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냄새는, 강 건너에서부터 났다.
물비린내도, 꽃향기도 아니었다. 금속이 데워진 냄새. 누군가의 하루가 저울에 올라가 녹는 냄새.
연잎 배가 방향을 틀기도 전에, 연이는 알았다. 다음 섬은 사람을 숫자로 세는 곳이라는 걸.
강물의 색이 서서히 변했다. 비겁의 섬 앞에서는 은빛, 식상의 섬 앞에서는 무지갯빛이더니, 이제는 탁한 황금빛이었다. 예쁜데 어딘가 텁텁한, 오래 만진 동전 같은 색.
연이—…이상하다. 반짝이는데 왜 하나도 안 설레지.
연이는 문득 자기 방을 떠올렸다. 카드가 삑삑거리던 아침, 매운 제육으로 둔갑한 삼각김밥, 만료된 쿠폰. 돈 앞에서 늘 반 박자씩 손해 보던 자신을.
연이—네오. 저 냄새 뭐야. 코가 아니라 지갑이 시큰거리는데.
네오—재성(財星)의 섬이다. 재물의 기운, 벌고 쥐고 불리는 힘이지. 사주에서 재성은 돈과 욕망을 다스리는 글자야.
네오—기억해라. 저 섬에서는 공짜가 제일 비싸다.
연이—공짜가 제일 비싸다… 우리 학교 앞 무료 타로 부스랑 같은 원리네.
네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강물이 점점 노랗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별빛이 아니라, 가라앉은 금화가 반사하는 빛이었다.
연이—강바닥에 금화가 깔려 있어! 저거 주우면—
네오—줍는 순간 이자가 붙어. 강바닥까지 내려간 손은 대개 강바닥의 것이 되고.
연이—…안 주울게.
연이는 뻗으려던 앞발을 슬그머니 거뒀다. 그러고도 삼 초쯤, 금화를 아쉬운 눈으로 곁눈질했다.
네오—…아직도 보고 있잖아.
연이—보는 건 무료잖아. …아마도.
네오—이 섬에선 그것도 장담 못 해.
연이—뭐야 무서워. 눈알 사용료 이런 거 없지? 없다고 해 줘.
연이—근데 네오. 우리 목적지 인성의 도서관이라며. 왜 배는 재성의 섬으로 가?
네오—인성의 도서관은 섬이 아니야. 재성의 섬 아래에 뿌리를 둔 곳이지. 재극인, 돈과 문서는 뗄 수 없는 한 쌍이라 두 권역이 한 뿌리로 이어져 있어. 입구는 저 섬 어딘가에 있고.
연이—돈의 섬 밑에 책의 뿌리라. 은행 지하에 도서관이 있는 격이네. 대출이란 말도 겹치고.
네오—…그 농담, 생각보다 정확해서 정정할 수가 없네.
연이—봐, 나도 가끔 정답 말한다니까. 별점 하나 올려 줘.
네오—별점은 접수하지 않는다. 여전히.
연잎 배는 노란 강물을 미끄러지듯 갈랐다. 물 밑에서 금화들이 별처럼 깜빡이며 배를 따라왔다. 마치 손님을 유혹하는 상점 진열장 같았다.
연이—근데 신기하다. 비겁의 섬은 거울투성이, 식상의 섬은 무대투성이더니, 여긴 아예 강바닥까지 돈이네. 섬마다 성격이 이렇게 달라?
네오—섬은 곧 네 사주의 기둥이니까. 비겁은 너 자신, 식상은 네가 표현하는 것, 재성은 네가 쥐려는 것, 인성은 네가 기대는 것. 섬을 다 돌면, 흩어진 네 글자가 다 모인다.
연이—…내 안에 그렇게 많은 방이 있었구나. 나는 나 하나인 줄 알았는데.
네오—사람은 원래, 자기 안에서 제일 길을 잃지.
연이—방금 그거 또 명언. 너 진짜 교양 교수 아니야? 커리큘럼 있는 고양이.
네오—사자다. 그리고 커리큘럼은 없다.
식상의 섬을 떠난 뒤로, 배 위가 조금 조용해졌다. 모카가 없는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노래 한 소절 없는 물길은 두 배로 길었다.
연이—모카, 잘하고 있겠지.
네오—불은 꺼지지 않는다. 옮겨붙을 뿐이다.
그리고 연이는 서고에서 본 검은 빗자국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네오가 그 자국을 바라보던, 그리움에 가까운 얼굴도.
이윽고 안개가 걷히고, 재성의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항구 전체가 금빛이었다. 지붕도 간판도 등불도, 심지어 갈매기 부리에도 금박이 입혀져 있었다.
연이—우와… 번쩍번쩍한데? 뭐야, 여기 다 부자야?
네오—금박은 종이 한 장 두께다. 이 섬의 부(富)도 대체로 그 두께지.
연이—종이 한 장 두께의 부라. 시적이네. 근데 왜 이렇게 서늘하게 들리지.
네오—진실은 원래 조금 서늘하다. 특히 반짝이는 것 뒤에 숨어 있을 때는.
항구 광장에는 거대한 황금 저울 조형물이 서 있었다. 한쪽 접시에는 금화 더미, 다른 쪽에는 '오늘의 신용'이라 적힌 텅 빈 접시.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신을 대하듯이.
연이—저 저울한테 인사하는 거야? 여기 사람들 진짜 저울 믿네.
네오—믿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거다. 재성이 신이 되면, 사람은 값이 매겨지는 순간 존엄을 잃거든. 이 섬 사람들은 그걸 매일 목격하며 산다.
부두에 내리자 소리가 먼저 밀려왔다. 짤랑, 짤랑. 걸음마다 금화 소리, 흥정 소리. 그리고 딸깍, 딸깍, 저울이 기우는 소리.
부두 난간마다 환전상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오늘의 운(運) 시세」라 적힌 칠판에는, 사람 이름 대신 숫자들이 빼곡했다. 어제보다 값이 오른 이름, 반토막 난 이름.
연이—저기 저거 봐. 사람 운을 주식처럼 사고팔아? 내 운도 상장돼 있으면 지금쯤 상장폐지 직전이겠는데.
네오—…네 운은 이 섬에 상장할 수도 없다. 심사에서 탈락한다.
연이—방금 그거 위로야, 디스야? 판정 좀.
네오—객관적 분석이다. 늘 그렇듯.
골목마다 노점이 즐비했다. 김이 오르는 만두, 설탕을 입힌 과일, 금박을 뿌린 꿀떡. 연이의 배가 정직하게 꼬르륵 울었다.
연이—저 꿀떡 하나만 먹으면 안 될까? 딱 하나. 여행자 기력 보충 차원에서.
연이가 노점으로 다가가자, 주인이 웃으며 꿀떡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저울 위에 올렸다. 떡이 아니라, 연이의 눈빛을.
주인: 「이 꿀떡, 값은 금화 한 닢. 아니면… 손님의 '오늘 제일 좋았던 기억' 한 조각.」
연이—기억으로 계산이 돼요?
네오—안 돼. 물러나라. 재성의 섬에서 값을 '마음'으로 치르면, 그 마음은 두 번 다시 안 돌아와.
네오가 연이의 앞발을 툭 눌러 노점에서 떼어냈다. 주인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꿀떡을 도로 내려놓았다.
연이—…큰일 날 뻔했네. 꿀떡 하나에 추억을 팔 뻔했어.
네오—이 섬에서 배고픔은 참을 수 있어도, 호기심은 못 참으면 파산한다. 기억해라.
연이—명심할게. 근데 저 꿀떡, 진짜 맛있어 보였단 말이야. 나중에 금화로 꼭 사 먹을 거야.
네오—…그때는 내가 사 주지. 금화로. 정당하게.
연이—어? 네오가 사 준다고? 이것도 마음속 수첩에 적어야겠다. 오늘 두 번째 이변.
지나가는 주민들 손에는 하나같이 작은 저울이 들려 있었다. 사과 한 알을 사면서도 저울. 인사를 나누면서도 저울.
연이—인사를 왜 저울에 달아…?
네오—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서다. 이 섬에서 빚은 목숨보다 무겁거든.
골목 어귀에서 한 남자가 저울을 든 채 다른 남자의 소매를 붙들고 있었다. 「자네가 삼 년 전 나한테 웃어 준 값, 아직 안 갚았어. 이자까지 쳐서 금화 두 닢일세.」 붙들린 남자는 말없이 지갑을 열었다.
연이—…웃어 준 것도 빚이 돼? 그럼 나 아까 네오한테 실실 웃은 것도 청구되는 거야?
네오—다행히 나는 채권 추심을 안 한다. 네 웃음은 회수 가치가 낮아서.
연이—방금 두 번째 디스. 오늘치 적립 완료.
연이는 시장을 둘러보며 자꾸 마음이 서늘해졌다. 반짝이는 건 많은데, 웃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들 무언가를 갚느라, 웃을 여유까지 저당 잡힌 얼굴이었다.
연이—네오. 여기 사람들, 부자인데 왜 하나도 안 행복해 보여?
네오—가진 걸 세는 데 익숙해지면, 없는 것만 보이거든. 재성은 원래 그런 힘이야. 잘 쓰면 살림이고, 잘못 쓰면 감옥이지.
그 말끝에, 시장 한복판의 가장 높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건물이 금박이라면, 그 건물만은 순금처럼 묵직하게 빛났다. 꼭대기엔 파란 토끼 문장이 걸려 있었다.
연이—저 파란 토끼 마크… 여기저기 다 붙어 있네. 간판에도, 저 노란 종이에도.
네오—청토끼 금융그룹. 이 섬의 빚을 거의 다 쥐고 있는 곳이야. 조심해라. 저기서 빌린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거든.
바로 그때, 광장 한쪽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벽으로 붙었다. 길 한복판으로, 잿빛 옷을 입은 한 무리가 줄지어 끌려가고 있었다.
모두 눈이 풀려 있었다. 발목엔 저울추가 달린 사슬. 걸음마다 짤랑, 짤랑, 갚아야 할 숫자가 소리를 냈다. 몇몇은 얼굴의 윤곽마저 흐릿했다.
연이—…저 사람들 왜 저래. 얼굴이, 지워지고 있어.
네오—'채무 노동 봉사단'이야. 갚을 게 없어서, 자기 자신을 담보로 넘긴 사람들이지. 오래 일할수록 이름이 지워져. 갚을 사람이 사라지면, 빚도 없어지는 거니까.
연이—그게 무슨 논리야! 사람을 지워서 빚을 없앤다니!
네오—재성의 극단이지. 재물이 사람을 다스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숫자가 돼. 숫자는 지워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줄의 끝, 한 여자가 무거운 금고를 밀며 지나갔다. 밀가루가 묻은 앞치마를 아직 벗지 못한 채였다. 연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연이—…앞치마. 빵집…?
여자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연이는 그 앞치마를 오래 눈으로 좇았다. 아직 만나지도 않은 누군가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네오—…봤지. 저게 이 섬의 진짜 얼굴이다. 금박 밑에 사슬이 있어. 함부로 빚지지 마라. 여기선 친절도 이자가 붙으니까.
연이—네오. 나 방금 결심했어. 이 섬, 그냥 지나가지만 않을래. 저렇게 지워지는 사람들, 최소한 한 명은 되찾아 줄 거야.
네오—…한 명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연이—그럼 두 명. 욕심나면 세 명. 원래 나 참견쟁이야.
네오의 눈이 시장 게시판의 시세표를 훑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네오—다음 보름에 금리가 두 번 뛴다. 환전은 오늘 해 두는 게 낫다.
연이—…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시세표에는 오늘 값밖에 없는데.
네오의 귀가, 아주 잠깐 움찔했다.
네오—…통계다.
연이—통계란 말이야, 편리하지. 근거를 안 보여줘도 되잖아.
연이는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네오는 가끔, 아직 오지 않은 날짜를 어제처럼 말한다.
연이—(비겁의 섬에서도 그랬어. 식상의 섬 무대 위에서 갈기가 금빛으로 탔을 때도. 이 고양이… 아니 사자, 분명 뭔가 알고 있어. 자기 얘기만 쏙 빼고.)
연이—네오. 너 혹시 미래에서 왔어?
네오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정말 반의 반 박자였다. 다른 사람은 놓쳤겠지만, 연이는 놓치지 않았다.
네오—…무슨 소설 같은 소리냐. 나는 그냥 오래 산 가디언이다. 오래 살면 패턴이 보여.
연이—방금 멈칫했어. 확실하게. 이것도 마음속 수첩에 적어 둔다? '네오, 미래 질문에 멈칫함.'
네오—…수첩이 참 부지런하군.
연이—됐어. 지금은 안 캐물을게. 근데 네오. 언젠가 말하고 싶어지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줘. 나 입 무거워. …가끔은.
네오—…기억해 두지.
네오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시선을 강 쪽으로 돌렸다. 그 옆얼굴이 어딘가, 아주 오래된 그리움을 닮아 있었다. 연이는 그 표정의 이름을 아직 몰랐다.
시장 한복판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앞쪽에서 소란이 터졌다.
「도둑이야!」 누군가 외쳤고 군중이 파도처럼 갈라졌다. 그 한가운데 조그만 흰 토끼가 바구니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분홍 원피스에, 귀가 몸보다 길어 보이는 아기 토끼였다. 바구니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났다.
루나—아니야! 훔친 거 아니야! 이건 배달이야! 우리 언니가 구운 빵이란 말이야!
장정 하나가 저울을 들이밀며 으르렁댔다. 빵 여섯 개 값을 치른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군중이 토끼를 둥글게 에워쌌다. 저마다 손에 든 저울을 들이밀며, 값을 매기듯 아이를 훑어봤다. 「저 토끼, 요새 빵집이 망했다던데.」 「망한 집 애가 훔치는 건 순서지.」
루나—아니야… 아니야! 우리 언니 빵은 훔칠 필요도 없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으니까 다들 줄 서서 산단 말이야!
아무도 아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섬에서 말은 저울에 올려야 무게가 생겼고, 어린 토끼의 눈물은 저울 위에서 늘 가벼웠다.
연이—잠깐만요! 애가 배달이라잖아요! 영수증이 없다고 도둑이 되는 건 아니죠!
군중의 시선이 이번엔 꽃돼지에게 쏠렸다. 말하는 꽃돼지는 이 섬에서도 흔치 않은 모양이었다.
네오—저울을 빌려주시죠. 빵 여섯 개, 무게를 달아 보겠습니다.
네오는 빵을 저울에 올렸다. 그리고 주문서 쪽지를 그 옆에 나란히 올렸다.
네오—주문서의 기재 중량과 실측이 일치합니다. 훔친 물건에 주문서가 동봉되는 경우는 제 통계상 없습니다.
군중이 웅성거리다 흩어졌다. 저울의 섬에서, 저울로 증명된 것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으르렁대던 장정도 머쓱하게 저울을 거뒀다. 다만 물러나면서 한마디를 흘렸다. 「…망한 집 애랑 엮이면, 다음 장부엔 네 이름이 오른다.」
연이—어머, 협박도 저울에 달아서 하시나 봐요? 방금 그거, 무게 하나도 안 나가던데요.
장정이 코웃음을 치며 사라졌다. 연이는 그 뒷모습에 대고 혀를 쏙 내밀었다. 꽃돼지가 혀를 내미니, 위협이라기보단 인형극에 가까웠다.
네오—…도발은 나중에. 우리는 눈에 띄면 안 되는 처지다.
연이—말하는 꽃돼지랑 말하는 사자가 같이 다니는데, 이미 글렀지 않아?
네오—…부정할 수가 없군.
루나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바구니를 꼭 안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올려다봤다. 큰 눈이 감탄으로 반짝였다.
루나—우와… 방금 완전 멋있었어! 저울 딱 올려서 증명하는 거! 어른들도 아무 말 못 했어!
연이—멋있는 건 네오지. 나는 옆에서 소리만 질렀고.
네오—소리도 전략이다. 시선을 끄는 동안 내가 저울을 준비했으니까.
연이—어? 방금 그거 나 칭찬한 거야? 네오가? 오늘 눈 온다.
네오—…분석이다.
루나—…고마워. 흑. 진짜, 진짜 고마워.
연이—울지 마. 빵은 무사하잖아. 여섯 개 다.
루나—응! 언니가 구운 빵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으니까, 한 개도 잃어버리면 안 돼!
토끼는 눈물을 소매로 쓱 닦더니, 금세 해처럼 웃었다. 감정의 환승이 빨랐다.
루나—나는 루나! 언니랑 둘이서 빵가게 해! 너희는 여행자야? 꽃돼지는 처음 봐!
연이—연이야.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돼지지만 원래는 인간이야. 이쪽 갈기 달린 고양이는 네오.
네오—…사자야.
루나—우와, 고양이가 말도 해! 크고 하얀 고양이!
네오—사자라니까.
루나—이름이 사자야? 근데 왜 고양이처럼 생겼어?
네오는 반박을 포기했다. 이 섬에 온 뒤 그가 내린 두 번째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첫 번째는 물론, 강바닥 금화를 안 주운 것.
연이—(네오가 말싸움에서 지는 거, 오늘 처음 봤다. 기념으로 마음속 수첩에 적어 둬야지.)
루나—연이, 네오! 나 너희 따라가도 돼? 빵 배달 끝났고, 언니 가게 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 재밌을 것 같아!
연이—당연하지. 길 안내해 주면 우리야 고맙지. 대신 위험한 데는 우리 뒤에 있기.
루나—위험은 내 전문이야! 배달하다 개한테 세 번, 깡패한테 두 번 쫓겨 봤거든. 다 따돌렸어!
네오—…자랑할 일인지 모르겠군.
루나—살아남았으니까 자랑이지! 언니가 그랬어. 도망도 실력이라고.
연이—언니가 좋은 말 많이 해 주셨나 보다. 어떤 분이야?
루나—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제일 빵 잘 굽는 사람!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키만 커! 이따 보면 알아. 분명 연이 너도 좋아할 거야.
루나가 언니 얘기를 할 때만은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그 애에게 언니는 가족이자 세상 전부인 모양이었다. 연이는 그 애의 걸음에 맞춰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루나는 앞장서 걸으며 종알종알 섬을 소개했다. 어느 골목 환전상이 악질인지, 어느 국숫집이 이자 없이 곱빼기를 주는지. 배달로 다져진 지리 감각은 어른 뺨쳤다.
연이—너 완전 걸어다니는 지도네. 내비게이션보다 낫다.
루나—헤헤, 배달 삼 년 차니까! 이 섬 골목이란 골목은 다 내 발바닥이 외우고 있어!
골목을 돌던 루나가 갑자기 물웅덩이 앞에서 멈칫하더니, 폴짝 뛰어 정확히 한가운데를 밟았다. 첨벙. 물이 튀는데도 옷은 신기하게 젖지 않았다. 물이 그 애를 피해 가는 것 같았다.
연이—어? 너 물 밟았는데 안 젖었어. 방수 토끼야?
루나—몰라~ 나 원래 물이랑 친해! 비 오는 날 배달도 제일 잘해. 물이 나한테는 안 달라붙거든. 언니는 나보고 물강아지래.
네오—…(물이 저 아이를 피한다. 재성의 섬 토끼치고, 기운의 결이 다르군. 물의 결이야.)
네오의 눈이 잠깐 루나에게 머물렀다. 무언가를 알아본 눈빛이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루나—그리고 저기! 저기가 우리 가게야! 굴뚝에서 빵 냄새 나지?
골목은 시장의 소란에서 한 겹 물러난 조용한 길이었다. 담장마다 작은 화분, 창가마다 말린 밀 다발. 돈 냄새 대신, 오래 사람이 산 냄새가 났다.
루나—여기 우리 동네야! 저 집 할머니는 매일 아침 우리 빵 두 개 사 가시고, 저 집 아저씨는 곰보빵만 좋아해. 아, 저 담벼락은 내가 다섯 살 때 넘어져서 이 빠진 데—
루나의 자랑은 골목 절반쯤에서 뚝 끊겼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골목까지 흘러나와야 할 빵 냄새가, 오늘은 없었다.
연이—…루나. 원래 이맘때 빵 냄새 나?
루나—응… 항상. 골목 끝에서부터 코를 잡아끄는데. 오늘은…
루나가 코를 킁킁댔다. 큰 귀가 불안하게 쫑긋 섰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뛰기 시작했다.
루나가 가리킨 골목 끝에 작고 둥근 가게가 보였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지 않았다.
연이도 뒤따라 뛰었다. 짧은 다리가 자갈에 걸려 두 번 넘어질 뻔했지만, 이번엔 웃기지 않았다. 앞서 뛰는 작은 등이, 자꾸 무너질 것 같아서.
루나의 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루나—…이상하다. 이 시간엔 항상 굽는데. 언니는 하루도 안 쉬는데.
가게 문에는 노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금빛 도장이 박힌, 두껍고 관청 냄새가 나는 종이였다.
「기한 내 미상환 시 — 본 점포 및 부속 일체를 회수함. 청토끼 금융그룹.」
루나—언니…?
루나가 문을 밀치고 뛰어들어갔다. 빵 냄새 대신, 식어버린 오븐 냄새가 흘러나왔다.
가게 안은 손님을 맞다 만 채로 멈춰 있었다. 반죽이 담긴 그릇은 굳어 갈라졌고, 오븐 앞 의자는 뒤로 밀려나 있었다. 누군가 급히 끌려 나간 자리였다.
루나—언니! 언니 어딨어! 나 왔어, 배달 다 하고 왔단 말이야!
대답은 없었다. 대신 계산대 위에, 아까 문에 붙어 있던 것과 같은 노란 종이가 한 장 더 놓여 있었다. 파란 토끼 도장. 그리고 그 아래, 급하게 눌러쓴 언니의 글씨 한 줄.
「루나야. 저녁은 냉장고에 있어. 이자만 갚고 금방 올게. 문단속 잘 하고.」
루나—…금방 온댔는데. 언니는 약속 어긴 적 없는데. 근데 오븐이 다 식었어. 이거 몇 시간은 지난 거야.
루나가 종이를 꼭 쥐었다. 작은 어깨가 떨렸다. 방금까지 섬을 통째로 외우던 씩씩한 배달 토끼는 온데간데없고, 언니를 잃은 어린아이만 남아 있었다.
연이—…이자를 갚으러 갔는데 왜 사람이 안 돌아와. 이거 갚으러 간 게 아니라 끌려간 거잖아.
네오—청토끼 금융은 돈만 담보로 잡지 않아. 갚을 게 없으면, 사람 자체를 장부에 올려. '채무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연이—사람을… 담보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네오—재성의 섬에서는 말이 된다. 여기선 갚지 못한 하루가, 갚는 사람의 몸으로 청구되거든.
연이는 굳은 반죽 그릇을 내려다봤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던 빵. 그 빵을 굽던 손이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생각만으로 속이 서늘했다.
루나—…나 어떡해. 나 혼자 언니 어떻게 찾아. 이 섬에서 청토끼한테 대드는 사람 아무도 없단 말이야.
연이는 무릎을 굽혀 루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짧은 앞발로, 그 애의 떨리는 손을 감쌌다.
연이—루나. 나 봐. 나 방금 저 시장에서 너 도둑 아니라고 증명한 거, 봤지? 우린 그런 거 좀 하거든.
연이—언니, 같이 찾자. 한 조각도 안 남기고 다 돌려받아 줄게. 빵도, 언니도, 언니 얼굴도. 약속.
루나—…진짜? 돼지가… 아니, 연이가 진짜 도와줄 거야?
연이—돼지 아니고 연이. 그리고 응, 진짜. 대신 나중에 언니 빵 제일 큰 걸로 하나 예약.
루나—…응! 백 개도 줄게! 언니 찾으면, 백 개!
루나가 눈물을 소매로 쓱 닦았다. 아까처럼 빠른 환승은 아니었지만, 젖은 눈 속에 작은 불씨 하나가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불씨였다.
네오—…목적지가 하나 늘었군. 인성의 도서관 입구를 찾기 전에, 청토끼 본사부터다.
연이—근데 네오. 우리 셋이 청토끼 본사에 그냥 쳐들어가면… 그게 통해?
네오—힘으로는 안 통한다. 저긴 계약과 저울의 성이야. 이기려면 저들의 규칙 안에서, 저들보다 정확해야 해.
연이—규칙 안에서 이기기. …좋아, 그거 내 특기 아닌데, 네 특기잖아. 나는 옆에서 소리 지르고.
네오—…또 그 역할 분담이군. 뭐, 나쁘지 않다.
루나—그럼 나는? 나도 뭐 할래! 길 안내는 이미 최고고!
연이—너는… 우리 마스코트. 그리고 언니 얼굴 제일 먼저 알아볼 사람. 그게 제일 중요한 역할이야.
루나—마스코트! 좋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마스코트가 돼 줄게!
창밖으로, 시장 한복판의 순금빛 건물이 저녁놀을 받아 붉게 타올랐다. 파란 토끼 문장이, 마치 이쪽을 내려다보며 웃는 것 같았다.
제15화 · 강 건너 황금 냄새 — 끝. 제16화 「탄 빵의 냄새」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