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의 내민 손 앞에서 잠깐 흔들렸던 박지은이, 그 흔들림을 이 악물고 떨쳐냈다. 손을 잡는 대신, 백 년 원한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낸 것이다.
박지은—…안 잡아. 못 잡아. 잡으면 내가 무너지니까. …차라리 다 흩어뜨릴래. 서로가 서로의 땅이라고? 그럼 그 서로를 억지로라도 떼어 놓으면 되잖아. 백 년 힘, 지금 다 쏟는다!
방금까지 서로를 땅 삼아 버티던 여섯의 실이, 그 마지막 발악 앞에서 하나씩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다정함에 흔들린 것을 감추려는 여자의 안간힘은, 그 어떤 공격보다 사나웠다.
연이—…안 돼! 다들 손 놓지 마! 방금 됐잖아, 서로가 서로의 땅이라고! …근데 왜, 왜 자꾸 풀려. …박지은 씨, 지금 당신 손 잡으려던 거 봤어요! 왜 도로 뿌리쳐요! 잡으면 되잖아요!
박지은—…봤어? 봤으니까 더 못 잡아! 흔들린 걸 들켰으니까! …나는 흔들리면 안 돼. 백 년을 버틴 게 다 무너지니까. …그러니까 그 손, 안 잡아. 대신 다 부술 거야. 흔들리게 만든 너희 전부를. 그래야 내가 안 무너지니까!
박지은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발악이, 이기기 위한 게 아니라 흔들리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것임을. 연이의 다정함이 백 년 얼음에 낸 실금이 무서워서, 그 실금째로 세계를 부수려는 것이었다. 가장 강한 공격은, 늘 가장 겁먹은 마음에서 나왔다.
연이—…박지은 씨. 지금 당신, 화가 나서 이러는 거 아니죠. 무서워서 이러는 거죠. …내가 낸 그 실금이, 백 년 얼음을 깰까 봐. 그 얼음 아래 진짜 당신이 나올까 봐. …그래서 더 세게 부수는 거예요. 근데요, 아무리 세게 부숴도 그 실금은 안 메워져요. 이미 났으니까.
박지은—…닥쳐! 실금 같은 거 없어! 나는 안 흔들려! …백 년을 이 얼음으로 버텼는데, 겨우 네 다정한 말 몇 마디에! …아니야. 없어. 안 흔들려. 안 흔들린다고! …그러니까 세계째로 부술 거야. 흔들릴 것 자체를 없애면, 안 흔들리니까!
연이—…그렇게 소리치는 것 자체가, 흔들린다는 뜻이에요. 정말 안 흔들리면, 그냥 무시하면 되잖아요. 근데 당신은 자꾸 '없다'고 소리쳐요. 그건 있다는 거예요. …박지은 씨, 흔들려도 괜찮아요. 백 년 얼음이 녹는 거, 그거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봄이 오는 거예요.
박지은—…봄. …나한테도, 봄이 올 수 있어? …백 년 겨울이었는데. …아니. 안 돼. 봄이 오면, 얼음이 다 녹으면, 그 밑에 뭐가 있을지 나도 몰라. 무서워. 차라리 겨울이 나아. 익숙하니까. …그러니까 봄 얘기, 하지 마.
박지은의 손가락이 허공을 훑을 때마다 실이 한 가닥씩 끊겼다. 그때마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하나씩 꺼졌다.
연이—…안 돼! 한 명씩 밀어내지 마! …방금 다들 올라왔는데! 힘들게 이어졌는데! …박지은 씨, 그만해요! 이건 너무 잔인해요! 겨우 다시 만난 사람들을, 또 떼어 놓는 거!
박지은—…잔인? 이게 잔인해? …아니, 이게 세상이야. 겨우 이어졌다 싶으면 또 떼어 놓는 게 세상이라고. 나는 그걸 백 년간 겪었어. 이어지자마자 끊기고, 또 끊기고. …이제 너도 그 맛을 봐야지. 나만 당하면 억울하잖아.
연이—…그래서 남한테도 똑같이 겪게 하는 거예요? 당신이 아팠으니까 남도 아프라고? …그건 복수지 정의가 아니에요! 당신이 당한 걸 남한테 물려주면, 그 아픔이 영영 안 끝나요! …누군가는 끊어야 해요, 그 고리를. 그리고 그게, 나예요. 당신 아픔, 나한테서 끝낼게요.
박지은—…내 아픔을, 네가 끝낸다고. …왜. 왜 네가. 나를 미워하면서, 왜 내 아픔을 끝내 줘. …그런 거, 나한테 해 준 사람 아무도 없었어. 다들 내 아픔을 이용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도망쳤지. 끝내 주겠다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연이—…미워하면서도 끝내 주고 싶어요. 왜냐면, 당신 아픔이 안 끝나면 당신은 계속 남을 아프게 할 거고, 그럼 이 슬픔이 영영 도니까요. …누군가는 '나는 물려주지 않을게' 해야 멈춰요. 병하가 나한테 그랬듯이. …그러니까 박지은 씨, 당신 백 년 아픔, 여기서 끝내요. 나랑 같이. 더는 아무한테도 안 물려주고.
박지은—…그만. …자꾸 그렇게 다정하게 굴면, 내가… 내가 정말 손을 펴 버릴 것 같잖아. …안 돼. 아직은 안 돼. 백 년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면, 그 백 년이 너무 억울하잖아. …조금만, 조금만 더 미워하게 둬. 준비가 안 됐어. 아직.
「연이야! 실이, 실이 자꾸 빠져나가!」 루나가 다시 별빛 감옥으로 빨려 들어갔다. 언니의 실도, 백문의 등불도, 무성의 물도 차례로 세계의 아가리에 삼켜졌다.
루나—…연이! 놓지 마! 나 아직 물길 붙잡고 있어! …끊긴 게 아니야, 잠깐 밀린 거야! 물은 다시 흘러! 나 꼭 다시 올라갈게! 조금만 버텨, 연이!
루나 언니—…연이 씨! 저희 몸은 저 아래 있으니까, 별빛만 갇힌 거예요! 죽은 거 아니에요! …빵 반죽처럼, 눌려도 다시 부풀어요! 저희 꼭 돌아갈게요!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요!
백문—…연이 학생! 실은 계약이고, 계약은 다시 맺을 수 있네! 지금 밀린 건 끝이 아닐세! …믿게. 자네가 여태 맺은 인연은, 이 정도로 안 끊어져. 잠시 숨을 고를 뿐이야. 곧, 곧 다시…!
무성—…연이! 안 돼, 내 물이…! …젠장, 저 여자가 세계째로 감으니까 내 물도 다시 삼켜져! …연이, 미안. 나 또 못 지켜. …근데 포기하지 마! 우리 실 아직 안 끊겼어! 네 안에 다 있어! 조금만…!
동료들의 목소리가 하나씩 멀어졌다. 다시 이어졌던 인연들이, 박지은의 마지막 발악에 도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무도 '잘 가'라고 하지 않았다. 다들 '다시 올게'라고 했다. 밀린 것과 끊긴 것은, 다른 것이었다.
연이—…다들 '다시 올게'라고 했어. 그럼 됐어. …밀린 거지, 끊긴 게 아니야. 루나는 물길을 파고, 언니는 다리를 낫게 하고, 백문 님은 서가를 열고, 무성은 물을 맑히고 있어. 지금 안 보여도, 다 나한테 오고 있어. …나는 그걸 믿고 버티면 돼.
박지은—…믿음이라. 참 순진하네. 믿음으로 뭘 할 수 있는데? 지금 네 옆엔 저 사자 하나뿐이야. 그마저 곧 묶일 거고. …믿음은 배부르게 안 해 줘, 얘야. 나는 백 년간 믿음 대신 힘을 모았고, 그래서 이 세계 전부를 가졌어.
연이—…근데 당신, 그 힘으로 다 가졌는데 지금 혼자잖아요. 나는 믿음밖에 없는데, 나한텐 돌아올 사람이 이렇게 많고요. …힘은 세계를 주지만, 믿음은 사람을 줘요. 당신은 세계를 골랐고, 나는 사람을 골랐어요. …누가 더 부자일까요, 우리?
「야, 이거 완전 반칙이잖아! 우리 방금 이겼는데!」 모카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폭풍 한복판에는 둘만 남았다. 연이와, 그 앞을 막아선 금빛 사자.
연이—…다들 밀려났어. 다시, 둘만. …병하, 무섭다. 방금까지 여섯이었는데. …근데 너 있으니까, 아주 안 무섭진 않아. 재성에서도, 도서관에서도, 늘 이렇게 둘이 시작했잖아. …그래. 둘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우리 원래 둘이었으니까.
네오—…맞아. 우리 늘 둘부터였어. 재성 검은 강도 둘이 건넜고, 도서관도 둘이 들어갔지. …겁먹지 마, 연이. 여섯이 하나로 뭉치는 것도 봤잖아. 둘이 여섯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야. 밀려난 동료들, 다 다시 와. …그때까지, 이 둘이 버티자.
박지은—…둘이 시작이라. 참 애틋하네. 근데 얘들아, 이번엔 그 둘도 못 지켜. 저 사자, 이제 곧 내 손에 묶일 거고. 그럼 너 하나 남지. …하나부터 다시 시작? 하나는 시작이 아니라, 끝이야. 백 년간 내가 그랬거든.
연이—…하나여도 시작이에요, 박지은 씨. …나 하나만 있어도, 나한테 이어진 실이 수백 개니까. 몸은 하나여도, 마음은 여럿이랑 이어져 있어요. …당신은 하나가 끝이었지만, 그건 당신이 아무하고도 안 이어져서예요. 나는 하나여도, 절대 하나가 아니에요.
박지은—…실이 수백 개라. 근데 지금 그 수백 개, 다 밀려났잖아. 눈앞에 하나도 없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안 보이는 실이, 지금 이 순간 널 지켜 줘? 저 사자 구해 줘? 아무것도 못 하잖아.
연이—…지금 당장은 못 해도, 곧 해요. 루나 물길이 절반 왔고, 다들 다시 오는 중이에요. …그리고 박지은 씨, 안 보이는 게 힘이 없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실이 나한테 힘을 줘요. '혼자 아니다'라는 마음. 그거 하나로, 나 이 무릎 다시 세워요. 봐요.
연이가 얼어붙은 무릎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손도 넝쿨도 얼었지만, 수백 개의 보이지 않는 실이 그 등을 받쳐 주는 것 같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하나로, 무너졌던 몸이 다시 섰다. 박지은은 그 광경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박지은—거 봐. 인연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씩 끊으면 결국 혼자가 되는 거야.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어.
연이—…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긴 게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당신은 백 년간 인연을 끊는 데만 힘을 썼어요. 그래서 당신 세상은 다들 혼자죠. …근데 내 세상은 안 그래요. 밀려나도 다시 오고, 끊겨도 다시 잇고. 나는 그런 세상을 살아요. 당신과 다른 세상을.
박지은—…다른 세상. …참 예쁜 착각이야. 근데 얘야, 지금 네 옆엔 아무도 없어. 파수꾼도 곧 묶일 거고, 친구들도 다 밀려났고. …네 그 예쁜 세상, 지금 어디 있는데? 보여 줘 봐. 텅 빈 이 폭풍 한복판에.
연이—…여기 있어요. 안 보여도. …내 심장에, 내 손끝 실에, 내 기억에. 다들 여기 있어요.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죠. 근데 제일 중요한 건 눈에 안 보여요. 마음, 인연, 사랑. 다 안 보이지만, 제일 세요. …그게 당신이 백 년을 못 이긴 이유고요.
연이—…아니야. 다들 잠깐 놓친 것뿐이야. 실은 안 끊겼어. 끊긴 것처럼 보일 뿐이야.
연이—…봐요, 박지은 씨. 다들 밀려나면서 '잘 가'가 아니라 '다시 올게'라고 했어요. 그게 증거예요. 실이 안 끊겼다는. …당신은 끊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잠깐 늘어난 것뿐이에요. 고무줄처럼. 놓으면 다시 튕겨 와요. …당신 손에서, 곧.
박지은—…고무줄이라. 귀여운 비유네. 근데 고무줄도 너무 세게 당기면 끊어져. …자, 어디 보자. 네 그 낙관이 언제까지 가나. 하나씩, 하나씩 당겨서, 정말 다 끊어지는 걸 네 눈앞에서 보여 줄게. 그때도 '다시 올게'라고 할 수 있나 보자.
연이—…할 수 있어요. 백 번이고. …박지은 씨, 당신이 아무리 당겨도, 우리 실은 사랑으로 맺은 거라 안 끊겨요. 미움으로 당기는 힘보다, 사랑으로 붙잡는 힘이 더 세거든요. …당신 백 년 미움이랑, 우리 하루 사랑이랑, 어느 게 센지. 지금부터 보여 드릴게요.
박지은—…하루 사랑이 백 년 미움을 이긴다고? …건방진. 그럼 어디 증명해 봐. 저 사자 묶인 거, 동료들 밀려난 거, 네 손 언 거. 지금 이 상황에서, 네 하루 사랑이 뭘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잖아. 말만 번지르르하지.
연이—…지켜봐요. 지금은 무력해 보여도, 사랑은 절대 안 져요. …왜냐면 사랑은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끝까지 안 놓으려고 버티는 거거든요.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놓느냐 붙잡느냐예요. 그리고 나는, 절대 안 놔요. 그게 사랑의 이기는 방법이에요.
연이—…해 봐요. 무서워도, 나 안 꺾여요. 병하가 준 이 믿음, 안 놔요. …근데 박지은 씨. 하나만. 당신 그렇게 다 끊어서, 정말 행복해요? 백 년간 다 끊었는데, 지금 행복해요? …아니잖아요. 끊을수록 당신만 더 혼자가 됐잖아요.
박지은—…행복. …그 단어, 참 오랜만이네. …백 년간 나는 이기는 것만 생각했지, 행복한 건 생각도 안 했어. 이기면 행복한 줄 알았거든. …근데 다 이겼는데도, 행복하진 않더라. 곳간을 채울수록, 밤은 더 길어졌어. …이상하지? 다 가졌는데 왜 행복이 없을까.
연이—…행복은 이기는 게 아니라 나누는 데 있으니까요. …당신은 백 년간 남을 이기고 뺏었죠. 근데 행복은 이겨서 오는 게 아니라, 같이 웃어서 와요. 삼각김밥 나눠 먹고, 서로 안부 묻고, 손 잡고 걷고. …그 시시한 것들이 행복이에요. 당신이 시시하다고 안 한 그것들이요.
박지은—…이제 와서 그런 걸 어떻게 해. 백 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나눠 먹을 사람도 없고, 안부 물을 사람도 없어. 다 내가 밀어냈으니까. …너무 늦었어. 행복 같은 거, 나한텐 이미 늦었다고. …그러니까 자꾸 그런 얘기로 나 아프게 하지 마.
연이—…안 늦었어요. …여기 있잖아요, 나눠 먹을 사람. 나예요. 지금 당신 적이지만, 그래도 나 당신이랑 삼각김밥 나눠 먹을 수 있어요. …당신이 병하 뺏었어도, 나 당신 손 잡을 수 있어요. 왜냐면, 당신도 결국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니까. …늦지 않았어요. 정말로.
박지은—희망 회로 참 부지런하네. 그럼 이건 어떻게 견딜래?
연이—…희망 회로 아니에요. 나 실이 보이거든요. 지금도 저 아래로, 루나한테로, 병하한테로 실이 이어져 있어요. 검게 얼었어도 안 끊겼어요. …당신 눈엔 안 보이겠죠. 당신은 실을 끊는 눈만 있고, 잇는 눈은 없으니까. 그래서 늘 혼자로 보이는 거예요.
박지은—…또 그 소리. 실이 이어져 있다느니. …좋아. 그럼 그 실이 태어난 자리를 아예 없애 주지. 네 심장. 모든 인연이 시작된 그곳. …그걸 꿰뚫으면, 이어질 실도, 볼 눈도 다 사라질 테니까.
연이—…심장을. …병하가 시간까지 거슬러 지킨 그 심장을. …당신, 정말 거기까지. …그래도 나 눈 안 감아요. 무서워도, 끝까지 뜨고 볼래요. 병하가 준 이 눈으로.
박지은이 손을 치켜들자, 하늘의 검은 실이 전부 한 점으로 모여 거대한 창이 되었다. 창끝은 정확히 연이의 심장을 겨눴다.
박지은—네 모든 인연이 태어난 그 심장부터 꿰뚫어 주지. 그럼 병하 씨도, 두 번 다시는 널 못 찾을 테니까.
검은 창이 쏘아졌다. 소리보다 빨랐다. 연이는 눈을 감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 한순간, 연이의 머릿속에 스친 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벚꽃 강가, 삼각김밥 두 개, 백 년 미룬 약속. 병하와 지킬 그 사소한 것들이, 사라지려는 순간에 가장 또렷하게 떠올랐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눈을 뜨자 눈앞에 넓은 등이 있었다. 금빛 갈기가 검은 창을 온몸으로 받아낸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이—…병하. …너, 또. …그 창, 내 심장 오던 거잖아. 그걸 네 몸으로. …왜! 왜 또 네가! 나한테 오던 거였는데! …이 바보야, 너 왜 자꾸 네 몸으로만 막아!
백 년 전 검은 비의 밤에도, 네오는 이렇게 연이의 앞을 막았다. 그때는 못 막았지만, 이번엔 온몸으로 받아 냈다. 사자의 등이, 백 년의 후회를 지우려는 듯 검은 창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박지은—…또, 저 등이야. 백 년 전 그 밤에도, 저 사람은 저 애 앞을 저렇게 막았어. 그때 나는 뒤에서 봤지. 저 넓은 등을. 나는 한 번도 서 본 적 없는 그 자리를. …누군가의 앞을 막아 주는 자리. 나는 왜 한 번도 그 자리에 못 섰을까.
연이—…박지은 씨도 설 수 있어요, 그 자리에. 누군가를 지키는 자리. …근데 그러려면, 먼저 남을 사랑해야 해요. 뺏는 게 아니라 지키고 싶어야 그 자리에 서요. …당신도 그런 사람이 생기면, 저 등처럼 설 수 있어요. 늦지 않았어요.
네오—…백 년 전엔 못 막았어. 네가 내 앞에서 지워지는 걸, 그냥 봤어. …이번엔 안 그래. 이번엔 내가 먼저 막아. 몇 번이고. …이게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이유야, 연이. 널 지키려고. 그러니까 이 등 뒤에서, 안전하게 있어.
연이—…싫어. 나 네 등 뒤에만 있는 거 싫어. …백 년을 네가 앞에서 막았으면, 이제 한 번은 나도 네 옆에 서고 싶어. 뒤 말고 옆에. …병하, 우리 실은 한쪽이 지키는 게 아니라 서로 지키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싸울래. 같이.
네오—…연이. …그래, 옆에 서. 네 말이 맞아. …근데 지금은 네 손이 얼었어. 넝쿨도 안 나.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내 등 뒤에서 힘을 모아. 손이 녹으면, 그때 옆에 서. 약속할게, 다음엔 꼭 옆에 세울게. …근데 지금 이 순간만은, 내가 막게 해 줘. 부탁이야.
연이—…알았어. 이번 한 번만. …근데 병하, 다음엔 진짜 옆이야. 나 뒤에 숨는 거 딱 이번까지야. …그리고 너 절대 무리하지 마. 막되, 죽지 마. 그거 어기면, 나 진짜 화낼 거야. 벚꽃 강가에서 백 년 잔소리할 거야.
네오—…말했잖아. 네 뒤는 내가 지킨다고.
연이—…병하! 안 돼! 그 창, 네 몸 뚫고 있잖아! …비켜, 내가 막을게! 넌 이미 백 년 막았어, 이번엔 내가! …제발, 또 너 혼자 다치지 마!
네오—…연이. 나 괜찮아. 사자 몸은 튼튼하거든. …근데 있잖아. 방금 네가 '내가 막을게' 했지. 그게 백 년 전이랑 딱 하나 다른 거야. 그때 너는 혼자 무너졌는데, 지금 너는 나를 막아 주려 하잖아. …그거면 됐어. 나 백 년 안 헛산 거야.
검은 창이 한 겹, 두 겹 파고들었다. 버티기만 해서는 결국 둘 다 꿰뚫릴 참이었다. 그때 네오의 눈이, 백 년을 눌러 온 무언가를 향해 처음으로 열렸다.
네오—…연이. 우리 아까 약속했지. 혼자 무리하지 않기로. …미안. 이 약속만은 못 지키겠어. 지금 이 힘 안 쓰면, 우리 둘 다 여기서 끝나. 너를 잃느니, 나는 백 번이라도 약속을 어길래.
연이—…무슨 소리야. 무슨 힘. …병하, 방금 눈빛. 재성 금고에서 봤던 그 눈빛이야. 네 별자리 소실하던. …안 돼, 그거 쓰면 너 사라진다며! 하지 마!
네오—연이. 백 년 전에 나 혼자 정한 게 하나 있어. 정말 마지막이다 싶을 때, 딱 한 번만 쓰기로 한 거.
연이—뭘 쓴다는 거야. 네오, 눈빛이 왜 그래. 하지 마, 왠지 무서워.
네오—재성의 금고에서 갈기가 금빛으로 빛났던 거, 기억나? 그때 삼킨 힘이야. 이걸 다 풀면 시간이 나를 알아봐. 그럼 소멸의 값이 앞당겨지지. …근데 지금은, 그래도 돼.
연이—…안 돼! 그래도 안 돼! …너 소멸 앞당겨진다며! 나 하나 지키자고 네 남은 시간을 통째로! …병하, 제발. 다른 방법 찾자. 나 안 다쳐도 돼. 너만 안 사라지면 돼. …제발, 그 힘 쓰지 마. 부탁이야.
네오—…연이. 나 백 년을 이 순간 하나 위해 아꼈어. 정말 마지막이다 싶을 때, 딱 한 번. …지금이 그때야. 너를 잃는 것보다 무서운 건 없어. 내 시간 좀 짧아지는 건, 하나도 안 무서워. …미안. 이번만은 네 말 못 들어. 이건, 백 년 전부터 정한 거야.
연이—…병하…
연이—…알았어. 막아. …대신 약속 하나만 더. 이거 쓰고 붙잡혀도, 절대 안 꺼지기. 그 금빛 한 톨 붙잡고, 내가 갈 때까지 버티기. …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게. 동료들 다 데리고, 저 위 부서진 나까지 되살려서. 그러니까 넌 그냥, 거기서 살아만 있어. 그거면 돼.
네오—…약속. …살아 있을게. 어떤 어둠 속이라도, 네가 온다는 거 아니까. 백 년을 기다린 나한텐, 어둠 속 기다림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가서, 다 되찾아 와, 연이. 나도, 저 별도, 저 여자도. 다.
네오가 백 년을 갈기 뒤에 숨겨 온 금빛을, 마침내 통째로 풀었다. 억눌려 있던 파수꾼의 진짜 힘이 사자의 몸에서 한낮의 태양처럼 터져 나왔다.
그 금빛은, 백 년을 아껴 온 힘이었다. 조금씩 쓰면 오래 갈 수 있었지만, 한 번에 다 풀면 시간이 그를 알아보고 소멸을 앞당긴다. 그럼에도 네오는 망설이지 않았다. 연이를 지키는 데라면, 남은 시간 전부를 한순간에 쏟을 수 있었으니까.
연이—…병하, 이 바보야! 그거 다 풀면 안 된다고 했잖아! …네 남은 시간을 통째로, 나 하나 지키자고! …왜 또 그래! 나 그렇게 안 지켜도 되는데!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하는데!
네오—…아니. 넌 혼자 하게 두면 안 되는 애야. 백 년 전에 그렇게 뒀다가, 널 잃었으니까. …이번엔 안 그럴 거야. 내 시간 좀 짧아지면 어때. 그 시간에 너 웃는 거 보면, 그게 남는 거지. …울지 마. 나 아직 안 사라져. 조금 짧아질 뿐이야.
사자의 몸에서 터진 금빛이 검은 창을 통째로 걷어 냈다. 그 힘 앞에서 박지은의 백 년 원한조차 잠깐 주춤했다. 나무를 벨 수도 있었던 그 칼이, 연이를 겨눈 것만 골라 베어 낸 순간이었다.
연이—…병하 금빛이, 저 검은 창을 밀어냈어! …봐요, 박지은 씨! 사랑의 힘이 당신 백 년 원한을 밀어냈어요! …이게 답이에요. 힘 대 힘이 아니라, 사랑 대 원한. 사랑이 더 세요. 방금 봤잖아요.
박지은—…세긴 세네. 근데 얘야, 저 금빛엔 값이 있어. 저걸 쓰는 순간, 시간이 저 사자를 알아봐. 소멸이 앞당겨지고, 내 실이 저를 붙잡을 수 있게 되지. …사랑의 힘이 세다고? 그래. 근데 그 대가로 저 사자는, 이제 내 것이 돼. 세지만, 비싼 힘이야.
연이—…아. …병하가 나 지키려고 그 힘을 썼는데, 그 대가가 자기가 붙잡히는 거라니. …이 잔인한 셈. …근데 박지은 씨, 하나만은 확실해요. 병하는 그 값을 알면서도 썼어요. 나를 위해서. 값을 알면서도 내주는 거, 그게 사랑이에요. 당신은 값부터 따지니까, 평생 못 하는 거고요.
금빛 파도가 검은 창을 통째로 밀어냈다. 그 반동에 별빛 감옥의 사슬이 느슨해지고, 갇혀 있던 친구들의 실이 처음으로 숨을 텄다. 연이는 그 한순간, 세계가 다시 이쪽 편이 되는 걸 보았다.
박지은—…아. 드디어 보여 주네. 그 금빛, 백 년을 그렇게 꽁꽁 숨기더니. 방금 시간이 너를 알아봤어, 병하 씨. 그 말은 이제, 내 실도 너를 붙잡을 수 있다는 뜻이야.
연이—…아. …그래서 병하가 백 년을 숨긴 거였어. 이 힘을 쓰면 시간이 알아보고, 그럼 박지은 실이 병하를 붙잡을 수 있어서. …병하! 안 돼! 힘 거둬! 이제 저 여자가 너 붙잡을 수 있어! …나 지키려고, 스스로 저 여자 손에!
네오—…알아. 그래서 백 년을 아꼈지. …근데 연이, 너를 잃는 것보단 이게 나아. 내가 저 여자한테 붙잡히면, 저 여자 시선이 나한테 쏠려. 그럼 너는 그 틈에 물러날 수 있어. …이게 내 마지막 작전이야. 나를 미끼로, 너를 살리는.
연이—…미끼라니! 그런 작전 싫어! …병하, 너 또 혼자 다 짊어지려고! 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너 없이 나 혼자 사는 거, 그게 지키는 거야?! …안 돼. 안 물러나. 절대 안 물러나!
연이—네오! 안 돼, 이 바보야! 왜 또…!
연이는 알았다. 네오가 방금 쓴 그 금빛이, 스스로를 박지은의 손에 넘기는 대가라는 걸. 나를 지키려고, 제 발로 어둠에 들어가는 선택. 백 년 전 못 지킨 것을 이번엔 지키려고, 자기 자신을 미끼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연이—…너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나 다치게 두지! …네가 붙잡히는 것보다, 내가 다치는 게 백 배 나아! …병하, 왜 항상 네가 더 아픈 쪽을 골라! 왜 나한텐 늘 쉬운 쪽만 주고, 네가 다 짊어져!
네오—괜찮아. 이 정도는 백 년 벼른 몸이라 버틸 만해. …근데 미안. 이번엔 좀, 오래 못 서 있을 것 같아.
연이—…오래 못 서 있을 것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병하, 다리 떨려. 서 있기도 힘든 거지? 금빛 다 써서. …왜 그랬어. 왜 나 하나 때문에 네 몸을 그렇게. …나 진짜 화나. 근데 화도 못 내겠어. 네가 나 사랑해서 그런 거라, 화도 못 내겠어.
네오—…화내도 돼. 나중에 실컷 내. 다 끝나고, 얼굴 맞대고. …그때까지, 나 붙잡고 있을게. 이 금빛 한 톨. 너 올 때까지 안 꺼뜨릴게. …약속했잖아. 나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야. 백 년 걸려도.
검은 창끝이 수십 가닥으로 갈라지더니, 뱀처럼 네오의 사지와 목과 갈기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연이—…놔! 병하 놔! …내 넝쿨로 그 실 끊을게! …아, 손이 얼어서 넝쿨이 안 나.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병하가 붙잡히는 이 순간에 내 힘이! …제발, 조금만이라도. 새싹 하나라도. 병하 저기 잡혀가는데!
네오—…연이. 힘 안 나는 거, 네 탓 아니야. 저 여자가 세계째로 감아서 그런 거야. …괜찮아. 지금 못 끊어도 돼. 나중에 끊으면 돼. …나 안 없어져. 묶이는 거지, 사라지는 거 아니야. 그 차이, 잊지 마. 묶인 건 풀 수 있어.
박지은—어머, 몸으로 막아 주기까지. 그럼 너부터 가져갈게. 백 년을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이렇게 제 발로 와 주네.
연이—…병하는 물건이 아니에요! '가져간다'니, 사람을 어떻게 가져가요!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요. 사람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곁에 있는 거예요. 병하를 백 년 갖고 싶었으면서, 정작 곁에 있는 법은 한 번도 안 배웠죠. 그래서 못 가진 거예요.
박지은—…곁에 있는 법. …그런 거 몰라. 나는 갖는 법밖에 안 배웠으니까. …근데 뭐 어때.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갖게 묶어 두면 되지. 저 사자, 이제 내 곳간 제일 깊은 곳에 걸어 둘 거야. 너도 못 보고, 나도 안 볼, 그 어둠 속에.
네오—…지은아. 나를 묶어 둔다고, 내 마음까지 네 게 되진 않아.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내 마음은 늘 저 애한테 가 있어. 네가 내 몸을 곳간에 걸어 둬도, 마음은 못 걸어. …그게, 네가 백 년간 못 가진 이유야. 몸은 뺏어도, 마음은 뺏는 게 아니거든.
네오—연이. 지금이야. 다들 감옥의 실이 느슨해졌어. 지금 물러나면 다 같이 빠져나갈 수 있어.
연이—너를 두고? 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연이—…나 재성에서 언니 안 두고 갔고, 도서관에서 소망이 안 두고 갔고, 자미두수에서 무성 안 두고 갔어! 근데 널 두고 가라고?! …절대 안 가! 차라리 여기서 같이 묶일래! 너 혼자 어둠에 안 보내!
네오—…연이. 네가 여기서 같이 묶이면, 저 위 부서진 너는 영영 못 구해. 저 여자만 좋은 일 시키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물러나. 힘을 모아서, 동료들이랑 다시 와. 그때 나도 같이 구해. …이건 지는 게 아니야. 다음을 위해 숨 고르는 거야. 알지?
연이—…알아. 아는데. …너 두고 물러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 …병하, 나 갈게. 근데 이건 물러나는 거 아니야. 너 구하러 오는 첫걸음이야. 꼭 다시 올게. 동료들 다 데리고. 그러니까 버텨. 제발.
네오—…응. 말이 안 되지. 너는 그런 애니까. 그래서 내가 백 년을 못 놓은 거고.
네오—…연이. 잘 들어. 나 잠깐 묶이는 거야. 안 죽어. 소멸이 앞당겨졌어도, 아직 시간 있어. …근데 너 혼자 나 구하려고 무리하지 마. 아까 약속했잖아, 혼자 안 짊어지기로. 그거 너도 지켜. …동료들 다시 불러. 루나 물길 기다려. 그리고 저 여자를… 미워하지 말고 읽어. 네 방식대로.
연이—…너는 혼자 다 짊어지면서, 나한텐 그러지 말래. …알았어, 병하. 나 혼자 안 무리할게. 동료들이랑 같이 갈게. …근데 너도 약속해. 거기서 절대 안 꺼지기. 깜빡여도 안 꺼지기. 내가 갈 때까지, 그 금빛 한 톨이라도 붙잡고 버티기. 약속!
네오—…약속. …벚꽃 강가에서 만나자, 연이. 삼각김밥 참치마요 두 개. 네가 사기로 했지. …그때까지, 나 안 꺼져. 백 년도 기다렸는데, 이 정도쯤이야.
두 사람을 잇는 붉은 실이, 검게 얼어 가면서도 마지막 한 가닥만은 붉게 빛났다. 아무리 얼려도, 그 한 가닥만은 얼지 않았다.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건 마지막 약속이었다.
연이—…안 물러나! 너 두고 어떻게 물러나! …병하, 손! 내 넝쿨 잡아! 내가 끌어낼게! …왜 안 잡아! 잡으라고! …아, 검은 실이 네 손을 다 감아서. …안 돼. 안 돼안돼안돼. 이거 놔! 이 여자야, 병하 놔줘!
네오—…연이. 봐, 나 웃고 있잖아. …백 년 만에 사람 얼굴로 웃는 거, 마지막이 네 앞이라 다행이야. …나 아직 안 죽어. 묶였을 뿐이야. 네가 나 꺼내러 올 거 아니까, 나 여기서 기다릴게. …울지 마. 우리 벚꽃 강가 약속, 아직 안 지켰잖아.
검은 실이 네오를 통째로 감아 끌고 갔다. 사자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고, 갈기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이가 뻗은 손끝과 네오의 갈기 사이가,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멀어졌다.
연이—…병하! 조금만! 손 조금만 더! …닿을 것 같은데! …안 돼, 멀어져. …병하, 기다려. 나 꼭 갈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 꺼낼게. 벚꽃 강가 약속, 나 절대 안 잊어. 그러니까 거기서 버텨. 알았지? 알았지, 병하!
베틀 기둥에 네오가 옭매였다. 수백 가닥의 검은 실이 그를 못 박듯 붙들어,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만들었다. 금빛을 다 쏟은 사자의 몸은, 이제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소멸의 값이, 앞당겨지고 있었다.
연이—네오! 네오!!
박지은—…소리쳐 봐야 소용없어. 저 사자, 금빛을 다 써서 이제 깜빡깜빡하잖아. 시간이 저를 알아보기 시작한 거야. …네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꺼져 갈 거야. 백 년을 너 하나 지키다, 결국 네 눈앞에서. …이게 사랑의 끝이야, 얘야. 잘 봐 둬.
연이—…아니에요. 이게 끝이 아니에요. …병하, 정신 차려! 깜빡이지 마! 나 여기 있어! …당신 아직 벚꽃 강가 약속 안 지켰잖아! 삼각김밥도 안 먹었잖아! 그거 다 지키기 전엔 못 꺼져! 안 보내! 절대 안 보내!
연이가 검은 실에 묶인 네오를 향해 넝쿨을 뻗었다. 하지만 검게 얼어붙은 손끝에선, 이제 여린 새싹조차 돋지 않았다. 백 년 전 그 밤처럼, 손 닿을 거리에 소중한 사람을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슬 너머에서, 잦아드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울지 마.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냥 좀, 묶였을 뿐이야.」
「…연이. 저 여자, 지금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 네 다정함이야. 힘으로 안 이겨. 저 여자 안의 그 붉은 실 하나, 그거 붙잡아. …그리고, 저 위 탑의 부서진 너도 잊지 마. 네가 온전해지면, 다 풀려. 나도, 저 별도, 어쩌면 저 여자까지도.」
연이—…응, 병하. 다 기억할게. 다정함으로 붙잡고, 탑의 나 구하고, 다 풀기. …너 하나도 안 잊었어. …근데 병하, 목소리가 자꾸 멀어져. …가지 마. 아직 가지 마. 한마디만 더. 나 힘 나게, 한마디만.
「…연이. 너를 만난 건, 내 시간을 통째로 걸 만큼 좋은 일이었어. 미래에도, 지금도. …그러니까 절대, 네가 태어난 걸 후회하지 마. 저 여자가 뭐래도. 너는, 세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야. 내가 증인이야.」
박지은—…묶여서도, 저 애 걱정만. …백 년 전 그 밤에도 그랬지. 지워지는 저 애 손을 끝까지 붙잡고, 자기 몸이 무너지는데도. …나는 그때 옆에서 봤어. 저렇게까지 누굴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게, 나한텐 한 번도 안 온다는 걸. …그래서 미웠어. 저 사랑이. 저 애가.
연이—…박지은 씨. 방금 목소리, 미움이 아니라 슬픔이었어요. …당신도 저런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죠. 병하가 나한테 준 것 같은. …근데 안 와서, 그래서 부수기로 한 거죠. 내가 받는 걸 보느니. …아, 박지은 씨. 그거 얼마나 외로운 결정이었을까. 미워하지만, 그 외로움은 너무 아파요.
박지은—…그만. 그만 좀 읽어. …네가 자꾸 내 안을 읽으니까, 내가 자꾸… 자꾸 무너지려 하잖아. …나는 무너지면 안 돼. 백 년을 이 미움으로 버텼는데. 미움까지 잃으면, 나한텐 정말 아무것도 안 남아. …그러니까 제발, 그 눈으로 나 그만 읽어.
연이—…병하. …응. 나 안 후회해. 태어난 것도, 널 만난 것도. …기다려. 나 꼭 갈게. 이번엔 내가 널 구하러 갈게. 백 년 전엔 네가 날 구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야.
박지은—…'내 차례야'라. …저 애는 받은 걸 갚으려 하네. 병하 씨가 준 걸, 병하 씨한테 되돌려주려고. …나는 왜 그걸 못 했을까. 병하 씨가 나한테 뭘 안 줘서? …아니. 준 게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받을 줄을 몰라서. 늘 뺏기만 하고, 받는 법은 안 배워서.
박지은은 문득 깨달았다. 백 년간 그녀가 못 가진 건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여러 번 그녀 곁을 스쳤다. 다만 그녀가, 그걸 '받는 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오므린 손으로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걸, 백 년이 지나서야 어렴풋이 느꼈다.
박지은—자, 이제 정말 너 혼자야. 파수꾼도 묶였고, 친구들도 갇혔고. 어때, 이 기분. 내가 백 년 산 기분이 딱 이래.
연이—…이 기분이, 당신이 백 년 산 기분이라고요. …소중한 사람 눈앞에서 뺏기고, 아무것도 못 하고. …박지은 씨, 당신 이걸 백 년을. …그럼 당신, 정말 많이 아팠겠다. 나 지금 이거 몇 분 겪는데도 이렇게 무너지는데, 당신은 백 년을.
박지은—…뭐야. 왜 나를 동정해. …내가 지금 네 걸 뺏었는데. 네 사람을 묶었는데. 왜 나를… 왜 그런 눈으로 봐. 미워해야지. 원망해야지. …왜 자꾸, 나를 불쌍하게 봐. 그게 제일…
연이—…미워요. 지금 진짜 미워요. 병하 뺏어서. …근데 동시에 불쌍해요. 당신이 이걸 백 년 겪었다니까. …사람 마음이 그래요, 박지은 씨. 밉고 불쌍하고, 둘 다 될 수 있어요. …당신은 미움 하나만 아니까, 사람이 이렇게 복잡한 걸 모르죠. 나는 알아요. 그래서 당신도, 미워하면서 구할 거예요.
박지은—…미워하면서, 구한다. …그런 게 가능해? 미우면 부수고, 좋으면 지키는 거 아니야? …밉고 불쌍하고 둘 다라니. 나는 백 년간 미움 하나로만 살아서, 그런 복잡한 건 몰라. …근데 왜, 그 복잡한 게 네 얼굴엔 있고, 내 얼굴엔 없을까. 왜 나는 이렇게 단순하고 텅 빈 걸까.
연이—…텅 빈 게 아니라, 얼려 둔 거예요. 복잡한 마음들, 다 얼음 밑에 있어요. …당신도 원래는 복잡한 사람이었어요. 사랑도, 미움도, 슬픔도, 그리움도 다 있는. 근데 사는 게 힘들어서, 미움 하나만 남기고 다 얼려 버린 거예요. …그 얼음 녹이면, 복잡한 진짜 당신이 나와요. 겁내지 마요.
검은 실이 네오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내렸다. 이제는 갈기의 금빛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이—…병하. …보여, 아직. 그 금빛 한 톨. 완전히 안 꺼졌어. …버티고 있구나. 나랑 약속 지키려고. …기다려. 나 진짜 갈게. 이 어둠 아무리 깊어도, 내가 뚫고 갈게. 백 년 전엔 못 갔지만, 이번엔 가. 꼭.
어둠 저편에서, 아주 희미한 금빛 한 점이 깜빡였다. 완전히 꺼지지 않은, 파수꾼의 마지막 불씨. 그리고 두 사람을 잇는 붉은 실도, 검게 얼어붙은 그 끝에 딱 한 가닥, 붉은 실오라기 하나를 남기고 있었다. 약속의 증표처럼.
연이—…근데 지금은. …지금 당장은, 내가 아무것도 못 해. 손도 얼고, 넝쿨도 안 나고, 동료도 다 밀려나고. …병하 저기 있는데, 손 닿을 데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해. …백 년 전이랑 똑같아. 이 무력함. 이게 제일 아파.
박지은—…이제 알겠어? 그 무력함. 소중한 걸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못 하는 그 기분. …그게 세상의 진짜 얼굴이야. 나는 그걸 백 년 전에 알았고, 그래서 힘을 모으기 시작했지. 다시는 무력하지 않으려고. …너도 이제 알았으니, 나처럼 되겠네. 힘을 좇는 여자로.
연이—…아니요. 나는 당신처럼 안 돼요. …당신은 무력함이 무서워서 힘을 좇았지만, 나는 무력해도 손을 놓지 않는 쪽을 골랐어요. …봐요. 손이 얼어도, 넝쿨이 안 나도, 나 아직 병하랑 이어진 이 붉은 실 한 가닥은 안 놨어요. 무력해도, 이건 붙잡을 수 있어요. 무력함이, 사랑을 못 이겨요.
연이가 검게 언 손끝을, 마지막 남은 붉은 실오라기에 감았다. 아무 힘도 없었다. 넝쿨도, 뿌리도, 동료도 없었다. 그러나 그 한 가닥 붉은 실을 놓지 않는 것. 그것만은, 온 세계가 멈춰도 할 수 있었다. 무력함의 밑바닥에서도, 사랑은 손을 놓지 않았다.
박지은—…무력한데도, 안 놔. …백 년 전 병하 씨도 그랬어. 네가 지워지는데, 끝까지 손을 안 놨지. …나는 그때 이해 못 했어. 왜 못 놓나. 놓으면 편한데. …근데 지금 너를 보니까, 알 것도 같아. 놓는 게, 오히려 더 아픈 거구나. 사랑은.
연이—…맞아요, 박지은 씨. 사랑은 놓는 게 더 아파요. 그래서 안 놓는 거예요. 무력해도, 손이 얼어도. …당신도 그 붉은 실 하나, 백 년을 안 놨잖아요. 얼려서 못 본 척했을 뿐, 끝내 안 놨어요. …그게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예요. 놓는 게 더 아파서, 못 놓은 거예요.
박지은—…내가, 안 놨다고. 그 실을. …그래. 백 년을 얼렸는데, 끝내 못 끊었어. 다른 인연은 다 잘라 놓고, 그 실 하나만은. …왜였을까. 왜 그것만은 못 잘랐을까. …아니. 알아. 놓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 남으니까. 그거라도 있어야, 내가 완전히 텅 비진 않으니까.
연이—…박지은 씨. 그 실 안 놓은 거, 정말 잘하셨어요. …그게 당신을 완전히 괴물이 되지 않게 지켜 준 거예요. 백 년을 얼려도 그 실 하나 살아 있어서, 당신 아직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그 실을 얼음 밖으로 꺼내요. 미움 말고, 원래 그게 뭐였는지. 사랑이었잖아요.
박지은—…꺼내면, 무너져. …백 년을 미움으로 버텼는데, 그게 사랑이었다고 인정하면, 나는 백 년을 헛산 게 되잖아. 미움으로 세상을 부순 게, 사실은 사랑 때문이었다고. …그걸 인정하는 게, 죽기보다 무서워. 그러니까 아직은, 아직은 못 꺼내.
연이—…괜찮아요. 지금 당장 안 꺼내도 돼요. 준비되면요. …근데 박지은 씨, 하나만 알아 둬요. 사랑 때문에 잘못한 거, 그거 헛산 거 아니에요. 방향이 틀렸을 뿐이에요. 사랑은 맞았어요. 방향만 바꾸면, 그 백 년이 헛된 게 아니라 아픈 사랑이었던 게 돼요.
연이—…돌려줘요. 제발. 저 사람은 나 하나 지키자고 인생을 통째로 버린 사람이에요.
연이—…미래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버리고, 백 년을 사자로 살고, 이제 남은 시간까지. …저 사람이 나한테 준 게 그렇게 많은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못 돌려줬어요. 삼각김밥 하나 못 사 줬어요. …그러니까 제발, 돌려줘요. 갚을 기회라도 주세요.
박지은—…갚을 기회. 그런 게 어딨어. 준 사람은 주고, 받은 사람은 받는 거지. 세상은 안 공평해. …나도 병하 씨한테 다 줬는데, 한 번도 못 받았어. 갚을 기회? 나는 그런 거 평생 없었어. 그러니 너도 없어. 그게 공평이야.
박지은—알아. 그래서 뺏는 거야. 네가 제일 아파할 방법으로. 원한이란 게 원래 그렇게 촘촘하거든.
연이—…내가 아파하는 걸 보면, 당신이 안 아파요? …아니잖아요. 남 아프게 해도, 당신 텅 빈 건 그대로잖아요. 병하 뺏어도, 당신 백 년 그 구멍은 하나도 안 채워져요. …당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아무리 뺏어도 안 채워지는 거, 백 년째 알면서.
박지은—…안 채워져. …맞아. 저 사자를 뺏어도, 안 채워질 거야. 백 년간 다 그랬으니까. …근데 그럼 어쩌라고. 채워지는 법을 모르는데. 뺏는 것 말곤 아는 게 없는데. …그러니까 나는, 그냥 계속 뺏을 수밖에. 밑 빠진 독인 줄 알면서도.
연이—…채워지는 법, 제가 알아요. 나눠 주는 거예요. 뺏는 거 말고. …밑 빠진 독은, 물을 부어서가 아니라 다른 독이랑 이어져야 안 말라요. 서로 물을 나누면, 둘 다 안 마르죠. …당신도 그럴 수 있어요. 근데 그러려면, 먼저 그 손을 펴야 해요. 뺏는 손 말고, 나누는 손으로.
박지은—…자꾸 그 손 얘기. …나는 못 펴. 백 년을 오므리고 있어서, 이제 펴는 법도 잊었어. …그러니까 그만해. 자꾸 못 하는 걸 하라고 하지 마. …아프잖아. 못 하는 걸 하라는 게, 제일 아프잖아.
연이는 무릎을 꿇었다. 손끝의 붉은 실이 검게 얼어 가는데도, 이번엔 뿌리내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연이—…어떡하지.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데.
연이는 처음으로, 진짜 혼자가 되었다. 네오는 묶였고, 동료들은 밀려났고, 손끝의 붉은 실은 검게 얼어 갔다. 백 년 전 지워지던 그 밤처럼, 세상이 다시 그녀를 혼자 두는 것 같았다.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박지은—…거 봐. 결국 혼자잖아. 인연이니 사랑이니, 다 이 순간을 못 견뎌. …이게 세상의 진짜 모습이야, 얘야. 다들 결국 혼자 남아. 나처럼. …그러니까 그만 포기해. 포기하면, 적어도 안 아프거든. 내가 백 년간 배운 유일한 지혜야.
연이—…아니요. …나 포기 안 해요. …혼자인 것 같아도, 나 혼자 아니에요. 병하가 저기서 날 기다리고, 루나가 물길 파고, 다들 '다시 올게' 했어요. …지금 안 보여도, 실은 안 끊겼어요. 나는 그 실을 믿어요. 포기하는 건, 그 실을 내가 먼저 끊는 거잖아요. 안 해요.
박지은—…지독한 애야. 무릎 꿇고도, 손 얼어붙고도, 안 포기해. …백 년간 내 앞에서 무릎 꿇은 자들은 다 포기했어. 그게 편하니까. 포기하면 안 아프니까. …근데 너는 왜. 왜 그 편한 걸 안 골라. 왜 아픈 걸 끝까지 붙잡아.
연이—…포기가 편한 거 알아요. 근데 편한 게 좋은 건 아니에요. …병하 포기하면 지금은 안 아프겠죠. 근데 평생 후회할 거예요. 그 후회가, 지금 아픈 것보다 백 배 아파요. …그래서 안 포기해요. 지금 아픈 게, 평생 후회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이게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방식이에요, 박지은 씨.
박지은—…평생 후회. …나는 백 년을 후회했어. 병하 씨를 못 가진 것도, 저 애를 부순 것도. …근데 후회하면서도, 멈추질 못했어. 후회가 무서워서 더 부수고, 더 뺏고. …너는 후회가 무서워서 안 포기한다는데, 나는 후회가 무서워서 다 부쉈네. 같은 무서움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연이—…방향이 달라서요. 당신은 후회가 무서워서 도망쳤고, 나는 후회가 무서워서 붙잡아요. …도망치면 후회가 쌓이고, 붙잡으면 후회가 안 남아요. …박지은 씨, 지금이라도 방향 바꿔요. 도망 그만치고, 그 붉은 실 하나 붙잡아요. 그럼 백 년 후회가, 거기서 멈춰요.
박지은—…붙잡으면, 후회가 멈춘다. …정말? …백 년을 도망쳤는데, 이제 와 붙잡으면… 정말 이 지긋지긋한 후회가, 멈출까. …모르겠어. 무서워. 근데… 조금은, 아주 조금은, 붙잡고 싶기도 해.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연이—…박지은 씨. 방금 그거, 백 년 만의 첫걸음이에요. '붙잡고 싶다.' …그 마음 하나면 돼요. 지금 당장 다 못 해도, 그 마음만 있으면 언젠간 손이 펴져요. …나 기다릴게요. 당신이 그 손 펼 때까지. 미워하면서도, 기다릴게요.
박지은—…아니. 아니야. 방금 그 말 취소야. …나는 안 붙잡아. 못 붙잡아. …자꾸 나를 흔들지 마! 이제 정말 끝낼 거야! 저 사자도, 너도, 다! …더는, 더는 못 흔들려!
박지은이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방금의 흔들림을 지우려는 듯, 더 사납게. 그러나 그 손끝은, 아까보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 년 얼음에 난 실금은, 이제 그녀 자신도 못 본 척할 수 없을 만큼 깊어져 있었다.
연이—…또 도망치네요. 괜찮아요. 아직 준비가 안 된 거니까. …근데 박지은 씨, 그 떨리는 손은 못 숨겨요. 당신 안의 봄이, 벌써 오고 있어요. 백 년 겨울이, 끝나 가고 있어요.
박지은—…시끄러워! 봄 같은 거 안 와! 나는 영원한 겨울이야! …자, 이제 진짜 끝이야. 저 사자 심장부터 얼려서, 네 눈앞에서 완전히 꺼뜨려 줄게. 그럼 너도 알겠지. 사랑이 얼마나 무력한지.
박지은—…끝까지 그 눈이네. 무릎 꿇고도 안 꺾이는 눈. …백 년간 그 눈을 한 사람이 딱 하나 있었어. 병하 씨. …너희 둘, 정말 닮았어. 그래서 더 미워. 그래서 더…
박지은의 목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그래서 더' 뒤의 말을, 그녀 자신도 잇지 못했다. 미움이라고 하기엔, 그 끝이 자꾸 다른 곳을 향했다. 부러움. 어쩌면, 그리움.
연이—…박지은 씨. 방금 말 못 이었죠. '그래서 더' 다음. …미워, 가 아니었죠. 부러워, 였죠. 아니면… 그립다, 였을지도. …당신, 병하를 아직도 그리워하는구나. 미움으로 백 년을 덮었지만, 밑엔 그리움이.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그건 당신 안에 아직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박지은—…그리움? 내가? …아니야. 나는 그런 거 없어. 다 미움이야. 백 년째 미움 하나로 살았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내 안에 사랑이 살아 있다느니. …그런 거 있으면, 내가 백 년을 이렇게 못 살았어. 없어. 없다고. …제발, 없다고 해 줘.
연이—…있어요, 박지은 씨. 당신 가슴 그 붉은 실 하나가 증거예요. 백 년을 얼려도 안 죽은 그 실. …당신이 '없다고 해 줘'라고 비는 것 자체가, 있다는 뜻이에요. 정말 없으면 빌 필요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있어도 돼요. 그 사랑, 이제 미움 말고 다른 걸로 바꿔요.
바로 그때였다. 세계가, 숨을 멈췄다.
쏟아지던 검은 실이 허공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박지은의 조롱도 멈췄다. 시간이 통째로 정지한 것이다.
검은 창도, 네오를 감던 실도, 박지은의 손짓도, 전부 그대로 멈췄다. 오직 연이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세계 전체가 숨을 죽인 그 정적 속에서, 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연이—…뭐지. 다 멈췄어. 박지은도, 검은 실도, 병하를 감던 것도. …시간이 멈춘 건가. 누가 이런 걸. …이 힘, 박지은보다 훨씬 커. 세계 그 자체보다 위에 있는 힘이야. …누구세요? 거기 계신 분.
세계의 천장, 별들의 실이 짜이기도 전의 아득한 높이에서, 무언가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지은이 이 세계의 주인이라면, 그것은 이 세계가 생기기 전부터 있던 존재였다. 운명이라는 것 자체의, 근원이었다.
연이—…시간을 멈출 수 있는 존재. 박지은도, 병하도, 세계도 다 멈췄는데 나만 안 멈췄어. …왜 나만. 왜 나만 움직일 수 있게 뒀지. …이 존재, 나한테 뭔가 하려는 건가. 아니면… 나한테 뭔가 보여 주려는 건가.
멈춘 세계 속에서, 오직 연이만이 숨을 쉬었다. 검은 창도, 묶인 네오도, 조롱하던 박지은도 전부 정지한 조각상 같았다. 그 정적의 한복판으로, 별빛보다 오래된 금빛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것은 형체가 없었다. 사람도, 짐승도, 신상도 아니었다. 다만 따뜻하고 아득한 금빛이, 온 세계를 부드럽게 감쌌다. 박지은의 차가운 금빛과도, 네오의 뜨거운 금빛과도 다른,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잔잔한 금빛이었다.
연이—…따뜻해. …방금까지 이렇게 추웠는데, 이 빛이 내려오니까 따뜻해. …누구신지 몰라도, 나쁜 분은 아니네. 나쁜 힘은 이렇게 안 따뜻하거든. …저기, 저 위에 계신 분.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어서 시간을 멈추신 거죠?
연이가 묶인 네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금빛 한 점. 그리고 박지은을 보았다. 발악하다 멈춘 그 얼굴에, 미움보다 슬픔이 더 많이 어려 있었다. 시간이 멈추자, 비로소 두 사람의 진짜 얼굴이 보였다. 지키려는 자와, 외로운 자.
연이—…이 멈춘 시간, 저한테 주신 거죠. 병하 얼굴도, 박지은 얼굴도, 천천히 보라고. …고마워요. 정신없이 싸울 땐 안 보이던 게, 멈추니까 보여요. 병하가 얼마나 날 사랑하는지, 박지은이 얼마나 외로운지. …이제 알겠어요.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연이—…병하를 힘으로 구하는 게 아니에요. 박지은을 힘으로 이기는 것도 아니고요. …박지은의 그 붉은 실 하나. 백 년 얼음에도 안 죽은 그 사랑. 그걸 녹이는 거예요. 그럼 박지은이 스스로 병하를 놓고, 저 위 부서진 나도 풀어 줄 거예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게 이 모든 걸 푸는 열쇠예요.
멈춘 세계 속에서, 연이의 눈이 맑아졌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마침내 길을 찾은 자의 눈이었다. 힘으로는 백 년을 못 이긴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어쩌면. 그 실낱같은 어쩌면 하나를 붙잡고, 연이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어디선가, 금빛 목소리가 세계의 천장에서 내려왔다. 다급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은, 오래된 강물 같은 목소리였다.
운명의 신—가엾은 아이. 여기서 멈추면, 아무도 죽지 않는단다.
제39화 · 붙잡힌 파수꾼 — 끝. 제40화 「운명의 신」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