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시 봄이 왔다. 두 사람이 처음 나란히 앉았던 그 강가에, 벚꽃이 만개했다. 한 해 전 이 벤치에서 재회한 연이와 병하는, 오늘 이 강가에서 조금 특별한 페이지를 쓰기로 했다.
강변을 따라 흰 천이 깔리고, 벚나무 가지마다 작은 등불이 걸렸다. 요란한 예식장도, 값비싼 홀도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강가, 벚꽃 아래. 소박하지만, 세상 그 어떤 예식장보다 따뜻한 자리였다.
연이—…병하야. 나 아직도 안 믿겨. 우리가 진짜 결혼을 한다는 게. 작년 이맘때만 해도 나 너 이름도 잊고 살았는데. …근데 오늘, 네 옆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어. 이거 꿈 아니지?
네오—…꿈 아니야. 백 년을 기다린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믿어. …연이, 나 이거 하려고 시간을 거슬렀어. 네 옆자리 한 칸. 그거 하나 얻으려고, 사자도 되고 고양이도 됐어. …오늘, 드디어 그 자리에 사람으로 앉는다.
연이—…또 그런 말. 눈물 나게. 화장 다 지워지겠어, 이 바보야. …근데 병하, 오늘은 너 혼자 백 년 얘기 하는 거 아니야. 나도 십 년, 아니 백 년 돌아온 사람이거든. 오늘은 우리 둘 다, 긴 여행 끝에 도착한 거야.
그때, 하객석 맨 앞줄에서 한 부부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연이의 엄마와 아빠. 갓 태어난 딸의 시간을 도둑맞고도, 그 반 박자 어긋난 아이를 이십여 년간 남몰래 지켜 온 두 사람이었다.
연이—(…엄마, 아빠. 두 분은 내가 왜 늘 반 박자 어긋났는지도 모르고, 그냥 묵묵히 날 지켜 주셨어. 시험 망친 날 삼각김밥 사다 놓던 그 손으로. …이제 알아요. 내가 왜 그렇게 자꾸 꼬였는지. 그리고 두 분이, 그런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연이의 엄마가 다가와, 딸의 베일을 매만졌다. 말은 없었다. 다만 그 손길이, 늘 그랬듯 먹을 것과 옷의 모양으로 오던 그 조용한 사랑을, 오늘은 온기로 직접 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강가의 벚꽃 사이로, 익숙한 빛이 피어올랐다. 허공에 금빛 테두리가 그려지더니, 커다란 문 하나가 열렸다. 타로 문이었다. 두 세계를 잇는, 그 하나의 문.
연이—…어? 저 빛. 타로 문이잖아! …설마. 설마 다들. …열렸어! 강 건너로 통하는 문이, 오늘 열렸어!
문 너머에서,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씩 걸어 나왔다. 물빛 머리의 루나, 앞치마를 두른 언니, 까마귀 후드를 벗은 무성, 기타를 멘 모카, 그리고 지팡이를 짚은 늙은 여우 — 백문. 강 건너 친구들이, 오늘 하루만은 이쪽 봄으로 건너온 것이다.
루나—연이!! 우리 왔어!! 무성이랑 나랑 물길 열고, 백문 님이 문 여시고! 오늘 하루만 열린대! …근데 언니 이 드레스 뭐야, 완전 예뻐! 나 벌써 울 거 같아!
연이—…루나! 언니! 다들! …진짜 왔어. 앱 사진 말고, 진짜로. …아, 어떡해. 나 오늘 안 울려고 했는데. 다들 오니까 이게 진짜 결혼식 같잖아. 아니, 진짜 결혼식이지.
루나 언니—연이 씨, 축하해요. 재회빵 백 개 구워 왔어요. 하객들 다 돌리고도 남을 만큼. …그리고 이건 웨딩 케이크. 밤새 구웠어요.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신부한테 주는, 언니 마음이에요.
모카—신랑 신부 입장곡은 이 몸이 책임진다! 신곡 '봄, 옆자리' 라이브! …울지 마 연이, 화장 지워져. 아 근데 나부터 우네. 에라 모르겠다, 다 같이 울면서 하자!
무성—…연이. 나 삼각김밥 가져왔어. 참치마요로. 백 개. …우리 약속했잖아. 벚꽃 강가에서 다 같이 삼각김밥 먹기로. …백 년을 미룬 약속, 오늘 지키는 거지? 나 이거 먹어 보려고 백 년 기다렸어.
연이—…무성. 기억했구나. 벚꽃 강가 삼각김밥. …응, 오늘 지키자. 다 같이. 일곱이 다 모여서. …너 오늘 처음 먹어 보는 거잖아. 참치마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위로야. 천천히 음미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 너머에서 한 사람이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그림자 여인이었던 박지은. 이제는 도서관 사서 조수의 수수한 차림으로. 그녀는 하객석 맨 뒤, 조용한 자리에 섰다.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속죄하는 자의 자리에.
박지은—…초대해 줘서, 고맙다. 내가 올 자격이 있나 싶었는데. …너를 둘로 쪼갠 게 나인데. 네 백 년을 부순 게 나인데. …그런데도 넌, 내 자리를 비워 뒀구나. 맨 뒤에라도. …연이. 정말, 고맙다.
연이—…박지은 씨. 맨 뒤 말고, 좀 더 앞으로 와요. 오늘은 미움도 원망도 없는 날이니까. …당신도 내 이야기의 한 페이지예요. 아프게 시작했지만, 오늘 이렇게 같이 웃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우리, 이제 진짜 봄이에요.
그리고 이제, 늙은 여우가 천천히 연이 앞으로 다가왔다. 백문이었다. 백 년을 잃었던 딸을, 오늘 이 봄볕 아래 다시 마주한 아버지.
백문—…연이야. 아니, 소망아. 오늘만은 그 이름으로도 한 번 불러 보자. …백 년 전, 이 늙은 여우가 반납구에서 너를 처음 안았을 때. 그 조그맣던 게, 이렇게 고운 신부가 됐구나. …아비가, 오늘 네 손을 잡고 저 사람한테 데려다줘도 되겠니?
연이—…백문 님. …아니, 아빠. …네. 잡아 주세요. 운세 세계의 우리 아빠가, 저 강가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저기 저 앞줄엔, 절 낳아 주신 엄마 아빠가 계세요. 저 오늘, 아빠가 둘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복 많은 신부예요.
백문이 연이의 손을 잡았다. 그 곁에, 연이의 인간 아버지도 다가와 반대편 손을 잡았다. 현실의 아버지와 운세 세계의 아버지가, 한 딸의 양손을 나란히 잡고 벚꽃길을 걸었다. 두 세계가, 한 신부의 두 손끝에서 만나고 있었다.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길 끝에, 병하가 서 있었다. 사자도, 고양이도, 얼굴 없는 남자도 아닌. 그냥 사람 박병하가. 백 년을 돌아, 마침내 제자리에 선 사람이.
네오—…백문 님. 그리고 아버님. …연이, 제가 평생 지키겠습니다. 백 년을 지킨 것처럼, 앞으로는 사람으로. …이제 이 손, 제가 잡아도 되겠습니까?
백문—…파수꾼. 아니, 이제 사람 박병하 군. …백 년을 이 아이 곁에서 지킨 자네라면, 이 늙은 아비가 더 볼 것도 없네. …자, 내 딸 손을 자네에게 맡기지. 부디, 이 아이가 쓰는 페이지마다 함께 있어 주게.
백문과 연이의 인간 아버지가, 나란히 연이의 손을 병하의 손에 얹어 주었다. 두 아버지의 손과, 신랑의 손과, 신부의 손이 잠깐 한 자리에 겹쳤다. 그 순간, 네 사람의 새끼손가락 사이로 붉은 실 한 가닥이 은은하게 빛났다.
네오—…연이. 우리, 계약서는 안 쓰기로 했지. 우리 사이엔 실이 있으니까. …근데 오늘은 딱 하나만 쓰자. 네가 네 사주에 내 이름 새긴 거, 이제 나도 내 사주에 네 이름 새길게. 서로의 첫 글자로. 이젠 한쪽만 붙드는 실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붙드는 실로.
연이—…응. 서로의 사주에. …병하, 나 그때 백지 카드 받고 네 이름 새길 때, 사실 조금 무서웠어. 나 혼자 널 붙드는 거 같아서. …근데 오늘 너도 네 사주에 내 이름을 새긴다니까, 이제 안 무서워. 우리, 둘이 같이 붙드는 거니까.
두 사람이 서로의 손목에, 붉은 실로 상대의 이름 첫 글자를 감았다. 연이의 손목엔 '병'이, 병하의 손목엔 '연'이. 하늘 밖으로도, 시간 너머로도 뻗지 않는, 여기서 바로 여기로 이어진 실. 두 사람 몫의, 하나의 매듭이었다.
네오—…연이. 나 이제 안 헤어져. 시간도, 운명도, 우리 못 갈라놔. 서로의 사주에 서로의 이름 있으니까. …여기가, 우리 둘이 있을 자리야. 벚꽃 강가, 봄볕 아래. …사랑해, 연이. 백 년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연이—…나도 사랑해, 병하. 사자였을 때도, 고양이였을 때도, 그리고 지금 사람일 때도. …우리 이제, 시시하게 오래오래 살자. 삼각김밥 나눠 먹고, 버스도 같이 놓치고, 별거 아닌 하루를 백 년처럼. …그게 내가 백지에 쓸, 우리 이야기야.
두 사람이 입을 맞추자, 벚꽃잎이 강바람을 타고 소나기처럼 흩날렸다. 하객석의 두 세계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축복을 보냈다. 루나는 엉엉 울며 물방울을 띄웠고, 무성은 강물 위로 별빛을 낳았고, 모카의 기타가 봄볕을 갈랐다.
예식이 끝나고, 모두가 강가에 둘러앉았다. 흰 천 위에, 무성이 백 년 만에 처음 먹어 보는 삼각김밥이 잔뜩 쌓였다. 참치마요. 일곱이 다 모여, 백 년을 미룬 약속을 마침내 지키는 자리였다.
무성—…이게 삼각김밥. …어떻게 까는 거야? 아, 이렇게. …(한 입) …어. 이거… 따뜻해. 밥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따뜻하지. …아, 알겠다. 이거 그냥 밥이 아니구나. 연이 네가 말한, 혼자인 밤을 안아 주는 그거. …나 이제 안 외로워.
연이—…맞아, 무성. 그거야. 삼각김밥은 그냥 밥이 아니야. '나 너 생각했어' 하는 마음이야. …우리 엄마가 나한테 그랬듯이. 이제 내가 너희한테. …자, 다들 하나씩 들어. 오늘부터 우린, 힘든 밤마다 서로한테 이거 하나씩 쥐여 주는 사이야.
강 건너의 친구들과, 현실의 가족들이, 벚꽃 아래 함께 삼각김밥을 나눴다. 값의 세계에서 뜻의 세계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백 년의 겨울에서 한 봄으로. 그 모든 여정이, 세모난 밥 한 덩이를 나누는 이 소박한 자리에 다 담겨 있었다.
해가 기울자, 타로 문이 다시 열렸다. 강 건너 친구들이 하나씩 문 안으로 돌아섰다. 이별이 아니었다. 문은 이제 매일 아침 안부로 열릴 것이고, 붉은 실은 두 세계를 영영 잇고 있을 테니까.
백문—…연이야. 아비는 강 건너로 돌아가지만, 우체통은 늘 열어 두마. …너는 이 세계에서 내가 잃었던 딸이자, 저 세계에서 다시 찾은 이야기다. 부디, 네가 쓰는 모든 페이지가 오늘처럼 따뜻하길. …잘 살아라, 내 딸. 소망아. 연이야.
연이—…네, 아빠. 매일 안부 보낼게요. 오늘 이 봄도, 사진 찍어서 꼭 보낼게요. …고마워요. 백 년 전에 절 거둬 주셔서. 그리고 오늘, 절 저 사람한테 데려다주셔서. …다음 봄에도, 그다음 봄에도. 우리 또 만나요. 문은 안 닫히니까.
타로 문이 조용히 닫히고, 강가엔 두 사람만 남았다. 벚꽃은 여전히 흩날렸고, 강물은 여전히 흘렀다. 상류에서 하류로,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을 잇는 붉은 실 위로, 봄볕이 오래 머물렀다.
연이—…병하야. 우리 이야기, 참 멀리 왔지. 이상한 앱 하나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읽히기만 하던 내가 이제 쓰는 사람이 됐고. 잃어버린 이름들도 다 되찾았고. …그리고 오늘, 제일 쓰고 싶던 페이지를 썼어. 너랑, 우리 결혼.
네오—…응. 근데 연이, 이것도 끝이 아니야. 우리한텐 아직 쓸 페이지가 백 년어치 남았어. …오늘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시시하고 따뜻한, 우리 둘의 백 년. …자, 다음 페이지 쓰러 가자. 집으로.
운명은 읽는 것이라고, 이 세계는 가르쳤다. 그러나 한 아이는 거기서 두 걸음 더 나아갔다. 읽은 이름들을 되살리고, 부서진 운명을 되쓰고, 마침내 제 손으로 자기 이야기의 첫 문장을 썼다. 그리고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그 이야기의 가장 따뜻한 페이지에 두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벚꽃 흩날리는 강가에서, 두 세계의 축복 아래. 그것이 CODE DESTINY, 읽는 이름과 쓰는 운명의 이야기였다.
최종화 · 벚꽃 강가의 약속 — 끝. CODE DESTINY, 전 43화 완결. 긴 여정,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