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순식간에 무릎까지, 다시 허리까지 차올랐다. 책들이 숨을 참은 채 물 위로 떠올라 둥둥 흘러갔다.
연이—꿀악! 발이, 발이 안 닿아!
모카—돼지는 원래 물에 뜨잖아! 침착해, 넌 지금 튜브야!
연이는 허우적거렸다. 몸은 떴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살이 그녀를 서가 사이로 자꾸만 끌고 갔다.
물 한가운데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그 위로 검은 등줄기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검은 호랑이였다. 털 끝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목의 금빛 고리가 젖은 빛을 냈다.
검은 호랑이—위층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꼭 아래까지 따라오네.
연이—내 책 돌려줘! 대출 카드에 내 이름 있었어!
검은 호랑이—카드는 젖으면 번져. 이름도 마찬가지고.
호랑이가 앞발로 수면을 내리쳤다. 물이 벽처럼 일어나 서가 하나를 통째로 삼켰다.
연이—(버텨. 나무는 뿌리가 있잖아. 뿌리를 내리면 돼.)
연이의 발끝에서 초록 뿌리가 뻗어 바닥을 찾았다. 그러나 뿌리는 물속에서 길을 잃고 둥둥 떠올랐다.
연이—안 잡혀. 뿌리가 바닥을 못 찾아!
윤달—물이 너무 많아요! 물이 넘치면 나무는 뿌리째 떠내려가요. 수다목표, 水多木漂!
모카—사자성어 말고 구명조끼를 달라고!
다음 물결이 연이를 덮쳤다. 그녀의 작은 몸이 서가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영냥이—연이야.
영냥이가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복슬복슬한 털이 물을 먹자마자, 작은 몸이 돌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윤달—고양이님! 쇠는 물을 낳는 기운이라 물속에선 힘이 빠져요! 金生水라고요!
영냥이—알아. 아는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
영냥이는 이를 악물고 발을 저었다. 앞으로 한 뼘 나아갈 때마다 아래로 두 뼘씩 가라앉았다.
모카—아, 진짜. 다들 비켜. 여기서 수영 되는 애가 누구야?
모카가 국자를 이빨에 물고 물속으로 미끄러졌다. 보랏빛 꼬리가 노처럼 한 번 휘자 물살이 갈라졌다.
모카—수달한테 물로 덤비냐? 이건 우리 집 앞마당이야.
모카는 가라앉는 영냥이의 망토 깃을 한 움큼 움켜쥐고 위로 끌어당겼다. 흠뻑 젖은 고양이가 수달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영냥이—망토 놔라. 뒷덜미 잡혀 끌려가는 건 고양이 체면이 아니다.
모카—체면은 물 빠지면 찾아. 지금은 숨이나 쉬어, 이 무거운 쇳덩이야.
영냥이—나 말고, 연이부터 찾아.
모카—알아, 알아. 근데 너부터 건져야 돼지를 건지지. 둘 다 가라앉으면 내가 왕복 두 번 해야 하잖아.
모카는 영냥이를 떠 있는 책장 위로 밀어 올리고는 다시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번엔 아래로, 연이가 사라진 쪽으로.
물속은 조용했다. 젖은 책들이 해파리처럼 천천히 떠다녔고, 페이지 사이로 누군가의 기억이 흐릿하게 비쳤다.
연이—(숨. 숨을 받쳐. 영냥이가 그랬잖아. 잡아당기지 말고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연이는 허우적거리던 앞발을 멈췄다. 몸에 힘을 빼자 물살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감싸 안았다.
바로 앞에 낡은 우산 하나가 거꾸로 뒤집힌 채 떠다녔다. 다락방 구석에 버려 둔 그녀의 우산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우산 밑에 찢어진 페이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비 오는 정류장. 우산 하나 아래에 두 사람. 얼굴은 물에 번져 보이지 않았다.
연이—(이거… 나야? 나 같은데, 이런 기억은 없는데.)
검은 앞발이 페이지를 낚아챘다. 호랑이가 바로 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물속인데도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검은 호랑이—보지 마. 그건 네가 볼 게 아니야.
연이—왜? 내 이름으로 빌린 책이잖아. 왜 네가 정하는데?
검은 호랑이—모르는 게 나은 빚도 있어. 갚을 수 없는 빚이면 더더욱.
연이—(이 냄새. 카드에서 나던 비 냄새. 대출자 칸을 지운 게 너였구나.)
연이—너, 나 알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나를 아는 것처럼 굴었잖아.
검은 호랑이—몰라. 알 필요도 없고. 나는 장부에 적힌 걸 거둘 뿐이야.
연이—거짓말. 장부에 적힌 거면 아까 그 페이지는 왜 그렇게 빨리 숨겼는데.
호랑이의 붉은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물속에서 그 눈만 젖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호랑이는 페이지를 앞발 안에서 구겼다. 그런데 그 동작이 이상하게 조심스러웠다. 버리는 게 아니라 숨기는 것처럼.
그때 물 밑바닥의 어둠이 갈라졌다. 검은 손가락 다섯 개가 해초처럼 솟아올라 호랑이의 고리를 감았다.
목소리—무엇을 망설이느냐. 그 돼지를 가라앉혀라.
검은 호랑이—책만 회수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돼지까지는…
목소리—명령이다. 네 장부에 미수를 남긴 값이다.
금빛 고리가 조여들었다. 호랑이가 짧게 숨을 삼키더니, 앞발을 들어 연이의 머리 위에 얹었다.
연이—(눌린다. 아래로, 아래로.)
그런데 앞발은 바로 내리누르지 않았다. 한 박자. 아주 짧은 한 박자 동안, 호랑이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모카—그 발 치워, 줄무늬!
모카가 물살을 가르며 돌진했다. 꼬리로 호랑이의 옆구리를 후려치고, 그 틈에 연이의 목덜미를 물어 끌어올렸다.
연이의 손목에서 아기 용이 눈을 번쩍 떴다. 용은 물을 한 번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용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작은 입으로 소용돌이가 빨려 들어갔고, 서가를 삼킨 물이 쑥쑥 줄어들었다.
물이 빠진 서고 바닥은 진흙처럼 질척했다. 젖은 책들이 여기저기 쓰러진 채 가늘게 숨을 골랐다.
연이—얘가, 이 조그만 게, 저 물을 다 마셨어?
윤달—진토는 물의 창고예요. 辰은 물을 가둬 두는 흙이거든요. 그 용이 숙녀분한테 온 게 우연이 아니네요.
모카—배 터지겠다. 야, 용. 너 물 몇 리터 마신 거야.
아기 용은 배가 볼록해진 채 연이의 손목에 다시 감겼다. 그리고 꺽, 하고 작은 물방울 트림을 했다.
연이—별 다섯 개. 아니, 여섯 개 줄게. 별점 규정 위반이지만.
진흙 바닥 끝,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참에 호랑이가 서 있었다. 목의 고리가 아직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검은 호랑이—용까지 데리고 다니는 줄은 몰랐네. 다음엔 그것도 안 통해.
연이—너 아까 왜 멈췄어? 나 누르라고 했을 때. 한 박자 멈췄잖아.
검은 호랑이—착각이야. 물속에선 다 느려 보여.
호랑이는 등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구겨 쥔 앞발을 한 번 가슴께로 당겼다. 무언가 젖지 않게 지키는 사람처럼.
검은 꼬리가 계단 아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젖은 발자국만 한 칸씩 아래로 이어졌다.
영냥이가 물가에서 몸을 털었다. 털이 몸에 착 달라붙어 평소보다 반은 작아 보였다. 모자 끝 술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콜록이며 일어섰다.
연이—고양이님! 괜찮아? 물 많이 먹었어?
영냥이—괜찮아. 모카 덕분에 살았어. 두 번 말하게 하진 마.
모카—녹음해 둘 걸. 평생 우려먹을 수 있었는데.
연이는 영냥이의 왼 앞발을 보았다. 그을린 자국 위로 붉은 녹 같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그가 재빨리 앞발을 망토 밑으로 감추었다.
연이—그 발. 아까부터 이상해. 보여 줘.
영냥이—젖어서 그래. 쇠도 젖으면 녹슬잖아. 말리면 좀 나아질 거야.
윤달이 영냥이를 한 번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장갑 낀 손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연이—(다들 뭔가 알아. 나만 모르는 게 있어.)
젖은 책들이 바닥에서 힘겹게 숨을 쉬었다. 몇 권은 페이지가 서로 들러붙어 숨구멍이 막혀 있었다.
연이—이대로 두면 얘네 다 굳어 버리겠다. 근데 불은 아까 그 꼴 났잖아.
모카—불을 세게 쓰니까 그렇지. 돼지, 빵 구울 때 화력 최대로 하냐?
연이—아니. 그러면 겉만 타고 속은 안 익어.
모카—그거야. 책 말리는 것도 똑같아. 약하게, 오래. 손바닥 온기 정도로.
연이는 앞발을 책 위에 가만히 올렸다. 불꽃 대신 따뜻한 기운만 천천히 흘려보냈다. 햇볕에 내놓은 이불 같은 온기였다.
들러붙어 있던 페이지가 하나씩 떨어졌다. 젖은 책이 작게 기침을 하더니,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연이—됐다! 숨 쉰다. 모카, 너 진짜 천재 아니야?
모카—이제 알았냐. 요리는 불 다루는 학문이야. 랩은 숨 다루는 학문이고.
윤달—식상이 인성을 돕네요. 불로 젖은 기억을 말리다니, 이 도서관 생기고 처음 보는 장면일걸요.
연이는 손에 쥔 것을 내려다보았다. 호랑이가 구겨 가져간 페이지의 귀퉁이 하나가 그녀의 발톱에 걸려 남아 있었다.
손톱만 한 종이였다. 거꾸로 뒤집힌 우산의 끝자락. 그리고 아주 작은 글씨 한 줄. 같이 쓰자, 우산.
연이—(같이 쓰자. 누가 누구한테 한 말이지.)
물이 빠진 벽 아래에서 계단 하나가 드러났다. 계단 입구에 젖은 금빛 글씨가 걸려 있었다.
[ 지하 3층 · 일어나지 않은 일 · 열람 주의 ]
윤달—일어나지 않은 일의 서가요. 저도 여긴 안 내려가 봤어요. 거긴 아직 아무도 살아 보지 않은 기억들이래요.
영냥이—호랑이도 아래로 갔어. 계단에 젖은 발자국이 남았네.
연이는 종이 귀퉁이를 접어 앞발 안쪽에 넣었다. 계단 아래에서 빗소리 같은 것이 아주 작게 들려왔다.
연이—내려가자. 내 봄이 저 밑에 있어.
모카—가자. 대신 이번엔 물 나오면 고양이 말고 돼지부터 건진다. 순서 바꾼다.
손목의 아기 용이 볼록한 배를 끌어안고 작게 울었다. 계단 아래 어딘가에서 누군가 우산을 접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