시늉을 했다. 아주 과장되게.

연이—(음음음. 이 맛이야. 이 맛.)

연이는 한 입 먹고 눈을 감았다. 두 입 먹고 앞발로 볼을 감쌌다. 세 입 먹고 바닥에 드러누워 버둥거렸다.

모카—저게 뭐 하는 거야.

영냥이—리뷰다. 별 다섯 개짜리.

지나가던 아이 하나가 걸음을 멈췄다. 손등에 도장이 하나. 웃음을 빼앗긴 아이였다. 아이는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돼지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떨렸다. 웃음이 나오려다 도장에 걸렸다. 연이는 꼬치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한 입 베어 물었다. 손등의 회색 도장 귀퉁이가 그을린 종이처럼 옅어졌다. 아이가 웃었다. 소리는 없었지만 분명 웃었다.

모카—…진짜네. 도장이 탔어.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 수레 쪽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셋. 다음에는 열. 줄이 생겼다.

모카—꼬치가 모자라! 고양이, 반죽 좀 해!

영냥이—나는 앞발이 이 모양이다.

모카—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말 몰라?

영냥이—그냥 고양이 아니다.

모카—그냥이든 아니든 반죽은 백 번 치대.

영냥이—모자 쓴 고양이의 자존심이 반죽에 섞이고 있다.

연이—(자존심 들어간 반죽이면 쫄깃하겠다.)

영냥이는 결국 반죽 그릇을 끌어안았다. 모자 챙과 하얀 털에 밀가루가 뽀얗게 묻었다. 지켜보던 아이들의 어깨가 들썩였다.

연이는 줄 선 사람들에게 꼬치를 나눠 주었다. 말 대신 손짓을 했다. 뜨거우니까 호호. 맛있으면 엄지. 다 먹으면 꼬치는 여기.

연이—(말 안 해도 다 통하잖아!)

모카—손님들, 호호는 한 번만 하세요. 석쇠에 침 튀어요.

시장 저편에서 톡, 톡톡 소리가 났다. 북 대장이 수레 옆에 상자를 놓고 박자를 넣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고개가 그 박자에 맞춰 까딱거렸다.

회색 시장의 한구석이 아주 조금 색을 되찾았다. 꼬치 굽는 연기가 금빛으로 올라갔다.

그때 시장 지붕 위에서 쇳소리가 났다. 줄 선 사람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날개 그림자가 수레를 덮었다.

까마귀—무허가 영업. 무단 미식. 무단 박자.

까마귀—그리고 무언의 선동.

모카—말도 안 했는데 무슨 선동이야!

연이—(진짜 말 안 했어! 한 글자도!)

까마귀—웃음은 노래의 시작이다.

사람들이 뒷걸음질 쳤다. 연이는 꼬치 하나를 들고 까마귀 앞으로 걸어갔다. 앞발이 떨렸지만 꼬치는 똑바로 들었다.

연이—(너도 하나 먹어.)

까마귀—피고는 말할 수 없다.

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꼬치를 한 번 더 내밀었다.

까마귀의 날개가 꼬치를 쳐 냈다. 꼬치가 바닥에 굴렀다. 연이는 꼬치를 줍지 않았다. 대신 칠판을 끌어왔다.

영냥이—연이야, 물러서.

연이는 그림을 그렸다. 무대. 무대 위의 작은 사람. 무대 아래 웃는 사람들.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지우고, 다시 그렸다. 이번에는 손뼉 치는 얼굴로.

연이—(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날.)

까마귀가 그림을 보았다. 가면이 흔들렸다. 쩍. 가면 한가운데에 금이 갔다.

금 사이로 얼굴 하나가 비쳤다. 소년이었다. 마이크를 쥔 채 굳어 버린, 열대여섯 살쯤의 그림자.

모카—…사람?

까마귀—보지 마.

까마귀는 금 간 가면을 날개로 가렸다.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재판정에서 들었던 그 갈라짐이었다.

까마귀—보지 마. 웃지 마. 아무도.

까마귀는 날아올랐다. 깃털 몇 개가 떨어졌다. 그중 하나가 연이의 칠판 위에 내려앉았다. 검은 깃털이 그림 속 무대를 덮었다.

시장 사람들은 수레 곁에 남아 있었다.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누군가 바닥에 굴러간 꼬치를 주워 털고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할머니였다. 도장 셋 중 하나가 옅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연이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연이—(별 다섯 개 받았다.)

모카—울지 마. 너 울면 나도…, 아니 나는 안 울어.

영냥이—오늘 장사는 성공이다. 말 한마디 없이.

밤. 셋은 해시계 무대가 내려다보이는 지붕에 엎드려 있었다. 섬에서 가장 높은 무대 위에, 멈춘 해가 걸려 있었다.

해의 한쪽이 검게 먹혀 있었다. 처음 섬에 왔을 때는 손톱만 했던 그늘이 이제 해의 절반을 덮었다.

모카—어제보다 커졌어.

영냥이—우리가 시장에서 불을 켤수록 저쪽도 서두르는 거다.

연이—(저게 다 덮이면?)

영냥이—丙이 먹히면 이 섬은 밤에 갇힌다. 정오는 다시 오지 않는다.

연이—(그럼 내 꼬치 노점도 영원히 야시장이네.)

모카—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보여. 장사 생각이지.

모카—그럼 언제 해. 정오 공연.

영냥이—다음 종이 울릴 때. 해시계가 마지막으로 그림자를 만드는 순간.

연이는 목을 만졌다. 텅 비어 있었다. 첫 소리를 낼 수 없는 돼지가 정오 공연을 하겠다고 한 셈이었다.

연이—(나 진짜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아니야?)

모카—그 얼굴 하지 마.

모카가 연이의 머리를 앞발로 꾹 눌렀다. 서툰 손길이었다.

모카—오늘 시장에서 한 마디도 안 하고 사람 백 명 웃겼잖아. 말 잘하는 것보다 그게 더 어려워.

연이—(…모카가 칭찬했어.)

연이—(녹음해 두고 싶다. 아, 목소리가 없지.)

모카—칭찬 아니야. 사실 적시야.

연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모카는 연이 위에 앞치마를 덮어 주었다. 그러다 영냥이의 앞발을 보았다.

모카—고양이. 그 손 뭐야.

영냥이—아무것도 아니다.

하얀 털 사이로 그을린 살갗이 보였다. 傷. 어제보다 글자가 선명했다.

모카—재판정에서 다친 거지. 돼지 불에.

영냥이—말하지 마라. 이 아이한테는.

모카—왜. 쟤가 알아야 조심하지.

영냥이—알면 정오에 소리를 못 낸다. 나를 다치게 할까 봐.

모카는 한참 영냥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앞치마 끝을 당겨 자는 돼지의 귀까지 덮어 주었다.

모카—…정오 끝나면 말해. 안 그러면 내가 말해.

영냥이—수달이 고양이를 협박하는군.

모카—요리사는 원래 협박을 잘해. 불 앞에서 오래 버티려면.

아무도 없는 재판정의 높은 단상. 까마귀는 금 간 가면을 벗지 않은 채 웅크려 있었다. 품 안에서 솔과 미의 실이 반짝였다.

까마귀—그 돼지는 노래를 몰라. 그런데 왜.

까마귀는 금 간 틈을 날개 끝으로 더듬었다. 틈으로 바람이 들었다. 오래전 무대 위에서 맞았던 바람과 같은 냄새였다.

그때 단상 아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그림자 끝에서 검은 손가락 다섯 개가 피어났다.

목소리—흔들리는구나, 아이야.

까마귀—…아닙니다.

목소리—그 돼지의 목소리를 삼켰으니, 이제 정오를 삼킬 차례다.

목소리—해가 다 먹히는 날, 네 깃털도 다 거둔다. 남은 노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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