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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3부 · 재성의 섬

EP.16 · 17 / 44

탄 빵의 냄새

탄 빵의 냄새. 잘못 구운 것 하나가 무엇을 무너뜨리는지 보게 된다.

한글 약 9,255자 · 읽는 시간 약 22분

가게 안은 좁고 따뜻했지만, 어딘가 지쳐 있었다.

밀가루 냄새와 버터 향이 벽에 배어 있었다. 오래 사랑받은 부엌만이 가지는 냄새였다. 그런데 그 다정한 냄새 밑에, 탄내 한 줄기가 섞여 있었다. 오늘 태운 빵의 냄새가 아니라, 며칠째 반복된 실수의 냄새였다.

창가엔 시든 화분이 하나. 물 줄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연이는 그 마른 잎을 보며, 이 집의 시간이 어디서부터 멈췄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연이—…따뜻한데 슬픈 냄새야. 이상하다. 냄새에도 표정이 있네.

선반의 빵들은 단정했다. 그런데 계산대 뒤편은 종이의 산이었다. 주문서에 독촉장에 계산기, 그리고 저울까지.

벽에는 색 바랜 그림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서툰 크레용으로 그린, 토끼 두 마리가 손을 잡은 그림. 아래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언니랑 나랑 빵집'이라 적혀 있었다. 루나가 어릴 때 그린 모양이었다.

연이—…이 그림, 예쁘다. 이 가게, 그냥 빵집이 아니라 두 사람 집이구나.

연이는 문득 마음이 아팠다. 저 종이 산은 그냥 빚이 아니었다. 저 그림 속 웃음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산이었다.

가게 한쪽엔 '오늘의 빵' 칠판이 걸려 있었다. 메뉴 대신, 지워지다 만 글씨가 남아 있었다. '오늘도 맛있게 드세요 —'. 뒷말은 지워지고 없었다. 인사를 끝맺을 기운조차 없었던 날의 흔적이었다.

이자를 갚으러 나갔다 겨우 돌아온 언니가 오븐 앞에 서 있었다. 넋이 나간 사이, 트레이 위의 식빵은 새까맣게 타 있었다.

루나—언니! 문에 붙은 종이 뭐야? 회수가 뭐냐고!

언니라 불린 여인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눈 밑의 그늘이 앞치마보다 짙었다.

루나 언니—…루나. 배달은 잘 다녀왔니. 어머, 손님도 계셨네요. 어서 오세요. 빵은… 아, 이건 탔구나.

루나가 바구니를 내던지고 언니 품으로 뛰어들었다. 언니는 밀가루 묻은 손으로 그 작은 등을 토닥였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매일 하던, 그래서 더 애틋한.

루나—언니 왜 안 웃어. 왜 이렇게 야위었어. 나 하루 나갔다 왔을 뿐인데.

루나 언니—괜찮아. 오븐 앞에 오래 서 있어서 그래. 우리 루나는 배달 다녀오느라 힘들었지? 다리 아프겠다.

연이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저릿했다. 야윈 건 언니인데, 언니는 동생 다리 걱정을 먼저 했다. 사랑은 늘 자기가 더 힘든 쪽에서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루나 언니—손님들, 서서 뭐 해요. 앉으세요. 아침에 구운 소보로 아직 있어요. 탄 건 제가 먹을 테니, 성한 걸로 드세요.

연이—감사합니다. 근데… 성한 건 언니가 드시고, 손님은 원래 눈치 보면서 아무거나 먹는 거예요.

루나 언니—어머, 재밌는 손님이네. 말하는 꽃돼지도 처음 보고요. 이 섬엔 별별 게 다 있지만, 웃겨 주는 손님은 오랜만이에요.

연이—저 원래 인간이에요. 이상한 앱 눌렀다가 이 세계 끌려와서 꽃돼지가 됐어요. 사주 글자 되찾으러 섬 여행 중이고요. 믿기 힘드시죠? 저도 아직 안 믿겨요.

루나 언니—…믿어요. 이 세계에선, 사람이 저울에 얼굴을 뺏기기도 하는걸요. 꽃돼지가 된 인간 하나쯤은, 오히려 귀여운 축이죠.

연이—귀엽다는 말, 오늘 세 번째 들었어요. 이 몸도 나쁘진 않네. …아니, 나쁜데 익숙해지는 중이에요.

네오—…적응력 하나는 인정한다.

연이—근데 언니. 이렇게 힘든 날 처음 본 저희한테 빵까지 내주시고. 왜 이렇게 착하세요.

루나 언니—…착한 게 아니라, 습관이에요. 힘든 날일수록 남한테 뭐라도 쥐여 주고 싶어져요. 그래야 제가 아직 뭔가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확인되거든요.

연이는 그 말에 목이 살짝 메었다. 다 빼앗긴 사람이, 남에게 줄 것을 찾는다. 그 마음이 너무 곱고, 그래서 너무 아팠다.

연이는 소보로 하나를 앞발로 조심히 집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 손이 다 빠져나갔다는데도, 그 손이 만든 빵은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연이는 문득 코끝이 시큰했다. 재성의 섬에서 처음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걸 만난 기분이었다. 저울에 올려도 바늘이 꿈쩍 안 할, 그런 맛.

연이—…언니. 이 맛은요, 청토끼가 아무리 회수해 가려고 해도 절대 못 가져가요. 왜냐면 이건 저울에 안 올라가거든요. 이미 제 안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연이—…어? 이거 진짜 맛있어요. 루나가 자랑한 게 과장이 아니었네.

루나—거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그랬지! 언니 빵은 먹으면 힘이 나!

루나는 언니 옆에 딱 붙어 앉아, 자기 몫의 빵 절반을 다시 언니 접시에 슬쩍 올려놓았다. 언니는 못 본 척, 그 절반을 다시 루나 쪽으로 밀었다. 소리 없는 실랑이가 오래 이어졌다.

연이는 그 실랑이를 보며, 짧은 앞발로 제 몫의 빵을 조금 뜯어 루나 접시에 얹었다. 이번엔 실랑이 없이, 루나가 활짝 웃으며 받았다.

루나—연이 착하다! 근데 왜 안 먹고 줘? 돼지… 아니 연이도 배고프잖아!

연이—나는 아까 시장에서 눈으로 꿀떡 실컷 먹었거든. 눈요기도 요기야.

루나—눈으로 어떻게 먹어?

연이—이 세계 오기 전엔, 나 매일 눈으로만 먹었어. 통장 잔고 보면서. 그거 진짜 배부른 거 아는 사람만 안다니까.

루나는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연이가 웃으니까 따라 웃었다. 야윈 언니도,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식은 빵 하나로도, 부엌은 잠깐 따뜻했다.

연이는 생각했다. 이 온기를 지키는 게, 어떤 사주 글자를 되찾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어쩌면, 그게 곧 재성의 진짜 글자일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탄 식빵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오늘 처음 빵을 태운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연이—(빵을 저렇게 잘 굽는 사람이 식빵을 태웠어.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듯이. …손이 아니라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거야.)

루나—언니 요즘 자꾸 태워. 예전엔 눈 감고도 안 태웠는데.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자꾸 계산기만 두드려. 나 걱정할까 봐 안 그런 척하는데, 나 다 알아.

루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 몰래 하는 말이었다. 다섯 살배기 같던 아이가, 그 순간만은 누구보다 어른스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힘듦을 알아채는 건, 나이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연이—(…이 남매, 서로를 위해 서로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둘 다 '난 괜찮아'라고. 제일 안 괜찮은 사람들이 제일 잘 하는 거짓말.)

네오—…연이. 저 계산대 뒤 종이 산, 그냥 빚 독촉이 아니야. 봐라. 저 필체, 저 도장. 전부 한 곳에서 나왔어. 이건 개인 채무가 아니라 조직적인 회수 작업이다.

연이—조직적? 그럼 저 언니가 뭘 특별히 잘못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표적이었다는 거야?

네오—…그럴 가능성이 높아. 이 정도로 촘촘한 덫은, 우연히 걸리는 게 아니거든. 누군가 이 가게를 콕 집어 노렸어.

연이—저, 실례지만 문에 붙은 통지서 봤어요. 청토끼 금융그룹이라는 데서 온 거요.

루나 언니—…동생이 신세를 진 모양이네요. 일단 앉으세요. 식은 빵이라도, 빵은 빵이니까요.

이름을 묻자 언니는 웃으며 고개만 저었다. 이 섬에서는 이름도 담보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다들 그녀를 그냥 빵집 언니라고 불렀다.

네오가 그 말에 잠시 시선을 내렸다. 이름을 빼앗긴 자의 이야기 앞에서, 그는 늘 조금 조용해졌다. 마치 어딘가에, 이름을 지워 가며 사는 누군가를 아는 사람처럼.

연이—(또 저 표정이야. 네오는 '이름 없는 사람'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져. …언젠가 물어봐야지. 오늘은 아니지만.)

네오—…이름은 되찾을 수 있다. 담보로 잡힌 것뿐이라면, 계약만 깨면 돌아와. 문제는, 담보로 잡힌 걸 잊어버리는 거지. 잊으면, 되찾을 생각조차 안 하게 되거든.

루나 언니—…맞아요. 요즘은 가끔, 제 원래 얼굴이 어땠는지도 가물가물해요. 그게 제일 무서워요. 잃는 것보다, 잃은 걸 잊는 게.

연이—그럼 우리가 기억할게요. 언니 원래 얼굴, 루나랑 똑같다면서요. 그럼 안 잊어버려요. 옆에 매일 거울이 있는 거잖아요.

루나 언니—…거울이라. 예쁜 말이네요. 그 앤 제 거울이고, 저는 그 애 오븐이고.

루나 언니—…솔직히요. 저 하나 지워지는 건, 이제 그러려니 해요. 근데 무서운 게 하나 있어요. 제가 다 지워지고 나면, 루나가… 이 섬에서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 그 애 담보로 잡을 사람이, 저밖에 없거든요.

연이—…언니.

루나 언니—루나는 아직 몰라요. 제가 이자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면 분명, 자기 다리라도 팔아서 갚겠다고 할 거예요. 그 앤 그런 애니까. 그래서 더, 이 계약을 그 애가 알기 전에 끝내야 해요.

연이—…끝낼게요. 루나가 자기 탓이라고 한 번도 생각 안 하게, 깔끔하게. 언니, 약속 하나만 해요. 우리가 내일 이기면, 그다음부턴 혼자 짊어지지 말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기. 그거 되게 어려운데, 연습하면 돼요. 제가 옆에서 계속 시킬게요.

루나 언니—…이상한 손님이에요, 정말. 남의 인생에 이렇게까지. 근데… 고마워요. 그 '이상함'이, 오늘 밤엔 참 따뜻하네요.

촛불이 조용히 흔들렸다. 식은 차 두 잔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겹쳤다. 남이었던 사람과 남이었던 사람이, 하나의 밤을 같이 새우고 있었다.

연이는 계산대 뒤 종이 산을 곁눈질했다. 주문서 뭉치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연이—이 주문서들, 전부 대량 주문이네요? 식빵 이백 개, 파이 삼백 개. 가게 규모에 비하면 너무 큰데요.

루나 언니—석 달 전부터 갑자기 큰 주문이 몰려왔어요. 축제 납품에 상단 도시락에 뱃사람 건빵까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아니,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루나 언니—주문을 받으려면 오븐을 늘려야 하고, 오븐을 늘리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그분이 오셨어요. 아주 친절한 얼굴로.

「특별 금리로 모시겠습니다, 사장님. 재능 있는 분께는 재물이 먼저 인사를 드리는 법이죠.」

파란 털의 토끼 신사였다고 했다. 금테 안경 같은 미소에, 계약서는 두 장이었고, 글씨는 아름다웠다고.

그 신사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진열대의 빵을 하나하나 코로 음미했다. 그러고는 감탄하듯 눈을 감았다. 「이 소보로… 반죽에 사랑이 들었군요. 이런 재능이 골목에 묻혀 있다니, 재물의 신이 다 서운해할 일입니다.」

그가 내민 계약서엔, 첫 장에 굵고 친절한 글씨로 혜택만 적혀 있었다. 특별 금리, 상환 유예, 명예 고객 대우. 정작 담보 조항은, 둘째 장 맨 아래에 개미만 한 글씨로 숨어 있었다.

루나 언니—저는 첫 장만 읽었어요. 둘째 장은 '형식적인 거니 안 읽으셔도 됩니다' 그러길래. …그 한마디에 넘어간 거예요. 친절한 목소리 하나에.

네오—…'안 읽으셔도 된다'는 말이 나오는 계약서는, 대개 그 부분이 전부인 법이지.

연이—완전 약관 스크롤 사기잖아요. '동의합니다' 누르게 하려고 좋은 말만 위에 띄우고, 진짜 무서운 건 저 아래 깨알같이 박아 두는 거. 저 그거 진짜 싫어해요.

네오—…그 감각, 내일 저울 앞에서 쓸모 있겠군. 너는 '숨겨진 조항'의 냄새를 잘 맡으니까.

루나 언니—그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사장님 빵은 이 섬의 보물이라고. 오븐만 늘리면 대저택 납품도, 궁정 연회도 다 잡을 수 있다고. …저는 그 말이, 제 빵을 알아봐 준 첫 마디 같아서.

언니의 목소리가 잠깐 흔들렸다. 사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의 설렘만은 진짜였던 모양이었다.

루나 언니—오븐을 세 대 늘렸어요. 반죽 기계도, 큰 냉장고도. 밤새 구워도 주문을 못 따라갈 만큼 바빴죠. 루나가 배달을 못 다닐 정도로.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바보같이.

언니의 눈이 잠깐, 그 시절을 비췄다. 새벽 세 시에도 굴뚝에서 연기가 올랐고, 골목 가득 빵 냄새가 넘쳤다. 루나는 배달 가방을 메고 온 섬을 뛰어다녔다. 「우리 언니 빵이요!」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금화가 쌓였다. 처음으로 루나에게 새 코트를 사 줬다. 처음으로 밀린 월세를 한꺼번에 냈다. 언니는 그때, 세상이 드디어 자기 편이 된 줄 알았다고 했다.

루나 언니—…그런데 어느 날 아침, 주문이 뚝 끊겼어요. 하루 만에. 어제까진 이백 개, 오늘은 영 개. 처음엔 실수인 줄 알았죠. 근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영 개였어요.

늘려 놓은 오븐 세 대가 텅 빈 채 식어 갔다. 산 재료는 상해 갔다. 그리고 이자는, 주문과 상관없이 매일 정확하게 불어났다. 행복했던 몇 달의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든 것이었다.

루나 언니—그제야 알았어요. 그 큰 주문들은, 저를 살찌우려던 게 아니라 저를 부풀려서 터뜨리려던 거였다는 걸. …풍선처럼요.

연이—바보 아니에요. 누구든 자기 재능을 알아봐 주면 마음이 열리는 거예요. 그걸 노린 쪽이 나쁜 거지.

루나 언니—…고맙네요, 그렇게 말해 줘서. 그런데 손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쁜 사람이 친절할 때예요. 친절이 덫인 걸 알았을 땐, 이미 발이 빠진 뒤거든요.

루나 언니—그런데 이상하죠. 대출을 받고 나니까 큰 주문들이 전부 취소됐어요. 위약금 한 푼 없이, 연기처럼 싹.

주문서를 되짚어 보니, 발주처 주소는 하나같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유령 상단, 유령 저택, 유령 연회. 처음부터 빵을 살 생각이 없던 주문들이었다.

네오—수요를 만들어 대출을 물리고, 대출을 물리자마자 수요를 지운다. 남는 건 갚을 수 없는 빚과, 늘려 놓은 설비. 설비는 다시 헐값에 회수하고. …설계가 촘촘하군.

루나—우리만 그런 게 아니야. 옆 골목 국숫집도, 건너편 대장간도, 다 똑같이 당했어. 갑자기 큰 주문 왔다가, 대출 받으면 싹 사라지고. 다들 지금 사슬 차고 지하에서 일해.

연이—…골목 하나가 통째로? 이거 한 사람 사기가 아니라, 섬 전체를 갈아먹는 공장이잖아.

네오—그래. 청토끼는 사기꾼이 아니라 시스템이야. 개인을 속이는 게 아니라, 섬 전체를 천천히 자기 장부로 옮기고 있어. 사람을 담보로, 하나씩.

연이—…그럼 언니 하나 구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네. 저 시스템 자체를 저울 앞에서 부숴야 하는 거야.

네오—맞아. 그래서 내일이 중요해. 언니 계약 하나를 무효로 만들면, 그건 판례가 돼. '청토끼도 진다'는 판례. 그 한 판이, 섬 전체의 사슬을 흔들 수 있어.

연이는 종이 산을 다시 바라봤다. 아까까진 그냥 한 가게의 억울함이었는데, 지금은 달라 보였다. 저 산 너머에, 얼굴이 지워져 가는 수백 명의 골목이 있었다.

연이—…좋아. 판례 만들어 주자. '값 매길 수 없는 것도 있다'는 판례. 언니 얼굴로, 루나 눈물로, 이 골목 전부로.

루나 언니—…제 계약 하나가, 그렇게 큰일이 될 수 있을까요.

연이—큰일은 늘 작은 한 판에서 시작해요. 언니 빵도 반죽 한 덩이에서 시작하잖아요. 내일이 그 반죽이에요.

연이—그거 완전 낚시잖아요. 주문을 미끼로 던져서 대출을 물게 한 거예요.

네오—전형적인 수법이야. 수요를 조작해서 빚을 심는 거지. 돈이 사람을 부리는 흐름, 재성의 탁한 기운이다.

언니는 대답 대신 앞치마 주머니를 무심코 눌렀다. 종이 접히는 소리가 났다. 계약서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루나가 잠든 뒤 연이는 부엌에서 언니와 마주 앉았다.

촛불 하나, 식은 차 두 잔. 그리고 탁자 위에 꺼내 놓은 계약서 한 장.

루나 언니—루나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 앤 분명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학비며 겨울 코트며, 전부 제가 좋아서 한 일인데.

연이—…계약서, 제가 봐도 될까요.

연이는 종이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원금, 이자, 연체 조항.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숨이 멎었다.

「담보: 채무자의 형상(形象)과 성명 일체.」

연이는 그 한 줄을 세 번 다시 읽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고, 두 번째엔 설마 했고, 세 번째엔 소름이 돋았다.

연이—형상과 성명 일체… 이거 진짜 사람 자체를 저당 잡은 거잖아요. 몸도, 이름도, 얼굴도. 못 갚으면 존재를 통째로 회수하겠다는—

촛불 아래, 언니의 반쯤 지워진 얼굴이 흔들렸다. 그 문장은 협박이 아니라, 이미 절반쯤 집행된 판결이었다.

루나 언니—…그 조항, 저도 나중에야 읽었어요. 그땐 이미 첫 번째 이자를 냈을 때였고, 눈꼬리가 사라진 뒤였죠.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어요.

연이—…아니요. 안 멀어요. 계약이 애초에 속임수로 맺어진 거면, 처음부터 무효예요. 무효인 계약은, 아무리 이자를 냈어도 없던 일이 되는 거고요. 그거 증명하면, 언니 얼굴 전부 돌아와요.

연이—형상이요? 가게가 아니라, 모습을 담보로 잡았다고요?

루나 언니—네. 이 섬에서 제일 비싼 건 금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래요. 저는 그걸 계약하고 나서야 알았어요.

루나 언니—…우리 부모님도 이 가게에서 빵을 구우셨어요. 두 분 다 일찍 떠나시고, 남은 건 오븐 하나랑 어린 루나였죠. 저는 그때 결심했어요. 이 오븐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언니의 손이 오븐 손잡이를 무심코 쓰다듬었다. 오래 만져 반질반질해진 손잡이였다. 그 온기가 곧 이 집의 심장이었다.

루나 언니—루나한테 따뜻한 빵을 매일 먹이고 싶었어요. 겨울에 코트도 사 주고, 학교도 보내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 마음이 덫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연이—…언니 잘못 아니에요. 동생 따뜻하게 먹이고 싶었던 마음이 무슨 죄예요. 죄는 그 마음을 이자로 계산한 쪽이 지은 거예요.

연이는 자기 엄마를 떠올렸다. 시험 망친 날 아무 말 없이 삼각김밥을 사다 놓던 손. 사랑은 늘 조용히, 먹을 것의 모양으로 왔다. 이 가게에도 꼭 그런 사랑이 배어 있었다.

연이—(…엄마. 나 어릴 때, 엄마가 늦게까지 식당 일 하느라 저녁마다 나 혼자 불 꺼진 집에서 엄마를 기다렸잖아. 무서워서 현관 불만 켜 놓고. …근데 식탁엔 늘, 엄마가 퇴근길에 사다 둔 삼각김밥 하나가 놓여 있었어.)

연이의 기억 속, 어린 자신이 불 꺼진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엔 참치마요 삼각김밥 하나와, 삐뚤빼뚤한 쪽지 한 장. 「미안, 오늘도 늦어. 이거라도 먹고 있어. 엄마가 제일 사랑해.」

연이—(…나 그 삼각김밥 먹으면서, 하나도 안 외로웠어. 엄마가 옆에 없어도, 그 세모난 게 '나 너 생각했어' 하고 안아 주는 거 같아서. …그때부터야. 내가 삼각김밥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게 된 거. 그건 그냥 밥이 아니라, 혼자인 밤에 날 안아 주던 엄마 손이었어. …그래서 나, 힘든 사람 보면 삼각김밥부터 쥐여 주고 싶어. 나도 그렇게 위로받았으니까.)

루나 언니—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루나가 그 몇 달 동안 배부르게 먹었으니까. 제 얼굴 반쪽 값이면, 동생 겨울 하나쯤은 사고도 남는 장사예요.

그 담담한 말이 연이의 가슴을 오래 눌렀다. 세상엔, 자기를 헐값에 파는 걸 손해라고 생각조차 못 하는 사랑도 있었다.

연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낮에 루나가 무심코 흘렸던 말. 언니는 원래 나랑 똑같이 생겼었어.

토끼 귀 머리띠가 아니었다. 그건 갉아먹히고 남은, 진짜 귀였다.

빚이 불어날수록 언니의 본모습은 이자로 조금씩 빠져나갔다. 털도, 얼굴도, 이름도. 그 자리를 낯선 형상이 대신 메웠다.

연이—그런 게 어디 있어요. 돈을 빌렸는데 왜 사람이 없어져요.

언니가 조용히 손거울을 들어 보였다. 거울 속엔, 반쯤 흐릿해진 얼굴이 있었다. 이목구비의 윤곽이 안개처럼 번져 있었다. 웃는지 우는지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루나 언니—…처음엔 눈꼬리가 지워졌어요. 그다음엔 보조개. 그다음엔 목소리 톤. 이젠… 제가 원래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루나는 아직도 제가 예쁘다고 하는데.

연이는 그 거울을 차마 오래 보지 못했다. 저 흐려진 얼굴 어딘가에, 루나와 똑같이 생긴 진짜 언니가 갇혀 있었다. 값이라는 이름의 안개 속에.

연이—…돌려받을 거예요. 눈꼬리도, 보조개도, 웃는 표정도. 한 조각도 안 남기고. 저 계약서, 제가 반드시 무효로 만들 거예요.

루나 언니—괜찮아요. 손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반죽은 손이 하는 거잖아요.

괜찮다는 그 말이, 그날 밤 들은 말 중에 제일 안 괜찮았다.

루나 언니—루나가 아직 어려요. 저까지 무너지면 저 앤 이 섬에서 혼자가 돼요.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야 해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은 할 수 있어야 하고요.

연이—…언니. 괜찮은 척 그만해도 돼요. 여기 지금, 언니 편이 세 명이나 늘었잖아요.

언니는 그 말에 처음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흘릴 여유조차, 저당 잡힌 사람처럼.

그때, 부엌 문틈에서 아주 작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루나였다. 잠든 척했지만,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큰 귀는 못 들은 척을 못 했다.

루나는 소리 내지 않았다. 다만 문틈에 웅크린 채, 두 앞발로 제 입을 꾹 막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면 언니가 더 슬퍼할까 봐, 다섯 살배기처럼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연이는 그 작은 그림자를 보았다. 하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조금 높여, 루나가 듣도록 말했다.

연이—언니. 내일 정오, 우리가 저울 앞에 같이 설 거예요. 이 계약, 반드시 무효로 만들 거고요. 언니 얼굴도, 이름도, 한 조각도 안 남기고 다 돌려받을 거예요.

루나 언니—…손님은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처음 본 남의 빚을, 왜 자기 일처럼 화를 내요.

연이—저도 세상이 나만 빼고 비싸게 구는 기분, 잘 알거든요. 카드가 삑삑거리고, 삼각김밥이 배신하고, 쿠폰이 만료되고. …근데 그거, 혼자 겪으면 진짜 서럽더라고요. 언니는 안 혼자 겪게 할래요.

문틈의 그림자가 아주 작게 떨렸다. 그리고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침대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루나의 눈은 조금 부어 있었지만, 그 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웃었다.

네오—…연이. 저 계약서, 겉으로는 완벽해. 하지만 '수요 조작'이 증명되면 '기망에 의한 계약'으로 무효를 다툴 수 있어. 밤새 발주처들의 허위를 증거로 모아야 한다.

연이—증거 수집이라. 그건 네 특기지. 나는?

네오—너는 저울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라. 재판은 증거로 이기지만, 여론은 진심으로 이긴다. 이 섬 사람들도… 사실은 저울에 지친 자들이니까.

연이—소리 지르기 담당, 접수. 이번엔 진심을 담아서 지를게.

연이는 지나온 섬들을 떠올렸다. 나를 나로 지키는 법을 배운 비겁의 섬. 내 것을 꺼내 보이는 법을 배운 식상의 섬.

연이—…근데 여긴, 그 두 개를 한꺼번에 빼앗아 가잖아.

그날 밤, 빵가게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다만 오븐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네오는 등불 아래에서 발주서 뭉치를 한 장씩 넘겼다. 존재하지 않는 주소, 겹치는 필체, 같은 주에 몰렸다 같은 주에 취소된 서른일곱 건. 그의 눈이 밤새 종이 위를 훑었다.

네오—…찾았다. 발주처 서른다섯 곳이 등기 주소 없음. 나머지 둘은 청토끼 자회사. 이건 우연이 아니라 지문이야. 설계자의 지문.

연이는 그 옆에서 서른일곱 장의 취소 통지를 날짜순으로 정리했다. 짧은 앞발로는 종이 넘기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꾹꾹 눌러 가지런히 쌓았다.

연이—이거 봐, 네오. 취소 날짜가 전부 대출 승인 다음 날이야. 미끼를 물자마자 낚싯대를 거둔 거지.

네오—…눈썰미가 좋군. 그거, 내일 저울에 올릴 결정적 한 장이다.

루나는 잠들지 않고 두 사람 사이를 종종거렸다. 물을 떠다 주고, 등불 심지를 돋우고, 졸리면 제 뺨을 찰싹찰싹 때려 가며 버텼다.

루나—나도 뭐든 할래! 이 골목 어느 집이 청토끼한테 당했는지 다 알아. 아침에 그 집들 돌면서, 다들 저울 앞으로 와 달라고 부탁할게! 증인 많으면 좋은 거지?

네오—…좋다. 아주 좋아. 피해자의 증언은 어떤 서류보다 무겁거든. 배달원의 발이, 내일 최고의 무기가 되겠군.

루나—헤헤! 배달 삼 년 차 발이 드디어 쓸모 있네!

언니는 그 광경을 문가에서 오래 바라봤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처음 보는 밤에, 남의 빚을 제 일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야윈 얼굴에 처음으로, 아주 옅은 웃음이 번졌다.

루나 언니—…이상하네요. 진 것 같았던 밤인데. 왜 이렇게 든든하지.

연이—원래 그런 거예요, 언니. 혼자면 지는 밤도, 여럿이면 그냥 새우는 밤이 되거든요.

밤이 깊었다. 등불 심지가 두 번 갈렸고, 종이 산은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증거는 모였고, 마음도 모였다.

그때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금화 소리가 아니라, 종이가 문틈에 꽂히는 소리였다.

새 통지서였다. 금빛 도장에 아름다운 글씨. 「최종 회수 집행 — 내일 정오. 청토끼 금융그룹 올림.」

통지서만 온 게 아니었다. 문밖에, 저울을 든 덩치 둘이 서 있었다. 청토끼 금융의 회수반이었다. 어깨엔 금박 완장, 허리엔 사슬.

회수반: 「사장님. 내일 정오, 순순히 나오시죠. 저항하면 이자가 붙습니다. 저항의 이자는… 팔 하나 정도일까요.」

루나—우리 언니 협박하지 마! 저리 가!

루나가 언니 앞을 가로막았다. 작은 몸이, 제 몸보다 두 배는 큰 덩치 앞에서 파르르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회수반: 「어이쿠, 새끼 토끼. 너도 장부에 올려 줄까? 배달용 다리 두 개, 값 좀 나가겠는데.」

바로 그때, 회수반의 저울이 갑자기 이쪽으로 툭 기울었다. 네오가 그 접시 위에, 금화 한 닢을 소리 없이 올려놓은 것이었다.

네오—…이 저울, 방금 아이를 위협한 값이 달렸군. 재성의 섬 법도 알 텐데. 위협도 채무다. 갚아야 할 걸 늘리지 마라.

회수반들이 움찔했다. 말하는 사자가, 저울의 논리로 저들을 되받아친 것이었다. 이 섬에서 저울의 언어를 쓰는 상대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됐다.

회수반: 「…내일 정오. 대저울 광장. 안 나오면, 이 가게째 접시에 올립니다.」

덩치들은 물러갔다. 하지만 골목 어귀에서 한 번 더 뒤를 돌아, 이쪽을 노려봤다. 그 눈빛에 담긴 건, 협박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사냥을 앞둔 자의 즐거움.

연이—…뭐야 저 인간들. 애한테 다리 값을 매겨? 진짜 저 파란 토끼 회사, 위아래로 다 썩었네.

네오—썩은 게 아니야. 저게 재성이 극단으로 간 모습이다. 모든 걸 값으로 보면, 아이의 다리도 그냥 매물이 되거든. 그러니 우리가 증명해야 해.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도 세상엔 있다는 걸.

네오—내일 정오라. 초대장이나 마찬가지군.

연이—좋아. 가 주자고, 그 금융그룹인지 뭔지. 이 섬은 빚을 저울로 갚는다며? 그럼 이 억울함도 저울에 달아 보면 되겠네.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언니는 평소처럼 새벽부터 오븐을 켰다. 이런 날에도 빵을 굽느냐고 묻자, 언니는 조용히 웃었다.

루나 언니—오늘 저울 앞에 서는 사람들, 다 아침을 굶고 왔을 거예요. 화가 난 사람은 배도 고프거든요. 따뜻한 거 하나씩 쥐여 주면, 조금은 덜 무너져요.

언니는 바구니 가득 갓 구운 빵을 담았다. 손이 반쯤 빠져나간 몸으로 구운, 그날의 마지막 빵일지도 모르는 빵을.

연이—…언니. 이 빵, 오늘 우리가 이기면요, 내일도 모레도 계속 구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걸 마지막처럼 굽지 마세요.

루나 언니—…그렇게 말해 주니, 손에 힘이 나네요. 고마워요, 정말.

루나는 벌써 밖에 나가, 골목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청토끼에게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배달 삼 년 차의 발이, 그날 아침만큼은 재판의 소환장 노릇을 했다.

루나—아저씨! 아주머니! 드디어 청토끼한테 맞서는 사람이 생겼어요! 저울 재판이 열리면, 증인으로 와 주세요! 이번엔… 이번엔 안 질지도 몰라요!

처음엔 다들 문을 닫았다. 청토끼에게 밉보이면 다음 장부에 오르니까. 하지만 루나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언니 얘기를 하자, 하나둘 앞치마를 벗고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연이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 섬 사람들이 겁쟁이라서 침묵한 게 아니었다. 그저, 앞장서 줄 한 사람이 없었을 뿐이었다.

네오—…준비됐다. 증거는 서른일곱 장, 증인은 골목 하나.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저울은 진실의 무게를 안다.

연이—부족하면 내가 소리로 채울게. 자, 가자. 저 파란 토끼한테, 오늘 진짜 무거운 게 뭔지 알려 주러.

세 사람과 한 아이가 골목을 나섰다. 뒤로는 빵 냄새가, 앞으로는 금빛 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수 집행이 예고된 그곳, 청토끼 금융그룹 본사로.

시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사람들이 흘끔흘끔 이쪽을 봤다. 말하는 꽃돼지, 말하는 사자, 그리고 빵집 언니와 배달 토끼. 청토끼 본사로 제 발로 걸어가는 무리는, 이 섬에서 흔치 않은 구경거리였다.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저 빵집… 오늘 회수당한다며. 마지막으로 얼굴 보러 가나 봐.」 또 누군가는 말했다. 「말리지 그래. 청토끼한테 맞서는 건, 저울에 손목을 올리는 거야.」

루나—…연이. 사람들이 우리 지는 거 구경하러 나온 것 같아. 무서워.

연이—루나. 저 사람들, 지는 거 구경 나온 거 아니야. 이기는 걸 처음 볼까 봐, 조마조마해서 나온 거야. 우리가 보여 주자. 이길 수도 있다는 거.

연이는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하지만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 뒷모습이 어딘가 든든해서, 루나는 저도 모르게 그 그림자를 밟으며 따라 걸었다.

언니는 걸으면서도 바구니의 빵을 하나씩, 길가의 잿빛 노동자들에게 쥐여 줬다. 사슬을 찬 손들이, 따뜻한 빵을 받고 잠깐 고개를 들었다. 지워져 가던 얼굴에, 아주 옅은 온기가 돌았다.

루나 언니—…다들 배가 고팠구나.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냥 오래 배가 고팠던 거야.

이윽고 시장 한복판, 순금빛 본사가 눈앞에 우뚝 섰다. 정문 위로 파란 토끼 문장이 거대하게 걸려 있었다. 지상은 이 층뿐인데, 어쩐지 건물 전체가 땅속 깊이까지 이어진 느낌이었다.

네오—…여기서부터는 규칙의 영역이다. 감정보다 논리, 목소리보다 증거. 다들 준비됐나.

연이—준비 끝. 저 안에서 무슨 저울이 나오든, 오늘은 우리가 먼저 접시에 진심을 올릴 거야. …가자.

거대한 금빛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마치 이쪽이 올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제16화 · 탄 빵의 냄새 — 끝. 제17화 「청토끼 금융그룹」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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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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