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잎 배가 다시 사주의 강 위로 미끄러졌다. 식신·상관의 섬이 뒤로 멀어지며, 아직 축제 냄새가 배어 있는 바람이 뺨을 스쳤다.
연이의 가슴 안쪽에서 두 개의 기둥이 조용히 빛났다. 乙亥. 丁未. 되찾은 글자는 이제 넷이었다.
모카—와아……. 진짜 배 타고 다니는 거였네요. 저 이 섬 백 년 살면서 한 번도 안 나가봤는데.
연이—백 년 동안 대기 줄만 섰다며.
모카—그 말 계속 하실 거예요?
연이—응. 재밌어서.
모카는 배 난간에 매달려 물을 들여다봤다. 강물 속에서 한자들이 물고기처럼 헤엄쳤다.
모카—근데요, 저 진짜 따라가도 되는 거예요? 저는 사주 글자 회수 같은 거 잘 모르는데.
연이—몰라도 돼. 나도 몰라.
모카—그게 더 불안한데요.
연이는 웃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아까부터 배 안이 너무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세 번은 잔소리가 날아왔을 타이밍이었다.
연이—네오.
네오는 뱃머리에 앉아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
네오—뭐지.
연이—아까부터 한마디도 안 하잖아.
네오—할 말이 없었다.
연이—너 할 말 없어도 하는 애야.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갈기 끝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모카—저기……. 네오님, 아까부터 숨소리가 좀 이상해요.
연이—숨소리?
모카—저 래퍼라서 숨소리는 좀 알거든요. 저건 들이켜는 소리가 아니라, 들이켠 척하는 소리예요.
연이의 등이 서늘해졌다. 무대에서 네오가 무릎을 꿇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네오—신경 쓸 것 없다. 곧 도착한다.
그리고 정말로, 안개 너머에서 섬이 나타났다.
이번 섬은 소리가 없었다.
식신·상관의 섬이 냄새와 음악으로 먼저 인사했다면, 이 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배가 선착장에 닿는 소리조차 물에 먹힌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모카—어……. 제 발소리가 안 나요.
연이—나도. 바닥은 분명 딱딱한데.
네오—인성의 도서관이다.
연이—인성?
네오—받아들이고, 새기고, 기억하는 힘. 배움과 기록의 자리다.
모카—그럼 여기 사람들은 다 공부만 해요?
네오—이 섬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섬 안쪽으로 들어서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섬은 통째로 하나의 서고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서가가 안개 속으로 솟아 있었다. 책장마다 책 대신 기억이 꽂혀 있었다. 어떤 것은 웃고 있었고, 어떤 것은 오래 울고 있었다.
지나갈 때마다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누군가의 오래된 하루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연이—…와.
그 감탄조차 소리가 되지 못하고 서가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모카—여기서는 랩 못 하겠는데요.
연이—드디어 조용해지겠네.
모카—그거 상처예요!
모카가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도 두 걸음 앞에서 사라졌다. 모카는 자기 입을 만져보고는 시무룩해졌다.
모카—이 섬 저랑 상성 최악이에요.
네오—그렇겠지. 여기는 꺼내는 섬이 아니라 담는 섬이다.
네오가 앞장섰다.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째에서, 그가 무너졌다.
쿵. 소리를 삼키는 섬에서, 그 소리만은 똑똑히 들렸다.
연이—네오!
연이가 달려갔다. 짧은 다리로 최대한 빨리. 네오는 옆으로 쓰러진 채 얕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금빛 갈기가 색을 잃고 있었다. 태양 같던 빛이 지금은 오래된 놋쇠처럼 탁했다.
모카—네오님! 네오님!
네오—…괜찮다.
연이—괜찮은 애가 왜 넘어져.
네오—발이 걸렸다.
연이—여긴 바닥이 평평해.
네오—…돌이 있었다.
연이—없어.
연이는 네오 옆에 주저앉았다. 화를 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먼저 떨렸다.
연이—무대에서도 그랬잖아. 무릎 꿇었잖아. 나 그거 봤어.
네오—봤군.
연이—보이게 넘어졌으면서 왜 못 본 척하래.
네오는 눈을 감았다. 짧은 침묵이 서가 사이를 채웠다.
모카—저기요, 네오님.
모카의 목소리가 낮았다. 처음 듣는 톤이었다.
모카—저 백 년 동안 대기 줄만 선 놈이라 아는 게 없어요. 근데 하나는 알아요.
모카—자기 혼자 다 하고 쓰러지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남은 사람은 평생 그 장면만 기억해요.
네오가 눈을 떴다.
모카—저 그거 이미 한 번 겪었어요. 그러니까 두 번은 싫어요.
연이는 모카를 돌아봤다. 그 수달의 헤드폰 아래 눈이 젖어 있었다.
네오—…미안하다.
연이—어, 방금.
네오—말하지 마라.
연이—너 방금 사과했어.
네오—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연이는 조금 웃었다. 사과할 줄 아는 걸 보니 아직 살아 있었다.
네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가 안쪽을 바라봤다.
네오—…어차피 이 섬에 온 이유가 그거다.
연이—뭔데.
네오—내가 쓰는 힘의 이름을, 너희에게 알려주려고.
네오가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느렸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서가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오래되었다. 종이 냄새가 흙냄새로 바뀌고, 흙냄새가 쇠 냄새로 바뀌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자리에, 다섯 색 실로 묶인 책 한 권이 서가 밖으로 반쯤 밀려 나와 있었다.
파란 실, 붉은 실, 노란 실, 흰 실, 검은 실. 다섯 가닥이 표지를 가로질러 묶고 있었다.
연이—이게 뭔데?
네오—오행식보. 五行息譜.
모카—…식보요? 먹는 거요?
네오—쉴 식(息)이다. 숨이라는 뜻이지.
연이—숨의 악보라는 거야?
네오—틀린 말은 아니군.
네오가 앞발을 대자 다섯 실이 스르르 풀렸다. 책이 저절로 펼쳐지며, 글자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행식보 · 五行息譜] · 운명 세계의 존재는 제 일간(日干)의 기운을 숨으로 돌려, 형(形)으로 꺼낸다. 이를 오행의 호흡이라 한다.
연이—일간이면……. 사주에서 나를 나타내는 글자?
네오—그렇다. 네 일주는 乙亥. 그 앞 글자, 乙이 네 일간이다.
연이—乙……. 나무?
네오—음목(陰木). 큰 나무가 아니라 덩굴이다. 감고, 잇고, 기어이 자라는 쪽.
글자가 다시 흘렀다.
[제1칙] 숨은 제 일간에서만 나온다. 남의 기운은 흉내 낼 수 있어도 꺼낼 수 없다.
[제2칙] 상생은 합기(合氣)하고, 상극은 파훼(破)한다. 곁에 선 자를 살리기도, 베기도 한다.
[제3칙] 숨은 나눠 쓰는 것이다. 형을 뽑을수록 제 숨이 줄고, 숨이 다하면 몸이 먼저 무너진다.
세 번째 문장이 떠오른 순간, 서가 전체가 아주 조용해졌다.
연이—…네오.
네오—말하지 마라.
연이—이거 네 얘기잖아.
네오—말하지 말라고 했다.
연이—무대에서 세 번 그었잖아! 세 번!
연이의 목소리가 서가를 울렸다. 소리를 삼키던 섬이 그 한 마디만은 삼키지 못했다.
네오는 오래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짧게 대답했다.
네오—그때 안 그었으면, 너희가 무너졌다.
연이—…바보야.
네오—가디언이다.
연이—바보 가디언.
모카—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오—둘 다 조용히 해라.
네오가 몸을 돌렸다. 서가 사이에 좁은 공터가 있었다. 오래전 누군가가 여기서 똑같은 걸 배웠던 자리처럼 보였다.
네오—보여주겠다. 한 번만이다.
연이—야, 숨 없다며!
네오—한 번은 있다.
네오가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이번엔 연이도 똑똑히 들었다. 공기가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가, 갈비뼈 안쪽에서 한 바퀴를 돌고, 발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어깨로 올라오는 소리.
금빛이 갈기 끝에서부터 발톱으로 흘러내렸다. 서릿발 같은 흰빛이었다.
네오—금(金)의 호흡. 일의 형 — 단금.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공터 맞은편 서가의 그림자가, 위에서 아래로 곧게 두 조각이 났다.
그림자만. 책장은 멀쩡했다.
모카—…어……? 뭐가 잘린 거예요?
네오—그림자를 잘랐다.
모카—그림자를 어떻게 잘라요?
네오—금은 형태를 정리하는 기운이다. 자를 것과 남길 것을 나눈다. 그러니 봉인도, 그림자도, 잘못 이어붙인 인연도 벨 수 있다.
연이—멋있는데 좀 무섭다.
네오—무서운 게 맞다.
네오가 앞발을 내렸다. 흰빛이 사그라들자, 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갔다.
연이—봐. 한 번에 저러잖아.
네오—그러니 다음은 너희 차례다.
연이—…나?
네오—乙木. 해봐라.
연이는 공터 한가운데에 섰다. 짧은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앞발을 들었다.
연이—어…… 어떻게 하는 건데?
네오—숨을 들이켜라. 그리고 네 안의 乙을 찾아라.
연이는 눈을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슴 안쪽에서 乙이 반응했다. 아주 작게, 덩굴이 한 마디 뻗는 느낌.
그리고 거기서 멈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이—어라.
다시. 숨을 들이켜고, 뱉었다. 아무것도.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에 연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모카—저……. 힘내세요?
연이—그 응원 지금 제일 아파!
연이는 앞발을 내리고 주저앉았다. 서가의 침묵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연이—왜 안 되는 거야.
네오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조용하게 말했다.
네오—제1칙을 다시 읽어라.
연이—숨은 제 일간에서만 나온다…….
네오—그 앞에 숨은 조건이 있다. 제 일간을, 제가 알고 있어야 한다.
연이—나 알아. 乙亥잖아. 되찾았잖아.
네오—글자는 되찾았지.
네오는 연이의 가슴께를 눈으로 가리켰다.
네오—하지만 너는 아직 그 글자를 읽지 못한다. 되찾은 것과 읽는 것은 다르다.
연이—…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네오—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너는 뭐라고 답하지?
연이—음……. 나무? 덩굴?
네오—그건 책의 답이다. 네 답이 아니야.
연이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네오—네 일간은 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문장이다. 그 문장을 아직 네가 못 쓰고 있는 것뿐이다.
연이—…그럼 언제 쓸 수 있는데.
네오—모른다.
연이—야!
네오—거짓말은 안 한다.
연이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자기가 제일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카—저기……. 연이 님.
연이—…왜.
모카—저도 백 년 동안 데뷔 못 했어요.
연이—그 얘기 지금 하는 거 반칙 아니야?
모카—근데 저 아직 안 접었잖아요.
연이가 고개를 들었다. 모카는 헤드폰을 목에 걸고, 노트를 꺼내 들고 있었다.
모카—저도 해볼래요. 제 일간, 뭐예요?
네오—너는 병화(丙火)다. 큰불이지.
모카—불이요? 저 수달인데요?
연이—물에 사는 놈이 제일 뜨거웠네.
모카—그거 좋은데요. 가사로 쓸게요.
네오—집중해라.
모카가 공터에 섰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카—어? 저도 안 되는데요.
네오—당연하다. 처음부터 되는 자는 없다.
연이—방금 나한테는 왜 그렇게 안 말했어?
네오—…실수했다.
연이—또 사과했어.
네오—안 했다.
모카는 열 번을 시도했다. 스무 번을 시도했다. 서른 번째에 이르자 헤드폰을 벗어 던졌다.
모카—아, 진짜! 왜 안 되는데!
모카의 목소리가 서가를 때렸다.
모카—백 년 기다렸어! 대기 줄만 섰어! 겨우 첫 줄 하나 썼는데! 나 이제 진짜 하고 싶은 거 생겼는데!
모카가 주먹을 쥐었다. 노트가 구겨졌다.
모카—저 사람들 또 무너지는 거 보기 싫다고!
팟.
모카의 발밑에서 불이 붙었다.
모카—화(火)의 호흡. 일의 박 — 불씨!
주홍빛이 확 번졌다. 모카를 중심으로 원이 그려지고, 잔불이 서가 사이로 흩어졌다.
모카—…어? 어어어?!
네오—멈춰라.
모카—어떻게요!
네오—숨을 세라. 넷에 들이켜고 넷에 뱉어라.
모카—저 랩할 때 숨 안 세는데요!
연이—지금 세!
불이 서가 쪽으로 기울었다. 종이 냄새가 순식간에 마른 냄새로 바뀌었다.
기억이 꽂힌 책장이었다. 누군가의 하루가, 누군가의 첫사랑이, 누군가의 마지막 인사가 꽂혀 있는 책장.
모카—안 돼. 안 돼요, 저거 태우면 안 돼요!
모카가 당황할수록 불이 커졌다. 화(火)는 마음을 그대로 받아 쓰는 기운이었다.
네오—연이.
연이—어!
네오—목생화(木生火)다. 나무는 불을 키우지만, 뿌리 없는 불은 나무가 붙잡는다.
연이—그게 무슨 말이야!
네오—가서 받쳐라. 지금.
연이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냥 뛰었다. 짧은 다리로, 불 한가운데로.
모카—오지 마요! 뜨거워요!
연이—뜨거우면 네가 무섭겠지!
연이가 모카의 손을 잡았다. 뜨거웠다. 정말 뜨거웠다. 그런데 놓고 싶지 않았다.
연이—모카. 너 지금 뭐가 제일 무서워?
모카—…이거 못 멈춰서, 다 태워버릴까 봐요.
연이—그럼 그거 붙잡을게. 내가.
그 순간이었다.
연이의 가슴 안에서 乙이 움직였다. 아까처럼 한 마디가 아니었다. 이번엔 손끝까지 흘러 내려왔다.
연이는 그제야 알았다. 자기 일간이 무엇인지.
연이—…아.
덩굴은 혼자 서는 나무가 아니다. 덩굴은 반드시 무언가를 붙잡아야 자라는 나무다.
혼자서는 한 뼘도 못 서면서, 붙잡을 것만 있으면 담벼락도 넘는 나무.
연이—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애였어.
연이는 웃었다. 처음으로,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연이—근데 붙잡을 게 있으면 되게 멀리 가.
연이가 숨을 들이켰다. 넷에 들이키고, 넷에 뱉었다.
연이—목(木)의 호흡. 일의 결 — 움.
청록빛 덩굴이 연이의 앞발에서 뻗어 나왔다. 서가를 향하던 불길을 감아 올리고, 다시 모카의 발밑으로 끌어내렸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대신 모여들었다.
덩굴이 감은 자리마다 불이 더 밝아졌다. 흩어지던 잔불이 하나의 심지로 모이며, 주홍과 청록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겹쳤다.
[합기 성립] · 木生火 — 목이 화를 살린다.
모카—…뜨거운데, 안 무서워요.
연이—그치? 나도.
불길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모카의 발밑에 손바닥만 한 불씨 하나만 남아, 조용히 타올랐다.
모카—…이거, 제 거예요?
네오—그렇다. 크기가 아니라 남아 있는 게 중요하다.
모카는 그 작은 불을 한참 들여다봤다. 그리고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이번엔 첫 줄이 아니라 두 번째 줄이었다.
연이—야, 네오. 나 했어. 봤지?
네오—봤다.
연이—칭찬해.
네오—…나쁘지 않았다.
연이—그거 너 최고 칭찬이지.
네오—해석이 빠르군.
연이는 신이 나서 덩굴을 한 번 더 뻗어봤다. 이번엔 서가 기둥을 감았다.
연이—봐봐. 이거 잡고 올라가면 위층도 갈 수 있겠는데?
네오—기둥은 놓아라. 오래된 서가다.
연이—조금만.
그때, 서가 위쪽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연이가 감은 기둥이 아니었다. 훨씬 위, 안개에 잠긴 층에서였다.
오래된 책장 하나가 통째로 기울었다. 그리고 연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모카—연이 님!
연이는 올려다봤다. 몸이 굳었다. 덩굴을 뻗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네오가 움직였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간 얼굴이었다.
흰빛이 번졌다. 떨어지던 책장이 공중에서 두 조각으로 갈라져, 연이의 양옆으로 비껴 떨어졌다.
연이는 무사했다.
…거의.
연이의 앞발 위, 방금 뻗어 있던 청록빛 덩굴이 함께 잘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앞발에, 가느다란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
연이—…어.
아프지는 않았다. 너무 정확하게 잘려서, 아픔이 늦게 왔다.
모카—연이 님! 피, 피 나요!
네오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연이는 네오를 봤다.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을 봤다.
네오는 겁에 질려 있었다.
연이—…네오?
대답이 없었다.
연이—야, 나 괜찮아. 이거 긁힌 거야. 진짜.
네오—…금극목(金克木).
연이—뭐?
네오—금은 나무를 벤다.
네오의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네오—제2칙이다. 상생은 살리고, 상극은 벤다. 내가 형을 뽑는 자리에 네가 있으면…….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연이—…내가 베인다고?
네오—그렇다.
서가가 조용했다. 이 섬은 소리를 삼키는 섬인데, 이번 침묵은 섬 탓이 아니었다.
연이—근데 너 방금 나 살렸잖아.
네오—살리려고 벴다.
연이—…
네오—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게 제일 문제다.
연이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이 세계에 온 뒤로 네오는 늘 답을 알고 있었다. 답을 모를 때조차, 모른다고 단단하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네오는 자기 발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처음 본 물건처럼.
모카—…네오님.
네오—거리를 둬라. 내가 형을 뽑을 때는, 반드시.
연이—싫어.
네오—연이.
연이—싫다고. 나 덩굴이야.
연이는 피가 배어 나온 앞발을 들어 보였다.
연이—덩굴은 붙잡아야 자라. 떨어져 있으면 그냥 바닥에 눕는 풀이야.
네오—…그러다 잘린다.
연이—잘리면 또 자라. 그거 나무의 특기야.
네오는 오랫동안 연이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연이는 그가 삼킨 말이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때, 발밑이 젖었다.
연이—…어?
서고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섬이라, 물이 차오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검은 물이었다.
네오—물러서라. 전부.
검은 물이 서가를 타고 올랐다. 물이 닿은 책장부터 글자가 지워졌다. 기억이 번지고, 풀리고, 사라졌다.
울고 있던 기억도, 웃고 있던 기억도 똑같이 회색이 되었다.
모카—저거 뭐예요!
네오—수(水)의 호흡이다.
연이—저것도 호흡이야?
네오—오행은 다섯이다. 우리 쪽에만 있을 리가 없지.
[水息 · 침식] · 스민다. 삼킨다. 지운다.
검은 물속에서 형체가 일어섰다. 사람도 짐승도 아니었다. 물이 사람 모양을 흉내 낸 것에 가까웠다.
그것은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아주 오래 젖어 있던 것 같은 인상이었다.
네오—연이. 모카. 저건 베어도 다시 이어진다.
연이—그럼 어떡해!
네오—물은 금을 무디게 하고, 불을 끄고, 나무를 키운다. 저건 우리 셋을 전부 알고 온 거다.
모카—그건 진짜 최악인데요!
검은 물이 밀려왔다. 모카가 반사적으로 불을 붙였다.
치익. 불이 꺼졌다. 수극화(水克火). 모카가 뒤로 밀려났다.
모카—으악!
네오가 그었다. 물이 두 조각 났다가, 곧바로 다시 붙었다.
네오—…역시.
네오의 숨이 짧아졌다. 세 번째 형은 없을 것 같았다.
연이는 생각했다. 아주 빠르게.
물은 금을 무디게 하고, 불을 끄고, 나무를 키운다.
연이—…나무를 키운다고?
연이가 앞으로 나섰다.
네오—연이! 물러서라!
연이—수생목(水生木)이잖아! 저거 나한테는 밥이야!
네오—…뭐?
연이—목의 호흡. 일의 결 — 움!
연이가 검은 물 한가운데로 덩굴을 뻗었다. 물을 베는 게 아니라, 마시는 방식이었다.
덩굴이 검은 물을 빨아들이며 굵어졌다. 청록빛이 점점 짙어지고, 물의 형체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하지만 검은 물은 기억을 지우는 물이었다.
연이의 눈앞이 흐려졌다. 모카의 이름이 잠깐 떠오르지 않았다.
연이—…어? 어……. 너 이름이…….
모카—모카요! 모카! 백 년째 무명인 그 모카요!
연이—아, 맞다. 미안.
네오—연이! 그건 마시면 안 되는 물이다!
연이—근데 이거 놓으면 서고 다 지워져!
연이의 덩굴이 떨렸다. 감당할 수 있는 양을 넘고 있었다.
그때 모카가 앞으로 뛰었다.
모카—연이 님! 아까 뭐라 그랬어요!
연이—뭐!
모카—붙잡을 게 있으면 멀리 간다면서요!
모카가 연이의 등에 손을 얹었다.
모카—화의 호흡. 일의 박 — 불씨!
모카의 불이 연이의 덩굴을 타고 올랐다. 젖은 덩굴은 타지 않았다. 대신 뜨거워졌다.
덩굴이 빨아들인 검은 물이, 덩굴 안에서 끓기 시작했다.
[합기] · 木生火 — 물을 머금은 나무를 불이 끓인다.
검은 물이 김이 되어 빠져나갔다. 지워졌던 글자들이 김 속에서 잠깐씩 다시 보였다.
물의 형체가 반쯤 줄어들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네오—…지금이다.
네오가 숨을 들이켰다. 아주 길게. 연이는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알았다. 마지막 숨이었다.
연이—네오, 하지 마! 너 숨 없잖아!
네오—연이. 뒤로.
연이—싫다고 했잖아!
네오—…그럼 붙잡아라.
연이—…어?
네오—덩굴은 붙잡아야 자란다며. 나도 그렇다.
연이의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뛰었다.
연이는 덩굴을 뻗어 네오의 앞다리를 감았다. 꽉.
이번엔 잘리지 않았다. 네오가 그 방향을 피해 몸을 틀었기 때문이다.
네오—금의 호흡. 일의 형 — 단금.
흰빛이 끓어오른 물의 형체를 세로로 갈랐다. 이번엔 다시 붙지 않았다. 끓어서 이을 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검은 물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으로 흩어지며, 서가 아래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물이 빠진 자리마다 지워졌던 글자들이 천천히 돌아왔다. 전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었다.
[水息 · 침식 격퇴] · [기억 서고 일부 손실]
네오가 주저앉았다. 이번엔 숨기지도 않았다.
연이—네오!
연이가 달려가 덩굴로 그를 받쳤다. 네오는 밀어내지 않았다.
네오—…셋이면 되는군.
연이—뭐?
네오—혼자 세 번 긋는 것보다, 셋이 한 번씩 하는 편이 낫다.
모카—그거 저 칭찬이죠?
네오—확대 해석이다.
모카—저 확대 해석 잘해요!
연이가 웃었다. 웃다가 앞발이 따끔해서 인상을 썼다. 아까 그어진 자리였다.
네오가 그걸 보고 시선을 돌렸다.
연이—야. 흉터 생기면 자랑할 거야.
네오—…자랑할 일이 아니다.
연이—내가 정하는 거야.
세 사람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고는 다시 조용해졌지만, 아까와는 다른 조용함이었다.
[오행의 호흡 개방] · [네오 · 金息 — 일의 형 단금] · [연이 · 木息 — 일의 결 움] · [모카 · 火息 — 일의 박 불씨]
연이는 자기 앞발을 내려다봤다. 청록빛이 아직 손끝에 옅게 남아 있었다.
연이—…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애.
예전이라면 그 문장이 아팠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건 약점이 아니라, 그냥 자기 일간이었다.
모카는 노트에 계속 뭔가를 적고 있었다. 네오는 눈을 감고 숨을 세고 있었다. 넷에 들이켜고, 넷에 뱉는 소리.
연이도 따라 세어봤다. 하나, 둘, 셋, 넷.
그러다 문득, 물이 빠져나간 바닥을 봤다.
물기가 마른 자리에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이 아니었다. 빗자국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굵게 그어진 검은 비의 흔적.
연이—…비?
서고에는 지붕이 있었다. 이 안에 비가 올 리 없었다.
연이는 네오를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굳었다.
네오는 그 빗자국을 보고 있었다. 아까 발톱을 내려다볼 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그건 겁이 아니었다. 그리움에 훨씬 가까웠다.
연이—네오. 저거 알아?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이—또 대답 안 하네.
네오—…아직 말할 때가 아니다.
연이—그 말 제일 수상한 거 알지.
네오—알고 있다.
서고 깊은 곳에서, 아주 희미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삼키는 섬에서, 그 소리만은 삼켜지지 않았다.
제14화 · 숨을 세는 법 — 끝. 제15화 「강 건너 황금 냄새」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