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췄던 세계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검은 실들이 다시 쏟아졌지만, 이번엔 연이의 눈빛이 달랐다.
가슴 안에서 백지 카드가 조용히 타올랐다. 남이 써 준 결말을 사양한 사람만이 가지는, 제 손으로 쓰는 자의 열기였다.
얼어붙었던 연이의 손끝에서, 여린 새싹이 다시 돋았다. 절망이 녹자 갇혔던 힘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손에 감긴, 마지막까지 얼지 않은 붉은 실 한 가닥. 사주에 새겨진 아홉 번째 글자, '박병하'가 그 실을 통해 따뜻하게 뛰고 있었다.
연이—…힘이 돌아왔어. 손도 녹았고. …그리고 이 붉은 실. 병하 이름을 새기니까, 실이 더 굵고 따뜻해졌어. …이제 병하는 안 사라져.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럼 됐어. 안심하고, 저 사람 구하러 갈 수 있어. 병하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연이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 무릎 꿇고 절망하던 눈이 아니었다. 운명의 신 앞에서 백지를 택한, 제 손으로 이야기를 쓰는 자의 눈이었다. 그 눈에는 두려움 대신, 아직 안 쓰인 결말을 향한 조용한 확신이 있었다.
연이—…자, 정리하자. 저 여자를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야. 저 여자 안의 첫 마음을 되살리는 거야. 그럼 저 여자가 스스로 검은 실을 놓아. …그러려면 저 폭풍 한복판까지 가야 해. 무섭지만, 갈 수 있어. 다들 뒤를 지켜 줄 거고, 나는 앞만 보면 되니까.
루나—…연이, 준비됐지? 내 물길 다 깔았어! 재성에서 백 년 판 물, 오늘 다 쏟을게! …너는 그냥 달리기만 해. 발밑은 내가 책임진다! 물의 아이가, 처음으로 진짜 힘 보여 줄 차례야!
연이—…응, 루나! 믿는다! …자, 다들. 이게 마지막이야. 이번 한 번만 더 힘내면, 다 같이 집에 가서 빵이랑 삼각김밥 먹을 수 있어. …가자! 백 년 외로운 사람, 우리가 안아 주러 간다!
연이가 첫걸음을 내디뎠다. 백지 카드의 열기가 가슴에서 온몸으로 번지고, 손끝의 새싹이 넝쿨로 뻗고, 발밑엔 물의 아이의 맑은 길이 열렸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시작한 한 걸음이, 이제 백 년 원한을 향한 마지막 돌격이 되었다.
네오—…(묶인 채로, 조용히) …가, 연이. 네 방식으로. …나는 여기서 지켜볼게. 백 년 전 못 지킨 그 밤과 달리, 이번엔 네가 스스로 걸어가는 걸. …그게, 내가 백 년간 제일 보고 싶던 장면이야. 네가 네 발로, 네 손으로, 네 이야기를 쓰는 거.
네오—…(묶인 채로) …연이. 네 사주에서, 내 이름 느껴져. 따뜻해. …백 년 만에, 내가 어디 붙어 있는 느낌이 들어. 시간의 틈으로 흩어지려던 게, 네 사주에 딱 붙들려 있어. …고마워. 이제 나, 안 무섭다. 어디로도 안 흩어져. 네가 날 붙잡아 줬으니까.
연이—…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아무도 안 죽이고, 아무도 안 잃는 방법.
연이는 베틀 위의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세계째 실을 감아쥔 그 손은 신의 손이 아니라, 오래 곪은 상처투성이의 손이었다. 이상하게도, 이번엔 무섭지 않았다.
비겁의 섬 거울 속에서 본 적 있는 눈이었다. 갖고 싶은 것을 끝내 가질 수 없어서, 그 마음째 부숴 버리기로 한 사람의 눈.
연이—…저 눈, 나 알아. 재성 거울 속에서 봤어. 내가 제일 약할 때, 내 안에서도 저런 눈이 있었어. …갖고 싶은데 못 가져서, 차라리 다 부수고 싶은 마음.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있는 거. …박지은 씨는 그 마음을 백 년 키운 거고, 나는 겨우 눌렀던 거고. 그 차이일 뿐이야. 저 사람이 특별히 나쁜 게 아니라, 나도 저럴 수 있었어.
네오—…(묶인 채로) …연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게, 네 힘이야. 저 여자를 '나랑 다른 괴물'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었던 사람'으로 보는 거. …그래야 이해가 되고, 이해가 돼야 구할 수 있어. 미워하기만 하면, 절대 못 구해. 잘 가, 연이. 네 방식으로.
연이—…응, 병하. 내 방식으로 갈게. 힘 말고, 마음으로. …저 사람 안에 있는, 나랑 똑같은 그 외로움. 그걸 안아 줄게. 미워할 게 아니라, 알아봐 줄게. …자, 간다. 백 년 외로운 사람한테.
연이—저 사람은 이기려는 게 아니야. 다 같이 여기서 끝내 버리려는 거야. 자기 자신까지.
연이—…신님이 그랬어. 힘으로는 백 년을 못 이긴다고. 사랑으로만 저 얼음이 녹는다고. …그러니까 나, 싸우러 가는 거 아니야. 안으러 가는 거야. 저 백 년 외로운 사람을. …무섭겠지. 근데 아까 배웠잖아. 진 게 아니라 아직 안 쓴 거라고. 저 여자 결말도, 아직 안 쓰였어.
네오—…(묶인 채로) …연이. 저 여자한테 갈 때, 무기 들지 마. 손을 비워. …백 년간 저 여자한테 온 사람은 다 무기를 들고 왔어. 그래서 다 삼켜졌지. …너는 빈손으로 가. 안아 줄 손으로. 그게 저 여자가 백 년간 한 번도 못 막은 유일한 거야.
연이—…응, 병하. 빈손으로 갈게. …아까 신님 앞에서 배웠어. 쥐면 도망가고 펴면 모인다고. …저 여자, 백 년을 손 오므리고 살았대. 아무도 그 손 못 잡았고. 그럼 내가 잡아 줄게. 편 손으로. 잡아 주면, 그 손도 펴질 테니까.
무성—…연이. 나도 무기 안 들게. 백 년간 삼키던 이 물, 오늘은 네 앞길 씻는 데만 쓸게. …너 안전하게 저 여자한테 닿게, 우리가 길 낼게. …가. 우리가 뒤 지킬 테니까, 넌 저 여자 마음만 봐. 우리 셋이, 아니 다 같이 하는 거야.
루나—…연이, 진짜 저 한복판으로 갈 거야? 검은 실 저렇게 쏟아지는데. …나도 갈게! 내 물로 네 앞길 칼비 막아 줄게! 물의 아이가 이럴 때 안 쓰이면 언제 쓰여!
연이—…응, 루나. 같이 가자. 근데 넌 물길 지켜. 네 물이 저 검은 실 씻는 역할이 제일 중요하니까. …나는 앞으로 갈게. 넌 뒤에서 내 길에 물 뿌려 줘. 검은 게 나한테 닿기 전에, 네 맑은 물로 다 씻어 내. 그게 우리 작전이야.
루나가 두 앞발로 물길을 크게 열었다. 재성에서부터 백 년을 파 올린 그 물이, 마침내 이 세계 한복판에서 콸콸 쏟아졌다. 물의 아이의 진짜 힘이, 처음으로 온전히 터진 순간이었다. 맑은 물줄기가 연이의 앞길을 흐르며, 검은 칼비를 하나씩 씻어 냈다.
루나—…간다, 연이! 내 물길 위로 달려! 검은 실은 내가 다 씻을게! …봐, 저 여자 검은 물, 내 맑은 물한테 닿으니까 다 녹잖아! 오염된 물은, 맑은 물을 못 이겨! 이게 물의 아이 힘이야!
루나—청류! …재성의 맑은 물, 다 받아라!
루나가 재성에서 백 년을 파 올린 물을 통째로 쏟았다. 배달만 다니던 겁 많은 토끼가, 이제 세계의 오염을 씻는 물의 아이가 되어 있었다. 도서관 아크에서 눈물로 도장 하나 씻던 그 물이, 이제 세계 전체를 씻을 만큼 자란 것이다.
연이—…루나! 너 진짜 강해졌다! 재성에서 처음 만났을 땐 겁 많은 배달 토끼였는데! …봐, 네 물이 세계를 씻어! 훈련한 보람이 있네! …이게 우리가 같이 큰 거야. 나도, 너도, 무성도. 다 처음엔 약했는데, 서로 도우면서 이렇게 컸어.
무성—…루나, 내 물도 보태! 이제 내 물 맑으니까, 네 물이랑 섞으면 두 배야! …백 년간 삼키던 이 물, 오늘은 씻는 데 쓴다! …연이 앞길, 우리 둘이 완벽하게 씻어 줄게! 달려, 연이! 뒤는 물의 아이 둘이 책임진다!
두 물줄기가 만났다. 재성에서 백 년을 파 올린 루나의 맑은 물과, 백 년을 삼킴에 쓰인 무성의 물. 오염된 물과 정화의 물이 섞이자, 검은 물이 서서히 맑아지며 두 배로 불어났다. 그 거대한 물줄기가 연이의 앞길을 흐르며, 쏟아지는 검은 칼비를 통째로 씻어 냈다.
루나—…무성! 우리 물 완전 잘 맞아! 이거 봐, 네 물이랑 내 물이랑 섞이니까 무지개 나! …백 년 오염이랑 백 년 배달 물이 만나서, 세계 씻는 물이 됐어! …연이, 걱정 마! 네 뒤는 우리 물길이 다 지켜! 넌 앞만 봐!
연이—…고마워, 둘 다! 너희 물길 위라서 하나도 안 무서워! …봐, 검은 칼비가 나한테 닿기도 전에 다 씻겨! 이게 우리가 같이 큰 힘이야! …자, 이제 저 여자한테 간다. 너희가 뒤를 지켜 주니까, 나는 마음 놓고 앞으로.
물의 아이 둘이 만든 맑은 길 위를, 연이가 거침없이 달렸다. 백 년 원한이 쏟아지는 폭풍 한복판인데도, 그 길만은 봄날의 시냇물처럼 맑고 따뜻했다. 뒤에서 두 물의 아이가, 앞에서 되살아난 인연들이,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켰다.
박지은—…왜 안 멈춰! 검은 실을 그렇게 쏟는데! …다들 물러났는데, 왜 너만! …설마 너, 무섭지도 않아? 백 년 원한이 통째로 너한테 쏟아지는데?!
연이—…무서워요. 엄청. 다리 후들거려요. …근데 그거 알아요, 박지은 씨? 무서운데도 가는 게, 그게 진짜 용기래요. 안 무서운 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고요. …나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가요. 왜냐면 당신을 혼자 두면 안 되니까. 그거 하나가, 무서움보다 커요.
박지은—…나 하나 두면 안 된다니. …나는 적인데. 너를 부순. …왜, 왜 그렇게까지. …백 년간 아무도 나한테 안 왔는데. 다들 나를 무서워하며 도망쳤는데. …너는 왜, 무서워하면서도 오는 거야. 나 같은 걸.
연이—…당신 같은 게 아니라, 당신이니까요. …외롭고, 아프고, 백 년째 우산 하나 못 씌워 준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혼자 둬요. …나도 외로워 봐서 알아요. 그때 누가 무서움 무릅쓰고 와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제가 갈게요. 당신한테. 늦었지만.
묶인 네오 쪽에서, 겨우겨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혼자 가려고? 저 폭풍 한가운데로?」
연이—응. 근데 혼자 아니야. 등은 네가 지켜 준다고 했잖아. 묶여 있어도, 그 약속은 안 풀렸어.
그 말에 답하듯, 감옥과 사슬 너머에서 실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루나의 실이 손을 끌고, 언니의 실이 등을 밀고, 백문의 등불이 길을 비추고, 무성의 물이 칼비를 가리고, 모카의 불이 발밑을 데우고, 네오의 실이 그 모든 걸 하나로 묶어 세웠다.
끊을 수 없는 실이라며 박지은이 비웃던 그것이, 지금은 연이의 다리가 되어 주고 있었다.
연이—…봐요, 박지은 씨. 당신이 비웃은 그 이름이, 지금 제 다리가 됐어요. …당신은 인연을 끊는 데 백 년을 썼는데, 저는 그 인연으로 다리를 놨어요. 당신이 끊으려 한 게, 지금 저를 당신한테로 데려가요. …아이러니하죠? 당신 미움이, 제 사랑의 발판이 됐어요.
연이가 인연의 다리 위를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박지은의 검은 폭풍이 오히려 흔들렸다. 그 폭풍의 근원이었던 원한이, 다가오는 다정함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백 년을 세운 벽이, 처음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채 떨고 있었다.
박지은—…이상해. …너를 막으려고 검은 실을 쏟는데, 오히려 내 폭풍이 흔들려. …백 년간 아무도 못 뚫은 이 폭풍이, 왜 너한테는. …아, 무섭다. 네가 다가오는 게. 근데 그 무서움이, 미워서가 아니라… 기대돼서 무서운 거라, 더 무서워. 백 년 만에, 누가 나한테 오는 게.
연이—…기대돼서 무섭다. 그거, 좋은 무서움이에요. 백 년 만에 누가 온다는 설렘이잖아요. …겁내지 마요. 그 설렘 그대로 두면, 곧 제 손이 당신한테 닿아요. 그럼 그 무서움이, 따뜻함으로 바뀔 거예요. …조금만 더. 제가 거의 다 왔어요.
박지은—…오지 마! 다가오지 마! …나한테 오면, 나 진짜 세계째로 다 부술 거야! 자폭할 거라고! 너까지, 다! …그러니까 멈춰! 제발 멈추라고! 나한테 오지 마!
연이—…안 멈춰요. …당신이 자폭하겠다는 거, 그거 진짜 죽고 싶어서가 아니잖아요. 아무도 안 오니까, 차라리 다 끝내려는 거잖아요. …근데 제가 가요. 백 년 만에, 당신한테 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자폭 안 해도 돼요. 이제, 안 혼자예요.
연이는 그 다리 위를, 폭풍의 한가운데를 향해 달렸다. 검은 칼비가 쏟아졌지만, 루나의 맑은 물이 앞길을 씻고, 무성의 물이 옆을 막고, 네오의 실이 발밑을 받쳤다. 온 인연이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떠받쳤다.
연이—뿌리내림. …당신 마음이, 처음 시작된 자리까지.
덩굴 뿌리가 박지은의 검은 실을 타고 거슬러 올라갔다. 겹겹이 덧발린 원한의 검은 층을 지나고, 단단히 얼어붙은 저주의 매듭들을 지나, 그 실이 맨 처음 붉게 짜이던 날까지.
박지은—…뭐 하는 거야! 내 실을 거슬러 올라가? …그만해! 거긴 안 돼! 그 밑엔 아무것도 없어! 다 원한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지 마! 내 실 맨 처음까지 읽지 마! 거기엔…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연이—…아무것도 없다면서, 왜 그렇게 막아요. …뭔가 있으니까 막는 거잖아요. 당신이 백 년간 아무한테도 안 보여 준 뭔가가. …괜찮아요. 나쁜 거 아닐 거예요. 어떤 미움도, 시작은 다들 예뻐요. 아무리 검게 변한 실도, 처음엔 다 붉었잖아요. …볼게요. 당신 마음이 처음 태어나던, 그 순간을.
박지은의 검은 실이 거세게 몸부림쳤다. 백 년을 숨겨 온 그 처음에 연이의 뿌리가 닿으려 하자, 온 힘을 다해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 저항이 오히려 증거였다. 지킬 게 있으니까, 막는 것이었다. 그 밑엔 분명, 아직 안 죽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이의 뿌리가 그 마음이 처음 태어난 자리에 닿았다. 백 년 원한의 맨 밑바닥, 아직 아무것도 검게 물들기 전의 어느 하루가, 실을 타고 연이에게로 흘러들어 왔다.
「…오늘 그 사람이 나한테 웃어 주었다. 도서관 앞에서. 그게 다인데, 세상이 조금 덜 외로웠다.」 아득한 곳에서, 젊은 날의 박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전부였다. 시작은 저주가 아니었다. 덜 외롭고 싶다는, 겨우 그만한 소원이었다.
연이가 실을 더 거슬러 올라가자, 그 마음이 하루하루 쌓여 온 순간들이 차례로 스쳤다. '오늘도 그 사람을 봤다. 나한텐 안 웃었지만, 그래도 봤다.' '그 사람이 다른 애한테 웃었다. 조금 아팠다.' …원한이 되기 전, 그건 그저 누군가를 몰래 좋아하던 사람의, 소박한 마음이었다.
연이—…박지은 씨. 당신 그 마음, 처음엔 이렇게 예뻤어요. '그 사람이 웃어서 덜 외로웠다.' '나한텐 안 웃었지만 그래도 봤다.' …이거, 저주 아니에요. 그냥 좋아하는 마음이에요. 누구나 다 하는, 예쁜 짝사랑이요. …어디서부터, 이게 검게 변한 거예요?
연이가 실을 조금 더 따라갔다. 그 예쁘던 마음이 검게 물들기 시작하는 순간이 보였다. '그 사람이 그 애한테 우산을 씌워 줬다. 나는 우산이 두 개나 있었는데.' …거절도 아니고, 배신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낄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날. 그날부터, 그 마음이 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연이—…여기구나. 낄 자리가 없다는 걸 안 날. …박지은 씨, 그날 얼마나 외로웠어요. 우산 두 개 들고, 씌워 줄 사람은 없고. …그 외로움이 미움이 된 거예요. 근데 미움 밑엔 아직 이 외로움이 있어요. 당신, 지금도 그냥 덜 외롭고 싶은 거잖아요. 백 년 전이랑 똑같이.
박지은—…어떻게 알아. …그래, 맞아. 나는 아직도 외로워. 세계를 다 가졌는데도. …그때 그 우산 두 개, 하나를 씌워 주고 싶었어. 근데 그 사람은 나를 안 봤고, 나는 씌워 줄 데가 없어서. …그 우산 하나가, 백 년간 내 손에 그대로 있어. 아직도 못 씌워 준 채로.
연이—…그 우산, 이제 저한테 씌워 줘요. …아니면, 제가 당신한테 씌워 줄게요. 지금 이 순간, 당신 그렇게 비 맞고 서 있잖아요. 백 년째. …이리 와요, 박지은 씨. 제가 우산 하나 같이 써 줄게요. 그거, 당신이 백 년간 제일 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연이가 폭풍 한복판에서, 박지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기 하나 없는 빈손이었다. 백 년간 그 여자에게 다가온 모든 손은 무언가를 쥐고 있었는데, 이 손만은 아무것도 쥐지 않았다. 그저, 함께 비를 피할 우산 하나 내미는 손이었다.
박지은—…그만 읽어. 제발. …그거, 내가 백 년간 아무한테도 안 보여 준 페이지야. …어떻게 그걸. …그래, 맞아. 나는 그냥 우산 하나 같이 쓰고 싶었어. 그게 다였어. 근데 그 자리가 없어서, 그래서…
연이—…봤어요. 당신 마음이 처음 시작되던 순간. 당신, 그 사람을 저주하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요.
연이—그냥 그 웃음 옆에, 조금만 더 있고 싶었던 거잖아요. 그게 다잖아요.
박지은의 검은 실이 잠깐 멈칫했다. 백 년을 아무한테도 안 들킨 그 첫 마음을, 누군가 소리 내어 읽어 준 것은 처음이었다. 세계를 감아쥐던 손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박지은—…어떻게. …어떻게 그걸 알아.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데. 나조차 백 년간 안 보려고 했던 건데. …그래. 맞아. 나는 그냥. …그냥 그 사람 옆에, 우산 하나 같이 쓰고 싶었어. 그게 다였어. 세상을 부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근데 왜 이렇게 됐지. 어디서부터 이렇게.
연이—…길을 잃은 거예요. 우산 같이 쓰고 싶은 마음이, 갈 곳을 못 찾아서. …그 마음이 나쁜 게 아니에요. 방향을 못 찾은 것뿐이에요. …박지은 씨, 지금이라도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가요. 우산 같이 쓰고 싶던, 그 예쁜 마음으로. 미움은 여기 두고, 그 마음만 데리고 가요.
박지은—…돌아가도, 될까. …이렇게 많은 걸 부쉈는데. 이렇게 멀리 왔는데. …그 예쁜 마음 쓰던 애한테, 이제 와서 돌아가도, 그 애가 나를 받아 줄까. …아니. 아니겠지. 나는 그 애를 배신했으니까. 그 애 마음을 이렇게 짓밟았으니까.
연이—…받아 줘요. 그 애가, 바로 당신이잖아요. 당신이 당신을 받아 주면 돼요. …남이 용서 안 해도, 당신이 당신을 용서하는 것부터 시작이에요. '나 그동안 많이 아팠구나, 많이 외로웠구나' 하고. …그럼 그 예쁜 마음 쓰던 애가, 당신 안에서 다시 눈을 떠요. 배신한 게 아니라, 오래 헤맨 거라고. 이제 집에 왔다고.
박지은—닥쳐! 그 페이지는 내가 제일 먼저 태워 버렸어. 세상에 남아 있을 리가 없어!
연이—태워도 원래 마음은 안 죽어요. 여기가 그런 세계잖아요. 아무리 미움으로 덧칠해도, 그 밑의 진짜 색은 안 지워져요.
연이—…백문 님이 가르쳐 줬어요. 본뜻은 안 죽는다고. 아무리 미움으로 덧칠해도, 맨 밑엔 진짜 마음이 남아 있다고. …당신 원한은 나중에 덧칠한 색이에요. 근데 그 밑엔, 그 우산 같이 쓰고 싶던 첫 마음이 아직 붉게 남아 있어요. …아무리 두껍게 덧칠해도, 원래 색은 못 지워요. 그래서 제가 그 첫 마음을 끌어올리면, 덧칠은 힘을 잃어요.
박지은—…아니야! 원본 같은 거 없어! 내가 다 태웠어! 백 년간 덧칠하고 또 덧칠해서, 원본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그러니까 읽지 마! 없는 걸 읽으려 하지 마! 거긴… 거긴 아무것도…
연이—…아니요. 방금 제가 읽었잖아요. '그 사람이 웃어서 덜 외로웠다.' 그 원본, 아직 거기 있었어요. …당신이 백 년을 태웠는데도, 안 사라졌어요. 왜냐면 그게 진짜 당신이니까. 진짜는 안 타요. 아무리 불질러도, 재 밑에 씨앗처럼 남아요. …그 씨앗, 제가 다시 심을게요. 물 줄게요. 그럼 다시 싹 터요.
연이—당신 원한이 아무리 커도, 당신 첫 마음보다는 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요.
박지은—…아니야. 첫 마음 같은 거, 이제 없어. 백 년 동안 원한으로 다 덮어 버렸어. …그 예쁜 마음 품던 애는, 백 년 전에 죽었어. 지금 나는 그냥 괴물이야. 미움으로 만들어진 괴물. …그러니까 나한테 첫 마음이 있다느니, 그런 말 하지 마. 없어. 없다고!
연이—…있어요. 방금 제가 읽었잖아요. '그 사람이 웃어서 덜 외로웠다.' 그 문장, 백 년 원한 밑에 아직 살아 있었어요. 안 죽었어요. …당신이 아무리 덮어도, 그 첫 마음은 안 죽어요. 그게 당신이 아직 사람인 증거예요. 괴물은 첫 마음이 없어요. 근데 당신은 있잖아요.
연이가 되살려 낸 그 첫 마음이, 검은 실을 타고 위로 번져 올라갔다. 백 년 원한 밑에 깔려 있던, 소박한 짝사랑의 순간들이 하나씩 다시 붉게 물들었다. 미움이라는 두꺼운 덧칠 아래, 원래의 마음이 다시 비쳐 나오기 시작했다.
박지은—…그만. …그 마음 되살리지 마. …그거 다시 보면, 내가 백 년간 한 짓이 다… 다 첫 마음을 배신한 게 되잖아. 덜 외롭고 싶었던 그 마음을, 내가 제일 크게 짓밟은 게 되잖아. …그걸 어떻게 견뎌. 차라리 없던 걸로 하는 게 나아.
연이—…배신 아니에요. 길을 잃었을 뿐이에요. 덜 외롭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라서 미움으로 갔던 거예요. …이제 길 찾으면 돼요.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가면 돼요. 덜 외롭고 싶다는 그 소원, 지금 제가 들어줄게요. 우산 씌워 줄게요. 그럼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배신이 아니라, 귀향이에요.
연이의 연둣빛 넝쿨이 검은 실을 가만히 감아쥐었다. 끊으려는 게 아니라, 그 밑에 잠든 원래 색을 깨우려는 손길이었다. 겹겹이 덧발린 원한 아래에서, 붉은 결이 한 겹씩 다시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검게 덧칠된 '그 사람을 저주한다' 밑에서,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던 마음이 붉게 배어 나왔다. 시커먼 '세상을 부수겠다' 밑에서, '나도 누가 웃어 줬으면' 하던 소원이 드러났다. 미움이라는 두꺼운 덧칠이 벗겨질수록, 그 밑의 외로운 소원들이 하나씩 빛을 냈다.
박지은—…그만해. …그거 다 벗기면, 내가 백 년간 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되잖아. 그냥 외로워서 발버둥 친 불쌍한 애였던 게. …나는 강한 회장님이어야 하는데. 세계를 가진 여자여야 하는데. …그 밑에 이런 초라한 소원들이 있는 거, 들키고 싶지 않았어. 백 년을 숨겼는데.
연이—…초라하지 않아요. 그 소원들, 제일 예뻐요. '누가 웃어 줬으면.' '나도 덜 외로웠으면.' …그거,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품은 소원이에요. 초라한 게 아니라, 사람다운 거예요. …강한 회장님보다, 이 소원 품은 당신이 백 배 예뻐요. 이게 진짜 당신이에요. 숨기지 마요. 이 예쁜 당신을.
연이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칼 한 번 쥔 적 없는 그 손으로, 베틀 위의 여자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박지은—…뭐 하는 거야. 놔. 나 안으면 안 돼. 나는 네 적이야. 네 백 년을 부순, 네 이름을 지운. …왜 안아. 밀어내야지. 미워해야지. …왜, 왜 하필 안아. 그게 제일…
연이—…괜찮아요. 박지은 씨. …백 년간 아무도 안 안아 줬죠. 그래서 안는 법도, 안기는 법도 잊었죠. …괜찮아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밀어내지 말고. …이거예요. 당신이 백 년간 우산 하나 같이 쓰고 싶었던 그거. 지금 제가 씌워 줄게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백 년, 아니 그 이전부터 아무한테도 안겨 본 적 없던 여자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자기가 부순 사람의 품이었다. 그 아이러니가, 오히려 그 포옹을 더 무겁고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미움조차 녹이는 온기였다.
그 포옹이 닿는 순간, 박지은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스르르 옅어졌다. 백 년을 세운 얼음 갑옷이, 힘으로는 백 번을 쳐도 안 깨지던 그것이, 다정한 온기 하나에 안개처럼 녹아내렸다. 세계를 감아쥐던 그 손아귀의 힘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루나 언니—…(멀리서) …연이 씨가 저 여자를 안았어. …저 백 년 얼음이, 포옹 하나에. …아, 나 눈물 나. 저게 진짜 강한 거구나. 칼보다, 힘보다, 안아 주는 게 제일 세구나. …우리 연이 씨, 진짜 대단한 사람이에요.
모카—…(멀리서) …야, 저거 봐. 연이가 적을 안았어. …소름. 나 지금 온몸에 소름 돋았어. …백 년 원한이, 포옹 하나에 무너지고 있어. 이게 무슨 장르야. 액션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최고의 감동 신파. …연이 저 녀석, 진짜 뭐냐.
연이—덜 외로워지고 싶었을 뿐인 사람을, 어떻게 미워해요.
여자의 손에서 세계의 실이 스르르 풀렸다. 팽팽하던 하늘이 한숨을 내쉬듯 느슨해졌다.
박지은—…놔. 놓으라고. 나는 너를 부쉈어. 네 백 년을 망가뜨렸고, 네 이름을 지웠어. 그런데 어떻게 나를…
박지은—…어떻게 나를 안아. …나는 안길 자격 없어. 이런 나쁜 짓을 하고. …차라리 때려. 욕해. 그게 편해. …근데 안는 건, 안는 건 너무… 너무 따뜻해서 견딜 수가 없어. 백 년을 얼어 있었는데, 이 따뜻함이 너무 아파. 차라리 추운 게 나았는데.
연이—알아요. 다 알아요. 용서는 아마 한참 걸릴 거예요. 근데 미워하는 마음은, 오늘 여기 두고 갈래요. 너무 무거워서 못 들고 가겠어요.
연이—…따뜻한 게 아픈 거, 그거 얼어 있던 게 녹아서 그래요. 손 시릴 때 갑자기 따뜻한 물에 넣으면 아프잖아요. 그거랑 같아요. …조금만 참아요. 이 아픔 지나가면, 그다음엔 진짜 따뜻해져요. 백 년 언 게 녹는 중이라 아픈 거예요. 곧, 괜찮아져요.
박지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십 년 동안, 아니 백 년 동안 아무한테도 안기지 못한 사람의 떨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가 무너졌다. 백 년간 세운 얼음 갑옷이, 다정한 포옹 하나에 와르르 녹아내렸다. 세계를 감아쥐던 그 손이 스르르 풀리고, 대신 연이의 등을 아주 조심스럽게, 서툴게, 붙잡았다. 안기는 법을 백 년 만에 처음 기억해 낸 손이었다.
박지은—…미안해. …나, 그동안. …너한테도, 병하 씨한테도, 저 별자리들한테도, 무성한테도. …다 미안해. …이 말, 백 년간 한 번도 못 했어.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잘못한 게 되니까. 근데 이제… 이제 하고 싶어.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연이—…들었어요. 그 '미안해', 저 들었어요. …그거면 됐어요, 박지은 씨. 백 년 만에 그 말 한마디. 그게 당신 재출발의 첫 문장이에요. …용서는 천천히 할게요. 근데 그 '미안해'는, 지금 받을게요. 고마워요, 그 말 해 줘서. 진짜 용기 냈어요, 당신.
그때 두 사람을 감고 있던 붉은 실이 일제히 같은 소리로 울렸다. 연이와 네오의 실, 친구들의 실, 그리고 박지은의 실에 타다 남아 있던 첫 문장까지, 전부 한 음으로.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랑이 내는 하나의 화음이었다. 짝사랑도, 우정도, 부녀의 정도, 백 년을 거스른 연인의 마음도, 심지어 미움으로 변질됐던 박지은의 첫 마음까지. 서로 다른 사랑들이 한 음으로 울리자, 검은 실을 물들이던 원한이 그 화음을 못 견디고 녹아내렸다.
연이—…들려요, 박지은 씨? 이 소리. …이게 사랑의 소리예요. 당신 첫 마음도 여기 섞여 있어요. 들리죠? 당신 실도 지금 같이 울고 있어요. …백 년 만에, 당신 마음이 다른 마음들이랑 같이 노래해요. 이제 안 혼자예요. 당신 마음도, 이 화음의 한 부분이에요.
박지은—…들려. …내 실이, 다른 실이랑 같이 울어. …백 년간 나 혼자 삐걱거렸는데. 아무하고도 안 맞았는데. …지금은, 지금은 같이 울려. 한 음으로. …이게, 이게 그렇게 갖고 싶던 거였어. 같이 우는 거. 혼자 안 우는 거. …왜 이걸, 이제야.
연이—…늦지 않았어요. 지금 같이 울고 있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백 년이 걸렸어도, 지금 이 순간 당신 마음이 다른 마음들이랑 하나로 울려요. 그게 시작이에요. 앞으로 계속, 같이 울면 돼요. 혼자 삐걱거리던 백 년은, 오늘로 끝이에요.
그 화음이 세계 끝까지 번졌다. 검게 굳었던 하늘의 실들이 한 가닥씩 진동하며, 원래의 붉은빛을 되찾았다. 미움으로 조율되었던 세계가, 처음으로 사랑의 음으로 다시 조율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백 년 만에 이 세계가 부르는 첫 노래 같았다.
모카—…야, 이 소리 뭐야. 소름 돋아. …나 콘서트 수천 번 뛰었는데, 이런 화음은 처음 들어. 모든 인연이 한 음으로 우는 거. …이거 녹음 못 한 게 한이다. 세상에서 제일 뭉클한 곡인데. …연이, 너 방금 세계 전체를 한 곡으로 만들었어. 완전 전설이야.
연이—…나 혼자 만든 거 아니야, 모카. 다 같이 부른 거야. 박지은 씨 첫 마음까지 섞여서. …이거 봐, 화음에 검은 음이 하나도 없어. 다 붉은 음이야. …이게 사랑의 소리구나. 미움을 이긴 게 아니라, 미움까지 품어서 하나로 만든.
품에 안긴 박지은이, 그 화음 속에서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백 년을 삐걱거리던 자기 마음이, 마침내 다른 마음들과 같은 음으로 울리는 것을 들으면서. 그 얼굴에서, 오래도록 얼어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녹아내렸다.
박지은—…따뜻해. …이 소리 속에 있으니까,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안 추워. …나도 이 화음의 한 음이구나. 삐걱거리던 나도. …그동안 나는 왜 이걸 혼자 부수려고만 했을까. 이렇게 같이 부르면, 이렇게 따뜻한데. …바보였네. 백 년 동안, 참 바보였어.
연이—…바보 아니에요. 그냥 이 화음을 몰랐던 거예요. 혼자 부르는 노래만 알아서. …이제 아셨잖아요. 그럼 앞으로 계속 같이 부르면 돼요. 도서관에서, 소망이랑, 백문 님이랑.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한테 우산 씌워 주는 날이 와요. 백 년 손에 든 그 우산, 드디어 쓰는 날이.
검은 물이 실에서 씻겨 나갔다. 하늘을 가득 메운 실들이 본래의 붉은빛을 되찾으면서, 세계가 노을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연이—…봐요, 박지은 씨. 세계가 밝아져요. 당신이 백 년간 어둡게 만든 이 세계가, 당신 첫 마음 하나로 다시 밝아져요. …당신이 부순 게 아니라, 당신이 되살린 거예요. 방금. 미움을 놓으니까, 백 년 어둠이 한순간에. …이게 당신 진짜 힘이에요. 부수는 힘 말고, 되살리는 힘. 원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어요.
박지은—…내가, 되살렸다고. …백 년을 부수기만 했는데. …이 밝은 게, 내가 한 거라고. 미움 하나 놓았을 뿐인데. …아, 이렇게 쉬운 거였나. 백 년을 그렇게 힘들게 부쉈는데, 되살리는 건 미움 하나 놓는 걸로. …왜 아무도, 나한테 이걸 안 가르쳐 줬을까. 이렇게 쉬운 걸.
연이—…아무도 안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당신이 들을 준비가 안 됐던 거예요. …지금은 준비됐잖아요. 그래서 들리는 거예요. …박지은 씨, 늦지 않았어요. 지금부터 되살리는 힘 쓰면서 살아요. 부수느라 보낸 백 년보다, 되살리는 하루가 훨씬 값져요. 오늘부터, 되살리는 사람으로 살아요.
연이가 뒤를 돌아보자, 사슬에서 풀려난 네오가 비틀비틀 다가오고 있었다. 금빛을 다 쏟아 갈기는 헝클어졌지만, 두 사람을 잇는 붉은 실만은 그 어느 때보다 굵고 따뜻하게 빛났다. 사주에 새겨진 아홉 번째 글자가, 그 실 끝에서 조용히 뛰고 있었다.
연이—…병하. …너 진짜 괜찮아? 금빛 다 썼잖아. 다리 후들거리는 거 봐. …근데 살아 있네. 안 꺼졌네. 약속 지켰네. …아, 진짜. 화내려고 했는데 얼굴 보니까 화가 안 나. 너 이 반칙쟁이. 매번 이렇게 살아 돌아와서, 화도 못 내게 하고.
네오—…약속했으니까. 안 꺼진다고. …백 년 만에 지킨 약속이야. 벚꽃 강가는 아직이지만, 이건 지켰어. …연이. 네가 저 여자를 안는 거 보면서, 나 확신했어. 백 년 전 널 지킨 게, 하나도 안 아까웠다고. 저런 사람을 지킨 거니까.
연이—…이 바보. 이런 상황에 또 그런 말. …됐어, 이제 무거운 얘기 그만. 다 끝났잖아. 박지은도 울고, 세계도 붉어지고, 다들 무사하고. …이제 진짜, 다 같이 집에 갈 일만 남았어. 벚꽃 강가 약속 지키러.
그 붉은빛이 세계 구석구석까지 번졌다. 네오를 못 박고 있던 검은 실도, 친구들을 가둔 별빛 감옥도, 눈 녹듯 스르르 풀려 내렸다.
루나의 맑은 물이 그 마지막을 도왔다. 검은 물이 씻긴 자리마다 물의 아이의 정화가 스며, 백 년 묵은 오염을 말갛게 헹궈 냈다. 오염된 물과 맑은 물이 만나 하나가 되고, 그 하나가 세계를 정화했다. 무성의 물과 루나의 물이, 마침내 완전히 섞인 것이다.
루나—…해냈다! 내 물이 세계를 씻었어! …봐, 무성! 네 물이랑 내 물이랑 완전히 섞였어! 이제 어디까지가 네 물이고 어디까지가 내 물인지도 모르겠어! …이게 물의 힘이야! 흐르고 섞여서, 다 하나가 되는 거!
무성—…루나.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내 물은 영영 검은 채였을 거야. …백 년간 오염이었던 내가, 네 덕에 정화가 됐어. …이제 나 부끄럽지 않아. 삼키던 물이 씻는 물이 됐으니까. 다 네 덕분이야.
스물여덟 별자리도 하나씩 풀려났다. 손목의 검은 실이 끊기자, 백 년을 억지로 실을 뽑던 성좌들이 처음으로 자유롭게 빛났다. 그들이 다시 짜는 인연은, 이제 검지 않고 붉었다. 세계 전체가, 원래의 따뜻한 색을 되찾아 갔다.
연이—…어? 저 위 탑! …소망이랑, 그리고 시들어 가던 창백한 별! …봐, 저 별이 다시 피어나고 있어! 붉은빛이 저기까지 닿았어! …저건, 부서진 나잖아. 미래의 나. …신님이 그랬어. 내가 온전해지면 하류의 나도 온전해진다고. 지금, 저 별이 되살아나고 있어!
탑 꼭대기, 백 년을 시들어 가던 창백한 별이 붉은빛을 받아 다시 피어났다. 박지은에게 부서졌던 연이의 미래 운명이, 과거의 연이가 온전해지자 함께 되살아난 것이다. 상류가 맑아지니, 하류도 맑아졌다. 두 연이가, 시간을 넘어 서로를 구한 순간이었다.
연이—…얘, 다시 폈어. 창백하던 게, 이제 발갛게. …백 년을 시들면서 버텨 줘서 고마워. 내가 왔어. 우리 같은 강물이라, 내가 맑아지니까 너도 맑아졌어. …이제 안 시들어. 안 부서져. 우리 둘 다, 온전해졌어. …아, 진짜 다행이다. 나 나를 구했어.
네오—…연이. 봐, 저 별. 네가 그 밤에 남긴 계획대로야. 과거의 네가 온전해지니까, 미래의 부서진 너도 되살아났어. …네가 널 구한 거야. 시간을 넘어서. …나한텐 백 년 전이던 그 밤, 너한텐 아직 오지 않았던 그 미래에, 지워지면서까지 이 계획을 세운 너. 그리고 오늘, 그 계획을 완성한 너. 두 연이가, 마침내 서로를 구했어.
연이—…두 연이가 서로를. …병하, 나 백 년 전의 나한테 너무 고마워. 사라지면서까지 날 포기 안 해 줘서. …그리고 저 위의 나한테도. 백 년을 시들면서도 안 꺼져 줘서. …우리 셋이, 아니 두 연이가 다 해냈어. 나는 정말, 안 부서지는 사람이었네. 세 번을 부서질 뻔했는데, 세 번 다 다시 일어섰어.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되살아난 창백한 별과, 그 안에 포개져 있던 소망이의 청록빛이 하나로 녹아들더니 — 한 줄기 빛이 되어 연이의 가슴께로 스르르 흘러들었다. 오래 떨어져 있던 조각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듯이. 연이는 숨을 멈췄다. 왼쪽 손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이—…어? 손목이. …여기, 뭔가 떠올라. 무늬가. …등불 물고기 모양의, 점. …이거, 백문 님이 말한 소망이 표식이잖아요. 왼쪽 손목의 등불 물고기 점. …왜 이게, 내 손목에서 지금.
백문—…! 그 점. …연이 학생, 자네 손목의 그 점. …그리고 자네가 품에 지녀 온 그 종이 물고기. 소망이가 백 년을 놓지 않았던, '안 도망가는 물고기.' 이 늙은 여우가 접어 준. …아아. 이 눈이, 곁에 두고도 못 알아봤구나. …소망아. …소망이가, 자네였어.
연이—…제가… 소망이라고요? …아. …이제 알겠어요. 미래에서 그 여자한테 부서진 내가, 시간의 강을 거슬러 백 년 전 이 세계로 떠밀려 왔던 거야. 반납구로 흘러든 그 갓난아기. …백문 님이 날 거둬 소망이라 불렀고, 그 여자가 또 빼앗아 갔고, 나는 강을 따라 더 흘러… 저쪽 현실에서 연이로 다시 태어났어. 강이 둥글게 돌아서, 결국 나한테로 온 거야. 저 위에서 부서져 시들던 게, 나였어. 나는 나를 구하러 온 거였어. 처음부터.
백문—…그래. 백 년 전, 이 도서관 반납구로 갓난아기 하나가 흘러들었지. 시간에 떠밀려, 반쯤 부서진 채. 나는 그 애를 딸로 거둬 '소망'이라 이름 지었어. …허나 그 여자가 다시 빼앗아 갔고, 그 애의 이야기는 강을 따라 더 아래로 흘러갔네. 그리고 저쪽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어. 자네로. …연이 학생. 자네는, 이 늙은 여우가 백 년을 찾아 헤맨 딸이, 강을 한 바퀴 돌아 마침내 돌아온 걸세.
연이—…그럼 저한테 아버지가 둘이네요. 저쪽 현실에서 절 낳고 키워 주신 엄마 아빠, 그리고 이 운세 세계에서 절 처음 거둬 주신 백문 님. …백문 님. 저 백 년 전엔 소망이었고, 지금은 연이예요. 이름은 달라도, 당신 딸인 건 안 변하죠. …아빠. 저 돌아왔어요. 백 년 만에.
백문—…아빠. …백 년 만에, 그 말을 다시 듣는구나. …그래, 소망아. 아니, 연이야. 어느 이름이든 좋다. 둘 다 내 딸이니까. …잘 돌아왔다. 이 아비가, 백 년을 하루같이 기다렸어. 미안하다, 못 지켜서. 그리고 고맙다. 이렇게 근사한 어른으로, 스스로 자라서 돌아와 줘서.
박지은—…그럼 내가 저 위에 백 년을 매달아 둔 그 부서진 별이… 너였어, 연이. 네 잃어버린 반쪽. …나는 갓 태어난 네 시간을 훔쳐서, 너를 둘로 쪼갰구나. 그 반쪽을 곳간에 백 년이나. …아아. 나는 한 아이를 둘로 찢어서, 양쪽 다 백 년을 아프게 했어. …용서받지 못할 짓을, 나는.
백문—…박지은. 자네가 그걸 제 입으로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 됐군. 백 년 전엔 상상도 못 했네. …내 딸은, 원망보다 먼저 자네를 안았어. 이 아이는 원래 그런 아이니까. …자네도 이제 도서관에서, 그 마음을 천천히 배우면 되네. 연이가 오늘 보여 준 그 순함을.
그때, 자유로워진 스물여덟 별자리가 일제히 반짝였다. 백 년을 억지로 실을 뽑던 성좌들이, 이제 제 뜻대로 인연을 짜기 시작했다. 그 첫 실들이 향한 곳은, 놀랍게도 연이의 머리 위였다. 감사의 인사처럼, 별빛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연이—…어? 별자리들이 나한테 실을 보내. …아, 고마워요, 여러분. 백 년 갇혀 있느라 힘드셨죠. …근데 저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요. 다 같이 한 거니까. 루나 물이랑, 무성 물이랑, 다들 힘 합친 거예요. …앞으로는 즐겁게 인연 짜 주세요. 검은 실 말고, 예쁜 붉은 실로.
세계 곳곳에서, 박지은이 끊고 물들였던 인연들이 되살아났다. 삼십 년 부부의 실이 다시 반질거렸고, 십 년 등 돌렸던 부녀가 전화기를 들었고, 첫사랑의 분홍빛 실이 조심스레 이어졌다. 한 사람의 미움이 검게 물들인 세상을, 한 사람의 포옹이 도로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연이—…봐요, 박지은 씨. 당신이 끊었던 인연들이 다 되살아나요. 저 삼십 년 부부도, 저 부녀도, 저 첫사랑도. …당신이 백 년 부순 걸, 오늘 당신 첫 마음 하나로 다 되돌렸어요. …이게 당신 진짜 힘이에요. 부수는 손이 아니라, 되살리는 손. 앞으로 그 손으로 살아요.
박지은—…내가 끊은 게, 다 되살아나. …저 부부도, 저 부녀도. 내가 재미로 검게 물들였던 그 사람들이. …아, 나 정말 못된 짓 많이 했구나. 이제야 보이네.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누군가한텐 세상 전부였는데. …미안해. 저 사람들한테도, 전부 다.
연이—…그 미안함, 앞으로 갚으면 돼요. 저 사람들 인연, 앞으로 당신이 정성껏 짜 주면서. …백문 님 도서관에서 찢긴 계약서 잇는 일부터 시작해요. 한 장 한 장, 당신이 끊었던 걸 다시 이어요. 그럼 백 년 갚는 데 백 년 걸려도, 언젠간 다 갚아져요.
무성—…박지은. 나도 당신 밑에서 백 년을 도구로 살았어. 원망 많았지. …근데 지금 당신 우는 거 보니까, 그 원망이 좀 풀리네. …나도 이름 되찾는 데 하루 걸렸어. 당신도 될 거야.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지. …도서관에서 만나면, 그땐 도구랑 주인 말고. 그냥 둘 다 백지에서 새로 시작한 사람으로.
박지은—…무성.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도 부족해. 백 년을 도구로 부렸는데. …그 말 받아 줘서 고맙다. 원망을 풀어 줘서. …나도 언젠가, 너처럼 이름값 하는 사람이 될게. 부수는 박지은 말고, 다른. …그 이름이 뭐가 될지는, 이제부터 천천히 쓸게.
연이—…좋아요. 다들 화해했으니까, 이제 진짜 다 같이 살길만 남았네요. …근데 잠깐, 저 하늘. …빛이 점점 밝아져요. 뭔가, 끝나 가는 느낌인데. …네오? 저 빛 뭐야? 왜 갑자기 분위기가.
기둥에서 풀려난 네오가 비틀거리며 연이 곁으로 돌아왔다. 갈기는 잔뜩 헝클어졌지만, 호박색 눈은 여전히 그녀만 보고 있었다.
네오—…거봐. 뒤는 안 돌아봤네. 잘했어.
연이—…병하! 풀려났어! …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너 저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거 보면서, 나 얼마나. …이 바보야. 또 혼자 다 짊어지고. 금빛 다 쓰고. …근데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약속 지켜 줘서 고마워. 안 꺼지고 버텨 줘서.
네오—…버텼지. 네가 온다는 거 아니까. …근데 연이, 너 진짜 대단했어. 저 폭풍 한복판을 혼자 달려가서, 저 여자를 안았어. 힘도 안 쓰고. …나 백 년을 지켰는데, 너는 하루 만에 나보다 더 큰 걸 해냈어. 저 여자를 이긴 게 아니라, 구했잖아. …자랑스럽다, 연이.
연이—너 진짜, 다신 그러지 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야.
저편에서 루나가 감옥을 뚫고 튀어나와 두 사람 사이로 달려들었고, 언니와 백문, 무성과 모카도 하나씩 풀려나 돌아왔다.
루나—연이! 살아 있었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실 안 놨거든!
연이—…다들! 다 무사해! …언니 다리도 괜찮고, 백문 님도, 무성도, 모카도. …아, 진짜 다행이다. 한 명도 안 잃었어. 아무도 안 죽었어. …신님한테 약속한 거 지켰다. 다 같이 살아서, 다 같이 웃는 거.
고개를 든 하늘에는, 이제 검은 실이 한 가닥도 없었다. 붉은 실들이 노을처럼 온 하늘을 물들이며, 저마다의 인연을 다시 부드럽게 짜 나가고 있었다. 백 년 만에, 이 세계가 숨을 쉬었다.
루나—…봐, 봐! 하늘이 붉어! 검은 거 하나도 없어! …내 물이 세계를 씻은 거야! 히히, 나 진짜 물의 아이 맞나 봐. 재성에서 배달만 다니던 겁쟁이가 세계를 씻었어! …언니, 나 이제 좀 멋있지?
루나 언니—…멋있고말고. 우리 루나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물의 아이지. …근데 다 씻고 나니까 배고프다. 이거 끝나면 언니가 갓 구운 빵 한가득 구워 줄게. 다들 와. 백문 님도, 무성이도, 저기 저… 아줌마도.
모카—…빵! 콜! 나 앙코르 뛰고 나면 항상 배고프거든. 오늘 앙코르는 좀 셌으니까, 빵 두 배로 줘요 언니. …근데 진짜, 이 팀 뭐냐. 콘서트보다 뭉클해. 다음엔 무대에서 이 얘기로 곡 써야지. 제목은 '끊을 수 없는 실'. 어때, 대박 감이지?
무성—…나도, 껴도 돼? 그 빵 자리에. …백 년간 아무것도 안 먹었거든. 삼킨 것 말곤. …이제 진짜 뭔가를 먹어 보고 싶어. 남의 이야기 말고, 그냥 빵 같은 거. 누구랑 같이.
연이—…당연하지, 무성! 네 자리 제일 앞이야. …아, 다들 이렇게 모여서 빵 먹을 생각 하니까 눈물 나. 재성에서 처음 만났을 땐 상상도 못 했는데. …우리, 진짜 식구가 됐네.
네오—…그러게. 백 년을 혼자 걸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많아졌네. …다 네 덕분이야, 연이. 넌 지나가는 자리마다 사람을 남겼어. 그게 오늘 이 하늘을 붉게 만든 거고.
루나 언니—…연이 씨. 진짜 해냈네요. 저 백 년 얼음 아줌마를, 힘도 아니고 포옹 하나로. …저 빵집 오래 했지만, 저런 건 처음 봐요. 미움을 안아서 녹이는 거. …연이 씨, 진짜 대단한 사람이에요. 존경스러워요.
모카—…야, 나 방금 감옥에서 다 봤어. 너 저 여자 안는 거. …소름 돋았잖아. 적을 안아서 이긴다니, 이거 완전 새로운 장르야. …식상의 섬 콘서트 수천 번 봤어도, 방금 그 장면이 제일 뭉클했어. 앙코르 백 번 외치고 싶다.
백문—…연이 학생. 자네가 오늘 되쓴 건, 박지은 한 사람의 운명만이 아닐세. 저 여자 손에 부서졌던 수천의 인연이, 지금 다 되살아나고 있어. …자네 포옹 하나가, 온 세계의 검은 실을 붉게 물들였네. …이게 사서가 평생 찾던 '본뜻의 힘'일세. 자네가 그걸 증명했어.
베틀 위의 여자는 오래, 아주 오래 울었다. 원한이 빠져나간 자리는 텅 비었지만, 그만큼 몸이 가벼워 보였다.
박지은—…이제 나는 뭘 하고 살지. 백 년을 원한 하나로 버텼는데. 그게 없으면, 난 뭐가 남는 거야.
연이—…박지은 씨. 원한이 빠져나간 그 자리, 텅 비어서 무섭죠. 백 년을 그걸로 채웠으니까. …근데 그거 알아요? 텅 빈 건 나쁜 게 아니에요. 이제 다른 걸 채울 수 있다는 뜻이에요. 원한 대신, 사람을. 미움 대신, 삼각김밥을. …백지가 된 거예요. 신님이 저한테 준 거랑 똑같은. 이제 당신도, 당신 이야기를 새로 쓰면 돼요.
박지은—…나도, 새로 쓸 수 있어? …백 년을 이렇게 산 나도? 이렇게 많은 걸 부순 나도? …그게 될까. 나는 미움 말곤 아는 게 없는데. 사랑도, 우정도, 그런 거 하나도 몰라. …빈손으로 뭘 어떻게 새로.
연이—…배우면 돼요. 저도 처음부터 안 거 아니에요. 이 세계 와서 하나씩 배웠어요. 루나한테 흐르는 법, 백문 님한테 읽는 법, 무성한테 잇는 법, 병하한테 지키는 법. …당신도 지금부터 배우면 돼요. 늦은 나이 없어요. 백 살이든 천 살이든, 배우기 시작하면 그때가 시작이에요.
박지은—…배운다. …나한테 뭘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까. 다 내가 밀어냈는데. …나 같은 사람 곁에, 누가 있어 주겠어. 나는 백 년을 혼자였는데.
연이—…여기 있잖아요. 저요. 그리고 이 사람들 다요. …방금 저 안겼잖아요. 그거, 곁에 있어 준다는 뜻이에요. 미워하면서도, 당신 곁에 있을게요. 용서는 천천히 하더라도. …당신, 이제 백 년 외톨이 아니에요.
루나—…저기, 아줌마. 나 아줌마 진짜 미웠거든. 우리 다 감옥에 가두고, 연이 괴롭히고. …근데 지금 우는 거 보니까, 좀 봐줄 만해. …나중에 도서관에서 인연 잘 짜면, 그때 내가 물 한 잔 갖다줄게. 맑은 물로. 화해의 물.
모카—…나도. 아줌마 때문에 감옥 갇혀서 앙코르 놓칠 뻔했잖아. 그거 완전 열받았는데. …근데 뭐, 연이가 안아 줬으니까 나도 봐줄게. …대신 나중에 도서관에서 반성문 쓸 때, 내 곡 배경음악으로 틀어. '끊을 수 없는 실'로. 그게 조건이야.
박지은—…너희, 나 안 죽이고. …오히려 물 갖다준다, 곡 틀어 준다. …백 년간 나한테 이런 말 해 준 사람 하나도 없었는데. …고맙다. 이 못된 나한테, 이렇게. …나, 정말 도서관에서 열심히 반성할게. 너희가 이렇게 봐줬으니까.
백문—그건 말일세, 백지에서 다시 쓰면 되네. 마침 여기 빈 서가 정리에 일가견 있는 사서가 하나 있거든. 일손이 부족하던 참이었어.
박지은—…나 같은 사람을, 도서관에 들이겠다고요?
백문—본뜻이 남아 있는 사람은, 언제든 다시 읽을 수 있네. 그게 사서의 오랜 신념일세.
박지은—…본뜻이 남아 있다. …그 예쁜 마음 품던 애가, 아직 내 안에 있다는 뜻이에요? …백 년을 미움으로 덮었는데도? …그 애를, 도서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내가, 다시 그 애가 될 수 있어요?
백문—…될 수 있네. 시간은 좀 걸리겠지. 백 년 덧칠을 벗겨 내는 일이니. …허나 서두를 것 없어. 도서관엔 시간이 많거든. 한 페이지씩, 천천히 읽어 나가면 되네. …그리고 자네, 인연을 짜던 손이었지 않나. 그 손으로 서가의 찢긴 계약서들을 다시 이어 주게. 부수던 손을, 잇는 손으로 되쓰는 걸세.
박지은—…부수던 손을, 잇는 손으로. …그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백 년을 끊기만 했는데. …근데, 해 보고 싶긴 해요. 처음으로. 뭔가를 부수는 거 말고, 잇는 거. …그 예쁜 마음 품던 애도, 원래 인연을 짜던 애였으니까. 어쩌면, 그게 진짜 저였을지도 몰라요.
연이—…맞아요, 박지은 씨. 인연 짜는 게 진짜 당신이에요. 부수는 건 길 잃은 당신이었고요. …도서관에서 다시 인연 짜요. 백문 님 곁에서, 찢긴 계약서 한 장 한 장.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당신도 붉은 실 하나 갖게 될 거예요. 미움 아닌, 진짜 인연으로 맺은. …그날 오면, 저 꼭 초대해 줘요. 축하하러 갈게요.
박지은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광기가 아니라, 오랜만에 지어 보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 웃음 끝에서, 하늘의 갈라진 틈이 조용히 빛나기 시작했다. 어긋나 있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빛이었다.
무성—파수꾼. 저 빛… 시간의 결계가 풀리고 있어. 거슬러 온 자한테 걸려 있던 대가가, 이제 청산된다는 뜻이야.
하늘의 갈라진 틈이 점점 밝아졌다. 박지은의 세계가 무너지고, 어긋나 있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시간을 거스른 자에게 걸려 있던 셈이 하나씩 정산되고 있었다. 그 빛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무언가 끝나 간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연이—대가가 풀리면… 네오,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어디로 돌아가는 거야?
네오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호박색 눈이 잠깐, 저 밝아지는 하늘 틈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스친 건 안도도, 두려움도 아닌, 오래 각오해 온 사람의 담담함이었다. 연이는 그 눈빛에서, 아직 못 들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걸 느꼈다.
연이—…네오. 왜 대답 안 해. 그 눈빛 뭐야. …너 사주에 이름 새겼으니까 안 사라진다며. 근데 왜, 저 빛 보는 눈이 그래. …설마 아직 나한테 안 한 얘기 있어? …병하, 나 봐. 눈 피하지 말고.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네오—…연이. 숨기는 거 아니야. 그냥, 아직 확실치 않아서. …저 문이 열리면, 내가 미래로 돌아갈지, 여기 남을지, 아니면… 다른 뭐가 될지. 그건 문이 열려 봐야 알아. …그러니까 지금 미리 걱정하지 마. 확실해지면, 제일 먼저 너한테 말할게. 약속했잖아.
무성—…(작게) …파수꾼. 나는 알아. 저 결계가 풀리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시간을 거스른 자의 셈은, 그렇게 가볍지 않아. …근데 저 아이한텐 아직 말 안 했네. …너, 각오하고 있구나. 백 년 전부터. …나는 아무 말 안 할게. 그건 네가 직접 말해야 할 거니까.
네오—…(작게) …고마워, 무성.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저 애가 이 순간만은 마음 놓고 웃게 해 주고 싶어. …곧 말할게. 저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이번엔 안 숨겨. 백 년 숨긴 걸로 충분하니까.
연이—…너희 둘, 방금 뭐라고 소곤거렸어? …무성, 너 표정 왜 그래. 병하, 너도.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지? …됐어, 지금 안 물을게. 근데 병하, 하나만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나 혼자 두고 가지 않기. 그것만은 지켜. 알았지?
네오—…그건, 약속 못 해, 연이. …미안. 근데 대신 이건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한 마음만은 절대 안 사라져. 내가 어디로 가든, 뭐가 되든. …그거 하나는, 시간도 못 가져가. 네 사주에 새겼으니까.
연이—…약속 못 한다니. 그게 무슨. …병하,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해. 마치 어디 멀리 갈 사람처럼. …나 방금 다 구했잖아. 너도, 박지은도, 부서진 나도. 다 웃는 결말 쓴다며. 근데 왜 너 혼자 그 결말에서 빠질 것 같은 얼굴이야.
하늘의 틈이 조금 더 넓어졌다. 시간을 거스른 자에게 걸린 백 년의 셈이, 이제 마지막 정산을 앞두고 있었다. 그 빛 속으로,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축복인지 작별인지 아직 알 수 없는, 아득한 금빛이.
네오—…연이. 저 문이 완전히 열리면, 내가 다 얘기할게. 숨김없이. …그때까지만, 딱 조금만 더. 지금 이 순간, 다 같이 웃는 이 장면을, 나 조금만 더 보고 싶어서. 백 년을 기다린 장면이거든. …자, 저 사람부터 챙기자. 내 얘긴 그다음에.
네오—…그건, 문이 열리면 얘기할게. 지금은 저 사람부터 챙기자.
제41화 · 사랑의 힘 — 끝. 최종화 「읽는 이름, 쓰는 운명」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