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 한 칸 내려갈 때마다 빗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지하인데도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모카—지하에 비라니. 이 도서관 배수 공사 누가 했냐. 별 하나.
연이—(별점은 내 일인데. 모카가 내 영역을 침범하고 있어.)
계단 끝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쪽 공기는 차갑고 맑았다. 마치 아직 아무도 숨 쉬어 본 적 없는 공기 같았다.
유리병처럼 투명한 책들이 붉은 실에 매달려 공중에 떠 있었다. 바닥에 금빛 규칙이 떠올랐다.
[ 지하 3층 · 일어나지 않은 일 · 펼치면 그 일이 조금 가까워진다 ]
연이—아직 안 일어난 일이 책으로 있다고요? 그럼 여기 미래가 다 있는 거예요?
윤달—미래라기보다는,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들이요. 될 수도 있고 영영 안 될 수도 있고.
모카—잠깐. 야, 이거 봐. 「모카, 지하 무대 단독 공연 전석 매진」. 이거 펼쳐도 돼?
윤달—펼치면 조금 가까워진대요. 연습은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없고요.
모카—그럼 의미 없잖아! 매진이 다가와도 내 실력이 그대로면 망신만 다가오는 거잖아.
연이—모카 진짜 랩 연습 안 하는구나.
모카—하거든! 너 잘 때 한다고!
영냥이—밤마다 벽 너머에서 들리던 박자가 그거였구나.
모카—쥐 아니고 비트박스야! 고양이 귀는 장식이냐?
손목의 아기 용이 빗소리 쪽으로 고개를 쭉 뺐다. 아까 마신 물이 아직 배 속에서 출렁거렸다.
연이—너 또 마시려고? 안 돼. 배 터져. 이번엔 진짜 별 하나 준다.
윤달은 웃으며 옆 책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끝이 얇은 책 한 권에 닿았다가 멈췄다.
[ 「윤달, 집에 돌아감」 · 0쪽 ]
연이—아저씨. 0쪽이에요.
모카—사기꾼 너 진짜 안 돌아갈 생각이었냐? 왜 한 줄도 없어.
윤달—표지는 있네요. 그럼 됐어요. 표지가 있다는 건 아직 안 끝났다는 뜻이니까.
그는 책을 건드리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장갑 안쪽의 구멍이 아주 작게 바람 소리를 냈다.
연이—그럼 제가 매일 불러 드릴게요. 윤달, 윤달. 그럼 위층 아저씨 책도 매일 한 장씩 두꺼워지잖아요.
윤달—하루 한 장이면 10년이면 3천 장인데요. 그 책 무거워서 못 들고 다니겠네요.
모카—걱정 마. 내가 들어 줄게. 운반비는 따로 받고.
윤달은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웃음이었다.
영냥이는 그 사이 혼자 앞서 걷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와도 망설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와 본 길처럼.
연이—고양이님, 길 알아? 여기 처음 아니야?
영냥이—냄새를 따라온 거야. 젖은 발자국도 이쪽이고.
연이—(발자국은 아까 계단에서 끊겼는데.)
영냥이를 따라가던 연이의 눈에 책 한 권이 걸렸다. 연분홍 표지 위의 제목이 반쯤 번져 있었다.
[ 「꽃돼지 · 하얀 □□와 벚꽃 강가에서」 · 0쪽 ]
연이—하얀 뭐? 하얀 뭐랑? 이거 왜 하필 거기만 번졌어!
모카—하얀 떡. 너라면 하얀 떡이야. 벚꽃 강가에서 떡 먹는 책.
연이—0쪽짜리 책에서까지 나를 먹보로 만들지 마!
앞서 걷던 영냥이의 꼬리가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흔들렸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가장 깊은 곳, 작은 받침대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다른 책들과 달리 투명하지 않았다. 검은 천으로 감싸고 검은 사슬로 묶여 있었다.
표지에 하얀 글씨가 박혀 있었다. 꽃돼지 · 첫 번째 봄.
연이—찾았다. 여기 있었어.
윤달—잠깐만요. 대출 중이라던 책이 왜 여기 있을까요. 그리고 이 서가는 일어나지 않은 일의 서가예요.
연이—그게 무슨 뜻인데요?
윤달—어디선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던 일이 된 봄이라는 뜻이요. 누가 이 책을 여기 숨겨 놓은 거예요.
사슬 가운데에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에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壬午.
연이의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명식판의 빈칸, 年 자리가 그 두 글자를 향해 끌려가는 것 같았다.
[ 年 □□ · 月 丙午 · 日 乙亥 · 時 □辰 ] 5/8 — 반응 : 壬午
연이—내 年柱야. 이 책 안에 내 글자가 있어.
연이는 자물쇠에 앞발을 댔다. 그 순간 바닥의 금빛 글씨가 붉게 바뀌었다.
[ 열람 불가 · 꽃돼지 님은 이미 한 권을 읽으셨습니다 (1/1) ]
연이—아. 자장가.
모카—그럼 내가 열어 줄게. 비켜 봐.
모카가 자물쇠를 잡자 사슬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 앞발을 튕겨 냈다.
[ 열람 불가 · 소유자 외 열람 금지 ]
모카—주인은 못 열고 남은 못 열고. 그럼 이 책은 누가 열어!
연이—괜찮아. 후회 안 해. 그 꼬맹이는 오늘 밤에 잘 잘 거야.
연이는 웃었다. 그런데 웃는 앞발 끝이 조금 떨렸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손댈 수 없는 봄이었다.
영냥이—연이야. 그 책은 열지 마. 방법도 찾지 마.
목소리가 이상하게 낮았다. 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냥이를 보았다.
연이—너 이 책 알지.
영냥이—나도 몰라. 이 책은 처음 봐.
연이—거짓말. 너 거짓말할 때 털끝이 서. 지금 섰어.
영냥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왼 앞발을 조금 들었다. 연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질수록 그 앞발의 그을린 자국이 짙어졌다.
연이—대출 카드에서 비 냄새 날 때도, 빈칸 볼 때도, 너만 이상했어. 뭔데. 뭘 숨기는데.
영냥이—지금은 말할 수 없어. 미안해.
연이—지금은? 그럼 언제? 너는 맨날 나중이야!
모카—야, 야. 둘 다 진정해. 싸우는 건 밥 먹고 해. 공복에 싸우면 말이 세져.
연이—모카는 빠져. 이건 우리 둘 얘기야.
영냥이—연이 말이 맞다. 이건 내 문제다.
모카—둘 다 똑같은 소리 하네. 그러니까 싸우는 거야.
영냥이의 앞발이 다시 움찔했다. 연이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책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였다.
윤달—두 분. 잠깐만요. 공기가 바뀌었어요.
받침대 밑의 그림자가 부풀어 올랐다. 사슬 틈마다 검은 손가락이 솟아 책을 감싸 쥐었다.
목소리—그릇의 첫 번째 봄. 그건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연이—또 너야? 남의 책 좀 그만 먹어!
목소리—먹는 게 아니다, 아이야. 돌려받는 것이지.
검은 손 수십 개가 한꺼번에 덮쳐 왔다. 영냥이가 앞으로 뛰어나가 발톱을 휘둘렀고, 모카의 국자 끝에서 불이 튀었다.
윤달이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의 구멍이 바람 소리를 내며 검은 손들을 한 움큼씩 빨아들였다.
윤달—크… 오늘 메뉴는 좀 많이 짜네요.
손바닥의 구멍이 손목 쪽으로 한 마디쯤 번졌다. 윤달은 웃는 얼굴로 그 손을 다시 들었다.
연이—아저씨, 그만해요! 구멍이 커지잖아요!
윤달—괜찮아요. 숙녀분 책 지키는 거면, 이 정도는 외상으로 해 둘게요.
그때 천장에서 진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검은 손들 사이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빗줄기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호랑이였다. 그녀는 받침대 위로 뛰어올라 책을 앞발로 눌렀다. 검은 손들이 주인을 알아본 듯 물러났다.
검은 호랑이—회수합니다.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연이—회수? 그거 내 이름 적힌 책이야. 네 장부엔 남의 봄까지 적혀 있어?
목소리—늦었구나. 그래도 좋다. 가져와라.
연이—안 돼!
연이가 뛰어올라 책 반대편을 붙잡았다. 사슬 위에서 돼지의 앞발과 호랑이의 앞발이 맞닿았다.
짧은 순간이었다. 호랑이의 앞발이 움찔 떨렸다. 빗방울이 연이의 정수리에 똑 떨어졌다.
검은 호랑이—너는… 왜 비 맞으면서 웃어.
연이—몰라. 그냥 비 오면 기분이 좋아. 옛날부터 그랬어.
호랑이의 붉은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목의 고리가 번쩍 빛나며 조여들었다.
호랑이는 책을 홱 잡아당겼다. 연이의 앞발에서 사슬이 미끄러져 나갔다.
검은 호랑이—비는 그냥 비야. 기분 좋을 것도 없어.
연이—너 그 책 왜 가져가? 너도 그 봄에 있었어? 그래서 대출자 칸을 지운 거야?
검은 호랑이—질문이 많네. 빚진 쪽은 원래 질문을 안 하는 법인데.
연이—나 너한테 빚진 거 없어!
검은 호랑이—그래. 이번엔 그렇게 끝내. 그게 너한테 나아.
호랑이는 책을 물고 계단 위로 뛰어올랐다. 한 번에 서너 칸씩,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둥근 천장 쪽으로 사라졌다.
모카—쫓아가! 저 줄무늬, 이번엔 내가 꼬리에 리본 묶어 준다.
윤달이 받침대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장갑 없는 손을 품에 감싸 쥐고 있었다.
윤달—가세요. 저는 잠깐만 앉았다 갈게요. 수달 씨가 옆에 있어 주시면 좋겠네요.
모카—왜 하필 나야.
윤달—제일 시끄러우니까요. 시끄러운 사람 옆에 있으면 안 잊혀요.
모카—그 말 반칙이다, 사기꾼. 알았어. 대신 나중에 밥 사.
영냥이—같이 간다.
연이—응. 대신 끝나면 다 말해 줘. 약속해.
영냥이—끝나면.
모카—고양이. 돼지 놓치지 마라. 놓치면 내가 너 털 다 밀어 버린다.
영냥이—수달한테 협박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연이는 그 대답이 약속인지 아닌지 끝내 묻지 않았다. 둘은 젖은 계단을 나란히 뛰어올랐다.
계단 꼭대기 너머에서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둥근 천장 아래, 숨 쉬던 도서관 전체가 천천히 젖어 가고 있었다.
[ 「첫 번째 봄」 · 대출 중 · 대출자 : ■■■ ]
대출 카드 위의 검은 칸 세 개가 빗물에 젖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마치 그 아래 이름 석 자가 떠오르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