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 운세다채로운 운세, 나를 위한 이야기

EP.17 · 22 / 73

숨 쉬는 책

한 사람에 한 권만 읽을 수 있는 숨 쉬는 책들. 검은 손이 보호받은 기억을 뜯어 먹는다.

한글 약 2,741자 · 읽는 시간 약 7분

새벽 다섯 시. 빵집 다락은 아직 어두웠고, 연이의 앞발 아래에서 대출 카드 한 장만 따뜻했다.

연이—(첫 번째 봄. 반납되지 않음. 나는 그런 책을 빌린 적이 없는데.)

카드 모서리에서 물 냄새가 났다. 비 그친 정류장 바닥에서 나는 것 같은, 차갑고 조금 쓸쓸한 냄새였다.

영냥이—안 자고 뭐 하냐. 해 뜨려면 아직 멀었다.

연이—이거 봐. 내 이름으로 빌려 간 책이 있대. 근데 나는 기억이 하나도 없어.

영냥이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잠깐, 그의 왼 앞발이 바닥에서 들렸다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영냥이—도서관 연체료는 무섭다더라. 그러니까 자라.

연이—(방금 그 앞발. 또 아픈 건가. 물어보면 또 아니라고 하겠지.)

손목에 감겨 자던 아기 용이 꼬리를 털며 깨어났다. 용은 카드 냄새를 킁킁 맡더니, 카드에 대고 크게 재채기를 했다.

다락 벽에 책장 하나만 한 틈이 열렸다. 틈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숨소리처럼 밀려 나왔다.

모카—뭐야, 새벽부터. 돼지 너 또 뭐 열었어? 이번엔 냉장고 아니지?

윤달—아, 이 문. 오랜만이네요. 인성의 도서관이에요.

연이—아저씨 여기 와 봤어요?

윤달—3년 동안 안 가 본 하늘이 없거든요. 여긴 조용히만 하면 꽤 친절한 곳이에요.

모카—조용히. 나한테 제일 어려운 단어네. 그다음이 다이어트.

틈을 지나자 둥근 천장 아래로 책장이 끝없이 이어졌다. 책들은 모두 아주 천천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연이—책이… 숨을 쉬어. 진짜로 쉬어.

윤달—여기 책은 전부 누군가의 기억이에요. 주인이 살아서 기억하는 동안은 이렇게 숨을 쉬죠.

바닥의 대리석 위로 금빛 글씨가 천천히 떠올랐다. 이 도서관의 규칙이었다.

[ 인성의 도서관 · 손님 한 분당 열람은 한 권 · 읽은 책은 되돌릴 수 없음 ]

연이—(딱 한 권. 그럼 첫 번째 봄 하나만 찾으면 되는 거네. 간단하잖아.)

모카—한 권? 짜다, 짜. 시장 시식 코너도 세 번까지는 봐주는데.

모카의 목소리가 천장까지 울렸다. 가까운 책장의 책 수십 권이 동시에 탁, 하고 표지를 닫았다.

이어서 사방에서 쉬이이, 하는 종이 소리가 번졌다. 모카가 슬그머니 국자를 입에 물었다.

윤달—책들한테 혼난 거예요. 수달 씨, 랩은 속삭이는 걸로 부탁해요.

모카—속삭이는 랩은 랩이 아니라 기도야. 내 장르를 바꾸라는 거냐고.

영냥이는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숨 쉬는 책들 사이에서 그 혼자만 숨을 참고 걷는 것 같았다.

중앙 안내대에는 사서가 없었다. 대신 커다란 목록 책 한 권이 펼쳐진 채 저 혼자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윤달—이름을 대면 서가를 알려 줘요. 숙녀분 먼저 하세요.

연이—연이요. 아, 혹시 모르니까 꽃돼지로도 찾아봐 주세요.

목록 책의 글자들이 먹물처럼 번지더니 한 줄로 모여들었다.

[ 꽃돼지 · 소장 23권 · 대출 중 1권 「첫 번째 봄」 · 대출자 : ■■■ ]

연이—대출자 이름이… 지워져 있어. 누가 일부러 칠한 것처럼.

모카—그보다 23권? 돼지 네 인생이 23권이나 돼? 대부분 먹는 얘기겠지.

연이—반은 리뷰야! 별점 리뷰도 엄연히 기억이라고.

다들 웃는 사이, 영냥이만 목록을 오래 보았다. 지워진 대출자 칸 위에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

영냥이—서가부터 가자. 여긴 오래 머물 곳이 아니야.

연이의 서가로 가는 길에 윤달이 한 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장갑 낀 손바닥을 다른 손으로 꾹 눌렀다.

연이—아저씨 책도 여기 있어요?

윤달—있죠. 보실래요? 숙녀분 한 권은 아껴야 하니까, 표지만 구경하는 걸로.

윤달이 꺼낸 책은 얇았다. 표지의 이름 자리는 비어 있었고, 책은 아주 얕게 숨을 쉬었다.

윤달—사람들이 절 잊을 때마다 한 장씩 빠져요. 작년엔 이것보다 두 배는 두꺼웠는데.

연이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그 얇은 책을 보았다. 마지막 장에 연필 글씨 한 줄이 새로 적혀 있었다. 숙녀분이 윤달이라고 불러 줌.

연이—그거, 어제 일이잖아요.

윤달—네. 덕분에 한 장 늘었어요. 이 도서관에서 제 책이 두꺼워진 건 3년 만이에요.

모카—야, 사기꾼. 그런 얘기는 밥 먹을 때 해. 체하잖아, 듣는 사람이.

윤달—그럼 오늘 저녁은 수달 씨가 사시는 걸로.

모카—그 얘기가 왜 그렇게 돼!

연이의 서가는 생각보다 낮았다. 책등마다 작은 꽃 무늬가 찍혀 있었고, 맨 끝에 책 한 권만 한 빈칸이 있었다.

연이—와, 내 책들이다. 이건 「초등학교 급식 별점 모음」. 이건 「첫 알바 사장님 미워」.

영냥이—제목 짓는 건 어릴 때랑 똑같네.

연이—칭찬이지? 칭찬으로 들을게. 반박은 안 받아.

연이는 빈칸에 앞발을 넣어 보았다. 서가 안쪽이 축축했다. 누군가 젖은 손으로 책을 꺼내 간 자리였다.

연이—(여기 꽂혀 있었구나. 첫 번째 봄.)

영냥이—연이야. 그 책을 찾으면 어떻게 할 거야?

연이—읽어야지. 내 책이잖아. 근데 왜?

영냥이—아니다. 그냥 물어봤다.

영냥이는 빈칸에서 눈을 돌렸다. 연이가 그 얼굴을 다시 보려 한 바로 그때였다.

그때 도서관 안쪽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숨 쉬던 책들이 일제히 숨을 멈췄다.

깊은 열람실. 유리장 안에 가장 소중한 기억들이 놓여 있었다. 그 유리장 위로 검은 손 여러 개가 거미처럼 기어올랐다.

윤달—보호 서가예요. 주인이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기억만 저기 넣어요.

검은 손 하나가 유리를 뚫고 들어가 얇은 책 한 권을 집었다. 그리고 한 장씩, 아주 맛있게 뜯어 먹었다.

[ 「엄마의 자장가」 · 소유자 : 아기 수달 · 남은 페이지 9 → 6 ]

모카—아기 수달? 야, 그거 우리 섬 꼬맹이 거야! 뱉어!

영냥이가 먼저 뛰었다. 발톱이 검은 손을 갈랐지만, 잘린 손가락은 먹물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영냥이—안 잘린다. 이건 몸이 아니다.

목소리—잘 읽었다. 남의 기억은… 언제 먹어도 달구나.

목소리는 어느 한 곳에서 나지 않았다. 책장 사이의 어둠 전체가 한꺼번에 입을 연 것 같았다.

연이—그거 내려놔. 남의 자장가야!

연이의 앞발에서 불꽃이 튀었다. 검은 손이 움찔 물러났고, 동시에 가까운 책장 모서리에 불이 옮겨붙었다.

윤달—숙녀분! 여긴 도서관이에요, 도서관!

모카가 국자로 불붙은 책장을 두드렸다. 책들이 비명처럼 바스락거리며 서로 몸을 붙였다.

연이—(불은 안 돼. 여기선 내가 세질수록 다른 사람 기억이 타.)

영냥이—연이야. 숨부터. 바닥에 내려놔.

연이는 불을 거두었다. 앞발이 떨렸다. 검은 손은 다시 자장가의 남은 페이지를 향해 기어갔다.

그때 바닥의 규칙 글씨가 희미하게 빛났다. 연이는 그 아래에 붙은 작은 글씨를 그제야 보았다.

[ 덧붙임 · 아끼는 마음으로 소리 내어 읽은 기억은 주인에게 돌아간다 ]

연이—(소리 내어 읽으면 돌아간다. 대신 그게 내 한 권이 되는 거고.)

윤달—숙녀분, 그걸 쓰면 첫 번째 봄은 못 열어요. 한 사람에 한 권이에요.

연이—알아요. 근데 내 봄은 좀 기다려 줄 수 있잖아요. 이건 지금 먹히고 있어요.

연이는 검은 손 사이로 뛰어들어 자장가 책을 끌어안았다. 남은 여섯 장이 품 안에서 작게 떨렸다.

연이는 첫 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잘 자라, 우리 아기. 물결이 너를 안고, 엄마가 물결을 안고.

연이—달이 뜨면 강도 잠들고, 너도 잠들고. 엄마는 여기 있어. 눈 뜨면 여기 있어.

서툰 목소리였다. 음정도 없었다. 그런데 한 줄 읽을 때마다 검은 손이 하나씩 책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목소리—아끼는 마음이라. 그런 건 맛이 없다.

목소리가 물러가자 검은 손들도 어둠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열람실에는 연이의 읽는 소리만 남았다.

마지막 장을 읽자 책이 금빛으로 녹아 천장 너머로 날아갔다. 어딘가 먼 섬에서 잠 못 드는 아기 수달에게로.

[ 「엄마의 자장가」 · 반환 완료 · 열람자 : 꽃돼지 (1/1) ]

모카—돼지… 너 방금 네 한 권 날렸어. 23권짜리 인생 찾으러 와서.

연이—안 날렸어. 빌려준 거야. 반납은 안 받을 거지만.

윤달—이 도서관에서 남의 책에 한 권을 쓴 손님은 처음 봐요. 사서가 있었으면 상 줬을 텐데.

영냥이—상은 내가 주지. 오늘 밤 간식 반.

연이—반? 반만? 고양이님 오늘 좀 짜다.

검은 손이 물러간 도서관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런데 숨소리가 어딘가 눅눅했다.

윤달—이상하네요. 여긴 종이를 지키느라 비도 안 내리는 하늘인데.

연이의 발밑에서 찰박, 소리가 났다. 대리석 틈으로 차가운 물이 스며 오르고 있었다.

물웅덩이 위에 커다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고양이를 닮았지만 고양이보다 몇 배는 큰 발자국이었다.

젖은 발자국은 열람실을 한 바퀴 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이어졌다. 지워진 대출자 칸의 물방울과 같은 냄새가 났다.

영냥이—호랑이야. 우리보다 먼저 왔어.

연이—(비 냄새. 카드에서 나던 그 냄새랑 똑같아.)

계단 아래에서 물 차오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낮고 서늘한 목소리 하나가 물 위로 떠올랐다.

검은 호랑이—첫 번째 봄은 내가 가져간다. 너는 거기서 떠내려가, 돼지.

계단에서 물이 거꾸로 쏟아져 올라왔다. 숨 쉬던 책들이 일제히 숨을 크게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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