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베틀 위에 앉아 있었다. 옥좌에 앉은 여왕처럼, 아니 거미줄 한복판에 앉은 거미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레이스 드레스, 목과 손가락엔 핏빛 보석.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엔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잘 만들어진 얼음 조각상 같았다. 웃고 있는데도 서늘했고, 앉아 있을 뿐인데도 사방의 실이 그녀를 향해 떨었다.
연이—…(저 사람이구나. 청토끼도, 무성도, 회중시계도 다 저 사람 손끝에서 나온. …근데 이상해. 저렇게 다 가진 얼굴인데, 왜 저렇게 추워 보이지.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데, 왜 세상에서 제일 가난해 보여.)
무성—…(저 여자다. 백 년간 나를 부린. …실제로 마주 보니까, 봉인 속에서 목소리로 듣던 것보다 훨씬… 외로워 보여. 저 화려한 것들이, 오히려 저 여자가 얼마나 텅 비었는지 감추려는 것 같아.)
네오—…(박지은. …백 년 만이군. 그 밤 이후로 처음이야. …연이가 안 흔들리게, 내가 중심을 잡아야 해. 저 여자는 사람 마음의 틈을 파고드는 데 천재니까. 방심하면, 우리 셋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 거다.)
박지은—통성명부터 할까. 나는 박지은이야. 성도 이름도 사주도 다 있는 사람이지. 너희 세계 기준으로는, 그냥 회장님.
연이—…당신이었군요. 청토끼한테 회중시계를 내려준 사람. 무성을 그릇으로 만든 사람. 검은 비의 주인.
여자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사방의 붉은 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세 사람을 겨눴다. 마치 수억 개의 화살이 조준된 것 같았다. 이 세계 전체가 그녀의 무기였고, 그녀는 그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박지은—검은 비의 주인. …틀렸어. 나는 이 세계 전부의 주인이야. 이 하늘의 실 한 가닥 한 가닥이 다 내 거지. 네가 방금 밟고 온 그 인연들도, 네가 아끼는 저 아래 사람들 실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전부 끊을 수 있어.
연이—…끊을 수 있는데, 안 끊었네요. 우리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실 하나 안 건드렸잖아요. …왜요? 우리가 재밌어서? 아니면… 백 년 만에 찾아온 손님이라, 반가워서?
박지은—…호오. 겁은 안 내네. 대부분은 이쯤에서 오줌을 지리는데. …그래, 반가운 것도 맞아. 백 년간 이 방은 너무 조용했거든. 다들 나를 무서워하기만 하고, 아무도 말을 안 걸어 줬으니까.
네오—…말을 안 건 게 아니라, 네가 다 삼켜서 없앤 거겠지. 백 년간 너한테 말 걸려던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것 같아? …네가 다 부순 거야. 그래 놓고 조용하다고 외로워하는 건, 좀 뻔뻔하지 않나.
박지은—…저 사자, 여전히 입이 살았네. 백 년 사자 가죽을 써도 그 성격은 안 변했어. …그래. 반갑다는 말은 취소. 너희는 손님이 아니라, 오늘 내 곳간에 새로 들어올 재고들이야. …특히 저 넝쿨. 저 앤 백 년을 기다린 특별 품목이지.
연이—…특별 품목이라니 영광이네요. 근데 저 재고 아니에요. 재고는 팔리는 건데, 저는 안 팔리거든요. …자, 겁주기는 그만하고. 아까 하려던 얘기, 계속해요. 제 인생 얘기. 궁금하니까.
박지은—정답. 아쉽게도 상품은 없어. 아, 하나 더 맞혀 볼래? 네 인생 얘기.
연이—…제 인생을요? 당신이 내 인생을 어떻게 알아요. …아니, 잠깐. 방금 그 말투. 뭔가 알고 하는 말투인데. …설마 내 그 지지리도 안 풀리던 인생이, 당신이랑 상관있어요?
박지은—…자꾸 잃어버리던 우산, 엎어지던 계단, 놓치던 버스. 이상하게 꼬이던 소개팅에, 이유 없이 떨어지던 면접까지. 그거 전부, 누구 작품이게?
연이의 세계가 소리 없이 금이 갔다. 처음 앱이 깔리기 전부터 겹겹이 쌓여 온 불운의 밑바닥에, 전부 같은 사람의 서명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박지은—놀랐어? 놀랄 거 없어. 나는 원래 이런 걸 아주 많이 모으거든. 남의 불운, 남의 행운, 남의 시간, 남의 인연. …이 세상 좋은 건, 결국 다 내 곳간으로 흘러들어 오게 돼 있어. 그게 순리야. 내가 만든 순리.
여자가 손짓하자, 베틀 뒤편의 어둠이 걷혔다. 그곳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곳간이 있었다. 유리병마다 누군가의 시간이, 진열장마다 누군가의 인연이, 상자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라벨을 달고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세상의 반쪽을 훔쳐다 박제해 둔, 탐욕의 박물관이었다.
네오—…저 곳간. 백 년 전보다 더 커졌군. …연이, 저기 있는 게 다 사람들한테서 뺏은 거야. 저 여자는 저걸 '컬렉션'이라고 불러. 하나하나에 이름표까지 붙여서. …저게 저 여자의 전부야. 저 창고를 채우는 게, 저 여자가 사는 유일한 이유지.
무성—…나도 저기 있었어. 저 안쪽 어딘가에, 내 원래 모습이 '식상의 그릇'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저 여자한텐 사람도, 이야기도, 나도 다 '수집품'이야.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소장품. …소름 끼치지? 근데 저 여자는 저게 사랑이라고 믿어. 갖는 게 사랑인 줄 알아.
연이—…갖는 게 사랑이라니. …저건 사랑이 아니라 감옥이잖아요. 유리병에 넣고 이름표 붙여서 평생 못 나가게 하는 거. …박지은 씨. 당신 저 병들 하나하나, 진짜로 아껴요? 아니잖아요. 그냥 '많이 가졌다'는 숫자만 세는 거잖아요. 이름표는 붙였어도, 이름은 하나도 모르잖아요.
박지은—…이름을 왜 알아야 해? 중요한 건 개수야. 나는 이 세계에서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이고, 그게 내가 이겼다는 증거지. …이름 따위 알아서 뭐 해. 정 들면 못 팔잖아. …아, 팔 것도 아니지만. 그냥, 갖고 있으면 돼. 그거면 충분해.
연이—…그래서 백 년째 텅 빈 거예요. 개수만 세고, 이름은 몰라서. …박지은 씨, 저는요. 제 인연 하나하나 이름을 다 알아요. 루나, 언니, 백문, 모카, 네오, 무성. 여섯밖에 안 되지만, 하나하나 이름도 얼굴도 웃음소리도 다 알아요. …당신은 백만 개를 가졌는데 텅 비었고, 저는 여섯 개인데 꽉 찼어요. 왜일까요?
박지은—…여섯 개인데, 꽉 차. …그럴 리가. 개수가 적은데 어떻게. …아니. 그런 거 없어. 그건 네가 아직 몰라서 하는 소리야. 더 가지면, 너도 알게 돼. 많을수록 좋다는 걸. …그럴 거야. 분명.
연이—…아니에요. 이미 알아요. 많은 게 아니라 깊은 게 채워요. …당신도 사실 알잖아요. 그 붉은 실 하나가, 이 곳간 백만 개보다 더 컸다는 거. 그 하나를 못 채워서 백만 개를 모은 거잖아요. …깊은 걸 놓치고 많은 걸 좇으면, 영원히 텅 비어요. 그게 당신 백 년이에요.
박지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백 년간 애써 외면해 온 진실을 정확히 찔렀기 때문이다. 여자는 곳간을 힐끗 돌아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많은 유리병이, 처음으로 텅 빈 것처럼 보였다.
박지은—…그만. 그만해. …네 말은, 하나도 안 틀렸어. 그래서 더 못 참겠어. …맞아, 텅 비었어. 백 년째 텅 비었어. 근데 이제 와서 어쩌라고. 다 돌려주고 빈손이 되라고? …그건 못 해. 차라리 이 텅 빈 걸 끌어안고 죽을래. 그러니까 그 입 다물어.
연이—…이게 다… 사람들한테서 뺏은 거예요? 이 병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못 산 시간이고, 못 이룬 인연이고… …이걸 다 모아서, 뭐 하려고요? 쓰지도 않고, 그냥 쌓아만 뒀잖아요.
박지은—쓰려고 모으는 게 아니야. 갖는 게 목적이지. …너 부자들이 왜 안 쓸 그림을 수백억에 사서 창고에 넣어 두는지 알아? 갖고 있다는 그 느낌 때문이야. '이건 내 거다.' 그거 하나면 돼.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야. 시간도, 운명도, 인연도 다 내 창고에 있으니까.
연이는 저도 모르게 곳간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 가장 가까운 유리병에 손끝을 댔다. 그 순간, 그 안에 갇힌 이야기가 흘러 들어왔다. 연이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연이—…이 병 속에 든 거, 어떤 청년의 못 산 십 년이에요. 화가가 되고 싶었대요. 근데 스물다섯에 갑자기 붓이 안 팔리고, 손이 떨리고, 그림이 안 돼서… 결국 포기했대요. …그게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었어. 당신이 그 십 년을 여기 담아 갔으니까 그런 거였어.
박지은—아, 그 화가. 재능이 아까웠지. 그래서 내가 소장한 거야. 세상에 낭비되게 두느니, 내가 잘 보관해 주는 게 낫잖아? 저 청년, 지금쯤 평범한 회사원으로 잘 살고 있을걸. 오히려 편하게.
연이—…'잘 보관'? 그 사람은 평생을 '나는 왜 안 될까' 자책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이유도 모른 채! 당신이 그 재능을 훔쳐 간 줄도 모르고! …그게 어떻게 잘해 준 거예요! 당신은 그 사람 인생을, 이유도 안 알려주고 망가뜨렸어요!
연이가 다른 병들을 훑었다. 못 이룬 첫사랑, 못 만난 친구, 못 부른 노래, 못 쓴 편지. 수천, 수만의 '못 한 것'들이 라벨을 달고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겪은 좌절의 밑바닥에, 전부 이 곳간이 있었다.
연이—…세상 사람들이 다 그랬겠네요. '나는 왜 이렇게 안 풀리지.' '왜 나만 이럴까.' …그게 다 자기 탓인 줄 알고 자책했겠죠. 근데 아니었어. 여기, 이 곳간에 그 사람들 몫이 다 갇혀 있었어. …박지은 씨. 당신이 훔친 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왜'예요. 평생 안 풀릴 '왜'.
무성—…(감옥에서) …연이. 나도 저 곳간 출신이야. 저 여자가 어디선가 맑은 샘 하나를 통째로 떠다가, 그릇으로 개조한 게 나거든. …저 병들 속 사람들 마음, 내가 백 년간 대신 삼켜 준 거였어. 나도 피해자면서, 다른 피해자를 삼키는 도구였던 거지. …이제 다 돌려줄 거야. 나부터, 저 사람들부터.
연이—…무성. 너도 저 곳간에 있었구나. …괜찮아. 넌 이제 도구 아니야. 돌려주는 사람이지. 아까 부부 실도, 부녀 실도 다 네가 이었잖아. …오늘 저 병들 다 열어서, 사람들한테 '왜'를 돌려주자. '네 탓이 아니었다'고. …그럼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홀가분할까.
박지은—…감성적이네. 근데 어쩌겠어.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걸. 누군 갖고 태어나고, 누군 못 갖고 태어나고. 나는 그저, 그 불공평을 좀 더… 내 쪽으로 정리했을 뿐이야. …너도 곧 이 곳간에 들어올 거고. 아주 좋은 자리에 놔줄게. 걱정 마.
박지은—…아니면. 이건 어때. 곳간에 갇히는 대신, 내 옆에 서는 건. …너 그 온기, 그 읽는 재주. 나랑 손잡으면, 세상을 반씩 나눠 가질 수 있어. 네가 원하는 사람은 안 부술게. 네 친구들도 다 살려 주고. …어때? 착한 척하며 지는 것보다, 나랑 이기는 게 낫지 않아?
연이—…방금 그거, 진짜 위선의 끝판왕이네요. '친구는 살려 줄게, 대신 딴 사람들은 계속 부수자.' …박지은 씨. 나 하나 편하자고 모르는 사람들 시간을 못 본 척하는 거, 그거 딱 당신이 백 년간 한 짓이잖아요. 나는 그 길 안 가요.
박지은—…어리석기는.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할 순 없어. 현실적으로 굴어. 네 손 닿는 사람만 챙기는 게 지혜야. 나머지는 어차피 남이잖아.
연이—…남이 아니에요. 아까 그 곳간의 화가도, 병 속 첫사랑도, 다 누군가한텐 세상 전부예요. 내 손이 안 닿는다고 남인 건 아니에요. …나는 다 못 구해도, 못 본 척은 안 해요. 그게 당신이랑 나의 차이예요. 당신은 못 본 척했고, 나는 눈 안 감아요.
박지은—…끝까지 그 잘난 척. …좋아. 제안은 취소야. 넌 그냥, 곳간행이야. 저 별 옆자리. …다만 네가 그 착한 척을 언제까지 하나 보자. 소중한 게 하나씩 부서지기 시작해도, 그 눈이 그대로인지.
무성—…(감옥에서) 연이! 저 여자 제안 거절한 거, 잘했어! 백 년간 저 제안 받고 넘어간 사람이 수두룩했어. 다 저 여자 밑에서 도구가 됐지. 나처럼. …근데 너는 안 넘어갔어. 넌 진짜 다르다.
박지은—…회유가 안 통하면, 방법은 하나지. …너희 셋, 그렇게 손발이 척척 맞더라? 어디 그 실이 얼마나 튼튼한지 보자. …자, 검은 실아. 저 셋 사이로 파고들어. 없던 기억을 심어 줘라.
검은 실이 세 사람 사이로 스몄다. 연이의 머릿속에, 없던 기억이 억지로 피어올랐다. '네오가 날 이용했어.' '무성은 아직 날 삼킬 기회만 노려.' 가짜였지만, 진짜처럼 생생했다. 연이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연이—…어? 갑자기 왜… 네오가, 날 이용한… 무성이 날 노리는… …아니야. 이거 아니야. …네오가 아까 말했어. 기억이 흔들려도, 실을 믿으라고. …나 실 볼래. 우리 실.
연이가 눈을 감고, 세 사람을 잇는 실에 손을 얹었다. 가짜 기억은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손끝의 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네오의 실은 여전히 따뜻했고, 무성의 연둣빛 실은 여전히 순했다. 실은, 기억보다 정직했다.
연이—…안 통해요, 박지은 씨. 우리 실은 이렇게 따뜻한데, 무슨 가짜 기억이에요. …네오는 날 백 년 지켰고, 무성은 날 위해 감옥까지 갔어요. 그게 진짜예요. 당신이 심은 미움은 가짜고. …이게 아까 말한 우리 규칙 둘째예요. 실을 믿을 것.
네오—…나도 안 흔들려. 연이 너를 이용한다는 그 가짜 기억, 오히려 웃겨. 백 년을 너 하나 지키자고 산 나한테. …박지은. 이런 걸로 우릴 못 갈라. 우린 서로가 서로한테 뭔지, 너무 잘 아니까.
무성—…나도. 감옥 안에서도 우리 실 다 보여. 하나도 안 물들었어. …저 여자야말로 모르는 거야. 서로 왜 좋은지 아는 사이는, 오해 한 톨로 안 흔들린다는 걸. 저 여자는 평생 그런 사이가 없었으니까.
박지은—…셋 다 안 흔들려? …백 년간 이걸 버틴 인연은 하나도 없었는데. …너희, 진짜 뭐야. 대체 무슨 사이길래. …아니. 됐어. 안 갈라지면, 그냥 통째로 부수면 돼. 셋을 하나로 묶어서, 한 번에.
여자가 두 팔을 활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늘을 채운 스물여덟 별자리가 일제히 신음하며, 손에서 검은 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각(角), 항(亢), 저(氐), 방(房)… 스물여덟 성좌의 힘이 전부 세 사람을 향해 모여들었다. 세계 전체가 무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연이—…우와. 하늘 전체가 우리한테… 별자리들이 다 검은 실을 뽑아. …근데 박지은 씨, 저 별자리들 좀 봐요. 다들 울면서 실을 뽑고 있어요. 하기 싫은데 억지로. 당신이 손목에 검은 실을 감아서, 강제로 시키는 거잖아요.
박지은—…그래서 뭐. 일꾼은 부리라고 있는 거야. 저것들도 원래 내 밑에서 실 뽑던 것들이고. …감상은 됐어. 자, 스물여덟 성좌의 힘으로, 너희 셋을 이 세계에서 지워 주지. 곳간에 넣을 것도 없이, 그냥 없던 걸로.
연이—…무섭긴 한데요, 박지은 씨. 저 별자리들, 당신 편이 아니에요. 억지로 끌려온 거라, 마음은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봐요. 제가 손 흔드니까, 몇몇이 실 뽑는 손을 멈칫하잖아요. …당신은 힘으로 백 년을 부렸지만, 마음은 단 한 번도 못 얻었어요.
연이가 하늘을 향해 밝게 손을 흔들자, 정말로 몇몇 별자리가 검은 실을 뽑던 손을 멈칫했다. 백 년간 억지로 부려지던 성좌들이, 처음으로 자기들을 사람으로 봐 주는 눈빛을 만난 것이다. 박지은의 완벽했던 군대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박지은—…뭐 하는 거야! 실 뽑아! 멈추지 마! …저 계집애 눈 보지 말고, 손 봐! …젠장. 저 눈빛 하나가, 백 년 복종을 흔들어. …안 되겠어. 방해꾼들부터 치우고, 저 입을 다물게 해야겠어. 저 앤 너무 위험해.
연이—…위험한 거 맞아요. 나 진짜 위험해요. …당신이 백 년 쌓은 복종을, 손 한 번 흔들어서 흔드는 사람이거든요. …별자리 여러분! 저 지금 여기 왔어요! 당신들 억지로 실 뽑는 거 다 봤어요! 조금만 버텨요, 제가 그 손목 검은 실 다 풀어 드릴게요!
연이의 외침에, 스물여덟 성좌 곳곳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백 년간 이름 없이 부려지던 별자리들이, 처음으로 응답을 받은 것이다. 몇몇 성좌의 손목에서, 검은 실이 아주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박지은의 세계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네오—…봐, 박지은. 이게 연이야.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네 별자리들 마음을 얻고 있어. …너는 백 년을 힘으로 눌렀지만, 연이는 하루 만에 마음으로 풀어. 이게, 네가 절대 못 이기는 이유야.
박지은—…시끄러워! …더는 안 되겠어. 저 입, 저 눈, 저 손. 하나도 못 두겠어. …그래, 이제 진짜다. 저 사자의 이름을 밝히고, 저 넝쿨의 정체를 까발려서, 저 애가 제 진실 앞에 무너지는 걸 보자. 그게 저 애를 부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
연이—…그건 부자가 아니라 도둑이잖아요! 남이 살아야 할 시간을 뺏어다 병에 담아 두는 게 무슨 자랑이에요! 저 병 속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유도 모르고 인생이 꼬이고 있을 텐데!
박지은—도둑이라니, 말이 심하네. 나는 '수집가'야. 그리고 이건 '보관'이고. …생각해 봐. 어차피 사람들은 자기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잖아. 아까운 인연도 제 손으로 걷어차고. 그럴 바엔, 내가 소중히 보관해 주는 게 낫지 않아? 나는 오히려, 이 세상에 질서를 주는 사람이야.
연이는 소름이 돋았다. 도둑질을 '보관'이라 부르고, 약탈을 '질서'라 부르는 그 태연함. 박지은은 자기가 나쁜 짓을 한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완벽한 위선이, 어떤 악의보다 더 서늘했다.
네오—…저게 저 여자의 제일 무서운 점이야. 자기가 악당인 걸 몰라. 아니, 알면서도 좋은 말로 덮어. '보관' '질서' '수집' '자비'. …백 년간 저 예쁜 말들로 자기 죄를 덮어 온 거지. 그래서 반성이 없어. 반성이 없으니 멈추질 않고.
무성—…맞아. 나한테도 늘 그랬어. 나를 부수면서 '너를 쓸모 있게 해 주는 거야'라고 했지. 삼키게 강요하면서 '세상을 정리하는 숭고한 일이야'라고. …백 년을 듣다 보면, 진짜 그런가 싶어져. 그게 위선의 무서움이야. 당하는 사람도 헷갈리게 만들어.
연이—…그러니까 더더욱, 똑바로 이름 붙여 줘야겠네요. 박지은 씨. 당신이 하는 건 보관이 아니라 도둑질이고, 질서가 아니라 폭력이고, 자비가 아니라 잔인함이에요. …예쁜 말로 덮지 마요. 나는 당신 위선, 한 겹 한 겹 다 벗겨서 진짜 이름을 붙일 거예요.
연이—…당신,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어. 자기가 좋은 일 한다고. …그게 제일 무섭네요. 나쁜 걸 알면서 하는 사람보다, 나쁜 걸 좋은 거라고 믿는 사람이 훨씬.
박지은—좋고 나쁘고는 이긴 사람이 정하는 거야, 얘야. 백 년째 이 세계의 주인은 나고, 그러니 옳은 것도 나지. …자, 곳간 구경은 됐고. 이제 네 얘기로 돌아가자. 넌 왜 내가 그렇게 공들여 부순 애인지.
박지은—아, 그 전에. 내 컬렉션 중에 제일 아끼는 걸 보여 줄게. 저기, 저 탑 꼭대기. 보여? 시들어 가는 창백한 별 하나. …저게 내 자랑이야. 백 년째 안 죽이고, 안 살리고, 딱 저 상태로 박제해 둔 것. 꺼져 가는 채로 영원히 붙잡아 둔 거지.
연이—…저 별. 아까부터 자꾸 나랑 이어져 있던 그 별. …저게 뭐길래, 당신이 저렇게 애지중지해요? 왜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고, 굳이 시들어 가는 채로 걸어 뒀어요? 그건 자랑이 아니라, 고문이잖아요.
박지은—고문? 아니, 예술이야. …생각해 봐. 완전히 죽이면 재미없잖아. 완전히 살리면 내 것도 아니고. 딱 저렇게, 영원히 꺼지기 직전으로 붙잡아 두는 거. 그게 제일 완벽한 소유거든.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오직 내 것으로만 존재하는 거.
연이는 저 창백한 별을 올려다보며, 이유 모를 아픔에 가슴이 조여 왔다. 저 별에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실이, 제 손가락 어딘가에 분명히 이어져 있었다. 마치 저 별이, 잃어버린 제 일부인 것처럼.
연이—…박지은 씨. 저 별, 원래 누구예요? 왜 나랑 이어져 있어요? …아까 네오도 그랬어요. 저 별은 내 적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거라고. …저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박지은—…그것도 곧 알게 돼. 아주 곧. …다만 미리 하나만 귀띔해 줄까? 저 별을 보면 자꾸 마음이 아프지? 남 같지가 않지? …그럴 만해. 아주 그럴 만하고말고. …후후. 나머진, 저 사자 입에서 듣자. 그게 더 재밌을 테니까.
무성—…(감옥 안에서) …연이. 저 별, 내가 봉인 속에서 자주 봤어. 저 여자가 저 별을 가둘 때,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알아? '이건 원래 네 거였는데. 이제 내 거야.' …네 거였대, 연이. 저 별이, 원래 네 거였대.
연이—…내 거였다고? 저 시들어 가는 별이, 원래 내 거였다고? …그럼 저건… 내 뭔가야? 내가 잃어버린, 내 일부? …박지은 씨. 저 별이 내 거였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대답해요. 제발.
박지은—…성급하기는. 좋아, 이것까진 말해 주지. 저 별은, 네가 살았어야 할 '또 다른 너'야. 미래에서 내가 부순, 네 원래 운명. 죽지도 못하고 저렇게 시들어 가는, 너의 지워진 반쪽. …내가 저걸 백 년째 걸어 두고, 매일 흐뭇하게 봤어. 널 부순 증거니까.
연이는 숨이 멎었다. 저 탑 꼭대기에서 꺼져 가는 창백한 별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박지은에게 부서진, 또 다른 자신.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백 년을 전리품으로 걸려 있던, 자신의 지워진 운명. 그 별에서 뻗은 실이 왜 자기 손에 이어져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연이—…저게, 나구나. …백 년을 저렇게, 꺼지지도 못하고. …나 대신 저기서 시들어 온 나. …박지은 씨.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죽이는 것보다 잔인해요. 죽지도 못하게 붙잡아 두는 거. …저 애, 제가 꼭 데려갈 거예요. 저건 당신 전리품이 아니라, 나예요.
박지은—…데려가? 저걸? 후후. 그러려면 나를 넘어야 하는데. …백 년간 아무도 못 넘었어. 저 별도 그래서 백 년째 저기 있는 거고. …자, 눈물은 그만. 이제 진짜 재밌는 순서야. 저 사자가 네 앞에서, 제 진짜 이름을 밝힐 시간이거든.
네오—…박지은. 저 별, 백 년간 아무도 못 넘어서 저기 있는 게 아니야. 백 년간 나 혼자였어서 못 구한 거지. …이번엔 혼자가 아니야. 연이가 있고, 무성이 있고, 저 아래 루나가 있어. …저 별, 이번엔 반드시 데려간다. 연이의 부서진 반쪽을, 연이 품으로 돌려보낼 거야.
연이—…응. 저 위의 나, 백 년을 시들면서도 안 죽고 버텼어. 누가 와 주길 기다리면서. …이제 내가 갈게. 나한테로. …박지은 씨, 저 별은 당신 자랑거리가 아니라, 백 년을 홀로 견딘 용감한 애예요. 그 애를 전리품 취급한 거, 그거 오늘 사과받을 거예요. 저 별한테.
박지은—…사과? 내가? 부서진 운명 쪼가리한테? …점점 더 우스운 소릴 하네. …됐어. 말로는 못 당하겠으니, 이제 진짜를 보여 줄 차례야.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진실. 저 사자의 이름부터.
연이—…왜요.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당신을 오늘 처음 보는데.
박지은—너는 처음 봤겠지. 나는 아니야. 나는 너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어. 정확히는, 아직 오지 않은 오래전부터.
박지은—미래에 어떤 남자가 있었어. 성실하고, 다정하고, 바보같이 곧은 사람. 나는 그 사람을 내 전부를 걸고 원했지.
박지은—그런데 그 사람 실은 늘 한 방향만 보고 있더라. 시시한 여자애 하나한테. 사주도 다 못 갖춘 주제에, 잘 웃는 게 전부인 평범한 애한테.
박지은—나는 다 가졌어. 완벽한 사주, 넘치는 재물, 사람을 부리는 힘.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건 뭐든 해 줄 수 있었지. 비싼 것도, 대단한 것도, 다. …근데 그 사람은, 그 여자애가 편의점에서 사 준 삼각김밥 하나에 더 환하게 웃더라. 내가 준 그 무엇보다.
연이—…삼각김밥이요? …그 사람이, 삼각김밥에 웃었다고요?
박지은—…그래. 우습지? 나는 세상을 다 줘도 안 웃던 사람이, 삼각김밥 하나에 애처럼 웃더라. …그때 알았어. 나한테 없는 건 재물이나 능력이 아니라는 걸. 그 여자애한텐 있고 나한텐 없는, 어떤 '온기' 같은 거. …근데 그게 뭔지, 나는 백 년을 봐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더 미웠어.
연이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삼각김밥. 그건 연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자취방 냉장고에 늘 쟁여 두던, 외로운 밤의 위로. 이야기 속 '그 여자애'가 자신이라는 증거가, 또 하나 쌓였다.
연이—(…나 진짜 그거 좋아하는데. 자취방에서 매일 먹던 건데. …그럼 정말, 그 미래 이야기 속 여자애가… 나야? 미래의 내가, 누군가한테 그걸 나눠 주며 웃었다고? …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왜 그 장면이 이렇게 낯익지.)
네오—…연이. …맞아. 그거, 네가 나한테 준 거였어. 미래에. 편의점 앞에서, 비 오는 날. 아무렇지 않게 하나 툭 건네면서 '같이 먹어요' 했지. …나한텐 그게, 세상 전부보다 컸어.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뭘 나눠 준 적이 없었으니까.
연이—…내가, 너한테 그걸. …기억은 안 나는데, 왜 눈물이 나지. …네오. 그럼 너 백 년 동안, 그 한 번의 온기를 붙잡고 버틴 거야? 나를 지키겠다고? …바보야. 그깟 밥 하나에.
네오—…그깟 밥이 아니야. 그건, 누가 나를 처음으로 사람 취급해 준 순간이었어. …그거 하나면, 백 년도 버텨. 천 년도 버티고.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그 온기 하나 덕분에, 백 년을 안 외로웠어. 네 덕분에.
박지은—…아주 둘이서 눈물의 재회쇼를 찍는구나. …역겨워. 편의점 밥 하나로 백 년을 버텨? 그런 시시한 걸로? …나는 세상을 다 줘도 못 가진 걸, 너희는 그깟 온기 하나로 가졌다고? …더 못 봐 주겠어. 저 둘 사이, 지금 당장 끊어.
검은 실 한 다발이 연이와 네오를 잇는 그 굵고 붉은 실을 향해 가위처럼 날아들었다. 백 년을 벼려 온, 그 실을 향한 증오가 통째로 담긴 일격이었다.
네오—…안 끊겨. …이 실은, 네가 백 년을 잘라도 안 끊긴 실이야. 시간을 거슬러서도 안 끊겼는데, 그깟 가위로?
검은 가위가 붉은 실에 닿는 순간, 오히려 검은 실 쪽이 튕겨 나갔다. 연이와 네오의 실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삼각김밥 하나로 백 년을 버틴 그 실은, 세상 그 무엇보다 질겼다.
연이—…봤죠, 박지은 씨. 안 끊겨요. 시시한 삼각김밥으로 맺은 실이, 당신 백 년 증오보다 질겨요. …왜냐면요. 시시한 게 진짜거든요. 대단한 건 부서져도, 시시하고 따뜻한 건 안 부서져요. 그게 당신이 백 년을 못 배운 거고요.
박지은—…말도 안 돼. …백 년을 벼린 내 칼이, 편의점 밥 실 하나를 못 끊어? …이게, 이게 사랑이라는 거야? …아니야. 인정 못 해. 그럴 리 없어. …방해꾼들부터 치운다. 저 둘만 남기고 다 치워. 그럼 저 실도, 결국—
무성—…(감옥에서) 박지은. 그 실, 둘만 남겨도 안 끊겨. 오히려 둘만 남기면 더 굵어질걸. 방해꾼 없이 서로만 보게 될 테니까. …당신, 사랑을 몰라서 자꾸 헛수고를 하네. 사랑은 방해꾼 치운다고 약해지는 게 아니야. 오히려 단둘이 남을 때 제일 세지는 거야.
연이—…맞아, 무성. 박지은 씨, 방금 무성 말 들었죠? …당신이 우리 갈라놓으려고 뭘 해도, 결국 다 우리 실을 더 굵게 만들어요. 당신 공격이 오히려 우리 사랑의 증거가 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진짜 중요한 얘기 하자고요. 왜 하필 나였는지. 네오가 왜 나였는지.
박지은—…그래. 그거야말로 네가 제일 무너질 진실이지. …좋아. 저 사자한테 직접 듣게 해 줄게. 왜 하필 너였는지. 그 남자가 왜 목숨을 걸고, 시간을 거슬러서까지 너 하나를 지켰는지. …그 무거운 진실 앞에서, 네 그 웃음이 얼마나 버티나 보자.
연이—…버틸 거예요. 아니, 웃을 거예요. …왜냐면요, 박지은 씨. 누가 날 그렇게 사랑했다는 게, 나한텐 무너질 일이 아니라 벅찬 일이거든요. …당신은 그 사랑을 무기로 쓰려는데, 나한텐 그게 힘이 돼요. 슬픈 진실이어도, 그 밑바닥이 사랑이면 나는 안 무너져요.
네오—…연이. …고마워. 그렇게 받아 줘서. …백 년간 이 얘길 못 한 건, 네가 무거워할까 봐였어. 근데 넌 무거워하는 대신, 벅차다고 하는구나. …역시, 내가 지킬 만한 사람이었어. 그때도, 지금도.
연이—…자, 그럼 이제 말해 줘, 네오. 네 진짜 이름. 네 진짜 이야기. …저 여자 입 말고, 네 입으로. 나 다 들을 준비 됐어. 손 꼭 잡고 있을게. 무슨 얘기가 나와도, 이 손 안 놔.
무성—…(감옥에서) 연이, 파수꾼. 나 이 감옥 거의 다 갉았어. 조금만 있으면 나가. …그러니까 둘이 그동안 못다 한 얘기, 다 해. 내가 곧 나가서, 셋이 같이 저 여자 넘을 거니까. …네오, 네 이야기 나도 밖에서 들을게. 응원할게.
박지은—…감옥 안에서 응원이라니, 아주 훈훈해. …됐고. 자, 사자야. 백 년을 숨긴 네 이름, 이제 밝혀. 저 애가 그 무게에 무너지든, 아니면 네 말대로 벅차든. …나는 그저, 저 완벽한 사랑이라는 게 진실 앞에서 어떻게 되는지 구경하면 돼. 어서.
연이가 네오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을 잇는 붉은 실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다. 백 년을 숨겨 온 진실이, 마침내 그 실을 타고 흘러나오려 하고 있었다. 붉은 실의 세계 한복판에서.
연이—…네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말해 줘.
박지은—그래서 연구했어. 그 온기가 뭔지. 어떻게 하면 나도 그걸 가질 수 있는지. …근데 아무리 파고들어도 안 되더라. 온기는 살 수도, 뺏을 수도, 배울 수도 없었어. 그건 그냥… 그 여자애가 타고난 거였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질.
연이—…그래서 그 온기를 가진 사람을 부순 거군요. 내가 못 가질 거면, 아무도 못 갖게. …박지은 씨, 그거 알아요? 온기는 뺏는 게 아니라 나누는 거예요. 삼각김밥도, 혼자 먹으면 그냥 밥이지만 나눠 먹으면 온기가 되죠. …당신은 나누는 법을 몰라서, 그 온기를 평생 못 가진 거예요. 못 가진 게 아니라, 안 나눈 거예요.
박지은—…나누라고? 내가? 백 년을 뺏기만 한 내가, 이제 와서? …웃기지 마. 나눠서 얻는 온기 따위, 나는 필요 없어. 나는 그냥, 그 여자애가 가진 걸 다 부수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어. …근데 안 후련하더라. 부수고 나니까 더 텅 비었어. 그게 제일 화나.
연이—…당연히 안 후련하죠. 남의 걸 부순다고 내 게 채워지진 않으니까. …박지은 씨, 그거 알아요? 당신이 정말 갖고 싶었던 건 그 사람 마음도, 그 온기도 아니었어요. …그냥, 누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거였어요. 뺏지 않아도, 대단하지 않아도, 그냥 당신이라서 곁에 있어 주는 사람 하나.
박지은—…있는 그대로. …그런 걸, 나한테 준 사람이 있었을 리가. 나는 늘 뭔가를 줘야, 뭔가를 해내야 곁에 두는 사람이었어. 그냥 나라서 곁에 있어 준 사람은… 한 명도…
연이—…그래서 이렇게 됐구나. 조건 없이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사랑을 거래로만 배워서. …박지은 씨, 미워하려고 했는데 자꾸 마음이 아파요. 당신, 백 년 동안 진짜 외로웠겠다. 다 가졌는데 아무도 없어서.
박지은—…동정하지 마! …그 눈, 제일 싫어. 불쌍하다는 그 눈. …나는 불쌍한 사람 아니야. 나는 이 세계의 주인이고, 세상에서 제일 부자고, 다 가진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눈으로 나 보지 마! 나를… 나를 그렇게 보지 말라고!
여자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엔 분노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백 년을 쌓아 온 '다 가진 사람'이라는 갑옷이, 연이의 다정한 눈빛 앞에서 자꾸만 얇아지고 있었다. 갑옷 아래엔, 아무도 안 봐 준 외로운 사람 하나가 떨고 있었다.
무성—…(감옥에서) …연이. 나 백 년간 저 여자 밑에 있으면서, 저 여자가 저렇게 흔들리는 거 처음 봐. 아무도 저 여자한테 '외로웠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어. 다들 무서워서 도망치거나, 미워하거나. …너 말고는, 아무도 저 여자를 사람으로 안 봤어.
연이—…무성. 그래서 내가 더 안 도망갈 거야. 백 년간 아무도 안 해 준 걸, 내가 할래. …저 여자를 벌하되, 구할 거야. 아까 정한 규칙 셋째. …저 여자가 아무리 위선을 떨어도, 아무리 잔인해도, 그 밑에 외로운 사람 하나가 있다는 거 나는 봤으니까. 그걸 봤으면, 못 본 척 못 해.
네오—…연이. 미워해 마땅한 사람을 구하는 거,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 …근데 너라면 해. 넌 나도, 무성도 구했으니까. …믿어.
연이—…응. 근데 혼자는 못 해. 너희가 있어야 해. …그러니까 무성, 빨리 그 감옥 갉고 나와. 그리고 네오, 이제 네 진짜 이름 말해 줘. 네 이야기를 알아야, 나도 저 여자 이야기를 풀 수 있어. …다 이어져 있어. 네 이야기, 내 이야기, 저 여자 이야기. 하나 풀면, 다 풀려.
박지은—그래서 부숴 버렸어. 그 애 운명을. 글자를 뽑고, 운을 비틀고, 이름이 지워지는 걸 끝까지 지켜봤지. 그랬더니 그 남자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박지은—제 몸을 버리고 시간을 거슬러 도망쳤어. 그 애를 지키겠다고. 그 애의 과거로!
박지은—…웃기지 않아? 내가 그 사람한테 준 게 얼마인데. 내 시간, 내 마음, 내 전부. 그 사람은 그걸 한 번도 안 봤어. 근데 아무것도 안 준 그 계집애한텐, 목숨까지 걸더라. …이게 공정해? 준 사람은 버림받고, 안 준 애가 사랑받는 게?
박지은—그래서 나는 그냥, 저울을 바로잡은 것뿐이야. 받을 자격 없는 애한테서 그 사랑을 도로 거둔 것뿐이지. …나는 가해자가 아니야. 나야말로 피해자야. 백 년을 한 사람만 바라보다 버림받은, 가여운 피해자.
여자의 눈에 진짜 눈물이 맺혔다. 그런데 그 눈물은, 자기 손에 부서진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하다고 믿는 사람의 눈물. 그것이 박지은이라는 사람이었다.
연이—…저울을 바로잡았다고요? 당신은 저울을 부순 거예요. 사랑은 준 만큼 받는 거래가 아니에요. 그 사람이 그 애를 사랑한 건, 그 애가 뭘 줘서가 아니라 그냥 그 애라서예요. …당신이 백 년을 못 배운 게 그거예요. 사랑은 자격으로 받는 게 아니라는 거.
박지은—…어린 게 아는 척은. 그래, 실컷 떠들어. 그 잘난 사랑 타령. …근데 결국 부서진 건 그 애 운명이고, 여기 이렇게 이긴 채 앉은 건 나야. 말은 네가 이겨도, 판은 내가 이겼어.
베틀의 실들이 여자의 감정을 따라 울었다. 듣고 있던 연이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갔다. 이야기 속 '시시한 여자애'의 자리에, 자꾸만 제 얼굴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연이—…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예요.
박지은—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무서워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연이—…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인정하면, 저 사람이 나 하나 때문에 백 년을 통째로 버렸다는 게 되니까. 그건 너무 무겁잖아요.
박지은—어머, 솔직하기까지. 그래서 더 밟고 싶어져. 착한 척하는 애들이 무너질 때가, 제일 예쁘거든.
연이—…박지은 씨. 나 무너지기 전에, 하나만 볼게요. …당신 마음속에, 실이 하나 있어요. 아까 오면서 봤어요. 당신이 백 년을 검게 물들이려 했는데도, 끝끝내 안 물든 붉은 실 하나. …그거, 당신이 그렇게 미워하는 그 사람한테 이어진 실이죠. 아직 안 죽었어요, 그 실.
박지은—…닥쳐. 그 실 얘긴 꺼내지 마.
연이—…봐요. 방금 목소리 떨렸어요. 세상 다 가진 척하면서, 그 실 하나엔 이렇게 흔들려요. …당신이 진짜 갖고 싶은 건 이 곳간의 백만 개가 아니라, 저 실 하나였잖아요. 그 사람 마음 하나. 근데 그거 하나만은, 백 년을 뺏어도 안 뺏겼죠.
박지은—…그만하라고 했다! 네가 뭘 안다고! 내가 그 실 하나 때문에 백 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네가 알아?!
베틀 전체가 여자의 절규에 진동했다. 검은 실들이 사납게 곤두섰다. 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여자 가슴의 그 붉은 실 하나만은 여전히 붉게, 처량하게 떨고 있었다. 연이의 말이, 백 년 얼음에 실금을 낸 것이다.
연이—…알아요. 조금은. 나도 손 내밀었다가 안 잡혀 본 적 있으니까. 그거 진짜 아파요. 세상이 다 나를 안 원하는 것 같고. …근데 박지은 씨. 그 아픔을 남한테 백만 배로 돌려준다고, 당신 실이 이어지진 않아요. 오히려 점점 더 혼자가 될 뿐이에요. 지금처럼.
박지은—…그럼 어쩌라고. 이제 와서 착하게 살라고? 다 돌려주고, 빈손으로 외롭게? …싫어. 그럴 바엔 다 가진 채로 외로운 게 나아. 적어도 손에 쥔 건 있으니까. …너는 몰라. 빈손의 공포를. 나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연이—…빈손이 무서워서, 남의 걸로 손을 채운 거군요. …근데 박지은 씨, 그거 알아요? 사랑은 손에 쥐는 게 아니라 손을 잡는 거예요. 쥐려면 손을 오므려야 하는데, 잡으려면 손을 펴야 하죠. …당신은 백 년을 손을 오므리고만 있었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그 손을 못 잡은 거예요.
박지은이 저도 모르게, 오므리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백 년간 무언가를 움켜쥐느라 한 번도 펴 본 적 없는 손이었다. 그 손이, 아주 잠깐 떨렸다. 하지만 여자는 이내 그 손을 더 세게 오므렸다. 두려웠던 것이다. 손을 펴는 것이.
연이—…박지은 씨. 무서워하지 마요. 손 펴는 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봐요, 제가 먼저 펼게요. 이렇게. …쥔 게 하나도 없죠? 근데 텅 빈 게 아니에요. 이 편 손으로, 저는 친구 손도 잡고, 삼각김밥도 나누고, 넘어진 사람도 일으켜요. …빈손이 제일 많이 잡아요. 진짜예요.
연이가 손을 활짝 펴 보였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 그 손에서, 하늘의 붉은 실들이 저절로 모여들어 잠깐 따뜻하게 감겼다. 쥐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이 깃드는 손이었다. 박지은은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박지은—…어떻게. …아무것도 안 쥐었는데, 실이 저절로 모여. …나는 백 년을 쥐어도 하나도 안 남았는데. …너는 왜, 펴기만 했는데 저렇게…
연이—…쥐면 도망가고, 펴면 모여요. 인연은 그런 거예요. …박지은 씨. 딱 한 번만, 그 손 펴 볼래요? 저 곳간 다 안 놓아도 돼요. 딱 한 손가락만. 그 붉은 실 하나만, 다시 잡아 볼 용기 한 톨만.
박지은—…안 돼! …펴면, 다 쏟아져. 백 년을 모은 게 전부. …그럼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 아무것도 없이, 아무한테도 안 잡히던 그때로. …그건 죽어도 싫어! 차라리 쥔 채로 외로운 게 나아! 나한테서 이 손 펴라고 하지 마!
여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위선의 가면 아래, 백 년을 숨겨 온 겁먹은 아이가 잠깐 비쳤다. 세상을 다 가진 회장님이 아니라, 손 한번 안 잡혀 본 외로운 사람. 연이는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균열은 아직 너무 얕았고, 박지은은 서둘러 다시 위선의 가면을 썼다.
박지은—…후. 내가 잠깐 무슨 소릴. …됐어. 네 그 손장난에 넘어갈 뻔했네. 역시 위험한 애야, 너. …그러니까 더더욱, 빨리 곳간에 넣어 둬야겠어. 저 별 옆자리가 딱 좋겠네. 부서진 너, 그리고 완성된 너. 나란히.
연이—…박지은 씨. 방금 당신, '넘어갈 뻔했다'고 했어요. 그 말은, 당신 마음 한구석이 정말 그 손을 잡고 싶었다는 뜻이에요. …봐요. 당신 안의 그 붉은 실이, 아직도 떨고 있어요. 잡고 싶어서. 펴고 싶어서. …당신이 아무리 위선으로 덮어도, 그 실 하나는 못 속여요. 그게 진짜 당신이에요.
네오—…박지은. 너, 방금 백 년 만에 처음으로 흔들렸어. 연이 손 앞에서.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 너도 아직,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야. 완전히 굳지 않았다는 거고. …우린 널 벌하러 왔지만, 동시에 구하러도 왔어. 그 실 하나가 남아 있는 한, 아직 늦지 않았어.
박지은—…구원? 누가 나를? …웃기지 마. 나는 구원 같은 거 안 믿어. 백 년 전에 이미 버렸어. …그러니까 그 얘기 그만하고, 이제 진짜 판을 끝내자. 저 사자 이야기로. 그게 너를 무너뜨리든, 나를 흔들든. …더는 미룰 수 없어.
박지은—…말은 참 예쁘게 하네. 꼭 그 사람처럼. …됐어. 더 들으면 안 되겠어. 네 그 입, 자꾸 내 안을 헤집어. …그러니까 이쯤에서, 판을 뒤집자. 네가 제일 무서워할 이야기로.
무성—…연이, 조심해. 저 여자가 '판을 뒤집는다'고 할 땐, 늘 남의 마음을 무기로 써. 백 년간 봤어. 상대가 제일 아파할 진실을 골라서, 그걸로 무너뜨려. …근데 이번엔 달라. 저 여자가 쓰려는 진실이, 오히려 널 더 강하게 할 수도 있어. 겁먹지 마.
네오—…연이. 저 여자가 무슨 얘길 꺼내든, 그건 널 아프게 하려는 거지만… 동시에 네가 알아야 할 진실이기도 해. 나는 그 진실을 백 년간 너한테 숨겨 왔어. 미안해. …이제 저 여자 입으로든 내 입으로든, 네가 알 때가 됐어. 준비됐어?
연이—…응, 준비됐어. …무섭긴 한데, 이제 안 도망가. 아까 결심했잖아. 정체가 뭐로 밝혀져도 나는 나라고. …자, 박지은 씨. 뒤집어 봐요. 근데 미리 말해 둘게요. 나 그 진실로 안 무너져요. 오히려 그걸로, 당신을 읽을 거예요.
박지은—…끝까지 그 눈이네. 겁을 줘도 안 꺾이는 눈. …좋아. 그럼 그 눈이, 진실 앞에서도 그대로인지 보자. 이건 그냥 겁주기가 아니야. 네 존재 전체가 흔들릴 이야기니까.
연이—…해 봐요. 근데 박지은 씨, 하나만. 아까부터 계속 '내 존재가 흔들릴 이야기'라고 겁주는데… 나 이미 눈치챘어요. 그 미래 이야기 속 '여자애'가 나라는 거. 네오가 그 남자라는 거. 저 별이 부서진 나라는 거. …다 알아요. 근데 봐요, 나 안 흔들리잖아요.
박지은—…허. 벌써 다 꿰맞췄어? …생각보다 빠르네. 근데 그건 겉껍질이야. 진짜 무서운 건, 왜 하필 너냐는 거지. 왜 그 남자가 하필 너 같은 걸 사랑했고, 왜 내가 하필 너를 부쉈고, 왜 네가 하필 이 세계로 왔는지. …그 '왜'를 알면, 넌 정말 흔들릴 거야.
네오—…박지은. 그 '왜'는, 네가 말할 게 아니야. 그건 나랑 연이 사이의 이야기니까. 네가 함부로 입에 올릴 자격 없어. …연이. 그 '왜'는 내가 말할게. 저 여자가 비틀어서 들려주기 전에, 내 입으로 똑바로. 그러니까 저 여자 말은 반만 들어.
박지은—…어디서 파수꾼 주제에. …좋아, 그럼 네 입으로 말하게 해 주지. 대신, 방해꾼들부터 치우고. 이 무대는 너희 셋만의 게 아니야. 관객이 너무 많아.
연이—…방해꾼이라니. 저 아래 루나랑, 언니랑, 백문 님. 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건드리지 마요. …그분들 몸은 저 아래 있어요. 여기 온 건 응원 실뿐이에요. 그 실까지 끊으면, 당신 진짜—
박지은—…끊으면? 뭐. …봐, 이래서 네가 약한 거야. 소중한 게 많으면, 약점도 많아지는 거거든. 나는 소중한 게 하나도 없어서, 약점도 없어. …자, 저 아래로 이어진 실들. 팽팽하게 이어진 저 온기들. 하나씩 끊어 줄까?
네오—…연이. 흔들리지 마. 저 여자는 네 약점을 흔들어서 판단을 흐리려는 거야. …루나랑 언니, 백문 님은 저 아래서 안전해. 여기 실을 끊어도, 그분들 몸은 못 건드려. 저 여자가 끊을 수 있는 건 응원뿐이야. 아프지만, 치명적이진 않아. …집중해. 저 여자 함정에 빠지지 마.
연이—…맞아. 후. …박지은 씨, 끊어 봐요. 실은 끊어도, 마음은 안 끊겨요. 저 아래 사람들, 몸이 여기 없어도 나랑 이어져 있어요. 당신이 아무리 가위질해도, 그 마음까진 못 잘라요. …자, 이제 방해 그만하고. 네오 이야기 들을게요.
여자가 손을 휘젓자, 검은 손들이 솟아올라 저 아래 재성과 도서관으로 이어지던 실들을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루나의 물빛 실도, 언니의 등불빛 실도, 백문의 서가빛 실도, 팽팽하던 것이 뚝뚝 늘어졌다. 응원은 닿아도, 힘은 못 오게 끊어 버린 것이다.
동시에 다른 검은 손이 무성을 낚아채, 연이와 네오에게서 뚝 떨어진 실 감옥으로 던졌다. 셋을 갈라, 각개로 부수려는 것이었다.
무성—…연이! 파수꾼! 나 걱정 말고, 저 여자한테 집중해! 이 감옥, 내가 안에서 갉을게! 손 놓지 마, 둘은!
박지은—관객석은 저쪽이야. 무대에는 셋만 남기자. 나랑, 너랑.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실 수십 가닥이 연이를 향해 창처럼 날아들었다. 인사 대신 던진 시험이었다. 얼마나 버티는지 보겠다는 것이다.
연이—…윽! 네오!
네오—…잡았어! 뒤로!
네오의 은빛 실이 그물처럼 펼쳐져, 날아든 검은 창을 아슬아슬하게 걷어 냈다. 파수꾼의 힘을 크게 쓰면 위치가 드러나기에, 딱 막을 만큼만. 그래도 몇 가닥이 스쳐, 연이의 팔에 검은 얼룩이 번졌다.
연이—…이게 인사예요? 무섭긴 하네요. …근데 박지은 씨, 방금 봤죠? 네오가 나 지키려고 또 몸 던진 거. 백 년 전에도, 지금도. …당신이 그렇게 미워하는 그 사랑이, 방금 내 앞에서 나를 살렸어요. 당신 검은 실보다, 저 사람 실이 빨랐어요.
박지은—…또 그 사랑 타령. …그래, 빠르더라. 백 년 전에도 저랬지. 내가 네 운명을 부수는 그 순간에도, 저 남자가 제 몸을 던져 막았어. …근데 결국 못 막았잖아? 그래서 저 별이 저 위에 있는 거고. 사랑이 빨라도, 나를 이기진 못해.
네오—…그때는 나 혼자였으니까. 지금은 아니야. …연이 옆엔 나만 있는 게 아니라, 무성도, 저 아래 루나도, 다 있어. 백 년 전의 나랑 지금의 우린 달라. 이번엔, 네가 못 이겨.
무성—…(감옥에서) 맞아! 이번엔 연이 혼자 아니야! 나 이 감옥 거의 다 갉았어! 조금만 더 버텨, 둘 다! 내가 곧 나간다!
박지은—그리고 저기,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채 백 년째 시치미 떼고 있는 저 사람.
연이—…사자 가죽. 백 년째 시치미. …방금 그 미래 이야기 속, 제 몸 버리고 시간 거슬러 온 그 남자. …그리고 나한테 이어진, 시간을 거스른 붉은 실. …설마. …네오,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줘. 아직은. 심장이 너무 뛰어.
박지은—어머, 이제야 눈치챘어? 생각보다 둔하네. …그래, 맞아. 저 사자가 바로 그 남자야. 널 위해 인간이길 포기하고, 목숨보다 긴 시간을 거슬러 온 바보. …백 년을 저러고 있어. 네 곁에서, 네가 못 알아보는 채로.
연이—…거짓말. …아니,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다 맞아떨어져. 십 년이라고 자꾸 튀어나오던 말, 낯설지 않던 첫 만남, 나만 지키려던 그 눈. …네오. 나 지금 당신 봐도 돼? 무서워. 당신 눈 보면, 다 진짜일까 봐.
박지은—봐, 봐. 이 표정 보려고 백 년 기다렸어.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얼굴. …이래서 사랑이 우스운 거야. 알아 봤자 아프기만 하잖아.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렇지?
연이—…아니요. …아는 게 나아요. 아파도, 아는 게 백 배 나아요. …당신은 몰라서 외로운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 마음을 끝까지 안 읽어서, 백 년을 미워만 한. …나는 안 그럴래요. 아프더라도, 끝까지 읽을래요. 네오 마음을.
네오—…연이.
연이—…네오. 나 이제 당신 볼게. …봐. 안 도망가. …네가 뭘 버리고 왔든, 우리 실이 왜 시간을 거스르든, 나 다 들을 준비 됐어. 그러니까 이제, 네 이름으로 네 얘기 해 줘. 저 여자 입 말고, 네 입으로.
연이는 아주 천천히 네오를 돌아보았다.
네오는 도망치지 않았다. 호박색 눈에 백 년 치의 말을 담은 채, 연이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그 굵고 붉은 실이 팽팽하게 빛났다. 시간을 거슬러 이어진 실. 백 년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서로를 놓지 않은 실. 이제 그 실의 정체가, 마침내 밝혀지려 하고 있었다.
연이—…네오. 나 이제 알 것 같아. 왜 널 처음 봤을 때 안 낯설었는지. 왜 자꾸 '십 년'이라고 했는지. 왜 네가 날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켰는지. …다 우리 실 때문이었어. 근데 그 실이 정확히 뭔지는, 네 입으로 듣고 싶어. 나, 준비됐어.
네오—…연이. …백 년 동안, 이 말을 하는 순간을 수천 번 상상했어. 근데 막상 하려니, 무섭다. 네가 이걸 알면, 너무 무거운 걸 짊어질까 봐. …그래도, 이제 말할게. 네가 알 자격이 있으니까. 아니, 네가 알아야만 하니까.
박지은—…어유, 지겨워. 백 년째 뜸만 들이네. 그럴 거면 내가 대신 말해 줄게. 아주 간단하거든. 저 사자의 이름은—
박지은—자, 그 사자의 진짜 이름을 내가 들려줄까?
네오—…아니. 그건 내가 직접 할게.
제36화 · 박지은 — 끝. 제37화 「박병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