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의 붉은 실이 새까맣게 물들어 칼이 되는 곳에서, 세 사람은 등을 맞대고 섰다. 연이, 네오, 그리고 방금 감옥을 부수고 나온 무성.
검은 칼날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실 한 가닥마다 끊어진 인연의 원한이 실려 있어서, 스치기만 해도 마음이 시렸다.
연이—칼이 너무 많아. 하나 쳐내면 세 개가 더 날아와.
검은 칼비가 밤을 통째로 뒤덮었다. 붉었던 인연들이 전부 새까맣게 벼려져, 세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한 가닥 한 가닥이 백 년치 원한을 품고 있어서, 스치기만 해도 마음이 얼어붙었다.
연이—…이거, 그냥 힘으로 막으면 안 돼. 마음이 시려. …근데 무섭진 않아. 나 혼자 아니니까. 병하 왼쪽, 무성 오른쪽, 나 가운데. …자, 등 맞대자. 백 년 칼비, 우리 셋이 뚫어 낸다.
네오—내 뒤에 붙어 있어. 왼쪽은 내가 막을게. 무성, 오른쪽!
무성—…맡겨. 백 년간 삼킨 검은 물, 이제 방패로 쓴다. 오른쪽은 한 방울도 안 통과시켜.
무성이 검은 물을 둥근 방패로 펼쳤다. 백 년간 이야기를 삼키던 그 물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벽이 되었다. 쏟아지던 칼날 절반이 그 방패에 막혀 튕겨 나갔다.
연이—…무성, 너 방패 진짜 잘 만든다! 삼키던 손이 이렇게 잘 지키다니! …봐, 셋이 되니까 사각이 없어. 병하 왼쪽, 무성 오른쪽, 나 앞. 완벽해!
무성—…백 년간 봐 둔 게 있어서. 저 여자 공격 패턴, 나만큼 잘 아는 사람 없거든. 다음은 위에서 온다. …네오, 위!
네오—…봤어! 위쪽은 금빛 서릿발로 막는다! …무성, 네 예측 정확하네. 백 년 옆에서 본 값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좋아, 셋이 이 리듬 유지하자. 오래 버틸수록 우리가 유리해. 밑에서 루나가 올라오니까.
무성—…백 년간 저 여자 밑에서 배운 게 이렇게 쓰이네. 아이러니하다. 저 여자가 나를 도구로 키웠는데, 그 도구가 저 여자를 상대로 쓰이고. …연이, 저 여자 다음 수 알려 줄게. 화가 나면 위에서 십자로 쏟아부어. 지금 화났으니까, 곧 십자 온다. 대비해.
연이—…무성 완전 든든하다. 적의 공격 패턴을 다 알아. …박지은 씨, 이거 좀 억울하겠어요. 백 년 키운 도구가, 당신 수를 다 읽어서 우리한테 알려 주니까. …이게 뺏기만 한 사람의 최후예요. 도구조차 마음이 떠나요.
박지은—…무성, 이 배신자. …백 년을 거둬 줬더니, 겨우 며칠 만에 저 애들 편이야? …배은망덕한. 네가 나 아니었으면, 진작 흩어져 사라졌을 존재인데!
무성—…거둬 준 게 아니라, 가둔 거였잖아. 이름도 뺏고, 마음도 못 갖게 하고. …나 배신 안 했어. 애초에 당신 편이었던 적이 없어. 억지로 묶여 있었을 뿐이지. …이제 그 실 끊었어. 내 이름으로, 내가 고른 편에 섰어. 그게 배신이면, 백 번이라도 배신할게.
네오—숙살.
연이—덩굴 결박!
네오의 서리가 칼날을 무디게 만들고, 연이의 덩굴이 그 사이를 받아넘겼다. 백 년을 벼려 온 파수꾼과 네 기둥을 되찾은 아이, 그리고 백 년 봉인을 깬 그릇. 세 사람의 호흡은 분명 강했다.
무성—수벽. …오른쪽 벽, 세운다.
세 원소가 처음으로 함께 돌았다. 쇠가 칼날을 무디게 하고, 물이 벽을 세우고, 나무가 그 사이를 엮었다. 각자 다른 힘인데도, 서로를 살리며 하나의 방어진을 이루었다.
연이—…이거 봐, 우리 진짜 잘 맞아! 쇠·물·나무가 서로 살리는 상생이야! …박지은 씨, 당신은 상극으로 부수지만 우린 상생으로 지켜요. 부수는 건 하나면 되지만, 지키는 건 서로 도와야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더 강해요.
박지은—…상생이라. 예쁜 말이네. 근데 얘야, 상생은 느려. 나는 상극으로 순식간에 부수는데, 너희는 서로 도우며 천천히 막잖아. …속도 싸움에선, 부수는 쪽이 이겨. 백 년간 그래 왔고.
네오—…속도로 안 지려고, 우린 숫자로 간다. 하나둘 늘어날 거야. 저 아래서 계속 올라오고 있으니까. …네 상극이 아무리 빨라도, 되살아나는 인연의 숫자는 못 이겨. 봐, 벌써 하나 올라온다.
박지은—…숫자로 온다고? 웃기네. 셋이서 세계 전부를 상대하겠다고? …아무리 인연이 올라와 봐야, 내 검은 실 앞에선 하나씩 얼어붙을 텐데. 어디, 몇이나 올라오나 보자. 다 얼려서 도로 떨어뜨려 줄 테니까.
연이—…글쎄요, 박지은 씨. 우리 인연, 생각보다 질기고 많거든요. 재성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식상의 섬에서도. …그리고 다들 나한테 진심이라, 당신이 얼려도 계속 올라올걸요? …자, 첫 번째 손님이에요. 이 씩씩한 목소리, 들어 보세요.
네오—…무성, 왼쪽 잠깐 맡아. 저 아래에서 뭐가 올라온다. 검은 실이 그쪽으로 몰려. …연이, 저건 네 실이야. 재성 쪽에서 이어진. 누가 오는지 알겠어?
연이—…이 물빛 실. 이 씩씩한 온도. …루나다! 루나가 올라와! …봐요, 박지은 씨. 벌써 첫 번째가 왔어요. 당신이 끊은 실 타고, 제 발로 다시.
하지만 베틀은 세계 그 자체였고, 실은 끝이 없었다. 박지은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원한은 숨을 쉬지 않으니까, 지칠 일도 없었다.
연이—…이거 힘으로만 막으면 끝이 없어. 칼날 하나하나가 원한이잖아. …그럼 읽어서 풀어야지. 무성, 네오! 나 읽는 동안 시간 벌어 줘! 저 칼날들, 원래 무슨 인연이었는지 하나씩 되돌릴게!
무성—…좋아. 오른쪽 내가 다 막아. …근데 연이, 너무 무리하지 마. 한 번에 다 읽으려다 네가 먼저 지쳐. 급한 것부터, 하나씩.
네오—…왼쪽 정리했어. 연이, 지금이야. 앞쪽 칼날 다발, 저게 제일 굵어. 저것부터 읽어. …우리가 뒤 맡을 테니, 넌 앞만 봐.
연이가 쏟아지는 칼날에 손을 뻗었다. 베이는 대신, 읽었다. 그 칼날은 원래 절친했던 두 친구의 실이었다. 사소한 오해로 틀어진 것을, 박지은이 검게 벼려 무기로 만든 것이었다.
연이—…너희, 원래 십년지기였잖아. 그 오해, 사실 둘 다 서로 걱정해서 생긴 거였어. …풀려라. 네 진짜 색으로 돌아가. 칼이 아니라, 실로.
검게 벼려졌던 칼날이, 연이의 목소리에 붉은빛을 되찾으며 스르륵 풀렸다. 무기 하나가 다시 인연이 되어, 오히려 세 사람을 감싸는 실이 되었다. 박지은의 공격이, 연이의 손끝에서 방어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박지은—…또 그 짓이야. 내 무기를 자꾸 되돌려. …소용없어. 나한텐 백 년치 원한이 있어. 네가 하나 되돌리는 동안, 나는 열 개를 벼려. 속도가 안 돼, 얘야.
연이—…혼자면 그렇겠죠. 근데 나 혼자 아니거든요. …봐요, 저 아래에서 뭐가 올라오는지.
박지은—버텨 봐야 소용없어. 너희 둘이 아무리 굳세도, 결국 둘뿐이잖아. 둘이서 세계 전부를 어떻게 막아?
검은 실이 마침내 연이와 네오를 잇는 붉은 실에 감겼다. 얼음이 번지듯이, 두 사람 사이의 붉은빛이 손끝에서부터 새까맣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연이—실이 차가워져. 네오, 네 쪽이 안 느껴져. 손이…
네오—연이. 놓지 마. 뭐가 와도 그 손만은 놓지 마.
박지은—그래, 바로 그 얼굴이야. 내가 백 년을 기다린 얼굴. 소중한 걸 눈앞에서 잃는 사람의 얼굴 말이야.
연이—…백 년을 이 얼굴 보려고 기다렸다고요. …박지은 씨, 그거 알아요? 그게 제일 슬픈 말이에요. 남 무너지는 얼굴을 백 년 기다리다니. …그 백 년에, 당신은 한 번도 안 웃었겠네요. 남 아프게 할 궁리만 하면서. …그거 이긴 인생 아니에요. 스스로 백 년을 감옥에 가둔 거예요.
박지은—…감옥이라. 그래, 감옥이었을지도. 근데 그 감옥에서 나오는 법을, 나는 몰라. …나오려면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백 년간 오므린 이 손이 안 펴져. …그러니까 그냥, 이 안에서 남 무너지는 거라도 봐야지. 그거라도 안 하면,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없으니까.
연이의 손끝이 감각을 잃어 갔다. 그때, 저 아래 세계로 이어졌다 끊겼던 실 하나가, 스스로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앞서 박지은이 잘라 냈던 그 응원의 실이었다. 끊었는데,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박지은—…뭐야. 저 실, 내가 분명 잘랐는데. 왜 다시 이어져. 끊긴 실이 어떻게 저절로…
루나—…(저 아래에서) 연이는 혼자 아니야! 이 못된 거미 아줌마야! 끊어? 우리 실을? 웃기시네, 이건 못 끊는 실이거든!
저 아래 재성의 물길에서, 루나가 다시 이어진 실을 붙잡고 위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물의 아이답게, 실을 물줄기 삼아 헤엄치듯. 백 년을 갈라 온 여자가 처음으로 본 광경이었다. 끊은 실이, 제 발로 되돌아오는.
루나—봤지? 내 실은 연이한테 이어져 있단 말이야! 아줌마가 아무리 잘라도, 사랑하는 마음은 다시 이어져! 그게 '끊을 수 없는 실'이라고! 내가 이 물길 타고 올라간다!
무성—…루나! 내가 길 뚫을게! 검은 물로 물길 넓힐 테니까, 타고 올라와! …이 검은 물, 백 년간 삼키는 데만 썼는데. 오늘은 친구 올라오는 길 내는 데 쓴다!
루나 언니—…(아래에서) 동생 혼자 보낼 수는 없죠. 언니도 이 실 타고 갑니다. 이 실은, 제 빵을 맛있다고 말해 준 사람한테 이어진 실이거든요. 회복한 이 다리로, 끝까지 올라갈게요.
백문—…(아래에서) 실이 곧 계약이라면, 이건 사서인 내 관할일세. 끊긴 계약이 다시 맺어지는 순간을, 사서가 어찌 놓치겠나. 전 서가, 지금부터 개관한다! 등불 물고기들아, 저 위로 길을 밝혀라!
백문의 등불 물고기들이 다시 이어진 실을 타고 헤엄쳐 올라, 어둠 속에 길을 밝혔다. 재성의 루나, 언니, 그리고 도서관의 백문. 몸은 저 아래 있어도, 그들의 별빛과 마음이 실을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박지은이 끊은 모든 인연이, 하나씩 되살아나 연이에게로 돌아왔다.
연이—…루나! 언니! 백문 님! …끊겼는데, 다시 왔어. …맞아, 이게 우리 인연이지. 아무리 잘라도 다시 이어지는. …고마워, 다들. 나 진짜 혼자 아니었어.
루나—…당연하지! 우리가 연이 혼자 보낼 리가! …나 재성에서부터 이 물길 계속 팠어. 언젠가 연이한테 갈 길 내려고. 봐, 드디어 이어졌잖아! 물은 어디로든 흐른다니까!
연이—…루나. 너 재성에서 물길 파고 있었구나. 나 여기서 싸우는 동안, 너는 나한테 올 길을 파고 있었어. …아, 진짜 눈물 나. 우리 서로 못 봐도, 각자 자리에서 서로한테 가고 있었네. …고마워. 진짜 고마워, 루나.
루나—…울지 마, 연이! 아직 다 안 왔거든! 지금 반쯤 왔어! …나 이 물길 끝까지 팔 거야. 그래서 결정적일 때, 짠 하고 나타날 거야. 물의 아이가 제일 멋질 때가 언제게? 다들 지쳤을 때 콸콸 쏟아지는 거야! 기대해!
무성—…루나, 그 물길 나도 도울게. 내 검은 물, 이제 맑아졌으니까 네 물이랑 섞여도 돼. 두 물이 합치면 물길이 두 배로 빨라져. …백 년간 삼키는 데 쓴 이 물, 오늘은 친구 데려오는 데 쓴다. 좋은 데 쓰네, 드디어.
루나 언니—…연이 씨. 저 이제 다 나았어요. 이 다리로, 이 실 끝까지 밟고 올라갈게요. …백 년 얼음 아줌마, 각오하세요. 제 동생 울린 값, 제가 빵 반죽 치대듯 톡톡히 받을 거예요.
연이—…언니! 다 나았구나! 재성에서 그렇게 지쳐 있더니, 이제 이렇게 씩씩하게. …아, 진짜 다행이다. 언니 회복한 거 보니까 눈물 나. …그때 언니 구하러 재성 갔던 게, 이렇게 돌아오네. 그때 맺은 실이, 지금 언니를 여기로 데려왔어.
루나 언니—…네, 연이 씨. 그때 연이 씨가 제 빵을 맛있다고 해 준 그 한마디가, 저를 살렸어요. 그 실 덕에 제가 회복했고, 그 실 타고 지금 여기 왔죠.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렇게 멀리 가네요. 백 년 아줌마는 모르는 거예요.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을.
박지은—…빵집 여자까지. …참 시시한 인연들이네. 빵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 목숨 걸고 올라오다니. …근데 왜, 그 시시한 것들이 자꾸 내 백 년을 흔드는 거야. 대단한 것도 아닌데. 겨우 빵, 겨우 삼각김밥, 겨우 옆자리인데.
연이—…그 시시한 게 진짜라서 그래요, 박지은 씨. …대단한 건 부서지지만, 시시하고 따뜻한 건 안 부서져요. 빵 한 조각, 삼각김밥 하나, 옆자리 온기. …그게 백 년을 버티는 거예요. 당신이 백 년간 못 가진 게, 바로 그 시시한 것들이에요.
박지은—…시시한 것들. …나는 늘 대단한 것만 좇았어. 완벽한 것, 값진 것, 남들이 부러워할 것. …근데 그런 건 다 손에서 부서졌지. 남은 게 없어. …저 애들은 시시한 걸 붙잡고 백 년을 버티는데, 나는 대단한 걸 다 가지고도 텅 비었네. …내가, 뭘 잘못 산 걸까.
백문—…저 여자, 방금 '뭘 잘못 산 걸까' 했네.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제 삶을 돌아보는 게야. …연이 학생, 지금이 고비일세. 저 여자가 지금 무너지느냐, 아니면 더 극단으로 가느냐. 마지막까지 다정하게. 저 여자를 벼랑 끝에서 붙잡는 건, 자네 손밖에 없네.
연이—…박지은 씨. 잘못 산 거 아니에요. 그냥, 아무도 시시한 게 진짜라고 안 가르쳐 줬을 뿐이에요. …이제 아셨잖아요. 그럼 지금부터 시시하게 살면 돼요. 대단한 거 다 내려놓고. …제 손 잡아요. 시시하지만 따뜻한, 이 손.
연이가 검은 폭풍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백 년 얼음의 여자를 향해, 시시하고 따뜻한 손 하나를. 박지은의 눈이, 그 손과 제 가슴의 붉은 실 사이에서 오래도록 흔들렸다. 백 년 만에, 손을 잡을지 말지를 정하는 그 갈림길에서.
박지은—…그 손. …잡으면, 정말 다 괜찮아져? …백 년 부순 나도, 시시하게 다시 살 수 있어? …나도, 저 합주에 낄 수 있어…?
네오—…응, 지은아. 잡아. 지금이야. …백 년 만의, 첫 손이야.
백문—…연이 학생. 자네가 재성에서, 도서관에서 맺은 인연들이 지금 다 자네를 지키러 왔네. …이게 자네가 백 년 전과 다른 점일세. 그때 자네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많은 실에 묶여 있어. 저 여자가 백 년을 잘라도 못 끊을 만큼.
무성—…나도 왔어, 연이. 이미 여기 있지만. …봐, 백 년간 나는 이 세계에서 제일 외로운 그릇이었어. 근데 지금은, 이 많은 실 한복판에 서 있어. 너희 덕분에. …이제 나도 이 인연 다발의 한 가닥이야. 안 외로워. 백 년 만에.
연이—…무성. 당연하지. 넌 이미 우리 넷째잖아. …봐, 박지은 씨. 이게 우리예요. 재성의 물, 도서관의 등불, 식상의 불, 파수꾼의 쇠, 백 년 그릇의 물, 그리고 내 넝쿨. 여섯이 한 다발이에요. …당신이 백 년간 하나씩 끊어 온 걸, 우리는 하루 만에 한 다발로 묶었어요.
모카—…와, 이거 우리 여섯이 딱 맞물렸네. 재성 물, 도서관 빛, 내 불, 파수꾼 칼, 연이 실. 톱니바퀴처럼. …좋아, 다들 준비됐지? 이번 판은, 제대로 간다!
여섯 개의 힘이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였다. 모카의 불이 검은 실을 태우면, 연이의 넝쿨이 그 재를 받아 새 실을 엮고, 무성의 물이 그 실을 적셔 굳히고, 네오의 서리가 방패를 세우고, 백문의 등불이 다음 칼날의 위치를 비추고, 언니의 빛이 길을 밝혔다. 공격과 방어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연이—…이거 진짜 밴드다! 다들 딱딱 맞아! …박지은 씨, 봤어요? 우리 여섯이 이렇게 합주하니까, 당신 백 년 원한도 리듬을 못 따라와요. 혼자 치는 북은 아무리 세도, 여섯이 맞추는 합주를 못 이겨요!
박지은—…합주라니. …백 년간 나는 늘 혼자 연주했어. 아무도 나랑 안 맞춰 줬으니까. …그래서 저 소리가, 저 여섯이 맞추는 소리가… 왜 이렇게 시끄럽고, 왜 이렇게… 부러운 거야. …아니. 아니야. 시끄러워. 다 부숴 버릴 거야!
백문—…또 '부럽다'는 말이 새어 나왔군, 저 여자. …연이 학생, 저 여자는 우리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부러워하는 게야. 미움은 사랑이 갈 곳을 잃은 것뿐이지. 저 여자의 미움 밑엔, 끼고 싶은 마음이 있어. 계속 두드리게. 그 마음을.
연이—…네, 백문 님. …박지은 씨. 부러우면, 끼면 돼요. 우리 합주에. …봐요, 여기 자리 있어요. 일곱 번째. 당신 실 하나만 우리 다발에 얹으면, 당신도 이 소리의 일부가 돼요. 혼자 치는 북 말고, 같이 맞추는 합주요. …백 년 만에, 안 시끄럽고 안 외로운 소리를 낼 수 있어요.
박지은—…나도, 낄 수 있어? …백 년을 적으로 산 나도? …저 소리에, 내 북 하나 얹어도, 저 애들이 안 밀어내?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내가 얼마나 많은 걸 부쉈는데. 낄 자격 같은 거, 나한텐 없어. …그러니까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흔들리니까.
네오—…지은아. 자격 같은 거 없어. 합주는 잘 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치고 싶은 사람이 끼는 거야. …네가 백 년간 부쉈어도, 지금 같이 치고 싶으면 그걸로 돼. 우린 안 밀어내. 연이가 자리 비워 뒀다잖아. …근데 그건, 네가 정하는 거야. 우리가 억지로 못 끌어들여.
박지은—…내가 정한다고. …그럼 나는… 나는… …아, 모르겠어! 백 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이제 와서 뭘 어떻게 정해! …머리 아파. 그만해. 다 그만하라고!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마! 생각하면, 내가 무너지니까!
박지은—…이게 무슨. …백 년간 이 세계에서, 끊은 실이 되돌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왜 저 애 실만. 왜 저 애 인연만 이렇게 질겨. 대체 저 애가 뭐라고!
연이—…특별해서가 아니에요, 박지은 씨. 나눠서 그래요. …나는 이 사람들한테 삼각김밥 나누고, 이야기 들어주고, 옆에 있어 줬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도 나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당신은 백 년간 뺏기만 했으니까, 아무도 안 돌아온 거고요. 그 차이예요.
되살아난 인연들이 세 사람을 감쌌다. 재성에서 올라온 물빛, 도서관에서 올라온 등불빛, 그리고 무성의 맑아진 검은 물. 얼어붙던 붉은 실이 다시 온기를 되찾으며, 검은 칼비를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루나 언니—…(아래에서) 연이 씨! 제 등불빛으로 칼날 눈부시게 할게요! 눈 감으세요, 잠깐! …자, 백 년 얼음 아줌마. 빵집 조명발 좀 받아 보세요! 저희 빵집, 조명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언니의 등불빛이 검은 칼비를 눈부시게 밝혔다. 어둠에 익숙하던 박지은의 검은 실이, 빛 앞에서 잠깐 방향을 잃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이의 넝쿨이 흐트러진 칼날을 한 아름 걷어 냈다.
백문—…(아래에서) 연이 학생, 지금일세! 저 여자가 벼린 칼날들, 원래 다 성한 계약이었네. 내가 원본을 읽어 줄 테니, 자네가 되쓰게! 사서와 독서가의 합작일세!
연이—…네, 백문 님! 읽어 주세요! …아, 보여요. 이 칼날들 원래 계약서. 다 사랑으로 맺은 거였어. 박지은이 미움으로 덧썼을 뿐. …되쓴다! 원래 본뜻으로! 미움 지우고, 사랑만 남겨!
백문이 읽어 낸 원본을 연이가 되썼다. 검은 칼날들이 한꺼번에 붉은 실로 돌아가, 세 사람을 공격하는 대신 감싸는 이불이 되었다. 사서와 독서가의 백 년 합작이, 박지은의 무기고를 통째로 무장해제한 것이다.
박지은—…내 칼날을 통째로 되써? …백문, 그 늙은 여우. 백 년을 서고에 처박혀 있더니, 저 애랑 짝을 이루니 이렇게 무서워지네. …안 되겠어. 하나씩 상대해선 끝이 없어. 다 같이, 통째로 부숴야겠어.
그리고 하늘의 갈라진 틈에서, 다섯 번째 실이 불꽃처럼 떨어져 내렸다.
주홍 불티를 튀기며, 수달 한 마리가 마이크 대신 주먹을 쥐고 무대 한복판에 착지했다.
모카—요! 초대장은 없었는데, 실은 있더라고. 식상의 섬 최고 화력 모카, 앙코르 무대 왔습니다!
연이—모카?! 너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모카—어떻게긴, 네 실 붙잡고 왔지. 이 세계에선 인연이 곧 통행증이래. 그나저나 너 사람 됐네? 오, 훨씬 낫다. 아니 뭐, 돼지도 귀여웠지만.
연이—이 상황에 그 소리가 나와?
모카—…아니 근데 진짜, 사람 되니까 훨씬 낫다. 돼지일 땐 안아 주기 좀 애매했는데, 지금은 딱 안기 좋게 생겼어. …자, 이따 다 끝나면 한 번 안자. 지금은 저 아줌마부터 조지고.
연이—…모카 넌 진짜 위기의식이 없어. 세계가 감기는 중인데 안아 줄 계획을 세워? …근데 고맙다. 네 그 능글맞음 덕에 긴장 확 풀렸어. …좋아, 다 모였다. 나, 네오, 무성, 루나, 언니, 백문 님, 모카. 일곱이야. 백 년 아줌마 상대로 일곱!
모카—…일곱 대 하나면, 이거 반칙 아니야? …아, 저쪽이 세계 전부를 가졌으니까 공평한가. 그럼 됐어. 자, 식상의 섬 화력 보여 줄게. 저 검은 실 다발, 내가 다 태워 버릴게!
모카—연화! 앙코르는 세게 가야 제맛이지!
모카의 불티가 줄지어 터지며 검은 실 다발을 태웠다. 식상의 섬 최고 화력답게, 무대 위 공연처럼 화려하고 뜨거웠다. 박지은의 어둠 한복판에, 오랜만에 밝은 불빛이 춤췄다.
모카—…어때, 백 년 아줌마? 나 이래 봬도 콘서트 수천 번 뛴 몸이야. 무대 장악력 하나는 자신 있거든. 이 어두컴컴한 무대, 내가 좀 밝혀 줄게!
박지은—…시끄러운 수달이네. 근데 불이라. 불은 금방 꺼지지. 화려하지만 오래 못 가. …네 그 불티, 몇 번이나 더 터질 수 있을까? 나는 백 년을 안 꺼졌는데.
모카—…어유, 초 치기는. 내 불 걱정 마셔. 나 혼자 타면 금방 꺼지는데, 연이 나무가 계속 기름 부어 주거든. 상생이란 게 그래. 혼자 안 타. …봐, 연이 나무가 있는 한 내 불은 안 꺼져.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모카—긴장 풀라고 하는 소리야. 자, 다 모였으니까 한 번 제대로 놀아 보자고.
박지은—…벌레 같은 것들이. 끊어도, 끊어도, 왜 자꾸 다시 이어지는 거야!
연이—…이건 끊을 수 없는 실이니까요. …당신은 백 년간 실을 끊는 법만 연구했지만, 세상엔 못 끊는 실이 있어요. 사랑으로 맺은 실. …그건 잘라도 다시 이어지고, 얼려도 다시 녹고, 태워도 다시 피어나요. 왜냐면, 마음은 안 죽거든요.
박지은—…마음은 안 죽는다. …웃기지 마. 나는 백 년간 수천 개의 마음을 죽였어. 이 곳간에 다 있잖아. …근데 왜, 왜 저 애들 마음만은 안 죽어. 뭐가 다른데. 내가 죽인 마음이랑, 저 애들 마음이 뭐가 다르냐고!
연이—…달라요. 당신이 죽인 마음들은, 혼자였어요. 서로 안 이어진, 외로운 마음들. 그래서 하나씩 끊을 수 있었죠. …근데 우리 마음은 서로 이어져 있어요. 하나를 끊으면 옆에서 다시 이어 주고, 그게 또 옆으로 번지고. …혼자인 마음은 죽지만, 이어진 마음은 안 죽어요. 그 차이예요.
박지은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백 년간 그녀가 죽인 수천의 마음은, 전부 혼자였다. 서로 이어지기 전에 끊었으니까. 그런데 눈앞의 여섯은, 이미 너무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어디를 끊어도, 다른 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처음으로, 그녀의 백 년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백문—…연이 학생. 저 여자 손이 멈칫했네. 방법이 안 통한다는 걸 저 여자 스스로 깨달은 게야. …백 년을 이긴 방법이 처음으로 막혔으니, 저 여자 지금 몹시 흔들릴 걸세. 몰아붙일 때야. 허나 조심하게. 궁지에 몰린 자는, 가장 극단적인 걸 꺼내니까.
연이—…네, 백문 님. …박지은 씨. 방법이 안 통하죠? 백 년간 한 번도 안 막힌 게, 오늘 처음 막혔죠. …그거, 지는 게 아니에요. 배우는 거예요. 혼자인 마음은 끊기지만 이어진 마음은 안 끊긴다는 걸, 방금 배운 거잖아요. …그럼 이제, 당신도 이어지면 돼요. 안 끊기는 쪽으로.
박지은—…이어지라고? 나더러? …백 년을 끊어 온 내가, 이제 와서 이어지라고? …그건 지는 거야. 내 백 년을 통째로 부정하는 거라고. …차라리, 차라리 다 끊어 버릴래. 이어질 수 있는 것 자체를 없애 버리면, 나도 안 지는 거잖아. …그래. 세계째로 끊는다. 이어질 실이 아예 없게.
네오—…왔다, 연이. 저 여자 극단으로 간다. 백문 님 말대로야. …다들 대비해! 저 여자가 세계 전부를 무기로 쓸 거야! 이번엔 진짜 크게 온다!
모카—불씨! 물에 사는 놈이 제일 뜨겁다니까.
무성—침수. …이번엔 부수는 게 아니라, 지키는 쪽으로.
무성의 검은 물이 처음으로 방패가 되어 칼비를 막았다. 그 물을 연이의 덩굴이 쭉 빨아들였다. 물이 나무를 살린다는 수생목의 이치가, 침식의 상성을 양분의 상성으로 뒤집어 놓았다.
연이—무성, 네 물 따뜻해. 예전이랑 완전 달라.
무성—…그런가. 그럼 됐어.
모카—…야, 근데 이 조합 뭐냐. 물이 나무 살리고, 나무가 불 키우고, 불이… 어, 나 불인데 다음 뭐야? 나 상생 순서 까먹었어!
백문—…화생토, 토생금일세, 수달 군. 불이 흙을 데우고, 흙이 쇠를 낳지. 자네 불이 이 궁의 흙바닥을 데우면, 그 온기가 파수꾼의 쇠를 벼린다네. …오행이 한 바퀴 돌면, 끊어질 틈이 없어. 그게 상생의 고리일세.
모카—…오, 사서 영감님 척척박사네. 좋아, 그럼 나 불로 바닥 데운다! 백문 영감 등불로 길 밝히고, 네오 쇠 벼리고, 연이 나무 자라고, 무성 물 흐르고! 다섯이 한 바퀴! 이거 완전 돌림노래잖아!
연이—…맞아, 모카! 우리 오행 돌림노래야! 한 명이 다음 명을 살리고, 그 명이 또 다음을. …박지은 씨 상극은 하나가 하나를 부수는 거지만, 우리 상생은 다 같이 도는 거예요. 부수는 건 끝이 있어도, 도는 건 끝이 없어요. 우린 안 지쳐요!
다섯 원소가 하나의 고리로 돌기 시작했다. 불이 흙을, 흙이 쇠를, 쇠가 물을, 물이 나무를, 나무가 불을. 끝없이 순환하는 상생의 고리 앞에서, 박지은의 상극 공격이 처음으로 갈 곳을 잃었다. 부수려 해도, 되살아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박지은—…상생의 고리라. …끊어도 다시 돌고, 부숴도 다시 이어. …백 년간 나는 이 고리를 하나씩 끊어서 이겨 왔는데, 저것들은 아예 고리를 통째로 돌려 버리네. …끊을 틈이 없어. 한 군데 끊으면, 옆에서 바로 메워 버려.
네오—…그게 상생의 힘이야, 박지은. 하나가 무너지면 옆이 살리고, 그게 또 옆을 살리고. …네 상극은 혼자 부수지만, 우리 상생은 다 같이 지켜. 지치지도 않아. 서로가 서로한테 힘을 주니까. …백 년 원한으로도, 이 고리는 못 끊어.
모카—…봐, 아줌마! 나 불티 백 번 터뜨려도 안 지쳐! 연이 나무가 계속 기름 부어 주거든! 이게 팀워크야! …자, 다음 곡 간다! 이번엔 다 같이 후렴 넣어! 하나, 둘, 셋!
여섯 사람의 힘이 후렴처럼 한꺼번에 터졌다. 물과 불과 나무와 쇠와 등불과 빛이 동시에 박지은의 검은 폭풍을 밀어냈다. 백 년을 홀로 연주하던 여자 앞에서, 처음으로 여섯이 맞춘 합주가 울려 퍼졌다. 시끄럽고, 따뜻하고, 못 견디게 부러운 소리였다.
물이 나무를 살리고, 나무가 불을 키우고, 백문의 등불이 길을 밝히고, 네오의 서리가 칼날을 재웠다. 다섯 사람의 숨이 처음으로 하나의 흐름이 되어 돌았다.
연이—…이거야! 오행이 서로 살리는 흐름! 무성 물이 내 나무 살리고, 내 나무가 모카 불 키우고, 모카 불이… 아, 근데 불이 네오 쇠를 녹이면 안 되는데!
네오—…괜찮아. 모카, 불을 나한테 말고 검은 실 매듭에 집중해. 나는 서리로 그 매듭을 얼릴 테니, 네가 얼린 매듭을 태워. 얼렸다 태우면, 백 년 매듭도 부서져.
모카—…오, 파수꾼 머리 좋은데? 얼렸다 태우기. 온도차로 매듭 깨기. …좋아, 간다! 연이 나무야, 내 불에 기름 좀 부어 줘! 이번 불티는 특대형이야!
모카—화룡! 식상의 섬 앙코르, 제대로 간다!
네오가 얼린 검은 매듭을, 모카의 불룡이 통째로 집어삼켰다. 얼음과 불의 온도차에 백 년 묵은 매듭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 틈으로 연이의 덩굴이 파고들어, 갈라진 매듭을 붉은 실로 되돌렸다.
무성—…나도 간다. 저 아래 루나 물길이랑 내 검은 물을 합쳐서, 큰 물줄기 만들게. 물이 두 배면, 연이 나무도 두 배로 자라. …루나! 아래에서 밀어 올려! 내가 위에서 받을게!
루나—…응, 무성! 간다! 재성의 물 다 끌어모았어! …이게 내가 백 년 판 물길의 전부야! 받아, 무성! 우리 물, 합치자!
저 아래 재성에서 루나가 밀어 올린 맑은 물과, 무성의 검은 물이 만났다. 오염된 물과 정화된 물이 섞이자, 검은 물이 서서히 맑아졌다. 백 년간 삼킴에 쓰이던 물이, 처음으로 되살리는 물이 되었다. 무성의 물이, 루나 덕분에 정화된 것이다.
무성—…내 물이, 맑아졌어. …백 년간 검기만 했는데. …루나, 네 물이 내 물을 씻었어. …이거, 이런 느낌이구나. 깨끗한 물로 누굴 지키는 거. …고마워. 나 이제 진짜 삼키는 자 아니야. 지키는 자야.
루나—…무성, 네 물 이제 안 무서워! 맑아지니까 우리 물이랑 똑같아! …봐, 두 물이 합치니까 물길이 두 배로 넓어졌어! 나 이제 이 넓은 물길로 더 빨리 올라갈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곧 진짜로 갈게!
연이—…루나 물이랑 무성 물이 합쳐지니까, 내 넝쿨이 미친 듯이 자라! 수생목이 두 배야! …봐, 박지은 씨! 당신이 오염시킨 물조차, 루나가 씻으니까 우리 힘이 돼요! 당신이 백 년 만든 무기가, 우리 손에서 다 뒤집혀요!
박지은—…내 검은 물이 씻겨? …그 물은 백 년간 아무도 못 정화했어. 그런데 저 토끼 한 마리가… …저 물의 아이, 위험해. 저것부터 막아야겠어. 저게 올라오면, 내 오염이 다 씻길 거야.
네오—…연이, 들었지. 저 여자가 루나를 경계해. 그 말은, 루나가 우리 승부처라는 뜻이야. …루나가 완전히 올라올 때까지, 우리가 시간 벌자. 저 여자 시선을 루나한테서 떼어 놔야 해. …자, 화력 집중! 저 여자가 우리만 보게!
네오—금강! …저 여자, 나 봐라. 백 년 숨긴 파수꾼 힘, 조금 보여 줄게.
모카—…나도! 야, 백 년 아줌마! 여기 식상의 섬 최고 화력이 있다! 이쪽 봐, 이쪽!
네오의 금빛과 모카의 불티가 요란하게 터지며 박지은의 시선을 끌었다. 화려한 미끼였다. 그 사이, 저 아래에서 루나가 조용히, 조금씩 더 높이 물길을 타고 올라왔다. 아무도 그쪽을 안 보게 하는 것. 그게 이 화력쇼의 진짜 목적이었다.
박지은—…시끄러운 것들. 파수꾼 금빛이랑 수달 불티라. 백 년 만에 제법 볼 만한 쇼네. …근데 얘들아, 나 바보 아니야. 이렇게 요란하게 굴 땐, 뭔가 숨기는 거지. …저 물의 아이. 여전히 올라오고 있구나. 그쪽부터 끊어야겠어.
연이—…들켰어! …안 돼, 박지은 씨! 루나 건드리지 마! …네오, 무성! 저 여자가 루나 물길 노려! 막아야 해!
네오—…내가 간다! 저 여자 손을 나한테 묶어 둘게! …연이, 넌 루나 물길을 네 넝쿨로 감싸! 저 여자 검은 실이 못 닿게! 무성은 물로 방벽! 서둘러!
네오가 금빛 실을 뻗어 박지은의 검은 손을 옭아맸다. 연이의 넝쿨이 루나의 물길을 이불처럼 감쌌고, 무성의 맑은 물이 그 위에 한 겹 더 벽을 세웠다. 세 사람이 저마다 몸을 던져, 아직 못 올라온 넷째 동료의 길을 지켰다.
박지은—…비켜! 저 물의 아이만 끊으면 다 끝나는데! …왜 너희는 자꾸 남을 지키겠다고 제 몸을 던져! 그게 무슨 소용인데! 저 아이가 뭐라고!
연이—…루나가 뭐냐고요? 우리 동료예요. 재성에서 만난, 물의 아이. …당신은 '저 아이가 뭐라고'라고 하지만, 우리한텐 저 아이가 세상 전부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세상 전부라서, 우린 서로를 지켜요. …당신이 이해 못 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루나—…얘들아. 나 때문에 너희가… …고마워. 진짜 고마워. …나 빨리 올라갈게! 너희가 이렇게 지켜 주는데, 내가 못 올라가면 안 되지! …물아, 힘내자! 재성의 모든 물아, 나 좀 밀어 올려 줘!
재성의 모든 물이, 루나의 부름에 응답했다. 검은 강도, 우물도, 빗물도, 눈물도. 세상의 모든 물이 하나의 물길로 모여 루나를 밀어 올렸다. 물의 아이가, 마침내 세계의 절반쯤까지 올라왔다. 이제 조금만 더였다.
네오—…연이, 버텨! 루나가 절반까지 왔어! 근데 저 여자가 지금 총공세야! …다들 조금만 더! 루나가 올라오면, 저 여자 오염이 다 씻겨! 그게 승부처야! 조금만 더 버티자!
박지은—…승부처? 그럼 그 승부처를 짓밟으면 되겠네. …물의 아이가 절반? 그럼 절반에서 떨어뜨리면 돼. 검은 실 전부, 저 물길로! 저 아이가 다시는 못 올라오게, 물길째로 얼려 버려!
박지은의 검은 실이 루나의 물길을 향해 화살처럼 쏟아졌다. 물길이 얼어붙기 시작하고, 절반까지 올라온 루나의 발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여섯 사람이 몸을 던져 막았지만, 백 년치 원한은 너무 무거웠다.
무성—…안 돼! 루나 물길 얼어! …내가 막는다! 내 검은 물로 저 얼음 다 녹일게! …루나, 손! 내 물 잡아! 백 년간 삼킨 이 물, 오늘 네 발판 되는 데 다 쓴다!
무성이 제 검은 물을 통째로 루나의 물길에 부었다. 얼어붙던 물길이 다시 녹으며, 루나가 미끄러지려던 발을 붙들었다. 백 년간 남을 삼키던 물이, 오늘은 남을 떠받치는 발판이 되었다. 무성이 제 존재를 통째로 친구의 디딤돌로 내준 것이다.
루나—…무성! 네 물 덕에 안 떨어졌어! …고마워! 나 진짜 올라갈게! 너희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근데 조금만 더 기다려. 얼었다 녹으니까 물길이 약해져서, 지금 무리하면 다 무너져. 천천히, 확실하게 올라갈게!
연이—…응, 루나. 천천히 와. 우리가 여기서 버틸게. …무성, 네오, 다들. 우리 진짜 대단하다. 아무도 안 포기하고, 다 서로 지키고. …박지은 씨, 이게 우리예요. 하나가 위험하면 여섯이 몸을 던지는. 당신은 백 년간 이런 거 한 번도 못 가졌죠.
박지은—…한 번도. …그래, 한 번도 못 가졌어. 나를 위해 몸을 던져 준 사람 같은 거. …나는 늘 혼자 싸웠어. 아무도 내 편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너희는, 서로가 서로 편이네. 그게, 그게 너무 부러워서… 아니. 아니야. 부럽지 않아! 그런 거 필요 없어!
연이—…방금 '부럽다'고 했어요, 박지은 씨. …괜찮아요. 부러워해도 돼요. 그거, 당신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그 검은 실 내려놓고, 일곱 번째 자리로 와요. 우리가 당신 편도 되어 줄게요. 백 년 만에, 당신도 혼자 안 싸워도 돼요.
박지은—…그만! …자꾸 그런 말로 나를 흔들지 마! …나는, 나는 이제 와서 못 바꿔! 백 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차라리, 차라리 다 부숴 버릴래! 부러우면 부러운 대로, 다 없애 버리면 되잖아! 그럼 부러울 것도 없어질 테니까!
네오—…연이, 조심해. 저 여자 지금 제일 위험해. 흔들리는 걸 감추려고 극단으로 가고 있어. …다들 대비해. 저 여자가 곧, 가진 걸 통째로 쏟아부을 거야. 부러움을 파괴로 덮으려고.
검은 폭풍이 처음으로 뒤로 밀렸다. 박지은의 손끝에서 베틀의 북이 삐끗하며 어긋났다.
연이—…밀렸어! 봤지? 우리 여섯이 하나 되니까, 백 년 폭풍도 밀려! …박지은 씨, 이게 인연이에요. 혼자면 못 막을 걸, 같이면 밀어내요. …이제 그만해요. 당신도 이 흐름에 들어와요. 일곱 번째 자리, 비워 뒀어요.
박지은—…일곱 번째 자리? …나더러 너희 틈에 끼라고? 백 년을 적으로 산 내가? …웃기지 마. 그런 자리, 나한텐 안 어울려. …그리고 방금 밀린 거, 그거 우연이야. 내가 잠깐 봐준 거라고. …이제 진짜를 보여 줄게.
여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밀린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그녀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여섯 개의 인연이 하나로 도는 그 흐름을, 백 년치 원한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걸. 그래서 더 극단으로 치달았다. 흔들리는 자신을 감추려고.
박지은—좋아. 그럼 실 몇 가닥 끊는 걸로는 안 되겠네. 베틀째로 전부 끊어 주지. 이 세계째로!
모카—…어? 야, 세계째로 끊는다는 게 무슨 소리야. 그럼 우리 발밑도 다 끊긴다는 거 아니야? …백문 영감, 이거 위험한 거 맞지? 왜 갑자기 등에 식은땀이…
백문—…위험한 정도가 아닐세, 수달 군. 세계를 통째로 끊으면, 이 안의 모든 인연이 한꺼번에 풀려 흩어져. 우리도, 이 세계 사람들도 다. …허나 저 여자도 알 걸세. 그건 제 세계까지 부수는 자폭이라는 걸.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야.
연이—…자폭이라고요? 박지은 씨, 안 돼요! 세계째로 끊으면 당신도 사라져요! 당신 곳간도, 저 위 부서진 나도, 다! …왜 그렇게까지. 지는 게 그렇게 무서워요? 차라리 다 같이 죽는 게 나아요?
박지은—…응. 나아. …이어진 너희가 이기는 꼴 보느니, 차라리 다 같이 없어지는 게 나아. …나 혼자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갖게. 그게 백 년 내 방식이었고, 마지막도 그럴 거야. …자, 세계여. 감겨라. 통째로.
네오—…연이, 저 여자 진심이야. 자폭까지 각오했어. …다들, 서로 꽉 잡아! 세계가 끊겨도 우리 여섯만은 안 흩어지게! 연이, 네 넝쿨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 루나 물길에 닻 내리고! 지금이야!
네오—…저건 위험하다. 세계의 실을 통째로 감고 있어. 다들, 실을 놓지 마!
여자가 베틀 위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하늘을 가득 메운 실 전부가, 그녀의 손가락 하나에 팽팽하게 감기기 시작했다.
그 손끝이 까딱이자, 방금 하나로 모였던 다섯 가닥이 비명을 지르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세계 전체가 박지은의 손아귀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성—…버텨! 다들 서로 붙잡아! 세계가 감기면, 우리 실도 다 감겨! …연이, 내 손! 네오, 반대편! 저 아래 루나 물길로 닻 내려! 세계가 감겨도, 우리 여섯은 안 감기게!
네오—…무성 말대로 해! 다들 뿌리내려! 연이, 네 넝쿨로 우리 여섯을 한 다발로 묶어! 세계가 다 감겨도, 우리는 하나로 버틴다!
연이—세계수! …다들 내 넝쿨 잡아! 뿌리 깊게 내린다!
연이의 넝쿨이 여섯 사람을 한 다발로 묶고, 저 아래 루나의 물길까지 뿌리를 내렸다. 세계가 통째로 박지은에게 감겨 들어가는데도, 그 넝쿨 다발만은 뽑히지 않았다. 뿌리가 너무 깊었고, 서로가 서로를 너무 꽉 잡고 있었다.
박지은—…왜 안 감겨! 세계 전부가 내 손에 감기는데, 저 여섯만 왜! …뽑혀! 뽑히라고! 백 년 원한으로 감는데, 겨우 넝쿨 하나가!
연이—…겨우 넝쿨 하나가 아니에요. 여섯이 서로 잡은 손이에요. …박지은 씨, 당신은 세계를 감을 순 있어도, 서로 잡은 손은 못 뽑아요. 그게 당신이 백 년간 못 이긴 거예요. 세계보다 질긴, 잡은 손.
박지은—…그래? 그럼 세계를 더 세게 감으면 돼. 손이 아니라, 손이 딛고 선 바닥째로 감으면. …백 년 원한 전부, 지금 이 한 번에 쏟는다. 이 세계가 통째로 내 손아귀에 감길 때까지!
박지은이 두 손으로 베틀의 북을 미친 듯이 돌렸다. 세계 전체가, 하늘도 땅도 실도 전부, 그녀의 손아귀를 향해 회오리처럼 감겨 들어갔다. 여섯 사람이 아무리 뿌리를 내려도, 그 뿌리가 딛고 선 세계 자체가 감기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모카—어…? 야, 이거 왜 이래. 발밑이 딸려 가잖아!
백문—세계가 곧 저 여자의 베틀일세. 우리는 지금, 짜여진 천 위에서 싸우고 있는 게야. 천을 통째로 감으면…
무성—…버텨! 아직 루나가 다 안 올라왔어! 조금만 더! …내 물로 닻을 더 깊이 박을게. 저 아래 루나 물길에 우리 뿌리를 묶으면, 세계가 감겨도 물길은 안 감겨!
루나—…무성! 나 아직 반밖에 못 올라왔어! 세계가 감기니까 물길도 흔들려! …근데 놓지 마! 나 이 악물고 올라갈게!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줘!
연이—…밀리고 있어. 방금까지 됐는데. 왜 갑자기 다시…
세계가 통째로 감기는 힘 앞에서, 여섯 사람의 뿌리가 하나씩 뽑히기 시작했다. 모카의 발이 뜨고, 백문의 등불이 흔들리고, 언니의 빛이 멀어졌다. 아무리 서로를 붙잡아도, 딛고 선 세계가 사라지면 붙잡을 곳이 없었다.
연이—…다들 손 놓지 마! 세계가 사라져도, 우리 손은 안 놔! …아, 근데 힘이. 넝쿨이 자꾸 뽑혀. 세계가 통째로 감기니까 뿌리 내릴 데가 없어. …병하, 무성! 어떡해! 이러다 다 흩어져!
무성—…연이! 세계에 뿌리 내리지 말고, 서로한테 내려! 세계는 사라져도, 우리는 안 사라지잖아! 네 넝쿨을 땅이 아니라 우리 여섯한테 감아! 서로가 서로의 땅이 되는 거야!
연이—…서로가 서로의 땅! …그거다, 무성! 세계가 없어져도, 우리가 서로를 붙잡으면 그게 땅이야! …다들 손! 세계 말고 서로를 잡아! 우리가 서로의 발밑이 되자!
연이의 넝쿨이 세계 대신 여섯 사람을 서로에게 감았다. 세계가 통째로 사라져 가는데도, 여섯이 서로를 땅 삼아 붙들자 흩어지지 않았다. 딛고 설 세계가 없어도, 서로가 서로의 세계가 되어 버틴 것이다. 박지은이 백 년을 이해 못 한, 마지막 답이었다.
박지은—…세계를 없앴는데도 안 흩어져?! …발밑이 사라졌는데 뭘 딛고 서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딛을 세계가 없으면 아무도 못 서는데! 저것들은 대체 뭘 딛고!
연이—…서로를요, 박지은 씨. 우리는 서로를 딛고 서 있어요. …세계가 없어도, 손 잡은 사람이 있으면 안 쓰러져요. 그게 인연이에요. 당신이 세계를 다 부숴도, 우리 잡은 손은 못 부숴요.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왜 백 년을 못 이겼는지.
박지은—…세계를 다 부쉈는데. 내 곳간도, 내 베틀도, 내 백 년도 다 걸었는데. …그런데도 저것들이 안 무너져. …왜! 대체 왜! 나는 다 가졌는데 늘 무너졌고, 저것들은 다 잃었는데 안 무너지는데! …이게 말이 돼?!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해도 돼?!
연이—…불공평한 게 아니에요, 박지은 씨. …당신은 '가진 것' 위에 서 있었고, 우리는 '잡은 손' 위에 서 있어요. 가진 건 뺏기면 무너지지만, 잡은 손은 안 뺏겨요. …당신도 손 잡으면 돼요. 지금이라도. 가진 걸 다 잃어도, 손 하나만 잡으면 안 무너져요.
박지은—…손 하나만. …근데 나는, 잡을 손이 없어. 백 년간 다 밀어냈으니까. …내가 손 내밀면, 누가 잡아 줘. 이렇게 다 부순 나를. …없어.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나는, 그냥 이대로…
네오—…있어, 지은아. 지금 네 눈앞에, 일곱 개의 손이 있어. 연이가 백 년째 비워 둔 그 자리. …네가 내밀기만 하면, 우리가 잡아. 병하가 약속할게. 이번엔, 아무도 널 혼자 안 둬. …근데 먼저, 네가 손을 내밀어야 해. 그것만은, 네가 해야 하는 일이야.
네오—연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만 잡고 있어. 알았지?
제38화 · 끊을 수 없는 실 — 끝. 제39화 「붙잡힌 파수꾼」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