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가 연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늘 그랬듯 반 걸음 뒤가 아니라, 처음으로 정면에 섰다.
네오—전에 약속했잖아.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제일 먼저 너한테 말하겠다고.
네오—그날이 바로 지금이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제 하나도 숨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할게.
연이—…응. 나 도망 안 가. 무슨 얘기든 다 들을게. …근데 병하, 하나만 미리 말해 둘게. 네 얘기 다 듣고 나서, 내가 울든 화내든 무너지든, 그건 다 네가 소중해서 그런 거야. 미리 미안. 그리고 미리 고마워. …자, 이제 시작해. 네 진짜 이야기.
박지은—…어디 한번 들어 보자고. 백 년 묵은 그 신파를. …근데 저 애야, 너 진짜 각오는 됐어? 저 사람 입에서 나올 진실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일 것 같아? …후회하지나 마.
연이—…후회 안 해요. 모르는 채로 사는 게 더 후회예요. …박지은 씨, 당신은 백 년간 진실을 무기로 썼지만, 나한텐 진실이 선물이에요. 내가 누구였는지, 누가 나를 사랑했는지 알게 되는 거니까. …자, 병하. 그 선물, 이제 풀어 줘. 나 준비됐어.
연이가 네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사자의 앞발이지만, 그 안에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백 년을 건너온 진실이,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서 풀려나기 시작했다.
네오—…손, 따뜻하다. …백 년 만이야, 네 손. …이 온기 하나 다시 느끼려고, 나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몰라. …그래. 이제 말할게. 우리 이야기. 처음부터.
연이—…응. 천천히. 시간 많아. …나 여기 있어, 병하. 아무 데도 안 가.
붉은 실의 세계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잠시 숨을 죽였다. 하늘을 채운 수억 개의 인연조차, 이 오래된 실 하나의 이야기 앞에서 조용해졌다.
네오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늘 무뚝뚝하던 사자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로.
백 년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갈기 뒤에 숨겨 온 것이 있었다. 파수꾼의 위엄도, 금빛 사자의 힘도 다 벗어 두고, 네오는 처음으로 한 사람의 남자로 연이 앞에 섰다. 그 눈에, 오래 참아 온 무언가가 일렁였다.
연이—…네오. 손 떨고 있어.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무슨 말이든, 다 들을게. 도망 안 가. …네가 나 백 년 지켰다며. 이제 한 번은, 내가 네 얘기 지킬 차례야. …천천히 해. 시간 많아.
네오—…고마워. …그 말, 미래에서도 네가 자주 했어. '천천히 해요. 시간 많아요.' 늘 급하게만 살던 나한테, 네가 준 제일 큰 선물이었지. …그래. 천천히 할게. 백 년을 참았는데, 몇 분 더 못 참겠어.
저 멀리 실 감옥 안에서, 무성도 갉던 손을 멈추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백 년간 이름 없이 산 그릇에게, 한 사람이 제 진짜 이름을 되찾는 순간은 낯설고도 벅찬 것이었다.
무성—…(감옥에서, 작게) …이름을 되찾는 순간이구나. 나도 얼마 전에 겪은. …파수꾼, 잘 말해. 이름은, 소리 내서 불릴 때 진짜가 되는 거니까.
네오—내 이름은 박병하야. 한국 사람이고, 너랑 같은 하늘 아래서 태어났어. 다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서.
연이—…박병하.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연이—…박, 병, 하. …네 이름. 백 년을 사자로 살면서도 안 버린 이름. …그럼 '네오'는? 네오는 뭐였어?
네오—…'네오'는, 이 세계 사람들이 붙여 준 이름이야. 파수꾼한테 이름이 필요하니까. …근데 진짜 이름은 늘 갈기 밑에 숨겨 뒀어. 박병하. 네가 부르던 그 이름. …그거, 다시 한 번 불러 줄래? 백 년 만에, 네 목소리로 듣고 싶어.
연이—…병하. …박병하. …어? 부르니까, 왜 이렇게 익숙하지. 처음 부르는 건데, 백 번은 불러 본 것 같아. …병하야. 병하야. …아, 자꾸 부르니까 눈물 나. 이 이름, 내가 진짜 많이 불렀었나 봐. 미래에서.
네오—…응. 아주 많이 불렀어. 아침에도, 밤에도, 화날 때도, 웃을 때도. …그 목소리로 백 년 만에 내 이름을 들으니까…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사자 이름 말고, 진짜 내 이름으로 불리니까.
무성—…(감옥에서) …이름이 불리니까 저 사자, 진짜 사람 같아졌어. …그렇지. 이름은 그런 거야. 불리는 순간, 도구가 사람이 되고, 사자가 사람이 되는. …나도 그랬으니까. 연이가 내 이름 불러 줬을 때.
네오—미래에서 나는 너를 알았어. 꼬박 십 년을. 처음엔 웃음소리부터 알았지. 도서관 옆자리에서, 시험 전날인데도 만화책 보면서 웃던 애.
연이—…웃음소리부터. …야, 그거 완전 나다. 지금도 시험 전날에 만화책 봐. 안 변했네, 미래에도. …병하야, 근데 이상하다. 네가 그 얘기 하니까, 도서관 그 옆자리 냄새가 나. 오래된 종이랑, 네 옆자리 온기랑. …기억은 없는데 그리워. 이게 무슨 마음이지.
네오—…그게, 몸이 기억하는 그리움이야. 머리는 잊어도 마음은 못 잊은. …나도 백 년간 그 옆자리 냄새를 못 잊었어. 도서관만 가면, 네가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자꾸 옆자리를 봤지. 늘 비어 있었지만.
연이—…이제 안 비어 있어. 내가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계속 얘기해 줘, 병하. 우리 옆자리 얘기, 더 듣고 싶어.
네오—같이 우산 쓴 날도 있었고, 빵 나눠 먹은 날도 있었어. 네 사주 얘기를 들려준 날도. …너한텐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이라, 기억할 수 없겠지만.
네오—처음 말 건 날 기억나. 아니, 너는 기억 못 하지. …도서관에서 네가 자다가 침을 흘렸는데, 그게 하필 빌린 책 위였어. 사서한테 혼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고, 내가 휴지를 건넸지. 그게 시작이었어.
연이—…자다가 책에 침을? …아, 그거 완전 나 같긴 하다. 미래의 나도 여전히 칠칠맞구나. …근데 그런 걸로 인연이 시작됐다고? 좀 없어 보이는데.
네오—없어 보이는 게 좋았어. 나는 늘 뭐든 완벽해야 하는 집에서 자랐거든. 근데 너는, 침 흘리고도 헤벌쭉 웃더라. 실수해도 세상 안 무너진다는 듯이. …나는 그게, 그 편안함이 부러웠어. 그리고 곧, 좋아졌지.
네오—너는 매일 편의점 삼각김밥을 두 개씩 샀어. 하나는 네 거, 하나는 '오늘 힘들어 보이는 사람' 주려고. …어느 날은 그게 나였어. 시험 망치고 벤치에 앉아 있는데, 네가 툭 던지더라. '이거 먹어요. 참치마요가 세상 구원해요.'
연이—…참치마요가 세상을 구원한다. …나 그거 진짜 자주 하는 말인데. 지금도 하는 말인데. …미래의 나도 똑같은 소릴 했구나. 어쩐지, 남 얘기 같지가 않더라.
네오—그날 알았어. 이 사람이구나. 세상을 다 가진 사람도 못 준 걸, 그 조그만 하나로 주는 사람. …나는 그때까지, 사랑이 뭔지 몰랐어. 우리 집에선 사랑도 거래였거든. 근데 너한텐 계산이 없었어. 그냥 힘들어 보여서, 그 환한 얼굴로 툭 건넨 거였어.
네오—그다음부턴, 매일 도서관 옆자리였어. 너는 공부는 안 하고 만화책만 봤지. 시험 전날에도. 그러다 시험은 또 어떻게든 통과하고. …나는 네 옆에서 처음으로, 뭘 안 해도 편한 시간을 배웠어.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좋은, 그런 시간.
연이—…네오. 아니, 병하. …나 지금 되게 이상해.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네 얘기 들으니까 그 장면이 다 보여. 도서관 냄새도, 네 옆자리 온도도. …이거, 진짜 내 기억인가 봐. 박지은이 지운, 미래의 내 기억.
네오—…맞아. 지워졌어도, 아주 깊은 데는 남아 있나 봐. 우리 실이 그걸 기억하니까. …더 들을래? 아니면 여기까지 할까. 무거우면, 멈춰도 돼.
연이—…아니. 다 들을래. 하나도 안 빼고. …내가 잃어버린 나를, 네 입으로라도 되찾고 싶어. …계속해 줘. 우리,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
네오—…그다음엔, 매일이 그랬어. 아침엔 네가 늦잠 자서 뛰어오고, 점심엔 학식 앞에서 만나고, 밤엔 도서관 끝나고 같이 걸었지. …별거 아닌 하루들이었는데,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일이 기다려진다'는 걸 알았어.
네오—한번은 네가 물었어. '병하 씨는 꿈이 뭐예요?' 나는 대답을 못 했어. 평생 부모가 정해 준 길만 걸어서, 내 꿈이 뭔지 몰랐거든. …그랬더니 네가 그러더라. '그럼 지금부터 찾으면 되죠. 제가 도와줄게요.' …그 말이, 내 인생을 바꿨어.
연이—…나 그런 말도 했구나. …그거 진짜 나다. 남 꿈 찾아 주겠다고 오지랖 부리는 거. …병하야. 그래서 넌 꿈을 찾았어?
네오—…찾았어. 아주 확실하게. …내 꿈은, 네가 웃는 걸 오래 보는 거였어. 거창한 거 없이, 그거 하나. …근데 그 꿈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꿈이 될 줄은 몰랐지. 저 여자 때문에.
네오—…박지은. 저 여자는, 미래에서 내 약혼자로 정해진 사람이었어. 두 집안이 정한. 나는 한 번도 저 여자를 사랑한 적 없어. 근데 저 여자는… 그걸 못 견뎠지. 내가 저를 안 보고, 널 본다는 걸.
연이—…약혼자. …그래서 저 여자가 그렇게. …내가 뺏은 것도 아닌데. 네 마음이 원래 저 여자한테 없었던 건데. …근데 저 여자는 그걸 내 탓으로.
네오—…응. 저 여자한텐 그게 안 통했어. '내가 이만큼 줬는데 왜 나를 안 보냐'가 저 여자 논리였으니까. 사랑을 준 만큼 받는 거래로만 아는 사람한테, 계산 없이 마음이 가는 걸 설명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저 여자는, 널 없애기로 한 거야. 원인을 지우면 될 거라고.
연이—…근데 그게 되나. 나를 지운다고, 네 마음이 저 여자한테 갈 리가 없잖아. …오히려 넌 더, 나를.
네오—…맞아. 저 여자가 널 부술수록, 나는 더 널 지키려 했어. 그게 저 여자를 더 미치게 했지. …결국 저 여자는, 이 운명의 세계까지 손을 뻗었어. 네 사주 자체를 부수려고. 사람 하나 없애는 걸론 성에 안 찼던 거야. 네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까지 다 지우려고 했어.
네오—…부서지기 시작할 때, 너는 이유를 몰랐어. 그냥 자꾸 안 풀리기만 했지. 되던 일이 안 되고, 사람들이 널 자꾸 잊고,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늦고. …너는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자책했어. 아니라고, 네 탓이 아니라고, 나는 백 번을 말했는데도.
연이—…나, 그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유도 모르고 세상이 나를 지우는데. …병하야. 너라도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거라도 없었으면, 나 진짜 혼자 사라졌을 거야.
네오—…마지막 며칠은, 그래도 좋았어. 너는 이미 반쯤 지워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매일 만났어. 네가 좋아하는 강가 벤치에서, 해 지는 걸 나란히 보면서. …너는 자꾸 흐릿해지는데도 웃었어. '병하 씨랑 있으면, 지워지는 것도 안 무서워요' 하면서. 끝까지, 그 웃음만은 안 흐려졌어.
연이—…나 그런 말을. …야, 미래의 나 진짜 멋있다. 사라지면서도 그런 말을 하고. …근데 병하 너는, 그 말 듣고 얼마나 아팠어. 웃는 나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네오—…찢어졌지. 근데 티 낼 수가 없었어. 내가 무너지면, 너까지 무너질 테니까. …그래서 나도 웃었어. 너 앞에서는. 그리고 돌아서서, 방법을 찾았어. 시간을 거스르는 법. 미친 짓이라고 다들 말렸지만, 나한텐 그거 말곤 없었어.
네오—…그리고 그날이 왔어. 네가 완전히 지워지던 날. 나는 네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 손이 점점 투명해졌어. …마지막 순간, 너는 내 이름을 불렀어. '병하 씨.' 그게 이 세상에서 네가 낸 마지막 소리였어. 그리고, 너는 없어졌어.
연이—…그래서 네가, 백 년을. …미래에서 함께한 십 년, 그리고 내 마지막 목소리 하나 붙잡고, 시간까지 거슬러 이 세계로 와서 또 백 년을. …병하야. 미안하고 고맙고,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근데 하나는 확실해. 이번엔 안 지워질 거야. 네가 백 년을 지킨 나, 이번엔 내가 끝까지 지킬 거야.
연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억에도 없는 일인데, 이상하게 그리웠다. 검은 비 꿈속에서 느꼈던 그 사무침과 똑같은 온도였다.
연이—…병하야. 나 진짜 이상해. 네 얘기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맞아, 그랬지' 하고 대답을 해. 머리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데, 마음이 먼저 알아. …이게 그거구나. 박지은이 아무리 지워도, 마음 제일 깊은 데는 못 지운 거.
네오—…응. 사람은 기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니까. 몸이 기억하고, 마음이 기억하고, 실이 기억해. …네가 삼각김밥을 좋아하는 것도, 남 걱정 먼저 하는 것도, 다 미래의 네가 그대로 가져온 거야. 박지은이 운명은 부쉈어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못 부쉈어.
연이—…그러네. 나는 여전히 나네. 미래에서도, 지금도. 삼각김밥 좋아하고, 오지랖 넓고, 칠칠맞고. …박지은이 그렇게 지우려 했는데도, 나는 나로 남았어. …그거 좀 멋지다. 나, 생각보다 안 부서지는 사람인가 봐.
네오—…응. 너는 세상에서 제일 안 부서지는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온 거고. …부서질 사람이었으면, 나도 백 년을 안 걸었어. 너라면 다시 일어설 걸 알았으니까. 실제로 너는, 재성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자미두수에서도 다 일어섰잖아.
연이—…와, 은근슬쩍 백 년치 신뢰 고백하네. …좋아, 그 믿음 안 배신할게. 이번엔 진짜 안 부서질 거야. 너랑, 무성이랑, 루나랑, 다 같이. …근데 병하야, 얘기 계속해 줘. 나 아직 내 미래 다 못 들었어. 우리 그래서, 사귀긴 했어?
네오—…그건, 이 상황 끝나고 얘기하자.
연이—…야! 제일 궁금한 걸 미뤄? …치사해, 진짜. 알겠어, 저 여자부터 넘고. 근데 그거 꼭 대답해야 돼. 백 년 묵은 밀당 나한테 통할 것 같아?
네오—…하나만 말해 줄게. 네가 지워지기 전에, 우리 약속을 하나 했어. …벚꽃 피면 강가에서 다시 만나자고. 매년. …근데 그 약속을 못 지켰어. 네가 그해 봄에 지워졌거든. …그래서 나는 백 년간, 봄마다 그 강가에 갔어. 혼자. 혹시나 해서.
연이—…백 년을, 봄마다, 혼자 그 강가에. …병하야. 그거 알아? 나 이 세계 오기 전에, 자취방 근처 벚꽃 강가를 진짜 좋아했어. 왜 좋은지도 모르고, 봄이면 꼭 거기 갔어. …그게 너였구나. 기억은 지워졌어도, 발이 그 약속을 기억한 거야.
네오—…그랬구나. …너도 갔구나, 그 강가에. 시간도 세계도 다른데, 우리 둘 다 봄마다 벚꽃 아래 있었네. 못 만나면서도. …연이. 이번엔 그 약속 지키자. 다 끝나면, 벚꽃 강가에서 삼각김밥 먹자. 백 년 미룬 약속.
연이—…응. 약속. 이번엔 꼭. …근데 병하야, 그날은 내가 쏠게. 네가 백 년 기다렸으니까, 그 정도는 내가 사야지. …자, 이제 그 약속 지키러, 저 여자부터 넘자. 우리 벚꽃 강가가 우릴 기다려.
무성—…(감옥에서) …나도 껴도 돼? 벚꽃 강가. …나 백 년간 삼킨 것밖에 없어서, 벚꽃 같은 거 본 적 없거든. …그날, 나도 데려가 줘. 셋이서, 아니 넷이서. 루나까지. 다 같이 벚꽃 밑에서.
연이—…당연하지, 무성! 너 없으면 안 가! …벚꽃 강가에 다 같이 가자. 병하, 무성, 루나, 언니, 백문 님, 모카, 다. 손에 뭐 하나씩 들고, 강물에 발 담그고. …그러니까 무성, 빨리 그 감옥 나와. 우리 넷째가 빠지면 그림이 안 되잖아.
무성—…거의 다 갉았어. 조금만. …근데 연이, 이 이야기 다 듣고 나니까 확실해졌어. 나 진짜 너희 편에 서길 잘했다. …저 여자는 백 년을 뺏고도 텅 빈데, 너희는 웃음 하나로 이렇게 꽉 찼잖아. …나도 그 꽉 찬 쪽에 있을래. 끝까지.
네오—…그리고 하나 더 알아 둬. 내 금(金)은, 원래 너 같은 나무를 베는 기운이야. 오행으로 상극이지. …그래서 나는 인간의 손을 버렸어. 이 발톱이 행여 너를 벨까 봐. …이 칼은 이제, 너를 위협하는 것만 벤다. 너는 절대 안 베. 그러려고 사자가 된 거야.
네오—…그렇게 백 년을 벼려 온 칼 앞에서도, 나는 네가 사라지는 걸 못 막았어. 저 여자가 네 운명을 부쉈으니까. 글자가 하나씩 뽑히고, 운이 새어 나가고, 마지막엔 네 이름조차 읽히지 않게 됐지. 세상이 너를 잊었어. 나만 기억했어.
네오—…그런데, 저 여자는 널 완전히 죽이진 않았어. 그게 더 잔인한 부분이야. …네 운명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시들어 가는 채로 붙잡아 뒀어. 전리품처럼. …저 탑 꼭대기의 창백한 별. 저게, 저 여자가 부순 네 미래야. 백 년째 저기서, 꺼지지도 못하고.
연이—…저 별이. …아까 박지은이 자랑하던 그 별이. …내 부서진 미래였어. 그래서 남 같지 않았구나.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났구나. 저게, 나였어. 백 년을 홀로 시든, 또 다른 나.
네오—…응. 그래서 내가 온 거야. 저 별을, 네 부서진 미래를 되살리려고. …네가 지금 이 시간에서 스스로 사주를 완성하면, 저 별도 다시 살아나. 과거의 네가 온전해지면, 미래의 부서진 너도 회복되는 거야. …그게, 네가 지워지던 그 밤에 나한테 남긴 마지막 부탁이었어. 너한텐 아직 안 온 미래의 밤이지만, 나한텐 백 년 전이야. 그 밤을 겪고, 시간을 거슬러 이 세계로 와서, 널 백 년을 기다렸으니까. 같은 밤이 너한텐 미래고, 나한텐 백 년 전인 거야.
연이—…내가, 너한테 부탁을? 사라지기 직전에?
네오—…응. 네 이름이 다 지워지기 직전, 너는 울지 않았어. 오히려 나를 보고 웃으면서 그랬어. '병하 씨, 나 잊혀도 괜찮아요. 근데 내가 나를 못 지키면, 병하 씨가 나 대신 지켜 줄래요? 과거로 가서, 그때의 내가 스스로 설 수 있게.' …그게, 네 마지막 말이었어.
연이—…사라지는 순간까지, 남 걱정을. …나 진짜 답도 없다. …병하야. 미안해. 나 하나 때문에 네가 몸까지 버리고, 백 년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부탁을.
네오—…자격 같은 거 없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너는 나한테 삼각김밥을 줄 때 자격을 안 따졌잖아. 나도 그래. 네가 좋아서, 지키고 싶어서 온 거야. 부탁은 핑계였고.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나는 이 백 년, 한 번도 후회 안 했어.
연이—…병하야. 나 이제 안 미안해할게. 대신, 갚을게. 백 년치. …네가 나 위해 시간을 거슬렀으면, 나는 너 위해 이 시간을 지킬게. 네가 나 위해 몸을 버렸으면, 나는 너 위해 내 사주를 걸게. …이건 빚 갚기가 아니라, 나도 널 그만큼 지키고 싶어서야. 알지?
네오—…알아. …근데 연이, 네 사주는 걸지 마. 그건 저 여자가 제일 원하는 거야. 네가 사주를 걸면, 저 여자한테 명분을 주는 거고. …너는 그냥 너를 지켜. 살아남는 게, 나한텐 제일 큰 갚음이야. 백 년 전에 못 지킨 걸, 이번엔 네가 스스로 지켜 주는 거.
연이—…알겠어. 나 안 죽어. 절대. 벚꽃 강가 약속 있잖아. 그거 지키려면 살아야지. …근데 병하, 너도 약속해. 또 혼자 무리하지 않기. 몸 던지지 않기. 이번엔 셋이, 아니 넷이 같이 짊어지기. …약속 안 하면 나 화낼 거야. 진심으로.
네오—…약속할게. 이번엔 혼자 안 짊어져. …백 년간 혼자 하는 데 익숙해서 자꾸 그러려 하겠지만, 네가 말려 줘. 나 혼자 뛰어들려 하면, 뒤에서 넝쿨로 발목 잡아. …그럼 나도, 멈출게.
연이—…이름이, 읽히지 않게 됐다고?
네오—응. 열람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기억나? 이름이 자꾸 지워지던 그 기록. 그게 미래의 너였어. 사라지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목소리.
연이—…아. …그 열람실. 이름이 자꾸 흐려지던 그 목소리. …나 그거 듣고 이유 없이 펑펑 울었잖아.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게 나였구나. 미래의 내가, 지워지면서 남긴 마지막 소리. 그래서 내 몸이 먼저 알고 운 거야.
네오—…응. 그때 네가 우는 거 보고, 나 진짜 힘들었어. 네가 네 자신의 마지막을 듣고 우는 건데, 나는 아무 말도 못 해 줬으니까. …그냥 옆에서 '괜찮다'만 했지. 그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
연이—…괜찮아, 병하. 그 '괜찮다' 한마디가, 그때 나한텐 컸어. 이유는 몰라도, 네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 괜찮아졌거든. …봐, 너는 늘 날 살렸어. 무뚝뚝한 '괜찮다' 하나로도. …이제 내 차례야. 이번엔 내가 너한테 '괜찮다'고 해 줄게. 병하야,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백 년을 혼자 '괜찮다'고 말해 온 사람이, 처음으로 그 말을 되돌려받았다. 네오의 호박색 눈이, 사자의 것이 아닌 사람의 눈물로 잠깐 일렁였다. 백 년 만이었다. 누가 자기한테 괜찮다고 말해 준 것은.
박지은—…(멀리서, 아주 낮게) …괜찮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저 사자가 저렇게 무너져. …나는 백 년간 아무한테도 못 들은 말인데.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완벽하지 않으면 사랑 못 받는 집에서, 누가 나한테 '괜찮다'고 해 줬겠어. …나도, 그 말 한 번 들어 보고 싶었는데.
연이—…박지은 씨. 방금 그 말, 나 들었어요. …당신도 '괜찮다'는 말 듣고 싶었구나. …그럼 제가 해 드릴게요. …박지은 씨, 괜찮아요. 백 년간 완벽하려고 애쓴 거, 사랑받으려고 발버둥 친 거, 다 괜찮아요. 이제 안 완벽해도 돼요. 그냥 당신이어도 돼요.
박지은—…하지 마! …그 말, 하지 말라고! …네가 나한테 그 말을 하면, 내가… 내가 무너진단 말이야! 백 년을 버틴 게, 그 말 한마디에 다 무너져! …나는 아직 안 무너질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 다정한 말 나한테 하지 마! 무기보다 그게 더 무서워!
네오—…봤지, 연이. 저 여자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우리 힘이 아니라, 네 다정함이야. …백 년 무기로 무장한 사람이,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저렇게 떨어. 그게 저 여자의 진짜 약점이고, 우리의 진짜 무기야.
연이—…응. 알겠어. 그럼 나, 계속 다정할게. 저 여자가 아무리 무섭게 굴어도, 나는 계속 '괜찮다'고 할 거야. 그게 저 여자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구하는 길이니까. …저 여자, 백 년간 그 말 한마디 못 들어서 저렇게 된 거잖아. 그럼 실컷 들려줘야지.
무성—…(감옥에서) …연이. 너 진짜 무서운 애다. 무기로 오는 적한테, 다정함으로 반격을 해. …백 년간 저 여자를 이긴 사람이 없었던 이유를 알겠어. 다들 힘으로만 붙었으니까. 너는 힘으로 안 붙고, 마음으로 붙어. 그래서 이기는 거야. 저 여자가 한 번도 못 막은 방식으로.
연이—…무섭긴. 그냥 다정한 거지. …자, 다들 준비됐지? 다정 폭격 간다. 박지은 씨, 각오해요. 오늘 백 년치 '괜찮다'를 다 들려줄 거니까. 무기보다 무서운 다정함으로, 당신 얼음 다 녹여 줄게요.
네오—「그 사람이 가지고 가 줄 거니까」. 그 한 줄을 품고, 나는 시간을 거슬러 왔어.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네오—네 운명이 부서지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와서, 네가 스스로 사주를 완성할 때까지 곁을 지키는 것.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어.
연이—…잠깐. 그럼 지금 이 시간의 나는… 부서지기 전의 나야? 미래에 부서질, 과거의 나? …그럼 저 위 탑의 시들어 가는 별이 미래의 부서진 나고, 여기 있는 내가 그걸 되살릴 과거의 나고. …우와, 머리 아파. 시간이 이렇게 꼬여 있었어?
네오—…응. 정확해. 네가 지금 여기서 온전한 사주를 완성하면, 그 힘이 시간을 타고 올라가서 미래의 부서진 너를 되살려. 과거의 네가 미래의 너를 구하는 거야. …그게, 나한텐 백 년 전이던 그 밤 — 너한텐 아직 안 온 미래에 — 네가 나한테 남긴 계획이었어. 너는 지워지는 순간까지도, 자기를 구할 방법을 계산하고 있었던 거야.
연이—…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한테 나를 구하라고 부탁을 남겼다고? …나 진짜 대단한 애였구나. 사라지면서도 그런 계획을. …그럼 나, 이미 절반은 성공한 거네. 사주 완성했잖아. 재성에서, 도서관에서, 자미두수에서. …이제 그 힘을 저 위로 올려 보내기만 하면 돼. 저 여자만 넘으면.
네오—…맞아. 근데 저 여자가 그걸 알아서, 필사적으로 막는 거야. 네 완성된 사주가 저 위로 올라가면, 저 여자의 백 년 전리품이 되살아나 사라지니까. …그러니까 저 여자는, 네 사주를 저 위로 못 올라가게 하려고 널 여기 붙잡아 두는 거야. 조심해. 저 여자한텐 이게 백 년 사업의 마지막 고비니까.
연이—…좋아. 그림 다 그려졌어. 저 여자 넘고, 저 탑 올라가서, 내 완성된 사주 힘으로 부서진 나를 되살린다. 그럼 미래의 나도 살고, 병하도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고, 다 풀려. …근데 나 혼자선 못 해. 병하, 무성, 루나, 다 필요해. …자, 이거 팀플레이야. 각자 역할 나누자.
네오—…나는 저 여자 검은 실을 맡을게. 파수꾼 힘으로 최대한 길을 열게. 다만 크게 쓰면 저 여자가 감지하니까, 타이밍 봐서. …무성, 넌 나오면 방패랑 물길을. 연이, 넌 읽기로 저 여자 마음을 열어. 힘으론 못 이겨도, 마음은 네가 이겨.
무성—…(감옥에서) 접수. 나 곧 나가. 나가면 검은 물로 방패 치고, 저 아래 루나 물길이랑 연결할게. 루나가 올라올 통로를 내가 뚫을 수 있어. …연이, 너는 저 여자만 봐. 우리가 뒤는 다 막을 테니까. …자, 백 년 사업 마지막 고비, 우리가 뒤집자.
박지은—…(멀리서) …그만해. 그 이야기, 더는 못 듣겠어. …병하 씨. 넌 저 애 얘기를 할 때만, 그렇게 살아 있는 얼굴이 돼. 백 년간 사자 가죽 속에 숨겨 뒀던 그 얼굴을, 저 애 앞에서만 꺼내잖아. …나는 백 년을 봐도 못 본 그 얼굴을.
네오—…지은아. 넌 이 얼굴을 볼 자격이 없었던 게 아니야. 그냥, 넌 이 얼굴을 원한 게 아니라 '가지려' 했을 뿐이야. …사랑은 갖는 게 아니라 보는 건데, 너는 늘 갖으려고만 해서 정작 한 번도 제대로 못 봤어. 나를.
박지은—…또 그 소리. …됐어, 계속해. 실컷 떠들어. 어차피 그 이야기의 끝은, 저 애가 지워지는 거잖아. 내가 이긴 이야기. 그러니까 얼마든지 추억팔이 해. 결말은 안 바뀌니까.
연이—…아니요, 박지은 씨. 결말은 바뀌어요. 그때는 내가 혼자였지만, 지금은 병하도 있고, 무성도 있고, 루나도 있고, 당신을 읽을 나도 있으니까. …그때 이야기는 슬프게 끝났어도, 이번 이야기는 내가 다시 쓸 거예요. 다 같이 사는 결말로. 당신까지 포함해서.
연이—…그래서 계속,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을 어제처럼 말했던 거구나. 이자율이 어떻고, 금리가 어떻고.
연이—…아, 그러고 보니. 너 재성에서 청토끼 금융 사기 딱 알아봤잖아. '이 이자율 구조는 삼 년 뒤에 터진다'고. 그때 나는 네가 무슨 금융 천재인 줄 알았어. …근데 그거, 진짜 미래에서 본 거였구나. 천재가 아니라 컨닝이었어!
네오—…컨닝이라니. 정보 우위라고 해 줘.
연이—…정보 우위 좋아하네. 미래에서 건너와 이 세계서 백 년이나 산 사람이 대학생들 틈에서 아는 척한 거잖아. …아, 그래서 너 늘 그렇게 어른스러웠구나. 우리보다 백 살 많으니까. …야, 너 나한테 백 살 연상이었어? 이거 좀 충격인데.
네오—…겉모습은 스물여섯에서 멈췄으니까, 그건 넘어가자.
연이—…흥, 편할 때만 스물여섯. …근데 병하야, 하나 물어보자. 미래에서 로또 번호 같은 건 왜 안 알려줬어? 너 그거 알았으면 우리 자취방 탈출했을 거 아니야.
네오—…알려주려고 했는데, 네가 싫다고 했어. '그렇게 얻은 돈은 재미없다'고. …너는 늘 그랬어. 편한 길보다, 네 힘으로 가는 길을 골랐지. 지금 이 세계에서 사주를 스스로 완성한 것도, 다 그 성격 덕분이고.
연이—…미래의 나, 은근 멋있네. 로또도 마다하고. …근데 지금은 좀 후회된다. 하나쯤 받아 둘걸. 삼각김밥 값이라도. …농담이야. 나도 그런 돈 싫어. 내 힘으로 벌 거야. 이 세계 일 다 끝나면, 자취방 가서 열심히 살 거야. 너랑 같이.
네오—응. 자꾸 티가 나서 나도 곤란했어. 근데 대가가 있었어. 시간을 거스른 인간은, 인간의 몸으로 남을 수가 없거든.
네오—그래서 이 모습이 된 거야. 운명 세계의 파수꾼, 금빛 사자. 네가 아는 네오. 사람이었던 시절은, 갈기 뒤에 다 숨겨 뒀어.
네오—…처음엔 힘들었어. 사람의 손이 앞발이 되고, 사람의 말이 으르렁이 되고. 무엇보다, 너를 봐도 사람의 얼굴로 웃어 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늘 무뚝뚝했던 거야. 웃고 싶은데, 이 얼굴론 웃는 법을 몰라서. 백 년을 연습했는데도, 잘 안 되더라.
연이—…그래서 늘 그 데드팬. …나는 네가 원래 무뚝뚝한 성격인 줄 알았어. 근데 웃고 싶어도 못 웃은 거였구나. …병하야. 지금은? 지금은 웃을 수 있어? 이 세계에선, 사람 얼굴 잠깐 돼?
네오—…여기선, 조금. 붉은 실의 세계는 마음이 모습보다 세거든. 그래서 아주 잠깐은… 이렇게.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백 년 만이야. 너 보고 웃는 거. 어색하지?
연이—…아니. …하나도 안 어색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웃음이야. …병하야, 백 년 만에 웃었는데 하필 이 난리통이라니. 진짜 타이밍 최악이다. …근데 고마워. 그 얼굴 보여 줘서. 나 이제 네 진짜 얼굴 아니까, 사자여도 안 무서워.
네오—…다 끝나면, 사람 얼굴로 더 많이 웃을게. 벚꽃 강가에서. …그러려면 지금 저 여자를 넘어야 하고, 저 위의 부서진 너도 되살려야 해. 네가 온전해지면, 나도 어쩌면… 사람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확실친 않지만.
연이—…뭐? 너 사람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그럼 더더욱 이겨야겠네! 병하 너 사람 얼굴로 삼각김밥 먹는 거 봐야지! 사자 입으로 먹으면 좀 그렇잖아. …자, 목표 하나 더 추가. 저 여자 넘고, 부서진 나 구하고, 너 사람 만들기! 다 하자!
네오—…너는 여전하다. 세상이 뒤집힐 얘기를 듣고도, 결국 삼각김밥으로 돌아오는구나. …그게 너라서, 내가 백 년을 버텼어. 어떤 진실 앞에서도 안 무거워지는 너라서.
연이—…무거우면 지잖아. 우리 이겨야 되니까 가볍게 가는 거야. …자, 정리하자. 오늘 할 일. 하나, 박지은 안의 붉은 실 되살리기. 둘, 저 위 부서진 나 구하기. 셋, 무성 감옥 탈출. 넷, 병하 사람 만들기. 다섯, 다 같이 벚꽃 강가! …할 일 많네. 부지런히 움직이자!
무성—…(감옥에서) 셋째, 내 탈출은 거의 다 됐어. 곧 합류해. …근데 연이, 목록에 하나 빠졌어. 여섯, 삼각김밥 참치마요 잔뜩 사기. 이거 제일 중요한 거 아니야?
연이—…맞다, 무성! 여섯 번째로 추가! 제일 중요한 거! …봐, 병하. 우리 무성이 이제 농담도 해. 백 년 만에. …이게 우리 팀이야. 세상 뒤집힐 얘기 하면서도 삼각김밥 걱정하는. …자, 진짜 가자. 할 일 여섯 개, 하나씩 다 해치우자!
연이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았다. 미래를 어제처럼 말하던 입버릇, 도서관이 적지 못하던 이름, 하늘 밖으로 이어진 붉은 실. 그리고.
연이—…검은 비. 꿈에서 계속 나오던 그 사람. 빗속에서 미안한 얼굴로 서 있던 그 사람. 그것도 너였어. 네가 버리고 온, 인간의 몸.
박지은—…(멀리서, 낮게) …검은 비. …그 밤, 나도 거기 있었어. 병하 씨가 인간의 몸을 버리던 그 밤. …나는, 그 사람이 사라지지 말라고 붙잡았어. 제발 이러지 말라고. 저 애 하나 때문에 네 몸까지 버리지 말라고. …근데 그 사람은, 내 손을 뿌리치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어. 뒤도 안 돌아보고.
네오—…지은아. 그때 널 뿌리친 거, 그건 미안해. …근데 내가 그 몸을 버린 건, 저 애 하나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어. 네가 그걸 '저 애 때문'이라고만 봤으니까, 그 밤이 백 년 원한이 된 거야. …사랑을 못 배운 사람한텐, 사랑이 그냥 빼앗김으로만 보이니까.
박지은—…그래, 나는 사랑을 몰라!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근데 병하 씨, 그거 알아? 그 빗속에서 네가 뒤도 안 돌아본 순간, 나도 뭔가를 버렸어. 마지막 남은 내 마음 한 조각을. …그때부터 나는, 이렇게 됐어. 다 뺏고, 다 부수는 여자로. 그러니까 이것도, 반은 네 탓이야.
연이—…박지은 씨. 그 밤 당신도 아팠구나. …근데요. 남이 나를 안 봐 준 아픔을, 세상을 부수는 걸로 갚으면 안 돼요. 그건 당신을 더 외롭게만 만들어요. …그 밤에 당신이 버린 마음 한 조각, 그거 아직 저 위에 있어요. 당신 가슴 그 붉은 실 하나로. 안 죽었어요. 되찾을 수 있어요.
네오—응. 잔상 같은 거야. 버려진 몸은 시공의 틈에 얼룩처럼 남거든. 도서관 서고에 있던 빗자국도, 나를 따라다니는 내 그림자였어. 놀라게 해서 미안해.
연이—…그래서 그 얼굴 없는 남자가 자꾸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구나. 그게 너였으니까. 나 지키려고 몸까지 버린, 너의 버려진 반쪽이었으니까. …병하야. 이제 안 무서워. 그 잔상, 이제 보면 안아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것도 너잖아.
네오—…고마워. 그 말. …백 년간 그 잔상은, 아무도 안 반겨서 계속 빗속에 서 있었어. 나조차도 그 얼룩을 외면했지. 부끄러워서. …근데 네가 안아 준다니, 이제 그 빗속 얼룩도 좀 덜 외롭겠다.
무성—…(감옥에서) …파수꾼. 나도 알아, 그 기분. 반쪽을 버리고 사는 거. …너는 인간 몸을 버렸고, 나는 이름을 버렸지. 우리 둘 다, 저 여자 때문에 자기 일부를 잃은 거야. …근데 봐. 연이가 네 잔상을 안아 준대. 내 이름도 돌려줬고. …연이는, 잃어버린 걸 되찾아 주는 애야. 그래서 저 여자가 제일 무서워하는 거고.
연이—…무성. 맞아. 나 오늘 여기서 다 되찾을 거야. 병하 잔상도, 네 이름도, 저 위의 부서진 나도, 그리고… 박지은이 잃어버린 그 사람 마음까지도. …다 되찾아서, 다 같이 돌아갈 거야. 아무도 안 버리고.
연이—미안이라니. 이 바보야. 백 년을 그렇게 혼자, 말도 못 하고, 내 옆에서 무뚝뚝한 척만 하면서…
네오—후회 안 해. 너는 결국 네 손으로 사주를 완성했고, 나는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으니까. 내 백 년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서 본 백 년이었어.
연이—…근데 병하야. 왜 진작 말 안 했어. 나 재성에서 무서웠을 때도, 도서관에서 울었을 때도, 너 그냥 옆에서 무뚝뚝하게 '괜찮다'만 했잖아. …다 알면서. 나를 백 년 지킨 사람이면서. 왜 한마디도.
네오—…말하면, 네가 흔들릴까 봐. '내가 원래 부서질 운명이었다'는 걸 알면, 지레 겁먹고 사주를 못 완성할까 봐.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네 힘으로 여기까지 와야 했어. 그래야 진짜 네 사주가 되니까. 내가 도와준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이룬 게 되니까.
연이—…그래서 백 년을 참았구나. 내가 스스로 서게 하려고. …병하야. 나 화도 나. 왜 혼자 다 짊어졌냐고. 근데 동시에… 너무 고마워. 나를 그렇게까지 믿어 줘서. 내가 스스로 해낼 거라고. …이 복잡한 마음, 뭐라고 불러야 돼?
네오—…글쎄. 나도 몰라. 근데 그 마음, 안 없애도 돼. 화나면서 고마운 거, 그거 아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 나도 저 여자한테 배운 게 아니라, 너한테 배운 거라 확실친 않지만.
연이—…야. 이런 상황에 그런 말 하기 있어? …나 지금 눈물 콧물 다 났는데. 최악의 타이밍에 최고의 말을 하네. 여전히 눈치 없어, 박병하.
네오—…미래에도 네가 그랬어. '박병하는 타이밍이 늘 최악이다'라고. …고칠게. 백 년쯤 더 있으면, 타이밍도 늘겠지.
연이—…백 년은 무슨. 이번엔 안 기다려. …병하야. 이번엔 내가 널 지킬 거야. 백 년 전엔 내가 못 지켜서 네가 다 짊어졌지만, 이번엔 아니야. …우리 같이 저 여자 넘고, 저 위의 나도 구하고, 다 같이 돌아가자. 삼각김밥 먹으러.
연이—…혼자 다 짊어지고. 진짜 너답다.
연이—…병하야. 나 이제 다 알았어. 내가 누군지, 왜 여기 왔는지, 네가 왜 사자가 됐는지. …근데 있잖아, 다 알고 나니까 무섭지 않고 오히려 든든해. 나 혼자 우연히 온 게 아니라, 누가 이렇게까지 나를 지켜서 여기 있는 거니까. …나, 사랑받는 사람이었구나. 그걸 알아서, 나 이제 안 흔들려.
네오—…응. 너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야.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나도, 다 널 사랑해. …그러니까 저 여자가 무슨 말로 널 흔들려 해도, 그 사실 하나만 기억해. 너는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숨을 건 선택으로 여기 있는 거야.
연이—…응. 기억할게. …자, 그럼 이제 저 여자 차례네. 저 여자도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이잖아. 방법을 몰라서 저렇게 된. …병하야, 나 저 여자도 구할 거야. 미워하지 않고. 네가 나 지킨 것처럼, 나도 저 여자 안의 그 붉은 실 하나를 지킬래.
네오—…쉽지 않을 거야. 근데 너라면. …그래, 하자. 벌하되, 구하자. 저 여자까지 데리고, 다 같이 돌아가자. 벚꽃 강가로.
박지은—감동적이네, 병하 씨. 백 년 만의 고백이 고작 이거야? 여전히 답답할 만큼 바보 같아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해.
박지은—…근데 있잖아. 그 감동적인 고백, 다 들으면서 나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저 온기, 저 눈빛, 저 다정함. 저게 원래 다 내 거였어야 했는데.' …나는 저 사람 약혼자였어. 정해진 짝이었다고. 근데 저 온기는 단 한 번도 내 쪽으로 안 왔어. 늘 저 애한테만.
박지은—…얼마나 억울한지 알아? 나는 다 갖췄는데. 얼굴도, 집안도, 능력도, 정해진 자리도. 근데 저 사람은 그 어떤 것도 안 보고, 침 흘리고 자는 저 칠칠맞은 애만 봤어. …내가 뭐가 부족해서? 대체 저 애한텐 있고 나한텐 없는 게 뭐야!
연이—…박지은 씨. 부족한 거 없어요. 당신 진짜 다 갖췄어요. …근데 딱 하나, 당신은 '갖추려고' 했고 나는 그냥 '나였어요'. 병하는 갖춘 사람이 아니라 편한 사람이 필요했던 거고요. …당신이 부족한 게 아니라, 방향이 달랐어요. 당신은 완벽해지려 했고, 병하는 완벽 안 해도 되는 곳을 찾았어요.
박지은—…완벽 안 해도 되는 곳. …그런 곳이, 나한테도 있었으면. …나는 늘 무대 위였어. 조금만 틀려도 다 무너지는 무대. 한 번도 내려와 본 적이 없어. …저 애는, 무대 아래서 편하게 웃는데. 나는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외로웠고. …그 차이가, 백 년을 갈랐네.
네오—…지은아.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도 돼. 아무도 널 안 보는 게 아니라, 이제야 진짜 널 볼 수 있는 거야. 완벽한 회장님 말고, 그냥 지은이를. …연이가 손 내밀었잖아. 그 손 잡고 내려와. 무대 아래는, 생각보다 따뜻해.
박지은—…안 돼. 내려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돼. 완벽한 회장님이 아니면, 나는 그냥… 사랑 한 번 못 받은 초라한 여자잖아. 그 초라한 나를, 어떻게 견뎌. …차라리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외로울래. 그게 익숙하니까. …그러니까 그만해. 자꾸 나를 흔들지 마!
연이—…박지은 씨. 초라한 게 아니에요. 사랑 못 받은 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 그냥 아직 맞는 사람을 못 만난 것뿐이에요. …그리고요, 무대 아래 초라한 당신이, 무대 위 완벽한 당신보다 백 배 예뻐요. 사람은 완벽할 때가 아니라, 진짜일 때 제일 예쁘거든요. …나 그 진짜 당신, 보고 싶어요.
박지은—…완벽 안 해도 되는 곳. …나는 평생 그런 곳이 없었어. 늘 완벽해야 했지. 조금만 흐트러져도 다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그게,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열심히 산 게? 완벽하려 애쓴 게? …왜 나는 그렇게 애썼는데, 아무한테도 사랑 못 받는데!
네오—…지은아. 애쓴 거, 잘못 아니야. 근데 너는 완벽해지려고 애쓰느라, 정작 너 자신은 다 지웠어. 사랑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진짜인 사람한테 가거든. 네가 너를 다 지워서, 사랑이 갈 '너'가 없었던 거야. …이제라도 그 지운 너를 찾으면, 사랑도 올 거야.
박지은—…지운 나를 찾으라고. …근데 병하 씨. 나는 그 지운 내가 어떤 앤지 이제 기억도 안 나. …어릴 때, 완벽해지기 전의 나. 그 애는 뭘 좋아했더라. 뭘 보고 웃었더라.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백 년이 아니라, 태어나서부터 지워 온 거라. …너무 오래돼서, 못 찾을 것 같아.
연이—…박지은 씨. 못 찾으면, 지금부터 새로 만들면 돼요. 지운 나를 되찾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진짜 나로 사는 거예요. …당신 몇 살이에요? 백 살? 천 살? 상관없어요. 진짜 나로 사는 데 늦은 나이는 없어요. 오늘부터 하나씩, 뭘 좋아하는지 찾아 가면 돼요.
박지은—…오늘부터. …그런 여유가 나한테 어딨어. 나는 백 년을 이렇게 살았고, 이 세계는 내 손에 있고, 저 곳간은 다 내 거야. 이제 와 다 버리고 '진짜 나'를 찾으라고? …그건 지금까지의 나를 다 부정하는 거잖아. 그건 못 해. 절대. …차라리 이대로, 다 가진 채로 끝낼래.
박지은—그래서 더 용서가 안 돼. 저 애를 위해선 몸까지 버리면서, 나를 위해선 단 하루도 돌아봐 주지 않았잖아.
박지은—…내가 뭘 안 해 줬는데! 나는 집안이 정해 준 약혼자였고, 그 자리에 어울리려고 완벽해지려 얼마나 애썼는데! 네가 좋아할 만한 건 다 배웠어. 네가 읽는 책도, 네가 듣는 음악도, 다! …근데 너는 단 한 번도 나를 안 봤어. 저 침 흘리고 자던 애는 그냥 봤으면서!
네오—…지은아. 네가 배운 그 모든 게, 다 '나한테 맞추려고' 한 거였잖아. 네 걸 지운 채로. …나는 완벽한 사람을 원한 적 없어. 그냥 자기 자신인 사람이 좋았어. 연이는 자기 자신이었고, 너는… 나한테 맞춘 껍데기였어. 나는 그 껍데기 말고, 진짜 너를 한 번도 못 봤어.
박지은—…진짜 나? …진짜 내가 어디 있는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뭐가 돼야 하는' 사람이었어! 완벽한 딸, 완벽한 약혼자, 완벽한 회장! 진짜 나 같은 건, 나도 몰라! 그런 거 가질 여유 따위 없었으니까!
여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백 년, 아니 그 이전부터 쌓아 온 위선의 갑옷에 커다란 금이 갔다. 그 아래엔, 한 번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 본 적 없는 텅 빈 사람이 있었다. 다 가진 회장님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외로운 사람.
연이—…박지은 씨. 방금 그 말, 진짜 슬프네요. …당신도 피해자였구나. 자기 자신으로 못 산 사람. …근데 그거 알아요? 병하가 나를 본 건,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에요. 그냥 내가 나로 살아서예요. 침 흘리고, 실수하고, 삼각김밥 나누는 그냥 나로. …당신도 그럴 수 있었어요. 껍데기 벗고, 그냥 당신으로.
박지은—…닥쳐! …이제 와서 그런 말 들어 봤자! 나는 이미 백 년을 이렇게 살았어! 다 뺏고, 다 부수고, 다 가둬서! 이제 와서 껍데기 벗으면, 나한텐 아무것도 안 남아! 그냥 텅 빈 사람 하나만 남는다고!
연이—…아니에요. 껍데기 벗으면, 진짜 당신이 남아요. 텅 빈 게 아니라, 이제야 채울 수 있는 당신이. …박지은 씨. 늦지 않았어요. 백 년이 아니라 천 년을 그랬어도, 지금 손 펴면 돼요. …제가 도울게요. 병하가 나 꿈 찾는 거 도왔던 것처럼, 나도 당신이 당신 찾는 거 도울게요.
네오—…지은아. 연이 말 들어. 저 애는, 적한테도 저런 말을 하는 애야. 백 년 전에도 그랬어. 자기를 부순 사람한테도, 손을 내미는 애. …네가 그토록 못 가진 그 온기가, 지금 네 앞에 손을 내밀고 있어. 이번엔, 좀 잡아 보지 그래.
박지은—…잡으라고? …저 손을? …나를 부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부순 애의 손을? …그걸 내가 무슨 염치로. …아니. 아니야. 안 돼. 잡으면, 내가 백 년간 한 짓이 다 잘못이 돼. 그건 못 견뎌. 차라리…
여자의 손이 허공에서 떨렸다. 연이의 내민 손과, 자기 가슴의 그 붉은 실 사이에서. 백 년의 위선이 무너지느냐, 아니면 백 년을 더 얼어붙느냐. 그 갈림길에서, 박지은은 오래도록 흔들렸다.
연이—…박지은 씨. 잘못을 인정하는 게 무너지는 게 아니에요. 그게 진짜 강한 거예요. …백 년간 한 짓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면, 그때부터 안 하면 되잖아요. 그게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늦지 않았어요. 저 손 안 잡아도 돼요. 그냥 당신 그 붉은 실 하나만, 다시 봐 주세요. 그거면 시작이에요.
박지은—…내 붉은 실. …병하한테 이어진, 백 년을 못 죽인 실. …그래. 나는 아직도. 아직도 저 사람을. …아니야! 아니라고! …이런 마음, 인정 안 해! 인정하면 나는, 백 년을 헛산 바보가 되잖아! 사랑 하나 못 받아서 세상을 부순, 불쌍하고 멍청한 여자가!
네오—…지은아. 불쌍하고 멍청해도 돼. 우리 다 그래. …나도 삼각김밥 하나에 백 년을 건 바보고, 연이도 남 걱정하다 자기가 지워진 바보야. …바보인 게 부끄러운 게 아니야.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된 건, 오히려 잘 산 거야. 문제는, 네가 그 바보짓을 남 부수는 데 썼다는 거지. 이제라도, 방향만 바꾸면 돼.
박지은—…그만해. 둘 다 그만하라고. …나 지금, 백 년 만에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어. 그게 무서워. 흔들리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그러니까 더 못 듣겠어. 이 소리들을. …없애야겠어. 저 실도, 저 목소리들도, 다. 그래야 내가 안 무너져.
박지은—닥쳐. 그 잘난 척, 이제 지겨워. 고백까지 다 들었으니 됐어. 이제 그 실을 잘라 줄게. 두 번 다시 이어지지 않게.
베틀이 울부짖었다. 하늘을 채우던 붉은 실들이 새까맣게 물들면서, 일제히 칼날처럼 곤두섰다.
수억 개의 검은 칼날이, 연이와 네오를 잇는 그 붉은 실 하나를 향해 일제히 쏟아졌다. 백 년의 질투가 통째로 담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가위질이었다.
네오—…연이! 뒤로! 이건 내가 막아!
연이—…안 돼, 병하! 너 혼자 다 막으려고 하지 마! 또 혼자 짊어지려고! …이번엔 같이야! 손 놓지 마!
네오가 은빛 실을 펼쳐 방패를 세웠지만, 검은 칼날은 너무 많았다. 몇 겹을 막아도 다음 겹이 밀려들었다. 백 년치 질투는, 파수꾼 하나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무성—…지금이야! (콰직—!) …나간다!
실 감옥이 안쪽에서 터져 나갔다. 백 년을 갉는 대신, 백 년 만에 되찾은 이름의 힘으로 단숨에 부순 것이다. 무성이 검은 물의 날개를 펼치며, 연이와 네오 앞으로 뛰어들었다.
무성—…연이! 파수꾼! 내가 왔어! …백 년간 삼킨 검은 물, 오늘은 너희 지키는 데 쓸게! 방패로! …자, 셋이 등을 맞대자! 이번엔 아무도 혼자 안 막아!
연이—…무성! 나왔구나! …봐, 병하. 혼자 아니라고 했잖아. …자, 셋이 등 맞대. 검은 칼날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 셋이 등 맞대면 사각이 없어. 네가 앞, 무성이 옆, 내가 읽을게. 가자!
넝쿨과 파수꾼과 그릇이, 붉은 실 세계 한복판에서 등을 맞댔다. 은빛 실, 검은 물의 날개, 그리고 초록 넝쿨. 세 개의 다른 힘이 하나의 원을 이루자, 쏟아지던 검은 칼날이 처음으로 주춤했다. 백 년을 갈라 온 여자 앞에서, 세 사람은 갈라지지 않았다.
검은 칼날이 세 사람의 원을 두들겼다. 네오의 은빛 방패가 앞을 막고, 무성의 검은 물 날개가 옆을 감쌌다. 그리고 연이는 그 안에서, 쏟아지는 칼날 하나하나에 담긴 원한을 읽어 냈다. 막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읽어서 풀어내는 방어였다.
연이—…이 칼날들, 다 원래 성한 인연이었어! 박지은이 검게 물들인 거야! …그럼 읽어서 되돌리면 돼! 이건 삼십 년 부부, 이건 십 년 부녀, 이건 첫사랑! 다 원래 붉은 실이야! …풀려라! 너희 진짜 색으로 돌아가!
연이가 읽어 낸 칼날들이, 하나씩 검은색을 잃고 다시 붉게 물들었다. 박지은이 무기로 던진 인연들이, 연이의 손끝에서 도로 살아나 세 사람을 감싸는 따뜻한 실이 되었다. 공격이 방패로 바뀌는, 기묘한 역전이었다.
박지은—…뭐야, 저건. 왜 안 갈라져. 왜 안 부서져! …백 년간 이 칼날 앞에서 안 무너진 인연은 없었는데! …저 셋, 대체 무슨 사이길래!
네오—…박지은.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 …백 년 전 너한테 부서진 애랑, 그 애 지키러 시간을 거스른 남자랑, 너한테 도구로 쓰인 그릇이야. …공통점이 보여? 우리 셋 다, 너한테 뭔가를 잃은 사람들이야. 근데 우린 서로를 붙잡아서 그걸 되찾았어. 그게, 우리가 안 갈라지는 이유야.
무성—…맞아, 박지은. 당신이 우리를 부술 때마다, 우린 서로를 더 꽉 잡았어. 당신 공격이 우릴 더 뭉치게 했지. …이게 사랑의 무서운 점이야. 부수면 부술수록, 더 단단해지거든. 당신 백 년 질투가, 오히려 우리 실을 벼려 줬어.
연이—…무슨 사이냐고요? 간단해요. 우리는, 서로를 갖으려는 게 아니라 지키려는 사이예요. 그래서 안 갈라져요. …자, 박지은 씨. 이제 진짜 시작이에요. 당신 백 년 질투랑, 우리 이 실이랑, 누가 센지 봐요.
제37화 · 박병하 — 끝. 제38화 「끊을 수 없는 실」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