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졌던 세계가 다시 펴졌을 때, 하늘에는 별 대신 실이 떠 있었다.
붉은 실이었다. 수억 가닥의 붉은 실이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흐르고 있었다. 굵은 실, 가는 실, 끊어진 실, 이제 막 이어진 실. 세상 모든 인연이 이곳에서는 눈에 보였다.
숙요의 세계. 스물여덟 별자리가 사람의 인연을 짜는, 거대한 인연의 베틀이었다.
발을 딛은 곳은 땅이 아니라, 촘촘히 짜인 붉은 실의 그물이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밑의 실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느슨해졌다. 누군가의 인연 위를 밟고 서 있는 셈이었다. 연이는 그 감각에, 자미두수의 명반을 걷던 때를 떠올렸다. 거기선 별을 밟았고, 여기선 인연을 밟았다.
연이—…악, 발 어디 디뎌야 돼! 밟을 때마다 누구 인연이 출렁거리잖아! …방금 내가 밟은 이 실, 누구 인연이지? 미안해요, 누구신진 몰라도 발자국 냈어요!
무성—…실은 밟아도 안 끊어져.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끊기면, 세상이 진작 텅 비었겠지. …발 편하게 디뎌. 이 실들은 백 년을 밟혀도 버틴 것들이야.
연이—…오, 무성이 갑자기 철학자 됐네? 봉인에서 나온 지 하루 만에 명언 제조기 됐어. …근데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하겠다. 얄미워.
네오—…저 녀석, 백 년간 남의 이야기만 삼켜서 아는 말은 많다. 쓸 데를 몰랐을 뿐이지.
무성—…파수꾼. 방금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아, 됐다. 백 년 만에 듣는 첫 대화가 너희라니. 복인지 벌인지 모르겠네.
연이—복이야, 무조건 복. 나 같은 명랑 넝쿨이랑, 저 무뚝뚝 은사자랑 한 팀이라니. 이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야. …자, 정신 차리고. 우리 여기 뭐 하러 왔지?
네오—…박지은을 만나러. 그리고 저 위 탑의, 시들어 가는 별을 구하러. …그러려면 먼저 이 세계를 읽어야 해. 연이, 네 특기잖아. …여긴 뭐가 보여?
연이—…음. 눈 감고 느껴 볼게. …아, 신기해. 실마다 온도가 달라. 따뜻한 실, 미지근한 실, 얼음장 같은 실. …그리고 소리도 나. 어떤 실은 웃음소리가 나고, 어떤 실은… 우는 소리가 나.
연이가 손을 뻗어 가까운 실 한 가닥에 살며시 손끝을 댔다. 그 순간, 실을 타고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 들어왔다. 마치 책을 읽듯이. 인연을 읽는 것, 그것도 연이의 본뜻 읽기의 한 갈래였다.
연이—…이 실은, 삼십 년 된 부부야. 매일 티격태격하는데, 실은 하나도 안 닳았어. 오히려 반질반질해. …아, 이 사람들 어제도 싸웠네. 근데 오늘 아침 같이 밥 먹었어. 실이 웃고 있어. …사랑은 안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우고도 안 놓는 거구나.
무성—…너, 실을 읽어? …나는 백 년간 이야기를 삼키기만 했지, 이렇게 다정하게 읽어 준 적은 없었어. …같은 실인데, 내가 만지면 삼켜지고 네가 만지면 살아나. …뭐가 다른 거지, 우리.
연이—…간단해, 무성. 넌 실을 '가지려고' 만졌고, 난 '알아주려고' 만졌어. 가지려는 손은 뺏고, 알아주려는 손은 살려. …이거, 저 위 박지은한테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야. 기억해 둬.
네오—…연이 말이 맞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이길 방법은 힘이 아니야. 박지은은 백 년치 힘을 가졌어. 우리가 이기려면, 저 여자가 못 하는 걸 해야 해. …읽어 주는 것. 알아주는 것. 저 여자가 백 년간 한 번도 못 받아 본 것.
연이—…오케이. 작전 접수. '박지은을 이기려면 두들겨 패지 말고 읽어 줘라.' …근데 솔직히, 두들겨 패는 게 더 쉬울 것 같은데. 읽어 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거든.
무성—…나를 읽어 줬잖아. 백 년 봉인을. …그러니까 저 여자도, 될지도 몰라. …아니. 나보다 백 배 두꺼울 거야, 저 여자 봉인은. 각오해.
연이—…백 배면 어때. 나 백문 님 백 년 묵은 계약서도 읽었고, 네 백 년 봉인도 읽었어. 이쯤 되면 백 년짜리는 내 전문 분야야. 백 년 전문 독서가 연이. 명함 파야겠다.
네오—…명함 팔 데가 없다. 여긴 붉은 실의 세계다.
연이—…아, 진짜 네오는 농담을 다큐로 받아. …됐어. 분위기 풀려고 한 거야. 다들 너무 비장해서. …자, 웃자. 웃는 얼굴로 들어가야 저 여자가 더 약 올라. 우린 이렇게 행복한데, 넌 왜 그러고 사냐 싶게.
무성—…그거 좋네. 저 여자, 남 행복한 거 제일 못 봐. 우리가 웃으면서 들어가면, 그것만으로도 한 방이야. …좋아. 그럼 나도 웃어 볼게. …이렇게? …어색하지? 백 년 만에 웃는 거라.
연이—…어색해도 예뻐, 무성. 백 년 만의 첫 웃음인데 그 정도면 잘한 거야. …자, 셋 다 웃는 얼굴. 준비됐지? 그럼 간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으로,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여자한테.
세 사람이 웃었다. 넝쿨의 밝은 웃음, 파수꾼의 옅은 미소, 그리고 백 년 만에 처음 웃는 그릇의 서툰 웃음. 붉은 실의 세계에, 오랜만에 따뜻한 온기 세 점이 켜졌다.
무성—…이상하다. 저 여자한테 가는 길인데, 안 무서워. 웃으니까, 진짜 안 무섭네. …이게 동료구나. 무서운 데를 웃으면서 갈 수 있게 해 주는 거.
네오—…그래. 그게 저 여자가 백 년간 못 가진 거고. …자, 온기 세 점. 저 얼음 궁을 녹이러 간다. …손, 놓지 마. 시작이다.
연이—…스물여덟 별자리. 이 하늘 곳곳에 별자리가 앉아서, 손으로 실을 짜고 있어. 한 별자리가 봄의 인연을, 한 별자리가 가을의 이별을. …근데 다들 지쳐 보여. 손은 움직이는데, 얼굴엔 빛이 없어. 억지로 실을 뽑는 사람들 같아.
네오—…원래 저 별자리들이 이 베틀의 주인이자 일꾼이었어. 즐겁게, 정성껏 인연을 짜던. …지금은 저 여자 밑에서 강제로 실을 뽑고 있지. 저 여자가 짤 실을, 별자리들이 대신 자아 바치는 거야. …봐, 별자리들 손목에도 검은 실이 감겨 있어. 다 묶여 있어.
연이—…다 갇혔네. 별자리도, 무성도, 저 부부도, 저 부녀도. …이 세계 전체가 한 사람 손아귀에 잡혀 있어. 근데 이상해. 이렇게 다 가졌는데, 왜 이 세계가 이렇게 춥지? 따뜻한 실이 이렇게 많은데, 공기는 얼음장이야.
무성—…가진 자가 안 따뜻하니까. 주인이 추우면, 세계도 추워. …저 여자는 이 많은 인연을 가졌는데도, 자기 실 하나가 안 이어져서 늘 추웠어. 그래서 이 세계 전체가 저 여자를 닮아 얼어붙은 거야. …봐. 저 검은 실들을. 저게 저 여자 마음의 색이야.
무성—…그분이 원래 여기 주인이었어. 인연을 짜는 분. 사람과 사람을 붉은 실로 이어 주는. …백 년 전, 그분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실을 짜던 분이었대. 봉인 속에서 다른 삼켜진 이야기들이 그렇게 말했어. …근데 지금은. …봐, 저 검은 실들을.
네오—…검은 실. 성한 인연 사이로 파고들면서, 멀쩡한 실까지 물들이고 있어. 사랑하던 사람들이 저 검은 실에 닿으면, 서로 미워하게 되는 거야. …인연을 짜던 자가, 인연을 썩히고 있어. …얼마나 아팠으면, 자기가 만든 걸 자기 손으로 부술까.
무성—…실이 하늘에 가득해. 저기 봐, 연이. 너랑 나 사이에도 방금 가느다란 실이 생겼어. 아까 이름 불러서 이어진 건가. …그리고 저 아래, 재성 쪽으로도 실이 뻗어 있어. 루나랑, 언니랑, 백문 님 쪽으로.
연이—…와, 진짜네. 저 아래 재성이랑 도서관으로 실이 이어져 있어. 몸은 저 아래 있어도, 마음은 이렇게 우리랑 이어져 있구나. …실이 안 끊겼어. 멀어도, 인연은 그대로야. …신기하다. 여긴 인연이 눈에 보이는 세계네.
연이—…봐, 이 물빛 감도는 실은 루나야. 성격처럼 맑고 시원해. 이 따뜻한 등불빛 실은 언니고. 이 두껍고 오래된 책 냄새 나는 실은… 백문 님. …다들 저 아래 있는데, 실은 여기까지 이렇게 또렷해. …나 혼자 온 거 아니었네. 다 데리고 왔네, 마음속에.
무성—…너, 실만 보고 누군지 다 알아? …나는 백 년을 여기 살았는데, 실을 그냥 '먹이'로만 봤어. 누구 실인지는 관심도 없었지. …근데 너는, 실 하나하나가 다 이름이 있구나. 얼굴이 있고.
연이—…당연하지. 실은 그냥 줄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이 줄 끝에 누가 웃고 있고, 누가 울고 있고, 누가 나 보고 싶어 하고. …그걸 잊으면, 딱 박지은 되는 거야. 사람을 줄로만 보면, 자르는 게 쉬워지거든. 사람으로 보면, 못 자르고.
네오—…맞아. 박지은의 첫 번째 잘못이 그거였어. 사람을 실로만 보기 시작한 것. 인연을 짜는 자가, 인연을 숫자로 세기 시작하면 끝이야. …저 여자는 세상에서 제일 인연을 잘 아는 자면서, 세상에서 제일 인연을 모르는 자가 됐어.
무성—…스물여덟 별자리. 각(角) 항(亢) 저(氐) 방(房)… 이 별자리들이 원래 이 베틀의 일꾼이었어. 사람 인연을 하나하나 정성껏 짜던. …근데 박지은이 주인이 되고부터, 별자리들도 지쳐서 하나둘 빛을 잃었지. 지금은 다 저 여자 밑에서 억지로 실을 뽑고 있어.
연이—…별자리들도 갇힌 거네. 무성 너처럼. …그럼 저 여자 하나만 풀면, 별자리도, 너도, 저 부부도, 저 부녀도, 다 같이 풀리는 거야? …와, 그럼 진짜 딱 한 매듭이네. 저 여자 마음속 그 발버둥 치는 붉은 실 하나. 그게 세상 전체 매듭이야.
네오—…말은 쉽지. 그 한 매듭이 세상에서 제일 단단해. 백 년을 굳은 매듭이니까. …근데 연이 너라면, 어쩌면. 넌 백문의 백 년 묵은 계약서도 읽어 낸 애잖아. …가자. 매듭 풀러.
연이—…좋아! 매듭 풀기 전문가 등판이요! 넝쿨은 원래 매듭을 좋아하거든. 감고, 풀고, 또 감고. …자, 심호흡 한 번 하고. 이 세계 진짜 예쁘다. 무섭지만, 예뻐. …다 구하고 나면, 여기 다시 놀러 오자. 셋이서.
네오—…숙요의 세계. 스물여덟 별자리가 사람 인연을 짜는 곳. …봐, 무성. 너랑 나 사이에도 실이 있어. 아주 오래되고 낡은 실이. 우리 둘 다, 백 년 전 저 여자한테 붙들려 도구로 쓰인 자들이니까. 같은 사람한테 부서진 인연은, 서로 알아보는 법이거든. …이 세계에선, 우리 셋의 진실이 실로 다 드러날 거야.
연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실들은 살아 있었다. 먼 곳에서 누가 웃으면 한 가닥이 따뜻하게 떨렸고, 어디선가 누가 등을 돌리면 다른 한 가닥이 툭, 소리도 없이 끊어졌다. 세상의 모든 만남과 이별이, 이 하늘에서 실시간으로 짜이고 또 풀리고 있었다.
연이—…저기 봐. 방금 새 실이 하나 태어났어. 반짝, 하고. …누가 지금 이 순간 누굴 처음 만났나 봐. 카페에서 우연히, 아니면 버스에서 어깨 스치고. …세상 어딘가에서 지금도 계속 인연이 태어나고 있어. 예쁘다, 진짜.
무성—…그리고 저기선 하나가 끊어졌어. 소리도 없이. …저건 뭐야? 누가 싸운 거야?
연이—…아니. 저건… 누가 떠난 거야. 싸운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거. …근데 봐, 무성. 끊어졌는데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어. 끝이 남은 쪽 손에 살며시 감겨 있어. …떠나도, 남은 사람 마음엔 실이 남는구나. 그래서 그리운 거고.
무성—…남은 실. …그럼 내가 백 년간 삼킨 그 수많은 이야기들도, 원래 주인 손엔 아직 끝이 남아 있으려나. …나는 그 사람들 실을 다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돌려줄 수 있는 걸까.
연이—…당연하지. 그게 우리가 여기 온 이유잖아. 네가 삼킨 이야기들, 다시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는 거. 끊긴 게 아니라 잠깐 맡아 둔 거였다고 하면 돼. …너, 백 년간 도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보관소였어. 이자 없는 착한 보관소.
무성—…보관소라니.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낫네. …백 년 도둑보다 백 년 보관소가 낫잖아. …좋아. 그럼 오늘부터 나는, 삼킨 걸 다 돌려주는 보관소야. 개업일이 하필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날이지만.
네오—…개업 축하한다. 첫 손님이 박지은이라 유감이지만. …가자. 네 보관소 물건들, 저 위 탑까지 다 돌려주러.
연이—…와, 네오가 농담했어! 이 세계 오길 잘했다. 은사자가 농담을 다 하고. …오늘 진짜 별일 다 있네. 무성이 울고, 네오가 웃고. 나 이 팀 너무 좋아.
그런데 한 가지가 이상했다. 유독 검게 그을린 실들이 보였다. 성한 실 사이를 파고들며, 멀쩡한 인연까지 시커멓게 물들이는 실이었다.
연이가 가장 가까운 검은 실에 손을 댔다. 그 순간 흘러든 이야기에, 연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뗐다. 방금까지 웃던 실과는 온도가 정반대였다. 그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 가는 소리였다.
연이—…이 실, 원래 자매였어. 서로 제일 아끼던 자매. 근데 어느 날부터 사소한 걸로 틀어지더니… 지금은 서로 얼굴도 안 봐. …근데 이상해. 이 미움, 두 사람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야. 밖에서, 누가 검은 걸 발라 놨어. 원래 없던 미움을, 억지로 심어 놨어.
무성—…그게 저 여자의 방식이야. 성한 인연을 골라, 아주 작은 오해 한 톨을 심어. 그럼 사람들이 알아서 그 오해를 키우지. 저 여자는 손 하나 안 대고, 멀쩡한 사랑 하나를 썩혀. …그리고 그 썩는 걸, 아주 즐겁게 구경해.
연이—…최악이다, 진짜. 자기가 안 아파 봤으면 몰라, 아파 봤으면서 남을 똑같이 아프게 하는 거잖아. …이건 실수가 아니라 취미야. 남 망가지는 걸 즐기는 거. …무성, 너 저 여자 밑에서 이런 거 백 년 봤어? 안 토할 것 같았어?
무성—…토할 것 같았지. 근데 나는 그릇이었잖아. 감정을 가지면 안 되는 도구. …그래서 삼켰어. 토할 것 같은 마음까지 전부. …너 만나기 전까진, 그게 잘못된 건지도 몰랐어. …지금은 알아. 저건, 잘못된 거야. 아주 많이.
네오—…봐. 저기 검은 실이 유독 굵게 뭉친 곳. 저기가 이 베틀의 중심이야. 박지은이 앉은 자리. 성한 실을 다 저리로 끌어당기고 있어. …우리가 가야 할 곳도 저기고, 저 위 탑으로 가는 길도 저길 지나야 해.
연이—…근데 잠깐. 저 검은 실 뭉치 한가운데, 유난히 발버둥 치는 실이 하나 있어. 검은 물이 덮으려는데, 필사적으로 안 물들려고 버티는 붉은 실. …저건 뭐지? 저렇게 저항하는 실은 처음 봐.
무성—…저건, 저 여자 자신의 실이야. …이상하지? 인연을 다 썩히는 자가, 정작 제 실 하나는 못 썩혀. 백 년을 발라도 안 물드는 붉은 실 하나. …저 여자 마음속에, 아직 안 죽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야.
연이—…안 죽은 무언가. …그거다, 네오. 아까 말한 '저 여자가 못 하는 것.' 저 발버둥 치는 붉은 실 하나가, 우리 열쇠야. 저 여자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증거. …그걸 붙잡으면, 어쩌면.
네오—…쉽지 않을 거야. 저 여자는 그 실을 제일 미워해. 자기 안의 그 붉은 실이, 자기가 얼마나 초라한지 계속 상기시키니까. …사람은, 자기가 못 가진 걸 제일 미워하거든. …가자. 중심으로 가면서, 이 세계를 더 읽어 두자. 많이 알수록 유리해.
세 사람은 실의 그물 위를 조심조심 나아갔다. 걸음마다 발밑에서 낯선 인연들이 이야기를 건넸다. 연이는 지나는 실마다 손끝을 대며, 무성에게 하나하나 읽어 주었다. 백 년간 삼키기만 한 그릇에게, 처음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연이—…무성, 이거 봐. 이 가느다란 실. 열일곱 살 두 애가 처음 손잡은 실이야. 아직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어깨만 스쳤는데 실이 벌써 분홍빛이야. …첫사랑 실은 가늘어도 제일 빛나. 아직 아무것도 안 줬는데, 벌써 다 주고 싶어서.
무성—…이렇게 가는데, 이렇게 밝아? …나는 굵고 오래된 실만 값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 애들, 아직 이름도 다 모르면서. 뭘 믿고 이렇게 환한 거야?
연이—…안 믿어서 환한 거야. 계산이 없으니까. 이 애들은 '이 사람이 나한테 뭘 해 줄까'를 안 따져. 그냥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 …사랑의 처음은 다 그래. 저 여자가 잃어버린 게, 바로 저거야. 계산 없이 환한 마음.
연이—…아, 이 실은 또 달라. 봐, 무성. 두 남자애 실인데 굵기가 아주 튼튼해. 이건 우정이야. 이십 년 친구. 서로 돈도 빌려주고, 싸우고, 또 술 사 주고. …사랑 실이랑 색이 좀 달라. 사랑은 붉은데, 우정은 좀 더 단단한 주홍빛이야.
무성—…우정도 실이 있어? …나는 사랑만 실인 줄 알았는데. …그럼 너랑 나 실은, 무슨 색이야? 사랑도 아니고, 그럼 우정인가?
연이—…봐 봐. 오, 우리 실은 연둣빛이 도네? 새싹 색. …이건 '이제 막 시작한 인연' 색이야. 앞으로 무슨 색이 될지 아직 안 정해진. 우정이 될 수도, 가족 같은 사이가 될 수도. …기대되지? 우리 실이 앞으로 무슨 색이 될지.
무성—…연둣빛. …새싹. …좋다. 백 년 검은 물만 보다가, 내 실이 연둣빛이라니. …나, 이 색 오래 보고 싶어. 그러니까 우리, 오늘 꼭 다 살아서 나가자. 이 실 무슨 색 되는지, 끝까지 보게.
네오—…저기 저 실도 봐. 아주 낡고 굵은데, 색이 바랬어. 오래된 노부부야. 한 명은 벌써 기억을 잃어 가는데, 실은 그대로 굵어. …기억이 흐려져도 인연은 안 흐려져. 몸이 잊어도, 실은 기억하거든. …저게, 사랑의 마지막 모습이야.
연이—…아, 저 실 보니까 눈물 나. 한 명이 다 잊었는데도, 매일 같은 사람 손을 잡아. 왜 잡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잡으면 편안해서. …그게 진짜 사랑이지. 이유를 잊어도 남는 거. …저 여자도 원래 저런 실을 짜던 사람이었다니, 더 슬프다.
무성—…계산 없이 환한 마음.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계산이었는데. 그릇으로 쓰이려고 만들어졌으니까. …나도 저런 실, 가질 수 있을까. 계산 없는 실.
연이—…이미 있잖아, 바보야. 너랑 나 실. 내가 너한테 뭐 바라고 이름 불러 줬냐? 그냥 네가 외로워 보여서 그런 거지. …그게 계산 없는 실이야. 네 첫 실이 하필 제일 좋은 종류라니, 너 운 좋다.
무성—…자꾸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눈, 뜨거워지잖아. 백 년간 안 울었는데, 너 만나고 벌써 세 번째야. …고장 났나 봐, 나.
네오—…고장 아니다. 그게 원래 정상이야. 백 년간 네가 비정상이었던 거고. …됐고, 저기. 저 실은 좀 다르다. 봐.
네오가 가리킨 곳에, 반쯤 끊어진 굵은 실 하나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검은 물이 물들인 것도 아닌데, 스스로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오래된 아픔의 냄새가 났다.
연이—…이건, 부모랑 자식 실이야. 아버지랑 딸. …십 년 전에 심하게 다퉜네. 서로 독한 말 하고, 그 뒤로 연락을 끊었어. …근데 이상해. 두 사람 다, 매일 이 실을 몰래 만지고 있어. 끊고 싶은데 못 끊어. 미운데 보고 싶은, 그런 실이야.
무성—…이런 실이 제일 아파 보여. 검은 물이 물들인 것도 아닌데, 자기가 자기를 끊으려 해. …저 여자가 손 안 대도, 사람들은 가끔 스스로 실을 끊더라. …왜지? 미운데 보고 싶으면, 그냥 이으면 되잖아.
연이—…먼저 손 내미는 게 무서워서 그래, 무성. 내가 이었는데 상대가 안 받으면, 더 아프니까. 그래서 다들 상대가 먼저 오길 기다리다가, 십 년이 가는 거야. …근데 우리, 이 실 살짝 도와줄까? 딱 한 톨만. 먼저 손 내밀 용기 한 톨.
무성—…내가 해 볼게. …아까 배웠으니까. 이 두 끝을, 억지로 붙이는 게 아니라… 아주 살짝, 서로 쪽으로 기울여만 놓는 거야. 나머진 두 사람이 하겠지. …이렇게?
무성이 늘어진 두 끝을 아주 조심스레, 서로를 향해 한 뼘씩 기울여 놓았다. 억지로 잇지 않았다. 그저 마주 볼 수 있게, 방향만 틀어 준 것이다. 실이 오랜만에 파르르, 온기를 되찾으며 떨렸다.
무성—…떨려. 이 실이. …좋아서 떠는 거야, 이거? …나 방금, 십 년 묵은 부녀를 마주 보게 했어. 억지로 안 붙이고. …이런 게, 잇는 거구나. 뺏는 거랑, 진짜 다르네.
저 멀리, 무성이 방향을 틀어 준 그 부녀 실이 서서히 밝아졌다. 어느 도시 어딘가에서, 십 년 만에 딸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참이었다. '아빠, 나야.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무성이 심어 준 용기 한 톨이, 십 년의 침묵을 깨뜨린 것이다.
연이—…봐, 무성! 저 딸이 방금 전화했어! 십 년 만에! 네가 심은 용기 한 톨이 저렇게 됐어! …이게 네 손이 한 거야. 백 년간 부순 손이, 십 년 침묵을 깼어. …너, 진짜 짜는 사람이야. 이제 아무도 너보고 도구라고 못 해.
무성—…내가. …내 손이 저걸. …백 년간 나는 내가 부수는 것밖에 못 하는 줄 알았는데. …고마워, 연이.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내 손이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줄 평생 몰랐을 거야. …이 손으로, 저 위에서 더 많이 이을게. 약속해.
네오—…무성. 지금 그 손, 저 위 박지은한테도 똑같이 써. 저 여자 안의 끊어진 실, 억지로 붙이지 말고 방향만 틀어 줘. 마주 보게만. …나머진 저 여자가 하게 두는 거야. 우리가 대신 이어 줄 순 없어. 마주 볼 용기만 주는 거지. 딱 오늘 배운 그거.
연이—…맞아. 우리가 저 여자 마음을 대신 이어 줄 순 없어. 저 여자가 직접 이어야 해. 우린 그냥, 저 여자가 백 년간 외면한 그 붉은 실 하나를, 다시 마주 보게 해 주는 거야. …쉽진 않겠지. 근데 방금 무성이 십 년을 깼잖아. 백 년이라고 못 깰 거 없어.
연이—…잘했어, 무성. 진짜 잘했어. …너 방금 인연을 짰어. 박지은이 백 년간 부수기만 한 걸, 넌 하루 만에 짓기 시작했어. …봐, 넌 그릇이 아니야. 넌… 짜는 사람이야. 무성(茂盛). 우거지게 하는 사람. 이름값 하네.
네오—…무성. 지금 그 감각, 잘 기억해 둬. 저 위에서 박지은을 넘으려면, 그 감각이 필요할 거야. …저 여자를 부수는 게 아니라, 저 여자 안의 끊어진 실을 마주 보게 하는 것. 그게 우리가 이기는 유일한 길이야.
연이—…자, 이제 좀 알겠다. 이 세계의 규칙. 끊긴 건 이을 수 있고, 물든 건 씻을 수 있고, 미운 건 원래 좋아했던 거다. …박지은도 결국 이 규칙 안에 있어. 아무리 대단해도, 저 여자도 한때 누굴 사랑한 사람이니까. …가자. 이제 진짜 만나러.
그때 연이가 하늘 한구석에서, 붉은 실의 바다 위로 솟은 검은 탑 하나를 발견했다. 자미두수의 궁에서 올려다보던 그 탑이, 이 세계에서도 똑같이 서 있었다. 두 세계는, 결국 하나의 진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이었다.
연이—…저 탑. 여기서도 보여. 꼭대기에 두 빛. 하나는 청록빛 소망이, 하나는… 시들어 가는 창백한 별. …네오, 여기서 보니까 더 확실해. 저 창백한 별한테서 뻗은 실이… 나한테 이어져 있어. 아주 가늘게. …저 별, 나랑 무슨 사이지?
네오—…그것도, 지금은 아니야. …다만 이것만. 저 별은 네 적이 아니야. 절대. 오히려 네가 지켜야 할 것에 가까워. …저 여자가 저 별을 왜 저렇게 가둬 뒀는지 알면, 넌 이 모든 이야기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저 별, 꼭 구해야 해.
무성—…저 별. 봉인 속에서 저 여자가 가끔 저 별을 보며 웃었어. 아주 만족스럽게. …자기가 부순 걸 전리품처럼 걸어 두고 흐뭇해하는, 그런 웃음. …근데 이상하게, 그 웃음 끝엔 늘 한숨이 붙었어. 가진 걸 보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사람의 한숨.
연이—…부순 걸 걸어 두고 흐뭇해하다가, 한숨. …무성, 그거 알아? 그게 제일 슬픈 종류의 사람이야. 뭘 가져도 안 채워지는 사람. 그래서 자꾸 더 가지려 하고, 더 부수고. …저 여자, 아마 백 년 동안 단 하루도 안 행복했을 거야.
무성—…맞아. 단 하루도. …봉인 속에서 나는 저 여자의 밤을 다 들었어. 낮엔 세상을 다 가진 회장님인데, 밤이면 늘 같은 말을 중얼거렸지. '왜 이렇게 텅 비었지. 이만큼 가졌는데 왜.' …그 말이, 백 년간 하루도 안 빠졌어.
연이—…이만큼 가졌는데 왜 텅 비었지. …그거, 답이 뻔한데. 사람이 사람으로 안 채워지는 걸, 물건이랑 시간으로 채우려 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부어도 밑 빠진 독인 거야. 사랑이 빠진 자리는, 사랑으로만 메워지는데.
네오—…연이. 방금 그 말, 저 여자 앞에서 그대로 해. …그게 저 여자를 가장 아프게 하고, 동시에 가장 살릴 수 있는 말이야. 백 년간 아무도 저 여자한테 그 말을 안 해 줬어. 다들 무서워서 도망쳤으니까. …넌 도망 안 치잖아. 그러니까 네가 해.
연이—…오케이. 접수. 근데 너무 겁주지 마. 안 그래도 심장 쫄깃한데. …자, 심호흡. 후우. …가자. 백 년 밑 빠진 독 아주머니, 우리가 그 독 바닥 메워 주러 왔다!
무성—…너 진짜 겁 없다. 백 년 만에 이렇게 저 여자한테 함부로 말하는 애는 네가 처음이야. …근데 이상하게, 네 옆에 있으니까 나도 안 무서워. …이게 실이 이어졌다는 건가.
네오—…그래. 그게 실이 이어진 거다. 무서움도 나눠지면 반이 돼. …자, 셋 다 손. …저 여자 앞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손 안 놓는다. 그게 첫 번째 규칙이야.
세 손이 포개졌다. 넝쿨의 손, 파수꾼의 손, 백 년 그릇의 손. 서로 다른 세 개의 힘이, 하나의 각오로 묶였다. 그리고 그 위로, 저 아래 재성에서 스민 루나의 물빛이 살며시 감돌았다. 넷째 손이었다.
연이—…들어가기 전에, 우리 한마디씩 하자. 왜 싸우는지. 무서울 때 떠올릴 이유 하나씩. …나 먼저. 나는… 이 세계 와서 처음으로 식구가 생겼어. 루나, 언니, 백문 님, 모카, 네오, 무성. 아무도 안 잃으려고 싸워. 그게 내 이유야.
네오—…나는. …백 년 전에, 한 번 지켜 주지 못한 게 있어. 그래서 시간까지 거슬러 왔지. …이번엔 지킬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게 내가 사자가 된 이유고, 여기 있는 이유야. …더는 말 못 해. 미안.
무성—…나는. …백 년간 이름도 없이 삼키기만 했는데, 너희가 이름을 돌려줬어. 무성. 우거지게 하는 자. …이제 나도, 뭔가를 지키고 싶어. 처음으로. …너희가 내 첫 지킬 것들이야. 그래서 싸워. 도구 아니라, 친구로서.
연이—…아, 무성. 그 말 반칙이야. 들어가기 전에 울리기 있어? …좋아. 이유 다 모였다. 식구, 지킴, 우정. …이 세 개면 충분해. 백 년 탐욕도, 이 세 개는 못 이겨. 가자!
네오—…그리고 하나 더. 저 아래 루나가 지금도 물길을 파고 있어. 언젠가 저 아이가 올라올 거야. 그때까지 우리가 버티면 돼. …우린 셋이 아니라 넷이고, 어쩌면 그보다 더 많아. 재성이, 도서관이, 다 우리 편이야. …자. 이제 진짜 간다.
저 아래 재성에서, 물의 아이 루나가 조약돌 너머로 이 각오를 들은 듯했다. 물빛 한 줄기가 실 그물 틈으로 한 뼘 더 깊이 스몄다. 아직은 닿지 못했지만, 분명 올라오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향해서.
무성—그분은 원래… 인연을 짜던 분이었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붉은 실을 이어 주던 분. 그런데 언제부턴가 잇는 대신 끊는 걸 즐기기 시작했지. 무엇이 그분을 그렇게 바꿔 놨는지는, 봉인 속에 있던 나도 끝내 몰랐어.
연이—…인연을 제일 예쁘게 짜던 사람이, 인연을 제일 잔인하게 끊는 사람이 됐다. …그거, 뭔가 있어. 사람이 그렇게 정반대로 뒤집힐 땐, 대개 자기 실이 먼저 끊긴 거야. 남의 실 끊는 사람은, 자기 실부터 크게 데인 사람이거든.
네오—…연이 말이 맞아. 나는… 그 이유를 조금 알아. 근데 그것도 지금은 못 말해. …다만 이것만. 저 여자가 처음 실을 끊은 건, 누군가한테 자기 실이 안 이어졌기 때문이야. 아무리 굵게 자아도, 상대가 안 받아 준 실 하나. …그게 시작이었어.
연이—…안 받아 준 실 하나. …아, 마음 아프다. 나도 알아, 그 기분. 내가 아무리 손 내밀어도 상대가 안 잡아 주면, 세상이 다 미워지지. …근데 대부분은 그러다 말잖아. 저 여자는 왜 그걸 백 년이나 키웠을까. 뭐가 그렇게 컸을까, 그 실이.
무성—…그 실이, 저 여자 인생 전부였나 봐. 다른 게 하나도 없었던 거지. 그거 하나 안 이어지니까, 세상 전체가 무너진 거야. …가진 게 그거 하나뿐인 사람은, 그걸 잃으면 괴물이 돼. 채울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연이—…그래서 세상 걸 다 긁어모으는 거구나. 그 하나가 빈 자리를, 다른 백만 개로 메우려고. …근데 백만 개로도 그 하나는 안 메워지지. 그래서 백 년째 텅 빈 거고. …하아. 미운데, 불쌍해. 이런 감정 처음이야. 악당이 불쌍하기는.
네오—…그 감정, 버리지 마. 그게 우리 무기니까. 저 여자를 미워하기만 하면 우린 저 여자를 못 이겨. 불쌍해할 줄 알아야, 저 여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증오는 문을 닫고, 연민은 문을 열거든.
무성—…너희 둘, 진짜 이상해. 적을 앞에 두고 불쌍하다는 얘기나 하고. …근데 이상하게, 그게 제일 강해 보여. 백 년간 저 여자를 이긴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는 벌써 저 여자 마음을 반쯤 읽었어. …나도, 그 편에 설래. 미워하는 편 말고, 읽어 주는 편.
연이—…근데 무성, 하나만 약속하자. 우리가 저 여자를 읽어 준다고 해서, 저 여자가 부순 걸 없던 일로 하자는 건 아니야. 불쌍한 거랑, 잘못한 거랑은 별개야. 저 여자는 사과해야 할 게 산더미야. …읽어 준다는 건, 봐준다는 게 아니라 제대로 마주 본다는 거야. 알지?
무성—…알아. 불쌍하다고 봐주는 거였으면, 나부터 못 참았을 거야. 저 여자가 나한테 한 짓 생각하면. …근데 마주 보는 거랑 미워하는 건 다르니까. 미워만 하면 저 여자 안이 안 보이지만, 마주 보면 보이잖아. …좋아. 봐주진 않되, 읽어는 준다. 접수.
네오—…그게 정확해. 저 여자는 벌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구원받아야 해. 둘 다야. 하나만 하면 반쪽이지. …백 년간 사람들은 저 여자를 벌하려고만 하다 다 삼켜졌어. 우리는 다르게 간다. 벌하되, 구한다. 어렵지만, 그게 유일하게 저 여자를 끝내는 길이야.
연이—…벌하되, 구한다. …좋아, 그게 오늘의 마지막 규칙이야. 하나, 손 놓지 말 것. 둘, 실을 믿을 것. 셋, 벌하되 구할 것. …이 세 개면 백 년 탐욕도 풀어. 자, 규칙 다 외웠지? 그럼 진짜 간다. 인연의 여자한테로.
무성—…규칙 세 개짜리 팀이라니. 백 년 만에 소속이 생겼네. 이름은 뭐로 하지? '실 잇는 넷'? …아, 넷째는 아직 안 왔지. 그럼 일단 '실 잇는 셋'. …촌스럽다. 그래도 좋아. 내 첫 소속이니까.
연이—…'실 잇는 셋' 좋은데? 나중에 루나 오면 '실 잇는 넷'으로 승격. 언니랑 백문 님 오면 '실 잇는 여섯'. …가다 보면 온 세상이 다 '실 잇는' 팀 될걸? 저 여자만 빼고. …아니다. 저 여자까지. 저 여자가 마지막 멤버야. 그게 우리 목표잖아. 자, 출발!
무성—…나한테도, 실이 있나.
연이—무성, 네 발밑에 방금 생긴 그 실, 나한테 이어져 있어. 아까 서로 이름 불러서 생긴 거야. …봐, 인연은 이렇게 눈에 보이게 생기는 거였어. 백 년 외톨이한테, 이제 실이 생겼네.
무성—…그런 건 소리 내서 말하지 마라. 민망하니까. …근데. …고마워. 내 첫 실이, 너랑 이어진 거라서.
연이—…어? 방금 무성이 '고마워' 했어? 네오, 들었지? 증인. 나중에 딴말 못 하게 해. …무성, 한 번 더 해 봐. 녹음할게. …아, 녹음기 없지. 아무튼 마음에 녹음했어.
무성—…한 번만 더 놀리면 이 실 도로 끊는다. …못 끊지만. …아, 못 끊어서 분하네. 이어진 실은 내 마음대로 안 끊긴다더니, 진짜였어.
네오—…끊고 싶어도 못 끊는 게 인연이다. 그게 저 여자가 백 년을 이 악물어도 못 이긴 이유고. …잘 배워 둬, 무성. 이제 넌 삼키는 자가 아니라, 잇는 자가 될 거니까.
무성—…잇는 자. …나는 평생 삼키는 것밖에 몰랐는데. …할 수 있을까. 나 같은 게, 남을 이어 주는 걸.
연이—…이미 했잖아. 너랑 나, 방금 이었어. 삼키던 손으로. …봐, 무성. 삼키는 손이랑 잇는 손은 같은 손이야. 방향만 반대일 뿐. 너, 이미 방향 바꿨어. …자, 연습. 저기 끊어지려는 실 하나 보이지? 살짝 이어 봐. 뺏지 말고, 건네줘.
무성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끊어지기 직전의 가느다란 실 두 끝을, 백 년간 삼키기만 하던 그 손이 처음으로 살며시 맞대었다. 잠깐 실이 파르르 떨더니, 두 끝이 스르륵 다시 이어졌다. 무성이 제 손을 믿기지 않는 듯 내려다보았다.
무성—…이어졌어. …내가, 이었어. 삼키지 않고.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내 손이 뭔가를 안 부쉈어. …이상해. 삼켰을 땐 배가 불렀는데, 이으니까… 마음이 부르네.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연이—…거봐. 그게 진짜 배부른 거야. 삼킨 건 곧 허기지는데, 이은 건 계속 따뜻해. …너 방금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걸 배웠어, 무성. 박지은이 백 년간 못 배운 거.
그때, 연이의 손목에 감긴 물 조약돌이 다시 은은하게 데워졌다. 저 아래 재성에서, 루나가 보내는 신호였다. 조약돌에서 흘러나온 물빛 한 줄기가, 발밑 실 그물 사이로 스며 어딘가로 흘러갔다. 마치 길을 내듯이.
연이—…어? 루나 조약돌이 반응해. …물빛이 실 사이로 흘러 들어가네. …루나가 뭔가 준비하고 있어. 재성에서 여기까지, 물길로 이으려는 건가? …설마, 루나가 이 위까지 올라오려고?
네오—…물은 어디로든 흐르지. 별길로는 못 올라와도, 실 사이 틈으로는 스밀 수 있어. …루나가 물의 길을 찾고 있는 거야.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저 아이가 나타날 거다. 물이 되어서. …기억해 둬, 연이. 우린 셋이 아니라, 아직 더 있어.
세 사람이 옅게 웃었다. 연이도 따라 웃다가, 문득 제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연이의 손가락에서 시작된 실은, 하늘의 그 어떤 실보다 굵고 붉었다. 그 실은 곧장 네오에게 이어져 있었다. 거기까지는, 심장이 뛰긴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연이—(…나랑 네오 실이 이렇게 굵어? …하긴, 재성에서부터 계속 같이 다녔으니까. 뭐, 이건 그냥 동료 실인 거지. …근데 왜 이렇게 밧줄처럼 굵어. 다른 실들은 다 실 굵기인데. …아 몰라. 얼굴 왜 뜨겁지.)
문제는 반대쪽 끝이었다. 실은 네오를 관통하듯 지나, 지평선 너머 하늘의 틈새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세계 어디도 아닌 곳, 아직 오지 않은 곳을 향해서.
연이—…어? 근데 이 실, 네오한테서 안 끝나. 네오를 지나서, 저 하늘 밖으로 계속 이어져. …저긴 아무것도 없는데. 세계 끝인데. …왜 내 실이 세계 밖으로 나가지? 인연은 사람이랑 사람 사이에 있는 거 아니야? 저 밖에, 대체 누가 있는 거야?
연이—네오. 우리 실, 왜 하늘 밖으로 이어져 있어? 저긴 아무것도 없잖아.
네오—…실이 낡아서 길이 좀 어긋났나 보지.
연이—또 그 얼버무리는 말투. 십 년 봤으면 이제 안 속아.
연이—(…근데 방금, 나 왜 '십 년'이라고 했지. 네오랑 안 지 몇 달밖에 안 됐는데.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왔어. '십 년 봤으면'이라고. …마치 진짜로 십 년을 본 것처럼. …이상해. 이 사람 앞에서만, 자꾸 기억에 없는 세월이 튀어나와.)
네오—…방금 '십 년'이라고 했지.
연이—…어? 어, 그냥 관용구야. '오래 봤으면'이란 뜻으로. …왜, 뭐 문제 있어? 표정이 왜 그래. 너 방금 완전 울 것 같았어.
네오—…아니. 아무것도. …그냥, 네가 가끔 그렇게 없는 세월을 툭 뱉을 때가 있어서. …관용구 맞아.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네오의 눈은 관용구를 들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무언가가, 상대의 무심한 한마디에서 잠깐 되살아난 사람의 눈이었다. 연이는 그 눈을 봤지만,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무성—…(저 둘, 진짜 답답하네. 실은 저렇게 굵게 이어져서 서로 다 아는데, 입으론 서로 모른 척. …백 년 봉인보다 저 둘 사이가 더 꽉 막혔어. 누가 좀 뚫어 줘야 하는 거 아냐?)
무성—…저 실은 시간을 거슬러 이어져 있어. 봉인 속에서 그분이 늘 저주하던 실이야. '과거로 도망친 실'이라고, 이를 갈면서 불렀지.
연이가 네오를 돌아보았다. 네오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 참아 온 사람의 눈으로, 조용히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연이—…과거로 도망친 실. 시간을 거슬러 이어진 실. …네오. 그 실 끝이 너야. 그리고 네오 너머, 아직 오지 않은 시간까지 이어져 있어. …네오. 너, 미래에서 왔어? 그 하늘 밖,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서?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사람이… 나야?
네오—…연이. 그 얘긴, 지금이 아니야.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제일 먼저 너한테 말할게. 약속했잖아. 근데 지금은 아니야. 저 여자 앞에서 이 얘길 꺼내면, 넌 위험해져. …그러니까 지금은, 그 실 못 본 척해 줘. 부탁이야.
연이—…알겠어. 안 물을게. 근데 네오. 하나만. …그 실이 나랑 너를 잇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는 확실하지? 아무리 이상한 방향이어도,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건 진짜지? …그럼 됐어. 나머진, 네가 말할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
무성—…파수꾼. 나는 네가 왜 그 밤에 인간의 몸을 버렸는지, 왜 사자가 됐는지, 봉인 속에서 어렴풋이 봤어. …전부 저 아이 하나 때문이더라. …저런 실은, 세상에 흔치 않아. 목숨보다, 시간보다 무거운 실. …저 여자가 왜 저 실을 그렇게 저주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 부러운 거야. 저 실이.
네오—…무성. 입.
무성—…어라. 파수꾼이 당황했어. 백 년 전에도 저 표정이었나? …됐어, 안 말할게. 근데 파수꾼, 하나만. 저 아이 앞에서 그렇게 얼버무리는 거, 저 아이가 다 눈치챘어. 안 속고 있어. 그냥 널 기다려 주는 거야. …그게 얼마나 큰 다정인지, 넌 알아야 해.
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연이를 잇는 그 붉은 실을, 아주 잠깐 손끝으로 매만졌다. 백 년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지켜 온 실이었다. 그 손짓에는 말로 못 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연이—(…저 손. …네오, 방금 내 실 만졌지. 내가 못 본 줄 알고. …다 봤어. …그리고 그 손이, 엄청 소중하게 만졌어. 깨질까 봐 조심하는 것처럼. …나, 저 사람한테 뭐였던 걸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서.)
연이—(…이상하다. 네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낯설지가 않았어. 재성에서 처음 만난 은빛 고양이인데, 왜 오래 알던 사람 같았지. …이 실 때문이었나. 시간을 거슬러 이어진, 우리 둘만의 실. …기억은 없는데, 실은 기억하고 있었나 봐.)
무성—…연이. 저 실, 무서워하지 마. …나는 봉인에서 별별 실을 다 봤는데, 저렇게 시간을 거슬러서까지 안 놓은 실은 딱 하나 봤어. 네 거. …그건 저주가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약속이야. 누가 널 위해서, 시간까지 거슬러 왔다는 뜻이니까.
연이—…시간까지 거슬러서. …누가, 나 하나 때문에. …무성, 나 왜 눈물 나지. 기억도 안 나는 일인데. …근데 이 실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자꾸 저릿해. 아주 오래된 그리움 같은 게, 여기 있어.
네오—…연이. 울지 마.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고, 아무것도 안 잃었어. 그 실은 지금도 이어져 있잖아. …내가 약속할게. 이번엔, 절대 그 실 안 끊기게 할 거야. 저 여자가 백 번을 자르려 들어도. …그러니까 지금은, 앞만 봐. 저 여자한테.
연이—…응. …고마워, 네오. 뭔지 다 몰라도, 네가 날 지키려 한다는 건 알겠어. …근데 이번엔 나도 너 지킬 거야. 일방적으로 지켜지는 거 싫어. 우리 실은 한쪽이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양쪽이 같이 잡고 있는 거니까. …자, 가자. 인연 짜는 여자, 얼굴 좀 보자.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발밑 그물이 병들어 갔다. 성한 실이 줄고 검게 그을린 실이 늘었다. 걸음마다 검은 실이 발목을 감으려 스멀거렸다.
연이—…발밑 조심해. 검은 실이 발목 잡으려고 해. …이거 밟으면 어떻게 돼? 갑자기 네오가 꼴 보기 싫어지고 그러는 거 아니지?
네오—…밟지 마. 저건 원한을 주입하는 실이야. 밟으면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없던 미움이 생겨. …저 여자가 우리 셋을 갈라놓으려고 깔아 둔 거지. 서로 미워하게 만들어서, 손 놓게 하려고.
무성—…이게 저 여자의 진짜 무기야. 힘으로 안 이기면, 사이를 갈라. 백 년간 나한테도 그랬어. 봉인 속 다른 이야기들이 나랑 친해지려 하면, 검은 실로 그 사이를 끊었지. …그래서 나는 백 년을 외톨이였어. 저 여자가, 내가 누구랑도 못 잇게 만들었으니까.
연이—…진짜 나쁜 여자다. 자기가 외로우니까 남도 다 외롭게 만드는 거야. …무성, 걱정 마. 여기선 안 통해. 우리 셋 실은, 검은 거 밟아도 안 끊겨. 우리는 서로 왜 좋은지 아니까. 오해 한 톨로 흔들릴 사이가 아니거든.
네오—…그래도 방심은 마. 저 여자는 없던 기억도 만들어. 밟으면 '얘가 나한테 나쁘게 했던 것 같은' 가짜 기억이 스며. 그럴 땐, 기억을 믿지 말고 실을 믿어. 우리가 함께 쌓은 실을. …알겠지, 연이? 무슨 일이 있어도 실을 믿어.
연이—…응. 실을 믿는다. 기억이 흔들려도, 우리 실은 여기 이렇게 굵게 있으니까. …근데 네오. 나 방금 내 실 또 봤는데, 저 탑의 창백한 별한테로 가는 가는 실 말고… 하나가 더 있어. 아주 희미한 실이, 저 검은 중심 쪽으로도 이어져 있어. …나, 박지은이랑도 실이 있어?
네오—…! …봤구나, 그것도. …연이. 그 실은… 미움도 사랑도 아닌, 아주 오래된 실이야. 좋게도 나쁘게도 못 말할. …그 실이 왜 있는지도, 저 위에서 다 밝혀질 거야. 지금은 그저, 그 실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 넌 저 여자와도,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어.
연이—…미움도 사랑도 아닌 오래된 실. …점점 더 미궁이네. 나 정체가 대체 뭐길래, 미래인이랑도 실, 탑의 별이랑도 실, 저 악당 여자랑도 실이야. …됐어. 안 물을게. 대신 저 여자 만나면, 내가 직접 물어볼 거야. 나랑 당신, 무슨 사이냐고. 얼굴 보고.
연이—…겁나지. 근데 나 이미 꽃돼지도 됐다가 사람도 됐다가 다 해 봤어. 정체가 뭐로 밝혀져도, 나는 나야. 삼각김밥 좋아하고, 친구 잘 챙기고, 매듭 잘 푸는 연이. …그건 어떤 진실도 못 바꿔. 자, 가자. 정체 밝히러, 그리고 다 구하러.
세 사람이 검은 실 뭉치가 소용돌이치는 베틀 중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디선가 나른하고 즐거운 목소리가 실을 타고 흘러왔다.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지은—「어머, 손님들이 벌써 여기까지. …근데 얘, 아까 그 부부 실 참 예쁘게도 읽더라. 삼십 년을 안 놓은 실. …그렇게 애틋하면, 내가 좀 만져 보고 싶어지잖아.」
연이—…! 아까 그 부부 실. 저 여자가 지금 그걸… 안 돼! 네오, 무성! 저기, 그 반질반질하던 실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어!
멀리, 연이가 다정하게 읽어 주었던 그 삼십 년 부부의 붉은 실 위로, 검은 물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저 재미 삼아, 손님들이 아끼는 걸 눈앞에서 부수는 것. 그것이 박지은의 첫인사였다.
박지은—「봐. 삼십 년 사랑도, 오해 한 톨이면 이렇게 돼. …내일 아침이면 저 부부, 서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거야. 아무 이유도 없이. …재밌지 않아? 사랑이란 게, 이렇게 허술하다는 거.」
연이—…허술한 게 아니라, 당신이 비겁한 거예요! 멀쩡한 걸 뒤에서 찌르는 게 무슨 힘이야! …네오, 저 검은 물 끊을 수 있어? 무성, 넌 이을 수 있지? 나는 그 부부 진짜 마음 읽어서 붙잡을게! 셋이 같이 가자!
네오—…간다. 검은 실 뿌리부터. …이런 건, 백 년 전에도 지겹게 봤어. 남의 사랑을 장난감으로 아는 손. …이번엔 안 놔둔다.
네오의 손끝에서 은빛 실이 뻗어, 부부의 실에 파고든 검은 물의 뿌리를 정확히 겨눴다. 파수꾼의 힘. 다만 이번엔 크게 쓰지 않고, 실낱같이 가늘게. 박지은에게 위치를 들키지 않을 만큼만.
연이—…무성! 네오가 검은 뿌리 끊으면, 그 자리에 바로 이어! 끊긴 채로 두면 부부 사이가 텅 비어서 더 위험해! 끊는 즉시 다시 잇는 거야! 호흡 맞춰!
무성—…알았어. 백 년간 삼키기만 하던 손이지만, 아까 한 번 이어 봤으니까. …파수꾼, 신호 줘. 네가 끊는 순간, 내가 잇는다. …틀리면, 이 부부 사이 영영 못 메워. 실수 안 해.
네오의 은빛 실이 검은 뿌리를 툭, 끊었다. 그 찰나의 빈틈으로 미움이 쏟아지려는 순간, 무성의 손이 번개같이 두 붉은 끝을 맞대었다. 삼키던 손과 끊는 손이, 처음으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완벽하게 맞물렸다.
연이—…그리고 나! 아저씨, 아주머니. 두 분 삼십 년 실 제가 읽었어요. 어제 싸우고도 오늘 같이 밥 먹은 거. …그 마음, 오해 한 톨한테 안 져요. 기억하세요. 두 분은 서로를, 이유 없이도 안 놓는 사람들이에요!
연이의 목소리가 실을 타고 부부에게 흘러갔다. 그 순간, 검게 물들려던 실이 다시 붉게 반질거리며 살아났다. 세 사람의 손이, 박지은의 첫 장난을 정확히 되받아친 것이다. 저 아래에서 스민 루나의 물빛 한 줄기가, 남은 검은 얼룩을 말갛게 씻어 내렸다.
연이—…봤죠? 우리 넷이에요. 나, 네오, 무성, 그리고 저 아래 루나까지. …당신이 뒤에서 하나 자를 때마다, 우리가 앞에서 하나 이을 거예요. 그러니까 헛수고 그만하고, 얼굴이나 보여 줘요, 박지은 씨!
박지은—「…호오. 끊자마자 잇네. 그것도 셋이 아주 손발 척척. …백 년 만이야, 내 장난을 되받은 건. …재밌어졌어. 진심으로. …그래, 얼굴 보여 줄게. 이렇게 재밌는 손님들은, 제대로 대접해야지.」
연이—…방금 봤어? 우리 셋, 처음인데 완벽했어. 네오가 끊고, 무성이 잇고, 내가 붙잡고. …이거, 연습도 안 했는데. …이게 진짜 팀이구나. 서로 뭘 할지 말 안 해도 아는 거.
무성—…나, 방금 도움이 됐지? 백 년간 부수기만 했는데, 방금은 살리는 데 손을 보탰어. …이런 기분, 처음이야. 내가 누군가한테 필요한 사람이라는 거. …너희 덕분이야. 나를 도구가 아니라 동료로 써 줘서.
네오—…동료 맞아. 아까 그 호흡, 아무나 못 맞춰. 넌 이미 우리 셋째야. …다만 방심은 마. 저 여자가 방금 건 건 장난이야. 진짜는 이제부터고. 저 여자가 얼굴을 보이겠다는 건, 슬슬 진심으로 우릴 부수기 시작하겠다는 뜻이니까.
연이—…알아. 근데 방금 그 한 번으로 나 확신했어. 우리, 이길 수 있어. 힘으론 못 이겨도, 이렇게 계속 이으면 돼. 저 여자가 하나 끊을 때마다 우리가 하나 이으면, 결국 세상은 이어진 쪽이 이겨. …자, 온다. 손 놓지 마.
연이와 네오를 잇는 그 굵고 붉은 실이, 두 세계와 시간을 가로질러 팽팽히 빛났다. 그리고 그 광경 위로, 하늘을 채운 다른 모든 실들이 갑자기 일제히 팽팽해졌다. 누군가, 이 인연의 베틀 앞에 앉은 것이다.
박지은—구경은 끝났어? 어서 와, 스물여덟 별자리의 베틀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이야. 여기선 자르고 싶은 실이 전부 다 보이거든.
제35화 · 붉은 실의 세계 — 끝. 제36화 「박지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