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는 연이가 실을 쥐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꼬리가 사슬을 쥐고 있었다. 그 사이에 검은 호랑이가 매달려 있었다.
검은 호랑이—회장님. 장부 마지막 줄, 제가 직접 쓸게요.
흑월—무슨 줄이냐.
검은 호랑이—서한비. 갚음. 금장 고리 한 개.
호랑이가 오른 앞발로 목의 고리를 움켜쥐었다. 발톱이 금속에 박혔다. 고리가 뜨거워졌다. 털 타는 냄새가 났다.
흑월—놓아라. 그 고리가 네 몸이다. 끊으면 네 힘도, 돌아갈 길도 함께 끊긴다.
검은 호랑이—알아요. 그래서 끊는 거예요.
고리에 금이 갔다. 한 줄, 두 줄. 금 사이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꼬리가 비명을 질렀다. 사슬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고리가 두 동강 났다. 소리는 작았다. 유리컵 하나 깨지는 소리. 그 작은 소리에 일식 아래가 통째로 울렸다.
검은 털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발톱이 오그라들었다. 큰 몸이 줄어들었다. 남은 것은 젖은 코트를 입은 사람 하나였다.
서한비—아. 생각보다, 춥네요.
사람은 떨어졌다. 아래에는 이제 붙잡을 사슬도 없었다. 손목에 감긴 붉은 실 한 가닥만 남았다.
위쪽, 스물일곱 달집의 우물가. 실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연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돌바닥에 찧혔다.
연이—무거워! 아까보다 무거워졌어! 왜?!
네오—호랑이 무게가 아니다. 사람 하나 무게다. 그리고 버티는 힘이 하나도 안 남은 무게.
네오가 실을 물려고 고개를 숙였다. 앞다리가 실을 그대로 통과했다. 어깨까지 맑아진 다리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네오—이럴 때 힘이 안 들어가네. 젠장.
모카—비켜, 고양이! 앞치마는 이럴 때 쓰는 거야!
모카가 앞치마를 풀어 실에 묶었다. 윤달이 그 끝을 잡았다. 셋이 한 줄로 서서 당겼다. 줄다리기 같았다. 상대가 우주라는 게 다를 뿐.
윤달—하나, 둘, 셋. 저 원래 이런 거 안 하는 사람인데요.
모카—입 다물고 당겨! 궁합은 나중에 봐!
우물 아래에서 젖은 손 하나가 올라왔다. 오른 손목에 고리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연이가 그 손목을 잡았다. 차가웠다.
끌려 올라온 사람은 돌바닥에 엎드려 기침을 했다. 검은 코트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품에는 젖은 장부가 안겨 있었다.
연이—옆집 사람.
서한비—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실례가 많네요.
연이는 할 말을 잃었다. 맑은 날에도 검은 우산을 들던 이웃. 벽 너머로 양말 잔소리를 하던 목소리. 송장에 적힌 이름. 전부 같은 사람이었다.
연이—실례 맞아. 엄청 큰 실례야.
비가 그쳤다. 우물가에 다섯이 둘러앉았다. 아니, 넷과 하나. 서한비만 조금 떨어져 앉아 있었다.
윤달—기운이 거의 없네요. 물 한 방울 정도. 호랑이 시절의 백분의 일도 안 돼요.
서한비—정확하시네요. 그분 손이 원래 그렇게 정확해요?
윤달—궁합 볼 때만요. 생년월일시 알려 주시면 더 정확해집니다.
서한비—그건 빚이에요.
모카—지금 이 사람한테까지 궁합이야?! 이 사람이 우리 섬 목소리 다 가져갔다고!
모카의 수염이 떨렸다. 앞발이 앞치마 끝을 꽉 쥐었다. 서한비는 고개를 들어 모카를 보았다. 피하지 않았다.
서한비—맞아요. 제가 가져갔어요. 시장 할머니 목소리, 지하 무대 랩하던 아이들 목소리. 장부에 다 적혀 있어요.
모카—그걸 그렇게 담담하게 말해?!
서한비—담담한 척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말이 안 나와서.
모카는 입을 다물었다. 화가 풀린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더 소리치지 않았다.
서한비가 장부를 펼쳤다. 젖은 페이지에 이름들이 빼곡했다. 그 사이에 연이 이름이 있었다. 옆 칸에는 미수, 미수.
서한비—변명부터 할게요. 그래야 그다음 말이 거짓말이 안 되니까.
연이—해 봐.
서한비—그 봄에, 저는 속았어요. 흑월이 당신 얼굴로 와서 제 봉투를 가져갔어요. 저는 당신이 날 버렸다고 믿었어요.
서한비—그래서 괴물이 되기 전에 막겠다고 했어요. 그 대가로 고리를 찼어요. 거기까지는 흑월 탓이에요.
서한비는 잠깐 말을 멈췄다. 손가락이 장부 모서리를 문질렀다. 종이가 일어났다.
서한비—그런데 속은 건 흑월 탓이지만, 아이의 박수를 빼앗은 건 내 손이었어요.
서한비—북 치는 아이가 울 때 저는 장부에 적었어요. 회수 완료. 모카 씨 섬에서도, 시간 섬에서도. 다 제 손으로 했어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우물 바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똑. 똑.
연이—고마워. 아까 구해 준 거. 그리고 지금 변명 안 한 거.
서한비—네.
연이—근데 용서는 안 해. 지금은.
연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나서인지, 울음이 나서인지 본인도 몰랐다. 그래도 끝까지 말했다.
연이—북 치던 애, 그날 진짜 울었어. 나 그거 봤어. 모카네 섬 할머니들도. 그 사람들한테 아무것도 안 돌려줬는데 내가 먼저 용서하면 안 되잖아.
연이—지금은 고맙다고만 할게. 용서는 나중에. 그것도 내가 정해.
서한비—그게 맞아요. 저도 지금 용서받으면 장부가 안 맞아요.
연이—또 장부.
서한비—버릇이에요. 고칠게요. 천천히.
서한비는 장부를 다시 넘겼다. 회수란에 적힌 목소리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글자를 거꾸로 밀어 보았다. 잉크는 꼼짝하지 않았다.
서한비—아. 돌려줄 힘도 같이 냈네요. 고리 값으로.
윤달—호랑이 힘으로 거둔 건 호랑이 힘으로만 풀려요. 지금 몸으로는 못 해요.
서한비—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모카—걸려도 해. 할머니들 기다리고 계셔.
모카는 그 말만 하고 돌아앉았다. 그래도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서한비 쪽으로 남은 성냥 한 갑을 밀어 놓았다. 젖은 코트를 말리라는 듯이.
서한비—이거, 받아도 돼요? 값은 어떻게.
모카—값 같은 소리 하네. 그냥 쓰라고. 불은 나눠도 안 줄어.
밤이 되었다. 스물일곱 개의 달이 하나씩 켜졌다. 연이는 우물 턱에 앉아 메모장을 꺼냈다. 네오가 옆에 엎드렸다.
연이—서한비, 구조됨. 용서 보류. 북 아이 이름, 아직 모름.
연이가 펜을 멈췄다. 실을 타고 올라온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비 오는 정류장. 그리고 흰 우산을 떨어뜨린 남자.
연이—네오. 그 정류장에 너도 있었어?
네오—무슨 정류장.
연이—흰 우산. 늦었구나, 내가 또. 그 목소리, 너였잖아.
네오의 손이 멈췄다. 그는 대답 대신 자기 팔을 내려다보았다. 어깨까지 투명했다.
네오—말하면 안 되는 게 있어. 숨기고 싶어서만은 아니야.
연이—또 그거야? 다들 비밀이 너무 많아. 이 세계 고객센터는 공지사항이라는 게 없어?
네오—있어. 아무도 읽질 않아서 그렇지.
연이—웃기지 마. 지금 하나도 안 웃겨.
연이는 네오의 투명한 앞다리를 보았다. 만져 보려다가 손을 멈췄다. 손이 통과해 버리면 그게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연이—그럼 하나만 대답해. 그 봄에도, 너 내 편이었어?
네오—그건 말할 수 있어. 네 편이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연이—(모습이 달라도 네오. 내 편. 이것만은 꼭 남겨 둬야 해.)
연이는 메모장 귀퉁이에 꾹꾹 눌러 썼다. 네오는 그 글씨를 보지 않은 척했다.
우물 반대편. 서한비가 혼자 달을 세고 있었다. 네오가 소리 없이 걸어와 옆에 섰다.
서한비—그때 늦게 온 거, 당신이죠. 흰 우산.
네오—그래. 너는 거기 남아 있었고.
서한비—둘 다 못 지켰네요.
네오—이번엔 다르게 할 거다. 너도.
서한비—저는 이제 힘이 없어요. 네오 씨처럼 빛을 다룰 수도 없고.
네오—지금은 빛을 다루기도 힘들어. 이 팔부터 사라지고 있으니까.
서한비가 네오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웃음기 없는 얼굴이 굳었다.
서한비—그 애, 알아요?
네오—모른다. 몰라야 한다. 너도 말하지 마라.
서한비—빚지게 하시네요.
네오—그래. 나중에 갚아라.
새벽. 스물일곱 달 중 하나가 갑자기 꺼졌다. 연이의 달, 바라니였다. 하늘 한쪽이 둥글게 검어졌다.
연이—어, 이상해. 속이 또 비는 느낌이야.
검은 원 안에서 거대한 머리가 내려왔다. 몸이 없는 머리. 라후였다. 입을 벌릴 때마다 별빛이 빨려 들어갔다.
윤달—머리는 앞날을 먹어요. 숙녀분, 메모장!
연이가 메모장을 펼쳤다. 다음 주 할 일 목록이 한 줄씩 지워지고 있었다. 장보기. 과제 제출. 바다 가기. 글자가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연이—바다 가기는 왜! 그건 아직 날짜도 안 정했단 말이야!
흑월—날짜가 없는 약속이 가장 맛있다. 너희 둘이 한 번 지키지 못한 그 약속처럼.
서한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약속을 아는 것은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끼어든 그것.
[ 年 壬午 · 결빙 ] 균열 확산 중
흑월—고리 없는 개는 필요 없다. 그 그릇과 함께 비워 주마.
머리가 내려왔다. 연이가 뒤로 물러섰다. 네오가 앞으로 나섰지만 다리가 바닥을 디디지 못했다.
그 앞을 막아선 것은 젖은 코트 한 벌이었다. 발톱도, 송곳니도 없는 맨몸의 서한비.
연이—뭐 해! 힘 없다며!
서한비—없어요. 그런데 이번엔 저쪽으로 안 걸어갈 거예요.
서한비—우산도 없네요. 반반은커녕.
라후의 입이 열렸다. 그때 서한비의 손바닥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차가운 물방울 하나. 검지 않고, 맑은.
서한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