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광장. 대저울은 집 한 채만큼 컸다.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황동 저울은, 두 접시가 각각 수레만 했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그 위용은, 재성의 섬이 무엇을 신으로 모시는지 한눈에 보여 줬다. 돈이 아니라, 저울. 정확함이라는 이름의 신을.
정오의 종이 울렸다. 열두 번. 종소리가 끝나는 순간, 재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광장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연이—…떨린다. 근데 이상하게, 도망치고 싶진 않아. 저 사람들이 다 보고 있잖아. 오늘 여기서 지면, 저 사람들은 영영 고개를 못 들 거야.
네오—…맞아. 오늘 재판은 빵집 하나가 아니라, 이 섬의 '희망'이 걸린 거다. 그러니 우리는, 증거로도 이기고 마음으로도 이겨야 해. 어느 하나만으론 부족해.
연이—증거는 네 담당, 마음은 내 담당. 늘 하던 대로네. 좋아, 소리 지를 준비 끝.
네오—…이번엔 소리만이 아니라, 진심을 지르는 거다. 이 섬 사람들 마음을, 네 목소리로 흔들어.
대저울은 재성의 섬의 법정이었다. 판사도, 변호사도 없었다. 두 접시에 각자의 진실을 올리면, 저울이 스스로 무게를 재어 판결했다. 이 섬에서 저울의 판정은 곧 신의 판정이었다.
저울 기둥엔 오래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다.」 아주 오래전, 이 섬이 아직 돈에 미치기 전에 새긴 글이라고 했다. 지금은 아무도 그 뜻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쪽 접시에는 청토끼 측 계약서가, 다른 쪽에는 네오가 밤새 모은 증거가 올라갔다. 취소된 주문서 서른일곱 장, 실체 없는 발주처 주소들, 미끼 상단의 장부.
연이—(저울 하나로 재판을 한다니. 우리 세계 법정보다 훨씬 빠르네. 근데 빠른 만큼 무섭다. 한 번 기울면, 항소도 없을 테니까.)
네오—연이. 이 저울은 '진실의 무게'를 재. 증거만이 아니라, 방청객이 '이건 옳다'고 느끼는 마음까지 얹혀. 그러니 우리는 두 가지를 이겨야 해. 청토끼의 서류, 그리고 이 섬 사람들의 체념.
연이—체념이 제일 무거운 추겠네. 다들 '어차피 청토끼가 이겨'라고 믿고 있으니까.
네오—…그래서 오늘, 그 믿음을 딱 한 번만 흔들면 돼. '어라, 이길 수도 있네?' 그 한 순간이면, 저울추가 통째로 우리 쪽으로 넘어와.
섬 주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잿빛으로 바래 가던 사람들이, 아주 오랜만에 고개를 들고 있었다.
광장 한쪽엔 루나가 밤새 불러 모은 증인들이 서 있었다. 국숫집 아저씨, 대장간 아주머니, 곰보빵 단골. 다들 청토끼가 무서워 얼굴은 반쯤 가렸지만, 발은 이 자리에 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용기였다.
루나—봤지, 연이? 내가 다 불러 왔어! 다들 처음엔 문 닫았는데, 언니 얘기하니까 나와 줬어! 우리 편, 이렇게 많아!
연이—…루나 너, 오늘 진짜 최고의 길잡이다. 저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저울에 올릴 진짜 무게야.
언니는 증인석 맨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오늘만은 도망치지 않고 제 재판을 지켜보러 나온 것이었다. 루나가 그 손을 꼭 잡았다.
청토끼가 대저울 앞에 섰다. 방청객을 둘러보는 그 눈에, 처음으로 아주 옅은 긴장이 스쳤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개를 든 광장은, 그의 삼십 년 영업에서 처음이었다.
청토끼—…이거 원, 관객이 많으시네요. 뭐, 좋습니다. 많이들 보세요. 저울 앞에서 진실이 어떻게 무게를 갖는지. 그리고 그 진실이, 어떻게 돈 앞에서 가벼워지는지도요.
연이—진실이 돈 앞에서 가벼워진다? 어디 두고 봅시다. 오늘은 그 반대일 테니까. 돈이 진실 앞에서 얼마나 가벼운지, 저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드릴게요.
청토끼—…패기 넘치는 꽃돼지 고객님이시네요. 그 패기가 언제까지 가나, 저도 참 궁금합니다.
루나—끝까지 가! 우리 연이 패기는 무한 리필이거든!
방청석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한 리필이라는 말에, 얼어 있던 광장의 공기가 아주 살짝 풀렸다. 그 작은 웃음 하나가, 오늘 재판의 첫 균열이었다.
청토끼—공개 재판이라니, 참 낭만적이네요. 좋습니다. 저울은 거짓말을 안 하니까요.
청토끼—먼저 저희 쪽. 계약서는 여기 있습니다. 채무자 서명, 날인, 이자 조항, 담보 조항. 전부 완벽하게 갖춰져 있죠. 자발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필체로 서명하셨고요.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청토끼 측 접시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완벽한 서류는, 그 자체로 무게가 있었다. 방청석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안 되나…」 되찾았던 용기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연이—완벽한 서류라. 근데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너무 완벽한 거예요. 사람이 급해서 쓴 계약은 원래 여기저기 흠이 있거든요. 이렇게 매끈한 건, 오히려 처음부터 짜고 만든 티가 나요.
청토끼—…흠. 심증이시네요. 저울은 심증으로 안 기웁니다, 고객님.
네오—그럼 물증으로 가지. 내 차례다.
네오—첫째, 발주처 서른일곱 곳 중 서른다섯이 등기 주소가 없어. 둘째, 나머지 둘은 전부 청토끼 금융그룹 자회사고. 셋째는.
네오의 목소리는 칼처럼 반듯했다.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대저울이 조금씩 이쪽으로 기울었다.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등기 주소가 없다고?」 「그럼 그 대량 주문, 전부 가짜였다는 거야?」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에 체념 대신 의문이 떠올랐다.
네오—넷째. 여기 계신 국숫집 사장님도, 대장간 사장님도, 똑같은 방식으로 당하셨습니다. 큰 주문이 몰렸다가, 대출을 받으면 사라졌죠. 같은 각본, 다른 배우. 이건 우연이 아니라 반복입니다.
국숫집 아저씨가 떨리는 손을 들었다. 삼십 년간 청토끼가 무서워 입도 뻥긋 못 하던 사람이었다. 「…맞소. 나도 그랬소. 갑자기 축제 납품 주문이 백 그릇씩 오다가, 대출 받으니 뚝 끊겼지. 나만 재수가 없는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둑이 터졌다. 대장간 아주머니가, 방앗간 할머니가, 하나둘 같은 이야기를 쏟아 냈다. 저마다 혼자 삼켰던 억울함이, 처음으로 광장에 소리가 되어 울렸다.
그 목소리들의 무게가, 대저울에 얹혔다. 저울이 눈에 띄게 이쪽으로 기울었다. 증거가 아니라, 되찾은 목소리들의 무게였다.
연이—…봐요, 네오. 한 사람이 용기 내니까, 다 따라 내잖아. 두려움도 전염되지만, 용기도 전염된다며. 지금 이 광장, 용기 감염 확산 중이야.
네오—…네 말이 맞았어. 저울추가 넘어오고 있다. 자, 마지막 한 방이다.
네오—셋째, 계약 당일의 잉크를 감정한다. 금선.
백금빛 실이 계약서 위를 훑자, 아름다운 글씨 밑바닥에서 다른 글씨가 배어 나왔다. 먼저 찍혀 있던, 백지 위의 서명이었다.
네오—금선은 잉크가 마른 순서를 읽어. 나중에 마른 잉크는 위에, 먼저 마른 잉크는 아래에 배어 나오지. 자, 보십시오. 서명의 잉크가 조항의 잉크보다 먼저 말랐습니다. 즉—
네오—서명이 먼저, 조항이 나중. 이건 채무자가 조항을 보고 서명한 게 아니라, 빈 종이에 서명부터 받고 나중에 채워 넣었다는 물증입니다. 명백한 기망이죠.
청토끼의 귀가 파르르 떨렸다. 삼십 년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그의 계약서가, 백금 실 한 가닥에 발가벗겨지고 있었다.
청토끼—…잉크 감정이라. 고객님, 그런 기술을 어디서. 이 시대엔 없는 감정법인데요.
네오—통계라고 해 두지. 늘 그렇듯.
연이—봐, 네오도 가끔 내 말투 따라 하네. '통계'래.
서명이 먼저고 조항은 나중이었다. 백지 계약이었던 것이다.
금선이 밝힌 진실이 광장 위로 크게 떠올랐다. 모두가 볼 수 있게. 빵집 언니가 서명한 건 백지였고, 그 위에 청토끼가 나중에 조항을 채워 넣은 것이었다. 담보도, 이자도, 형상 회수도, 전부 서명 뒤에 붙은 거짓이었다.
방청석이 크게 술렁였다. 「나도 백지에 서명했는데!」 「그럼 우리 계약도 다 가짜야?」 사람들이 저마다 제 계약서를 떠올렸다. 하나의 진실이, 광장 전체의 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연이—들으셨죠, 여러분! 백지에 서명받고 나중에 조항 채우기! 이게 청토끼의 진짜 영업 비법이에요! 여러분 계약도, 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라고요!
저울이 크게, 아주 크게 이쪽으로 기울었다. 물증과 여론이 한꺼번에 얹혔다. 청토끼 측 접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판정까지, 정말 한 뼘이었다.
청토끼—…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삼십 년이야. 삼십 년간 이 저울은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어.
연이—저울은 배신 안 했어요. 원래 저울은 진실 편이었는데, 당신이 삼십 년간 저울을 속여 온 거죠. 오늘 처음, 저울이 진짜 무게를 잰 것뿐이에요.
청토끼의 손이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의 여유가 사라지고, 궁지에 몰린 짐승의 눈빛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가 무언가를, 정말 쓰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언니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흐릿한 눈에서, 오랜만에 또렷한 눈물이 흘렀다. 자기 억울함이, 처음으로 세상에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광장이 술렁였다. 저울이 크게 이쪽으로 기울었다. 청토끼의 미소에서 처음으로 각도가 무너졌다.
청토끼—…고객님. 지금 제 삼십 년 영업을 통째로 부정하시는 겁니까?
연이—삼십 년 사기를 부정하는 거죠, 정확히는.
방청석에서 누군가 「옳소!」 하고 외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옳소!」 「맞아!」가 터졌다. 삼십 년 눌러 온 목소리들이, 오늘 광장을 가득 채웠다.
네오—들리십니까, 대표님. 이게 여론의 무게입니다. 저울이 재는 건 서류만이 아니에요. 저 목소리들도, 전부 무게가 있습니다.
청토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그의 눈에서 오래된 무언가가 스쳤다. 삼십 년 전, 아무도 자기 목소리를 들어 주지 않던 어린 토끼의 얼굴이. 지금 광장을 채운 저 목소리들이, 그때의 자기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루나—맞아! 삼십 년 동안 나쁜 짓 한 거예요! 저울아, 이 아저씨 아주 무겁게 달아 줘!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두려움에 눌려 있던 광장에, 처음으로 웃음소리가 울렸다. 청토끼를 비웃는 웃음. 그 웃음의 무게가, 또 저울에 얹혔다.
청토끼의 완벽한 미소가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귀가 뒤로 젖혀지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삼십 년간 이 섬 누구도 자기를 비웃은 적이 없었다. 값을 매기는 자를, 감히 비웃다니.
청토끼—…웃지 마세요. 웃음도 값을 매길 수 있어요. 여러분, 방금 그 웃음, 아주 비싼 겁니다. 나중에 청구서로 돌려받으실 거예요. 한 명도 빠짐없이.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 터진 웃음은, 두려움보다 빨리 번졌다. 삼십 년 눌러 온 억울함이 웃음의 형태로 광장을 채웠다. 대저울이, 결정적으로 이쪽으로 기울었다.
연이—봤죠, 언니? 사람들이 웃어요. 청토끼가 무서워서 다들 숨죽이던 광장에서요. 이게 무효 판정보다 먼저 온 진짜 승리예요. 사람들이 다시 웃을 수 있게 된 거.
판정은 눈앞이었다. '무효'라는 두 글자가 저울 위에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광장이 숨을 죽였다. 삼십 년간 한 번도 기운 적 없던 저울이, 처음으로 청토끼의 반대편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잿빛 사람들의 눈에, 오랫동안 잊었던 빛이 돌아왔다. 희망이라는 빛이.
루나—이겼다! 연이, 우리 이긴 거야! 저울 봐, 저울! 우리 쪽으로 완전히—
언니가 두 손을 모았다. 흐릿한 얼굴에, 오랜만에 사람다운 기대가 번졌다.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굴도, 이름도, 딸 같은 동생과의 평범한 아침도.
연이—…봐요, 언니. 값 매길 수 없는 것도 있다니까요. 방금 그거, 저울이 증명했어요. 언니 억울함이, 청토끼 서류보다 무거웠던 거예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승리가 손에 잡힐 듯했던 그 순간, 청토끼가 아주 조용히 웃었다. 진 자의 웃음이 아니라, 마지막 패를 아껴 둔 자의 웃음이었다.
그때 청토끼가 웃음을 거뒀다. 그러고는 망토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회중시계였다. 금도 은도 아닌, 밤하늘을 깎아 만든 듯한 검은 케이스. 뚜껑에는 실 한 오라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 시계를 본 순간, 네오의 온몸이 굳었다. 갈기 끝이 곤두섰다. 저 시계를, 저 검은 케이스를, 저 실 한 오라기를 — 그는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악몽처럼.
네오—…저 실 문양은. 그 여자의 물건이야. 청토끼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건, 이 섬의 착취가 처음부터 그 여자의 손길이었다는 뜻이고.
연이—그 여자? 네오, 너 저 시계 알아? 청토끼 위의 '회장'이랑 관계있는 거야?
네오—…나중에 설명할게. 지금은, 저 뚜껑이 열리기 전에 시계를 빼앗아야 해. 저게 열리면, 이 재판은 재판이 아니게 돼. …이 세계의 규칙 자체가 다시 쓰이거든.
방청석이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용기를 되찾았던 사람들이, 저 검은 시계 하나에 다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본능이 알고 있었다. 저것은, 저울보다 위에 있는 물건이라는 걸.
루나—연이! 저 시계 무서워! 아까 물이 빛나던 거랑 정반대야. 저건… 뭔가를 지우는 냄새가 나!
연이—…루나 말이 맞아. 저거 열면 안 될 것 같아. 네오, 지금 막아!
청토끼—이건 정말 쓰고 싶지 않았는데요. 위에서 내려 주신 물건이라, 함부로 꺼내면 혼나거든요.
네오—…그 시계, 어디서 났어. 대답해. 그건 이 시대 물건이 아니야.
청토끼—어라, 역시 아시네요? 역시 고객님도 이 시대 분이 아니시고요?
네오가 움직이기도 전에, 청토끼의 엄지가 뚜껑을 열었다.
딸깍. 시계 속에서 시간이 아닌 것이 흘러나왔다. 검푸른 안개, 잉크 냄새, 그리고 사각사각 보이지 않는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
청토끼—부정 계약. 고쳐 쓰기의 시간입니다, 고객님들.
대저울 위의 계약서가 저 혼자 펄럭였다. 무효의 증거였던 백지 서명 위로 새 조항이 스멀스멀 자라났다. 잉크가 시간을 거슬러 마르고 있었다.
「본 재판의 참관인 일동은, 판정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제 숨으로 담보한다.」
연이—뭐야 이거. 글자가 제멋대로 써지고 있어!
광장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들이 자라났다. 잿빛 주민들이 비명도 없이 고개를 떨궜다. 저울이 미친 듯이 반대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방금 용기를 냈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씩 고개를 숙였다. 국숫집 아저씨의 입에 「이의 없음」이라는 금빛 글자가 새겨졌다. 대장간 아주머니의 눈에 「방청 종료」가 새겨졌다. 되찾았던 목소리가, 한 줄의 조항에 다시 봉인됐다.
언니가 비틀거렸다. 방금까지 또렷했던 눈물이, 다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증명됐던 억울함이, 눈앞에서 도로 지워지고 있었다.
루나—언니! 안 돼, 언니 얼굴 또 흐려져! 연이가 다 증명했는데! 저울도 우리 편이었는데! 왜, 왜 또 이래!
루나가 언니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관계자 접근 금지」라는 글자가 그 애의 발밑에 새겨졌다. 발이 바닥에 붙었다. 눈앞에서 언니가 지워지는데,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다.
루나—…이건 너무해.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냥 빵 굽고, 배달하고, 같이 살고 싶었던 것뿐인데.
연이는 흐려지는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발이 묶인 루나, 지워지는 언니. 이 억울함이, 이 무력함이, 자기가 원래 살던 세계의 어떤 밤들과 너무 닮아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비껴가듯 망가지던, 그 밤들과.
연이—…이런 게 운명이라고? 열심히 산 사람이 이렇게 지워지는 게? …아니야. 이건 운명이 아니라, 누가 펜으로 그렇게 써 버린 것뿐이야. 쓴 거라면, 다시 쓸 수도 있어. 반드시.
루나 언니—…역시. 안 되는 거였어. 이 섬에서 청토끼를 이기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어. 괜히 여러분까지…
연이—언니! 그런 말 하지 마요! 아직 안 끝났어요! 방금 저울, 우리 쪽으로 완전히 넘어왔었잖아요! 저건 반칙이에요, 진 게 아니라!
하지만 연이의 목소리에도 금빛 글자가 새겨지려 했다. 「원고 측 발언, 채권단 검토 대상.」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조항이 그 말을 삼키려 들었다.
연이—…내 말까지. 이젠 말도 못 하게 하는 거야?
청토끼—불필요한 발언은 비용이거든요, 고객님. 저는 비용을 아주 싫어해서요. …자, 이제 조용히, 폐기 절차를 밟으실까요?
연이는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원고 측 발언 종료」라는 글자가 입술을 봉하려 들었다. 목소리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항목이 되어 가는 감각. 자기 이름이, 계약서의 한 줄로 바뀌어 가는 감각.
루나 언니—…그만해요, 연이. 이제 그만. 저 때문에 여러분까지 지워지는 건, 정말 못 보겠어요. 제 얼굴 하나, 그냥… 포기할게요. 여러분만은, 여러분만은 도망쳐요.
바로 그때, 봉해지려던 연이의 입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항이 삼키기 직전, 마지막 한 마디였다.
연이—…포기 안 해요! 언니 얼굴은 언니 거예요! 저 파란 토끼 장부에 적힌 한 줄이 아니라, 매일 아침 루나한테 웃어 주던 그 얼굴이라고요! 그건 저울로도, 펜으로도, 절대 못 지워요!
그 외침이 광장에 울렸다. 조항이 그 말마저 덮으려 했지만, 진심이 담긴 말은 잉크보다 조금 더 오래 버텼다. 잿빛으로 굳어 가던 방청객 몇몇이, 그 말에 아주 잠깐 고개를 들었다.
청토끼—…시끄럽네요. 말이 길수록 이자가 붙는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좋아요. 그럼 그 입도 폐기 목록에 넣어 드리죠. 다 함께, 아래로.
네오—단금.
백금의 참격이 검은 안개를 갈랐다. 그런데 베인 자리에서 잉크가 비웃듯 다시 이어졌다. 아무리 베어도 조항은 계속 새로 쓰였다.
네오—금선! 열 갈래로!
네오가 백금 실 열 가닥을 동시에 뻗었다. 안개의 열 곳을 한꺼번에 묶으려 했다. 하지만 열 가닥 모두에, 순식간에 「채권단 자산」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실이 제 주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네오—…내 기술이, 나를 묶어. 이건 상대가 강한 게 아니라, 세계의 룰을 통째로 쥔 거야. 정면으로는 못 이긴다. 정면으로는—
네오의 갈기가 조금씩 잿빛으로 물들었다. 백 년을 벼린 파수꾼의 백금빛이, 한 줄 한 줄 조항에 덮여 갔다. 그는 이 악물고 버텼지만, 세계를 다시 쓰는 펜 앞에서는 그조차 한 문장에 불과했다.
연이—네오! 네 갈기가! 그만해, 너까지 지워지잖아!
네오—…괜찮아. 네가 흐려지는 것보단, 내가 먼저 흐려지는 게 나아. 늘 그랬잖아. 네 뒤는, 내가 지킨다고.
네오—글자를 벤다고 문서가 죽는 게 아니야. 이건 문서의 본뜻 자체를 덧쓰는 힘이라고!
검은 안개가 광장 전체로 번졌다. 안개가 닿는 곳마다, 세상이 계약서로 변했다. 나무는 '목재 자산'이 되고, 분수는 '급수 설비'가 되고, 사람은 '노동 담보'가 되었다. 이름이 있던 모든 것이, 값이 매겨진 항목으로 다시 쓰였다.
청토끼—이게 진짜 저울의 세계입니다, 고객님. 저는 그냥 사채업자가 아니에요. 저는 이 섬의 '문장'을 고쳐 쓰는 대리인이죠. 위에 계신 분이 주신, 이 아름다운 펜으로요.
네오—…펜. 그래, 저건 펜이야. 시계가 아니라. 그럼 벨 게 아니라, 펜을 멈춰야 한다. 연이! 시계 말고, 청토끼의 손을 노려!
네오가 다시 금선을 뻗었다. 이번엔 안개가 아니라 청토끼의 손목을 겨눴다. 하지만 손목에 닿기 직전, 금선에 글자가 새겨졌다. 「본 참격은 정당방위 범위를 초과하여 무효.」 백금 실이 힘없이 풀렸다.
네오—…내 공격까지 조항으로 무효 처리한다고? 이건 반칙이 아니라, 규칙 자체를 쥐고 있는 거잖아.
청토끼—반칙이라뇨. 저는 규칙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다만, 그 규칙을 제가 실시간으로 쓸 뿐이죠. 펜을 쥔 자에게 반칙이란 없어요. 룰이 곧 저니까요.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무엇을 해도 조항으로 덮였다. 힘을 쓰면 '자산'이 되고, 저항하면 '위반'이 됐다. 이건 싸움이 아니라, 저 혼자 룰을 바꾸는 게임이었다. 절망이 발밑에서 차올랐다.
연이—덩굴 결박!
연이의 청록 덩굴이 회중시계를 향해 뻗었다. 그런데 닿기 직전, 덩굴 표면에 금빛 글자가 새겨졌다. 「본 덩굴은 채권단의 자산으로 한다.」
연이—내 덩굴이 안 움직여! 내 숨인데 내 말을 안 들어!
청토끼—이해가 빠르시네요. 이 시계 아래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게 계약서 위의 문장이 됩니다. 그리고 문장의 소유권은 말이죠.
청토끼—언제나 펜을 쥔 쪽에 있거든요.
연이—그럼 이건! 움!
연이의 발밑에서 새싹이 돋으려 했다. 하지만 싹이 흙을 뚫기도 전에, 「본 식물은 무허가 재배물로 즉시 압류」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새싹이 잿빛으로 시들었다.
연이—뿌리내림! 이 시계의 본뜻까지—!
뿌리가 회중시계의 밑바닥을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시계에 닿기도 전에, 「본 뿌리의 소유권은 채권단에 있음」이 새겨졌다. 뿌리가 제 주인을 배신하듯, 연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연이—…뭘 해도 안 돼. 힘을 쓰는 순간 그게 조항이 돼. 이건… 이건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네오—…아니. 방법이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조금만 버텨, 연이. 우리를 받쳐 줄 무언가가, 이 아래 어딘가에 있어. 재성이 버린 걸 거두는 곳이.
루나—연이! 네오 아저씨! 안 돼, 둘 다 흐려지고 있어! 뭐라도, 뭐라도 해야 하는데—
루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순간, 광장 분수의 물이 그 애의 다급함에 응답하듯 크게 출렁였다. 물줄기 하나가 저 혼자 솟아, 검은 안개를 향해 튀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물줄기에도 곧 금빛 글자가 새겨졌다. 「본 물은 광장 시설물로 채권단에 귀속된다.」 물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나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그게 자기가 한 건지도 몰랐다.
네오—(…방금 그 물. 저 아이가 무의식중에 물을 움직였어. 하지만 아직 제 힘을 몰라. 그리고 지금은… 저 시계 아래에서는 무슨 힘을 써도 다 문장으로 덮여 버린다.)
루나—…어? 방금 물이, 내 말 들은 것 같았는데. 다시! 다시 움직여 줘, 물아!
하지만 물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겁에 질린 마음은, 아직 물을 부를 만큼 단단하지 못했다. 루나는 울먹이며 주먹을 꼭 쥐었다. 힘이 있는데 쓸 줄 모르는 것만큼, 무력한 건 없었다.
네오—(…저 아이, 재성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물의 결을 타고났어. 아주 드문 경우다. 만약 저 힘을 다스리게 된다면… 언젠가, 이 시계의 물마저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직, 씨앗일 뿐이야.)
루나—…나 왜 이렇게 약해. 언니도 못 지키고, 연이도 못 도와주고. 물이 내 말 들었으면서, 왜 딱 한 번뿐이야.
루나의 눈물이 다시 광장 바닥에 떨어졌다. 그 눈물이 닿은 자리가, 아주 잠깐 은빛으로 반짝였다. 아무도 못 봤지만, 물은 여전히 그 애를 알아보고 있었다. 다만 아직, 서로 인사할 준비가 안 됐을 뿐이었다.
네오—루나. 지금 못 하는 걸 자책하지 마라. 오늘은 씨앗을 본 날이야. 씨앗은 원래, 당장은 아무것도 못 해. 하지만 물을 주고 기다리면, 반드시 자란다. 네 안의 그 물도 그래.
루나—…내 안에 물이 있어? 진짜로?
네오—있어. 아주 크고 따뜻한 물이. 다만 지금은 네가 그 물을 무서워해서, 물도 네 눈치를 보는 거야. 언젠가 친해지면, 그땐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네 편이 될 거다.
숨이 무거워졌다. 연이는 제 앞발이 흐릿해지는 것을 봤다. 지하 창고 사람들과 똑같은 잿빛이었다.
의식이 멀어졌다. 값이 매겨지는 감각. 이름이 항목으로 바뀌는 감각. 아, 이게 그 사람들이 매일 겪던 거구나. 연이는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이상하게도 창고의 얼굴들이 또렷이 떠올랐다.
곰보빵 아저씨, 손등의 지워진 이름. 앞치마의 빵집 언니. 자기 다리라도 팔겠다던 루나. 저 잿빛 사람들의 얼굴이, 흐려지는 연이의 정신을 오히려 붙들었다.
연이—…아니. 나 여기서 항목이 될 순 없어. 나 아직 아무것도 못 돌려줬잖아. 언니 얼굴도, 창고 사람들도. …나, 아직 지워지면 안 돼.
연이는 흐려지는 앞발로, 제 머리 위 꽃을 만졌다. 을(乙)의 꽃. 자기를 나타내는 중심 글자. 그 꽃이 아주 약하게, 그러나 분명히 따뜻했다. 아직 여기, 자기가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연이—…맞아. 나는 항목이 아니야. 나는 연이야. 저울로도 못 지우는, 연이라고.
하지만 회중시계의 힘은 너무 강했다. 결심만으로 뒤집기엔, 저 펜은 세계 그 자체를 쥐고 있었다. 연이의 꽃빛이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잿빛에 눌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네오가 연이 앞을 막아섰다. 그 넓은 등이, 처음으로 뒤로 밀리고 있었다.
네오—연이, 숨을 세. 넷에 들이쉬고 넷에 내쉬어. 글자가 네 숨까지 가져가려 들어도, 숫자 세는 목소리만은 절대 내주지 마.
연이—…하나… 둘… 셋… 넷…
연이는 잿빛으로 변해 가는 입술로 숫자를 셌다. 회중시계의 조항이 그 숫자마저 지우려 했지만, 이상하게 숫자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그저 살아 있으려는 리듬. 숨은, 계약서에 적히지 않는 것이었다.
네오—잘하고 있어. 숨은 네 거야. 아무도 못 가져가. 계속 세. 내가 최대한 시간을 벌게.
네오가 다시 앞을 막았다. 금선을 뻗고, 참격을 날리고, 조항이 새겨지면 또 뻗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걸 알면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뒤에 있는 두 사람이 흐려지는 것보다는, 제가 먼저 부서지는 게 나았으니까.
하지만 시계의 힘은 끝이 없었다. 네오의 갈기가 조금씩 잿빛으로 물들었다. 백 년을 벼린 파수꾼조차, 세계를 다시 쓰는 펜 앞에서는 한 줄의 문장에 불과했다.
네오—(…이대로는 안 돼. 지금 그 금빛을 풀면 셋 다 살릴 수 있어. 하지만… 여기서 풀면 시간이 나를 알아본다. 저 시계의 주인한테, 내 위치를 알려 주는 꼴이야. 아직은… 아직은 안 돼.)
루나—연이! 고양이 아저씨! 바닥이, 바닥 글자가 지워지고 있어!
광장 포석에 새겨져 있던 오래된 글자들, '값을 매길 수 없음'이라 적힌 축문들이 지워지면서 그 아래로 어둠이 열렸다.
청토끼—돈이 문서를 이기는 곳에는, 진 문서들이 떨어지는 길이 따로 있습니다. 고객님들은 오늘 그 폐기 서류함으로 가시는 거예요.
루나—안 돼! 연이! 네오 아저씨!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루나가 벌어지는 어둠을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청토끼의 조항이 그 애의 발목을 붙들었다. 「미성년 채무 관계자, 낙하 금지.」 루나는 발버둥 쳤지만, 광장 바닥에 붙박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연이—루나! 울지 마! 이거 끝난 거 아니야! 나 반드시 돌아와서, 언니 얼굴 되찾을 거야! 약속했잖아, 한 조각도 안 남기고 다 돌려받아 준다고!
루나—연이…! 꼭! 꼭 돌아와야 해! 나 여기서 기다릴게! 언니랑 같이!
네오—루나. 언니 지켜라. 우리가 없는 동안, 네가 이 광장의 유일한 우리 편이야. 물을 믿어. 아까 그 물, 네 안에 있는 힘이야. 겁먹지 말고, 조금씩 친해져 봐.
루나—…물을? 내가? 근데 아까는 안 됐는데—
네오—안 된 게 아니라, 아직 서로 인사를 안 한 것뿐이야. 다음엔 될 거다. 그때까지, 언니 손 꼭 잡고 있어.
바닥이 사라졌다. 세계가 세로로 길어졌다. 루나의 비명이 저 위로 멀어졌다.
떨어지는 건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위에 남겨 둔 것들이었다. 발목이 붙박인 채 우는 루나. 얼굴을 포기하려던 언니. 다시 고개를 숙인 광장 사람들. 지키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한 채 떨어지고 있었다.
연이—…미안해, 루나. 미안해, 언니. 나 꼭 돌아올게. 이대로 끝 아니야. 절대 아니야.
네오가 낙하 중에도 연이 곁으로 다가와, 그 흐릿한 몸을 감쌌다. 잿빛으로 물든 갈기였지만, 그 온기만은 여전히 따뜻했다.
네오—…아직 진 거 아니야, 연이. 재성의 섬에서는 밀렸지만, 우리가 떨어지는 이 아래는 저 시계의 힘이 안 닿는 곳이다. 저기선 다시 우리가 우리일 수 있어.
연이—…시계 힘이 안 닿는 곳? 그런 데가 있어?
네오—있어. 값을 매기는 세계가 버린 것들이 모이는 곳. 값이 아니라 '뜻'이 다스리는 곳. 재성의 밑에 뿌리내린, 인성의 도서관이야.
떨어지면서 연이는 보았다. 어둠 속을 함께 떨어지는 무수한 종이들. 지워진 편지, 빼앗긴 일기, 본뜻을 잃은 계약서들.
그것은 재성의 섬이 지워 온 모든 진심의 무덤이었다. 「사랑해」라고 쓰였다가 지워진 편지. 「미안해」라고 쓰였다가 찢긴 쪽지. 값이 안 매겨져 버려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문장들.
연이—…이 종이들, 전부 누군가의 마음이었네. 값을 못 매겨서 버려진 게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어서 너무 귀했던 건데.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종이들이 연이의 몸 아래로 모여, 커다란 종이배처럼 그녀를 받쳐 들었다. 마치 버려진 진심들이, 같은 처지의 여행자를 알아보고 손을 내민 것처럼.
네오—…이 종이들이 우리를 받치고 있어. 폐기 서류함은, 청토끼가 생각한 것과 다른 곳인 모양이군. 버려진 문서가 모이는 곳. 그렇다면, 저 아래엔—
그리고 그 종이의 폭포 아래에서, 등불 하나가 조용히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등불 물고기 몇 마리가 그 주위를 별처럼 헤엄쳤다. 누군가, 이 버려진 문서들을 지키고 있었다. 재성의 섬이 버린 모든 본뜻이, 실은 저 아래 어딘가에 차곡차곡 보관되고 있었던 것이다.
네오—…우리는 지금, 인성의 도서관으로 떨어지고 있어. 재극인. 돈이 버린 걸, 문서가 거둔다. 저 등불의 주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연이—…재성의 섬에선 졌지만, 아직 안 끝났어. 언니 계약서도, 이 버려진 마음들도. 저 아래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번엔, 값이 아니라 뜻으로.
등불이 점점 커졌다. 아니, 이쪽이 등불을 향해 가라앉는 것이었다. 종이배가 부드럽게 속도를 줄였다. 마치 오래 이 손님을 기다린 누군가가, 마지막 한 걸음을 조심히 받아 주는 것처럼.
그 등불 아래, 흰 로브를 입은 형상이 서 있었다. 여우처럼 뾰족한 귀, 오래된 책 냄새. 그 손에 든 등불 속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별처럼 헤엄쳤다.
흰 여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두 손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한 쌍, 재성이 값을 못 매겨 버린 손님들이 오는구나. 어서 오게. 여기는 버려진 본뜻을 거두는 곳. 인성의 도서관일세.」
연이—…책 냄새. 그리고 이 따뜻한 느낌. 여기가… 도서관?
네오—…그래. 우리가 원래 찾던 곳이야. 재성의 섬을 통해서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도착하는 거였어. 연이.
종이의 폭포가 잦아들고, 두 여행자가 부드러운 책의 바다 위로 내려앉았다. 위에서는 재성의 저울이 그들을 버렸지만, 아래에서는 인성의 도서관이 그들을 받았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법이었다.
제18화 · 회중시계가 열릴 때 — 끝. 제19화 「책들이 숨 쉬는 곳」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