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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3부 · 재성의 섬

EP.17 · 18 / 44

청토끼 금융그룹

청토끼 금융그룹의 문이 열린다. 이 섬의 규칙은 계약서로 쓰여 있다.

한글 약 9,377자 · 읽는 시간 약 22분

청토끼 금융그룹 본사는 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아니었다. 가장 깊은 건물이었다. 지상은 이 층뿐인데, 지하는 아무도 끝을 몰랐다.

정문 앞에는 거대한 저울 두 개가 문지기처럼 서 있었다. 들어가는 사람의 무게를 재고, 나오는 사람의 무게를 다시 쟀다. 대부분은, 나올 때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무언가를 두고 나온 것이었다.

루나—…연이. 저 문 무서워. 사람 잡아먹는 입 같아. 들어가면 뭔가 뺏길 것 같아.

연이—괜찮아. 우리는 뺏기러 가는 게 아니라 되찾으러 가는 거니까. 나올 땐 오히려 더 무거워져서 나올 거야. 언니 얼굴만큼 무거워져서.

네오—…말은 그렇게 해도, 긴장 놓지 마라. 이 건물은 살아 있어. 들어서는 순간, 우리를 저울에 올리기 시작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손 놓지 마.

로비의 샹들리에는 금화를 꿰어 만든 것이었다. 그 한 알 한 알이 누군가 갚지 못한 하루라고 생각하니, 아름답기는커녕 서늘했다.

바닥은 거울처럼 닦인 대리석. 걸음마다 제 얼굴이 발밑에 비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친 얼굴들은 하나같이 조금씩 흐릿했다. 이 건물 안에서는, 사람도 금화처럼 조금씩 닳는 모양이었다.

연이—…네오. 여기 바닥, 내 얼굴이 비치는데 자꾸 지워져 보여. 기분 탓이지?

네오—기분 탓이 아니야. 이 건물 자체가 저울이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네 값을 재고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선 마음이 흔들리는 게 곧 이자다.

벽에는 초상화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역대 '우수 채무자'라는 명패. 하지만 초상화 속 얼굴들은 전부 텅 비어 있었다. 액자만 있고, 그림은 없었다. 다 갚기 전에 얼굴부터 회수당한 것이었다.

루나—…무서워. 그림이 다 얼굴이 없어. 우리 언니도 여기 걸리는 거 아니지? 그렇지?

연이—안 걸려. 우리가 걸리기 전에 다 부술 거니까. 루나, 내 뒤에 딱 붙어.

정오. 연이와 네오, 그리고 굳이 따라나선 루나가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언니는 가게에 남겨 두었다. 본인이 오면 그게 곧 자수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응접실은 지나치게 안락했다. 푹신한 벨벳, 따뜻한 차, 달콤한 향. 하지만 그 안락함이 오히려 덫처럼 느껴졌다. 편안하게 만들어 놓고, 방심한 틈에 서명을 받아 내는 방이었다.

네오—차는 마시지 마라. 이 방의 친절은 전부 청구서가 붙어 있어. 앉는 것도, 웃는 것도, 감사 인사도. 여기선 공짜가 없다.

연이—…알겠어. 숨도 아껴 쉴게. 근데 이 향 진짜 좋다. 향 맡는 것도 돈 나가나?

네오—…아마도.

응접실 안쪽, 벨벳 의자에서 파란 토끼가 일어섰다. 보랏빛 망토에 금실 자수, 그리고 완벽한 각도의 미소.

키는 루나보다 조금 클 뿐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력은, 지하 창고 전체의 무게만큼 무거웠다. 웃고 있는데도, 방 안의 온도가 한 뼘 내려간 것 같았다.

루나—…어? 저 아저씨, 나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파란 토끼네. 근데 왜 하나도 안 귀엽지?

연이—(같은 토끼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루나는 보고만 있어도 따뜻한데, 저쪽은 보고만 있어도 지갑이 시려.)

청토끼의 시선이 넷을 차례로 훑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상품을 감정하는 눈이었다. 저 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넷의 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네오가 슬며시 앞으로 반걸음 나섰다. 연이와 루나를 그 시선으로부터 가리듯이. 값을 매기려는 눈과, 값을 매기지 못하게 막는 등. 응접실의 진짜 대치는, 이미 첫 눈빛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연이—(네오 등이 또 커졌어. 저 무뚝뚝한 사자, 입으로는 냉정한 척하면서 몸은 늘 우리 앞을 막는단 말이지.)

청토끼—어서 오십시오, 고객님들. 청토끼 금융그룹 대표, 청이라고 합니다. 아, 명함은 받으시면 이자가 붙으니 사양하셔도 됩니다. 농담이에요. 절반쯤은.

청토끼는 완벽했다. 털 한 올까지 손질된 파란 털, 흠 하나 없는 미소, 정확히 계산된 각도의 목례. 그 완벽함이 오히려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진심이 한 톨도 안 섞인 친절이었다.

그가 손짓하자, 어디선가 차와 다과가 소리 없이 놓였다. 김이 오르는 차, 금박을 입힌 쿠키. 하지만 셋 중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청토끼—드세요, 드세요. 이건 서비스입니다. …아, 물론 '서비스'라는 단어에도 아주 작은 각주가 붙긴 하지만요. 뭐, 굳이 안 읽으셔도 됩니다.

연이—'안 읽으셔도 된다'는 말이 제일 무서운 거, 저 오늘 낮에 배웠거든요. 사양할게요. 저희는 물만 마셔도 배부른 체질이라.

청토끼—…호오. 눈치가 빠르시네요, 꽃돼지 고객님. 보통은 첫 잔에서 다들 넘어가는데. 이 방에 들어와서 아무것도 안 드신 손님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네오—본론으로 들어가지. 우리는 빵집 계약이 속임수로 맺어졌다는 걸 알고 왔다. 그걸 저울 앞에서 증명하러.

청토끼—성격 급하시네요, 파수꾼님. 뭐, 좋아요. 급한 게 나쁜 건 아니죠. 급할수록 실수하고, 실수할수록 이자가 붙으니까요. 저희 회사엔 아주 반가운 성격이랍니다.

연이—(엄청 정중하네. 근데 정중함이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구나.)

루나—(연이 뒤에 딱 붙어서) 나 저 아저씨 싫어. 웃는데 하나도 안 웃겨.

청토끼—이런, 상처네요. 아가씨, 그 반감도 장부에 적어 둘까요? 미움은 이자가 아주 잘 붙거든요.

루나—그럼 백 배로 적어요! 천 배로!

네오—…루나. 지금 저쪽 빚만 늘려 주고 있어.

루나—앗.

청토끼—빵집 건은 정말 유감입니다. 저희도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계약은 계약이잖아요? 저울은 슬픔까지 달아 주지는 않거든요.

청토끼—아, 그런데 고객님들. 제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요. 특별 제안 하나 드릴게요. 이 빵집 건, 그냥 못 본 척 지나가시면 어떨까요? 그럼 여러분 여행 경비로, 금화 백 닢. 지금 바로 드리죠. 인성의 도서관 입구도, 제가 친절히 안내해 드리고요.

금화 백 닢이 탁자 위에 소리 없이 쌓였다. 여행자에게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리고 그 옆엔, 도서관 입구가 그려진 지도 한 장.

연이—(백 닢에… 도서관 입구까지. 우리 목적지는 원래 도서관이었잖아. 이거 받으면, 언니 일에 안 엮이고 편하게 갈 수 있어. 게다가—)

연이는 잠깐, 정말 잠깐 흔들렸다. 남의 빚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여기서 손을 떼도, 아무도 연이를 탓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 연이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 언니가 쥐여 준 소보로의 온기가 떠올랐다. 다 빼앗긴 사람이, 처음 본 자기에게 성한 빵을 내주던 그 손이.

연이—…됐어요. 그 금화, 도로 넣으세요. 언니 얼굴값이 백 닢이라는 거, 방금 당신이 스스로 증명했네요. 근데요, 저한테 언니 웃음은 백만 닢 줘도 안 팔아요. 애초에 그건 팔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청토끼—…허. 재미있네요. 백 닢 앞에서 안 흔들리는 여행자라. 요즘 세상에 멸종한 종류인데.

네오—…멸종 안 했다. 네가 저울로 다 사들여서 안 보였을 뿐이지.

루나—맞아! 우리 연이는 안 팔려! 나도 안 팔리고! 우린 비매품이야!

청토끼는 금화를 도로 거둬들이며, 처음으로 흥미로운 눈빛을 지었다. 값으로 안 움직이는 것들은, 그에게 위협이자 동시에… 오래 잊고 있던 무언가였다.

청토끼가 손끝으로 금화를 굴렸다. 금화가 손가락 사이를 살아 있는 것처럼 걸어 다녔다.

네오—대표한테 하나 묻지. 대출 직전에 빵집으로 몰린 그 대량 주문, 발주처 명부를 볼 수 있나.

청토끼—호오. 명부라.

네오—주문이 전부 같은 주에 들어와서 같은 주에 취소됐어. 위약금 조항도 없는 발주가 서른일곱 건. 이건 수요가 아니라 설계야. 속여서 맺은 계약은 무효를 주장할 수 있지.

청토끼—흐음. 이론적으로는요. 그런데 고객님, '설계'라는 걸 증명하려면, 그 발주가 저희 손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발주처는 전부 익명이고, 취소도 정당한 사유였고요. 심증만으로는 저울이 안 기울어요.

네오—익명 발주처 서른다섯 곳이 등기 주소가 없어. 나머지 둘은 네 자회사고. 이 정도면 심증이 아니라 물증이지.

청토끼—…어라. 벌써 거기까지 파셨어요? 하룻밤 사이에? 파수꾼님, 정말 이 시대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장부를 읽는 손님은, 삼십 년 만에 처음이거든요.

연이—우리 네오가 원래 좀 그래요. 밤새 종이 넘기는 게 취미거든요. 취미가 사기 적발이라니, 참 건전하죠?

청토끼—…재미있는 팀이네요. 물증이 있다니, 이거 흥미로운데요. 하지만 그건 대저울 앞에서 따지기로 하고. 그전에,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파수꾼님.

응접실 공기가 살짝 내려앉았다. 청토끼의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귀가 아주 미세하게 젖혀졌다.

청토끼—…고객님, 혹시 법 공부하셨어요? 아니, 그보다.

청토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코를 작게 실룩였다. 상대의 숨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청토끼—이상하단 말이죠, 고객님. 당신 숨에서는 이 시대의 이자율 냄새가 안 나요. 마치 아직 오지도 않은 장부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달까.

연이는 저도 모르게 네오를 봤다. 네오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 무표정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청토끼—게다가 그 갈기. 사자인 척하지만, 사실은 사자도 아니죠? 냄새가 두 겹이에요. 겉은 짐승, 속은… 사람. 그것도 아주 오래,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의 냄새.

청토끼의 눈이 처음으로 웃음기를 지웠다. 순금빛 눈동자가, 네오의 속을 저울에 올리듯 훑었다.

청토끼—저희 회장님이 딱 이런 냄새를 찾고 계시거든요. '시간을 거스른 자'. 파수꾼님, 혹시… 그쪽 아니세요?

연이는 심장이 철렁했다. 파수꾼. 시간을 거스른 자. 처음 듣는 말인데, 이상하게 네오의 뒷모습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네오—…네 코가 요즘 감기 걸렸나 보군. 헛것을 맡네.

청토끼—후후. 부정도 긍정도 안 하시네요. 그것도 정보예요, 고객님. 침묵은 이 바닥에서 제일 비싼 자백이거든요.

연이는 그 대화를 다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았다. 네오가 숨기는 비밀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위험하다는 것.

연이—(회장님… 청토끼 위에 또 누가 있어. 그리고 그 사람이, 네오 같은 존재를 찾고 있어. 이거, 그냥 빵집 빚 얘기가 아니야.)

네오—손님 냄새부터 맡는 게 이 바닥 예절인가?

청토끼—실례했습니다. 직업병이에요. 제가 냄새로 신용등급을 매기거든요.

루나—코로 등급을 매긴다고요? 그럼 우리 언니 빵 냄새 맡아 봐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냄새인데, 그건 몇 등급인데요!

청토끼—…빵 냄새는 담보가 안 됩니다, 아가씨. 금방 사라지거든요. 사라지는 건 값을 못 매겨요.

루나—흥. 사라지는 게 제일 소중한 건데. 아저씨는 그것도 몰라서 그렇게 부자구나.

청토끼의 미소가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굳었다. 어린 토끼의 말이 어디 아픈 데를 스친 모양이었다.

루나—우리 언니가 그랬어! 세상에서 제일 비싼 건, 살 수 없는 거래! 웃음이랑, 냄새랑, 방금 구운 빵 온기 같은 거. 그런 건 아무리 돈 많아도 못 산대! 아저씨는 그걸 몰라서 불쌍한 거야!

청토끼—…불쌍하다고? 이 섬에서 제일 부자인 나한테?

루나—응! 아저씨 집에 금화는 많은데, 아저씨한테 빵 나눠 줄 사람은 없잖아. 우리 언니는 가난한데도 매일 누구한테 빵 줘. 누가 더 부자게?

청토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금빛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다섯 살배기의 산수 앞에서, 삼십 년 금융 대표의 계산기가 처음으로 멈췄다.

연이는 그 침묵을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저 파란 토끼도, 아주 오래전엔 누군가 빵을 나눠 주길 바라던 어린 토끼였다는 걸. 그 바람이 이뤄지지 않아서, 세상을 값으로만 재게 된 거라는 걸.

청토끼—…재미있는 아이군요. 그 순진함, 오래 못 갈 겁니다. 이 섬은 그런 걸 제일 먼저 갉아먹거든요. …하지만 뭐, 내일까지는 간직하시죠.

연이—오래 못 간다고요? 아니요. 이 애 순진함, 제가 지킬 거예요. 당신이 갉아먹기 전에, 제가 먼저 지킬 거라고요. 그게 어른이 애한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이에요.

청토끼—…어른. 재미있는 단어네요. 이 섬에서 '어른'은, 애 몫까지 빚을 짊어질 줄 아는 사람을 말하거든요. 그런 의미라면, 고객님은 이미 충분히 어른이시네요. 남의 애 순진함까지 짊어지려 하시니.

연이—…그거 칭찬으로 접수할게요. 삐딱하게 말해도, 방금 건 칭찬 맞죠?

청토끼—글쎄요. 저는 칭찬에도 이자를 붙이는 사람이라서. 공짜 칭찬은 안 하거든요.

루나가 연이 뒤에서 청토끼를 향해 조그맣게 혀를 내밀었다. 연이는 그걸 못 본 척, 속으로만 웃었다. 저 작은 반항심이, 이 무거운 방에서 유일하게 가벼운 것이었다.

루나—저기요! 신용이고 뭐고, 우리 언니 가게 돌려줘요! 언니 얼굴도!

청토끼—아가씨. 얼굴을 빼앗은 게 아니라 담보로 보관 중인 거예요. 다 갚으시면 바로 돌려드립니다. 저희는 약속을 지키는 회사거든요.

청토끼—마침 잘 오셨네요. 견학이나 시켜 드리죠. 저희 보관 창고를.

황금빛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안쪽 벽은 온통 거울. 넷이 타자, 거울 속에 무수한 넷이 겹쳐 비쳤다. 그런데 층수 버튼이 없었다. 대신 저울 눈금이 있었다. 위로 갈수록 '부', 아래로 갈수록 '빚'.

청토끼가 아래쪽 눈금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려갈수록 공기가 축축해지고, 금화 냄새 대신 쇠사슬 냄새가 짙어졌다.

루나—…연이. 아래로 갈수록 거울 속 내가 자꾸 흐려져. 무서워. 나 여기 있는 거 맞지?

연이—여기 있어. 내 앞발 잡아. 이 온기 느껴지지? 이게 네가 여기 있다는 증거야. 거울 말고, 이걸 믿어.

루나가 연이의 짧은 앞발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 온기 덕분인지, 거울 속 루나의 윤곽이 다시 또렷해졌다. 온기는, 이 건물의 지우는 힘에 맞서는 유일한 것이었다.

네오—…연이. 아래로 갈수록 이 건물이 사람을 지운다. 오래 있으면 안 돼. 볼 것만 빨리 보고 나온다. 그리고 무엇을 보든, 흔들리지 마라. 흔들리는 순간 저울이 네 무게를 재기 시작하니까.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멈췄다. 눈금은 밑바닥, '빚'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문이 열리는 순간 연이는 숨 쉬는 걸 잊었다.

거대한 지하 공동에 작업대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잿빛으로 바랜 사람들이 말없이 금화를 닦고, 세고, 나르고 있었다.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작업대는 끝이 없었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오직 금화 부딪는 소리와, 사슬 끌리는 소리만이 거대한 공동을 가득 채웠다. 지옥이 있다면, 딱 이렇게 조용할 것 같았다.

연이—…뭐야 이거. 이게 다 사람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전부 여기서…

연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장의 반짝임 아래, 정확히 이만큼의 어둠이 있었다. 금박 한 장 밑에, 이 거대한 무덤이 있었다. 부유함의 진짜 가격표가, 여기 다 걸려 있었다.

루나—…연이, 나 여기 오면 안 됐나 봐. 다리가 안 움직여. 근데 눈은 자꾸 봐. 저 사람들, 다 누구 언니고 누구 동생일 텐데.

연이—…봐도 돼, 루나. 봐야 해. 잊지 않으려면. 우리가 기억하는 한, 저 사람들은 완전히 지워진 게 아니거든. 눈에 담아 두자. 다 구할 때까지.

네오—…이건 사채업의 규모가 아니야. 섬 하나를 통째로 담보 잡은 거다. 이 정도 규모를, 청토끼 혼자 설계했을 리 없어. 반드시 위가 있어. 그 '회장'이.

모두 윤곽이 흐릿했다. 얼굴이 지워진 사람, 이름표가 빈 사람, 몸의 절반이 안개가 된 사람.

작업대마다 저울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금화를 닦으며, 자기 몸에서 빠져나가는 안개를 저울 반대편에 얹었다. 갚을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가벼워질수록 이름이 지워졌다.

한 노인이 손등을 하염없이 문지르고 있었다. 손등엔 원래 손주 이름을 새긴 문신이 있었다는데, 이제는 그 글자마저 안개가 되어 흐릿했다. 무엇을 잊었는지조차 잊은 얼굴이었다.

루나—…어, 저 아저씨. 우리 단골이야. 매일 아침 곰보빵 두 개 사 가던. 근데 왜… 왜 나를 못 알아봐. 루나예요, 아저씨! 배달 토끼요!

노인은 루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금화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이름도, 곰보빵의 맛도, 그에게선 이미 회수된 뒤였다. 루나의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연이—…이게 '자발적 서명'이라고요? 손주 이름까지 뺏긴 사람한테, 자발적이라는 말을 붙여요?

청토끼—서명하실 땐 다들 웃으셨는걸요. 배가 고프면, 미래를 파는 것도 웃으면서 하거든요. 저는 그저, 그 미소에 값을 매겼을 뿐이에요.

네오—…배고픈 사람의 서명을 자발적이라 부르는 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선택'했다고 하는 거랑 같아. 그건 선택이 아니라 강요다.

청토끼—철학은 대저울 앞에서 하시죠, 파수꾼님. 여긴 감정을 논하는 곳이 아니라, 자산을 관리하는 곳이거든요.

연이는 창고를 둘러보며 온몸이 떨렸다.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잿빛 사람들 어딘가에, 얼마 뒤면 빵집 언니가 서 있을 거라는 생각. 그 생각이, 발밑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문득, 연이는 자기 현실을 떠올렸다.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던 학자금, 알바비를 먼저 떼어 가던 각종 요금. 저 잿빛 사람들이, 어쩌면 자기 미래의 어떤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함.

연이—…네오. 여기, 남 얘기 같지가 않아.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어. 조금만 더 운이 나빴으면.

네오—…그래서 네가 저들을 못 지나치는 거다. 남의 일이 아니니까. 그 마음, 재성의 섬에서 제일 위험하고, 제일 귀한 거야.

네오—…연이. 이 창고, 이상하지 않아? 청토끼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인 사기꾼이라기엔, 모은 형상을 안 팔아. 그냥 쌓아 두고 있어. 마치 누군가한테 '납품'하려고 모으는 것처럼.

연이—납품? 사람 얼굴을… 누구한테?

네오—모르겠어. 하지만 아까 청토끼가 말한 '회장'. 그리고 그 회중시계. 전부 이 시대 물건이 아니야. 이 섬의 착취는, 돈을 넘어선 무언가를 위한 수단인 것 같아. …불길하군.

연이는 창고를 둘러봤다. 수백 개의 작업대, 수백 개의 흐려진 얼굴. 이 모든 게 단순한 사채업이 아니라, 훨씬 크고 어두운 무언가의 일부라면. 그 생각이 등골을 타고 내렸다.

연이—…뭐가 됐든. 지금 눈앞에서 지워지는 사람부터 구하자. 큰 그림은 나중에. 오늘은 언니, 그리고 이 창고. 그거면 돼.

네오—…그래. 언제나 발밑부터. 그게 네 방식이지. 나쁘지 않아.

루나는 곰보빵 아저씨의 작업대 앞에 살며시 빵 하나를 놓고 왔다. 아저씨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루나는 그래도 놓고 왔다. 언젠가 기억이 돌아오면, 배고프지 말라고.

청토끼—채무 노동 봉사단이라고 부릅니다. 다들 자발적으로 서명하셨어요.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필체로요.

연이—…이 사람들, 전부.

청토끼—담보죠. 재성의 섬에서 제일 안정적인 자산은 결국 자기 자신이거든요. 금은 시세가 흔들려도, 절망은 언제나 액면가라서요.

연이—…당신, 사람을 그렇게 값으로만 보면서 안 무서워요? 언젠가 당신도 저 저울에 올라갈 텐데.

청토끼—저요? 후후. 저는 이미 오래전에 올라가 봤답니다, 고객님. 그래서 알아요. 저 접시 위에서 사람이 얼마나 하찮게 가벼운지.

청토끼의 미소가 잠깐, 아주 잠깐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다. 웃음이 아니라, 오래 곪은 상처 같은 것이었다.

청토끼—저도 한때는 저 잿빛 무리 중 하나였어요. 이름도 없는 뒷골목 토끼. 저울추나 나르던 잡부. 그때 배웠죠. 이 세상에서 값이 안 매겨지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거랑 같다는 걸.

연이—…당신도 당했었어요? 그럼 왜, 같은 짓을 남한테—

청토끼—당했으니까 하는 거예요. 당하는 쪽보다 매기는 쪽이 낫다는 걸, 저 창고에서 배웠거든요. 저는 두 번 다시, 접시 위에 올라가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이는 그 말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미워해야 할 사람인데, 그 눈빛 어딘가에 지워지지 않는 어린 토끼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세상이 값으로만 대해서, 결국 자기도 세상을 값으로만 대하게 된 아이가.

네오—(…또 이 냄새다. 이 녀석도 누군가한테 '쓰이는' 존재야. 스스로 정상에 선 척하지만, 저 회중시계도, 저 손톱의 기운도, 제 것이 아니야. 누가 쥐여 준 거지.)

작업대 하나가 비어 있었다. 명패에는 아직 이름이 없었지만, 예약 딱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빵집. 내일 정오.」

작업대 위엔 벌써 준비물이 놓여 있었다. 금화 닦는 헝겊, 저울, 그리고 발목에 채울 사슬 하나. 사슬 끝엔 이미 작은 명패가 달려 있었다. 「채무자 형상 보관용.」

루나—…이거, 우리 언니 자리야? 언니를 여기다 앉히려고? 내일 정오에?

루나가 사슬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작은 몸으로, 그 무거운 쇠사슬을 어떻게든 뜯어내려 했다. 손이 벌게지도록. 하지만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나—안 돼! 우리 언니 여기 못 앉혀! 언니는 오븐 앞에 있어야 한단 말이야! 여기 말고! 여기 말고!

연이는 그 빈 작업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상상해 버렸다. 밀가루 묻은 앞치마의 언니가, 저 사슬을 차고, 금화를 닦으며, 점점 얼굴이 흐려지는 모습을. 루나의 이름조차 잊어 가는 모습을.

그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연이의 짧은 앞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아니라,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결심이 몸을 타고 올랐다.

네오—…연이. 진정해. 여기서 힘으로 사슬을 부수면, 우리가 계약 위반이 된다. 저들은 그걸 노려. 규칙 안에서 이겨야 해. 내일, 저울 앞에서.

연이—알아. 아는데… 네오, 이 자리 보고도 참으라는 거 진짜 힘들다. 이 예약 딱지, 내일 내가 저울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연이는 예약 딱지를 손대지 않았다. 대신 그 앞에 서서, 눈에 깊이 새겼다. 「빵집. 내일 정오.」 이 여섯 글자를, 반드시 다른 여섯 글자로 바꾸겠다고. 「빵집. 영업 재개.」로.

청토끼—흐음. 그 눈빛, 값이 오르고 있네요, 고객님. 분노는 좋은 담보거든요. 오래가고, 잘 타고, 사람을 움직이니까. …내일 그 분노, 저울에 올려 보시죠.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제가 재 드릴게요.

연이—좋아요. 재 봐요. 근데 미리 말해 두는데요, 이 분노는 당신 저울로는 못 재요. 왜냐면 이건 제 무게가 아니라, 저 사람들 전부의 무게거든요. 당신 저울, 내일 부서질지도 몰라요.

청토끼가 처음으로, 웃지 않았다. 순금빛 눈이 연이를 오래 응시했다. 저 작은 꽃돼지가, 어쩌면 삼십 년 쌓아 온 자기 저울을 정말로 부술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 예감이, 처음으로 그의 완벽한 미소에 금을 냈다.

네오—…봤지, 청. 값으로 안 재지는 것도 있어. 내일, 그걸 저울 위에서 직접 보게 될 거다. 각오해 둬.

세 사람과 한 아이가 창고를 등지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수백 개의 흐릿한 얼굴이 그들을 배웅했다. 소리 없이. 하지만 그 침묵 속에, 아주 오랜만에 피어난 무언가가 있었다. 기대라는 이름의, 아주 작은 불씨가.

연이—저 자리, 지금 당장 치워요.

청토끼—오, 좋은 눈빛이네요. 그런 분노는 값이 꽤 나갑니다, 고객님. 사람을 잘 홀리거든요.

네오—본론으로 가지. 속임수 계약이니 무효라고, 저울 앞에서 이 섬 법대로 따진다.

청토끼의 귀가 이번엔 천천히 곧게 섰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청토끼—저울 앞에서 이 섬 법대로라. …좋아요. 아주 좋아. 사실 저, 요즘 좀 심심했거든요. 이기는 게 너무 뻔해서요. 여러분처럼 겁 없는 손님, 오랜만이라 반갑네요.

청토끼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작은 몸이었지만, 방 전체가 그 움직임을 따라 기우는 듯했다. 저울의 주인이, 마침내 판을 열 준비를 한 것이었다.

청토끼—좋습니다. 내일 정오, 대저울 앞에서. 이기시면 계약은 무효. 지시면.

청토끼—고객님들 형상도 저희 장부에 예쁘게 적어 드리죠.

연이—…좋아요. 받아들일게요. 대신 조건 하나. 우리가 이기면, 빵집 언니 계약만 무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저 아래 창고 사람들 계약도 전부 다시 저울에 올려요. 속임수로 맺은 게 하나라도 나오면, 도미노처럼.

청토끼—…호오. 판을 키우시네요, 고객님. 겨우 빵집 하나 구하러 온 줄 알았는데, 창고를 통째로 노리시다니.

네오—판례는 원래 하나로 시작해서 전부를 흔드는 거야.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계약 하나로 섬 전체를 삼켰으니까.

청토끼—좋습니다. 그 조건, 받죠. 어차피 못 이기실 테니까. 오히려 판이 커지면, 여러분이 질 때 회수할 형상도 많아져서 저는 이득이거든요. 파수꾼 하나, 꽃돼지 하나, 배달 토끼 하나. …오, 셋 다 값이 꽤 나가겠는데요.

루나—내 값 안 팔아! 나는 나 거야!

청토끼—후후. 그 패기, 그것도 값이에요, 아가씨. 팔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제일 비싸거든요. …내일 정오. 대저울 앞에서 뵙죠. 늦지 마세요. 지각도 이자가 붙으니까.

엘리베이터가 다시 위로 올랐다. 아까와 반대로, 눈금이 '빚'에서 '부'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지하에서 본 얼굴들이, 발목에 사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청토끼—참, 고객님들. 내일 정오, 대저울 앞에는 저 말고 다른 분도 오실 겁니다. 저희 회장님이 특별히 관심을 보이셔서요. 특히 파수꾼님한테요. …기대하세요. 아주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오실 테니까.

네오—…회장. 그 이름, 오늘 두 번째군. 대체 누구지.

청토끼—글쎄요. 저도 그분 얼굴은 잘 몰라요. 그저 검은 비 오는 날에만 오시고, 아주 오래된 물건을 하나 쥐고 계시죠. 저한테도 그걸 하나 나눠 주셨고요. 이 회중시계요.

청토끼가 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내 흔들었다. 금도 은도 아닌, 밤하늘을 깎아 만든 듯한 검은 케이스. 뚜껑엔 실 한 오라기가 새겨져 있었다. 네오의 눈이 그 순간 얼어붙었다.

네오—…그 시계. 어디서 났어. 그건 이 시대 물건이 아니야.

청토끼—어라, 역시 아시네요? 그럼 내일이 더 기대되겠네요. 자, 이제 그만 올라오셨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내일까지, 부디 형상 잘 간수하시고요.

금빛 문이 닫혔다. 등 뒤에서, 금화 굴리는 소리가 오래 따라왔다. 마치 이미 셋의 값을 매기고 있다는 듯이.

돌아가는 길, 루나는 내내 말이 없다가 골목 끝에서 딱 한마디 했다.

루나—…언니 얼굴, 원래 진짜 예뻐. 나랑 똑같이 생겼단 말이야. 꼭 돌려줄 거지?

연이—응. 한 조각도 안 남기고 다 돌려받아 줄게. 약속.

루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창고에서 곰보빵 단골 아저씨가 자기를 못 알아본 게, 아직도 가슴에 박혀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이 나를 잊는다는 것.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걸, 그 애는 오늘 처음 배웠다.

루나—…연이. 언니가 나 잊으면 어떡해. 곰보빵 아저씨처럼, 나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면. 나… 그럼 나 진짜 혼자야.

루나가 골목의 작은 물웅덩이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눈물이 웅덩이에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눈물이 닿은 웅덩이가, 아주 옅게 빛나기 시작했다. 물결이 루나의 울음에 맞춰 파문을 그렸다. 마치 물이 그 애의 슬픔을 같이 울어 주는 것처럼.

네오—(…또 저 반응이다. 물이 저 아이의 감정에 공명해. 재성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저 아이의 결은 재(財)가 아니라 수(水)야. 흐르고, 스미고, 잊지 않는 물의 결.)

연이—루나. 봐 봐. 물이 너랑 같이 울어 주잖아. 너 안 혼자야. 물도 네 편이고, 나도 네 편이고, 네오도… 무뚝뚝하지만 네 편이야.

네오—…부정은 안 하겠다.

루나—…물이 빛나. 왜 빛나지? 나 무서운데, 왜 예쁘지?

연이—슬픔도 예쁠 수 있어. 특히 누군가를 진짜 사랑해서 우는 슬픔은. 루나, 너 그 마음 잊지 마. 그게 언젠가 네 힘이 될 거야. 왠지 그럴 것 같아.

루나는 눈물을 닦고, 웅덩이를 오래 들여다봤다. 물에 비친 제 얼굴이, 아까 본사 로비에서와 달리 하나도 흐릿하지 않았다. 또렷했다. 사랑하는 마음은, 저울로도 지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셋은 다시 빵가게에 모여 마지막 준비를 했다. 네오는 증거를 다시 검토했고, 연이는 저울 앞에서 할 말을 골랐고, 루나는… 골목을 한 바퀴 더 돌며, 내일 증인이 되어 줄 사람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았다.

네오—연이. 내일 저울은 두 번 기운다. 첫 번째는 증거로. 발주처 허위 서른일곱 건, 이건 내가 맡는다. 두 번째는 마음으로. 방청한 섬 사람들이 '이건 부당하다'고 느끼면, 저울이 그 무게를 읽어. 그게 네 몫이야.

연이—마음의 무게라. …근데 네오, 나 사실 걱정돼. 저 사람들, 청토끼가 무서워서 다 입 다물면? 증인이 한 명도 안 나오면?

네오—…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한 사람만 용기를 내면, 나머지도 따라 낸다. 두려움은 전염되지만, 용기도 전염되거든. 문제는, 그 첫 한 사람이 누구냐인데.

연이—그 첫 한 사람, 내가 할게. 나 원래 앞뒤 안 재고 소리 지르는 거 하나는 잘하거든. 내일 저울 앞에서, 제일 크게 소리 지를 사람이 나야.

언니가 밤참으로 갓 구운 빵을 내왔다. 이번엔 하나도 안 탔다. 손이 절반쯤 빠져나간 몸으로도, 이 밤만은 정신을 다잡고 구운 빵이었다.

루나 언니—…내일이, 제 얼굴을 되찾는 날이 될지, 완전히 잃는 날이 될지 모르겠어요. 근데 어느 쪽이든, 오늘 밤은 참 따뜻하네요. 이런 밤을 만들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연이—되찾는 날이에요. 딴 소리 하기 없기. 자, 언니도 이제 좀 자요. 내일 얼굴 되찾으려면, 오늘은 그 얼굴로 푹 자 둬야죠.

루나는 언니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잠결에도 언니 소매를 꼭 쥔 채였다. 놓치면 사라질까 봐, 잠든 손조차 붙들고 있었다.

연이는 그 남매를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했다. 내일, 저 잠든 손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이 조금이라도 덜 무섭기를. 그러려면 이겨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이—내일이야. 저 파란 토끼도, 그 위의 '회장님'인지 뭔지도. 오늘 창고에서 본 얼굴들, 하나도 안 잊을 거야. 그 얼굴들 값을, 내가 저울 앞에서 제대로 매겨 줄 거야. …값 매길 수 없다는 값으로.

창밖으로 밤이 깊었다. 대저울 광장 쪽에서, 거대한 저울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번쩍였다. 내일 정오, 저 접시 위에서 두 개의 진실이 무게를 겨룰 것이었다.

제17화 · 청토끼 금융그룹 — 끝. 제18화 「회중시계가 열릴 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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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필 안내

『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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