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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7부 · 숙요, 붉은 실 · 결말

EP.40 · 41 / 44

운명의 신

운명의 신 앞에 선다. 묻는 쪽과 답하는 쪽이 뒤바뀐다.

한글 약 16,553자 · 읽는 시간 약 39분

눈을 뜨자, 폭풍도 베틀도 사라지고 없었다. 연이는 거대한 타로 카드들이 별처럼 떠 있는, 소리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완벽한 정적이었다. 검은 폭풍의 굉음도, 박지은의 조롱도, 네오를 감던 실의 소리도 없었다. 그저 별처럼 떠 있는 수많은 타로 카드와, 그 사이를 흐르는 아득한 고요뿐.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었다.

연이—…방금까지 그 난리통이었는데. …여긴 너무 조용해. 소리 하나 없어. …근데 안 무서워. 이상하게 편안해. 무슨 도서관 제일 깊은 서가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성당 같기도 하고. …여기, 나쁜 곳은 아니네. 나쁜 곳은 이렇게 편안하지 않으니까.

연이—…근데 병하는? 무성은? 다들 어디 갔지. …방금까지 옆에 있었는데. …설마 나 혼자 딴 데로 온 건가. …아니면, 시간이 멈춰서 다들 저기 그대로 있고 나만 여기로 불려온 건가. …누가 나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이유가 있어서겠죠?

대답은 없었다. 다만 사방의 타로 카드들이, 아주 미세하게 빛을 더했다. 마치 연이의 물음을 듣고 있다는 듯이. 이 고요한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귀 같기도 했다. 연이의 모든 말을, 온 우주가 조용히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연이—…듣고 계시는구나. 대답은 안 하셔도. …좋아요, 그럼 계속 말할게요. 저 지금 좀 무섭거든요. 병하가 붙잡혀 갔고, 다들 밀려났고, 저 혼자 남았어요. …근데 이렇게 조용한 데서 잠깐 쉬니까, 마음이 좀 가라앉네요. …고마워요, 이 시간. 정신없이 무너지던 저한테, 숨 고를 틈을 줘서.

그제야, 카드들 너머에서 형체 없는 금빛이 아주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연이가 두려움 속에서도 감사를 말한 그 순간, 비로소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마음이 든 것처럼.

카드마다 다른 연이가 그려져 있었다. 웃는 연이, 우는 연이, 늙은 연이, 태어나지 않은 연이. 세상에 있을 수 있었던 온갖 갈래의 연이가 그림이 되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이—…이게 다 나야? 웃는 나도, 우는 나도, 할머니가 된 나도. …이 카드는, 회사원이 된 나네. 넥타이 맨 사람들 사이에서 무표정하게. …이 카드는, 대학 졸업하고 평범하게 취직한 나고. …다 나인데, 하나도 지금 나 같지가 않아. 다 남이 그려 준 나 같아.

연이가 카드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어떤 연이는 부유했고, 어떤 연이는 유명했고, 어떤 연이는 안정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카드 속 연이도, 지금 이 순간 흙투성이로 친구를 구하려 발버둥 치는 연이만큼 살아 있어 보이진 않았다.

연이—…이상하다. 저 카드 속 나들은 다 나보다 편해 보이는데, 왜 하나도 안 부럽지. …아, 알겠다. 저 카드 속 나들은 다 '누가 그려 준 나'라서 그래. 내가 고른 게 아니라. …편한데 남의 삶, 고단한데 내 삶. 나는 후자가 좋아. 이 흙투성이 나가, 나는 제일 좋아.

운명의 신—…흙투성이인 자신을 제일 좋아하는 아이라. …보기 드문 눈이구나. 대부분은 저 편안한 카드들을 부러워하며, 지금의 자기를 미워한단다. '왜 나는 저렇게 못 살까' 하고. …너는 반대로, 고단한 지금의 너를 사랑하는구나. 그것이, 네가 이 여행을 끝까지 온 힘이란다.

연이—…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어요. 이 세계 오기 전엔 저도 제가 싫었어요. 왜 이렇게 안 풀리나, 왜 이렇게 칠칠맞나. …근데 여행하면서 알았어요. 넘어지고 흙 묻은 이 나가, 남이 그려 준 깔끔한 나보다 훨씬 살아 있다는 거. …흙투성이인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더라고요.

운명의 신—…자기를 싫어하던 아이가, 자기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그것이 이 여행의 진짜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박지은을 이기는 것보다, 무성의 이름을 되찾는 것보다, 어쩌면 그게 가장 큰 성취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 …그런 아이만이, 남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지.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남을 사랑할 그릇이 없거든.

연이—…맞아요. 저 저를 사랑하게 되고 나서야, 남도 제대로 사랑하게 됐어요. …박지은은 아직 자기를 미워하잖아요. 그래서 남도 못 사랑하는 거예요. …그럼 제가 그 사람도 자기를 사랑하게 도와줄래요. 그럼 그 사람도, 남을 사랑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게 진짜 그 사람 구하는 거네요.

그때 카드들 사이로, 아주 작고 창백한 카드 한 장이 보였다. 다른 카드들과 달리, 그 카드 속 연이는 시들어 가고 있었다. 저 위 탑의 별과 같은 얼굴이었다.

연이—…이 카드. 이건, 부서진 나야. 박지은이 미래에서 부순. 저 위 탑의 별이랑 같은 얼굴. …아, 여기 있었구나. 이렇게 카드로도 존재하는구나. …기다려. 나 너도 꼭 구할 거야. 카드 밖으로, 진짜로. 시들지 않게.

연이가 그 창백한 카드에 손을 대자, 그 안의 시들어 가던 연이가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들었다. 마치 백 년 만에 누군가 자기를 알아봐 준 것처럼. 부서진 미래의 자신과, 온전한 과거의 자신이, 카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것이다.

연이—…얘, 나 봤어. 지금 나 알아봤어. …백 년을 저렇게 혼자 시들면서, 누가 와 주길 기다렸구나. …미안해. 오래 걸렸지. 근데 이제 갈게. 내가 온전해지면, 너도 다시 피어. 우리 같은 강물이래. 상류가 맑으면 하류도 맑아진대.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 언니가, 아니 내가 갈게.

운명의 신—…저 부서진 아이가, 백 년 만에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구나. 네가 알아봐 준 것만으로. …보렴, 아이야. 이것이 되쓰기의 시작이란다. 거창한 힘이 아니라, 알아봐 주는 것. 잊지 않는 것. …네가 저 아이를 알아본 순간, 저 아이의 시든 카드에도 아주 작은 온기가 돌기 시작했어.

연이—…여기, 어디예요. 당신은 누구고요.

금빛이 대답 대신, 사방의 카드들을 천천히 회전시켰다. 웃는 연이, 우는 연이, 부유한 연이, 외로운 연이. 수천 갈래의 삶이 별자리처럼 그녀를 감쌌다. 마치, '이 모든 게 다 너였을 수 있단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연이—…이 카드들, 다 저예요? 이렇게 많은 갈래의 제가. …아, 신기해. 하나의 저한테 이렇게 많은 가능성이 있었구나. 근데 그중에 저는 딱 하나만 살고 있는 거고. …당신, 이걸 보여 주려고 저 부르신 거예요? 제가 어떤 삶을 살 수 있었는지.

금빛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다만 지켜보는 빛. 마치 아주 오래된 강물이 조약돌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듯, 그 존재는 연이라는 작은 아이를 깊고 다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연이—…뭔가, 되게 오래 사신 분 같아요. 눈빛이… 아니, 형체는 없지만 눈빛 같은 게 느껴져요. 아주 오래되고, 아주 다정한. …좋아요. 무섭지 않으니까, 편하게 얘기할게요. 저한테 물어보실 거 있으신 거죠? 뭐든 물어보세요. 저 솔직하게 답할게요.

운명의 신—나는 이름이 많단다. 누구는 나를 운명이라 부르고, 누구는 나를 우연이라 부르지. 너희가 매일 넘기는 그 타로 카드, 그 뒷면에 사는 것이 바로 나란다.

연이—…운명. 우연. 타로 카드 뒷면. …그럼 당신이, 이 모든 걸 정하는 분이에요? 사주도, 자미두수도, 붉은 실도, 다? …그럼 박지은이 내 운명 부순 것도, 병하가 시간 거스른 것도, 다 당신이 쓴 거예요?

운명의 신—아니란다. 나는 쓰지 않아. 다만 지켜볼 뿐이지. …사람들은 내가 모든 걸 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백지를 나눠 줄 뿐이야. 그 위에 무얼 쓸지는, 각자의 몫이란다. …박지은이 미움을 쓴 것도, 병하가 사랑을 쓴 것도, 다 그들이 쓴 글이야. 나는 그저 종이였을 뿐.

연이—…당신은 종이일 뿐이라고요. 그럼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다들 '운명이 그래서'라고 하잖아요. '팔자가 그래서', '타고나서'. …그게 다, 사실은 자기가 쓴 거라고요?

운명의 신—대부분은 그렇단다. 다만 사람들은 자기가 쓴 걸 잊어버리고, 내 탓을 하지. '운명이 그랬다'고. …그게 편하니까. 자기가 쓴 걸 인정하는 것보다, 남 탓하는 게 쉬우니까. …허나 아이야. 너는 이 여행에서 다른 걸 배웠지. 운명은 읽는 게 아니라 쓰는 거라고. 그래서 내가 너한테 왔단다. 너는, 자기가 쓴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아이라서.

연이—…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데요. 그냥 여기서 좋은 사람들 만나서 배운 것뿐이에요. 저 혼자 깨달은 거 아니에요. 루나가, 백문 님이, 무성이, 병하가 다 하나씩 가르쳐 준 거예요. …저는 그냥, 그 가르침을 잘 받은 학생일 뿐이에요. 운 좋은 학생요.

운명의 신—…그 겸손함까지, 참으로 귀하구나. …아이야, 배움을 잘 받는 것도 재능이란다. 아니, 어쩌면 제일 큰 재능이지. 박지은은 백 년간 아무한테도 안 배웠어. 다 안다고 여겼으니까. 너는 만나는 이마다 배웠지. 그 차이가, 너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란다. …잘 배운 학생이, 이제 스스로 쓰는 작가가 될 시간이구나.

연이—…네. 배웠어요. 재성에서, 도서관에서, 자미두수에서. 다들 그걸 가르쳐 줬어요. 정해진 걸 되쓸 수 있다고. …근데 신님, 그럼 하나 물어볼게요. 제 운명도, 제가 다시 쓸 수 있어요? 박지은이 부순 저 별도, 병하 소멸도, 제가 되쓸 수 있어요?

운명의 신—…쓸 수 있단다. 다만, 되쓰기엔 값이 따르지. 남이 써 준 걸 지우고 네 걸 쓰는 건, 그만큼 무거운 일이야. …그리고 아이야, 하나 알아 두렴. 네가 되쓸 수 있는 건 오직 네 운명뿐이란다. 병하의 운명은 병하가, 박지은의 운명은 박지은이 써야 해. 다만, 네 운명에 그들의 이름을 엮을 수는 있지. 그게 오늘 네게 주어진 선택이란다.

연이—…제 운명에 병하 이름을 엮는다. …그럼 병하 운명이 제 운명이랑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 사라지면, 병하도 안 사라지고? …오, 그거 좋은데요. 저 안 죽을 자신 있거든요. 그럼 병하도 제가 붙잡아 둘 수 있는 거잖아요.

운명의 신—…그리 단순하진 않단다. 값이 있다고 하지 않았니.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려던 참이야. 성급한 아이로구나. 먼저, 네게 원래 쓰여 있던 결말부터 보여 주마. 값을 알려면, 무엇을 내놓는지부터 봐야 하니까.

운명의 신—시간을 멈춘 건 자비가 아니야. 그저 마지막으로 한 번 물어보고 싶어서란다. 정해진 대로 갈 것인지, 아닌지.

연이—정해진 대로라니, 무슨 뜻이에요.

운명의 신—…세상 모든 사람에겐, 태어날 때 대강의 밑그림이 그려진단다. 사주라는 것, 별자리라는 것, 다 그 밑그림이지. 대부분은 그 밑그림 위를 그대로 걷다 죽어. 그게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이란다. …편하지. 어디로 갈지 이미 그려져 있으니까. 헌데 그건, 남이 그려 준 그림 위를 걷는 것뿐이야.

연이—…남이 그려 준 그림 위. …근데 신님, 그 밑그림은 누가 그린 거예요? 당신이요? …아까 당신은 종이일 뿐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 밑그림, 누가.

운명의 신—…조상이, 부모가, 세상이, 그리고 아주 조금은 우연이 그린단다. 여러 손이 얽혀 그린 그림이지. 그래서 아무도 온전히 자기 뜻대로 태어나진 못해. …허나 아이야, 그 밑그림 위에 덧그릴 붓은, 오직 너만 쥘 수 있단다. 남이 그린 밑그림을 지우고, 네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게 되쓰기고, 그게 오늘 네가 할 일이야.

연이—…그렇구나. 밑그림은 남이 그려도, 덧칠하는 붓은 내 거구나. …신님, 그럼 저 이 붓 잘 쓸게요. 밑그림에 안 좋은 게 그려져 있어도, 그 위에 좋은 걸 덧그리면 되니까. …저 불운의 밑그림 위에, 저는 병하랑 친구들이랑 웃는 그림을 덧그릴래요. 밑그림이 어두워도, 제 붓이 밝으면 되잖아요.

운명의 신—…밑그림이 어두워도 붓이 밝으면 된다라. …아이야, 너는 참 위로가 되는 말을 하는구나. 나조차도. …세상엔 어두운 밑그림을 타고나는 이가 많단다. 박지은도 그랬지. 헌데 다들 그 밑그림을 원망하다 끝나. 붓이 제 손에 있는 줄도 모르고. …네가 그 붓을 남들에게도 쥐여 주렴. '네 손에 붓이 있어'라고. 그거면, 세상이 조금 밝아질 게야.

운명의 신—보렴. 이것이 원래 쓰여 있던 결말이야.

카드 하나가 크게 떠올랐다. 그 안에서 연이가 혼자 타로 문을 열고 현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사히. 안전하게. 흠집 하나 없이.

카드 속 연이는 자취방으로 돌아가, 삼각김밥을 먹고, 취직을 하고, 평범하게 나이 들어 갔다. 큰 불행도 없고, 큰 상처도 없는 삶. 다만 그 얼굴엔, 무언가 아주 소중한 걸 잊어버린 듯한 희미한 허전함이 늘 어려 있었다.

연이—…이게 정해진 내 결말이에요? 안전하게 돌아가서, 평범하게 사는 거. …나쁘지 않네요. 아니, 사실 좋아 보여요. 안 다치고, 안 힘들고. …근데 신님, 저 카드 속 나 표정이 왜 저래요. 다 가진 것 같은데, 왜 자꾸 뭔가 허전해 보여요?

운명의 신—…그건, 잊었기 때문이란다. 이 여행도, 파수꾼도, 친구들도. 안전하게 돌아가는 대신, 너는 이 모든 걸 잊어야 해. 병하도, 재성도, 도서관도, 무성도. 전부. …기억하지 못하는 상실은 아프지 않아. 다만, 이유 모를 허전함으로 평생 남지.

연이—…병하를 잊는다고요. …다 잊고, 안전하게. …그럼 저 카드 속 나는, 왜 허전한지도 모른 채 평생 사는 거네요. 뭔가 소중한 걸 잃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거, 안 다치는 게 아니라 제일 크게 다치는 거잖아요. 이유도 모르고 평생 그리운 거.

운명의 신—…예리하구나. 그래, 그것이 이 '안전한 결말'의 값이란다. 몸은 안 다치지만, 마음 한구석이 영영 빈 채로 살지. 대부분의 사람은 그 길을 택한단다. 이유 모를 허전함이, 분명한 아픔보다 견디기 쉬우니까.

연이—…이유 모를 허전함. …그거, 저 진짜 알아요. 이 세계 오기 전에요, 저 자주 그랬거든요. 다 괜찮은데 뭔가 허전한 거. 봄에 벚꽃 강가만 가면 이유 없이 눈물 나고. …그게, 지워진 병하의 기억이었던 거예요? 잊었는데도 몸이 그리워한.

운명의 신—…그렇단다. 잊어도 몸은 기억하지. 네가 봄마다 벚꽃 강가에서 울었던 건, 지워진 약속이 몸에 남아 있어서야. …안전한 결말을 택하면, 너는 다시 그렇게 살게 된단다.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리며, 왜인지도 모른 채로. 평생.

연이—…그건 진짜 싫어요. 이유도 모르고 평생 그리운 거. …차라리 이유를 알래요. 병하 때문에 그리운 거라고, 똑똑히 알래요. 그래야 그리워도 웃을 수 있으니까. …이유 아는 그리움은 사랑이지만, 이유 모르는 허전함은 그냥 병이에요. 저는 사랑을 고를래요.

운명의 신—…'이유 아는 그리움은 사랑이고, 이유 모르는 허전함은 병이다.' …아이야, 방금 그 말은 나조차 배우는구나. 운명의 근원인 나도, 사람의 마음은 늘 새로 배운단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잊어서 안 아픈 것보다, 기억해서 그리운 게 나아. 그리움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니까. 잊으면, 사랑했다는 것조차 없던 일이 되지.

연이—…신님도 사람 마음은 배우시는구나. 좀 귀엽네요, 그거. …아무튼, 그래서 저는 다 기억할래요. 이 여행도,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다 기억해서, 다 사랑으로 남길래요. …잊어서 편한 것보다, 기억해서 아픈 게 사람다운 거잖아요. 저는 끝까지 사람답게, 다 기억하면서 살래요.

연이—…그러니까 신님, 저 물러설 생각 없어요. 편한 결말 내주셔도 안 받을래요. …아프더라도, 제 손으로 고를게요. 그게 신님이 주신 백지 카드잖아요. 뭘 쓸지는 제가 정하는 거. …저, 이제 거기 뭘 쓸지 정했어요.

연이—…신님. 다른 사람들 카드도 볼 수 있어요? 병하 카드요. 그리고… 박지은 카드도.

운명의 신—…볼 수 있단다. 다만, 남의 운명을 보는 건 무거운 일이야. 각오가 되었니? …좋아. 먼저, 파수꾼의 카드다.

카드 한 장이 떠올랐다. 그 안의 병하는, 홀로 시간의 틈에서 조용히 흩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채. 백 년을 한 사람만 지키다, 그 사람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진 채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멸이었다.

연이—…이게 병하의 정해진 결말이에요?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채로, 혼자 사라지는 거. …나까지 잊으면, 병하를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도 없게 되는 거잖아요. …안 돼요. 이건 너무 슬퍼요. 백 년을 사랑만 하다가, 그 끝이 이거라니. 절대 이렇겐 못 끝내요.

운명의 신—…허나 아이야. 그것이 시간을 거스른 자의 정해진 값이란다. 사랑을 위해 시간을 거스른 대가로,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흩어지는 것. …잔인하지. 나도 그리 여긴다. 헌데 그것이 여태 쓰여 있던 글이야. 네가 아니면, 아무도 안 고치지.

연이—…그럼 제가 고칠게요. …병하가 아무에게도 기억 안 되는 게 정해진 결말이라면, 저는 그 위에 덧쓸게요. '단 한 사람은 끝까지 기억한다.' 그게 저예요. …세상이 다 잊어도, 제가 기억하면 병하는 안 사라져요. 기억이 곧 존재니까요. 제 기억 속에서, 병하는 영원해요.

운명의 신—…'단 한 사람은 끝까지 기억한다.' …아름다운 덧쓰기구나. 그래, 그것이 소멸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란다. 잊히지 않는 것. …한 사람의 기억이, 온 세계의 망각을 이긴단다. 네가 병하를 기억하는 한, 시간도 그를 못 데려가. 그게 네 사주에 그의 이름을 새기는 일의, 진짜 의미야.

운명의 신—…그럼 이번엔, 그 여자의 카드다. …보렴. 이것이 박지은의 정해진 결말이야.

카드 속 박지은은, 텅 빈 곳간 한복판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모았는데, 곁엔 아무도 없었다. 백 년이 천 년이 되어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혼자였다. 다 가지고도 영원히 텅 빈, 가장 부유한 고독이었다.

그런데 그 카드 속, 박지은의 가슴 한복판에 아주 작은 붉은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온통 검고 차가운 그림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색. 백 년을 얼려도 안 죽은, 그 붉은 실 하나였다.

연이—…어? 신님, 저 카드 속 박지은 가슴에, 붉은 점 하나 있어요. 다 검고 차가운데, 저것만 붉어요. …저게 그 붉은 실이죠? 백 년을 얼려도 안 죽은. …봐요, 저 정해진 고독한 결말 속에서도, 저 실 하나는 살아 있어요. 그럼 이 결말도, 아직 안 끝난 거예요. 저 실이 살아 있는 한.

운명의 신—…예리하구나. 그래, 그 붉은 점이 박지은의 마지막 가능성이란다. 정해진 결말 속에서도 안 꺼진 그 불씨. …그 실을 누군가 녹여 주면, 이 고독한 결말도 다시 쓰일 수 있어. 허나 백 년간 아무도 그 실을 못 봤단다. 다들 박지은의 차가운 겉만 봤지. …너는, 그 붉은 점을 봤구나. 처음으로.

연이—…봤어요. 저 그거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왔는걸요. …신님, 그럼 저 붉은 점 녹이는 게, 박지은 구하는 거네요. 이 영원한 고독 결말을, 다 같이 웃는 결말로 바꾸는 거. …할래요. 미워하면서도, 저 붉은 점 녹일래요. 저 사람이 혼자 천 년 얼어 있는 거, 저 못 봐요.

연이—…박지은도 결국 혼자네요. 영원히. …다 가졌는데, 아무도 없어. …신님, 이 결말도 바꾸고 싶어요. 박지은은 나쁜 사람이지만, 이 영원한 고독은 너무 잔인해요. …저 사람도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인데. 이렇게 혼자 두는 건, 벌이 아니라 고문이에요.

운명의 신—…놀랍구나. 너를 부수고, 네 사랑을 뺏은 자의 결말까지 바꾸고 싶다니. …허나 아이야, 그건 네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박지은의 운명은 박지은이 써야 해. 네가 대신 못 쓴단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 여자가 스스로 다시 쓸 기회를 주는 것뿐이야.

연이—…스스로 다시 쓸 기회. …그거면 돼요. 제가 대신 안 써도 돼요. 그냥, 그 사람이 손 펼 수 있게 옆에 있어 줄게요. …신님, 그 여자 안에 붉은 실 하나 아직 살아 있어요. 백 년을 얼려도 안 죽은. 그거 하나면, 그 여자도 다시 쓸 수 있어요. 그렇죠?

운명의 신—…있단다. 그 실 하나가, 그 여자가 아직 사람인 증거지. …허나 그 실을 녹이는 건, 힘으로 안 돼. 미움으로도 안 되고. 오직 하나, 그 여자가 백 년간 못 받아 본 것으로만 녹는단다. …너는 이미 그게 뭔지 아는 것 같구나.

연이—…네. 알아요. 다정함이요. '괜찮다'는 말 한마디. …백 년간 아무도 그 여자한테 안 해 준 말. …제가 할게요. 미워하면서도, 그 말 해 줄게요. 그럼 그 얼음도, 언젠가 녹겠죠. …그러니까 신님, 저 백지 카드 주세요. 병하도, 박지은도, 저 부서진 저도, 다 다시 쓸래요.

연이—…아, 신님. 무성 카드도 볼 수 있어요? 그 애도 걱정돼서요. 백 년을 도구로만 살았는데.

운명의 신—…무성의 카드는, 이미 바뀌기 시작했단다. 네가 그 아이 이름을 불러 준 순간부터. …보렴. 원래 그 아이 카드엔 아무것도 안 그려져 있었어. 이름 없는 그릇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연둣빛 새싹 하나가 돋아 있구나. 네가 그려 준 첫 획이란다.

무성의 카드가 떠올랐다. 텅 비었던 그 카드에, 작은 연둣빛 새싹 하나가 돋아 있었다. 백 년간 아무것도 없던 그릇의 운명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연이가 이름을 불러 준, 그 한마디의 결과였다.

연이—…무성 카드에 새싹이. …내가 그린 거라고요. 이름 한 번 불러 준 걸로. …아, 신님. 저 이제 진짜 알겠어요. 말 한마디, 이름 한 번이 이렇게 남의 운명에 획을 그어요. …그럼 저, 앞으로 더 많이 불러 줄래요. 다들 이름을. 다들 카드에 예쁜 그림이 자라게.

운명의 신—…그것이, 이야기의 주인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란다. 남의 백지에 첫 획을 그어 주는 것. 이름을 불러 주는 것. …너는 이미 여럿의 카드에 획을 그었어. 무성에게 새싹을, 루나에게 용기를, 백문에게 외출을, 언니에게 회복을. …네가 지나간 자리마다, 텅 빈 카드에 그림이 자랐단다. 그게 네가 쓴 이야기야. 네 것만이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

연이—…제가 지나간 자리마다 그림이. …그거 진짜 멋진 말이네요, 신님. …그럼 저 앞으로도 계속 그럴래요. 지나가는 자리마다, 텅 빈 카드에 예쁜 획 하나씩 남기고. 이름 불러 주고, '괜찮다' 해 주고, 삼각김밥 나눠 주고. …그렇게 살면, 제 이야기가 저 혼자 게 아니라 다 같이 쓰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게 좋아요.

운명의 신—너는 여기서 손을 놓고 돌아가면 된단다. 그럼 너는 살지. 생채기 하나 없이, 원래의 평범한 삶으로.

연이—…제가 돌아가면, 이 세계는 어떻게 돼요? 박지은은요? 저 위 부서진 저는요? …저 하나 안전하자고 돌아가면, 여기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고요.

운명의 신—…보여 주마. 네가 손을 놓고 돌아간 뒤의 이 세계를.

카드 한 장이 어둡게 떠올랐다. 그 안에서, 박지은은 이 세계 전부를 손에 넣고 있었다. 인연이란 인연은 다 끊기고, 별자리들은 영영 갇히고, 무성은 다시 검은 물의 도구가 되고, 저 위 부서진 연이는 시든 채 영원히 걸려 있었다. 온기라곤 한 점도 없는, 얼어붙은 세계였다.

연이—…이게, 제가 돌아간 뒤의 세계예요? …다 얼어붙었어. 무성도 다시 도구가 되고, 별자리도 갇히고, 부서진 나는 영영 시들고. …그리고 박지은은, 다 가지고도 저 텅 빈 곳간에 혼자. …안 돼요. 이건 안 돼요. 나 하나 편하자고 이 많은 사람을 이 얼음에 두다니. 절대 못 해요.

운명의 신—…그러니 정하렴, 아이야. 너 하나 안전한 세계와, 모두가 얽혀 사는 불안한 세계. 어느 쪽을 쓰겠니. …이건 강요가 아니야. 어느 쪽을 택하든, 나는 탓하지 않는단다. 안전을 택하는 것도, 결코 비겁한 게 아니야. 다만, 네 선택일 뿐.

연이—…신님. 반대쪽도 보여 주세요. 제가 남아서 다 구한 세계요. 그것도 볼래요. 양쪽 다 보고 정할래요.

운명의 신—…허나 그 카드는, 아직 안 쓰였단다. 네가 남는 쪽은, 정해진 결말이 아니라 백지니까.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단다. …다만, 상상해 볼 수는 있겠지. 네가 원하는 그 세계를.

연이가 눈을 감자, 아직 안 쓰인 백지 카드 위로 희미한 그림이 어렸다. 벚꽃이 흩날리는 강가, 삼각김밥을 나눠 먹는 사람들. 병하도, 무성도, 루나도, 언니도, 백문도, 모카도. 그리고 그 한구석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박지은까지. 다들 웃고 있었다. 아직 안 쓰였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연이—…봤어요, 신님. 제가 쓸 그림. …다 같이 벚꽃 강가에서 웃고 있어요. 박지은까지요. …이거예요. 이게 제가 쓸 이야기예요. 정해진 안전한 결말 말고, 이 안 정해진 따뜻한 그림. …아직 안 쓰였으니까, 제가 쓰면 되잖아요. 그렇죠?

운명의 신—…그렇단다. 아직 안 쓰였으니, 네가 쓰면 된단다. …다만 명심하렴. 그 그림은 저절로 그려지지 않아. 네가 한 붓 한 붓, 피 흘리며 그려야 하지. 상상은 아름답지만, 현실로 만드는 건 고되단다. …그래도, 그 그림을 향해 가겠니?

연이—…네. 고된 거 알아요. 재성부터 여기까지 이미 고생 많이 했는걸요. 넘어지고, 울고, 무서웠고. …근데 신님, 그 고생 하나하나가 다 소중해요. 편하게 얻은 건 감동이 없는데, 힘들게 얻은 건 평생 안 잊혀요. …그러니까 이 그림도, 고되게 그릴게요. 그래야 진짜 제 그림이 되니까.

운명의 신—…참으로, 이야기의 주인다운 각오구나. …대부분은 '고되다'는 말에 물러선단다. 헌데 너는 그 고됨을 소중하다 하는구나. …그래, 그런 아이라면 그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 피 흘리며, 넘어지며, 그래도 끝까지. …자, 그럼 네게 백지를 주마. 네 이야기의, 진짜 첫 장을.

연이—…고마워요, 신님. …저 이 백지, 평생 소중히 쓸게요. 좋은 페이지도, 힘든 페이지도, 다 제 손으로. 남한테 안 떠넘기고, 남 탓 안 하고, 제가 책임지고 쓸게요. 그게 이야기의 주인이 되는 거잖아요.

연이—…그럼 네오는요. 친구들은요.

운명의 신—파수꾼은 원래 사라질 운명이었어. 시간을 거스른 자에겐 소멸의 값이 매겨지거든. 오늘이 아니어도 그는 곧 시간의 틈으로 흩어져. 그게 정해진 글이란다. 네가 무얼 하든.

연이—…원래 사라질 운명. …그럼 병하는, 나를 지키려고 시간을 거슬러 온 순간부터 이미 사라지기로 정해져 있었던 거예요? …나 하나 지키자고, 자기 존재를 걸었다고요? 그걸 알면서도 왔다고요?

운명의 신—…알면서 왔단다. 그 아이는 소멸의 값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시간을 거슬렀지. …사람들은 그걸 어리석다고 한단다. 제 존재를 걸 만큼 가치 있는 게 세상에 어디 있냐고. …허나 그 아이에겐, 네가 그만한 가치였던 거야. 어리석지만, 아름다운 셈이었지.

연이—…바보. 진짜 바보.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데. 삼각김밥 좋아하고, 칠칠맞고, 잘 넘어지는 애인데. …그런 나 하나 때문에 존재를 걸다니. …신님, 그럼 더더욱 안 되겠어요. 병하가 나 때문에 사라지는 결말, 그거 절대 못 받아들여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꿀 거예요.

운명의 신—…바꾸려면, 대가가 있단다. 세상에 공짜로 고쳐지는 운명은 없어. 파수꾼의 소멸을 지우려면, 네가 그만한 것을 내놓아야 해. …그 대가가 무언지, 들어 볼 준비가 되었니?

연이—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 사람은 나 하나 지키려고 몸까지 버렸는데. 결말이 고작, 혼자 조용히 사라지는 거라고요?

운명의 신—운명은 공평하지 않단다. 다만 정확할 뿐이지.

연이—…공평하지 않고, 정확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정확한데 안 공평하다니.

운명의 신—…심은 대로 거둔다는 뜻이란다. 좋은 걸 심으면 좋은 게, 나쁜 걸 심으면 나쁜 게 정확히 돌아오지. 허나 애초에 누구는 좋은 땅에서, 누구는 척박한 땅에서 시작한단다. 그건 공평하지 않아. …병하는 좋은 마음을 심었는데 소멸을 거두고, 박지은은 나쁜 마음을 심었는데 세계를 거뒀지. 정확하지만, 공평하진 않아.

연이—…박지은은 척박한 땅에서 시작했겠네요. 사랑받는 법도 못 배우고, 완벽해야만 인정받는 집에서. …그래서 나쁜 걸 심을 수밖에 없었나 봐요. 좋은 씨앗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신님, 그럼 저 척박한 땅에, 제가 좋은 씨앗 하나 심어 줄게요. 다정함이라는 씨앗. 그럼 그 땅에서도 뭔가 자라겠죠.

운명의 신—…척박한 땅에 씨앗을 심겠다니. …아이야, 그건 농부의 마음이구나. 좋은 땅만 탐내는 게 아니라, 척박한 땅을 일구려는. …그래, 박지은의 땅은 백 년을 얼어붙어 아무것도 안 자랐지. 헌데 네 다정함이라는 씨앗 하나가, 그 언 땅을 녹이고 첫 싹을 틔울지도 몰라. …쉽진 않을 게야. 언 땅을 녹이는 건, 좋은 땅에 심는 것보다 백 배 고되니까.

연이—…고된 거 각오했어요. 근데 척박한 땅에서 자란 싹이, 제일 강하잖아요. 곱게 자란 것보다, 언 땅 뚫고 나온 게 더 질겨요. …박지은도 그럴 거예요. 백 년 언 땅에서 겨우 틔운 싹이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랑이 될걸요. 그거 보고 싶어요. 저 사람이 피우는 첫 싹.

연이—…그럼 신님, 그 안 공평한 걸 바로잡는 게 제 일이겠네요. …좋은 걸 심은 병하가 소멸하고, 나쁜 걸 심은 박지은이 다 가진 거. 그거 뒤집는 거요. …정확한 운명은 두더라도, 안 공평한 건 제가 되쓸게요. 병하한텐 사랑을 돌려주고, 박지은한텐 진짜 필요한 걸 주는 걸로.

운명의 신—…운명의 정확함은 두되, 불공평은 고쳐 쓴다라. …참으로 이야기의 주인다운 발상이구나. 그래, 그것이 '되쓰기'의 본질이란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걸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새 뜻을 덧쓰는 것. …박지은이 부순 건 못 없애지만, 그 위에 회복을 덧쓸 순 있지. 네가 배운 게 바로 그거야.

운명의 신—하지만 아이야. 딱 하나, 그 글을 고쳐 쓰는 길이 있긴 해. 대가가 아주 크지만.

연이—…뭔데요. 뭐든 할게요.

운명의 신—…또 성급하구나. '뭐든 하겠다'는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말이란다. 값도 모르고 계약하는 사람은, 늘 후회하지. …병하가 네게 뭐라 했지? 성급하게 정하지 말라고. 들어 보고 정하라고. …그 아이 말을 듣거라. 값을 다 듣고, 그러고도 하겠다면 그때 하렴.

연이—…맞다. 병하가 그랬지. …죄송해요, 신님. 제가 급했어요. 병하 살린다니까 앞뒤 안 보고. …네, 다 들을게요. 값이 얼마든, 뭘 내놓아야 하든. 다 듣고, 그러고도 정할게요. 후회 안 하게, 똑바로 알고 정할게요.

운명의 신—…좋다. 그 마음이면 됐다. 그럼 값을 일러 주마. 저 파수꾼을 살리려면, 네 사주에 그의 이름을 새겨야 해. 네 운명과 그의 존재를 하나로 묶는 거야.

연이—…제 사주에 병하 이름을 새긴다. …그럼 병하가 소멸의 값으로 사라지려 할 때마다, 제 사주가 그를 붙잡아 주는 거예요? 제 운명이 병하의 닻이 되는 거요?

운명의 신—…그렇단다. 시간이 병하를 흩어뜨리려 할 때, 네 사주에 새겨진 그의 이름이 그를 이 세상에 붙들어 두지. 네가 살아 있는 한, 병하도 흩어지지 않아. …허나 그 대가로, 네 운명은 그의 불안정함을 함께 짊어져. 그의 이름을 새긴 순간부터, 네 삶은 두 사람 몫의 무게가 된단다.

연이—…두 사람 몫의 무게. …무겁겠네요. 근데 신님, 그거 아세요? 병하는 백 년을 저 하나 지키느라 자기 존재를 걸었어요. 저는 그거에 비하면, 두 사람 몫 무게쯤 아무것도 아니에요. …병하가 백 년 짊어진 걸, 이제 제가 나눠 지는 거잖아요. 그거, 오히려 영광이에요.

운명의 신—…'영광'이라. …무게를 짐이 아니라 영광이라 부르는 아이는, 그 무게에 안 짓눌린단다. …대부분은 사랑을 짐으로 여겨 도망치지. 박지은이 그랬듯이. 헌데 너는 그 무게를 기꺼이 지는구나. 그래서 네가 병하를 붙잡을 수 있는 게야. 짐이라 여기는 자는 붙잡지 못하지만, 영광이라 여기는 자는 놓지 않으니까.

연이—…맞아요. 짐이면 내려놓고 싶지만, 영광이면 꼭 안고 싶어요. …병하 이름을 제 사주에 새기는 거, 무거운 짐이 아니라 제일 자랑스러운 훈장이에요. 세상 어떤 사주에도 없는, 저만의 아홉 번째 글자. …그거 새기고, 평생 자랑하고 다닐 거예요. '이거 내가 고른 글자야'라고.

운명의 신—그 순간 너는 '정해진 삶'을 잃는단다. 안전하게 짜여 있던 네 앞날이 통째로 백지가 돼. 두 번 다시 남이 써 준 운명 위를 편히 걷지 못하고, 매일을 네 손으로 직접 써 나가야 하지. 불안하고, 고단하고, 아무 보장도 없는 길이야.

연이—…정해진 삶을 잃는다. 앞날이 백지가 된다. …그럼 저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나도 모르는 채로 사는 거네요. 아무 보장도 없이. …무섭긴 하네요. 다들 그래서 정해진 삶을 좋아하잖아요. 예측 가능하니까. 안전하니까.

운명의 신—그렇단다. 백지는 자유롭지만, 그만큼 무섭지. 아무것도 안 정해졌다는 건, 아무도 안 지켜 준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 백지 위에, 소멸이 예정된 파수꾼의 이름을 새긴다는 건, 그의 불안정한 운명까지 네가 짊어진다는 뜻이야. 그가 다시 흔들리면, 네 삶도 함께 흔들려. …그래도 하겠니?

연이—…신님. 저 잠깐 생각 좀 할게요. …이거, 가볍게 정할 일 아니잖아요. 병하 목숨도, 제 앞날도 걸린 거니까. …병하가 저한테 그랬어요. 성급하게 정하지 말라고. 들어 보고 정하라고. …그러니까 저, 이 카드들 좀 더 볼게요. 제가 뭘 내놓는지, 뭘 얻는지, 똑바로 보고 정할래요.

연이가 다시 카드들을 올려다보았다. 안전한 연이들이, 백지 카드 하나와 저울처럼 마주 떠 있었다. 한쪽엔 보장된 평범한 행복, 다른 쪽엔 아무것도 안 쓰인 백지와 사라져 가는 사람 하나. 누가 봐도, 저울은 안전한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연이—(…저울이 완전 한쪽으로 기울었네. 안전한 쪽이 백 배 무거워. …근데 이상하지. 저 안전한 카드들 보면 볼수록, 하나도 안 끌려. 저 백지 카드가 자꾸 눈에 밟혀. 아무것도 안 쓰였는데, 왜 저게 제일 반짝여 보이지.)

연이—(…아, 알겠다. 저 안전한 카드들은 다 '끝'이 보여. 어떻게 살다 어떻게 끝날지 다 그려져 있어. 그래서 답답해. …근데 저 백지는 끝이 안 보여. 뭐든 될 수 있어. 병하랑 벚꽃 강가도, 무성이랑 삼각김밥도, 다. …그래서 반짝이는 거야. 가능성이 무한하니까. 정해진 건 답답하고, 안 정해진 건 설레.)

운명의 신—…마음속으로 이미 정했구나. 눈이 저 백지만 좇는걸. …아이야, 그 설렘을 믿으렴. 머리는 안전을 계산하지만, 마음은 늘 진짜를 알아본단다. 네 마음이 백지를 향하는 건, 그게 네 진짜 길이라는 뜻이야. …허나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정하렴. 마음속으로 정한 걸, 입으로 말해야 운명이 접수한단다.

연이—…네, 소리 내서 정할게요. …신님. 저, 안전한 카드 안 받을래요. 저 백지 카드 주세요. …정해진 해피엔딩 말고, 제가 직접 쓸 불안한 내일. 병하 이름 새기고, 두 사람 몫 짊어지고, 박지은까지 구하는, 그 고된 길. …그거 갈래요. 소리 내서 말해요. 이게 제 선택이에요.

연이의 목소리가 소리 없는 공간에 울려 퍼지자, 떠 있던 수많은 안전한 카드들이 스르르 빛을 잃었다. 정해진 운명들이, 한 아이의 선택 앞에서 조용히 자리를 비켜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직 백지 한 장만이 밝게 빛났다.

운명의 신—…접수했단다. 소리 내어 정한 그 선택, 운명의 이름으로 확실히 새겼어. …이제 저 안전한 카드들은 사라진단다. 두 번 다시 못 돌아가. 각오됐지? …허나 걱정 마라. 네가 잃는 건 남이 그려 준 그림뿐이야. 진짜 소중한 건, 지금부터 네가 그릴 테니까.

연이—…네, 각오됐어요. 하나도 안 아쉬워요. 남이 그려 준 그림, 애초에 제 것도 아니었는걸요. …자, 그럼 백지 주세요. 제 진짜 이야기, 지금부터 쓸게요. 첫 문장은 이미 정했어요. '나는,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다.'

운명의 신—평범한 행복을 내주고, 불확실한 사람 하나를 얻는 거란다. 그래도 하겠니?

연이—…신님. 정하기 전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저 계속 헷갈리는 게 있어서요. 병하가 그랬어요. 제가 미래에 부서진 사람이라고. 저 위 탑의 별이 미래의 저라고. …근데 그럼, 지금 여기 있는 저는 뭐예요? 과거의 저? 아니면… 아예 다른 저예요?

운명의 신—…어려운 물음이구나. …시간은 강물 같단다. 상류의 물과 하류의 물은 다른 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강이지. …지금 여기 있는 너는, 부서지기 전의 너란다. 저 위 탑의 별은, 부서진 미래의 너고. 둘은 다른 사람 같지만, 같은 강물이야. 네가 지금 온전해지면, 하류의 너도 온전해진단다. 상류가 맑으면, 하류도 맑아지듯이.

연이—…같은 강물. …그럼 저 위 부서진 저를 구하는 게, 결국 저를 구하는 거네요. 저는 저를 구하러 온 거고. …신님, 이거 너무 이상하고 슬퍼요. 제가 저를 구해야 하다니. 근데 동시에 좀 든든해요. 아무도 안 구해 줘도, 제가 저를 구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운명의 신—…그것이 '되쓰는 자'의 본질이란다, 아이야. 남이 구해 주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를 구하는 것. …네 앞의 그 백지는, 남이 네게 준 게 아니야. 미래의 네가, 부서지는 순간까지 계산해서 과거의 너에게 남긴 기회란다. 너는, 네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지금 받는 거야.

연이—…미래의 내가, 부서지면서까지 나한테 이걸. …아, 신님. 저 좀 울어도 돼요? …미래의 저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자기가 지워지는데도, 과거의 나 살릴 계획을 세우고. 병하한테 부탁하고. …저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저 자신한테, 처음으로 좀 자랑스러워요.

운명의 신—…자랑스러워해도 된단다. 자기를 구하려 그토록 애쓴 아이는, 흔치 않아. …그리고 아이야, 지금 네가 백지를 택하는 것도, 미래의 네가 그토록 지키려 한 그 마음을 잇는 거란다. 상류의 네가 하류의 너에게, 하류의 네가 상류의 너에게.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거지. 시간을 넘어서.

연이—…서로가 서로를 구한다. 시간을 넘어서. …멋있다. 저 진짜 멋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네요. …좋아요, 신님. 미래의 제가 남긴 이 선물, 헛되게 안 쓸게요. 저를 구하고, 병하를 구하고, 다 구할게요. 그래서 미래의 저한테, '고마워, 잘 받았어'라고 할래요.

연이는 떠 있는 카드들을 올려다보았다. 웃는 연이도, 우는 연이도, 전부 남이 그려 준 그림이었다. 단 한 장도, 제 손으로 그린 건 없었다.

연이—(…이 여행, 참 길었다. 재성에서 꽃돼지로 시작해서, 청토끼랑 싸우고, 언니 구하고. 도서관에서 백문 님 만나 본뜻 배우고, 소망이 되쓰고. 자미두수에서 무성 이름 돌려주고. 그리고 여기까지. …돌아보니, 나 진짜 많이 변했네. 읽히기만 하던 애가, 이제 쓰는 애가 됐어.)

연이—(…재성에서 루나가 그랬어. 물은 어디로든 흐른다고. 도서관에서 백문 님이 그랬어. 쓰는 모든 게 사랑을 지키게 하라고. 무성이 그랬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지으면 된다고. 병하가 그랬어. 운명은 되쓸 수 있다고. …다들 나한테 같은 걸 가르쳐 줬어. 정해진 건 없다고. 내가 쓰는 거라고.)

연이—(…그럼 답은 정해졌지. 아니, 정해진 게 아니라 내가 정하는 거지. …남이 그려 준 안전한 그림 위에서 평생 편히 사느냐, 아니면 아무것도 안 쓰인 백지에 내 손으로 병하랑 같이 쓰느냐. …나는 후자야. 백 번을 물어도, 후자야.)

운명의 신—…마음을 정한 눈이구나. 허나 다시 한번 묻겠다. 그 백지엔 아무 보장이 없어. 병하와 함께 써 나가도, 그 끝이 행복하리란 보장조차 없단다. 어쩌면 더 큰 고생과 상실이 기다릴지도 몰라. 그래도 그 백지를, 안전한 그림과 바꾸겠니?

연이—…네, 신님. 바꿀게요. …보장 없는 거 알아요. 근데요, 보장된 행복은 사실 행복이 아니에요. 정해진 대로 오는 건, 감동이 없거든요. …제가 직접 써서, 고생 끝에 얻는 작은 행복. 그게 진짜예요. 삼각김밥 하나도, 힘들 때 먹으면 세상 구원이잖아요. 저는 그런 행복을 쓸래요. 병하랑 같이.

연이—…있잖아요, 신님. 저 그동안 제가 운이 나쁜 사람인 줄만 알았거든요. 버스 놓치고, 삼각김밥 속 틀리고, 자꾸 꼬이고.

연이—근데 이 여행에서 딱 하나 배웠어요. 운명은 읽는 게 아니라 쓰는 거라고. 네오가, 백문 님이, 다들 그걸 가르쳐 줬어요.

연이—…그리고 이제 알아요. 그 불운들, 사실 다 박지은이 심은 거였다는 거. 제가 운이 나쁜 게 아니라, 누가 제 운을 훔쳐 갔던 거였어요. …근데 신님, 웃긴 건요. 그 불운 덕에 제가 이 세계에 왔고, 병하를 만났고, 이 여행을 했어요. …나쁜 운이, 제일 좋은 걸 데려다줬네요. 인생 참 알 수 없어요.

운명의 신—…그렇단다. 운명은 그렇게 얄궂지. 가장 나쁜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고. …그래서 함부로 '이건 불행이다, 이건 행운이다' 단정할 수 없단다. 끝까지 살아 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지. …너는 그 얄궂음을, 원망하지 않는구나.

연이—…원망 안 해요. 어차피 다 제 이야기의 한 페이지인걸요. 불운 페이지도, 행운 페이지도, 다 모여야 제 이야기가 되니까. …나쁜 페이지 하나 찢어 버리면, 그 뒤 좋은 페이지도 같이 없어져요. 그러니까 다 안고 갈래요. 불운까지 통째로, 제 이야기로.

운명의 신—…아이야. 너는 참으로, 이야기의 주인다운 말을 하는구나. …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눈이란다. 자기 불운까지 제 이야기로 끌어안는 눈. …그런 눈을 가진 아이라면, 백지를 줘도 되겠어. 아니, 그런 아이한테만 백지를 줄 수 있지.

연이—그러니까 정해진 결말은 정중히 사양할게요. 남이 써 준 해피엔딩보다, 제가 직접 쓰는 불안한 내일이 백 배 나아요.

운명의 신—…남이 써 준 해피엔딩을 사양하는 아이라. …아이야, 그건 참으로 용감한 말이란다. 대부분은 남이 써 준 해피엔딩이라도 감지덕지 받거든. 해피엔딩이 어디냐고. …헌데 너는 그 해피엔딩조차, 네 손으로 안 쓴 거면 싫다는구나. 행복보다 '내 것'을 택하는 아이. 참 드물어.

연이—…네. 남이 준 행복은, 사실 행복이 아니거든요. 그냥 받은 거지, 이룬 게 아니니까. …제가 넘어지고 울면서 겨우 이룬 작은 행복이, 남이 뚝딱 만들어 준 큰 행복보다 백 배 소중해요. …그래서 사양해요. 저 스스로 쓸래요. 서툴러도, 제 손으로.

운명의 신—…후회하지 않겠니. 평범한 삶은, 한번 잃으면 두 번 다시 못 얻는단다.

연이—…솔직히 조금 무섭긴 해요. 평범한 삶. 정해진 대로 학교 다니고, 취직하고, 예측 가능하게 사는 거.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다들 그렇게 살고, 그게 안전하고. …근데 신님, 저 이제 그 평범이 뭔지 좀 알 것 같아요. 이 여행하기 전엔 몰랐는데.

운명의 신—…무엇을 알았니, 아이야.

연이—…평범이 나쁜 게 아니라, '남이 정해 준 평범'이 문제였다는 거요. …제가 직접 고른 거면, 평범해도 좋아요. 근데 정해진 대로 떠밀려 사는 평범은, 아무리 안전해도 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정했어요. 남이 준 안전한 평범 말고, 제가 고른 불안한 모험. 후회 안 해요. 이건 제가 고른 거니까.

운명의 신—…남이 준 평범과, 네가 고른 모험이라. …참으로 명료하구나. 대부분은 그 둘을 구분조차 못 한단다. 남이 준 걸 제 것인 줄 알고 평생 살지. …너는 그 차이를 아는구나. 그래서 이 선택이, 네게 두렵지 않은 게야. 잃는 게 아니라, 되찾는 거니까.

연이—…되찾는다. …맞아요. 이건 잃는 게 아니에요. 원래 제 거였던, 제 이야기의 주도권을 되찾는 거예요. 그동안 남이 대신 써 주던 걸, 이제 제가 쥐는 거죠. …좀 무섭지만, 설레요. 처음으로 제 인생이 진짜 제 거가 되는 거니까. …신님, 저 이 되찾기,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운명의 신—…그 자신감이, 참 보기 좋구나. …가렴, 아이야. 네 이야기를 되찾으러. 그리고 그 이야기에, 사랑하는 이들을 다 초대하렴. 병하도, 무성도, 루나도, 그리고 그 외로운 여자까지. …네 백지가, 그 모두의 이름으로 가득 차기를. 운명의 근원이, 너를 축복한단다.

연이—네. 대신 그 사람이랑 같이 쓸 거니까요. 혼자 편한 것보다, 둘이서 고생하는 게 저는 훨씬 좋아요.

연이—…생각해 보면요, 신님. 병하가 준 게 참 많아요. 삼각김밥 하나에 웃어 준 거, 백 년을 옆에서 지켜 준 거, 시간까지 거슬러 온 거. …근데 저는 아직 하나도 못 갚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갚을 차례예요. 제 평범한 삶 하나 내주는 걸로, 그 백 년 사랑에 답할 수 있다면, 그거 완전 남는 장사예요.

운명의 신—…사랑을 '남는 장사'라 하는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허나 틀린 말은 아니야. 사랑은 주고받을수록 불어나는, 세상 유일한 셈이니까. 뺏을수록 줄어드는 박지은의 셈과는 정반대지. …너와 병하의 셈은, 서로 주고 또 주어서, 결국 둘 다 부자가 되는 셈이란다.

연이—…맞아요! 사랑은 주면 줄수록 부자가 되는 거예요! …박지은은 뺏어서 텅 비었고, 저희는 줘서 꽉 찼어요. 같은 셈인데 방향만 반대인데, 결과가 이렇게 달라요. …신님, 저 이 셈을 박지은한테도 가르쳐 주고 싶어요. 뺏지 말고 주라고. 그럼 그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운명의 신—…적에게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려는 아이라니. …아이야, 그거 아니? 박지은은 그 셈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다만 첫 번째 '줌'에서 거절당하고, 그 뒤로 주는 게 무서워진 거지. 한 번 크게 데인 사람은, 다시 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단다. …네가 그 여자에게 가르칠 건, 셈이 아니라 용기일 게야. 다시 줄 용기.

연이—…다시 줄 용기. …맞아요. 박지은은 병하한테 다 줬다가 거절당했으니까. 그 뒤로 주는 게 무서웠던 거예요. …그럼 제가 보여 줄게요. 줘도 안 거절당하는 걸. 제가 먼저 그 사람한테 다정함을 주고, 안 거절할게요. 그럼 그 사람도, 다시 줄 용기가 생기겠죠. 한 번만 성공하면, 그 뒤론 쉬워지니까.

떠 있던 카드들이 일제히 뒤집혔다. 그리고 그 뒷면에서, 텅 빈 백지 카드 한 장이 연이의 손안으로 내려앉았다.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그녀만의 카드였다.

연이—…이게, 제 백지 카드. …아무것도 안 쓰여 있어. 정말 텅 비었네. …무섭다. 근데 설레. 이 위에 뭐든 쓸 수 있다는 거잖아. 병하랑 벚꽃 강가도, 무성이랑 삼각김밥도, 다. …남이 그려 준 그림이 아니라, 내가 그릴 내 이야기. …처음이야. 이렇게 온전히 내 거인 게.

연이가 백지 카드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얼어붙었던 손끝이, 그 카드에 닿자 조금씩 따뜻해졌다. 아무것도 안 쓰인 그 백지가,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카드보다 소중했다. 그것은 자유의 무게였고, 동시에 책임의 무게였다.

연이—…신님. 저 이거 소중히 쓸게요. 한 장 한 장, 후회 없이. …불안한 백지지만, 그래서 더 소중해요. 정해진 게 없으니까, 다 제가 채울 수 있잖아요. …첫 페이지는 정했어요. '병하를 구하러 간다.' 그게 제 이야기의 다음 문장이에요.

운명의 신—…좋은 첫 문장이구나. …아이야, 하나만 일러 주마. 백지는 언제든 다시 쓸 수 있단다. 오늘 잘못 써도, 내일 고쳐 쓰면 돼. 그게 남이 써 준 운명과 다른 점이야. 네 이야기는, 네가 살아 있는 한 계속 고쳐 쓸 수 있어. …그러니 완벽하게 쓰려 애쓰지 말고, 그저 네 손으로 쓰렴. 틀려도 괜찮으니.

연이—…틀려도 괜찮다. …그 말, 진짜 위로가 되네요. 저 완벽한 사람 아니거든요. 실수도 많고, 칠칠맞고. …근데 틀려도 고쳐 쓰면 된다니까, 마음이 편해요. 병하 구하는 것도, 박지은 녹이는 것도, 한 번에 완벽하게 안 돼도 괜찮은 거잖아요. 틀리면 다시. 그럼 되잖아요.

운명의 신—…그렇단다. 박지은이 백 년간 무너진 건, 완벽하려 했기 때문이야. 한 번 틀리면 다 끝이라 믿어서, 틀릴까 봐 아무것도 못 나눴지. …너는 다르구나. 틀려도 고쳐 쓰면 된다는 걸 아니까, 겁 없이 나눌 수 있어. 그 차이가, 백 년을 가른 게란다.

연이—…박지은한테도 이거 알려 줄래요. 틀려도 괜찮다고. 백 년 틀렸어도, 지금부터 고쳐 쓰면 된다고. …그 사람 완벽하려다 저렇게 된 거잖아요. 그럼 '안 완벽해도 돼'가, 그 사람한테 제일 필요한 말이겠네요. …고마워요 신님. 박지은 녹일 말, 하나 더 배웠어요.

운명의 신—좋아. 그 선택, 운명의 이름으로 접수하마. 가서 네 글을 쓰렴. 이야기의 주인아.

연이—…신님. 고마워요. 저한테 이 선택을 주셔서. …사실 그냥 정해진 대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멈춰서 물어봐 주셨잖아요. …그게 진짜 자비 같아요. 강요가 아니라, 선택할 기회를 주는 거. …저 이 기회, 헛되게 안 쓸게요. 병하도, 박지은도, 다 구하는 데 쓸게요.

운명의 신—…나는 늘 물어본단다. 다만, 대부분은 안전한 쪽을 택하지. 그걸 탓하진 않아. 무서운 게 당연하니까. …허나 아주 가끔, 너 같은 아이가 백지를 택한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설레지. 이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쓸까 하고. …가렴, 연이야. 네 이야기, 나도 궁금하구나. 오랜만에.

연이—…신님도 설레실 때가 있구나. …좋아요, 기대하세요. 제 이야기, 재밌게 쓸게요. 슬픈 페이지도 있겠지만, 끝은 꼭 다 같이 웃는 걸로. …병하랑, 무성이랑, 루나랑, 언니랑, 백문 님이랑, 모카랑. 그리고… 박지은까지. 다 같이 벚꽃 강가에서 삼각김밥 먹는 걸로. 그게 제 결말이에요.

운명의 신—…욕심이 많구나. 적까지 결말에 넣다니. …허나 그 욕심이, 참 아름답구나. …그래, 어디 그 결말을 향해 가 보렴. 시간을 다시 흘려주마. 이번엔, 네 편에서.

연이—…신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저 내려가면, 여전히 힘들 거잖아요. 병하는 묶여 있고, 박지은은 강하고, 저 손은 얼었고. …그 상황 그대로일 텐데, 제가 뭘로 싸워요? 백지 카드 하나로?

운명의 신—…아이야. 너는 이미 무기를 가졌단다. 방금 이 공간에서 얻은 것. …'정해진 건 없다'는 확신. 그 하나면 충분해. …네가 진 게 정해진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너는 어떤 절망 앞에서도 다시 일어선단다. 얼어붙은 손도, 묶인 파수꾼도, 강한 적도. 다 '아직 안 정해진 것'이니까. 백지 위에선, 무엇이든 다시 쓸 수 있어.

연이—…'아직 안 정해진 것.' …그 말, 아까 무릎 꿇었을 때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병하 붙잡혀 갈 때, 나 정말 다 끝난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니었네요. 끝난 게 아니라, 아직 안 쓴 거였어요. …신님, 저 이 말 평생 안 잊을게요. 절망이 와도, '이건 아직 안 정해진 거야'라고 되뇌면서 다시 일어날게요.

운명의 신—…그 한마디가, 박지은에게 없던 거란다. 그 여자는 한 번 정해지면 끝이라 믿었어. 그래서 틀릴까 봐 얼어붙었고, 얼어붙은 채 백 년을 살았지. …너는 그 반대의 믿음을 가졌구나. 언제든 다시 쓸 수 있다는. …그 믿음을, 박지은에게도 나눠 주렴. 그게 그 여자를 얼음에서 꺼내는 열쇠가 될 게야.

연이—…네. 나눠 줄게요. '박지은 씨, 아직 안 끝났어요. 지금부터 다시 쓰면 돼요.' 그렇게요. …신님, 오늘 여기서 진짜 많이 배웠어요. 이 멈춘 시간이, 저한테 제일 큰 선물이었어요. 싸울 힘이 아니라, 싸울 이유랑 방법을 얻었으니까요.

연이—…맞아요. 아직 안 정해졌어. 진 게 아니라, 아직 안 쓴 거야. …고마워요, 신님. 이제 안 무서워요. 내려가서, 제 손으로 다 다시 쓸게요. 병하도, 박지은도, 저도, 다 웃는 결말로. …자, 갈게요. 제 이야기의 다음 페이지로.

운명의 신—…가렴, 이야기의 주인아. 그리고 기억하렴. 네가 쓰는 모든 페이지를, 나는 이 위에서 지켜보고 있단다. 응원하면서. …오랜만이야. 이렇게 응원하고 싶은 아이는.

연이—…신님, 진짜 마지막 질문요. 저 내려가면 힘이 다시 생겨요? 아까 손 다 얼었었는데.

운명의 신—…네 힘은, 얼어붙은 게 아니라 갇혀 있었을 뿐이란다. 절망이 네 손을 얼렸지. 헌데 이제 너는 절망을 벗어났어. '아직 안 정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절망이 녹으면, 힘도 돌아온단다. 그리고 저 아래에선, 네가 못 본 사이에 물의 아이가 거의 다 올라왔더구나. 네가 내려가는 순간, 그 아이도 닿을 게야.

연이—…루나가 거의 다 올라왔다고요?! …아, 다행이다. 저 여기서 이러는 동안, 루나가 물길을 끝까지. …그럼 저 내려가면, 루나랑 합류하는 거네요. 물의 힘이랑 제 넝쿨이랑 합치면… 오, 이거 뭔가 될 것 같은데요. 신님, 저 왠지 이길 것 같아요. 힘이 막 나요.

운명의 신—…그 설렘이, 이미 네 힘이 돌아왔다는 증거란다. …가렴. 물의 아이와 함께, 사랑의 힘으로 저 얼음을 녹이렴. 힘 대 힘이 아니라, 마음 대 마음으로. …그것만이 박지은을 이기는 게 아니라, 구하는 길이니까.

백지 카드가 빛으로 부서지며 연이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얼어 있던 세계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시간이, 이번엔 연이의 편에서 흘렀다.

그 순간, 연이의 사주에 아홉 번째 글자가 새겨졌다. 여덟 글자로 완성됐던 그 사주에, '박병하'라는 이름이 덧쓰였다. 정해진 운명의 여덟 글자 위에, 연이가 제 손으로 고른 아홉 번째 글자. 그것은 세상 어떤 사주에도 없는, 오직 연이만의 글자였다.

동시에, 얼어붙었던 연이의 손끝에서 여린 새싹이 다시 돋았다. 절망이 녹자, 갇혔던 힘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저 아래에서, 마침내 물의 아이가 세계의 끝까지 올라와 연이의 발밑에 닿았다. 맑은 물빛이, 얼어붙은 발밑을 따뜻하게 적셨다.

연이—…돌아왔다. 힘도, 루나도. …이제 안 무서워. 진 게 아니라, 아직 안 쓴 거니까. …자, 박지은 씨. 병하 씨. 저 위 부서진 나. 그리고 다들. …지금부터, 제가 우리 이야기를 다시 쓸게요. 다 같이 웃는 결말로.

저 아래에서, 마침내 물의 아이가 세계의 끝까지 올라와 연이의 손을 잡았다. 오래 파고 오른 물길의 끝. 물빛과 넝쿨이 다시 맞닿는 순간, 얼어붙었던 세계 한구석에 작은 온기가 번졌다.

루나—…연이! 나 왔어! 물길 끝까지 팠어! …봐, 내가 결정적일 때 나타난다고 했지? 물의 아이가 제일 멋질 때, 바로 지금이야! …자, 이제 나랑 너랑, 물이랑 나무랑 힘 합치자! 저 얼음 여자, 우리 둘이면 녹일 수 있어!

연이—…루나! 진짜 왔구나! …아, 든든해. 이제 진짜 혼자 아니야. …자, 루나. 우리 사랑의 힘으로, 저 백 년 얼음 녹이러 가자. 병하도 구하고, 부서진 나도 살리고, 박지은도. 다 같이 웃는 결말, 지금부터 쓴다!

운명의 신이 준 백지 위에, 연이가 첫 문장을 썼다. '나는,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의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다시 얼어붙은 세계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엔, 시간이 그녀의 편이었다.

제40화 · 운명의 신 — 끝. 제41화 「사랑의 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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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필 안내

『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본문은 게시 전 편집자가 문장과 흐름을 다듬습니다. 오탈자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문의로 알려 주시면 확인 후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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