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것에도 끝은 있었다. 다만 바닥 대신 책이 있었다.
연이는 산더미 같은 책 위에 폭신하게 파묻혀 있었다. 종이 냄새와 오래된 잉크 냄새. 그리고 아주 멀리서, 책장이 숨을 쉬듯 천천히 삐걱이는 소리.
고개를 들자 천장이 없었다. 책장이 하늘까지 자라 있었고, 등불이 별처럼 떠서 서가 사이를 물고기처럼 헤엄쳐 다녔다.
연이—…여기, 어디야. 방금까지 재판정이었는데. 청토끼가 회중시계를 들었고, 세상이 뒤집혔고, 그다음엔—
연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재성의 재판정에서 진 순간, 발밑이 종이처럼 찢어지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값의 세계에서 미끄러져 나와, 전혀 다른 결의 세계로 빨려 들어온 것이다.
네오—…재성에서 지면 인성으로 떨어져. 세상의 이치야. 값에 진 것들은, 뜻의 세계로 돌아오게 돼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더 나쁜 곳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연이—더 나쁜 곳…? 재성보다 나쁜 데도 있어?
네오—…있어. 하지만 지금은 말 안 할래. 여긴 그런 곳이 아니니까. 일단, 이 도서관이 우릴 받아 줬다는 것부터 다행으로 여기자.
책장은 나무처럼 살아 있었다. 어떤 서가는 천천히 숨을 쉬듯 부풀었다 줄었고, 어떤 책은 저 혼자 펼쳐져 페이지를 넘겼다. 재성의 섬이 반짝임으로 사람을 홀렸다면, 이곳은 고요함으로 사람을 붙들었다.
공기에서 나던 냄새가 이상했다. 오래된 종이 냄새 밑에, 아주 희미하게 사람 냄새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의 눈물, 누군가의 다짐, 누군가의 마지막 인사. 이 도서관의 책들은, 잉크가 아니라 마음으로 쓰인 것 같았다.
연이—…이상하다. 무서운 데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여. 위에선 계속 값이 매겨지는 기분이었는데, 여긴… 그냥 있어도 되는 기분이야.
네오—…재성이 '얼마짜리냐'를 묻는 곳이라면, 인성은 '무슨 뜻이냐'를 묻는 곳이거든. 값이 아니라 뜻으로 사람을 보는 곳. 그래서 마음이 놓이는 거야.
등불 물고기 한 마리가 연이의 코앞까지 헤엄쳐 왔다. 손을 뻗자, 물고기는 겁내지 않고 그 짧은 앞발 위에 잠깐 앉았다. 따뜻한 빛이 앞발을 감쌌다. 재성의 섬에서라면, 이 빛에도 값이 매겨졌을 것이다.
연이—…얘 뭐야, 귀여워. 물고기가 하늘을 나네. 아니, 헤엄치나?
네오—등불 물고기. 이 도서관의 글자를 먹고 사는 존재야. 책이 슬퍼하면 어두워지고, 책이 기뻐하면 밝아지지. 저 물고기가 너한테 왔다는 건, 이 도서관이 너를 손님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연이—여기 뭐야, 도서관? 이렇게 큰 도서관이 세상에 있어?
네오—세상 아래에 있지. 너는 무사해?
연이—응. 책이 받아 줬어. 깔린 게 아니라 받아진 느낌이야, 신기하게.
연이—…근데 나 방금 백 권쯤 깔고 앉은 것 같은데. 이거 변상하라고는 안 하겠지?
네오—방금 전까지 빚이 얼마나 무서운지 배운 애가 할 걱정은 아닌 것 같은데.
연이—어우, 트라우마 생겼나 봐. 이젠 뭘 봐도 '이거 이자 붙나?'부터 생각나. 청토끼가 내 머릿속에 세 들어 살아.
네오—…월세는 받고 있나.
연이—방금 그거 개그였어? 네오가? 야, 너 이 도서관 오더니 좀 풀렸다. 위에선 딱딱하기만 하더니.
네오—…여긴 값을 안 재는 곳이니까. 나도 조금은, 긴장을 풀 수 있는 거겠지.
연이는 그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늘 등을 지키느라 긴장해 있던 네오가, 여기서 처음으로 어깨를 내렸다. 이 무뚝뚝한 사자도, 사실은 오래 쉬지 못한 여행자였던 것이다.
연이—…그래, 여기선 좀 쉬어. 네 등은, 여기 있는 동안엔 내가 지킬게. 잘은 못하겠지만, 소리는 크게 지를 수 있어.
네오—…든든하군. 세상에서 제일 시끄러운 방패라.
그때 책 산 너머에서 등불 하나가 딸깍딸깍 지팡이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등불 아래 선 것은 새하얀 여우였다. 남보랏빛 학자 로브에 코끝의 안경, 품에는 가죽 표지 고서를 안고 있었다.
백문—떨어진 소리가 크길래 또 글자인가 했더니, 이번엔 손님이로군. 숨 좀 볼까. 목의 기운과, 금의 기운이라.
백문—게다가 목 쪽은 그릇이 크고, 금 쪽은… 흠, 오래됐군. 아주 오래 벼려진 숨이야.
연이—저, 안녕하세요? 여기가 어디예요? 저희 위에서 재판을 하다가 그만.
백문—부정 계약에 졌겠지. 다들 그렇게 온다네. 여긴 인성의 도서관. 본뜻을 잃은 문서들이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곳일세.
백문이 지팡이로 허공을 툭 짚자, 등불 물고기 떼가 모여들어 그의 주위를 밝혔다. 노(老)사서의 그림자가 서가에 길게 드리웠다. 오래된 것들만이 가지는, 깊고 조용한 위엄이었다.
백문—세상은 두 가지 힘으로 굴러가지. 하나는 '값'이고, 하나는 '뜻'일세. 위의 재성은 값을 다스리고, 여기 인성은 뜻을 다스려. 둘이 균형을 이루면 세상이 건강한데, 요즘은 값이 뜻을 너무 이겨. 그래서 이 도서관이 이렇게 바빠진 거고.
연이—…값이 뜻을 이긴다. 저 위에서 봤어요. 언니 얼굴이 '담보'라는 값으로 바뀌던 거. 편지가 '증서'로 바뀌던 거. 전부 뜻이 값한테 진 거였네요.
백문—바로 그걸세. 그런데 아이야, 값은 뜻을 '덮을'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어. 아무리 덧칠해도, 맨 밑바닥엔 처음 쓴 뜻이 남아 있지. 그 밑바닥을 읽어내는 힘, 그게 바로 인성의 힘이고, 자네가 여기서 배울 것일세.
네오—…밑바닥의 본뜻을 읽는 힘. 그게 청토끼의 '고쳐 쓰기'를 이기는 열쇠군요. 덧쓴 조항 밑에 깔린 원래 계약을 끌어내면, 그 시계도 무력화된다.
백문—영민한 파수꾼이군. 그렇다네. 값은 위에서 덮고, 뜻은 밑에서 버틴다. 우리는 그 밑을 파는 법을 배우면 돼. 서두르지 말게. 뿌리는 원래,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천천히 자라는 법이니.
여우는 자신을 백문이라고 소개했다. 이 도서관의 사서라고. 흰 백에 글월 문, 이름부터가 곧 직업이었다.
연이—인성의 도서관이요? 근데 왜 하필 돈의 섬 밑에 책 도서관이 있어요? 둘이 무슨 상관이에요?
백문이 안경 너머로 연이를 물끄러미 봤다. 좋은 질문을 받은 선생의 눈이었다.
백문—재성과 인성은 본래 뗄 수 없는 사이일세. 돈은 문서를 극하거든. 재물이 넘치면 글이 마르고, 글이 바로 서야 재물이 길을 잃지 않지.
백문—그래서 이 도서관이 재성의 섬 바로 밑에 뿌리를 대고 있는 걸세. 한 나무의 줄기와 뿌리처럼 말이야. 위에서 돈이 문서를 이길 때마다, 진 문서들이 이리로 떨어진다네.
네오—재극인이라고 해. 사주의 이치지. 재물이 지나치면 문서와 공부의 기운을 해쳐.
연이—재물이 공부를 해친다… 아, 알 것 같아요. 저 시험 기간에 알바 늘리면, 딱 성적 떨어지거든요. 돈 벌려다 공부 놓치는 거. 그게 재극인이에요?
백문—허허, 정확하네. 자네 세계 말로 옮기니 더 와닿는군. 돈이 나쁜 게 아닐세. 다만 돈이 '주인' 자리에 앉으면, 뜻이 '종'이 되지. 그럼 사람은 값으로만 살고, 값이 없는 건 다 버리게 돼.
백문—위의 토끼가 딱 그 꼴이지. 값을 매기다 못해, 사람 얼굴까지 값으로 바꿔 버렸으니. 그래서 이 도서관이 존재하는 걸세. 값이 버린 뜻을, 누군가는 거둬야 하니까.
연이—…그래서 백문 님이 그걸 하시는 거예요? 버려진 뜻을 줍고, 닦고, 다시 꽂는 거.
백문—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나는 그저, 오래 살아서 그 일을 맡게 됐을 뿐이고. …그런데 자네, 질문이 자꾸 사람 마음 안쪽을 찌르는군. 좋은 독자의 재능일세. 사주의 글자만 읽는 게 아니라, 사람의 뜻을 읽는 재능.
연이—그럼 아까 폭포처럼 쏟아지던 그 종이들, 전부 위에서 진 문서들이었어요? 지워진 편지랑 일기 같은 거.
백문—그렇다네. 나는 그걸 줍고 닦고 다시 꽂는 사람이고. 따라오게. 밟아도 되는 책과 밟으면 서러워하는 책이 따로 있으니, 발밑은 조심하고.
연이—채, 책이 서러워한다고요? 그걸 어떻게 미리 구분해요?
백문—밟으면 아는 법일세. 대개는 밟고 난 뒤에 알지.
연이—(…그럼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야겠다.)
서가 사이를 걷는 동안, 책들이 저마다 반응했다. 어떤 책은 연이가 지나가면 페이지를 팔랑팔랑 흔들어 인사했고, 어떤 책은 부끄러운 듯 표지를 꼭 닫았다. 살아 있는 도서관이었다.
한 서가 앞에서, 아주 작은 책 한 권이 발밑으로 굴러왔다. 표지엔 「일기장」이라 적혀 있었다. 연이가 조심히 집어 들자, 책이 저 혼자 펼쳐지며 한 줄을 보여 줬다.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 그게 제일 감사한 하루였다.」
연이—…누군가의 평범한 하루가, 여기 이렇게 소중하게 꽂혀 있네요. 재성의 섬이었으면 값이 안 나간다고 버렸을 텐데.
백문—바로 그걸세. 값이 안 나가는 하루가, 실은 제일 값진 하루지. '아무 일 없음'을 지키려고, 사람들은 평생을 애쓰는 거니까. 이 도서관은 그런 하루들을 거두는 곳이야.
연이는 일기장을 조심히 제자리에 꽂아 주었다. 책이 만족한 듯 표지를 톡 닫았다. 연이는 문득, 자기 방의 평범한 아침들이 그리워졌다. 삑삑거리는 카드도, 매운 삼각김밥도, 지금은 다 소중한 '아무 일 없던' 하루였다.
백문—…자네, 방금 그 일기를 읽는 눈빛을 보니, 시험 하나 해 보고 싶어지는군. 마침 여기 딱 좋은 게 있어.
백문이 로브 안주머니에서 반으로 찢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래돼 누렇게 바랜 계약서였다. 위쪽 절반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불에 그슬린 듯 새까맸다.
백문—이건 아주 오래전, 위에서 떨어진 계약서의 반쪽일세. 아랫부분이 타 버려서, 무슨 약속이었는지 나조차 못 읽어. 백 년을 들여다봤는데도 말이야. 자네가 한번, 읽어 보겠나?
연이—네? 백문 님도 못 읽는 걸 제가 어떻게…? 저 아직 아무것도 안 배웠는데요.
백문—배운 것으로 읽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읽는 걸세. 글자를 보지 말고, 이 종이가 무슨 마음으로 쓰였는지를 봐. 눈을 감아도 좋아. 손끝으로, 이 계약이 원래 어떤 약속이었는지 느껴 보게.
연이는 반신반의하며 찢긴 계약서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그슬린 종이. 그런데 잠깐, 손끝으로 아주 희미한 온기가 스몄다. 누군가의 다급함,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아주 깊은 사랑.
연이—…이거, 빚 문서가 아니에요. 겉은 돈 얘기인데… 속은, 누군가를 지키려는 약속이에요. '내가 대신 갚을 테니, 저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쓴 계약 같아요.
백문—…!
백문의 지팡이가 딸깍, 멈췄다. 안경 너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백 년을 못 읽은 반쪽을, 이 어린 손님이 손끝 한 번으로 꿰뚫은 것이다.
연이—…맞아요? 저 그냥 느껴지는 대로 말한 건데.
백문—…맞네. 완벽하게 맞았어. 이건, 어느 부모가 자식의 운명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지키려 한 계약일세. …실은, 나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지. 다만 인정하기 싫어서, 백 년을 모른 척했던 걸세.
네오—…인정하기 싫었다? 백문 님, 이 계약서… 혹시 아는 사람의 것입니까.
백문—…오래된 이야기일세. 지금은 접어 두지. 다만 이것만은 말해 두겠네 — 이 아이는, 내가 백 년을 갈고닦아도 못 가진 눈을 타고났어. 값이 아니라 마음을 읽는 눈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벼려 주기만 하면 되겠군.
연이는 백문의 목소리 끝이 아주 살짝 젖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노(老)사서에게도, 백 년째 접어 둔 아픈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캐물을 일은 아니었다. 연이는 찢긴 계약서를 두 손으로 백문에게 조심히 돌려 드렸다.
연이—…이거, 언젠가 제가 나머지 반쪽도 읽어 드릴게요. 지금은 반밖에 못 읽었지만, 제가 여덟 글자를 다 채우고 나면, 분명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백문—…허허. 그 말, 늙은이 가슴에 오래 남겠군. 좋네. 그럼 그 약속, 받아 두지. 자네가 완전해지는 날, 이 반쪽의 나머지를 같이 읽어 보세.
네오—(…이 도서관, 연이한테는 학교이자 시험장이군. 그리고 백문 저 여우 — 오래 접어 둔 상처가 있어. 연이가 그걸 건드렸어. 어쩌면 이 아이는, 남의 사주만 읽는 게 아니라, 남의 상처까지 읽어 내는지도 몰라.)
백문은 찢긴 계약서를 다시 로브 깊숙이 넣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팡이를 딱, 짚었다. 하지만 그 걸음은 아까보다 조금 더 느렸고, 조금 더 무거웠다. 연이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네오—…돌아가고 싶어졌지?
연이—응. 근데 지금은 여기 할 일부터.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지켜야 할 것도 있다는 뜻이니까.
백문을 따라 서가 사이를 걸었다. 연이는 정말로 발끝을 세우고 걸었다. 걸을수록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서가 한 구역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꽂힌 책 등마다 금빛 도장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청토끼 금융그룹 소유.」
백문—오염 구역일세. 위의 토끼가 부정 계약을 찍어낼 때마다 그 사본이 여기 서가를 갉아먹거든. 문서의 본뜻이 돈에 덧씌워지면, 책은 저렇게 검게 앓는다네.
검게 물든 서가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책장이 신음하듯 삐걱였다. 연이가 가까이 가자, 한 책이 저 혼자 펼쳐졌다. 원래는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였는데, 그 위에 「채권 양도 증서」가 검게 덧씌워져 있었다.
연이—…편지가 증서로 변했어. 누군가 엄마한테 쓴 편지가, 빚 문서가 돼 버렸어. 이거 너무해요. 마음까지 담보로 잡히는 거잖아요.
백문—…이게 재성이 인성을 극할 때 벌어지는 일일세. 돈이 뜻을 이기면, 세상의 모든 편지가 청구서가 되지. 나는 매일 이 검은 서가를 닦지만, 위에서 토끼가 도장을 찍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백문의 지팡이를 쥔 손이 떨렸다. 오래 혼자 싸워 온 사람의 지침이었다. 수백 년, 어쩌면 그보다 오래, 이 노(老)사서는 홀로 이 검은 물결을 막아 온 것이었다.
네오—…혼자 오래 버티셨군요. 이 넓은 도서관을, 사서 한 명이.
백문—버틴다기보단, 그냥 안 놓은 것뿐일세. 놓으면 이 모든 뜻이 영영 검게 물드니까. …그런데 오늘, 아주 오랜만에 손님이 둘이나 왔군. 그것도 목의 기운을 가진 아이가. 어쩌면, 이 늙은이의 야근도 끝이 보일지 모르겠어.
연이—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다 갉아먹네, 그 토끼.
백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래된 사연이 있는 침묵이었다.
연이는 그 침묵을 알아챘다. 검은 서가를 바라보는 백문의 눈에, 단순한 사서의 안타까움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저 오염 속에 백문 자신의 무언가가 섞여 있는 것처럼.
연이—…백문 님. 혹시 저 검은 서가랑, 개인적으로 무슨 사연이 있으세요? 안 물어봐도 되는데, 표정이 너무 아파 보여서요.
백문—…허허. 자네는 정말, 사람의 밑바닥을 읽는 아이로군. 그래. 사연이 있지. 아주 오래된. 하지만 그건, 자네가 첫 수업을 통과한 뒤에 들려주겠네. 지금 들으면, 자네가 나를 동정할 테니까. 동정으로 배우는 건, 오래 못 가거든.
네오—…무리하게 캐묻지 마, 연이. 모든 책엔 펼쳐질 페이지가 따로 있어. 백문 님의 이야기도 그럴 거다.
연이—…네. 그럼 나중에, 백문 님이 펼치고 싶으실 때 들을게요. 대신 하나만. 그 사연, 혼자 너무 오래 안고 계셨던 거 같아요. 그것만은 알아 둘게요.
백문의 안경 너머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수백 년 혼자 삼켜 온 무언가를, 처음 만난 손님이 툭 건드린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만 지팡이로 연이의 머리를 아주 가볍게 톡 짚었다. 고맙다는, 오래된 방식의 인사였다.
백문은 두 사람을 열람대로 데려가더니, 색인함에서 카드 한 장을 뽑아 말없이 연이 앞에 내려놓았다.
색인 카드에는 연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연이—어? 왜 여기 제 이름이 있어요?
백문—이 도서관에는 세상 모든 사주의 원문이 꽂혀 있다네. 자네 것도 물론 있지. 그런데, 이걸 좀 보게.
백문이 색인을 따라 한 서가로 안내했다. 그곳엔 연이의 이름이 적힌 얇은 책이 꽂혀 있었다. 「연이 — 을해(乙亥)년생」. 연이가 조심히 그 책을 펼치자, 자기가 태어난 순간부터의 모든 것이 별자리처럼 적혀 있었다.
연이—…이게 제 사주예요? 여덟 글자로 제 인생 전부가? 근데 여기 네 번째 칸이 비어 있어요. 까맣게 지워진 것처럼.
백문—그게 바로 자네의 잃어버린 네 번째 기둥, 시주(時柱)일세. 태어난 시(時)를 나타내는 글자지. 누군가 그걸 빼돌려서, 자네 사주가 미완성이 된 거야. 그래서 자네가 이 세계로 끌려온 거고.
연이—제 사주가 미완성이라서… 그래서 이상한 앱이 깔리고, 운이 계속 꼬였던 거군요. 여덟 글자 중 두 글자가 빠졌으니, 인생이 반 박자씩 어긋난 거예요.
백문—영민하군. 사주는 여덟 글자가 서로를 받치는 구조야. 하나가 빠지면 나머지도 흔들리지. 자네는 지금까지 비겁·식상·재성의 글자를 되찾았어. 마지막 하나, 이 시주만 되찾으면, 자네 사주는 완성되고 자네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네.
연이—시주… 태어난 '시'라고 하셨죠. 근데 저, 제가 몇 시에 태어났는지 몰라요. 엄마도 '한밤중이었나?' 하고 얼버무리셨거든요. 그게, 이렇게 중요한 거였어요?
백문—…바로 그걸세. 자네가 태어난 시(時)를 아무도 정확히 기억 못 하는 것 — 그게 우연이 아닐지도 몰라. 누군가 일부러 그 기억을 흐려 놨을 수도 있지. 시주를 빼돌리려면, 먼저 사람들 기억에서 그 '시'를 지워야 하니까.
네오—…그 여자가 손을 썼겠지. 태어난 시를 지우면, 시주를 담보로 잡아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니까. 완벽한 도둑질이야. 훔친 줄도 모르게 훔치는.
연이—…소름 끼쳐. 제가 몇 시에 태어났는지도 모르게 만들어 놓고, 그 빈틈으로 제 인생 한 조각을 통째로 빼 간 거잖아요. 저는 있는지도 몰랐던 걸 잃어버린 거예요.
백문—그러니 되찾으면 되네. 잃어버린 시를 되찾는 건, 곧 잃어버린 자네 자신의 한 조각을 되찾는 거야. 그 조각이 돌아오면, 자네는 지금보다 훨씬 또렷한 사람이 될 걸세. 반 박자 어긋났던 인생이, 비로소 박자를 맞추지.
연이—…그럼 저, 집에 돌아가는 것보다 더 큰 걸 되찾는 거네요. 진짜 '온전한 나'를요. …좋아요. 무섭지만, 오히려 되찾고 싶어졌어요.
네오—…그 눈빛이면 됐어. 겁먹는 대신 되찾고 싶어지는 거. 그게 이 아이가 여기까지 온 이유야.
연이—…근데 그 마지막 글자를, 하필 청토끼가 담보로 잡고 있다는 거죠. 되찾으려면 그 시계를 이겨야 하고요.
백문—그렇다네. 그러니 조급해 말고, 여기서 힘을 기르게. 완성을 서두르다 미완성으로 부서지는 것보단, 천천히 제대로 벼리는 게 나아. 이 도서관은, 그런 '기다림'을 배우기에 딱 좋은 곳이지.
카드의 대출 기록란 마지막 줄에 금빛 잉크로 적혀 있었다. 「제4주(柱) — 대출 중. 담보 시장 유통분.」
네오—연이의 마지막 기둥이 대출 중이라고?
백문—누군가 오래전에 빼돌려서 위의 담보 시장에 흘렸군. 지금 채권자 이름은, 굳이 확인 안 해도 알겠지.
연이—청토끼가 제 마지막 사주 기둥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백문—정확히는, 담보 시장에 유통시켰지. 되찾으려면 원본 계약서를 찾아 무효를 증명해야 하네. 그 원본이, 청토끼 금고 제일 깊은 곳에 있고.
연이—원본 계약서를 찾아서, 무효를 증명한다… 근데 어떻게요? 저 시계가 이미 제 시주를 '담보로 잡았다'고 도장을 찍었을 텐데. 그 도장을 어떻게 이겨요?
백문—바로 거기서 '본뜻 읽기'가 쓰이는 걸세. 저 시계가 찍은 담보 도장은, 남의 것을 억지로 '내 것'이라 덧쓴 거짓 도장이야. 원본에 적힌 진짜 뜻 — '이 시주는 연이의 것'을 자네가 읽어 내면, 거짓 도장은 힘을 잃지.
연이—…아, 아까 그 검은 서가의 앓던 책처럼요. 도장 밑에 눌린 원래 문장을 제가 더 크게 믿으면, 도장이 밀려났잖아요. 제 시주도 똑같은 거네요.
백문—영리해. 다만 자네 시주는 남의 책보다 훨씬 무거워. 자네 인생 전부가 걸린 도장이니까. 그걸 밀어내려면, 지금의 자네론 어림없어. 여기서 벼려야 해. 남의 뜻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뜻을 끝까지 믿는 힘을.
네오—…또 청토끼 금고로 돌아가야 하는군. 하지만 이번엔 그냥 쳐들어가면 안 돼. 위에선 저 회중시계 앞에서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
백문—그래서 자네들이 여기로 떨어진 걸세. 우연이 아니야. 저 시계의 힘, '고쳐 쓰기'를 이기려면, 먼저 '본뜻 읽기'를 배워야 하거든. 덧쓰인 글자 밑에 깔린 원래 뜻을 끌어내는 법. 그게 이 도서관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일세.
연이—본뜻 읽기… 그럼 저, 여기서 공부하면 돼요? 그 시계 이길 방법을?
백문—공부라기보단, 읽는 힘을 기르는 거지. 자네는 이미 재능이 있어. 아까 편지의 뜻도, 사람의 마음도 읽었으니까. 다만 그 힘을 사주의 글자로 벼려야 해. 며칠 걸릴 걸세. 각오는 됐나?
연이—…됐어요. 언니 얼굴도, 제 마지막 기둥도, 저 검은 서가들도. 전부 되찾으려면, 저 시계를 이겨야 하는 거잖아요. 배울게요. 뭐든.
네오—…좋은 눈빛이야. 백문 님, 이 아이 부탁드립니다. 저는 옆에서 등을 지키죠.
백문—…파수꾼. 자네 숨은 참 이상하군. 이 시대의 것이 아니야.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책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아. 게다가 그 갈기 밑에 숨긴 금빛은… 흠, 캐묻지는 않겠네. 도서관은 남의 미완성 원고를 함부로 읽지 않는 법이니.
네오—…배려 감사합니다. 제 이야기는, 때가 되면 제 입으로 하죠.
백문—그러게. 모든 책엔 펼쳐질 때가 있는 법이지. 다만 하나만 일러 두겠네. 자네가 그 금빛을 아끼는 이유, 나도 어렴풋이 아네. 시간을 거스른 자에겐 대가가 따르지. 하지만 파수꾼, 대가가 두려워 끝까지 아끼기만 하면… 정작 지켜야 할 순간에 못 쓰는 수가 있어.
네오—…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을 쓰는 순간, '그 여자'가 저를 찾아냅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위험해져요. 그러니 정말 마지막까지, 아껴야 합니다.
백문—…그 여자라. 위의 토끼가 쥔 회중시계의 주인 말이군. 자네와 그 여자는, 같은 시간에서 온 사이인가 보군. 더는 안 묻겠네. 다만, 그 마지막이 오면 망설이지 말게. 아끼다 놓치는 것만큼, 오래 후회하는 것도 없으니.
연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다 알아듣진 못했다. 하지만 네오가 숨긴 비밀이 이 도서관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만은 느꼈다. 시간, 대가, 그 여자. 언젠가 이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연이—(…네오. 여기서도 네 얘기가 나오네.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거, 대가가 있다는 거. 나 하나도 안 캐물을게. 근데 딱 하나는 알겠어. 너, 나 때문에 뭔가 엄청난 걸 치르고 있구나.)
백문—허허. 오랜만에 제자를 받는군. 좋아, 내일부터 시작하지. 첫 수업은… '본뜻의 서가'에서. 세상 모든 글의 진짜 뜻이 잠들어 있는 곳일세.
그러나 첫 수업은 내일이라도, 도서관은 오늘 밤부터 연이를 붙들었다. 백문이 등을 돌려 서가 사이로 사라지자, 연이는 참지 못하고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책이 숨 쉬는 곳이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이—네오, 이것 봐! 책장이 저 위까지 끝도 없이 올라가. 사다리도 혼자 움직여. 저기 저 책은 날개가 달렸어!
네오—…떨어지지만 마. 여긴 바닥이 안 보이는 서가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무 책이나 펼치지 마. 이 도서관 책은, 읽는 사람 마음을 같이 읽거든.
통로 천장에는 등불 물고기 떼가 은하수처럼 흘렀다. 연이가 손을 뻗자, 물고기 한 마리가 손끝에 잠깐 머물다 톡, 종이 비늘 하나를 떨어뜨렸다. 비늘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오늘 읽힌 마음: 그리움」이라고 적혀 있었다.
연이—…얘네, 사람 마음을 글자로 낚는 물고기구나. 방금 내 마음을 '그리움'이라고 낚아 올렸어.
네오—…그래서 내가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랬지. 여기선 숨기고 싶은 마음도 다 활자가 돼서 떠다녀. 나도 여기선 좀… 벌거벗은 기분이거든.
연이—어? 그럼 저 물고기 잡으면 네오 속마음도 낚을 수 있는 거 아냐? 잠깐만, 한 마리만—
네오—야. 야. 하지 마. …방금 그 물고기 눈빛 봤지? 나 노려봤어. 얘네 은근 성깔 있어.
고양이라면 물고기 앞에서 초연할 리 없었다. 네오의 은빛 갈기가 저도 모르게 물고기 떼를 따라 살짝 흔들렸고, 앞발이 허공을 한 번 툭 쳤다가, 파수꾼의 위엄을 떠올린 듯 뚝 멈췄다.
연이—…방금 잡으려고 했지. 너 방금 완전 고양이였어. 앞발 나갔잖아.
네오—…파수꾼의 반사신경이 잠깐 오작동한 것뿐이야. 그리고 너, 웃을 때가 아니야. 저기 좀 봐.
네오가 턱짓한 방향으로, 도서관의 밝은 등불이 닿지 않는 구역이 있었다. 서가 하나가 통째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책등마다 붉은 낙인이 찍혀 있었고, 그 위엔 하나같이 「연체」 「압류」 「말소」라는 도장이 겹겹이 눌려 있었다.
연이—…이 서가만 왜 이렇게 어두워요? 책들이… 앓고 있는 것 같아. 숨소리가 거칠어.
백문—…거기까지 갔군. 그 서가는 '오염 서가'라네. 위의 재성의 섬에서 값을 못 치른 사람들의 원문이, 청토끼의 손을 거쳐 저렇게 낙인이 찍힌 채 이리로 떠내려오지. 원래 뜻 위에, 빚 도장이 덧찍힌 걸세.
연이—덧찍혔다… 그럼 저 사람들 진짜 사주는, 저 도장 밑에 그대로 있는 거예요? 지워진 게 아니라 눌려 있을 뿐이에요?
백문—바로 그걸세. 그게 '본뜻 읽기'의 첫 이치야. 세상에 완전히 지워지는 글자는 없어. 덧쓰이고, 눌리고, 가려질 뿐이지. 그 밑에 깔린 원래 뜻을 다시 길어 올리는 것 — 그걸 우리 도서관은 '재극인(再剋印)'이라 부른다네.
네오—재극인… 덧찍힌 도장을 도장으로 되받아친다는 뜻이군요. 청토끼의 '고쳐 쓰기'가 남의 글자에 도장을 덧찍는 힘이라면, 그걸 무효로 만드는 반대 도장.
백문—영리한 파수꾼일세. 그래. 저 회중시계는 남의 운명을 '고쳐 쓴다.' 하지만 고쳐 쓴 것은, 반드시 원본이 어딘가에 남아 있지. 원본을 읽어 내면, 덧쓴 글자는 힘을 잃어. 자네들이 배울 건 바로 그 힘일세.
연이는 검게 앓는 서가 앞으로 조심히 다가갔다. 책 한 권이 유난히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붉은 도장 세 개가 겹쳐 찍힌 얇은 책이었다.
연이—…백문 님. 이 책, 만져 봐도 돼요? 왠지, 이 애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아요.
백문—…허. 벌써 부름을 듣는군. 좋아. 다만 마음 단단히 먹게. 오염된 원문은 만지는 이의 마음을 시험하니까. 겁먹으면, 도장의 뜻이 자네에게로 옮겨붙어.
연이가 손을 얹자, 책이 저절로 펼쳐졌다. 붉은 「말소」 도장 아래로, 아주 흐릿하게 원래 문장이 비쳤다. 「이 아이는 봄에 태어나, 꽃을 피우는 재주를 타고났다.」 그 위에 청토끼의 도장이 짓눌러 놓은 글자는 — 「무능·연체·회수 대상」이었다.
연이—…너무해. 이 사람은 원래 꽃을 피우는 재주를 갖고 태어났는데. 청토끼가 그 위에 '무능'이라고 덧찍었어. 빚 때문에, 재주가 통째로 '쓸모없음'으로 고쳐 써진 거야.
백문—그게 저 시계의 진짜 무서움일세. 사람을 죽이지 않아. 다만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를 지우고 '너는 빚진 무능한 자다'로 고쳐 쓰지. 그러면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믿어 버려. 그게 가장 깊은 압류라네.
연이—…그럼 제가 읽을게요. 이 사람 원래 문장을. 봄에 태어나서, 꽃을 피우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고. 그게 진짜라고. 도장 밑에 눌려 있어도, 안 지워졌다고.
연이가 흐릿한 원문을 소리 내어 읽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붉은 「말소」 도장이 살짝 옅어지고, 눌려 있던 원래 글자가 아주 조금 또렷해졌다. 책의 거친 숨이, 한결 편안해졌다.
백문—…허어. 배우지도 않고 재극인의 첫 문턱을 넘었어. 도장을 지운 게 아니야. 원문을 '더 크게 믿어' 도장을 밀어낸 걸세. …자네, 정말 물건이군.
네오—…연이답네. 넌 남의 눌린 마음을 못 지나치니까. 재성에서 언니 편지를 읽었을 때랑 똑같은 눈빛이었어.
연이—…근데 완전히는 안 지워졌어요. 도장이 아직 흐릿하게 남아 있어요. 저 혼자 읽는 걸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봐요.
백문—당연하지. 재극인은 '믿음의 크기'로 하는 거야. 자네 혼자의 믿음으론 여기까지. 원문을 완전히 되살리려면, 그 사람의 이름과 태어난 때 — 온전한 여덟 글자가 필요하네. 그래서 자네의 잃어버린 시주가 중요한 거야. 자네부터 완전해져야, 남도 완전히 읽어 낼 수 있어.
연이—…제 여덟 글자부터 채워야, 저 시계도 이기고, 이 오염된 책들도 살릴 수 있는 거네요. 다 이어져 있었어.
백문—이제 알겠지? 자네가 왜 여기 떨어졌는지.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그 책은 자네가 밀어낸 만큼 편해졌으니, 오늘 밤은 편히 잘 걸세. 자네도, 이제 좀 쉬게.
연이는 검은 서가를 떠나기 전, 앓던 책을 제자리에 가만히 꽂아 주었다. 붉은 도장은 여전히 흐릿하게 남아 있었지만, 이번엔 「말소」가 아니라 「봄에 태어난 아이」 쪽이 조금 더 진했다. 반드시 완전히 되살려 주겠다고, 연이는 속으로 약속했다.
네오—(…이 아이, 무섭게 자라는군. 재성에선 남의 값을 읽었고, 여기선 남의 눌린 뜻을 읽어. 이 속도라면… 어쩌면 정말, 그 시계를 이길지도 몰라. 대가 없이.)
백문은 두 사람에게 서가 한켠의 작은 독서실을 내주었다. 낡은 소파와, 마르지 않는 찻주전자와, 밤에도 은은히 빛나는 등불 물고기 몇 마리. 오랜만에, 쫓기지 않는 밤이었다.
연이—…이상하다. 위에선 매일 도망치고 싸우기만 했는데. 여기 앉아 있으니까, 그동안 못 쉰 게 한꺼번에 몰려와. 나 되게 지쳐 있었구나.
네오—…당연하지. 넌 섬을 세 개나 돌았어. 사람이었다가 꽃돼지가 됐고, 글자를 세 개나 되찾았고. 오늘 밤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쉬어.
연이가 소파에 몸을 뉘자, 네오도 맞은편 낡은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파수꾼의 위엄이 무색하게도, 등불 물고기 한 마리가 네오의 코앞을 살랑살랑 헤엄쳐 지나갔다.
네오의 은빛 갈기 끝이 파르르 떨렸다. 두 귀가 쫑긋 섰다. 앞발이 아주 천천히, 아주 은밀하게 들어 올려졌다. 파수꾼의 눈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사냥꾼 고양이의 눈이었다.
연이—…네오.
네오—(움찔)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연이—방금 또 앞발 나갔지! 파수꾼의 위엄은 어디 갔어. 물고기 한 마리한테 완전 무장해제됐잖아.
네오—…이건 사냥 본능이 아니라, 도서관 위협 요소를 사전에 제압하려는 경계 태세였어. 저 물고기가 네 얼굴로 돌진할 수도 있었다고.
연이—아~ 그러셨구나. 그럼 저 물고기가 위협 요소니까, 지금 꼬리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도 다 '경계 태세'겠네?
네오의 은빛 꼬리가 그제야 자기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듯, 뚝 멈췄다. 파수꾼은 헛기침을 하며 꼬리를 앞발로 꾹 눌러 앉았다.
네오—…이 도서관은 사람 마음을 활자로 만든다더니, 고양이 본능까지 들춰내는군. 아주 위험한 곳이야.
연이—위험하긴. 나 너 이런 모습 처음 봐. 위에선 늘 등 세우고 앞만 보던 애가, 여기선 물고기 보고 앞발 나가고. …좋다. 네오도 좀 사람 같아, 아니 고양이 같아.
네오—…놀리는 거지.
연이—아니. 진심이야. 너 항상 나 지키느라 긴장만 했잖아. 오늘 밤 너 그렇게 물고기한테 홀린 거, 나 되게 좋았어. 너도 좀 쉬는 것 같아서.
네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눌러 앉혔던 꼬리를 슬며시 풀어, 이번엔 흔들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등불 물고기가 다시 코앞을 지나가도, 이번엔 앞발을 들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만, 천천히 그 빛을 따라갔다.
네오—…딱 오늘 밤만이야. 내일부턴 다시 파수꾼이다.
연이—응응, 파수꾼님. 근데 파수꾼님 지금 그르릉거리는 소리 나는 거 알아?
네오—…안 나.
연이—나거든. 완전 골골골. 나 이거 녹음해서 위에 있는 루나한테 들려줄 거야. '무서운 파수꾼 네오님 실체.mp3'로.
네오—…그 파일, 이 도서관 오염 서가보다 위험하군. 반드시 압류해야겠어.
두 사람은 한참을 웃었다. 오랜만이었다. 값에도, 시계에도, 빚에도 쫓기지 않는 웃음. 검은 서가의 무게도, 언니의 흐려진 얼굴도, 이 밤만큼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연이는 소파에 파묻혀 등불 물고기가 헤엄치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문득, 위에 두고 온 루나와 언니가 떠올랐다. 지금쯤 광장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두 사람이.
연이—…루나, 잘 있을까. 언니 얼굴은 더 흐려지지 않았을까. 나 여기서 이렇게 쉬어도 되는 걸까.
네오—쉬는 게 곧 그 애들을 위한 거야. 지금 네가 힘을 못 기르면, 돌아가도 또 진다. 급할수록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해. 백문 님이 그랬잖아. 뿌리는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자란다고.
연이—…맞아. 내일부터 제대로 배울게. 그 시계를 이기는 법. 언니 얼굴 되찾는 법. 루나가 다신 울지 않게 하는 법. 전부, 이 도서관에서.
등불 물고기들이 두 여행자 위로 별처럼 떠서, 조용히 밤을 밝혔다. 재성의 섬에서는 값에 쫓겼지만, 인성의 도서관에서는 뜻이 그들을 재웠다. 오랜만의, 깊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제19화 · 책들이 숨 쉬는 곳 — 끝. 제20화 「본뜻의 서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