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도서관에도 밤은 있었다. 등불 물고기들이 낮게 헤엄치는 시간이었다.
연이는 낮 동안 도서관 곳곳을 돌아본 참이었다. 볼수록 이상한 곳이었다. 어떤 서가는 웃고, 어떤 서가는 울고, 어떤 책은 손이 닿기도 전에 제 이야기를 먼저 펼쳤다. 값의 세계에선 상상도 못 할, 뜻이 살아 숨 쉬는 곳.
연이—백문 님. 저 낮에 돌아다니다 봤는데, 여기 책들은 다 자기가 무슨 얘긴지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재성의 섬에선 물건들이 다 '얼마인지'만 알고 있었는데.
백문—허허. 잘 봤네. 값은 '얼마'만 알고, 뜻은 '왜'를 알지. 이 도서관 책들은 저마다 '나는 왜 쓰였나'를 알고 있어. 그걸 잊지 않는 한, 어떤 책도 진짜로 죽지 않는다네.
연이—'나는 왜 쓰였나'…라. 그럼 사람도 '나는 왜 사는가'를 알면, 진짜로는 안 지는 거예요?
백문—…허어. 자네, 첫날부터 이 도서관의 심장을 건드리는군. 그래. 바로 그걸세. 그게 오늘 밤 자네에게 가르치려는 것의 전부이기도 하고. 자, 앉게. 차가 식기 전에.
네오—…연이는 늘 이래요, 백문 님. 배우기도 전에 답에 먼저 발을 걸치죠. 가끔은 스승보다 반 발짝 앞서 있어서, 가르치는 사람이 다 무안해질 정도로.
백문—허허, 그거야말로 스승 복이지. 자, 그럼 그 영민한 머리로 이걸 읽어 보게. 백 년을 들여 쓴, 이 늙은 여우의 유일한 저서일세.
백문은 두 사람에게 따뜻한 차와 두꺼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부정 계약, 그 병과 처방. 저자 백문.」
연이—이거 직접 쓰셨어요?
백문—연구할 시간이야 넘쳐 났으니까. 이 도서관에 딱 한 권 있고, 대출자는 지금까지 자네가 처음일세.
연이—(첫 독자가 이렇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나….)
네오—…첫 독자이자 아마 유일한 독자겠지. 표지 두께를 보니, 백 년 치 야근이 다 들어 있군요.
백문—허허, 야근이라. 파수꾼은 말을 참 밉게 하는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닐세. 이 한 권에, 내가 백 년간 이 도서관에서 알아낸 저 회중시계의 정체가 다 들어 있으니까. 자, 첫 장을 펼치게.
연이가 표지를 넘기자, 첫 장에 큼직한 글씨가 있었다. 「모든 병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을 알면, 절반은 나은 것이다.」
연이—'모든 병에는 이름이 있다'… 그럼 청토끼 회중시계가 부리는 것도, 이름이 있는 병이에요?
백문—있고말고. 그 병의 이름은 '재극인(財剋印)'일세. 어제 파수꾼이 말했지. 재물이 지나치면 문서와 공부의 기운을 해친다고. 그 극(剋)함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사람의 운명 문서 자체를 돈으로 덧써 버리는 병이 되네. 저 시계가 바로 그 병을 무기로 삼은 거야.
연이—병을 무기로… 그럼 이 책은 그 병의 '처방'도 적혀 있는 거죠? 제목이 '그 병과 처방'이니까.
백문—영리해. 처방은 뒤쪽에 있네. 다만 처방을 이해하려면 병부터 알아야 하지. 순서대로 가세. 서두르면 처방을 봐도 못 쓰거든. 자, 병의 정체부터.
네오—…연이. 잘 들어. 여기서 배우는 이 '재극인'의 이치가, 곧 저 회중시계를 이기는 열쇠야. 재판정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못 했던 이유가, 이 책 안에 다 있다.
연이—…응. 집중할게. 언니 얼굴 되찾으려면, 이 병을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니까.
백문—잘 듣게. 저 회중시계의 힘은 파괴가 아니야. 고쳐 쓰기일세.
백문—세상 모든 약속에는 본뜻이 있네. 빌린 걸 갚겠다는 마음, 너를 돕겠다는 마음. 부정 계약은 그 본뜻 위에 돈의 문장을 덧씌워서, 원래 마음을 안 보이게 만들지.
네오—덧씌운 거라면, 벗겨낼 수도 있다는 뜻이네.
백문—바로 그걸세. 그리고 벗겨내는 법칙은 딱 하나야. 사본은 원본을 이기지 못한다.
백문이 검게 앓는 책 한 권을 가져와 열람대에 펼쳤다. 금빛 도장이 찍힌 페이지가 지네처럼 꿈틀댔다.
백문—이 검은 문장은 어디까지나 사본이야. 본뜻의 원문이 살아 있는 한, 이렇게 되지.
백문의 지팡이 끝에서 흰 글자들이 흘러나와 검은 문장 위에 겹쳐졌다. 원래 문장인 「딸의 학비를 위해 빌린다」가 떠오르자, 금빛 도장이 소리 없이 바스러졌다.
연이—…와. 검은 도장이 '무능·회수 대상'이었는데, 밑에서 '딸의 학비를 위해'가 올라오니까 그냥 바스러졌어요. 거짓말이 진실 앞에서 못 버티는 거네요.
백문—바로 그걸세. 저 회중시계가 아무리 강해도, 그건 '고쳐 쓰는' 힘이지 '없애는' 힘이 아니야. 고쳐 썼다는 건, 반드시 고쳐지기 전의 원본이 어딘가 살아 있다는 뜻이지. 원본만 찾으면, 시계의 모든 조작은 사본에 불과해져.
네오—…그래서 청토끼가 원본들을 제 금고 깊숙이 감춘 거군요. 원본이 세상에 나와 있으면, 자기가 덧쓴 모든 계약이 한꺼번에 무효가 될 테니까. 원본이야말로 그 시계의 유일한 약점이다.
백문—영리한 파수꾼일세. 그러니 이 싸움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야. '원본을 찾아 읽는' 싸움이지. 저 토끼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 줄 아나? 칼이 아니라, 진실을 소리 내어 읽는 목소리라네.
연이—진실을 소리 내어 읽는 목소리… 그게 무기라니, 좀 이상하면서도 멋있어요. 근데 백문 님, 궁금한 게 있어요. 그럼 왜 사람들은 덧쓰인 대로 믿어 버려요? 원본이 살아 있는데, 왜 다들 '나는 무능하다'를 진짜로 받아들이죠?
백문—…좋은 질문일세. 그게 저 병의 가장 무서운 증상이거든. 덧쓴 글자를 자꾸 보다 보면, 사람은 원본을 스스로 잊어버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나'를 잊는 순간, 사본이 원본 행세를 하지. 그래서 남이 읽어 줘야 하는 걸세.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고.
연이—…그래서 백문 님이 이 도서관을 지키는 거네요. 사람들이 자기 원본을 잊었을 때, 대신 기억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니까.
백문—…허허. 자네는 정말, 노인 마음을 자꾸 울리는군. 그래. 나는 세상이 잊은 원본을 대신 기억하는 사람일세. 그리고 이제 자네가, 그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고. …자, 이론은 여기까지. 이제 직접 해 봐야 몸에 남네.
네오—…연이. 정리하면 이래. 하나, 저 시계는 원본을 못 없애고 덧쓰기만 한다. 둘, 원본은 청토끼 금고에 있다. 셋, 원본을 소리 내어 읽으면 덧쓴 조작이 전부 무효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해. 금고를 열고, 원본을 읽는 것.
연이—…머릿속에 딱 정리됐어. 근데 문제는, 그 금고를 열려면 먼저 회중시계 앞을 지나야 하고, 그 앞에 서면 숨이 묶인다는 거잖아. 그래서 내가 '숨의 본뜻'을 먼저 배워야 하는 거고.
백문—…허어. 파수꾼이 설명하기도 전에 자네가 다 꿰었군. 그래, 정확해. 자, 그럼 이제 진짜로 언니 계약서 얘기를 해 보세. 자네가 방금 그렇게 묻고 싶어 하는 눈이었으니.
연이—우와, 그럼 언니 계약서도 저렇게 하면 되잖아요!
백문—…원본이 있다면 말이지.
백문이 색인함을 두드리자 빵집 언니의 카드가 나왔다. 원문 소장처는 공란, 비고란에 금빛 글씨. 「원본 반출 — 지상 금고 보관.」
백문—영리한 토끼야. 원본을 여기 두면 내가 되읽을 수 있으니 제 금고로 가져갔지. 담보로 잡은 형상들의 원본 계약서 전부, 그리고 아마 자네 기둥도 거기 있을 걸세.
네오—금고 위치는?
백문—본사 지하 창고, 그 밑일세. 대저울의 추가 내려가는 우물 밑바닥이지. 한데 서두르지는 말게. 지금 올라가면 또 똑같이 진다네.
네오—…대저울의 추가 내려가는 우물이라. 그 우물은 재성의 심장부와 이어져 있겠군요. 금고에 닿으려면 청토끼 본사를 정면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중시계를 든 그 토끼를 지나서.
백문—바로 그걸세. 그래서 힘만으론 안 돼. 지난번엔 자네들이 그 앞에서 숨이 묶였지. 이번에도 같은 상태로 올라가면, 똑같이 묶이고 똑같이 진다네. 달라져야 할 건 힘이 아니라, 자네들의 '숨'일세.
연이—…맞아요. 그때 회중시계가 째깍거리기 시작하니까, 몸이 돌처럼 굳었어요. 손가락 하나 못 움직였어요. 언니가 눈앞에서 담보로 잡히는데도,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 무력함이… 아직도 꿈에 나와요.
백문—…그건 자네가 약해서가 아닐세. 그 순간 자네 마음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라고 스스로에게 덧써 버렸기 때문이야. 시계가 자네를 묶은 게 아니라, 자네가 자네를 묶은 거지. 그 순간 자네 숨엔 답이 없었거든. '나는 왜 여기 있는가'에 대한 답이.
네오—…그래서 백문 님이 '숨의 본뜻'을 먼저 배우라 하시는 거군요. 힘을 더 기르는 게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이유를 먼저 갖추라는. …연이, 이건 나도 못 가르치는 부분이야. 이건 네 안에서 찾아야 해.
백문—아까 회중시계 아래서 자네들 숨이 묶였던 건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야. 자기 숨의 본뜻을 아직 글자로 답하지 못해서일세.
연이—숨의 본뜻이요?
백문—왜 싸우는가, 왜 지키는가. 그 물음에 문장으로 답할 수 있는 자의 숨은, 어떤 펜으로도 덧쓸 수 없거든. 내일부터 열람실에서 그걸 찾을 걸세.
연이—…백문 님. 내일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면 안 돼요? 위에서 루나랑 언니가 기다리고 있어요. 하루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어요.
백문—허허, 급한 제자로군. …좋아. 원래 첫 수업은 몸이 쉬고 난 뒤에 시키는 법이지만, 그 눈빛을 보니 오늘 밤은 잠이 안 오겠어. 따라오게. '본뜻의 서가'로.
백문은 두 사람을 도서관 가장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다른 서가들이 책으로 빼곡한 것과 달리, 그곳은 텅 빈 하얀 서가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책은 한 권도 꽂혀 있지 않았다.
연이—…어? 여기 '본뜻의 서가'라면서 책이 하나도 없잖아요. 텅 비었어요.
백문—비어 보이지. 하지만 눈으로 보려 하니까 안 보이는 걸세. 본뜻은 활자가 아니라 마음이거든. 눈을 감고, 서가에 손을 얹어 보게. 그럼 '읽힐' 거야.
연이가 눈을 감고 빈 서가에 손을 얹자, 손끝에서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약속들, 다짐들, 사랑들. 세상 모든 진심이 활자가 되기 이전의, 날것의 마음 그대로 그곳에 잠들어 있었다.
연이—…들려요. 아니, 느껴져요. 여기, 세상 모든 진심이 다 있어요. '꼭 갚을게', '지켜 줄게', '미안해', '사랑해'… 글자가 되기 전의 마음들이.
백문—그게 본뜻일세. 청토끼의 시계는 활자를 고쳐 써. 하지만 활자가 되기 전의 이 마음까지는 손대지 못하지. 여기 잠든 본뜻을 길어 올려, 덧쓰인 거짓 활자에 맞세우는 것 — 그게 자네가 배울 힘이야.
백문—본뜻 읽기에는 세 개의 문턱이 있네. 첫째, '느끼기'. 문서에 깃든 원래 마음을 손끝으로 느끼는 것. 자네는 이미 넘었지. 아까 찢긴 계약서를 읽었으니까.
백문—둘째, '읽기'. 느낀 마음을 정확한 문장으로 옮기는 것. 여기서 대부분이 막혀. 마음은 뿌옇거든. 그걸 또렷한 한 문장으로 벼려야 힘이 생기네.
백문—셋째, '되쓰기(再筆)'. 읽어 낸 본뜻을 소리 내어 세상에 다시 쓰는 것. 이게 가장 어렵고, 가장 위험해. 남의 운명을 되쓰려면, 먼저 자기 운명을 한 치 흔들림 없이 믿어야 하거든. 흔들리면, 거짓 활자가 되레 자네를 덮어써.
네오—…흔들리면 역으로 당한다. 그래서 아까 재판정에서 연이가 회중시계 앞에 섰을 때 숨이 묶인 거군요. '되쓰기'를 시도했는데, 자기 믿음이 시계보다 약했으니까.
백문—정확해, 파수꾼. 그러니 순서가 중요해. 되쓰기부터 욕심내면 부서져. 오늘은 둘째 문턱, '읽기'만 하네. 마음을 문장으로 옮기는 연습. …자, 첫 문제일세.
백문이 빈 서가에서 흐릿한 마음 한 조각을 손끝으로 떠서, 연이 앞의 빈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종이 위에 뿌연 안개 같은 감정만 맴돌 뿐, 글자는 없었다.
백문—이 마음을 한 문장으로 옮겨 보게. 느끼는 건 됐고, 이번엔 '정확한 말'로 적는 거야. 뭉뚱그리지 말고, 이 사람이 진짜 하려던 말 딱 한 줄로.
연이—…음. 따뜻하고… 미안하고… 어… 걱정되는 마음이에요. 누군가를… 두고 떠나는…?
백문—틀린 건 아니야. 하지만 그건 '느낌'이지 '문장'이 아닐세. '따뜻하고 미안하고 걱정되는'은 안개야. 안개로는 시계를 못 이겨. 다시. 이 사람이, 누구에게, 무엇을, 왜 하려는지. 한 문장으로.
연이—…어렵다. 느껴지는 건 많은데, 한 문장으로 줄이려니까 자꾸 다 빠져나가요. 뭘 남기고 뭘 버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백문—그게 '읽기'의 벽일세. 마음은 넓고, 문장은 좁아. 다 담으려 하면 아무것도 안 담겨. 가장 뜨거운 한 점만 남기고, 나머진 과감히 버려. 이 사람 마음에서 제일 뜨거운 곳이 어디지?
연이는 다시 눈을 감고, 그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손을 뻗었다. 안개를 헤치고, 헤치고, 또 헤치자 — 맨 밑바닥에 아주 뜨겁고 단단한 한 점이 만져졌다.
연이—…'네가 나 없이도 잘 살길 바라.' …이거예요. 이 사람이 진짜 하려던 말. 미안한 것도 걱정도 다, 결국 이 한 문장으로 가고 있었어요.
연이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자, 빈 종이 위에 안개가 뭉쳐 또렷한 한 줄이 새겨졌다. 「네가 나 없이도 잘 살길 바라.」 종이가 은은한 금빛으로 빛났다. 정확히 읽힌 마음은, 스스로 빛을 냈다.
백문—…허어! 첫날에 둘째 문턱을 넘었어. 그것도 이렇게 깨끗하게. …자네, 정말 무서운 아이로군.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눈일세.
연이—됐다! 저 방금 마음을 문장으로 옮겼어요! 안개가 글자가 됐어!
네오—…잘했어, 연이. 근데 방금 그 문장, 어쩐지 남 얘기 같지 않던데. '네가 나 없이도 잘 살길 바라.' …너, 언니가 너한테 그런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연이—…들켰네. 응. 이 마음 읽는데 자꾸 루나 언니가 떠올랐어. 재성에서 봤거든. 그 언니가 루나 두고 담보로 잡힐 때, 딱 이 마음이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더 또렷하게 읽혔나 봐.
백문—…그래서 자네가 잘 읽는 걸세. 본뜻 읽기는 재주가 아니라 공감이야. 남의 마음 밑바닥에 자기 마음을 대 볼 줄 아는 사람만이, 그 밑바닥을 읽어 내지. 자네는 그걸 타고났어.
연이는 빛나는 종이를 한참 들여다봤다. 마음을 문장으로 옮긴다는 것. 그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남의 아픔에 자기를 겹쳐 보는 일이었다. 이 도서관에서 배울 힘이 어떤 것인지, 연이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연이—백문 님! 저 한 번 더 해 볼래요! 아까 그 검은 서가의 앓던 책들, 그것도 이렇게 읽어 주면 낫는 거잖아요! 지금 당장—
백문—자, 잠깐! 연이, 그건 아직—
하지만 연이는 이미 가장 가까운 검은 책 한 권에 손을 뻗은 뒤였다. 아까 앓던 편지책보다 훨씬 크고, 훨씬 검고, 도장이 다섯 겹이나 눌린 책. 연이가 원래 문장을 소리 내어 되쓰려는 순간—
쿠구궁! 검은 도장들이 일제히 살아나 연이의 손목을 타고 팔로 기어올랐다. 「연체」 「무능」 「회수 대상」… 거짓 활자들이 연이 자신에게 덧쓰이려 했다. 겁먹은 마음의 틈으로, 오염이 역류한 것이다.
연이—악?! 뭐야 이거, 글자가… 글자가 내 팔로 올라와! 떼어지지가 않아! 백문 님, 이거—
백문—되쓰기를 시도했군! 아직 자기 믿음이 여물지 않았는데! 연이, 눈을 마주치지 마! 그 활자와 눈을 맞추면 '너는 무능하다'가 진짜가 된다!
네오—연이!
네오가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은빛 갈기가 어둠 속에서 달빛처럼 번쩍였다. 그가 연이의 팔을 감싸 쥐자, 팔을 기어오르던 검은 활자들이 그의 갈기 빛에 닿아 지지직 타들어 갔다.
네오—…내 눈을 봐, 연이. 저 글자 말고, 내 눈을. …너는 무능하지 않아. 너는 섬을 세 개나 건넜고, 방금 백 년 묵은 마음도 읽어 냈어. 저 글자는 거짓말이야. 나를 믿어. 내가 아는 너를 믿어.
연이가 검은 활자 대신 네오의 눈을 마주 본 순간, 팔을 기어오르던 거짓 글자들이 힘을 잃고 스르르 흘러내렸다. 남의 확신이, 흔들리던 연이를 붙들어 준 것이다.
연이—…하아, 하아… 무서웠어. 갑자기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어. '무능하다'는 글자가 팔에 닿는 순간, 그게 진짜처럼 느껴졌어…
백문—…그게 되쓰기의 위험일세. 아까 내가 셋째 문턱이 가장 위험하다 하지 않았나. 자기 운명을 한 치 흔들림 없이 믿지 못하면, 남의 거짓 활자가 되레 자네를 덮어써. 방금 그 책은, 자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어.
연이—…죄송해요. 빨리 낫게 해 주고 싶어서, 순서를 건너뛰었어요. 첫날에 셋째 문턱을 넘으려 하다니, 제가 욕심냈어요.
백문—…욕심이 아니라 다정함일세. 앓는 책을 그냥 못 지나치는 그 마음. 다만 다정함도 힘이 받쳐 줘야 남을 구하지, 안 그러면 자기가 먼저 삼켜져. 그러니 순서를 지키게. 느끼고, 읽고, 그다음에 되쓰는 걸세. 조급함이 자네를 죽여.
네오—…괜찮아. 처음이니까 이런 것도 배우는 거야. 대신 약속해. 다음부턴 되쓰기 하기 전에, 반드시 내가 옆에 있을 때만 한다고. 네가 흔들리면, 내가 붙잡을 테니까.
연이—…응. 약속할게. 고마워, 네오. 너 아니었으면 나 진짜 저 글자한테 덮어써질 뻔했어. …근데 방금 너, 완전 멋있었어. 갈기 번쩍이면서 날아오는 거.
네오—…파수꾼이니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갈기야. …그리고 방금 건 되쓰기 실습이 아니라, 실전 구조였다. 오늘 실습 성적엔 안 들어가.
연이—에이, 그래도 이건 확실히 배웠어. '겁먹으면 진짜가 된다.' 이거 인생 교훈인데? 시험 볼 때도 '나 망했어' 하면 진짜 망하잖아.
백문—허허, 바로 그걸세. 본뜻 읽기는 도서관에서만 쓰는 게 아니야. 자네 세계에서도, 스스로에게 '나는 무능하다'를 되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 거짓 도장을 스스로 걷어내는 것 — 그게 이 공부의 진짜 쓸모라네.
연이는 팔을 문질렀다. 검은 글자는 사라졌지만, 그 서늘한 감촉은 오래 남았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 힘은 남을 구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잘못 쓰면 자기를 무너뜨리는 힘이기도 하다는 걸. 무겁게, 그러나 또렷하게, 연이는 그 사실을 가슴에 새겼다.
자리를 파하기 전, 연이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걸 물었다.
연이—백문 님은 왜 이 넓은 데서 혼자 계세요?
백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등불 물고기 하나가 그의 어깨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백문—…혼자 있는 게 아니라, 못 나가는 걸세. 이 늙은 여우는 이 도서관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
백문이 로브 소매를 걷었다. 손목에 금빛 글자가 수갑처럼 감겨 있었다. 「사서인 회수 완료 — 잔여 직무: 무기한.」
연이—…그거, 청토끼 금빛 글씨잖아요. 백문 님 손목에… 왜 저 토끼 도장이 채워져 있어요?
백문—…오래전 이야기일세. 나도 한때는 이 도서관 밖을 자유로이 다녔지. 세상의 억울한 문서를 찾아다니며 본뜻을 되읽어 주는, 떠도는 사서였어. 그런데 어느 날, 딱 한 번 — 갚지 못할 계약에 도장을 찍고 말았네.
네오—…부정 계약을. 본뜻 읽기의 대가인 백문 님이, 어째서.
백문—…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내 직무 전부를 담보로 잡혀도 좋다고 생각했지. 토끼는 그걸 놓치지 않았어. '사서인(司書印)' — 내 사서의 인장을 회수해 갔네. 대신 나는 이 도서관에 무기한으로 묶였고.
연이—…그럼 백문 님이 지키려던 그 아이는요? 그 아이는, 무사한가요?
백문—…모르네. 사서인을 잃은 순간부터, 나는 도서관 밖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됐거든.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살아 있기는 한지… 백 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저 여기서 검은 서가나 닦으며 기다릴 뿐일세.
연이는 문득, 아까 백문이 백 년째 못 읽던 찢긴 계약서를 떠올렸다. 부모가 자식을 지키려 운명을 담보로 잡힌 그 반쪽. …어쩌면 그건 남의 계약서가 아니라, 백문 자신의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연이—…백문 님. 아까 그 찢긴 계약서. 혹시, 백문 님 거예요? 그 아이를 위해 도장 찍었던, 바로 그 계약서.
백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로브 소매를 천천히 다시 내려, 금빛 수갑을 가렸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분명했다.
백문—…자네는 정말, 읽지 말아야 할 것까지 읽는군. 그래. 자세한 건 자네가 첫 수업을 다 끝낸 뒤에 들려주지. 지금은 그저 이것만 알아 두게 — 나도 청토끼에게 빼앗긴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 자네가 저 시계를 이기는 걸, 나는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네오—…백문 님. 우리가 청토끼 금고를 열면, 담보로 잡힌 원본들이 다 거기 있다고 하셨죠. 그럼 백문 님의 사서인도, 어쩌면 그 안에 있을지 모릅니다.
백문—…!
연이—맞아요! 우리가 언니 계약서랑 제 시주 되찾으러 가는 김에, 백문 님 사서인도 같이 찾아올게요! 그럼 백문 님도 이 도서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잖아요!
백문—…허허. 이 늙은이는 이제 밖에 나가 봐야 할 일도 없다만. …그래도, 그 마음이 참 고맙군. 백 년 만에 처음일세, 누군가 내 몫까지 되찾아 주겠다고 한 건.
백문의 안경 너머 눈이 촉촉하게 빛났다. 등불 물고기들이 그의 어깨 위로 모여들어, 오래 외로웠던 노(老)사서를 위로하듯 은은히 빛났다. 연이는 다짐했다. 반드시, 이 도서관의 문을 열어 주겠다고.
연이—…저 갑자기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네요. 언니 얼굴, 제 시주, 그리고 백문 님 사서인. 청토끼 그 금고, 아주 탈탈 털어 버릴 거예요.
네오—…든든한 제자를 뒀군요, 백문 님.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이 아이도 첫 수업으로 진이 빠졌을 테니.
그날 밤, 연이는 본뜻의 서가에서 읽어 낸 그 한 문장을 오래도록 되뇌었다. '네가 나 없이도 잘 살길 바라.' 언니의 마음이자, 어쩌면 백문의 마음이자, 세상 모든 지키는 이들의 마음. 그 문장을 품고, 연이는 깊은 잠에 들었다.
도서관의 아침은 등불 물고기들이 천장 높이 떠오르며 시작됐다. 연이는 눈을 뜨자마자 본뜻의 서가로 달려갔다. 하루라도 빨리, 한 문장이라도 더. 급한 마음이 발을 재촉했다.
백문—허허, 벌써 왔나. 밥은 먹고 하게. …아니, 이 여우가 잔소리를 다 하는군. 백 년 만에 제자를 두니 별 소릴 다 하네. 좋아, 오늘은 어제보다 어려운 마음을 읽어 보세.
백문은 연이 앞에 여러 장의 빈 종이를 늘어놓고, 각각 다른 마음 조각을 올렸다. 어떤 건 기쁨, 어떤 건 분노, 어떤 건 체념. 연이는 하나씩 손을 얹고, 그 밑바닥의 한 문장을 길어 올렸다.
연이—…이건, '화가 난 게 아니라 무서웠던 거야.' …이건,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안 괜찮아.' …이건, '고맙다는 말을 못 했어.'
종이마다 안개가 뭉쳐 또렷한 문장이 새겨지고, 하나씩 금빛으로 빛났다. 어제는 한 문장에 반나절이 걸렸는데, 오늘은 연달아 세 개를 읽어 냈다. 연이의 손끝이,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었다.
백문—좋아, 이번엔 더 꼬인 걸세. 겉과 속이 정반대인 마음. 이런 건 대개 겉 문장에 속아 넘어가지. 손끝으로 겉을 뚫고, 진짜 밑을 짚어 보게.
백문이 새 종이 위에 유난히 뒤엉킨 마음 조각을 올렸다. 겉으론 웃음이, 속으론 울음이 뒤섞여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연이는 눈을 감고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연이—…어렵다. 웃는 말인데, 밑에서 자꾸 반대가 만져져. '잘 가, 행복해'라고 웃는데… 진짜는…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예요. 겉으로 보내 주는 척하면서, 속으론 붙잡고 있어요.
연이가 그 밑 문장을 읽어 내자, 소용돌이치던 안개가 잔잔해지며 두 줄이 나란히 새겨졌다. 겉의 「잘 가, 행복해」 아래, 진짜인 「가지 마」가 금빛으로 더 진하게 빛났다.
백문—…겉과 속을 둘 다 읽고, 어느 쪽이 진짜인지까지 짚었어. 이건 둘째 문턱을 넘어 셋째로 가는 길목일세. 자네, 지금 자네가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알기나 하나.
연이—…이 마음, 읽는데 좀 아팠어요. 보내 주는 척하면서 붙잡는 마음. …재성에서 루나가 딱 이랬거든요. 언니한테 '나 괜찮아, 걱정 마' 하면서, 사실은 언니가 안 사라졌으면 했어요. 그 애 마음이 딱 이랬어요.
백문—…그래서 자네가 이 어려운 걸 읽어 낸 걸세. 겪어 본 마음만이, 겪어 본 마음을 알아보거든. 자네의 아픔이 자네의 힘이 되고 있어. …참 얄궂지. 하지만 그게 인성의 이치라네.
연이—…그럼 저, 지금까지 아팠던 게 다 헛된 게 아니었네요. 그 아픔이 지금 남을 읽는 손끝이 됐으니까.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난 일들이 조금은 덜 서러워요.
백문—바로 그걸세. 본뜻 읽기의 마지막 선물이 그거야 — 남을 읽다 보면, 어느새 자기 지난날까지 다시 읽게 되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자, 오늘 몫은 충분하네. 손끝이 뜨거워졌을 테니 좀 식히게.
백문—…하루 만에 이렇게. 대개는 첫 문장 하나 읽는 데 한 달이 걸리는데. 자네는 마음에 자기를 대 보는 게 몸에 배어 있어. 남의 아픔을 제 아픔처럼 여기는 것 — 그게 자네의 재능이자, 어쩌면 자네가 살아온 방식이겠지.
연이—…어릴 때부터 언니 눈치를 많이 봤어요. 언니가 힘든 걸 티 안 내려고 애쓰는 걸, 저는 알았거든요. '괜찮아' 하는데 안 괜찮은 거. 그거 읽는 게, 저한텐 그냥 일상이었어요.
백문—…아픈 재능이군. 남의 마음을 읽는 눈은, 대개 남의 눈치를 보며 자란 아이에게 생기지. 자네는 슬픈 곳에서 자란 힘으로, 이제 남을 구하려는 거야. …그 힘, 부디 자네 자신을 읽는 데도 써 주게. 남만 읽다 정작 자기 마음은 못 읽는 이가 많으니.
연이—…제 마음이요?
백문—그래. 셋째 문턱, 되쓰기의 열쇠가 바로 그것일세. '왜 싸우는가'에 답하려면, 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마음 밑바닥을 읽어야 해. 그건… 오늘 말고, 자네가 준비됐을 때. 서두르지 말게.
연이—…근데 백문 님. 남의 마음을 읽는 게 이렇게 잘 되면, 혹시 저 네오 마음도 읽을 수 있어요? 쟤 맨날 무뚝뚝해서 속을 모르겠거든요. 한번 읽어 볼까—
네오—…야. 그건 반칙이야. 사람 속을, 아니 사자 속을 함부로—
연이가 장난스럽게 네오 쪽으로 손을 뻗자, 백문이 껄껄 웃으며 그 손을 가만히 막았다.
백문—허허, 그건 안 되네. 본뜻 읽기엔 예의가 있어. 남이 스스로 펼치지 않은 마음은, 함부로 읽지 않는 법일세. 특히 저 파수꾼처럼, 아끼느라 감춘 마음은 더더욱. 감춘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연이—…아, 그렇구나. 죄송. 장난이었어, 네오. 진짜 읽으려던 건 아니야. …근데 사실 나, 안 읽어도 알아. 너 무뚝뚝한 척하면서 나 제일 많이 챙기는 거.
네오—…읽지도 않고 그런 소릴 하면, 읽는 것보다 더 반칙이잖아.
연이—헤헤. 그건 본뜻 읽기가 아니라, 그냥 오래 같이 다닌 값이야. 이건 공짜로 읽혀.
백문—…허허. 그래, 정말 소중한 건 읽으려 애쓰지 않아도 읽히는 법이지. …다만 연이, 하나만 새겨 두게. 이 세상엔, 아무리 읽으려 해도 밑바닥이 안 보이는 마음도 있어. 그런 마음을 가진 자를 만나거든, 조심하게. 밑이 없는 우물처럼 깊은 자는, 대개 무언가를 잃고 텅 빈 자거든.
네오—(…밑바닥이 안 보이는 마음. …그 여자가 딱 그렇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안엔 끝없는 어둠뿐이었어. 무언가를 잃고 텅 빈 자. …백문 님은, 어쩌면 그 여자의 정체까지 짐작하고 계신지도 모르겠군.)
연이—…밑이 없는 우물. 어쩐지 무서운 말이네요. 그런 사람, 안 만났으면 좋겠다.
백문—…글쎄.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지. 자, 이야기가 무거워졌군. 다시 밝은 일로 돌아가세. 어제 그 '봄에 태어난 아이' 책 말인데—
연이—…백문 님. 그럼 어제 그 검은 서가의 '봄에 태어난 아이' 책은요? 제가 어제 조금 밀어냈던 그 책. 셋째 문턱 없이도, 지금 실력으로 조금 더 도와줄 수 있어요?
백문—…오호. 완전한 되쓰기는 못 해도, 둘째 문턱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 있지. 원문을 정확한 문장으로 '읽어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눌린 책은 숨을 크게 쉰다네. 내가 곁에서 받쳐 줄 테니, 해 보겠나?
연이—…네. 어제 그 애한테 약속했거든요. 꼭 다시 와서, 끝까지 읽어 주겠다고.
연이는 검은 서가로 돌아가, 어제 그 얇은 책을 다시 꺼냈다. 붉은 「말소」 도장 아래, 「봄에 태어나 꽃을 피우는 재주를 타고났다」는 원문이 여전히 흐릿하게 눌려 있었다. 연이는 이번엔 겁먹지 않았다. 백문이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백문—이번엔 도장을 '지우려' 하지 말게. 원문을 '더 크게 읽어' 주는 걸세. 이 아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자네가 아는 그대로. 겁먹지 말고, 그저 다정하게.
연이—…괜찮아. 이제 안 무서워. 나 어제보다 훨씬 잘 읽거든. …자, 네 진짜 이야기를 읽어 줄게.
연이—…'너는 봄에 태어났어. 너는 꽃을 피우는 사람이야. 빚 때문에 잠깐 그 재주가 가려졌을 뿐, 너는 한 번도 무능한 적이 없었어. 너는, 무언가를 피워 내는 사람이야.'
연이의 목소리가 서가에 울리자, 붉은 「말소」 도장이 이번엔 크게 옅어지며 밀려났다. 눌려 있던 원문이 또렷하게 되살아나 금빛으로 빛났다. 「봄에 태어나, 꽃을 피우는 재주를 타고났다.」 책의 거친 숨이, 마침내 평온해졌다.
연이—…됐다. 다 안 지워졌어도, 이제 이 애는 '무능'이 아니라 '꽃 피우는 사람'이 더 진해. 내가 아는 진짜 너로, 다시 읽혔어.
백문—…허어. 곁에서 조금 받쳤을 뿐인데, 거의 되쓰기에 가까웠네. 자네는 정말… 이 도서관이 백 년을 기다린 아이였는지도 모르겠어. 검은 서가 하나가, 방금 자네 덕에 다시 밝아졌어.
연이가 되살린 책을 제자리에 꽂자, 놀랍게도 그 옆의 검은 책들까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진심이 되살아나면, 곁의 진심도 용기를 얻는 법이었다. 검은 서가 한 귀퉁이가, 오랜만에 등불빛을 되찾았다.
연이—…책들이 서로 옮겨 붙어요. 하나가 밝아지니까 옆에 애도, 그 옆에 애도. 좋다. 오염이 옮는 게 아니라, 이번엔 빛이 옮아.
백문—그게 인성의 힘일세. 값은 나눠 가지면 줄지만, 뜻은 나눠 가지면 늘지. 자네가 한 아이를 되살리면, 그 옆의 열 아이가 용기를 얻어. …자, 됐네. 오늘 자네는 사람 하나를 구한 걸세. 아니, 그 이상을.
연이가 훈련에 몰두하는 동안, 네오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파수꾼의 눈이 아침부터 도서관의 어느 서가를 향해 있었다. '미래의 서가'라 적힌,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구역이었다.
네오—(…이 도서관엔 세상 모든 원문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아직 쓰이지 않은 원문도 있을까. …'그 여자'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되돌리려 했는지도.)
네오가 미래의 서가에 손을 뻗자, 책장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딱 한 권, 표지도 제목도 없는 책이 꽂혀 있었다. 그가 그것을 펼치려는 순간, 책이 저 혼자 굳게 닫히며 짧은 글자를 떠올렸다. 「아직 읽을 수 없음 — 대가 미납.」
네오—…역시. 여기서도 나는 '대가 미납'이군. 시간을 훔친 값을 다 치르기 전엔, 내 이야기의 다음 장은 나조차 못 읽는다. …공평하다면 공평하지.
백문—…거기 있었군, 파수꾼. 미래의 서가는 대가를 다 치른 자만 펼칠 수 있네. 자네가 아직 그 책을 못 여는 건, 아직 자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야.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아직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네오—…바꿀 수 있다. …백문 님은 참, 위로도 사서답게 하시는군요. 책 얘기로.
백문—허허. 다만 하나 일러 두지. 자네가 그토록 아끼는 그 금빛 힘 — 그건 시간을 거스르는 힘이지? 자네 숨에서 아주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나. 그 힘을 마지막에 쓰게 된다면, 부디 '누굴 위해 쓰는지'를 잊지 말게. 시간을 거스르는 자가 목적을 잃으면, 그때부턴 시간이 그를 삼키니까.
네오—…명심하겠습니다. 제가 이 힘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저 아이를,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는 것. 그거 하나만 붙들고 있으면, 시간이 저를 삼켜도 후회는 없습니다.
네오는 표지 없는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언젠가 대가를 다 치르는 날, 저 책의 마지막 장이 무엇을 말할지. 파수꾼은 애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연이의 훈련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저녁 무렵, 연이는 그날 읽어 낸 문장들을 백문에게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열두 장의 종이가 저마다 금빛으로 빛났다. 하루 만에 이룬, 놀라운 진전이었다.
연이—백문 님! 오늘 열두 개나 읽었어요! 이 정도면 이제 언니 계약서도 읽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백문—…둘째 문턱은 통과했네. 아주 훌륭하게. 하지만 언니 계약서를 되살리는 건 셋째 문턱, 되쓰기야. 그리고 되쓰기는… 아까도 봤듯이, 자기 믿음이 여물기 전엔 오히려 위험해. 조금만 더, 참을성을 기르게.
연이—…네. 아까 그 검은 글자가 팔로 기어오르던 거, 아직도 서늘해요. 급하게 하다간 제가 먼저 삼켜지겠죠. …알겠어요. 순서대로. 느끼고, 읽고, 그다음에 되쓰기.
네오—…잘 배웠네. 조급함을 이기는 것도 훈련이야. 넌 오늘 문장 열두 개보다, 그 말 한마디를 배운 게 더 커.
백문—그렇지. 자, 내일은 장소를 옮기세. '기억의 열람실'로. 거기선 문서가 아니라 '기억'을 읽을 걸세. 자네의 잃어버린 시주 — 그 태어난 시(時)의 기억이, 어쩌면 그곳에서 실마리를 보일지도 모르니.
연이—제가 태어난 시의 기억이요? 저도 모르는 걸, 열람실에선 볼 수 있어요?
백문—기억은 지워져도 흔적은 남는 법. 열람실은 그 흔적을 비추는 곳일세. 자네가 태어나던 그 밤, 누가 그 '시'를 빼돌렸는지 — 어쩌면 그 실마리도, 거기서 처음 보게 될 걸세. 마음 단단히 먹게.
백문은 그날 저녁, 오랜만에 손님 몫의 식사를 차렸다. 마르지 않는 찻주전자에서 우린 차, 도서관 정원에서 딴 열매, 그리고 등불 물고기가 떨군 종이 비늘로 부친 얇은 전병. 백 년 만에, 이 도서관 식탁에 세 그릇이 놓였다.
연이—우와, 이거 다 백문 님이 직접 만드신 거예요? 도서관에 부엌도 있었어요?
백문—허허. 백 년을 혼자 살다 보면, 별걸 다 하게 되지. 요리도, 바느질도, 혼잣말도. …오랜만에 누구 먹일 사람이 있으니, 손이 다 떨리는군. 맛은 장담 못 하네. 백 년간 내 입맛만 봐 왔으니.
그때, 접시 위 전병 한 조각이 등불 물고기 냄새를 풍기자 — 맞은편 네오의 두 귀가 또 쫑긋 섰다. 파수꾼의 코가 씰룩, 앞발이 슬금슬금 식탁 위로 올라갔다.
연이—…네오. 또. 방금 또 앞발 올라갔어. 그거 물고기 아니고 전병이야. 이미 죽은, 아니 부쳐진.
네오—…아니야. 나는 그저 이 전병의 신선도를 점검하려던 것뿐이야. 파수꾼은 동료의 식사 안전을 책임지니까.
백문—허허, 파수꾼. 그 전병, 신선도 점검이 필요하면 자네가 다 먹어도 되네. 백 년 만의 손님이 잘 먹는 것만큼 이 늙은이를 기쁘게 하는 건 없으니. …자, 사양 말고.
네오—…그럼, 동료의 안전을 위해 제가 먼저 검식하겠습니다. …흠. …흠흠. …합격입니다. 아주, 합격이에요.
연이—검식은 무슨. 너 지금 세 개째 먹고 있잖아! 나 한 개밖에 못 먹었는데! 백문 님, 파수꾼이 손님 몫까지 검식하고 있어요!
세 사람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백 년간 침묵만 흐르던 도서관 식탁에, 웃음소리가 등불 물고기처럼 떠다녔다. 연이는 문득, 이 낯선 세계에서 처음으로 '식구' 같은 온기를 느꼈다.
연이—…백문 님. 이 도서관, 생각보다 안 외로운 것 같아요. 오늘은요. …우리 위에 올라가서 이기고 나면, 백문 님도 꼭 같이 나가요. 밖에서 이렇게 셋이서, 아니 루나랑 언니까지 다섯이서 밥 먹어요.
백문—…다섯이서라. …허허.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네가 자꾸 이 늙은이 마음에 없던 욕심을 심어. …좋네. 약속하지. 자네가 이기면, 나도 이 문을 나서겠네.
네오—…그럼 그 다섯 그릇 식탁, 반드시 만들어야겠군요. 백문 님 요리 실력이면, 밖에 나가 식당을 차려도 되겠습니다. …전병은 특히.
백문—허허, 파수꾼이 칭찬을 다 하는군. 그래, 오늘은 이만 쉬게. 내일 열람실은… 어쩌면 오늘처럼 웃을 수만은 없는 곳이야. 자네의 지워진 기억을 마주하는 건, 때로 아프거든. 그러니 오늘 밤은 푹, 웃은 채로 잠들게.
둘째 날 밤도, 등불 물고기들은 낮게 헤엄쳤다. 연이는 하루 만에 열두 개의 마음을 읽어 낸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 손으로, 반드시 언니의 얼굴을, 자기 시주를, 백문의 사서인을 되찾겠다고. 잠들기 전, 연이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제20화 · 본뜻의 서가 — 끝. 제21화 「기억의 열람실」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