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랑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양쪽 벽에 문짝만 한 카드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카드마다 그림이 움직였다. 바람이 불고, 별이 돌고, 누군가 걸었다.
연이—여기가 타로 하늘이야? 전시회 같은데. 입장료 받는 거 아니지?
윤달—받으면 제가 낼게요. 대신 생년월일시를.
모카—저 사람 입에 뭐 좀 물려 놔.
[ 메이저 아르카나 · 0 → 21 ] 순서대로 지나가십시오
윤달—타로의 큰 카드 스물두 장은 원래 이야기 하나예요. 바보가 길을 떠나서 세상 끝까지 가는 이야기. 순서를 건너뛰면 문이 안 열려요.
서한비—장부랑 비슷하네요. 앞줄이 맞아야 다음 줄을 쓸 수 있으니까.
서한비는 일행 맨 뒤에서 걸었다. 연이와 세 걸음 거리. 연이가 멈추면 같이 멈췄다. 보호관찰은 그런 식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연이는 주머니 속 카드를 만졌다. 별 무늬 뒷면. 아직 뒤집히지 않는 그 카드가 손끝에서 미지근했다.
연이—(아까부터 계속 앉아 있네. 손만 아픈 게 아닌가.)
연이—네오, 걷기 싫어? 업어 줄까?
네오—네가 날 업겠다고? 이제 키 차이도 있는데.
연이—못 업을 것 같아? 손으로 버티지 말고 일단 기대 봐.
네오가 연이의 등을 가볍게 밀고 앞장섰다. 돌바닥에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연이는 그가 일부러 조심히 걷는 줄 알았다.
첫 번째 카드 앞. 0번, 바보. 짐 보따리를 멘 젊은이가 절벽 끝에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발치에서 작은 흰 개가 짖었다.
모카—개는 있고 수달은 없네. 차별이야.
윤달—바보 카드는 겁이 없는 시작이에요. 절벽인 줄 알면서 한 발 내딛는.
연이—설마 우리도 저기서 뛰어내려야 돼?
네오—그럴 줄 알았어.
카드 속 절벽이 앞으로 다가왔다. 발밑이 사라지고 구름만 펼쳐졌다. 연이는 네오의 팔을 잡으려다 허공을 쥐었다.
연이—꿀악! 미리 말해 주는 카드는 없어?!
다섯은 구름 위로 떨어졌다. 아프지 않았다. 구름이 그대로 다음 카드의 바닥이 되었다. 1번, 마법사의 탁자 위였다.
탁자에는 네 가지가 놓여 있었다. 잔, 칼, 지팡이, 동전. 그리고 꺼진 촛불 하나. 불을 켜야 다음 문이 열린다는 듯이.
모카—불? 그건 내 전문이지.
모카가 앞치마에서 성냥을 꺼냈다. 한 번에 붙었다. 촛불이 켜지자 마법사가 그림 속에서 모카를 향해 모자를 벗었다.
모카—봤어? 인사했어. 나한테. 이 하늘 사람들은 예의가 있네.
윤달—2번 문에서는 예의가 더 필요할 거예요. 여사제 방이라.
2번, 여사제의 방은 조용했다. 벽에 금이 쓰여 있었다. 말하는 자는 돌아간다. 윤달이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몹시 괴로웠다.
연이는 윤달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서한비가 윤달 앞에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윤달이 휘갈겨 썼다. 숙녀분들 생년월일시.
서한비—글로 써도 안 알려 드려요.
방을 나서자마자 윤달이 숨을 크게 쉬었다. 이 분 참은 사람치고는 너무 큰 숨이었다.
윤달—제 인생에서 제일 긴 이 분이었어요.
3번, 황후의 밀밭은 금빛이었다. 이삭이 바람에 고개를 숙였다. 서한비가 지나가자 밀 이삭이 그녀 쪽으로만 기울었다. 물 냄새를 맡은 것처럼.
서한비—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윤달—비 오는 사람한테 곡식이 기우는 건 당연하죠. 궁합이 좋은 거예요.
4번, 황제의 계단 꼭대기에 돌 왕좌가 있었다. 왕좌는 비어 있었다. 목소리만 울렸다. 무엇을 다스리느냐. 대답한 자만 지나가라.
모카—내 부엌.
윤달—제 입. 잘 안 되지만요.
서한비—제 장부요. 이제부터는.
연이 차례였다. 연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메모장을 꺼내 흔들었다.
연이—이거. 내가 까먹는 거, 여기다 다 적어 놔. 이게 나를 다스려.
계단 위 돌문이 열렸다. 왕좌가 작게 웃은 것 같았다. 5번 교황의 종탑에서는 종이 세 번 울렸다. 문은 하나씩 열렸다. 모카가 불을 켜고, 윤달이 길을 읽고, 연이가 질문에 답했다.
연이—생각보다 순조로운데? 이러다 오늘 안에 스물한 장 다 끝나겠다.
서한비—그런 말은 장부에 적으면 안 되는 말이에요.
연이—왜?
서한비—꼭 그다음 줄에 사고가 나거든요.
6번 문 앞에서 일행은 쉬기로 했다. 문은 담쟁이로 덮여 있었다. 윤달이 품에서 자기 카드 묶음을 꺼냈다. 손때 묻은 낡은 카드였다.
윤달—쉬는 김에 한 장씩 뽑아 볼까요. 타로 하늘에서 뽑는 타로는 잘 맞거든요.
연이—나 먼저! 아니다, 모카 먼저.
모카—왜 나야. 됐어. 운세 같은 거 안 믿어.
모카는 그렇게 말하고 제일 먼저 한 장을 뽑았다. 뒤집었다. 벌거벗은 두 사람과 천사. 6번, 연인.
윤달—오. 연인. 모카 씨 상대는 아마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일 텐데요.
모카—너 지금 이 카드 바꿔치기했지?! 손 내놔! 장갑 벗어!
윤달—장갑은 진짜 안 돼요! 거기 구멍 있어요!
둘이 카드 한 장을 두고 엎치락뒤치락했다. 연이는 배를 잡고 웃었다. 서한비는 그 모습을 보다가 한 장을 뽑았다.
서한비—11번. 저울 든 사람이네요.
윤달—정의예요. 숙녀분한테 잘 어울려요.
서한비—벌 받는 카드라는 뜻이죠.
윤달—아니요. 정의는 벌이 아니라 저울이에요. 기울어진 쪽을 맞추는 거. 지금 숙녀분이 하는 일이 딱 그거잖아요.
서한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드를 한참 보다가, 장부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연이—네오도 뽑아. 네 카드는 뭐가 나올까?
네오—나는 됐다.
연이—안 돼. 다 뽑았어. 단체 생활이야.
네오가 오른손을 뻗었다. 손끝이 카드를 통과했다. 그가 재빨리 왼손으로 바꿔 한 장을 집었다. 연이는 그 짧은 틈을 보았다.
연이—(방금 손이 카드를 통과했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네오가 카드를 내려놓았다. 8번, 힘. 하얀 옷의 여자가 발톱을 세운 흰 고양이를 맨손으로 달래고 있었다. 고양이는 발톱을 거두고 여자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윤달—힘이네요. 억센 힘이 아니라 길들이는 힘. 부드러운 손이 사나운 것을 이기는 카드.
연이—고양이 나왔네. 그럼 이건 네오 카드다.
네오—여자 얼굴을 봐라.
연이가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그림 속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연이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쓰다듬는 고양이의 앞발은, 투명했다.
연이—네오. 이거.
네오—카드 그림이잖아. 지금 모습이랑 꼭 같진 않아.
그날 밤. 회랑 벽의 카드들이 하나씩 꺼졌다. 8번 힘 카드만 남아 희게 빛났다. 빛이 닿는 곳마다 네오의 몸이 흐려졌다.
네오가 일어서려다 주저앉았다. 투명한 것은 이제 다리만이 아니었다. 가슴께까지 빛이 비쳐 보였다.
네오—여긴 이름에 유난히 예민하네.
네오의 무릎이 꺾였다. 연이가 팔을 받쳤지만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몸 곳곳으로 바닥의 무늬가 비치기 시작했다.
연이—네오! 정신 차려. 내 어깨 잡아. 천천히, 숨부터 쉬자.
네오는 대답할 숨을 고르지 못했다. 연이는 그의 팔을 자기 어깨에 걸쳤다. 남아 있는 왼손이 연이의 소매를 붙들었다.
연이—기대. 괜찮은 척하지 말고. 지금은 내가 잡을게.
네오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아끼는 게 아니었다. 한마디를 내는 데도 숨이 필요했다.
서한비—힘 카드의 빛이 저분을 깎고 있어요. 저 카드 안에 뭔가 있어요.
윤달—케투예요. 꼬리가 카드 그림 뒤에 숨었어요. 지난 걸 먹는 꼬리니까, 고양이님 지난날을 갉고 있는 거예요.
모카—그럼 저 카드 태워 버려!
윤달—태우면 길이 끊겨요. 8번을 못 지나면 21번까지 못 가요.
다음 길은 6번 문 너머였다. 연이는 네오를 부축한 채 담쟁이가 덮인 문 앞에 멈췄다.
모카—잠깐. 고양이 저 꼴인데 지금 가? 하룻밤 쉬고 가자.
윤달—쉬면 더 깎여요. 8번 빛은 밤에 더 세지거든요. 지나가는 게 제일 빨라요.
서한비—그럼 제가 앞에 설게요. 문 너머에 뭐가 있든 먼저 맞는 건 저로 해요.
연이—너 힘 없다며.
서한비—없어서 앞에 서는 거예요. 잃을 게 제일 적으니까.
연이는 뭐라고 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서한비 코트 자락을 한 번 잡아당겼다. 너무 앞으로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서한비는 반 걸음만 앞에 섰다.
연이—그럼 빨리 지나가자. 연인이든 뭐든.
모카—연인 카드면 고백하는 문 아니야? 윤달 오빠 또 생년월일부터 묻겠네.
윤달—이번엔 안 물어요. 이 문은 묻는 문이 아니라 읽게 하는 문이거든요.
연이—읽게 한다고? 뭘?
윤달—그게 문제예요. 문마다 꼭 하나씩, 제일 아픈 걸 읽게 해요.
네오의 턱이 굳었다. 연이는 소매를 붙든 그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괜찮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담쟁이가 저절로 걷혔다. 문 한가운데 문패가 있었다. 글씨는 아직 흐렸다. 세 글자. 첫 글자만 겨우 보였다. 박.
흑월—이 문은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만 열린다. 문패를 읽어라, 그릇아.
네오가 연이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남은 힘을 모두 쓴 듯 손이 떨렸다. 아주 작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읽지 마라. 연이. 그것만은.」
문패의 두 번째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연이는 눈을 떼지 못했다. 소매를 쥔 네오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