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에 매달린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남의 손에 끌리듯 어색하게 움직였다.
방금까지 마음을 열고 이름을 되찾으려던 아이가, 여자의 실 한 번에 다시 인형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백 년 전과 달랐다. 그 인형의 눈 깊은 곳에서, 보랏빛 한 점이 여전히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으니까. 되찾은 이름과 우정이, 여자의 명령에 맞서 버티고 있었다.
연이—…무성! 봐, 네 눈 아직 살아 있어! 그 여자가 실을 당겨도, 방금 네가 고른 선택은 안 지워졌어! …나 안 도망가. 아까 약속했잖아. 널 그 실에서 꺼낸다고. 지금 지킬게. 조금만 버텨!
검은 물이 폭주해 열두 궁을 집어삼켰다. 별 감옥의 빛마저 어두워졌다. 인형이 된 그릇은 강했다. 봉인돼 있던 힘이 밑 빠진 독처럼 쏟아졌으니까.
조금 전까지 힘을 다 쏟고 텅 비었던 무성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실이 봉인을 강제로 열자, 그 텅 빈 그릇으로 박지은의 백 년치 힘이 통째로 부어졌다. 무성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여자의 힘. 그래서 방금 연이가 이긴 무성보다, 지금 이 인형이 훨씬 강했다.
연이—…이건 무성이 아니야. 무성 몸에 그 여자 힘을 통째로 부은 거야. …방금 이긴 상대랑 차원이 달라. 이건 박지은 본체나 다름없어. …근데 그래서, 오히려 방법이 보여. 힘은 그 여자 건데, 몸은 무성이잖아. 몸을 되찾으면, 그 여자 힘은 쏟을 그릇을 잃어.
네오—…그릇을 비운다. 무성을 되찾으면, 저 힘은 담길 데가 없어서 물러난다는 거지. …좋아. 그럼 우리 목표는 저 힘을 이기는 게 아니라, 무성을 꺼내는 거야. 힘 대결이 아니라, 사람 구출. …그거라면, 승산 있어.
연이—…맞아. 저 검은 물 창을 다 막을 필요 없어. 그냥 무성 하나만 저 실에서 빼내면 돼. 그럼 이 폭주도 저절로 멈춰. …네오, 넌 실을 끊어. 나는 무성 마음을 붙잡을게. 저 애가 자기 이름 되찾게. …이건 싸움이 아니라, 구조야. 우리 특기잖아.
검은 물의 창이 다시 쏟아졌다. 연이는 이번엔 넝쿨로 정면을 막는 대신, 그 창 사이를 파고들어 무성에게 다가갔다. 맞서는 게 아니라, 다가가는 것. 그것이 이 잔인한 인형극을 끝낼 유일한 길이었다.
무성—…오지 마! 위험해! 이 손이 널 삼킬 거야! …나한테 오지 말라고! …아니, 와. 와 줘. 제발. 나 혼자 이 실 못 이겨. 와서, 나 좀 꺼내 줘. …모순이야. 오지 말라면서, 와 달라고. …근데 진심은, 와 달라는 거야. 연이, 와 줘.
연이—…간다, 무성. 네 진심은 '와 줘'라는 거, 나 알아. 오지 말라는 건 무서워서 그런 거고. …근데 나 안 무서워. 네 손이 나 겨눠도, 그건 네가 아니니까. …자, 이 검은 창 사이로, 나 지금 너한테 가.
연이가 검은 물의 창밭 사이로 몸을 던졌다. 창이 옷깃을 찢고 뺨을 스쳤지만, 연이는 멈추지 않았다. 넝쿨로 몸을 감싸고, 뿌리로 발을 딛으며, 한 걸음씩 무성에게 다가갔다. 백 년의 주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에게 조종당하는 한 아이를 향해서.
네오—연이가 파고들었어! 나는 실을 끊는다! 연이, 네가 저 애 손 닿는 거리까지 가면, 그때 이름을 꺼내! 나머지 실은 내가 전부 붙들게! …가! 조금만 더!
인형이 된 무성이 손을 뻗자 검은 물이 창이 되어 연이에게 쏟아졌다. 소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는데, 손만은 남의 명령대로 정확히 움직였다. 제 몸으로 제 친구를 겨누는,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인형극이었다.
무성—크윽… 피해! 이 손 내 손 아니야! 멈추라고, 멈춰! 그분, 제발 이것만은…!
검은 물의 창이 연이의 뺨을 스쳤다. 아슬아슬했다. 인형이 된 무성의 힘은, 방금까지 눈물 흘리던 소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셌다. 봉인이 풀린 그릇에서, 박지은의 백 년치 힘이 통째로 쏟아지고 있었다.
연이—윽…! 무성, 나 안 다쳤어! 근데 봐, 네 눈은 나 안 보고 있어. 딴 데를 봐. 네 손이 나를 겨눠도, 네 마음은 아니라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나 안 피해. 너 믿으니까!
연이—무성! 정신 차려! 너 지금 우는 얼굴로 공격하고 있잖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광경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멈춰, 미안해'라고 울부짖는데, 그 손은 여자의 명령대로 정확히 친구를 겨눴다. 마음과 몸이 갈가리 찢긴 채, 무성은 제 의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제 몸과 싸우고 있었다.
네오—연이, 뒤로! 저 힘 지금 절정이야! 봉인 풀린 그릇은, 무성 본인 힘의 몇 배야! …저건 무성이 아니라 박지은이 무성 몸을 빌려 휘두르는 거야! 정면으로 받지 마!
검은 물이 열두 궁을 통째로 삼키며 차올랐다. 방금 다시 켜지던 별들이 하나둘 도로 꺼졌다. 인형이 된 무성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명반 전체가 검은 바다로 뒤덮였다. 연이와 네오는 점점 좁아지는 별빛의 섬 위로 몰렸다.
연이—…밀린다. 이 힘, 방금 이긴 무성이랑 차원이 달라. …근데 네오, 무서운 건 힘이 아니야. 저 애 얼굴이야. 박지은 힘에 조종당하면서도, '미안해, 멈춰'라고 울고 있어. …저 애 저러다 부서져. 마음이랑 몸이 갈라져서. …빨리 꺼내야 해. 힘으로 이기려 말고, 저 애를 저 실에서 빼내야 해.
네오—…맞아. 시간 끌면 무성이 먼저 무너져. 마음이랑 몸이 백 년 만에 다시 찢기고 있으니까. …연이, 서두르자. 저 검은 물 다 막을 필요 없어. 무성 하나만 빼내면 이 폭주도 끝나. …내가 길 낼게. 넌 저 애한테 가.
네오—금선. 실을 겨눈다!
네오의 백금 실이 검붉은 실과 얽혔다. 이번엔 물을 베는 게 아니라, 소년을 조종하는 실만 골라 노렸다. 실과 실의, 한 치 싸움이었다.
백금 실과 검붉은 실이 허공에서 얽혔다. 네오는 무성의 몸이 아니라, 그 몸을 조종하는 실만 골라 겨눴다. 한 올 한 올, 정확하게. 백 년을 벼린 파수꾼의 손끝이, 이 순간 살상이 아니라 해방을 위해 움직였다.
박지은의 실은 세계의 실이었고, 네오의 실은 한 사람의 것이었다. 수로 밀리는 싸움이었다. 그래도 네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실 한 가닥이 끊길 때마다, 무성의 팔이 반 뼘씩 자유로워졌으니까.
네오—…끊긴다. 한 가닥씩. …젠장, 근데 끊는 족족 두 가닥이 새로 자라. 세계의 실이라 무한이야. …이대로면 내가 먼저 지쳐. 근데 상관없어. 내가 한 올이라도 더 끊으면, 무성이 한 마디라도 더 자유로워지니까.
네오의 이마에 핏방울 같은 땀이 맺혔다. 백금 실을 쥔 손이 검붉은 실에 베여 갔다. 세계 전체를 상대로, 한 사람이 실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승산 없는 싸움이었지만, 네오의 눈에는 물러섬이 없었다. 친구를 위한 싸움이었으니까.
무성—…파수꾼. 그만해. 너 다쳐. 세계의 실을 어떻게 이겨. …나 하나 때문에, 너까지. …그냥 날 두고 가. 나는 어차피 도구야. 그릇이야. …크윽, 아니. 아니야. 나 도구 아니야. 무성이야. …근데 몸이, 몸이 말을 안 들어!
연이—무성! 너 방금 '나 도구 아니야, 무성이야'라고 했어! 그거야! 그 마음 붙잡아! …네 몸이 말을 안 들어도, 네 마음은 이미 실을 이기고 있어! 몸보다 마음이 먼저야! …계속 말해! '나는 무성이다'라고! 그 말이 실을 녹여!
무성—…나는… 나는 무성이야! 도구 아니야! 삼키는 새 아니야! …나는 무성이라고! 크윽…! …이 손, 연이 안 삼켜! 안 삼킨다고! 나는… 내가 정한다! 내 손은, 내 거야!
소년이 절규할 때마다, 검붉은 실 몇 가닥이 스스로 느슨해졌다. 마음이 실을 밀어내고 있었다. 네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금 실로 걷어 냈고, 연이는 그 순간을 위해 뿌리를 준비했다. 셋의 호흡이, 마지막 한 수를 향해 모였다.
네오—연이! 지금이야! 저 애 마음이 실을 절반이나 밀어냈어! 나머지는 내가 끊을게! 너는 저 애의 진짜 마음을, 그 봉인 제일 깊은 데 잠든 그 소원을 꺼내! 그게 마지막 실을 끊을 열쇠야!
연이—…응! 무성, 아까 별빛으로 봤어. 네가 제일 깊이 숨긴 거. 백 년간 나조차 안 보려던 그거. …이제 그걸 꺼낼 거야. 그게 네 진짜 마음이고, 그게 이 실을 이겨. …준비됐지? 아플 수도 있어. 근데 그게 널 자유롭게 해.
네오—연이! 실은 내가 붙들게. 너는 저 애의 진짜 마음을 읽어! 명령보다 센 이유를 찾아 줘!
연이—응! 무성, 잘 들어. 아까 별빛으로 네 기억 다 봤어. 그리고 찾았어. 그 여자가 준 이름 밑에, 네가 몰래 적어 둔 글자!
무성—…몰래 적은 글자? …아니, 그건. 그건 아무도 몰라야 해. 나조차 잊으려고 제일 깊이 숨긴 건데. …보지 마, 연이. 그거 보면… 그거 보면 나 진짜 무너져. 백 년간 안 무너지려고 그것만은 안 봤단 말이야!
연이—…무성, 무너져도 돼. 아까 말했잖아.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지으면 돼. …그리고 그 글자, 그게 네 진짜 마음이야. 백 년 봉인보다, 여자 명령보다 깊은 곳에 있는 너. 그걸 꺼내야, 네가 이 실을 이겨. …믿어. 내가 꺼낼게. 네 진짜 마음을.
연이는 보았었다. 열 번째 장면의 구석, 이름의 진실을 알아 버린 밤에 소년이 제 깃털 하나에 아무도 몰래 새겨 둔 한 줄을. 조롱의 이름을 받아 든 그 밤, 소년이 눈물로 새긴 단 하나의 소원을.
연이—뿌리내림. 네 마음 밑바닥까지!
연이의 뿌리가 검은 물을 뚫고 내려갔다. 아래로, 더 아래로. 여자의 힘이 쏟아지는 표면을 지나, 백 년치 삼킴의 층을 지나, 봉인의 가장 깊은 바닥으로. 거기, 여자의 손도 닿지 못한 가장 순수한 자리가 있었다. 무성이 자기조차 잊으려 했던, 진짜 마음이 잠든 곳이.
뿌리가 검은 물을 뚫고, 실을 뚫고, 소년의 그림자 밑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깃털 하나를 끌어올렸다. 거기 서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 내 이름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다.」
서툰 글씨였다. 백 년 전, 이름이 조롱이라는 걸 알아 버린 소년이,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눈물로 꾹꾹 눌러쓴 한 줄. 삼키는 도구로 만들어진 아이의, 세상에서 가장 작고 간절한 소원. 누군가를 부르고 싶다는, 오직 그 하나.
연이—…무성. 이거였어. 네가 백 년간 제일 깊이 숨긴 게, 미움도 원망도 아니라 이거였어. …'내 이름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다.' …이렇게 고운 소원을 품고, 백 년을 삼켜 온 거야. …울지 마. 아니, 울어. 이 소원, 이제 이룰 거니까.
검붉은 실이 일제히 얼어붙은 듯 멈췄다. 백 년간 이 아이를 옭아맨 봉인이, 그 아이의 가장 순수한 소원 앞에서 처음으로 멈칫한 것이다. 여자의 명령보다, 소년의 소원이 더 오래되고 더 깊었으니까.
무성—…그 글자. …네가 읽었구나. 내가 백 년간 나조차 안 보려던 그걸. …맞아. 나…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어. 삼키는 게 아니라, 부르고 싶었어.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근데 나는 이름이 없어서, 부를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어. …근데 너는, 나한테 이름을 줬잖아. 무성(茂盛).
네오—…무성. 그 소원, 나도 봤어. 그리고 알아. 백 년간 그거 하나 붙들고 버틴 거. …이제 이뤄. 네 이름으로, 누군가를 불러. 연이가 바로 앞에 있잖아. 나도 있고. …부를 자격? 그런 거 없어. 부르고 싶으면 부르는 거야. 그게 이름의 전부야.
연이—…맞아, 무성. 자격 같은 거 없어. 나 지금 여기 있어. 내 이름은 연이. 딱 두 글자야. 네가 부르기 딱 좋은. …불러 봐, 무성. 백 년간 하고 싶었던 그거. 지금. 실이 아무리 막아도, 네 소원이 더 세. …불러. 내 이름을. 네 목소리로.
소년의 입술이 떨렸다. 백 년의 봉인과, 백 년의 소원이, 그 작은 입술 위에서 맞부딪쳤다. 여자의 실은 그 입을 꿰매려 했고, 소년의 소원은 그 실을 밀어내려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연이의 뿌리와 네오의 실과 저 아래 루나의 물이, 소년의 소원 편에 섰다.
연이—무성, 네 진짜 마음은 침식이 아니야. 누군가를 부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불러 봐. 내 이름을, 네 목소리로!
연이—…네 이름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싶다며! 지금이야! 나 여기 있어! 연이! 내 이름은 연이야! 불러! 네가 백 년간 하고 싶었던 그거, 지금 해! 나를 불러, 무성!
네오—…연이가 길을 열었어! 무성, 지금이야! 네 소원이 봉인보다 세! …그 실, 힘으로 끊으면 네가 지워져. 그러니 끊지 마. 대신 네 이름을 되찾아! 이름을 되찾으면, 실이 널 못 붙들어! 나는 실이 네 입 막는 것만 걷어 낼게. 너는 불러! 이름 하나면 돼! 딱 한 번만!
인형의 입이 떨렸다. 실이 그 입을 꿰매려 들었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실을 씹어 끊듯 소리를 밀어냈다.
무성—…크윽… 이, 입이… 실이 자꾸 막아… 근데… 근데 나 부르고 싶어… 백 년간… 이거 하나 하고 싶었어… 누군가를… 내 목소리로…!
연이의 뿌리가 소년의 발밑을 감싸, 그 소원에 힘을 보탰다. 네오의 백금 실이 소년의 입을 꿰매려는 검붉은 실을 걷어 냈다. 그리고 저 아래 재성에서, 루나가 보낸 맑은 물의 기운이 조약돌을 타고 소년의 목을 적셨다. 셋의 힘이, 소년의 목소리를 밀어 올렸다.
실이 소년의 입술을 꿰매려 파고들었다. 소년은 그 실을 어금니로 물어뜯었다.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제 것이었던 적 없는 목소리를, 처음으로 제 힘으로 끌어올렸다.
무성—…연, 이. 연이! 나는 무성이야! 그릇이 아니라, 무성이라고!
이름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계약을 붙들던 말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유리보다 맑고 사슬보다 무거운 소리였다. 백 년간 소년을 옭아맨 그 모든 봉인이, '연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연이—…불렀다. 무성, 너 방금 내 이름 불렀어! 네 목소리로, 네 이름으로! …봐, 했잖아! 백 년간 하고 싶었던 거, 방금 해냈잖아! …그거야, 무성. 그게 너야. 삼키는 새가 아니라, 이름을 부르는 아이.
무성이 부른 그 이름이, 반대로 무성을 불러 세웠다. 도구가 아니라 사람으로, 그릇이 아니라 무성으로. 이름이란 그런 것이었다. 부르는 순간,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가 동시에 사람이 되는. 백 년의 셈이, 두 글자의 이름 하나에 무너졌다.
네오—…깨졌어. 봉인이. …세계의 실이, 이름 두 글자에. …믿기지 않아. 나는 백 년간 칼로 실을 끊는 법만 배웠는데. 저건 칼로는 백 년을 해도 못 끊었을 거야. …연이, 네 방식이 옳았어. 힘이 아니라, 이름. 부수는 게 아니라, 불러 주는 거.
연이—…네오. 칼이 필요 없었던 게 아니야. 네가 실을 붙잡아 줘서, 무성이 이름 부를 틈이 생긴 거야. 네 칼이 시간을 벌고, 내 뿌리가 마음을 꺼내고, 루나 물이 목을 적셨어. …셋이 같이 한 거야. 아무도 혼자 안 했어.
무성—…셋이 같이. …나는 백 년간 혼자 삼켰는데. 너희는, 하나를 구하는데도 셋이 같이 하네. …그게 너희 힘이구나. 혼자가 아니라는 거. …나도 이제 그 셋에 껴도 돼? 넷이 되는 거야?
연이—…당연하지, 무성. 벌써 넷이야. 쇠, 나무, 물, 그리고 이야기의 샘. …아니, 루나까지 다섯. 백문 님이랑 모카까지 하면 일곱. …너 이제 엄청 많은 친구 사이에 낀 거야. 축하해. 백 년 외로움, 오늘로 끝.
무성—…일곱. …나 백 년간 혼자였는데, 몇 분 만에 친구가 일곱 명. …너무 많아. 감당이 안 돼. …아니, 좋아. 감당 안 될 만큼 좋아. …이름들 다 외울래. 연이, 네오, 루나, 백문 님, 언니, 모카. …여섯. 어? 한 명 모자라. 일곱이랬는데.
네오—…소망이. 아직 못 만난 일곱 번째. 저 위 탑에 있어. 백문 님 딸. 세상에서 제일 순한 이야기. …그 애까지 구하면, 일곱 맞아. …무성, 너 이제 그 이름들 지키는 사서가 될 거잖아. 그럼 소망이가 네 첫 친구이자, 네가 지킬 첫 이야기야.
무성—…소망이. …그 애 이름도 외울게. 일곱 명 다. …그리고 지킬게. 사서로서. 친구로서. …백 년간 이야기를 삼키기만 한 내가, 이제 이야기를 지키는 일곱 친구 중 하나가 되네. …이거, 꿈같아. 근데 꿈 아니지? 진짜지, 연이?
연이—…진짜야, 무성. 하나도 안 꿈이야. 네 발밑 새싹도, 네 뺨 눈물도, 이 친구들도, 다 진짜야. …자,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저 여자 만나고, 소망이 구하고, 다 데리고 내려가자. 일곱이 다 모여서, 재성에서 삼각김밥 나눠 먹자. …그게 우리 결말이야.
검붉은 실이 힘을 잃고 흩어졌다. 힘으로 끊긴 게 아니었다. 무성이 제 이름을 되찾자, 실은 더 이상 그를 옭아맬 매듭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름이 곧 그의 뿌리가 되어, 실이 아무리 감아도 헛돌 뿐이었다. 소년의 그림자에서 검은 비가 빠져나와, 하늘도 아닌 어딘가로 증발했다. 봉인돼 있던 것이 그릇을 잃고 물러난 것이다.
검은 물과 깃털로 뒤엉켰던 소년의 몸이, 조금씩 맑아졌다. 오수가 걷힌 자리에, 원래의 무성이 드러났다. 여전히 마르고 창백했지만, 그 몸에서 더는 삼키는 냉기가 아니라 무언가를 낳으려는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오염된 새가, 다시 맑은 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년의 발밑으로, 아주 작은 청록빛 새싹 하나가 돋았다. 무성이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삼키는 대신 낳은 것이었다. 이야기의 샘이, 오랜 겨울을 끝내고 첫 싹을 틔운 순간이었다.
연이—…봐, 무성. 네 발밑에 새싹 났어. 네가 삼킨 게 아니라, 낳은 거야. …이게 진짜 너야. 삼키는 새가 아니라, 이야기를 낳는 샘. …백 년 겨울 끝났어, 무성. 이제 네 봄이야.
무성이 떨리는 손으로 그 새싹을 만졌다. 백 년간 그의 손이 닿은 것은 모두 삼켜져 사라졌는데, 이 작은 새싹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길에 반응해, 잎을 하나 더 틔웠다. 무성은 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성—…안 사라져. 내가 만졌는데. …백 년간 내가 만진 건 다 삼켜졌는데. 이 새싹은… 오히려 자라. …나, 이제 삼키는 손이 아니라, 키우는 손이 됐구나. …연이. 나 이거, 이거 하고 싶어. 삼키는 거 말고, 이렇게 키우는 거. 평생.
연이—…해, 무성. 평생. …너 원래 그런 존재였어. 이야기를 키우는 샘. 그 여자가 백 년간 억지로 삼키게 만든 것뿐이야. …이제 네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어. 봐, 손끝에서 잎이 나잖아. 이게 너야. 진짜 무성이야.
네오—…놀랍네. 방금까지 온 세계를 삼키던 검은 새가, 이젠 손끝에서 잎을 틔워. …연이, 나 이런 거 처음 봐. 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적을 원래 좋은 존재로 되돌리는 거. …너, 진짜 무서운 애야. 좋은 의미로. 네 앞에선 어떤 어둠도 오래 못 버텨.
연이—…무서운 애 아니거든? 나 그냥 사람 잘 읽는 대학생이야. …근데 네오, 네 말도 맞아. 어둠은 사실 대부분, 상처받은 빛이거든. 무성도 그랬고, 어쩌면 저 여자도 그럴 거야. …상처를 읽어 주면, 빛으로 돌아와. 없애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만, 훨씬 값져.
무성—…상처받은 빛. …그게 나였구나. 나는 내가 원래 어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나는 상처받은 빛이었어. 그리고 연이가 그 상처를 읽어 줘서, 다시 빛이 됐어. …고마워. 나를 어둠이 아니라, 상처받은 빛으로 봐 줘서.
무성—…그럼 나도, 이제 그렇게 볼래. 저 여자를. 박지은을. …저 여자도 어둠이 아니라, 상처받은 빛일지도 몰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길 안 봐 준 상처. 그 사람이 딴 사람 위해 다 버리고 떠난 상처. …나는 저 여자가 무섭기만 했는데, 이제 저 여자의 상처가 보여. …연이, 나도 너처럼, 저 여자 상처를 읽어 볼래. 미워하지 않고.
연이—…무성. …너 방금 진짜 멋있었어. 방금 막 자유로워진 애가, 벌써 자기 백 년 주인을 이해하려 하다니. …그래. 같이 읽자. 저 여자 상처. 그리고 그 상처, 같이 낫게 하자. …봐, 너 벌써 사서 자질 있어. 이야기를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는 거, 그게 사서의 첫째 덕목이거든.
네오—…둘이서 벌써 저 여자 걱정을. …하여간 너희. 적을 앞에 두고 적의 상처를 읽겠다니. …근데 뭐, 그게 너희 방식이지. 나는 등 지킬 테니, 너흰 마음껏 읽어. 저 여자든, 뭐든. …자, 이제 정말 저 여자한테 가자. 셋이서.
소년은 무릎을 꿇은 채 웃고 있었다. 처음 웃어 보는 사람처럼, 서툴게.
무성—…불렀다. 내 이름으로, 네 이름을. 별거 아니었네. 이걸 왜 백 년이나 못 했을까.
소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슬퍼서가 아니라, 제 목소리가 처음으로 제 것이어서. 이름 하나 불렀을 뿐인데, 백 년어치 무언가가 눈으로 쏟아져 나왔다.
무성—…따뜻해. 눈물이. 얼음이 아니라, 따뜻해. …백 년간 내 안엔 검은 물만 흘렀는데. 지금은, 따뜻한 물이 흘러. …이게 사람의 눈물이구나. 이게, 살아 있는 거구나. …연이. 나 지금, 살아 있어. 처음으로.
연이—…응. 살아 있어, 무성. 완전히. …너 방금 이름 부르면서 태어난 거야. 사주 없이 백 년을 떠 있던 아이가, 지금 이 순간 진짜로 태어났어. …네 생일이야, 오늘. 축하해, 무성. 세상에 온 거.
무성—…생일. …나 생일이 있어?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졌는데. …아니. 방금 태어났다며. 그럼 오늘이 내 생일이네. …백 년 만에, 생일이 생겼어. …고마워, 연이. 이름도, 친구도, 생일도. 다 네가 줬어.
무성은 천천히 제 손을 들어 폈다 쥐었다. 백 년간 남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던 그 손이, 지금은 제 뜻대로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그 작은 자유가, 무성에게는 온 우주를 얻은 것만큼 벅찼다.
무성—…내 손이, 내 맘대로 움직여. …이거 봐, 연이. 나 지금 손 쥐었다 폈어. 아무도 안 시켰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별거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 나지. …백 년간 이 작은 것도 내 맘대로 못 했구나.
네오—…무성. 그거야. 그 작은 자유가, 사람의 전부야. 손 하나 내 맘대로 쥐는 거. 내가 갈 길을 내가 고르는 거. …나도 별자리 버리고 도망칠 때, 그 작은 자유 하나 얻으려고 그 큰 대가를 치른 거였어. …너도 이제 그 자유 가졌어. 아무도 못 뺏어.
연이—…무성, 실컷 움직여 봐. 손도, 발도, 다. 네 맘대로. 걷고 싶으면 걷고, 뛰고 싶으면 뛰고. …이 결투 끝나면 우리 재성 시장 같이 걷자. 네 발로, 네가 가고 싶은 데로. …삼각김밥도 사 먹고. 네 손으로 골라서.
무성—…재성 시장을. 내 발로. …백 년간 나는 저 아래를 삼키기만 했지, 걸어 본 적이 없어. …가고 싶어. 시장 구경도 하고, 모카 무대도 보고, 빵집 언니 빵도 먹고. …그리고 도서관 가서, 백문 님이 준다는 그 볕 좋은 서가에 앉아서, 삼킨 이야기들을 하나씩 다시 써 볼래. 이번엔 낳는 걸로.
연이—…응. 다 하자. 하나도 안 빼고 다. …근데 무성, 그 전에 우리 아직 할 일이 있어. 저 여자를 만나고, 저 시들어 가는 별를 구하고, 왕좌의 그 사람도 꺼내야 해. …근데 이제 안 무서워. 너까지 우리 편이 됐으니까. 삼키던 새가 낳는 샘이 됐으니까. …이거, 엄청 큰 힘이야.
무성—…응. 나도 도울게. 이제 그분… 저 여자한테 맞설 거야. 백 년간 조종당했지만, 이젠 아니야. …내가 아는 저 여자의 약점, 봉인의 구조, 다 알려 줄게. 백 년 문지기였으니까, 이 궁이랑 저 여자에 대해선 내가 제일 잘 알아. …연이, 이번엔 내가 네 길잡이가 될게.
네오—…셋이네. 쇠, 나무, 그리고 이제 이야기의 샘. …연이, 우리 진용이 하나 더 늘었어. 무성은 이 궁의 안내자이자, 이야기를 낳는 샘이야. 저 여자한테 제일 아픈 카드야. 백 년 부린 도구가 등을 돌렸으니까. …좋아. 이제 저 여자 앞에 당당히 서자. 셋이서.
연이—…응. 네오는 쇠, 나는 나무, 무성은 이야기의 샘. 그리고 저 아래엔 물의 루나가 뒤따라오고 있어. …점점 든든해지네. 저 여자가 백 년을 갈라놓은 걸, 우리가 하나씩 다시 잇고 있어. …자, 이제 저 여자 만나러 가자. 무섭지만, 셋이면 안 무서워.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쇠와 나무와 샘. 박지은이 갈라놓고 부순 것들이, 이제 스스로 뭉쳐 그녀에게 맞서려 하고 있었다. 그 결속이, 곧 마주할 그 여자의 세계에서 그들을 지탱할 뿌리가 될 것이었다.
연이—원래 제일 쉬운 게 제일 오래 걸려. 그거 내 전공이야. 버스 놓치는 거랑 같이.
무성—…버스? 그게 뭔데. …큭. …어? 나 방금. …웃었어? 나 방금 웃은 거야? …백 년간 웃어 본 적 없는데. 네 실없는 소리에, 그냥… 웃음이 나왔어. …이게 웃는 거구나. 배가 간질간질하고, 얼굴이 저절로 올라가는 거.
연이—…웃었어, 무성. 방금 확실히 웃었어. …아 진짜, 너 웃으니까 완전 다른 애 같다. 백 년 그림자는 어디 가고, 그냥 장난기 있는 남자애 하나 있네. …봐, 웃는 것도 이름 부르는 거랑 똑같아. 별거 아닌데,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
네오—…무성, 너 웃는 거 처음 보는데, 나쁘지 않네. …근데 연이 실없는 소리에 웃는 건, 좀 위험한 습관이야. 저거 하루에 백 개씩 나오거든. 웃다가 결투 지겠어. …농담이야. 웃어. 실컷. 백 년치 못 웃은 거, 지금부터 다 웃어.
무성—…이상해. 몇 분 전까지 나는 온 세계를 삼키던 그림자였는데. 지금은 웃고, 울고, 이름을 부르고, 새싹을 키우고, 친구가 생겼어. …이게 다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백 년이 안 바뀌던 게, 네 몇 마디에 이렇게 바뀌네. 연이, 너 대체 뭐야. 사람 맞아?
연이—…사람이지. 삼각김밥 좋아하고 버스 잘 놓치는. …무성, 몇 분 사이에 바뀐 거 아니야. 네 안에 이미 다 있었어. 웃음도, 눈물도, 이름을 부르고 싶은 마음도. 백 년간 눌려 있었을 뿐이야. 나는 그냥, 그거 꺼내는 거 도와준 거고. …원래 다 네 거였어.
무성—…내 안에 이미 다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덜 무섭다.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게 아니라, 원래 나로 돌아온 거니까. …고마워, 연이. 나를 꺼내 줘서. 백 년간 나조차 못 찾은 나를. …이제, 이 되찾은 나로 저 여자한테 맞설게. 도구가 아니라, 사람으로.
명반의 별빛이 돌아왔다. 무성의 봉인이 풀리자, 별 감옥도 함께 녹아내렸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세 점의 빛 — 루나의 물빛, 언니의 등불빛, 백문의 서가빛이 감옥을 벗어나 환하게 피어올랐다.
세 빛이 잠시, 저마다 주인의 형상을 어렴풋이 그려 냈다. 물빛은 루나의 모습으로, 등불빛은 언니의 모습으로, 서가빛은 백문의 모습으로. 저 아래 재성과 도서관에 있는 몸으로 돌아가기 전, 잠깐 연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루나—연이! 이겼어? 우리 별 풀린 거야? …아 다행이다, 몸이 다시 가벼워졌어! 저 아래 내 진짜 몸이, 방금 눈 떴대! …어, 근데 저 깃털 오빠는 누구야? 아까 그 무서운 그림자 맞아? 근데 왜 이렇게 순해 보여?
무성—…순하다는 말은 처음 듣네.
연이—루나! 언니! 백문 님! …다들 무사하구나. 별빛으로라도 이렇게 봐서 다행이야. …이 애는 무성이야. 아까 그 그림자 맞아. 근데 이제 우리 편이야. 아니, 친구야. 백 년간 그 여자한테 조종당한 아이였어. 이제 막 풀려났어.
루나—친구?! 그 무서운 그림자가?! …히야, 연이 언니 진짜 대단하다. 적도 친구로 만들어. …무성 오빠? 나 루나야! 물 다루는! 저 아래서 언니랑 같이 싸웠어! 이제 오빠도 우리 편이면, 나랑도 친구 하자!
무성—…나랑 친구를. …방금 처음 본 애가, 나한테 친구 하자고. …이상하다. 나 백 년간 다들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너는 왜 안 무서워해?
루나—헤헤, 연이 언니가 친구라잖아! 언니가 친구면 다 친구지! 그리고 오빠 눈, 하나도 안 무서워. 되게 슬퍼 보여. 슬픈 사람은 안 무서워. 안아 주면 돼.
무성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안아 주면 된다니. 백 년간 아무도 무성을 안으려 하지 않았는데, 이 물빛 아이는 무성의 슬픔을 한눈에 알아보고, 무서워하기는커녕 안아 주겠다고 했다. 무성의 눈에, 또 한 방울 따뜻한 눈물이 맺혔다.
루나 언니—…무성 학생. 언니가 하나만 말할게. …자네, 배고프지? 백 년간 삼키기만 했으면, 정작 자네 배는 늘 텅 비었을 거야. …이 일 끝나면 우리 빵집에 와. 갓 구운 빵, 실컷 먹여 줄게. 삼키는 거 말고, 맛보는 거. 그거 완전히 다른 거란다.
무성—…빵을. 나한테. …맛보는 거랑 삼키는 거가 다르다고요. …나 백 년간 삼키기만 해서, 맛이라는 걸 몰라요. …그거, 어떤 거예요? 맛본다는 거.
루나 언니—…따뜻하고, 폭신하고, 입안에서 살살 녹는 거지. 그리고 다 먹고 나면, 마음까지 든든해지는 거란다. …자네, 그거 꼭 알아야 해. 백 년치 굶주림, 언니가 다 채워 줄게. 그러니까 꼭, 살아서 와. 우리 빵집으로.
무성—…네. …갈게요. 빵집. 도서관도. 재성 시장도. …백 년간 삼키기만 한 세상을, 이제 맛보러 갈게요. …고마워요, 언니. 다들. …나 진짜, 갈 데가 잔뜩 생겼어요.
백 년간 갈 곳도, 부를 이름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던 아이에게, 이제 갈 곳이 잔뜩 생겼다. 빵집, 도서관, 시장, 그리고 친구들. 무성은 그 낯선 풍요 앞에서,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몰라 그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 서툰 인사가, 백 년의 외로움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연이—…무성, 고개 그만 숙여. 이제 고개 들고 다녀. 넌 이름 있는 아이니까. …근데 있잖아, 갈 데 많다고 좋아하는 거 보니까 나 눈물 나려 해. 백 년간 얼마나 갈 데가 없었으면. …괜찮아. 이제 나랑 다 갈 거야. 하나도 안 빼고. 네 손 잡고.
무성—…내 손, 잡아 줄 거야? …백 년간 내 손은 삼키는 손이라, 아무도 안 잡았는데. …이제 키우는 손 됐으니까, 잡아도 돼? …그럼, 이 일 다 끝나면. 제일 먼저 네 손 잡고 재성 시장 걸을래. 삼각김밥 사러. …약속.
연이—…약속. 새끼손가락 걸자. …자, 이제 진짜 저 여자 만나러 가자. 우리 약속 지키려면, 이 일부터 끝내야 하니까. …무성, 무섭겠지만 이번엔 네가 우리 편이야. 백 년 문지기가 우리 길잡이야. …가자. 다 같이.
백문—흐음, 성 없는 숨이라. 색인에 없는 책이 여기 또 하나 있었군. 청년, 도서관에 오게. 자네 서가는 내가 제일 볕 좋은 칸으로 잡아 주지.
무성—…서가를. 나한테. …나는 이야기를 삼킨 놈인데. 도서관은 이야기를 지키는 덴데. 그런 내가 거길 가도… 돼요?
백문—…허허. 청년, 도서관은 죄지은 이야기를 벌하는 곳이 아니라, 길 잃은 이야기가 돌아오는 곳일세. 자네가 삼킨 백 년치 이야기, 그거 이제 자네랑 같이 도서관으로 돌아오면 되네. 자네가 그 이야기들의 사서가 되어. …어떤가. 삼킨 자에서, 지키는 자로.
무성—…삼킨 자에서, 지키는 자로. …그거, 내가 제일 되고 싶었던 거예요. 이야기를 낳고 지키는 것. …갈게요, 도서관. 꼭. 이 일 다 끝나면. …고마워요, 백문… 님.
무성—…그리고 루나. 아까, 내 목이 실에 막혔을 때. 어디선가 맑은 물이 흘러와서, 목을 적셔 줬어. 그 덕에 소리를 낼 수 있었어. …그거, 너였지? 저 아래서, 네 물을 보내 준 거.
루나—어! 맞아! 나 저 아래 재성에서 언니 몸 지키면서, 조약돌로 물 보냈어! 오빠 목 막혔다는 게 어떻게 느껴져서, 무작정 물을 흘려보냈거든! …통했구나! 헤헤, 내 물이 저 위까지 닿았어! 언니, 나 잘했지?!
연이—…응, 루나. 진짜 잘했어. 네 물이 무성 목소리를 살렸어. …봐, 무성. 너 혼자 봉인 깬 거 아니야. 내 뿌리, 네오 실, 루나 물. 셋이 같이 깬 거야. …그리고 루나. 너 이제 저 위 명반까지 물을 보내. 물은 어디든 흐른다더니, 진짜네. …너, 곧 여기까지 올 수 있겠어.
연이는 그 말을 하며 속으로 확신했다. 루나의 물이 이제 두 세계를 넘어 명반까지 닿는다는 것. 조금만 더 자라면, 루나는 물빛만이 아니라 제 몸으로 이 위에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물의 아이가 전장에 서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루나—…나도 저 위에 갈 수 있다고? 진짜? …그럼 나 더 연습할게! 물길 만드는 거! 언니 있는 데까지, 내 물로 길 뚫고 올라갈 거야! …기다려 언니, 나 꼭 갈게! 이번엔 물빛 말고, 진짜 나로!
무성—…루나. 네 물, 맑더라. 아까 내 목 적셔 준 그 물. …나 백 년간 오염된 검은 물만 다뤘는데, 네 물은 달랐어. 흐르는 물. 정화하는 물. …네가 저 위로 올라오는 물길, 내가 도울 수 있어. 나 이 궁의 물길을 다 아니까. 어디로 흘러야 여기까지 닿는지, 내가 알려 줄게.
루나—진짜?! 무성 오빠가 도와준다고?! 야호! 그럼 나 금방 갈 수 있겠다! …오빠, 우리 물 콤비네? 오빠는 이야기의 샘, 나는 정화의 물! 둘이 합치면 무성이 아니라 무성무성이야! …어? 오빠 이름이 무성이었지. 헷갈려. 아무튼! 우리 둘이 물 담당이야!
무성—…물 콤비. …큭. 너 참 밝다, 루나. …그래. 물 콤비 하자. 네 정화의 물이랑, 내 이야기의 샘이랑.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내 물을 나쁜 데 안 쓰고 좋은 데 쓸 수 있겠네. 너 덕분에.
물빛의 아이와 이야기의 샘이, 두 세계를 사이에 두고 눈을 맞췄다. 오염된 물과 맑은 물이 아니라, 이제 둘 다 무언가를 살리는 물이었다. 저 여자가 백 년간 나눠 부린 물의 힘이, 지금 우정으로 하나가 되고 있었다.
백문—…연이 학생. 기뻐하기엔 이르네. 아직 저 위 탑 꼭대기에, 내 딸 소망이가 있어. 그리고 그 시들어 가는 별도. …자네가 무성을 구했듯, 그 아이들도 구해야 하네. …허나 나는 이제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해. 몸이 그리 부르고 있어. …소망이를, 부탁하네. 꼭.
연이—…네, 백문 님. 소망이 꼭 데려올게요. 그 아이, 아픈 애 곁에서 안 울고 버티고 있대요. 착한 것. …백문 님은 도서관 가서 몸 추스르세요. 소망이 데려가면, 백 년 만에 부녀 상봉이에요. …그 그림, 제가 꼭 그리게 해 드릴게요.
백문의 서가빛이 따뜻하게 흔들리곤, 저 아래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루나의 물빛과 언니의 등불빛도 재성으로 내려갔다. 명반에는 이제 연이와 네오와 무성, 세 사람만 남았다. 그리고 저 위 탑 꼭대기에서, 소망이와 시들어 가는 별의 두 빛이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채 퍼지기도 전에, 세계가 얼어붙었다. 무성이 풀려난 기쁨도, 재회의 온기도, 순식간에 서늘한 공기 아래 가라앉았다. 무언가 거대하고 차가운 것이, 이 자리에 강림하고 있었다.
별 도는 소리가 멎고 명반이 정지했다. 우주의 시계가 멈춘 것이다. 방금까지 다시 켜지던 별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 아무도 없던 왕좌 위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레이스, 핏빛 보석. 무성을 통해 목소리로만 듣던 그 여자가, 마침내 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연이—…당신. …박지은. 무성 통해 말하던 그 여자. …직접 나왔네요. 회장님. 그림자 여인. …그동안 인형 뒤에 숨어 있더니, 이제야 얼굴을 보여 주네요.
무성이 그 여자를 보자마자 온몸을 떨었다. 방금 풀려난 아이가, 백 년의 주인 앞에서 본능적으로 움츠러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연이가, 그리고 네오가, 무성의 곁을 지켰다. 무성은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연이—…무성, 떨어도 돼. 백 년 주인인데 안 무서우면 이상하지. …근데 봐. 나 여기 있고, 네오 여기 있어. 그리고 넌 이제 저 여자 도구 아니야. 무성이야. 이름 있고, 친구 있고, 되찾은 마음 있는. …저 여자, 이제 널 함부로 못 해. 우리가 안 놔두니까.
무성—…응. …무섭지만. 도망 안 가. 백 년간 저 여자 앞에서 늘 고개 숙였는데. …오늘은, 고개 들고 볼 거야. 도구가 아니라 사람으로. …그분… 아니, 박지은. 나 이제 당신 무성 아니에요. 그냥 무성이에요. 당신이 만든 도구가 아니라, 연이가 이름 붙여 준 아이.
여자의 눈이 무성을 향했다. 오래 부린 도구가 처음으로 제 앞에서 고개를 들고, 제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여자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나 그 비웃음 뒤로, 아주 미세한 당혹이 스쳤다. 도구가 사람이 된다는 건, 여자의 셈에 없던 변수였으니까.
박지은—…무성. 네가 이름을 얻었다고? 저 아이가 붙여 준 이름으로? …가엾은 것. 이름 하나 얻었다고 사람이 된 줄 아는구나. 너는 여전히 내가 만든 그릇이야. 언제든 다시 채울 수 있는. …허나, 뭐. 잠깐의 반항은 봐주마. 어차피 인연의 세계에서, 네가 누구였는지 다시 알게 될 테니.
무성—…아니요. 나 다시 안 채워져요. 연이가 그랬어요. 한번 부른 이름은 못 지운다고. …당신이 백 년간 나를 도구라 불렀지만, 연이는 나를 무성이라 불렀어요. 그리고 나도, 내 목소리로 연이를 불렀어요. …그거면 됐어요. 나는 이제, 부르고 불리는 사람이에요. 당신 그릇 아니에요.
여자가 잠시 말을 잃었다. 오래 부린 도구가 지금 또박또박 제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 낯선 광경 앞에서, 여자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스르르 걷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어쩌면,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이름을 불러 주었어야 할, 그러나 끝내 부르지 못한.
연이—…박지은 씨. 방금 무성이 자기 존재를 주장할 때, 당신 얼굴에 이상한 감정이 스쳤어요. …그거, 그리움 아니에요? …무성이 사람이 되는 걸 보면서, 당신도 뭔가를 떠올린 거죠.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의 이름을 그렇게 다정히 부르고 싶었던 걸.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이의 말은 정확했다. 아주 오래전, 아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그녀에게도 온 마음을 걸고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박병하. 성실하고 다정하고 바보같이 곧은 사람. 마음이 셈보다 크다 믿던, 그녀의 가장 따뜻했던 시절이. 여자는 그 기억을 애써 밀어냈지만, 이미 늦었다. 연이가 그 문을 두드린 것이다.
박지은—…닥쳐. 닥치라 했다! …네가 뭘 안다고, 자꾸 내 안을 헤집어! …그래! 나도 사랑했다! 내 전부를 걸고! 병하 씨를! 근데 그 사람은 날 단 한 번도 안 봤어! 늘 딴 데만 봤지! 사주도 못 갖춘, 잘 웃는 게 전부인 어떤 계집애만! …그래서 부쉈어. 그 애 운명을. 근데 그 바보가 어떻게 했게? 제 몸까지 버리고, 시간을 거슬러 그 애한테로 도망쳤어! …마음이 지킨 게 뭐야! 나한텐, 아무것도 안 남았어!
연이—…박지은 씨. 방금 그 절규, 그게 당신 진심이에요. …당신은 병하 씨를 그만큼 사랑했던 거예요. 근데 그 사랑이 끝내 안 닿아서, 그 아픔을 애먼 사람한테… 그 여자애한테 쏟은 거고요. …얼마나 아팠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늘 딴 사람만 보는 거. 백 년 같은 그 시간을, 혼자.
여자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맺혔다. 인형의 것도, 셈의 것도 아닌, 박지은 자신의 눈물이었다. 자기 아픔을 알아봐 준 그 한마디에, 오래 얼려 둔 슬픔이 실금 사이로 새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그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 냈다.
박지은—…됐다. 이런 데서 이럴 순 없지. …너, 정말 위험한 아이야. 셈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람을 무너뜨려. 미래에도, 여기서도. …좋아. 인연의 세계로 가자. 거기서 다 보여 주마. 병하 씨가 왜 사람의 몸을 버렸는지, 네가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이 모든 게 몇 번째 반복인지. …각오해라, 아이야.
연이—…네. 갈게요. 그리고 거기서, 당신 눈물도 끝까지 읽을게요. 셈으로 덮은 그 마음, 다 꺼내 드릴게요. …박지은 씨. 이번엔, 당신도 구할 거예요. 당신도, 병하 씨도, 무성도, 다. …사랑이 아무것도 못 지킨 게 아니라는 걸, 제가 증명할게요.
박지은—…그릇이 비었네.
박지은—백 년 공들인 봉인을 이름 한 번 부르게 해서 깨다니. 역시 너야. 미래에서도 여기서도, 너는 꼭 그런 식으로 내 것을 망가뜨려.
연이—…미래에서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당신 처음 보는데. …미래에서 나를 안다고요? …당신, 시간을 다루는 사람이랬죠. 그럼 당신은… 나를 예전부터, 아니 나중에도 알고 있는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얘기야.
박지은—…모르는 척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가. …하긴, 이 시점의 너는 아직 모르겠지. 우리가 몇 번이나 이렇게 마주 앉았는지. 네가 몇 번이나 내 셈을 망쳤는지. …됐다. 지금 알 필요 없어. 곧, 아주 곧 알게 될 테니.
연이—(…몇 번이나 마주 앉았다고? …이 여자, 나랑 여러 번 만난 것처럼 말해. 나는 처음인데. …시간을 다루는 사람이랬지. 그럼 이게… 반복되는 거야? 나랑 이 여자가, 몇 번이고 이 싸움을 다시 하는 거야? …소름 끼쳐. 근데 왜, 뼛속이 이 말을 진짜라고 느끼지.)
네오—연이, 저 여자 말에 휘둘리지 마. 시간을 다루는 자들의 수법이야. 상대를 혼란시켜서 판단을 흐리는 거. …진짜든 아니든,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안 변해. 저 여자를 막고, 부서진 걸 되찾고, 다 구하는 거. …그 목표만 붙잡아. 나머지는 인연의 세계 가서 확인하면 돼.
연이—…응, 네오. 맞아. 휘둘리지 말자. …박지은 씨. 우리가 몇 번을 만났든, 나는 매번 같은 걸 원할 거예요. 다 사는 길. …그러니까 몇 번이고 내가 당신 셈을 망쳤다면, 그건 그 셈이 틀렸다는 뜻이에요. 맞는 셈이면, 내가 안 망쳤겠죠. …이번엔, 그 틀린 셈 자체를 바꿔 봐요. 같이.
네오—…박지은.
네오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연이는 영문도 모른 채 등줄기가 얼었다. 이미 몇 번 들은 이름인데, 어째서 네오의 목소리로 들으니 뼛속이 먼저 반응하는 걸까.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아직 오지 않은 어딘가에서부터 이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네오—…박지은. …그 이름. 내 입이 저절로 불렀어. 기억은 안 나는데, 내 혀가 이 이름을 알아. …당신, 나를 알지. …당신이 연이 운명을 부쉈어. 그래서 내가 이 꼴이 된 거고. …당신은 다 알잖아. 내가 누구인지. 저 애가 누구인지. 다.
박지은—어머. 병하 씨도 아니면서,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주네.
연이—…병하? …박병하. …그게 누구예요? …네오 목소리가, 그 병하 씨랑 닮았다고요? …네오, 너 저 여자랑 무슨 사이야? 저 여자가 자꾸 미래 얘길 하고, 내 정체 어쩌고 하고. …너,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지.
박지은—…영특한 아이. 하나를 던지면 열을 읽어 내는구나. …허나 그 이상은, 인연의 세계에서 직접 보여 주마. 말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나을 테니. …특히 너에겐. 네가 누구인지, 왜 여기 왔는지, 그 진실까지 전부.
연이—…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왔는지. …당신, 자꾸 그런 말을 하네요. 마치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을 아는 것처럼. …좋아요. 그것도 궁금하니까 갈게요. 근데 그 전에 하나만. …저 위 탑 꼭대기, 소망이랑 한 빛으로 겹쳐 있는 그 창백한 아이. 그 애 누구예요? 왜 그렇게 아파 보여요? 왜 저 탑에 가둬 뒀어요?
여자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두려움도 그리움도 아닌, 탐욕스러운 자가 제 전리품을 들킨 듯한 미소였다. 그 창백한 아이는, 여자가 가장 아끼는 수집품이었으니까.
박지은—…아, 그 애. 내 컬렉션 중에서도 제일 값진 거지. …궁금하면 직접 가서 봐. 곧 알게 될 거야. 아주, 아주 잘 아는 얼굴일 테니까. …후후. 그 애가 왜 저기서 시들고 있는지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무성—…저 탑의 아이. 나 봤어, 연이. 저 꼭대기에서. …창백하고, 늘 아팠어. 근데 착했어. 제 품의 작은 청록빛을 꼭 끌어안고, '너만은 안 꺼진다'고 속삭였어. …근데 이상해. 그 애 얼굴이, 어딘가 너랑 닮았어, 연이. 자꾸 겹쳐 보여. …마치, 또 다른 너 같아.
연이—…나랑 닮았다고? …또 다른 나? …(가슴 밑바닥이 서늘하게 식었다) …박지은 씨. 그 애, 대체 누구예요. 왜 나랑 닮았어요. 왜 소망이가 그 애 곁에 있어요. …당신,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박지은—…무슨 짓? 어머, 말이 심하네. 나는 그냥 '수집'했을 뿐이야. 세상엔 임자 없이 굴러다니는 값진 것들이 많거든. 시간, 운명, 인연… 그런 걸 알아보고 거둬들이는 게 죄야? 나는 그저, 아름다운 걸 아끼는 사람일 뿐인데.
연이—…수집이라고요? 남의 운명을 부수고 뺏는 걸? …당신, 방금 그거 위선이에요. 도둑질을 '수집'이라 부르고, 잔인함을 '아끼는 것'이라 부르고. …자기가 하는 짓을 예쁜 말로 덮으면, 그게 안 나쁜 게 되나요? …아니에요. 당신, 그냥 탐욕스러운 거예요. 그리고 그걸 인정 안 하려고 위선을 떠는 거고.
여자의 미소가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위선'이라는 단어가, 여자가 백 년간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겨 온 진실을 정확히 찔렀다. 그러나 여자는 이내, 그 일그러짐을 더 화려한 여유로 덮었다. 위선자는, 위선을 들켰을 때 더 우아하게 웃는 법이니까.
박지은—…똑똑한 아이야, 정말. 그래서 더 갖고 싶어져. 네 그 완성된 사주, 내 컬렉션의 마지막 조각으로. …자, 인연의 세계로 가자. 거기서 다 보여 주마. 저 창백한 아이가 누구인지, 네가 왜 여기 왔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많은 걸 가졌는지. …각오해라, 아이야.
연이—…좋아요. 갈게요. 도망 안 쳐요. 저 창백한 아이가 누구든, 나랑 닮았든, 끝까지 마주할게요. …그리고 박지은 씨. 방금 당신, '위선'이란 말에 흔들렸어요. 당신도 알아요, 당신이 하는 게 도둑질이라는 거. …그 위선의 가면, 인연의 세계에서 내가 다 벗겨 드릴게요. 당신 맨얼굴을, 당신도 보게.
연이—(…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왔는지. 저 여자가 자꾸 그걸 알아요 하듯 말해. …나 그냥 앱 깔았다가 이 세계에 온 평범한 대학생 아니었어? …근데 왜 자꾸, 아닌 것 같지. 내 꿈속 얼굴 없는 남자가 '너를 이 세계로 끌어들였다'고 한 것도. …나, 정말 우연히 여기 온 게 맞을까.)
연이—(…근데 무섭지 않아. 내가 누구든, 저 창백한 아이가 뭐든, 마주할 거야. 도망치면 아무것도 안 바뀌니까. …그리고 저 여자, 저 탐욕도 위선도, 내가 다 읽어서 벗겨 낼 거야. 값이 아니라 뜻으로. …자, 박지은 씨. 데려가요. 나 준비됐어요.)
네오—…연이. 너 방금 표정, 불안해 보였어. 저 여자가 네 정체 어쩌고 하는 거, 신경 쓰지 마. …아니. 신경 쓰이겠지. 근데 뭐가 나오든, 나 네 옆에 있을게. 네가 누구든, 넌 연이야. 재성에서 언니 구하고, 무성 이름 붙여 준. 그건 안 변해.
연이—…고마워, 네오. …그래. 내가 누구든, 지금 내가 한 일들은 진짜야. 그거면 됐어. …좋아. 그 진실이 뭐든, 마주할게. 도망 안 쳐. 셋이 같이, 아니 다 같이 가는 거니까.
연이는 손목의 물 조약돌과 목의 손수건, 품속의 붓과 종이 물고기를 차례로 매만졌다. 넷이, 그리고 이제 무성과 네오까지, 여럿이 함께였다. 저 붉은 실 너머에 어떤 진실이 기다리든, 연이는 혼자 마주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사실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연이의 유일하고도 충분한 무기였다.
무성—…연이. 하나만 약속해. 저 안에서 무슨 진실이 나오든, 네가 누구라는 게 밝혀지든. …너는 연이야. 나한테 이름을 준, 나를 상처받은 빛으로 봐 준 그 연이. 그건 안 변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무서우면, 내 손 잡아. 이번엔 내가 네 손 잡아 줄게.
연이—…응. 잡을게, 무성. …봐, 백 년 삼키던 애가, 이제 남 손을 잡아 주네. …너 진짜 많이 컸다. 아니, 진짜 무성이 됐다. …자, 이제 정말 가자. 그 붉은 실의 세계로. 셋이서, 손잡고.
네오—…손잡는 건 좋은데, 나까지 끼는 건 좀. …농담이야. 셋이 가자. 쇠, 나무, 이야기의 샘. 백 년 전 갈라진 것들이, 이번엔 스스로 뭉쳐서 저 여자한테 간다. …그 자체가, 저 여자한테 이미 한 방이야. 가자.
네오—연이, 내가 옆에 있을게. 저 여자, 위험해. 백 년 전 나를 셋으로 가른 자야.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근데 이번엔 나 도망 안 쳐. 내 진짜 이야기가 저기 있다면, 마주할 거야. 너랑 같이.
무성—…나도 갈래. 나 이제 그분… 아니, 저 여자 인형 아니야. 무성이야. 내 발로 따라갈 거야. 저 진실이 뭐든, 나도 알아야 하니까. 나도 그 밤에 저 여자한테 붙들린 자니까. …연이, 이번엔 내가 네 곁을 지킬게.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명반이, 세계가 종이처럼 구겨졌다. 그리고 구겨진 틈새로 붉은 실 한 가닥이 낚싯줄처럼 일행을 낚아챘다. 연이와 네오와 무성이, 그 붉은 실에 감겨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멀어지는 명반 저편, 탑 꼭대기에서 소망이의 청록빛이 마지막으로 크게 반짝였다. 마치 '언니, 저 여기서 기다릴게요'라고 말하듯. 연이는 그 빛에 대고 마음으로 답했다. 그래, 곧 갈게. 조금만 더 버텨, 소망아.
박지은—자리를 옮기자. 인연 얘기는 인연의 세계에서 하는 게 예의니까.
붉은 실이 일행을 통째로 삼켰다. 자미두수의 별들이 멀어지고, 그 너머로 온통 붉은 실로 짜인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백 년의 가장 아픈 진실이, 그리고 연이 자신의 뿌리에 얽힌 비밀이, 그 붉은 실의 세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실에 감겨 빨려 들어가는 순간, 연이는 무성의 손을, 무성은 네오의 어깨를 붙들었다. 셋은 서로를 놓지 않았다. 백 년 동안 저 여자가 갈라놓고 부숴 온 인연이 수없이 많았다면, 지금 이 셋은 스스로 서로를 붙들어 하나처럼 뭉쳤다. 그것이, 저 여자의 셈에 맞서는 첫 번째 답이었다.
연이—…놓지 마, 둘 다! 저쪽에서 무슨 진실이 나오든, 우리 이 손 안 놓는 걸로 시작하자! …가자, 붉은 실의 세계로! 마지막 진실을 향해서!
무성—…응! 안 놔! 백 년 만에 잡은 손인데, 이 정도로 안 놔!
세 사람의 손이 하나로 맞잡힌 채, 붉은 실 속으로 사라졌다. 자미두수의 궁도, 그 위 왕좌도, 저 아래 재성도 멀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인연으로 짜인 마지막 세계와, 그 안에 봉인된 백 년의 진실뿐이었다. 연이의 진짜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네오—…셋이 하나로. 간다.
제34화 · 이름을 돌려주다 — 끝. 제35화 「붉은 실의 세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