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 창밖으로 검은 실이 팽팽하게 뻗어 있었다. 시계탑 쪽으로 당겨질 때마다 연이의 앞발 숫자가 한 칸씩 무너졌다.
연이—누구세요! 아니, 누구든 좋으니까 이것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윤달—그러려고 왔어요. 숙녀분, 앞발 이쪽으로.
영냥이—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연이를 맡길 순 없어.
윤달—그럼 고양이님 발톱으로 끊어 보시든가요. 실보다 숙녀분 앞발이 먼저 잘릴 텐데.
남자가 맨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 한가운데에 동전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 안은 밤하늘보다 까맸다.
연이—손에… 구멍이 있어. 진짜 구멍이야.
바람이 거꾸로 불었다. 검은 실이 구멍 쪽으로 휘어 들어가더니, 국수 가락처럼 후루룩 빨려 사라졌다.
[ 보유 시간 71:41:09 — 정지 ]
연이—멈췄어. 숫자가 멈췄어!
윤달—윽… 오늘 건 좀 짜네요.
남자가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구멍 가장자리가 아까보다 쌀 한 톨만큼 넓어져 있었다.
영냥이—그 구멍, 쓸 때마다 커지는 거야?
윤달—눈이 좋으시네. 맞아요. 그래서 아껴 써요. 숙녀분 같은 분한테만.
시계탑 꼭대기의 그림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망토 자락이 한 번 펄럭이더니, 그림자는 바늘 뒤로 사라졌다.
연이—(봤어. 우리가 실 끊는 걸 보고도, 그냥 갔어.)
다음 날 아침. 빵집 굴뚝에서 첫 김이 올랐다. 연이는 앞치마를 두르고 반죽 앞에 섰다.
루나 언니—접을 때는 손바닥 말고 손목으로요. 반죽이 숨 쉴 자리를 남겨 두고.
연이—숨 쉴 자리! 영냥이도 맨날 그 소리 해요. 숨, 숨, 숨.
연이의 앞발은 생각보다 반죽에 잘 맞았다. 말랑한 것이 말랑한 것을 접으니 결이 고르게 쌓였다.
루나 언니—처음치고 잘하네요. 루나보다 낫다.
루나—언니! 그건 비밀이랬잖아!
창밖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모카가 가게 앞에서 국자로 냄비를 두드리며 줄을 세우고 있었다.
점심 무렵, 루나 언니가 연이의 앞발에 손목을 대었다. 째깍. 예약되어 있던 숫자가 진짜 숫자로 바뀌었다.
[ 제 손으로 번 시간 +00:12:00 ]
연이—12분. 내가 번 12분이야.
루나 언니—겨우 12분인데 그렇게 좋아요?
연이—겨우가 아니에요. 이건 안 써요. 액자에 넣을 거예요. 마음속 액자.
루나 언니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흐린 얼굴 한가운데 입꼬리만 또렷했다.
연이—루나야, 어제 그 아저씨한테도 빵 하나 갖다 주자. 실 끊어 준 사람.
루나—어제? 어떤 아저씨?
연이—보라색 천막. 장갑 낀. 손에 구멍 있는 아저씨.
루나—그런 사람이 왔었어? 언니, 어제 우리 가게에 손님 왔었어?
루나 언니—글쎄… 기억이 안 나네. 바빴나 봐.
맞은편 꼬치 좌판의 상인도 고개를 저었다. 보라색 천막? 이 시장엔 그런 천막 없는데.
연이—(어제 일인데. 다 같이 봤는데.)
빵집 문이 열렸다. 보랏빛 천막의 남자가 하품을 하며 들어왔다. 루나는 그를 처음 보는 손님처럼 맞았다.
루나—어서 오세요! 처음 오셨죠?
윤달—네, 처음이에요. 매일 처음이에요.
연이—아저씨. 다들 아저씨를 잊었어요. 하룻밤 만에.
윤달—알아요. 원래 그래요. 하루 지나면 얼굴이, 사흘 지나면 이름이 흐려지죠.
연이—그런 걸 왜 웃으면서 말해요.
윤달—울면서 말하면 빵을 공짜로 주실까 봐요. 그럼 반칙이잖아요.
연이—난 기억해. 어제 일, 하나도 안 빼고.
윤달—오늘은요.
윤달은 그 말만 하고 빵 하나를 집었다. 손목을 내밀었지만 째깍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계산대가 그의 손목을 읽지 못했다.
루나—손님, 손목이… 텅 비어 있어요.
윤달—네. 그래서 늘 외상이에요. 이 숙녀분이 갚아 주실 거예요.
연이—내 12분은 건들지 마요. 그건 액자 거예요.
영냥이—지금 그 표정은 별 다섯 개네.
연이—영냥이까지! 별점은 내 전문이거든!
그때 가게 유리창이 덜컥 흔들렸다. 파란 비행선이 빵집 바로 위까지 내려와 그림자를 드리웠다.
비행선 배에서 밧줄 사다리가 툭 떨어졌다. 사다리를 타고 파란 조끼를 입은 하얀 토끼 하나가 우아하게 미끄러져 내렸다.
청토끼—안녕하세요~ 청토끼 금융입니다. 오늘 만기 고객님 찾아왔어요.
루나 언니—아직 오늘이잖아요. 저녁까지는 시간이 있다고 했잖아요.
청토끼—계약서 뒷면 읽어 보셨죠~ 담보는 내일 하루, 만기는 오늘 정오. 지금 정오 1분 전이네요?
시계탑의 종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열두 번째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토끼가 손가락을 튕겼다.
루나 언니의 가슴께에서 빛나는 모래가 흘러나왔다. 모래는 공중에서 작은 모래시계로 모여, 토끼의 앞발에 쏙 들어갔다.
루나—언니 거 돌려줘! 언니 내일 돌려줘!
청토끼—걱정 마세요~ 오늘은 멀쩡하실 거예요. 내일이 없을 뿐이죠.
영냥이—정체를 밝혀라. 너는 누구의 손이지.
청토끼—어머, 눈치 빠른 고양이님. 저는 회장님 손 중에서 최약체랍니다~
청토끼—손가락으로 치면 새끼손가락쯤? 그래도 이 섬 하나쯤은 혼자 굴려요.
연이—회장님이 누군데요!
청토끼—그건 알려 드리면 안 돼요. 대신 좋은 걸 알려 드릴게요.
토끼가 연이 앞으로 폴짝 뛰어왔다. 분홍 코를 킁킁거리더니 눈을 반달처럼 접었다.
청토끼—어머머. 고객님 명식, 시간 칸이 비었네요? 그래서 운이 늘 한 박자 늦게 오시죠?
[ 年 □□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 ] 4/8
청토끼—청토끼 운 대출! 빈 칸을 저희가 채워 드려요. 이자는 아주 조금. 담보는 고객님 내일 몇 개만.
연이—(빈칸이 채워진다고? 그럼 집에 한 발 더…)
영냥이—연이야. 앞발 내밀지 마.
윤달—그 빈칸, 빌린 걸로 채우면 평생 이자 내요. 제가 산증인이에요.
토끼의 귀가 쫑긋 섰다. 윤달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토끼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청토끼—어머! 누군가 했네. 묘시 고객님! 아직 이 섬에 계셨어요?
연이—묘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청토끼—이분 태어난 시가 묘시였거든요. 새벽 다섯 시 무렵. 이자 대신 제가 맛있게 먹었죠~
윤달의 장갑 낀 오른손이 떨렸다. 웃던 입꼬리는 그대로였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윤달—맛은 어땠어요. 내 새벽.
청토끼—이슬 맛? 조금 짰어요. 누가 울던 새벽이었나 봐요~
윤달—숙녀분, 고양이님. 저 모래시계만 떨어뜨려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먹을게요.
청토끼—감히 최약체를 건드려요? 최약체도 지갑은 두껍답니다!
토끼가 앞발을 휘두르자 금빛 동전이 쏟아져 방패처럼 겹겹이 쌓였다. 동전마다 누군가의 하루가 새겨져 있었다.
영냥이—금이라면 내가 다룰 수 있어. 엉킨 결부터 끊을게.
영냥이의 발톱이 동전 방패를 사선으로 그었다. 금이 갔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동전들이 서로를 붙잡고 버텼다.
그 틈으로 윤달이 맨손을 밀어 넣었다. 구멍이 동전을 한 닢, 두 닢, 수십 닢 삼켰다. 방패가 물 빠진 모래성처럼 꺼졌다.
윤달—크… 오늘 외상이 많이 늘었네.
연이—내놔! 언니 내일 내놔!
연이가 몸을 던졌다. 돼지 머리가 토끼 배에 정통으로 꽂혔다. 모래시계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나 토끼의 긴 귀가 채찍처럼 휘어 모래시계를 낚아챘다. 토끼는 그대로 사다리에 매달렸다.
청토끼—최약체는 원래 도망이 빠르답니다~ 내일은 금고에 잘 넣어 둘게요. 시계탑 아래 제일 깊은 칸에!
비행선이 구름 속으로 떠올랐다. 흩날린 광고지 한 장이 연이의 코에 붙었다. 시간이 모자라세요?
연이—놓쳤어… 코앞에서.
가게 밖에서 모카가 국자를 내던졌다. 저 토끼 이 섬 별 마이너스 다섯 개. 그 목소리가 유리창 너머로 들렸다.
밤이 되자 섬의 째깍 소리가 조금 느려졌다. 빵집 지붕 위에 연이와 윤달이 나란히 앉았다.
연이—손, 아파요?
윤달—구멍이 커질 때만요. 평소엔 그냥 바람 드는 정도.
연이—아까 그 토끼 말. 진짜예요? 태어난 시를 먹혔다는 거.
윤달—진짜예요. 3년 전에 저도 그 앱을 받았거든요. 고객센터, 우주.
연이—아저씨도요? 그럼 선배였어요?
윤달—선배죠. 졸업을 못 해서 그렇지.
윤달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섬의 하늘에서는 시곗바늘 같은 별자리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윤달—처음 떨어진 섬이 여기였어요. 시간이 모자라서 그 토끼한테 빌렸죠. 하루, 이틀, 일주일.
윤달—못 갚았어요. 이자가 원금보다 빨리 자라더라고요.
윤달—그래서 담보를 가져갔어요. 제가 태어난 시. 새벽 다섯 시 무렵, 엄마가 처음 저를 안은 시간.
윤달이 장갑을 벗고 손바닥을 달빛에 비추었다. 구멍 너머로 별이 보였다.
윤달—시가 빠진 자리가 여기로 옮겨 왔어요. 빈 시간, 공망. 뭐든 빨아들이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윤달—여덟 글자 중에 일곱 개로는 문이 안 열려요. 집에 가는 문이요.
연이—그래서 3년이나 여기서…
윤달—덕분에 궁합 실력은 늘었죠. 3년 내내 생년월일시만 물었으니까.
연이—그게 자랑이에요?
지붕 끝에 남색 모자 끝이 쏙 올라왔다. 영냥이가 소리 없이 다가와 둘 사이에 앉았다.
영냥이—사람들이 너를 잊는 것도 그 구멍 때문인가.
윤달—고양이님도 오셨네. 네, 시가 없으면 기억에 걸릴 고리가 없어요. 머릿속에서 미끄러져 나가요.
윤달—윤달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에요. 있어도 없는 달. 저한테 딱이죠.
연이—그럼 진짜 이름은요?
윤달—묘시랑 같이 금고에 있어요. 시계탑 아래 제일 깊은 칸. 아까 그 토끼가 친절하게 알려 줬잖아요.
영냥이—금고를 지키는 짐승이 있다고 들었다. 장부를 든 짐승.
윤달—네. 검은 망토, 줄무늬. 거둔 시간을 장부에 하나하나 적어요. 숙녀분도 이미 아실걸요.
연이—(시계탑 위의 그림자. 호랑이.)
연이는 앞발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 멈춘 71:41:09 옆에서 작은 글씨 12분이 반짝였다.
연이—내 12분은 내가 벌었어. 언니 내일은 언니가 번 거고, 아저씨 이름은 아저씨 거야.
연이—남의 걸 가져간 쪽이 도둑이지. 되찾는 쪽은 도둑 아니야.
연이—그럼 털자. 금고.
윤달—털자고요? 시계탑 금고를요?
영냥이—연이야. 방금 금고를 털자고 했어?
지붕 아래 창문에서 모카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털자는 말 들었어. 나 냄새로 경비 홀리는 거 잘해.
윤달—하하… 3년 만에 처음 듣는 계획이네요. 무모해서 마음에 들어요.
영냥이—무모한 게 아니라 무계획이다. 계획은 내가 세운다.
연이—거봐. 영냥이도 하자는 거잖아.
그때 빵집 다락문이 벌컥 열렸다. 잠옷 차림의 루나가 맨발로 지붕 위까지 기어 올라왔다.
루나—언니가… 언니가 안 일어나. 아무리 불러도, 흔들어도 안 일어나.
[ 루나 언니 · 남은 오늘 05:59:59 ]
숫자가 한 칸 내려갔다. 내일을 빼앗긴 사람의 오늘이 소리 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연이—여섯 시간. 해 뜨기 전까지 금고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