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빛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작별 인사를 할 여유를 주려는 것처럼, 천천히 하늘의 틈을 넓혀 갔다.
싸움이 끝난 자리에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다들 각자 돌아갈 곳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박지은은 백문의 도서관으로 가기로 했다. 제일 볕이 안 드는 반성의 서가부터, 아주 긴 목록을 하나씩 정리하는 조건이었다.
박지은—연이. 네 인생을 어지럽혀 놓은 것들, 내가 하나씩 다 되돌려 놓을게. 그게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이야.
연이—그것보다요. 언젠가 그 첫 문장, 다시 써 봐요. 이번엔 태우지 말고. 주어를 '나'로 바꿔서요.
박지은—…나를 주어로. 그런 문장, 오랜만이네.
연이—천천히 쓰면 돼요. 저도 제 사주 읽는 데 한참 걸렸는걸요.
박지은—…연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너는, 나를 용서한 거야? 아니면 그냥 봐준 거야?
연이—…아직 용서는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요. 당신이 나한테 한 짓, 하루아침에 다 없던 일이 되진 않아요. …근데 미워하는 마음은 안 가져가기로 했어요. 그거 들고 살면 나만 무거우니까. …용서는, 당신이 도서관에서 하나씩 갚아 가는 걸 보면서 천천히 할게요. 그때까지, 우리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내요.
박지은—…아는 사이. …백 년 만에 처음 들어 보는 관계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그냥 아는 사이. …좋다. 그거면 충분해. 나한텐 과분하고. …고맙다, 연이. 미워할 자격도 없는 나한테, 아는 사이가 되어 줘서.
박지은이 도서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 년을 곧게 세우고 다니던 어깨가, 지금은 조금 굽어 있었다. 하지만 그 굽은 어깨가, 곧게 세웠던 백 년보다 훨씬 사람다워 보였다.
몇 걸음 가던 박지은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결국 아주 작게 고개만 숙였다. 백 년 만에,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감사의 인사였다. 말로는 아직 못 하는, 서툰 목례 하나.
연이—…박지은 씨가 나한테 인사했어. 목례긴 하지만. …백 년간 아무한테도 안 숙이던 고개를, 나한테. …아, 저 사람 진짜 변하는구나.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잘 가요, 박지은 씨. 도서관에서, 당신 첫 문장 꼭 완성해요. 주어를 '나'로.
무성은 자미두수 세계로 돌아가기로 했다. 검게 물든 별들을 하나씩 닦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이었다. 백 년을 오염시킨 하늘을, 이제 제 손으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었다.
무성—연이. …가끔 이름 불러 줘. 대답하는 거, 연습해 둘 테니까.
백 년을 이름 없이 산 그릇이, 이제 이름 불러 달라 청하고 있었다. 그 짧은 부탁 하나에, 무성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가 다 담겨 있었다. 삼키는 자에서, 불리는 자로. 그리고 언젠가는, 부르는 자로.
연이—당연하지. 답장 짧게 하면 네오처럼 잔소리할 거야.
무성—…그건 좀 무섭네.
연이—…무성. 너 진짜 많이 변했다. 처음 봤을 땐 남의 이야기만 삼키던 애였는데, 이제 네 이야기를 쓰잖아. 별들 닦으러 가는 것도, 네가 정한 거고.
무성—…다 네 덕분이야. 네가 이름을 불러 줘서. …근데 연이, 나 이제 안 외로워. 별자리들이 있고, 강 건너 붉은 실로 이어진 네가 있고, 박지은도 도서관에서 볼 거고. …백 년을 혼자 삼키던 애가, 이제 돌려줄 게 이렇게 많아. …삼키는 자가 아니라, 짜는 자가 됐어. 무성(茂盛). 이름값 하네, 드디어.
연이—…이름값. 응, 진짜 우거지게 잘 살아. …그리고 무성, 우리 약속 잊지 마. 언젠가 벚꽃 강가에서 다 같이 삼각김밥 먹기. 너도 꼭 와. 참치마요로 준비해 둘게.
무성—…삼각김밥. 아직 못 먹어 봤는데. …그날 처음 먹어 볼게. 너랑 같이. …기대할게, 그 봄. 백 년 만에 기대라는 걸 해 본다.
무성이 자미두수의 별길로 돌아섰다. 백 년을 검게 물든 채 갇혀 있던 그 하늘로, 이번엔 제 발로, 제 이름으로. 삼키는 그릇이 아니라, 별을 닦는 짜는 자로. 그 뒷모습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연둣빛 실 한 가닥이, 연이에게로 길게 이어져 있었으니까.
연이—…무성, 잘 가. 아니, 다음에 봐. …저 애가 저렇게 씩씩하게 돌아갈 줄이야. 처음 만났을 땐 검은 새였는데. …이름 하나 불러 준 게, 저 애 인생을 저렇게 바꿨어. 말 한마디가, 사람 하나를 살렸어. …나, 앞으로도 이름 많이 불러 줘야지. 세상에 외로운 사람이 줄어들게.
루나가 연이 다리에 매달려 엉엉 울었다.
루나—연이 진짜 또 가는 거야? 또? …아니 근데 이번엔 안 슬퍼. 우리 앱 있잖아. 내가 매일매일 알림 울릴 거니까!
연이—응. 매일 보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을게.
루나—…연이. 나 재성에서 배달만 다니던 겁쟁이였잖아. 물이 무서워서 강도 못 건너던. …근데 너 만나고 물의 아이가 됐어. 세계도 씻고. …그거 다 네 덕분이야. 네가 나 믿어 줘서. …그러니까 자주 와야 돼. 앱으로 말고, 진짜로. 물길 내서 마중 나갈게!
연이—…응, 루나. 네가 물길 내면, 내가 그 위로 달려갈게. 재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너 진짜 멋지게 컸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물의 아이야. 자랑스러워, 우리 루나.
루나—…헤헤. 자랑스럽대. 오늘 일기에 크게 써야지. '연이가 나 자랑스럽대!'라고. …자, 울지 말고 웃으면서 보내자! 다음에 볼 때까지, 다들 씩씩하게!
루나 언니—빵은 아쉬운 대로 사진으로 보내 드릴게요. 아, 다음 신메뉴 이름은 '재회빵'으로 정했어요. 언니가 제일 자신 있는 걸로 구울게요.
루나 언니—…연이 씨. 재성에서 저 지쳐 쓰러져 있을 때, 제 빵 맛있다고 해 준 그 한마디. 그게 저를 살렸어요. 그 말 덕에 회복했고, 그 실 타고 붉은 실 세계까지 갔죠.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렇게 멀리 가더라고요. 저도 앞으로, 빵 사러 오는 손님들한테 그 한마디씩 건넬게요. 연이 씨가 저한테 해 준 것처럼.
연이—…언니. 재성에서 만났을 땐 그렇게 지쳐 있더니, 이제 이렇게 씩씩하고 다정해요. …언니 빵, 진짜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재회빵도, 연이 크림빵도 다 먹으러 갈게요. 루나 데리고. 자주 갈게요.
모카—난 신곡으로 배웅한다! 제목은 '실은 안 끊겨'. 실이 말장난인 거 눈치챘지? 눈치챘지!
연이—응, 첫 소절부터 눈치챘어.
모카—…에이, 재미없어. 좀 모르는 척 좀 해 주지. …아무튼! 그 곡 후렴이 킬링파트야. '끊어도 끊어도 다시 이어져~ 실은 안 끊겨~' 이렇게. 강 건너까지 히트 칠 거니까 기대해. 너 응원 댓글 1빠로 달아.
연이—…응, 1빠로 달게. 근데 모카, 후렴 가사가 좀 오글거리는데? …아니다, 오글거려서 더 좋아. 딱 너답다. …신곡 나오면 병하랑 같이 들을게. 강 건너 우리 밴드 노래, 이쪽 세계에서도 히트시켜 볼게.
백문—자네 서가는 늘 볕 드는 칸에 둘 걸세. 언제든 열람하러 오게. 대출 기한은 평생으로 해 두었으니.
모카—…야, 연이. 나 진짜 너 만나서 인생 폈다. 식상의 섬에서 앙코르도 못 뛰던 무명 수달이었는데, 이제 세계를 씻은 밴드 '끊을 수 없는 실'의 화력 담당이잖아. …다음 콘서트 1열 표 비워 둘게. 꼭 와. 강 건너서라도.
연이—…응, 모카. 신곡 나오면 첫 조회수 무조건 나야. 알림 설정 다 해 놨어. …너 능글맞은 거, 나 은근 좋아했어. 위기 때마다 긴장 풀어 줬잖아. 고마웠어, 진심으로.
모카—…어유, 갑자기 진지하게 고맙다니까 나까지 찡하잖아. …됐어, 울지 말고. 우린 앱으로 매일 볼 거니까 작별도 아니야. …자, 백문 영감. 마지막 인사 하셔. 제일 오래 산 양반이 폼 나게 마무리해야지.
백문—…허허. 이 늙은 여우가 백 년 만에 서고 밖으로 나온 것도, 백 년을 잃었던 딸을 되찾은 것도, 다 자네 덕이었네. …연이야. 자네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읽는 아이였어. 그게 사서인 나도 백 년을 못 배운 거였지. …강 건너로 돌아가도, 자네는 이 늙은 여우의 하나뿐인 딸일세. 우체통으로 매일 안부 전하마. 우리 도서관의 제일 좋은 독자이자, 이 아비의 제일 자랑스러운 이야기에게.
연이—…백문 님, 그 말 진짜 오래 기억할게요.
동료들이 하나씩, 연이를 안아 주었다. 루나는 엉엉 울며 매달렸고, 언니는 다정하게 등을 토닥였고, 무성은 어색하게 손만 잡았고, 모카는 요란하게 헤드록을 걸었고, 백문은 그저 오래 바라봐 주었다. 재성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함께 걸어온 길이 그 포옹들 안에 다 담겨 있었다.
연이—…다들, 진짜 고마웠어. 나 혼자였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 …루나 물길, 언니 등불, 무성 물, 모카 불, 백문 님 서가. 다 없었으면 나 재성에서 청토끼한테 벌써 졌을걸. …우리, 진짜 좋은 팀이었어. 아니, 지금도 좋은 팀이고. 강 건너도 실은 안 끊기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이는 네오 앞에 섰다.
시간의 빛이 사자의 몸을 감싸자, 금빛 갈기가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은빛 머리카락과 사람의 손, 곧은 어깨가 천천히 돋아났다.
별무늬가 새겨진 감청색 코트를 입은 은발의 청년이 서 있었다. 백 년 동안 갈기 뒤에 숨겨 두었던 사람의 얼굴이, 이제야 드러났다.
모카—…와, 파수꾼 이렇게 생겼었어? 사자 가죽 벗으니까 완전 미남이잖아. …야, 연이. 너 이런 미남을 그 고생길 내내 옆에 두고도 몰랐어?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루나—…우와, 네오 아저씨 사람 됐다! 은발이야! …근데 좀 아쉽다. 나 사자 네오도 좋아했는데. 등이 넓어서 타고 다니기 좋았거든. …아, 농담이야! 사람 된 거 축하해요!
무성—…파수꾼. 사람 얼굴이 되니까, 백 년 전 검은 비 속 그 얼굴 없는 남자랑 겹쳐 보여. …아, 이제 알겠다. 그때 그 잔상이 이 얼굴이었구나. 드디어 얼굴을 찾았네. 축하해. 잃어버린 반쪽이랑, 이제 하나가 됐어.
네오—…고마워, 다들. …백 년을 이 얼굴 숨기고 살았는데. 이제 감출 이유가 없네. …연이 곁에서, 이 얼굴로 살 거야. 무뚝뚝한 사자 말고, 웃을 줄 아는 사람으로.
연이—…진짜, 사람이었구나. 이게 원래 너였어.
연이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 사람의 뺨에 닿았다. 사자의 갈기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였다. 백 년을 무뚝뚝한 앞발로만 만났던 사람의, 진짜 얼굴이었다.
연이—…따뜻해. 사람 얼굴이야. …병하, 너 웃을 수 있구나. 사자일 땐 웃는 법을 몰라서 늘 무뚝뚝했다며. 근데 지금 웃고 있어. 진짜 예쁘게. …나 이 얼굴, 백 년을 못 봤던 거네. 미래의 나는 봤을 텐데, 지금의 나는 처음이야.
네오—…응. 이제 실컷 봐. 앞으로 매일 볼 거니까. …사람 얼굴로 웃는 거, 백 년 만이야. 너 앞에서 처음으로 마음껏 웃네. 사자 입으론 못 하던 걸, 이제 할 수 있어. …고마워, 연이. 나를 사람으로 돌려보내 줘서. 네가 온전해진 덕분이야.
연이—…이 바보. 그거 내가 한 거 아니라 네가 백 년 버틴 거잖아. …됐어, 서로 고맙다고 하다 날 새겠다. …자,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대가를 다 치렀다며. 좋은 얘기라며. 빨리 말해 봐. 심장 쫄깃해.
네오—응. 이제 대가를 다 치렀어. 원래 인간은 제 시간이 아닌 곳에 오래 못 머물러. 그래서 말인데.
연이—그래서? 잠깐, 그래서 뭔데. 좋은 얘기야, 나쁜 얘기야?
네오—겁먹지 마. 나쁜 얘기 아니야.
네오—네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네가 사는 그 하늘 아래로. 사실 처음부터, 거기가 내가 돌아갈 자리였거든.
연이—…뭐? 내가 사는 곳으로 온다고? …나쁜 얘기인 줄 알고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너 아까 그 담담한 눈빛으로 사람 겁줘 놓고! …아, 진짜. 화내야 되는데 너무 좋아서 화가 안 나. 이 반칙쟁이.
네오—…미안. 겁줄 생각은 아니었어. 나도 확실치 않았거든, 저 문이 어디로 이어질지. …근데 네 사주에 내 이름이 있으니까, 시간이 나를 네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더라. 이름을 새긴다는 게, 이런 거였어.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 되는 거.
연이—…그럼 우리, 이제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사는 거네. 반 걸음 뒤 말고, 사자 가죽 말고, 그냥 사람 박병하로. 내 옆에. …백 년 걸렸다. 너 나 옆에 오는 데. …근데 왔네. 결국 왔어.
연이—…거기, 내 옆자리 말하는 거지?
네오—응. 반 걸음 떨어져서 말고, 바로 옆에서.
연이—…바로 옆에서. …백 년을 반 걸음 뒤에서 지키기만 하더니. 이제 옆에 오는 거야? …아, 진짜. 백 년을 무뚝뚝한 사자로, 파수꾼으로. 이제야 사람으로 내 옆에. …좋아. 가자, 우리 집으로. 벚꽃 강가 약속도 지키고, 시시하게 오래오래 살자.
네오—…응. 시시하게, 오래오래. 그 말 참 좋다. …백 년을 대단한 것만 지키며 살았는데, 이제 시시한 걸 지키며 살게. 네 웃음이랑, 삼각김밥이랑, 벤치 옆자리 같은. …그게 내가 진짜 지키고 싶던 거였어. 처음부터.
뒤에서 동료들이 손을 흔들었다. 루나는 엉엉 울면서도 씩씩하게, 언니는 다정하게, 무성은 어색하게, 모카는 요란하게, 백문은 잔잔하게. 그리고 저만치서 박지은도, 아주 작게 손을 들어 보였다. 작별이 아니라, '다음에 또'라는 인사였다.
타로 문이 열렸다. 이번엔 두 사람 몫의, 하나의 문이었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거창한 마법도, 요란한 팡파르도 없었다. 그저 여느 때와 똑같은, 아주 평범한 아침이었다. 커튼 사이로 든 봄볕, 머리맡의 폰, 어제 미뤄 둔 빨래. …하지만 그 평범함이, 연이가 온 우주를 걸고 되찾은 것이었다. 남이 정해 준 안전한 평범이 아니라, 제 손으로 싸워 얻은 평범.
세상은 하나도 안 달라진 것 같았다. 여전히 버스는 가끔 놓칠 것이고, 삼각김밥 속은 가끔 틀릴 것이다. 하지만 연이는 이제 안다. 그 사소한 불운들 사이로 어떻게 온기를 심는지, 넘어진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연이의 방이었다. 낯익은 얼룩, 낯익은 커튼. 폰의 달력은 아주 평범한 새 학기의 어느 날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이—…돌아왔다. 내 자취방. 삼각김밥 냄새 나는 이 좁은 방. …근데 이상해. 떠날 땐 이 방이 답답했는데, 돌아오니까 세상에서 제일 아늑해. …그 여행이 다 꿈이었나? …아니.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 안 꿈이야. 다 진짜였어. 병하도, 다들도.
연이가 제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았다. 봄볕에 붉은 실 한 가닥이 가늘게 빛났다. 이제는 하늘 밖으로 뻗지 않고, 이 방 어딘가로, 아주 가까운 곳으로 이어진 실이었다. 그 실 끝에, 사주에 새긴 아홉 번째 글자가 조용히 뛰고 있었다.
연이—…병하도 이 세계 어딘가에 있겠구나. 이 실 끝에. …찾아가야지. 오늘, 그 벤치로. 내가 제일 좋아하던 그 봄볕 벤치로. …왠지 거기 있을 것 같아. 반 걸음 옆자리 비워 두고.
연이는 서둘러 삼각김밥 두 개를 챙겼다. 하나는 자기 몫, 하나는 '오늘 만날 사람' 몫. 미래에 병하한테 건넸던 그 온기가, 백 년을 돌아 이번엔 과거의 연이 손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연이—…참치마요 두 개. 오늘은 내가 사기로 했으니까. …기다려, 병하. 이번엔 내가 갈게. 백 년 전엔 네가 나한테 왔지만, 오늘은 내가 너한테. …우리 실 끝에, 네가 있겠지. 봄볕 벤치에서.
머리맡의 폰이 아침부터 부지런히 울렸다. 강 건너에서 온 알림들이었다.
[ Code Destiny ] 루나: 굿모닝! 오늘 재회빵 1호 나왔어! (사진) 언니가 연이 몫 따로 구웠대. 식기 전에 마음으로 먹어!
[ Code Destiny ] 백문: 신착 도서 알림. 「숙요의 밤, 다시 잇는 실」. 저자 근황란에 청토끼가 반성 서가 청소 중이라 적혀 있네. 필체가 날마다 얌전해지고 있어.
[ Code Destiny ] 무성: …연이. (첫 알림 연습이다. 잘 도착했나?)
[ Code Destiny ] 모카: 신곡 티저 떴다! 링크! 첫 조회수 무조건 너다!
연이—…다들 잘 지내네. 강 건너에서도, 별 위에서도.
[ Code Destiny ] 언니: 연이 씨, 재회빵 반응 폭발이에요! 손님들이 이름 예쁘다고 매일 물어봐요. 다음엔 '연이 크림빵'도 낼까 봐요. 부끄러우면 말하고요~
[ Code Destiny ] 박지은: (반성 서가 3층에서) …연이. 첫 문장, 아직 못 썼어. 근데 어제 두 글자는 썼다. '나는'. 거기서 한참 멈췄지만. …천천히 쓰라고 했으니까, 천천히 쓸게. 답장은 안 해도 돼.
연이—…박지은 씨가 '나는' 두 글자를 썼구나. …그거 엄청난 거야. 백 년을 남 얘기만 쓰던 사람이, 드디어 자기를 주어로. …답장 안 해도 된다지만, 이건 답장해야지. '잘 쓰고 있어요. 다음 글자도 기대할게요'라고.
연이는 박지은에게도 답장을 보냈다. 백 년 원한의 여자에게 보내는, 짧지만 따뜻한 응원이었다. 미움은 두고 왔지만, 아는 사이의 안부는 이렇게 오갈 수 있었다. 그게 연이가 택한, 벌하되 구하는 방식이었다.
연이는 하나하나 답장을 보냈다. 이번엔 전부, 세 글자보다 훨씬 길게.
[ Code Destiny ] 무성: (도착했구나. 답장이 다섯 줄이나 돼. 읽는 데 한참 걸렸어. …좋더라.)
연이—…무성이 '좋더라'래. …백 년간 삼키기만 하던 애가, 이제 남의 답장 받고 '좋더라' 하는 거. …그거 되게 큰 거야. 무성이 진짜 사람처럼 살고 있어. …아, 다들 이렇게 각자 자리에서 잘 사는 거 보니까 마음이 놓인다. 내 여행이, 헛되지 않았어.
연이는 답장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였다. 강 건너 친구들에게 세 글자짜리 무성의 답장이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 이제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길게, 더 따뜻하게 썼다. 실은 이렇게, 매일 아침 안부로 이어지고 있었다.
캠퍼스의 계절은 봄이었다. 연이는 이제 계단에서 넘어지지 않았고,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 가끔은 일부러 한 정거장을 걸었다. 세상을 읽는 재미를 알아 버려서.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의 인연이 어렴풋이 보였다. 다투는 연인의 실이 사실은 아직 굵다는 것도, 오늘 처음 만난 두 사람 사이에 가느다란 새 실이 돋는 것도. 붉은 실의 세계에서 배운 눈은, 현실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연이는 그 눈으로,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게 슬쩍 다가가 삼각김밥을 건네곤 했다. 미래에 병하한테 그랬듯이. 어쩌면 그 사소한 나눔 하나가, 또 누군가의 텅 빈 카드에 첫 획을 그어 줄지도 몰랐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그렇게 온기를 남기면서.
연이—…나 이제 알아. 운이 좋아진 게 아니라, 운을 읽게 된 거라는 거. …그리고 남의 운에 좋은 획 하나 그어 주는 재미도. 세상이 이렇게 재밌는 거였구나. 예전엔 왜 몰랐지.
병하는 캠퍼스 생활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처음엔 학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어색했지만, 이제는 연이 옆에서 강의 노트를 받아 적고, 학식 앞에서 메뉴를 고르며 십 분씩 고민하는 평범한 청년이 되어 갔다. 백 년 파수꾼의 흔적은, 이따금 위험한 걸 보면 반사적으로 연이 앞을 막아서는 습관에만 남아 있었다.
연이—…병하야, 그거 그냥 자전거야. 위험한 거 아니야. 앞 안 막아도 돼. …너 아직도 뭐만 지나가면 나 지키려고 앞을 막더라. 백 년 습관이 어디 가겠냐만은. …근데 뭐, 그거 좀 든든하긴 해. 세상에서 제일 과보호하는 남자친구네.
네오—…미안. 자꾸 몸이 먼저 움직여. 백 년을 그렇게 살아서. …근데 이젠 지키는 게 아니라, 그냥 옆에 있는 거로 바꿔 볼게. 지키는 것보다, 나란히 있는 게 더 어렵더라. 근데 그게 더 좋아.
운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다만 운이 어디로 흐르는지 읽을 수 있게 됐을 뿐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리고 벤치. 모든 게 시작되기 전부터, 연이가 제일 좋아하던 자리였다.
봄이면 이 벤치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왜인지도 모른 채, 벚꽃을 보며 늘 무언가를 그리워했다. 이제 연이는 그 이유를 안다. 지워진 미래 어딘가에서, 이 벤치가 누군가와의 약속이 담긴 자리였다는 걸. 몸이 잊지 못한 그리움이, 봄마다 눈물이 되어 흘렀던 것이다.
연이—…이 벤치, 나 진짜 좋아했는데.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이제 알겠어. 여기가 우리 약속의 자리였구나. 미래의 나랑 병하가, 벚꽃 필 때마다 만나기로 한. …그래서 나도 모르게 봄마다 여기 온 거야. 발이 약속을 기억해서.
연이—…오늘도,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해. 근데 이번엔 슬퍼서가 아니야. …뭔가, 아주 오래 기다린 게 드디어 오는 느낌. …저기, 벤치에 누가 앉아 있어. 봄볕 속에. …왜, 심장이 이렇게 뛰지.
그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에 곧은 등. 그리고 반 걸음쯤 비워 둔 옆자리.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심장이 이 등을 먼저 알아보는 걸까.
연이의 발이 저절로 멈췄다. 머리는 '모르는 사람'이라는데, 새끼손가락의 붉은 실은 이미 그 등을 향해 팽팽히 당겨지고 있었다. 봄마다 이 벤치에서 이유 없이 흘리던 눈물이, 오늘 비로소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연이—…(어? 나 왜 발이 멈췄지. …저 사람, 처음 보는데. 근데 심장이 막 뛰어. …저 은발. 저 곧은 등. 반 걸음 비워 둔 옆자리. …설마.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호박색 눈이 백 년 치의 인사를 담은 채, 부드럽게 휘었다.
네오—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하면 좀 이상하려나.
연이—…박병하.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몸이 먼저 알아본 이름이었다. 기억에는 없어도, 마음 제일 깊은 곳에 새겨져 있던 이름.
연이—…어떻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름이 저절로 나와. …아, 맞다. 우리 실이 기억하는 거지. 시간을 거슬러 이어진 실. 머리는 잊어도, 실은 안 잊었어. …병하야. 진짜 병하야. 이번엔 사자도, 고양이도 아니고. 그냥 사람 박병하야.
봄볕이 두 사람 사이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십 년, 아니 백 년을 돌아온 두 사람이, 마침내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나란히 있었다. 시간을 거스르고, 세계를 건너고, 운명을 되쓰고서야 겨우 도착한 이 평범한 봄날 벤치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네오—…울지 마. 아니, 울어도 돼. 나도 지금 눈물 참는 중이거든. …백 년을 이 순간 하나 보려고 버텼어. 네가 사람 박병하 이름을 불러 주는 이 순간. …이제 안 헤어져. 시간도, 운명도, 우리 못 갈라놔. 네 사주에 내 이름 있으니까. 여기가, 내가 있을 자리야.
네오—응. 이제야 이렇게 마주 앉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연이—…나 삼각김밥 두 개 사 왔어. 하나는 네 거. …이거, 미래에 내가 너한테 준 거랑 같은 거래. 참치마요. 세상 구할 맛. …자, 먹어. 이번엔 과거의 내가, 사람 박병하한테 주는 거야. 백 년 만에, 드디어 되돌려주는 거.
네오—…이거야. 이 삼각김밥이. …백 년 전, 비 오는 날 벤치에서 네가 나한테 준 그거. 그거 하나에, 나 백 년을 걸었어. …고마워, 연이. 이번엔 사람 손으로 받네. 앞발 말고. …이거 먹으면, 우리 진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번엔 옆에서.
연이—…응. 처음부터 다시. …근데 병하, 우리 사실 처음이 아니잖아. 미래에서 이미 한 번, 지금 여기서 또 한 번. …우리 몇 번을 만나도, 결국 이렇게 서로한테 오네. 손 하나 맞잡고. …이게 인연인가 봐. 시간도 못 끊는.
연이—기다린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름도 모르는 채로, 십 년 넘게.
네오—그동안 답장이 너무 짧았지. 앞으로는 옆에서 다 얘기할게. 못 한 얘기가 진짜 많았거든.
연이—…응. 백 년 치 얘기, 천천히 다 들려줘. 미래에 우리가 어땠는지, 도서관 옆자리에서 무슨 얘기 했는지, 벚꽃 강가에서 무슨 약속 했는지. …나 기억 없으니까, 네가 다 채워 줘. 우리 둘이 같이, 그 기억 다시 쓰자. 처음부터.
네오—…그래. 다시 쓰자. 이번엔 지워지지 않게. …근데 연이, 하나만. 옛날 기억 못 채워도 괜찮아. 지금부터 새로 만들면 되니까. 미래의 우리도 좋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우리가 나는 더 좋아. …여기가, 진짜 시작이야. 우리 이야기의 첫 장.
두 사람이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백 년을 돌아, 시간을 거스르고, 세계를 건너서야 겨우 도착한 그 나란함이. 이제는 아무것도 그 사이를 갈라놓지 못했다. 반 걸음의 거리도, 사자의 갈기도, 지워진 기억도. 그저, 나란히였다.
연이—…있잖아, 병하. 나 이 순간이 진짜 오래 안 잊힐 것 같아. 벚꽃도 아직 안 폈는데, 벌써 봄 같아. …이게 내가 백지에 쓴 첫 문장인가 봐. '그 사람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게 다인데, 세상이 하나도 안 외로웠다.' …박지은 씨 첫 문장이랑 비슷한데, 우린 주어가 '우리'네.
연이는 웃으면서 울었고, 울면서 그 옆자리에 앉았다. 새끼손가락 끝에서 붉은 실이 봄볕에 반짝였다. 이제는 하늘 밖으로 뻗지 않는, 여기서 바로 여기로 이어진 실이었다.
그 후로, 봄은 오래 머물렀다.
박병하는 현실이 처음이었다. 사자로도, 흰 고양이로도 살아 봤지만, 사람으로 버스를 타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교통카드 단말기 앞에서 그는 오래 굳어 있었다. 삑. 삑삑. 「다시 대 주세요.」 연이가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연이—봐, 이 세계도 튜토리얼 없이 냅다 던져 주지? 카드는 이렇게 한 번만. 급하게 여러 번 대면 오히려 안 찍혀.
네오—…네가 처음 이 세계 튜토리얼 없다고 불평하던 게 이거였구나. 이제야 좀 이해가 된다.
연이—거봐. 인간계도 만만치 않지? 대신 여긴 가끔 환불 버튼이 있어. 아주 가끔.
편의점 삼각김밥을 처음 먹던 날, 그는 비닐을 뜯다 세 개를 연달아 터뜨렸다. 네 번째에 겨우 성공하고는, 명반을 정복한 전략가의 얼굴을 했다.
네오—…이 포장, 설계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군. 열두 궁의 명반보다 어렵다.
연이—그건 인류 공통의 숙제야. 아직 아무도 정답을 못 냈어.
편의점 알바가 그를 힐끔거렸다. 은발에 감청색 코트를 입은 미남이 비닐 포장 하나에 열두 궁을 정복한 전략가의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연이—…병하야, 사람들이 너 쳐다봐. 비닐 하나에 그렇게 비장한 표정 짓는 사람은 처음 볼 거야. …그리고 너 너무 잘생겼어. 사자일 땐 몰랐는데, 사람 되니까 길에서 다들 돌아봐. 나 지금 좀 어깨 으쓱하다.
네오—…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근데 연이, 사람들이 왜 이 삼각김밥을 매일 사 먹는지 알겠어. 이거, 열두 궁 정복보다 뿌듯해. 내 손으로 비닐 뜯어서, 내가 먹는 거. …별거 아닌데 왜 이렇게 벅차지.
연이—…그게 사는 거야, 병하. 별거 아닌 걸 별거로 만드는 거. …너 백 년을 파수꾼으로, 대단한 걸 지키며 살았잖아. 이제 별거 아닌 걸 즐기면서 살아. 편의점 비닐 뜯고, 버스 놓치고, 나랑 벤치에 앉고. 그런 시시한 걸로.
네오—…시시한 게 제일 좋아. 백 년 만에 알았어. …근데 이 참치마요, 진짜 세상을 구할 맛이네. 네가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겠다.
고양이 시절 버릇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벤치에 앉으면 그는 여전히 반 걸음쯤 떨어져 앉으려 했다. 파수꾼이 백 년을 지켜 온, 오래된 거리였다.
연이—거기 반 걸음. 이제 그거 안 해도 돼.
연이가 그 반 걸음을 손끝으로 톡 당겼다. 파수꾼이 그토록 오래 지켜 온 간격이, 처음으로 사라졌다. 나란히. 이제는 그냥, 나란히.
네오—…이 거리는 익숙해지는 데 좀 걸리겠어. 아주 좋은 쪽으로.
연이—…천천히 익숙해져. 우리 시간 많으니까. …백 년을 반 걸음 뒤에서 지켰으니, 앞으로 백 년은 옆에서 나란히 걷자. 그럼 얼추 계산 맞지?
네오—…계산이 안 맞아. 백 년 뒤에서 지킨 값이 얼만데. 옆에서 천 년은 걸어야 겨우 갚지. …그러니까 오래 살자, 연이. 갚을 게 많아서, 나 오래 살아야겠어.
연이—…천 년? 야, 나 사람이라 백 년도 못 살아. …됐어, 계산 그만해. 그냥 하루하루 옆에 있으면 돼. 시시하게, 봄볕에 나란히 앉아서. 그게 제일 값진 거잖아. 너도 이제 알지?
네오—…응. 이제 알아. 세상에서 제일 값진 건, 제일 시시한 거라는 거. …네 옆에서, 그 시시한 걸 매일 배울게. 백 년 파수꾼이, 이제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박병하의 인간 적응기는 매일이 소소한 사건이었다. 자동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습관,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을 보며 진지하게 걱정하는 얼굴, 편의점 전자레인지 앞에서 데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십 분을 고민하는 모습. 파수꾼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한번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한 모금 마시더니, '이 검은 물은 재성의 검은 강 맛이 난다'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연이는 커피를 뿜을 뻔했다. 또 한번은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이건 십이궁 배치보다 복잡하다'고 진지하게 감탄했다.
연이—…병하야, 아메리카노는 그냥 쓴 커피야. 검은 강 아니고. …그리고 지하철 노선도가 어렵긴 하지. 나도 아직 헷갈려. …아, 진짜 너랑 다니면 하루가 개그야. 백 년 파수꾼이 아메리카노에 심각해지고, 노선도에 감탄하고. 나 요즘 웃겨 죽겠어.
네오—…웃으라고 하는 건 아닌데, 네가 웃으니까 나도 좋네. …이 세계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매일 새로워. 백 년을 다 아는 채로 살다가, 이제 하나도 모르는 채로 사니까. …근데 이 '모른다'는 게, 이렇게 설레는 거였구나. 몰라서 좋은 것도 있네.
연이—…거봐. 모르는 게 나쁜 게 아니야. 배울 게 많다는 거지. …앞으로 우리, 이 세계 하나씩 같이 배우자. 아메리카노도, 노선도도, 전자레인지도. 천천히, 재밌게. 그게 우리 이야기 쓰는 거야.
연이—…병하야, 그건 그냥 전자레인지야. 명반 아니야. 버튼 하나 누르면 돼. …근데 데울지 말지를 십 분을 고민하는 사람은 처음 봐. …너 명반에선 그렇게 냉철했으면서, 왜 편의점만 오면 이렇게 어리바리해?
네오—…명반은 규칙이 있었어. 오행 상생 상극, 십이궁 배치. 다 계산이 됐지. …근데 이 세계는 규칙이 없어. 데울지 말지, 정답도 없고. …근데 이상하게, 규칙 없는 게 더 좋아. 매일이 새로우니까. 백 년 만에, 내일이 궁금해.
연이—…거봐. 규칙 없는 게 사는 맛이야. …자, 오늘은 벚꽃 강가 가자. 우리 백 년 미룬 약속. 참치마요 두 개 사서. 이번엔 내가 사기로 했잖아.
네오—…응. 드디어, 그 약속. …백 년을 봄마다 혼자 갔던 그 강가에, 오늘은 너랑 같이 가네. …가자, 연이. 우리 이야기의, 제일 좋은 페이지 쓰러.
두 세계를 잇는 우체통은 여전히 부지런했다. 루나는 영상통화로 매일 언니의 신메뉴를 자랑했고, 모카는 신곡을, 백문은 신착 도서를 보냈다.
병하도 그 앱에 적응해 갔다. 처음엔 '이 작은 판에 어떻게 세계가 담기냐'며 신기해하더니, 이제는 무성과 밤늦게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백 년 전 같은 자에게 부서진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회복을 응원하는 친구였다.
[ Code Destiny ] 무성 → 병하: 오늘 별 세 개 닦았다. 손이 아직 서툴러서 하나는 살짝 흠집 냈어. 너는 삼각김밥 잘 뜯게 됐냐.
[ Code Destiny ] 병하 → 무성: 아직 세 번에 한 번은 터뜨린다. 우리 둘 다, 사람 사는 거 배우는 중이네. 천천히 하자.
연이—…병하랑 무성이 문자 친구가 됐어. …백 년 전 둘 다 박지은한테 부서졌던 사인데, 이제 서로 응원하네. …이런 게 좋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 알아보고, 서로 일으켜 주는 거. 세상이 이렇게 이어지는 거구나.
강 건너 세계도 천천히 회복되어 갔다. 재성의 섬에서는 청토끼가 반성 서가를 청소하며 빼앗았던 이름들을 하나씩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도서관에서는 박지은이 찢긴 계약서를 잇는 법을 백문에게 배웠다. 자미두수의 하늘에서는 무성과 별자리들이 검게 물든 별을 닦았다.
박지은이 부순 세상이, 연이가 심은 다정함의 씨앗을 따라 조금씩 다시 자라났다. 한 사람의 미움이 백 년을 얼렸던 세계가, 한 사람의 포옹으로 다시 봄을 맞고 있었다. 되쓰기란, 그렇게 오래 걸리지만 확실한 일이었다.
연이—…다들 천천히, 각자 자리에서 되쓰고 있어. 하루아침에 안 되는 거 알아. 백 년 걸려 부서진 거, 되살리는 데도 오래 걸리겠지. …근데 방향이 맞으니까 괜찮아. 부수는 쪽 말고, 잇는 쪽으로 다들 가고 있으니까. 언젠간 다 회복될 거야.
[ Code Destiny ] 무성: 오늘은 일곱 줄 썼다. 점점 길어진다. …이런 게 안부라는 거, 이제 좀 알 것 같아.
[ Code Destiny ] 청토끼: (반성 서가 청소 중) …그, 빵집에 사과 편지 부쳤다. 답장은 기대 안 해. 그냥, 처음으로 원본으로 썼어.
[ Code Destiny ] 루나: 연이! 대박 소식! 무성이랑 나랑 물길 합쳐서 재성이랑 자미두수 세계 연결했어! 이제 별들이 물길로 서로 놀러 다녀! 무성이 별 닦다가 나한테 물총 쐈잖아. 걔 요즘 장난도 쳐!
[ Code Destiny ] 무성: (루나가 과장했다. 물총 아니고 실수였다. …근데 재밌긴 했다. 장난이라는 거, 처음 쳐 봤어. 백 년간 못 해 본 걸, 요즘 하나씩 해 보는 중이야.)
[ Code Destiny ] 박지은: (도서관에서) …강 건너 연이가, 앱으로 사탕 사진을 보냈다. 내가 시간을 훔쳐 둘로 쪼갰던 그 아이가. 원망 대신 사탕을, 그리고 '백문 님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나 그거 받고 서가 뒤에서 한참 울었어. 이런 게 순한 마음이구나. 나도 배우는 중이야, 천천히.
연이—…다들. 각자 자리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구나. 무성은 장난도 치고, 박지은은 사탕 받고 울고, 청토끼는 사과 편지 쓰고. …다 빼앗겼던 걸 되찾았어. 이름도, 마음도, 순함도. …나 진짜, 이 여행 하길 잘했다.
강 건너의 모두가, 각자의 봄을 맞고 있었다. 빼앗겼던 이름을 되찾은 채로.
'이상한 앱이 깔렸다'로 시작한 이야기였다.
그 앱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이제 연이는 안다. 그건 저주가 아니라, 강 건너 친구들이 매일 아침 보내오는 안부의 문이라는 걸.
돌이켜 보면, 처음 그 앱이 깔렸을 땐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일 같았다. 로그인도 안 되고, 환불도 안 되고, 자꾸 이상한 세계로 끌고 가는 버그투성이 앱. …근데 그 버그투성이 앱이, 연이에게 병하를 데려다줬다. 무성을, 루나를, 언니를, 백문을, 모카를.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연이—…제일 재수 없던 일이, 알고 보니 제일 좋은 일이었어. …신님이 그랬지. 가장 나쁜 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이 이상한 앱이,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네. 지워지지 말고, 평생 이렇게 안부나 실어 날라 줘.
봄볕이 벤치 위로 길게 드리웠다. 한 아이가 흙투성이로 넘어지고 일어서며 써 내려간 이야기가, 이제 가장 평범하고 가장 따뜻한 한 페이지에 도착해 있었다. 남이 써 준 게 아니라, 제 손으로 쓴 페이지였다.
그해 봄, 벚꽃이 흩날리는 강가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삼각김밥을 먹었다. 백 년을 미룬 약속이었다. 병하는 여전히 비닐을 한 번에 못 뜯었고, 연이는 그걸 보며 웃었다. 참치마요 두 개. 세상을 구할 맛이라던 그것을, 드디어 둘이 함께.
네오—…드디어 지켰네. 벚꽃 강가 약속. …백 년을 혼자 오던 이 자리에, 오늘은 네가 있어. …연이, 나 지금 세상 다 가진 기분이야. 명반도 곳간도 아니고, 이 조그만 하나로.
연이—…나도. 세상 다 가진 기분. …병하야, 우리 이거 매년 하자. 봄마다 이 강가에서, 삼각김밥 두 개. 백 살까지. …아니, 네가 천 년 살고 싶다고 했으니까, 벚꽃 필 때마다 천 번. 어때?
네오—…천 번. 좋아. 계약서 쓸까? …농담이야. 우리 사이엔 계약서 필요 없지. 실이 있으니까. …이 붉은 실 하나면, 천 번이 아니라 영원도 약속돼. 시간도 못 끊는 실이잖아.
벚꽃 한 잎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위로 내려앉았다. 새끼손가락을 잇는 붉은 실이 봄볕에 반짝였다. 하늘 밖으로도, 시간 너머로도 뻗지 않는, 여기서 바로 여기로 이어진 실.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실이었다.
연이—운명은 읽는 거라고 배웠어. 그리고 오늘부터의 운명은, 내가 직접 쓰는 거야.
재성의 섬에서 꽃돼지로 눈을 뜬 그날부터, 여기까지. 넘어지고, 울고, 무서웠던 모든 페이지가 모여 오늘의 연이가 되었다. 남이 그려 준 안전한 그림을 사양하고, 제 손으로 고른 이 봄볕 벤치. 세상 그 무엇과도 안 바꿀, 온전히 자기만의 페이지였다.
네오—…무슨 생각 그렇게 해?
연이—…응, 그냥. 우리 이야기가 참 멀리 왔다고. 이상한 앱 하나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그리고 앞으로 쓸 페이지가 아직 잔뜩 남았다고. 신난다는 생각. …자, 병하. 다음 페이지 쓰러 가자. 오늘은 뭐부터 쓸까?
연이는 폰을 들어, 벤치의 봄볕과 옆자리의 사람을 한 장에 담았다. 그리고 강 건너로 사진을 보냈다.
연이—「나 잘 지내. 너희도 잘 지내지?」
답장은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강 건너와 별 위에서, 각자의 봄을 사는 친구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 Code Destiny ] 루나: 완전 잘 지내! 근데 옆에 그 사람 누구야?! 설마?! 자세한 얘기 당장!!!
[ Code Destiny ] 언니: 어머, 두 분 잘 어울리세요. 재회빵 두 개 구워 놓을게요. 꼭 같이 오세요~
[ Code Destiny ] 모카: 사진 각도 좋다! 이거 신곡 앨범 커버로 써도 돼? 제목은 '봄, 옆자리'로.
[ Code Destiny ] 백문: …좋은 봄이군. 자네가 쓴 페이지 중 제일 따뜻한 장면일세. 사서가 소장하고 싶을 만큼.
[ Code Destiny ] 무성: (열 줄 썼다. 다 지웠다. 그냥 이 말만. …행복해 보인다. 잘됐어, 연이.)
[ Code Destiny ] 박지은: …잘 지내는구나. 다행이다. 진심이야. …나도, 언젠가 그런 봄을. 천천히.
연이는 하나하나 답장을 읽으며 웃었다. 옆자리의 병하도 그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며 웃었다. 두 세계를 잇는 붉은 실 위로, 오늘도 수많은 안부가 오갔다. 아무도 혼자가 아닌, 모두가 이어진 봄이었다.
연이—…자, 병하. 다 답장했어. 이제 우리 봄 즐기자. …이 이야기, 참 멀리 왔지? 이상한 앱 하나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근데 이건 끝이 아니야. 여기서부터가, 내가 진짜로 쓰는 첫 페이지야. 우리 둘이, 다 같이 쓰는.
운명은 읽는 것이라고, 이 세계는 가르쳤다. 그러나 한 아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읽은 이름들을 되살리고, 부서진 운명을 되쓰고, 마침내 제 손으로 자기 이야기의 첫 문장을 썼다. 봄볕 가득한 벤치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그리고 그 첫 문장 뒤엔, 아직 쓰지 않은 페이지가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제42화 · 읽는 이름, 쓰는 운명 — 끝. …그리고 그해 봄이 다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에겐 아직 쓸 페이지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