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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6부 · 자미두수, 별들의 궁

EP.33 · 34 / 44

그릇

그릇.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가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먼저 묻힌다.

한글 약 15,417자 · 읽는 시간 약 37분

부러워하는 눈. 그 한마디가 어떤 기술보다 깊이 박힌 모양이었다.

무성—…닥쳐. 네가 뭘 안다고!

소년의 동요가 물기둥이 되어 명반을 때렸다. 하지만 그 물결은 공격이라기엔 너무 울음에 가까웠다.

무성—…네가 뭘 알아! 사주가 있고, 이름이 있고, 부르는 목소리가 있는 네가! 나는 백 년을 이 왕좌 곁에서, 그림자로만 살았어! 아무도 내 이름을 안 불렀어! 부러워? 그래, 부러워! 죽도록 부러워! 그게 뭐 어때서!

소년의 외침이 명반 전체에 메아리쳤다. 백 년간 목구멍 깊이 눌러 온 그 절규가, 마침내 터져 나온 것이다. 물기둥은 사납게 몰아쳤지만, 연이는 피하지 않았다. 그 물이 공격이 아니라, 백 년 묵은 울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연이—알아. 나도 그런 눈을 한 적 있거든. 거울 속의 내가 진짜 나를 볼 때, 갖고 싶은데 못 갖는 걸 볼 때 그런 눈이 돼.

연이—…그리고 방금 네가 한 말, '부러워하는 게 뭐 어때서'. …맞아. 하나도 안 어때. 부러운 걸 부럽다고 소리치는 거, 그거 엄청 용기 있는 거야. 백 년간 삼켜 온 걸, 드디어 뱉었잖아. …무성, 잘했어. 이제 하나씩, 다 뱉어.

무성—…뱉으라고. …백 년간 삼키기만 했는데. 뱉는 법을 잊었어. …근데 방금, 소리치니까… 조금 가벼워졌어. 가슴에 얹힌 게, 아주 조금 내려간 것 같아. …이게, 뱉는 건가. 이렇게 하는 거야?

연이—…응. 그렇게 하는 거야. 잘하고 있어. …삼키는 건 안으로 쌓는 거고, 뱉는 건 밖으로 내보내는 거야. 백 년간 안으로만 쌓았으니, 얼마나 무거웠겠어. …이제 밖으로 내보내. 나한테. 네 친구한테. 다 쏟아 내도 돼.

네오—…나도 들을게, 무성. 네 백 년치. 우리 둘이면, 아무리 무거워도 나눠 들 수 있어.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뱉어. 네가 뱉는 만큼, 우리가 받을 테니까.

무성—…둘이서. …나눠 든다고. …백 년간 나 혼자 다 들었는데. 근데 너희가 나눠 들어 준다니. …이상해. 그 말만 들었는데도, 벌써 어깨가 가벼워. 아직 아무것도 안 뱉었는데. …이게, 곁에 있어 준다는 거구나.

소년의 사납던 검은 물이, 그 말들 앞에서 조금씩 잦아들었다. 백 년간 혼자 지던 무게를, 처음으로 누군가 함께 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 한마디가, 어떤 공격보다 깊이 소년의 방어를 무너뜨렸다. 연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연이—…무성. 나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네 이야기 듣기 전에, 딱 하나. …너, 원래는 뭐가 되고 싶었어? 삼키는 새 말고, 그 여자가 정하기 전에. 아주 어릴 때, 네가 진짜로 되고 싶었던 거. …그거 하나만, 먼저 말해 줄래?

무성—…원래 되고 싶었던 거. …그런 걸 물어본 사람도, 네가 처음이야. …모르겠어. 너무 오래돼서. 깃털이 뽑히면서 다 지워져서. …근데 지금 네가 물어보니까, 아주 깊은 데서 뭔가 꿈틀해. …보여 줄게. 내 처음을. 거기, 그 답이 있을지도 몰라.

연이의 그 말에, 사납던 물기둥이 조금 누그러졌다. '잘했어.' 백 년간 명령과 질책만 들어 온 소년에게, 그 두 글자는 낯설고 아득한 것이었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이를 바라보았다.

연이—무성. 너, 네 사주가 없구나.

물기둥이 뚝 멎었다.

무성—…그래. 없어. 나는 사주가 없어. 기둥도, 글자도, 태어난 시조차 없어.

연이—…사주가 없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텅 비어 보였구나. 사주는 그 사람이 언제 어떻게 세상에 왔는지, 그 시작을 새긴 거잖아. 근데 넌 그 시작이 없으니까. …무성, 그거 얼마나 외로웠어.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거. 뿌리 없이 백 년을 떠 있는 거.

무성—…외로웠어. 남들은 다 사주가 있어서, 자기 별자리를 알잖아. 나는 그런 게 없어. 그래서 늘 남의 사주를 부러워하며 봤어. 저 사람은 을목이구나, 저 사람은 경금이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다들 뭐라도 되는 게 부러웠어.

연이—…무성. 근데 사주가 없다는 건, 아직 안 정해졌다는 뜻이기도 해. …남들은 태어난 순간에 하늘이 사주를 새겨 버려서, 못 바꿔. 근데 너는 백지야. 무섭게 들리겠지만, 그거 자유이기도 해. 네가 앞으로 뭐가 될지, 아무도 안 정했어. 너 스스로 쓸 수 있어. …오늘부터. 나랑 같이.

무성—…백지. …내가 뭐가 될지 아직 안 정해졌다고. …백 년간 나는 '정해진 도구'인 줄만 알았는데. 네 말대로면,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니까, 뭐든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을목처럼, 무언가 될 수 있어? 내 별자리를, 내가 그릴 수 있어?

연이—…응. 그릴 수 있어. 네 별자리, 네가 직접. …무성, 너 원래 이야기를 낳던 샘이었잖아. 그럼 네 별자리는, 이야기의 별자리야. 남의 이야기를 삼키는 게 아니라, 낳고 지키는. …이 결투 끝나면 우리 같이 그리자. 무성이라는, 세상에 하나뿐인 별자리를.

무성—…내 별자리. …이야기를 낳고 지키는 별. …좋다. 그거 좋아. …백 년간 나는 별을 꺼뜨리기만 했는데, 내 별자리를 갖는다니. 그것도 이야기를 지키는 별을. …연이. 나 그거 하고 싶어. 진짜로. 처음으로, 되고 싶은 게 생겼어.

연이—…봐. 되고 싶은 게 생겼잖아. 그거야, 무성. 그게 살아 있다는 거야. 도구는 되고 싶은 게 없어. 사람만 있어. …너 지금, 완전히 사람이야. 백 년 만에. …그러니까 우리, 그 별자리 그리러 가자. 이 결투부터 끝내고.

무성—왜냐면 나는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졌으니까.

연이—…만들어졌다고. …그럼 넌 사주가 없는 게 당연하지. 사주는 태어난 순간의 하늘이 새겨 주는 건데, 넌 태어난 순간이 없으니까. …무성. 그거 네 잘못 아니야. 만든 사람 잘못이지. …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줄래? 나 도망 안 가. 끝까지 볼게.

무성—…정말? …백 년간 아무도 안 봐 줬는데. 다들 결과만 봤어. 삼키는 괴물, 침식하는 그림자. 그렇게 만들어진 과정은, 아무도 안 궁금해했어. …너는, 궁금해?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연이—…궁금해. 엄청. …있잖아 무성, 사람을 미워하기는 쉬워. 결과만 보면 되니까. 근데 이해하려면, 과정을 봐야 해. 왜 그렇게 됐는지. …나는 사람을 미워하러 온 게 아니라 이해하러 왔어. 그러니까 네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 줘. 그래야 내가 널 제대로 이해하지.

무성—…이해. …그 단어도 오랜만이야. 미움은 백 년간 실컷 받았는데, 이해는… 한 번도. …이상하다. 미움받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해받으려니까 왜 이렇게 무섭지. 마치 벌거벗는 것 같아. …근데, 그 무서움이… 나쁘지 않아.

연이—…그 무서움, 좋은 거야. 진짜 마음 열 때 다 그래. …괜찮아, 무성. 벌거벗어도 돼. 내가 안 비웃어. 안 미워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널 볼게. 백 년간 아무도 안 봐 준, 진짜 너를.

연이—…응. 궁금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괴물이 아니라 아이가. …보여 줘, 무성. 그래야 내가 널 제대로 읽을 수 있어. 그래야 널, 제대로 구할 수 있어.

네오—…나도 볼게. 저 애 기억 속에, 어쩌면 나랑 왕좌의 그 사람도 있을지 몰라. 백 년 전 그 밤. …무성, 두렵겠지만, 보여 줘. 우리 셋 다, 거기서 시작됐을 테니까.

소년이 후드를 벗자, 명반의 별빛이 그의 기억을 궁에 하나씩 비추기 시작했다. 열두 궁이 열두 장면이 되었다.

연이와 네오는 숨을 죽이고 그 장면들을 지켜보았다. 백 년간 아무에게도 열리지 않은 한 아이의 시작이, 우주의 운명 지도 위에 별빛으로 펼쳐졌다. 그것은 결투장이 아니라, 마치 오래 봉인된 일기장을 함께 넘겨 보는 것 같았다.

연이—…무성. 고마워. 이거 보여 주는 거, 엄청 용기 필요했을 텐데. …나 하나도 안 놓치고 다 볼게. 그리고 다 기억할게. 네가 잊어버려도, 내가 기억해 줄게. 네 시작을.

* * *

첫 번째 장면. 검은 비가 내리는 방에서, 여자의 손이 잉크에 깃털 하나를 적신다. 「너는 무성이야. 무성하게 자라서, 나 대신 저 세계를 침식할 아이지.」

연이—…검은 비. 내 꿈에 나오던 그 방이야. …그리고 저 손. 저게 그 여자, 박지은의 손이구나. 태어난 아이한테 이름을 지어 주는 게 아니라, 도구한테 기능을 새겨 넣듯 이름을 붙였어. …'침식할 아이.' 그게 네 존재 이유였어? 너무해. 너무하잖아.

소년은 그 장면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슬퍼할 힘조차 오래전에 잃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연이가 대신 울어 주자, 소년의 눈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기 대신 울어 주는 사람을, 백 년 만에 처음 본 것이다.

네오—…검은 비. 저 방. …나 저 방을 알아. 기억은 안 나는데, 저 검은 비 냄새가 내 몸에 배어 있어. 나도 저기 있었어. 백 년 전, 저 방에. …무성, 저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나랑 왕좌의 그 사람도, 저기 있었지?

무성—…파수꾼. 미안하지만, 그 밤 기억은 나도 못 꺼내. 그분이 제일 깊이 봉인한 게 그 밤이야. …다만 이건 느껴. 너, 네오. 넌 하나인데 둘로 보여. 은빛 사자랑, 검은 비 속 얼굴 없는 남자. 그 둘이 원래 한 사람이야. 저 밤에, 네가 뭔가를 버리면서 둘로 나뉜 거지. …왜, 어떻게는 몰라도.

연이—…네오가 둘로. 은빛 사자랑, 얼굴 없는 남자. …내 꿈이 맞았어. 그 둘이 자꾸 겹쳐 보이던 거. 하나였다가 갈라진 것처럼. …네오, 너 저 검은 비의 밤에 무슨 일이 있었어? 뭘 버렸길래, 둘로 나뉜 거야? …그리고 왜, 그 얼굴 없는 반쪽이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

무성—…그 답이, 그 밤의 봉인 안에 있어. 그리고 그 봉인을 풀 열쇠는… 왕좌의 그 사람이 쥐고 있을 거야. 그가 우리 셋 중 가장 많은 걸 기억하니까. 대신, 가장 많은 걸 짊어지고 있지. …그래서 그렇게 왕좌에 갇혀서, 백 년을 아파하는 거야.

두 번째 장면. 소년이 처음으로 실 한 가닥을 제대로 이었다. 여자가 아주 잠깐, 정말 반 초쯤 미소 비슷한 걸 지었다. 소년은 그 반 초짜리 미소를 다시 받고 싶어서, 그 뒤로 무슨 일이든 했다.

연이—…반 초짜리 미소. …무성, 너 그 반 초 때문에 백 년을 견딘 거야? …그 마음, 나 알 것 같아. 사랑받고 싶었던 거지. 도구가 아니라, 아이로. 그 여자가 딱 한 번만 진심으로 웃어 주길 바라면서. …근데 무성, 그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반 초로 사람을 백 년 부리는 게 아니야.

무성—…나도 알아.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 거. 백 년쯤 지나니까 알겠더라. …근데 알면서도, 그 반 초를 못 놓겠어. 그거라도 없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그 반 초짜리 미소가, 내가 그래도 뭔가이긴 하다는 유일한 증거였어. …비참하지? 그런 걸 붙들고 백 년을 산 게.

연이—…비참하지 않아. 하나도 안 비참해. …무성, 그건 네가 그만큼 사랑에 목말랐다는 거야. 그리고 사랑에 목마른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사람이라면 다 그래. …이제 그 반 초, 놓아도 돼. 대신 내가 진짜 미소를 줄게. 반 초 말고, 온전한 걸로. 우리 다 같이.

소년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백 년간 반 초짜리 미소를 구걸하며 살아온 자신이, 갑자기 온전한 미소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 말이 너무 커서, 소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저 떨기만 했다.

네오—…무성. 그 반 초짜리 미소, 나도 봤어. 근데 저건 미소가 아니야. 저건… 낚싯바늘이야. 딱 놓지 못할 만큼만 주고, 백 년을 부리는. …그 여자, 사랑을 미끼로 쓰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더 무서운 거고. …너 잘못 없어. 그 미끼, 누구라도 물었을 거야.

무성—…낚싯바늘.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덜 비참하다. 내가 멍청해서 물린 게 아니라, 그분이 그만큼 교묘했던 거니까. …근데 파수꾼, 너는 어떻게 그런 걸 알아? 미끼 같은 거.

네오—…나도 도망친 자니까. 그 여자한테서. …기억은 안 나지만, 몸이 알아. 저 미끼 물었다가, 큰 대가를 치른 것 같아. 별자리를 통째로 버릴 만큼. …그러니 무성, 이번엔 그 바늘 뱉자. 나랑 같이. 늦지 않았어.

세 번째 장면. 소년이 처음 심부름에 실패한 날. 여자는 화내지 않았다. 다만 소년의 깃털을 한 움큼 뽑아 잉크병에 되돌려 넣었다. 소년은 그날 사흘 치 기억을 잃었다.

연이—…화를 안 냈다는 게 더 무서워. 차라리 소리를 지르지. 화도 안 내고, 그냥 깃털을 뽑아서 기억을 지운다니. …그건 벌이 아니라, 부품 교체 같은 거잖아. 고장 난 도구 고치듯. …그 여자는 무성을 아이로 안 본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물건으로만.

무성—…그때 알았어. 나는 혼나는 것도 사치라는 걸. 혼난다는 건, 그래도 사람 취급이잖아. 근데 나는 그냥 조정당하는 거였어. 잘못하면 부품을 빼고, 다시 끼우고. …나는 백 년간, 한 번도 혼난 적이 없어. 사람이 아니니까.

연이—…무성. 그럼 내가 처음으로 혼내 줄까? …아니다. 안 혼낼래. 대신 처음으로 칭찬해 줄게. 너 여기까지 버틴 거, 진짜 대단해. 백 년을 부품 취급받으면서도, 마음 한 조각 안 잃은 거. 그거 아무나 못 해. …잘 버텼어, 무성.

깃털이 뽑힐 때마다 기억이 지워졌다. 어제 뭘 잘못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싶었는지까지. 소년은 매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지워지는 건 아프지도 않아서, 더 무서웠다.

연이—…그래서였구나. 네가 옛일을 기억 못 하는 거. 네오랑 얽힌 그 검은 비의 밤도. …그 여자가 벌 대신 네 기억을 지운 거야. 좋아하는 것도, 되고 싶었던 것도 다. …무성, 너는 지워지고 또 지워져서, 결국 '삼키는 도구'만 남은 거야. 네가 누군지도 모르게.

네오—…그래서 나도 저 애를 기억 못 하는 건가. 저 애 기억이 지워질 때, 나랑 얽힌 부분도 같이 지워진 거야. …젠장. 백 년 전 그 밤, 우리 셋한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여자는 왜 이렇게까지.

연이—…무성. 걱정 마. 지워진 기억, 내가 되찾아 줄게. 나 그거 잘해. 삼켜진 이야기도 읽어서 살리는데, 지워진 기억도 읽어서 되쓸 수 있어. …네가 좋아했던 거, 되고 싶었던 거, 다시 알려 줄게. 백 년 전 그 밤도, 다 밝혀 줄게.

소년의 눈에, 아까와는 다른 빛이 스쳤다. 부러움도 절망도 아닌, 아주 오래 잊고 있던 감정. 기대. 어쩌면 나도 나를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백 년 만의 아득한 기대였다.

다섯 번째 장면. 소년이 처음으로 하늘을 삼켰다. 재성 어느 마을의 별 하나가, 소년의 검은 물에 잠겨 사라졌다. 그 별 안에는, 서로 사랑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소년은 그 이야기가 자기 안에서 꺼져 가는 걸 느끼며, 처음으로 삼킨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무성—…그때 처음 알았어. 삼킨다는 게, 누군가의 사랑을 끄는 일이라는 걸. …울고 싶었어. 근데 울면 그분이 깃털을 뽑을 테니까, 못 울었어. 그냥 삼키고, 삼키고, 또 삼켰어. 울음도 같이 삼키면서.

연이—…무성. 너 그 울음, 백 년치 다 삼켰겠다. …이제 뱉어도 돼. 그 삼킨 울음, 나한테 다 뱉어. 내가 다 받을게. 백 년치 울음, 한 방울도 안 버리고 다 받아 줄게.

무성—…울음을, 받아 준다고. …어떻게 받아. 그건 그냥 눈물인데. 아무 쓸모도 없는. …그분은 눈물은 낭비라고 했어. 울 시간에 하나 더 삼키라고. …근데 너는, 그 낭비를 받아 주겠다고.

연이—…눈물은 낭비가 아니야, 무성. 눈물은, 마음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야.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는 거잖아. …네 백 년치 눈물, 그거 다 네가 아직 사람이라는 증거야. 그러니까 실컷 울어. 낭비 아니야. 그거 제일 값진 거야.

소년의 검은 물이, 처음으로 눈물처럼 맑아졌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그 한 방울은 오염된 오수가 아니라 투명한 눈물이었다. 백 년 만에, 무성이 삼키는 대신 흘렸다. 그리고 그 맑은 한 방울이, 연이의 손바닥에 조용히 떨어졌다.

여섯 번째 장면. 소년이 딱 한 번, 명령을 어겼다. 삼키라는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차마 못 삼키고 놓아준 것이다. 그날 밤, 여자는 소년의 깃털을 절반이나 뽑았다. 소년은 그 뒤로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를 반쯤 잃었다.

연이—…한 번, 착한 일을 했다고. 슬픈 이야기를 못 삼키고 놓아줬다고. 그 벌로 감정을 반이나 뺏겼어. …그 여자는 무성이 착해지는 걸 제일 무서워했구나. 착한 도구는, 삼키질 못하니까. …무성, 근데 봐. 넌 그렇게 뺏기고도, 방금 또 착한 선택을 했잖아. 반쯤 남은 그 마음으로.

일곱 번째 장면. 소년이 물었다. 「저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여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들? 너는 내 그릇이야. 힘을 봉인해 담아 두는 예쁜 그릇.」

연이—…그릇. …또 그 말이야. 무성, 너도 그릇이었어? …잠깐. 그럼 이제 알겠어. 그 여자는 '그릇'을 만들어서, 거기에 힘이랑 이야기를 담는 사람이야. 너는 그 여자의 힘을 담는 그릇이었고. …그리고 나는. 나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을 마지막 그릇이야.

무성—…이제 알겠어? 그래. 나는 그분의 힘을 담아 봉인하는 그릇. 백 년간 세상의 이야기를 삼켜 모은 것도, 결국 너라는 마지막 그릇에 한꺼번에 부으려는 준비였어. …너는 완성된 사주. 세상의 모든 걸 담고도 안 깨지는, 유일한 그릇. 그래서 그분이 백 년을 기다린 거야. 너를.

연이—…그럼 그 여자의 계획은 이거구나.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삼켜서(=무성), 그걸 나한테 담고(=완성된 그릇), 나를 통째로 제 곳간에 거둬들이는 것(=컬렉션의 정점). …제 텅 빈 구멍 하나 채우려고, 온 세계랑 나를 다 긁어 담는 거야. …끔찍하다. 근데… 그 텅 빈 목마름이, 미워할 수만은 없어서 더 끔찍해.

네오—…연이. 그럼 너, 여기 온 순간부터 표적이었던 거야. 그 여자가 백 년을 기다린 마지막 그릇이. …나 너 그렇게 못 보내. 네가 통째로 부어져 사라지는 거. 절대 안 돼. …이 결투, 무성만의 문제가 아니었어. 네 목숨이 걸린 거였어.

연이—…네오. 걱정 마. 나 안 부어져. 아까도 말했잖아. 그릇은 쓰임을 내가 정한다고. …그 여자는 나를 붓는 데 쓰려 하지만, 나는 나눠 돌려주는 데 쓸 거야. 같은 그릇, 정반대 쓰임.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잖아. 너도, 무성도, 다들 있잖아. 우리가 있는 한, 나 안 부어져.

무성—…연이. 미안해. 나도 몰랐어. 아니, 알았지만 안 미안했어. 백 년간 삼키기만 했으니까. …근데 지금은 미안해. 네가 그 마지막 그릇이라는 게. 그리고 그걸 만드는 데, 나도 한몫했다는 게. …이 결투 끝나면, 내가 꼭 갚을게. 너를 지키는 걸로.

드디어 '그릇'의 정체가 드러났다. 연이의 완성된 사주는, 이 궁이 백 년을 들여 준비한 마지막 그릇. 삼켜진 모든 이야기가 그 안에 담겨, 그 여자의 곳간으로 통째로 거둬들여질 예정이었다. 연이가 재성부터 걸어온 그 모든 여정이, 사실은 이 그릇을 굽는 과정이었을지도 몰랐다.

연이—(…소름 돋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 여정이 그 여자 손바닥 위였을 수도 있어. 근데 그게 다는 아니야. 내가 재성에서 만난 사람들, 도서관에서 배운 본뜻, 그건 그 여자가 안 짠 거야. 내가 스스로 얻은 거야. …그릇은 그 여자가 구웠어도, 그 안에 뭘 담을지는 내가 정해.)

무성—…연이. 무섭지 않아? 네 모든 여정이 짜인 거였을지도 모른다는 게. …나는 그거 알았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렸는데. 내 존재 전부가 남의 계획이었다는 게.

연이—…무섭지. 당연히 무섭지. 근데 무성, 그거 알아? 짜인 각본이라도, 연기하는 건 나야. 각본이 '삼켜져라'라고 써 있어도, 내가 '안 삼켜진다'로 애드리브 치면 되는 거야. …인생은 각본대로 안 가. 특히 나 같은 애가 주인공이면 더더욱. 나 애드리브 진짜 잘하거든.

연이—…무성. 근데 나 아까도 말했지. 그릇은 붓는 데만 쓰는 게 아니야. 담아서 나누는 데도 써. …그 여자는 나를 한 아이한테 쏟아부으려 하지만, 나는 이 그릇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원래 주인들한테 하나씩 나눠 돌려줄 거야. 너한테도. 네 지워진 기억도, 이 그릇으로 되찾아 줄게.

무성—…내 지워진 기억까지. …그럼 나도 알 수 있어? 내가 뭘 좋아했는지, 백 년 전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오랑 왕좌의 그 사람이랑 내가 무슨 사이였는지. …다, 되찾을 수 있어? 그 여자가 뽑아 간 내 깃털들을, 다시?

연이—…응. 다. 나 그거 잘한다니까. 값이 아니라 뜻을 읽는 사람. 지워진 것도, 삼켜진 것도, 다 다시 읽어서 되쓰는 사람. …무성, 이 결투 끝나면 우리 제일 먼저 그거 하자. 네 지워진 백 년, 하나씩 되찾기. 네가 누구였는지, 다시 알기. …네 이름 옆에, 네 이야기도 돌려줄게.

무성—…이상해. 너랑 얘기하다 보면, 백 년간 불가능하다고 믿은 게 다 가능해 보여. …되찾는 것도, 나누는 것도, 이름을 갖는 것도. …네가 무슨 마법사라도 되는 거야? 아니면, 원래 세상이 이렇게 따뜻한 건데, 내가 백 년간 그걸 몰랐던 거야?

연이—…후자야, 무성. 세상은 원래 따뜻한 데도 많아. 네가 백 년간 제일 차가운 데만 있어서 몰랐을 뿐이야. …이제 따뜻한 데로 나오자. 재성에도, 도서관에도, 우리 자취방에도. 따뜻한 데 천지야. 내가 다 데려가 줄게.

무성—…재성. 도서관. 자취방. …거기, 어떤 데야? 나 삼켜진 이야기들 속에서 봤어. 재성은 시장이 시끌시끌하고, 도서관은 책 냄새가 나고. …근데 직접 가 본 적은 없어. 늘 저 위에서, 삼키기만 했으니까. …나도 거기, 진짜로 가 볼 수 있어? 삼키러 말고, 그냥 놀러?

연이—…응. 놀러. 삼키러 말고. …재성 가면 모카가 무대 보여 줄 거고, 빵집 언니가 갓 구운 빵 줄 거고. 도서관 가면 백문 님이 제일 좋은 책 추천해 줄 거야. 자취방 오면… 음, 좁아서 미안한데, 삼각김밥은 나눠 먹을 수 있어. …다 같이. 너도 우리 중 하나로.

무성—…삼각김밥. …나 그거 삼켜진 이야기 속에서 봤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나눠 먹는다고? 나랑? …백 년간 나는 뭘 나눠 본 적이 없어. 다 삼키기만 했지. …나눈다는 거, 어떤 느낌일까. …해 보고 싶어. 너랑, 삼각김밥 나누는 거.

연이—…그래. 꼭 하자. 이 결투 끝나고, 다 끝나고. 삼각김밥 하나 딱 반으로 갈라서. …그게 우리 첫 번째 '나눔'이야, 무성. 삼킴이 아니라 나눔. …그 약속, 내가 꼭 지킬게. 그러니까 너도 살아서 나와. 인형 말고, 무성으로.

네오—…삼각김밥이면 나도 껴. 참치마요는 내 거야. …무성, 나눈다는 거 별거 아니야. 반으로 갈라서 하나씩 먹는 거야. 근데 그 별거 아닌 게, 백 년 삼킴보다 훨씬 배불러. …이상하지? 나눴는데 더 많아지는 거. 그게 나눔이야.

무성—…나눴는데 더 많아진다. …그런 셈은 처음 들어. 그분 셈으론, 반으로 가르면 반이 되는데. …너희 셈은, 반으로 갈랐는데 오히려 커지네. …이상한 셈이야. 근데… 그 이상한 셈, 배우고 싶어. 나도 그렇게 셈하고 싶어. 삼키는 셈 말고, 나누는 셈.

연이—…배워, 무성. 우리가 다 가르쳐 줄게. 나누는 셈. 함께 사는 셈. 하나가 살면 다 사는 셈. …그 여자 셈이랑 정반대인, 우리 셈. …그거 다 배우고 나면, 너 진짜 무성한 숲이 될 거야. 아무도 못 삼키는, 다 품는 숲.

여덟 번째 장면. 소년이 처음으로 거울을 봤다. 거기 비친 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검은 깃털과 물이 뒤엉킨 형상이었다. 소년은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삼킨 이야기 속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흉내 내며, 자기 얼굴을 상상했다.

연이—…자기 얼굴도 몰랐구나. …무성, 너 지금 얼굴 있어. 보랏빛 눈에, 마른 볼에, 백 년을 견딘 어깨. 예뻐. 진짜야. …이 결투 끝나면 거울 보여 줄게. 네 진짜 얼굴. 흉내 낸 거 말고, 무성이라는 아이의 얼굴을.

아홉 번째 장면. 소년이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삼켜지기 직전의 어느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속삭인 것이다. 「…그래도,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마워.」 소년은 그 말을 백 년간 잊지 못했다. 삼키는 자에게 건네진, 유일한 감사였으니까.

무성—…그 이야기가 그랬어. 삼켜지면서도, 나한테 고맙다고. 자길 삼키는 놈한테. …왜 고맙냐고 물었더니, '삼켜져도, 네 안에서는 내가 안 잊히니까'라고. …그 말이, 백 년간 나를 버티게 했어. 나도 누군가를 기억하는 존재일 수 있다는 게.

연이—…그 이야기, 참 곱다. 삼켜지면서도 삼키는 널 위로하다니. …무성, 봐. 네가 삼킨 것들은 다 그렇게 고운 이야기였어. 미움이 아니라. 그러니까 네 안엔, 백 년치 고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거야. 넌 괴물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많은 이야기를 품은 아이야.

열 번째 장면. 소년은 마침내 알아 버렸다. 제 이름 무성이 사실은 '성(姓)이 없는 자'라는 뜻의 말장난이었다는 것을.

연이—…무성(無姓). 성이 없는 자. …이름조차 놀림이었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인 줄 알았던 게, 사실은 '너는 성도 없는 존재'라는 조롱이었어. …어떻게 그래. 아이한테. 하나뿐인 이름을, 그렇게 잔인한 말장난으로. …그 여자, 정말 사랑이라는 걸 아는 사람 맞아?

무성—…처음엔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인 줄 알았어. 그래서 열심히 자라려고 했어. 그분 마음에 들려고. …근데 어느 날 알았지. 그게 '성 없는 자'라는 뜻이라는 걸. …그날, 나는 자라기를 멈췄어. 자라 봐야, 성도 없는 놈일 뿐이니까.

네오—…잔인하다. 이름으로 사람을 그렇게 옭아매다니. …무성, 근데 이름이란 건 원래 새길 수도, 다시 쓸 수도 있는 거야. 나도 '네오'라는 이름, 내가 골랐어. 도망치면서. …너도 네 이름 다시 쓰면 돼. 그 여자가 새긴 조롱 말고, 네가 고른 뜻으로.

연이—…맞아. 그래서 내가 아까 무성(茂盛)으로 다시 읽어 준 거야. …무성, 너 그날 자라기를 멈췄다고 했지? 이제 다시 자라도 돼. 무성하게. 우거지게. 성 없는 자가 아니라, 온 세상을 이야기로 뒤덮는 무성한 숲으로. …네 이름값, 이제부터 진짜로 하자.

무성—…다시 자라도 된다고. …백 년간 멈춰 있던 게, 다시 자랄 수 있다고. …연이, 네오. 너희 자꾸 나한테 '다시'라는 말을 주네. 다시 자라고, 다시 친구 하고, 다시 이름 쓰고. …그 '다시'가, 이렇게 따뜻한 말인 줄 몰랐어.

열한 번째 장면. 소년이 처음으로 도망을 꿈꿨다. 저 아래 세계로,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사는 곳으로. 그러나 문 앞에서 멈췄다. 도망쳐 봐야 갈 곳이 없었다. 이름도, 집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아이에게, 도망은 그저 더 큰 어둠일 뿐이었다.

연이—…문 앞에서 멈춘 아이. …무성, 이제 도망 안 쳐도 돼. 갈 곳 생겼으니까. 나 있잖아. 네오 있잖아. 재성에 루나도, 모카도, 언니도 있어. …이제 네가 도망칠 곳이 어둠이 아니라, 우리한테로야. 언제든 와. 문 활짝 열어 둘게.

네오—…나도 도망쳤어, 무성. 이 궁에서. 근데 나는 갈 곳이 있었어. 연이가 있는 세계. …너도 이제 갈 곳이 있어. 우리가 네 갈 곳이야. 도망이 아니라, 귀가야. 집에 오는 거.

열두 번째 장면. 별들 사이로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지나갔다. 누구는 엄마가 불렀고, 누구는 친구가 불렀다. 소년은 그 부름을 하나하나 세었다. 세다 보면 언젠가 제 차례도 올 것 같아서. …물론, 오지 않았다.

연이—…이름을 세는 아이. …저기 저 별 밑에서, 남들 이름 불리는 걸 세면서, 언젠가 내 차례도 오겠지 하고 기다린 아이. …무성. 그 차례, 지금 왔어. 내가 부를게. 지금부터, 네 이름을. 조롱이 아니라, 진심으로.

연이의 말에, 열두 장면의 기억들이 별빛으로 흩어졌다. 백 년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자신의 시작을, 소년은 이 이상한 손님에게 다 열어 보였다. 그리고 그 손님은, 도망치기는커녕 대신 울어 주고 있었다.

네오—…무성. 방금 그 기억들, 나도 봤어. 근데 백 년 전 그 밤, 나랑 왕좌의 그 사람이 나오는 장면은 없더라. …그 여자가, 거기만 특별히 더 깊이 지운 거야. 우리 셋이 얽힌 그 밤을. …제일 중요한 걸, 제일 꼼꼼히 숨겼어.

무성—…맞아. 그 밤 기억만, 유독 더 깊이 봉인돼 있어. 나도 못 꺼내. 그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그 밤이니까.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이 모든 봉인이 풀릴지도 몰라.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꽁꽁 숨긴 거야.

연이—…그럼 그 밤이 열쇠네. 네오가 둘로 나뉜, 그 검은 비의 밤. 그걸 밝히면, 이 모든 매듭이 풀려. …좋아. 그 밤의 진실, 반드시 찾아낼게. 근데 그 전에, 지금은 널 저 실에서 꺼내는 게 먼저야.

연이—…무성. 방금 그 열두 장면 보면서, 나 하나 확실히 알았어. 너, 삼키는 도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 반대였어. 누군가한테 불리고 싶었고, 무언가를 낳고 싶었어. 백 년간 그 소원을, 아무한테도 못 들키게 꾹꾹 눌러 뒀지.

무성—…어떻게 알아, 그걸. 나도 인정 안 하려고 백 년을 애썼는데. …그래. 맞아.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도구 말고. 근데 그런 소원 품는 것 자체가, 그분한테 들키면 벌받을 일이라서. 제일 깊은 데 숨겨 뒀어. 나도 잊을 만큼 깊이.

연이—…무성. 그 숨겨 둔 소원, 안 잊었어. 네 제일 깊은 데, 아직 살아 있어. 내가 봤어. …괜찮아. 그 소원, 부끄러운 거 아니야. 그리고 그거, 내가 꼭 이뤄 줄게. 네가 사람이 되는 거. 반드시.

* * *

별빛이 꺼지고 소년만 남았다. 세상에서 제일 큰 무대 한가운데, 제일 혼자인 채로.

연이—…제일 큰 무대, 제일 혼자. …무성, 나 그 기분 알아. 사람 많은 강의실에서, 나 혼자만 아무도 안 부르는 것 같던 그 기분. …근데 넌 그걸 백 년을 했구나. 나는 몇 시간만 그래도 숨 막히던데. …어떻게 버텼어. 어떻게, 안 부서지고 여기까지 왔어.

무성—…안 부서졌다고? …부서졌어. 여러 번. 근데 그때마다 그분이 깃털을 뽑아서, 부서진 기억을 지웠어. 그래서 나는 내가 부서졌다는 것도 몰라. …어쩌면 그게,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일지도. 아픈 걸 기억 못 하니까, 계속 삼킬 수 있었던 거지.

연이—…그럼 이제 기억해. 아픈 것도, 부서진 것도. 내가 옆에 있을게. 혼자 기억하면 무너지지만, 둘이 기억하면 견딜 수 있어. …무성, 네가 백 년간 잃어버린 그 모든 아픔, 이제 나랑 같이 하나씩 되찾자. 그리고 그 자리에, 새 기억을 채우자. 친구랑 웃는 기억으로.

소년은 오래 연이를 바라보았다. 백 년간 이 광막한 무대에서 혼자였는데, 지금 그 무대 위에 누군가 함께 서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그냥 곁에 있어 주는 누군가가. 소년의 눈에서,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무성—연이. 나는 네가 부러웠어. 빼앗긴 사주라도, 되찾을 사주가 있다는 게. 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강 건너까지 줄을 선다는 게.

무성—…처음 강에서 너를 봤을 때. 겁먹은 꽃돼지 한 마리였는데. 근데 그 뒤로, 사람들이 하나씩 네 곁에 모이더라. 토끼도, 여우도, 빵집 언니도, 파수꾼도. …나는 그걸 백 년간 지켜봤어. 부러워서. 나는 왜 아무도 안 모이지, 하면서. …그래서 네 세계를 삼키라는 명령이, 이상하게 덜 미안했어. 나는 못 가진 걸, 너는 너무 많이 가졌으니까.

연이—…무성. 미안. 나 그런 것도 모르고. 저기 위에서 누가 그렇게 외롭게 나를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친구들이랑 웃고 있었네. …근데 무성. 그 사람들이 나한테 모인 거,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야. 내가 먼저 다가가서, 먼저 손 내밀어서야. …너도 할 수 있어. 아니, 지금 하고 있잖아. 나한테 마음 열고 있잖아.

무성—…내가, 지금 마음을 열고 있다고? …그런가. …이상하다. 백 년간 아무한테도 못 연 마음이, 너한테는 자꾸 열려. 네가 자꾸 다가와서. 네가 자꾸 물어봐서. …이게, 친구가 생기는 건가. 이런 느낌인가.

연이—…무성. 너 이름이 없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안 불러 준 거였구나. 그거, 사실 내가 제일 잘 알아. 세상이 나만 쏙 빼고 돌아가는 기분.

무성—…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는 강 건너에 이름을 불러 줄 친구가 그렇게 많은데.

연이—지금은 그렇지. 근데 그 친구들, 처음엔 다 낯선 사람이었어. 이름은 부르니까 이름이 되는 거야. 안 불러 주면, 아무리 예쁜 글자라도 그냥 잉크 얼룩이고.

연이—무성. 네 이름, '성 없는 자'라는 조롱이랬지? 근데 나는 그 이름을 다르게 읽을래. 무성(茂盛). 무성하게, 우거지게 자란다는 뜻으로. …너는 삼키는 새가 아니라, 원래는 이야기를 무성하게 낳던 샘이었잖아. 그 뜻이 네 진짜 이름이야. 그 여자가 붙인 조롱 말고.

무성—…무성(茂盛). 우거질 무, 성할 성. …그렇게도 읽을 수 있어? 같은 소리인데, 그렇게 다른 뜻으로. …백 년간 나는 '성 없는 자'로만 나를 알았는데. 네가 부르니까… 갑자기 다른 아이가 된 것 같아.

연이—…거봐. 이름은 부르는 사람이 뜻을 정하는 거야. 그 여자는 널 조롱으로 불렀지만, 나는 널 무성한 숲으로 부를게. …무성아. 우거진 아이야. 이제 그 이름값 하러 가자. 삼키지 말고, 다시 낳는 걸로.

소년은 그 부름에 오래 침묵했다. '무성아.' 다정하게 불린 제 이름이, 백 년간 굳어 있던 무언가를 안에서 녹였다. 조롱의 이름이, 처음으로 축복의 이름이 되는 순간이었다. 소년의 보랏빛 눈에, 별빛 한 점이 되돌아왔다.

무성—나는 이기면 네 사주를 왕좌에 바쳐야 해. 그분의 명령이니까. 그분의 힘이 내 안에 봉인돼 있으니까. 그릇은 담긴 것을 거역할 수 없거든.

연이—…담긴 것을 거역할 수 없다. …무성, 근데 방금 너 거역했잖아. 나한테 마음 열었잖아. 나를 사람으로 봐 줬잖아. 그거 다, 그 여자 명령에 없던 거야. …너 이미 조금씩 거역하고 있어. 그릇 안에 담긴 게 그 여자 힘만이 아니라는 거야. 네 마음도, 거기 담겨 있어.

무성—…내 마음도. …그런가. 봉인된 그분 힘 밑에, 아주 작게, 내 마음도 있었나. …근데 그 마음 쓰면, 그분이 알아채. 그럼 실을 당겨. 아까처럼. …그래서 백 년간 내 마음을 안 쓴 거야. 쓰면, 벌받으니까. 기억이 지워지니까.

연이—…그럼 이번엔 나랑 네오가 있잖아. 그 여자가 실을 당기면, 네오가 그 실을 끊을 거고, 나는 네 마음을 붙잡을게. …무성, 이번엔 너 혼자 마음 쓰는 거 아니야. 우리가 같이 지켜 줄게.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네 마음 써. 거역해. 처음으로.

네오—…맞아. 실은 내가 맡을게. 나 이래 봬도 실 다루는 건 좀 하거든. 백금 실로 백 년을 벼렸어. 그 여자 실이 아무리 질겨도, 무성 네가 마음 쓸 틈 정도는 내가 벌어 줄게. …그러니까, 연이 말대로 해. 거역해 봐.

네오—…그분. 무성, 그 여자의 이름을 말해.

무성—말할 수 없어. 그 이름이 계약을 붙드는 말이라서. 그릇이 제 안에 담긴 것의 이름을 발음하면, 그릇은 깨져 버려.

연이—그럼 됐어. 이름은 안 물을게. 무성, 우리 결투 계속하자.

무성—…뭐?

연이—단, 종목만 바꾸자. 힘 대결 말고 읽기 대결로. 내가 네 진짜 마음을 읽어낼게. 네 안에 봉인된 그 여자 말고, 너를.

무성—…읽기 대결? 그런 게 어디 있어. 왕좌의 법엔 그런 종목 없어. …그리고 내 마음을 읽는다니. 백 년간 나도 못 찾은 걸, 네가 어떻게. …나는 이제 삼키는 도구 말고는 아무것도 안 남았다니까.

연이—…있어. 방금 나 벌써 읽었어. 무성(茂盛), 우거진 숲이 되고 싶었던 아이. 반 초짜리 미소에 백 년을 건 아이. 남들 이름 세면서 제 차례를 기다린 아이. …봐, 다 읽었잖아.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었어. 내 눈엔 처음부터 그렇게 보였어.

무성—…그걸 다. …네가 다 봤어. 내가 백 년간 아무한테도 못 보여 준 걸. …이상해. 읽혔는데, 하나도 안 무서워. 오히려… 후련해. 누가 나를 봐 줬다는 게. …이게, 읽힌다는 거구나.

연이—…그래. 이게 읽기 대결이야. 나는 너를 읽어서 살리고, 그 여자는 너를 도구로 봉인해 죽여. …무성, 너 이제 선택할 수 있어. 도구로 남을지, 사람으로 살지. …나는 너를 사람으로 읽었어. 이제 네 차례야.

무성—…선택. …백 년간 나는 선택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어. 그분이 시키면 했고, 시키면 삼켰어. …내가 뭘 선택할 수 있다고? 나 같은 게. 봉인된 도구가. …무섭다. 선택한다는 거. 잘못 고를까 봐. 또 벌받을까 봐.

연이—…무성, 선택엔 잘못된 게 없어. 네가 고른 거면, 그게 네 거야. …그리고 봐. 너 방금 이미 선택했어. 나한테 마음 열기로. 네 기억 보여 주기로. 그거 다 네가 스스로 고른 거야. 벌 안 받았잖아? 오히려 친구가 생겼잖아. …선택, 생각보다 안 무서워. 한번 해 봤으니 알잖아.

무성—…그러네. 나 이미 선택했네. 너한테 마음 연 거. …그럼 하나 더 선택할래. 이 결투, 그만두는 거. 너를 안 삼키는 거. …그분 명령보다, 방금 생긴 이 친구가 더 중요하니까. 백 년 만에 처음 생긴 친구니까. …이게 내 선택이야, 연이.

연이—…무성. …잘 골랐어. 진짜 잘 골랐어. …봐, 너 선택 잘하잖아. 백 년 만에 첫 선택인데, 완벽했어. …이제 우리 친구야. 진짜로. 아무도 못 떼어 놔. 그 여자 실도, 뭐도.

소년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어이없음의 밑바닥에서, 아주 작은 기대가 별처럼 깜빡였다.

무성—…연이. 나, 네 읽기 대결 받을게. 도구 말고, 사람으로.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스스로 선택했어. 이 결투를 멈추기로. 너를 안 삼키기로. 내 진짜 이름, 무성(茂盛)으로 살기로. …고마워, 연이. 나를 사람으로 읽어 줘서.

연이—…무성. 잘 선택했어. 진짜 잘했어. …이제 됐어. 우리 같이, 이 궁을 다 풀자. 왕좌의 그 사람도, 저 시들어 가는 별도, 그 여자도. …네가 첫 단추야. 도구가 마음을 되찾은 게, 이 모든 걸 바꾸는 시작이야.

네오—…무성. 고마워, 나를 사람으로 봐 줘서. …그리고 부탁 하나. 이 궁을 잘 알지? 저 여자한테 가는 길, 안내해 줄래? 그리고 이 궁 어딘가에, 검은 비 냄새를 두른 오래된 목소리가 있는 것 같아. 자꾸 가슴이 아파. 그것도 찾아야 해.

무성—…응. 안내할게. 나만 아는 지름길이 있어. …그리고 파수꾼, 네가 말한 그 목소리. 나도 느껴. 이 궁 깊은 곳, 검은 비를 두른 잔상 하나가 얽혀 있어. …연이. 그 목소리 만나면 놀라지 마. 어쩌면 네오랑 관련된, 네 꿈에 나온 그 얼굴일지도 몰라.

연이—…내 꿈에 나온 얼굴. …얼굴 없는 남자. 검은 비 속에 서서 나한테 미안하다던. …그 목소리가, 네오의 버려진 반쪽이야? …무성, 그거 대체 뭐야?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왜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였다고—

바로 그때였다. 소년의 그림자가 소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성이 그 오래된 비밀을 입에 올리려는,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바로 그 순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힘이 저 어둠 너머에서 개입한 것이다.

그림자에서 검붉은 실이 자라나, 소년의 목과 팔과 깃털을 인형처럼 옭아맸다. 무성이 되찾으려던 별빛 한 점이, 그 실에 의해 다시 꺼졌다. 백 년의 봉인이, 단 한순간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무성—크윽, 안 돼. 그분이 직접 줄을 당기고 있어. 도망쳐, 연이! 지금부터 나는 내가 아니게 돼!

연이—무성?! …저 검붉은 실. 아까 그 검은 실보다 더 진해. 그 여자가 직접 나선 거야. …무성, 버텨! 방금 네가 한 선택, 그거 진짜야! 그 실이 아무리 당겨도, 네가 사람이라는 건 안 지워져! 나 안 도망가! 너 놓고 안 가!

무성—안 돼…! 내 몸이, 손이… 말을 안 들어. 그분 힘이 나를 통째로… 연이, 지금 네 앞에 선 건 무성이 아니야. 그분의 인형이야. 이 인형이 널 삼키기 전에, 제발… 크윽!

네오—연이, 안 돼! 저 애가 다시 삼켜지고 있어! 방금 마음을 되찾았는데! …젠장, 저 검붉은 실. 내 눈에도 보여. 저건 세계의 실이야. 한 사람이 세상 전체를 붙들 만큼, 지독하게 질긴. …나 혼자 칼로는 못 끊어.

연이—무성! 방금 네가 한 선택, 그거 안 지워져! '무성(茂盛)으로 살겠다'고 했잖아! 그 말, 붙잡고 있어! 그 여자가 실을 당겨도, 네가 스스로 고른 건 못 뺏어! …무성, 내 목소리 들려? 나 여기 있어! 안 가!

소년이 안간힘을 썼다. 되찾은 별빛 한 점을 지키려고, 검붉은 실에 맞서 온몸을 떨었다. 하지만 백 년의 봉인은 너무 깊었고, 세계의 실은 너무 질겼다. 소년의 저항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검붉은 실이 소년을 완전히 옭아맸다. 방금까지 눈물 흘리던 아이의 얼굴 위로, 표정 없는 인형의 가면이 씌워졌다. 보랏빛 눈이 텅 빈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텅 빈 눈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정하고, 잔인한, 여자의 목소리가.

「…거기까지다, 손님. 내 그릇을 너무 오래 붙들어 두었구나. 무성이 흔들리는 건, 내가 용납하지 않아. …이제 내가 직접 상대해 주마. 완성된 그릇아. 네가 얼마나 버티는지, 내가 직접 보자꾸나.」

연이—…그 여자. 박지은. 무성을 통해서 직접 말을 거는 거야. …좋아요. 드디어 만나네요. 미워하러 온 거 아니에요. 당신이 부순 것들도, 무성도, 당신도 다 살릴 길을 찾으러 왔어요. …자, 당신 인형 뒤에 숨지 말고. 우리 제대로 얘기해요.

「…다 살린다? …순진한 아이로구나. 세상에 공짜로 사는 목숨은 없다. 하나가 살려면, 하나는 죽어야 하지. 그게 셈의 법칙이야. 나는 백 년간 그 셈을 배웠다. …너는 그 셈을 모르니, 그렇게 웃으며 '다 살린다'는 헛소리를 하는 게지.」

연이—…셈의 법칙. 하나 살면 하나 죽는다. …그거, 당신이 백 년간 믿어 온 거죠. 근데 그거 진짜일까요? …나는 재성에서 봤어요. 다 죽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서로 손잡아서 다 산 걸. 셈으로는 불가능한 게, 마음으로는 되더라고요. …당신은 그 마음을, 백 년간 잊은 것뿐이에요.

네오—…연이 말이 맞아. 나도 봤어. 청토끼 금고에서, 재성의 결전에서. 셈으로 치면 우리가 졌어야 했어. 근데 안 졌어. 서로 지켜서. …그 여자. 당신 셈은 정확하지만, 세상은 셈보다 크다는 걸 몰라. 사람 마음은, 셈에 안 들어가는 변수야.

「…변수라. …그래, 나도 한때 그 변수를 믿었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던 시절엔. 마음이 셈을 이길 거라 믿었어. …그러나 그 마음은, 그 사람을 끝내 내 것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지. 그러니 나는 변수를 지웠다. 이제 내 세계엔 셈만 있어. 변수가 없는 셈만이, 확실하니까.」

연이—…사랑하던 사람. …당신, 누군가를 사랑했었구나. 온 마음을 걸고. …근데 그 사람이 당신을 안 봤구나. 그래서 이렇게 됐구나. …얼마나 아팠어요.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딴 데만 보는 거. …그 사람이 누구예요? 지금 어디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굳었다. 연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곳을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그 굳은 침묵 속에서, 연이는 확신했다. 박지은과 그 사랑하던 사람 사이에, 백 년의 가장 아픈 짝사랑이 가로놓여 있음을.

연이—…말 안 해도 돼요. 근데 박지은 씨. 그 사람이 당신을 안 봐서, 얼마나 미웠을까요. 근데 미움 밑엔 늘 사랑이 있죠. …당신, 아직도 그 사람 사랑하죠? 그래서 셈으로 다 덮으려는 거고요. 잊으려고. …근데 안 잊히죠. 사랑은, 셈으로 못 덮어요.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다만 인형이 된 무성의 눈에서, 여자의 것이 아닌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여자의 슬픔이, 무성의 몸을 빌려 잠깐 새어 나온 것이다. 백 년간 얼려 둔 그 눈물이, 연이의 말 앞에서 실수처럼 흘러내렸다.

연이—…봐요. 당신 지금 울고 있어요. 무성 눈을 빌려서. …박지은 씨, 당신 안에 아직 마음이 살아 있어요. 셈으로 다 덮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위에서 만나요. 얼굴 보고, 제대로. 그리고 그 얼어붙은 마음, 같이 녹여요. 당신도 울 수 있게.

「…그만. …그만하라 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급히 무성의 눈물을 거뒀다. 흔들리는 자신을 들킨 것이 두려운 것이다. 여자는 서둘러 다시 셈의 얼음으로 마음을 봉했다. 그리고 그 봉인과 함께, 무성을 향한 명령이 더 사나워졌다.

연이—…도망치시네요, 박지은 씨. 자기 눈물한테서. …괜찮아요. 지금은 도망쳐도. 근데 위에서 만나면, 그땐 못 도망쳐요. 제가 당신 그 눈물, 끝까지 읽어 드릴 테니까. …무성, 준비됐지? 그 여자 명령이 더 세질 거야. 근데 우리도 더 세지면 돼.

네오—…연이. 방금 저 눈물, 나도 봤어. 저 여자, 무너지기 직전이야. 백 년 얼음이 실금 갔어. 네 말들이 그렇게 만든 거야. …좋아. 그럼 저 인형을 부수는 게 아니라, 저 실을 끊고 무성을 꺼내는 데 집중하자. 그게 저 여자한테도 가장 아픈 한 방일 테니까.

연이—…응. 무성을 꺼내는 게, 그 여자 셈을 무너뜨리는 첫걸음이야. 그 여자가 백 년 부린 도구가, 그 여자 손에서 벗어나 사람이 되는 거. 그것보다 큰 균열은 없어. …자, 무성.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네 손으로 그 실을 뿌리치자. 우리가 도울게.

「…마음. …그 단어, 오랜만이구나. 내가 마지막으로 마음을 준 게 언제였더라. …아니. 됐다. 마음 따위,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어. 뺏는 힘만이,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게 해 줬지. 그러니 완성된 그릇아, 얌전히 이리 오너라. 네가 내 마지막 수집품이 되어 주어야겠다.」

연이—…박지은 씨. 방금 당신, '마음이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못 만들었다'고 했죠. 그 말 뒤에, 엄청 큰 상처가 있네요. …당신,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원했는데, 그 사람이 당신을 안 봤구나. 그래서 절망해서, 뺏는 힘으로 돌아선 거예요. …사랑이 안 통해서가 아니에요. 사람 마음까진 훔칠 수 없어서, 절망한 것뿐이에요.

여자의 목소리가 잠시 멈칫했다. 오래도록 아무도 그 상처의 시작을 물어 준 적이 없었다. 다들 그녀를 탐욕스러운 괴물로만 봤지, 한때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여자로는 보지 않았다. 텅 빈 인형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끄럽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나도 한때는 온 마음으로 원했지. 그 사람 하나를. 근데 그 사람은 늘 딴 데만 봤어. 사주도 못 갖춘, 잘 웃는 게 전부인 어떤 계집애만. …마음은 그 사람을 단 하루도 내 것으로 못 만들었어. 그래서 나는 힘을 택했다. 뺏는 힘을. 이제 나는, 갖고 싶은 건 다 뺏는다.」

연이—…네. 얼마나 아팠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늘 딴 사람만 보는 거. …근데 박지은 씨. 사람 마음은, 뺏는다고 가져지는 게 아니에요. 당신도 알잖아요. 백 년을 뺏어도, 당신 안의 그 구멍이 안 채워진다는 거. …세상을 다 훔쳐도, 그 텅 빈 자리는 그대로예요.

인형이 된 소년의 텅 빈 눈이, 아주 잠깐 크게 흔들렸다. 여자의 실을 타고 흐르던 냉기가, 그 한마디에 잠시 갈라진 것이다. '아무리 훔쳐도 안 채워진다.' 백 년간 긁어모으는 데만 몰두하느라, 여자는 정작 자기 안의 그 구멍을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이다.

「…닥쳐라. …그 구멍이 뭔지,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안다. 백 년째 안다. 아무리 곳간을 채워도, 밤이면 늘 텅 빈 그 느낌.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순 없어. 채우는 것 말고, 나는 이제 다른 사는 법을 몰라. 그러니 나는 훔친다. 더, 더 많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이—…박지은 씨. 방금 그 말, 진심이 다 담겼네요. 그 구멍이 훔쳐도 안 채워진다는 거, 당신 알고 있잖아요. …그럼 그거예요. 그 구멍은 남의 걸 뺏어서가 아니라, 당신 그 상처를 마주해야 채워져요. …저랑 같이 마주해요. 그 절망을. 뺏는 게 아니라, 다른 길로.

여자의 목소리가 오래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연이는 아주 희미한 떨림을 느꼈다. 백 년간 탐욕의 얼음으로 감싸 온 그 마음에, 연이의 말이 실금 하나를 낸 것이다. 하지만 그 실금은, 아직 너무 얕았다.

「…교묘한 아이로구나. 내 상처를 헤집어 나를 멈추게 하려는 게냐. …소용없다. 나는 백 년을 이 탐욕에 바쳤어. 이제 와 흔들릴 만큼, 내 각오가 얕지 않다. …네 그 다정한 말들은, 저 위에서 내가 널 통째로 내 곳간에 담기 전에나, 실컷 해 두려무나.」

연이—…네. 꼭 살아남아서, 당신 그 텅 빈 구멍의 정체를 끝까지 읽어 드릴게요. …박지은 씨. 당신이 백 년을 바친 그 탐욕, 그 밑엔 사랑받지 못한 상처가 있어요. 방향만 바꾸면, 그 절박함이 당신을 진짜로 채울 수도 있어요.

「…방향이라. …네 입은 참으로 위험하구나. 자꾸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려. …안 되겠다. 더 듣고 있다간, 백 년 각오가 흔들리겠어.」 여자의 목소리에서 방금 스쳤던 온기가 걷히고, 다시 서늘한 탐욕의 냉기가 돌아왔다. 실금은, 얼음으로 메워졌다.

연이—…안 가요. 나는 당신 곳간의 마지막 장식품이 되러 온 게 아니라, 당신이 부숴서 가둔 것들을 되살리러 온 거예요. …박지은 씨. 나 당신 안 미워해요. 사랑받지 못한 그 텅 빈 마음, 감히 다 안다고는 못 해도, 그게 얼마나 아픈지는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셋째 길을 찾아요. 당신도, 부서진 것들도, 다 사는 길을.

「…셋째 길. …그런 게 있었다면, 내가 백 년을 이러고 있었겠느냐. …됐다. 말이 길구나. 무성아, 저 아이를 삼켜라. 완성된 그릇을, 이 손에 가져오너라.」 여자의 목소리가 명령하자, 인형이 된 소년이 텅 빈 눈으로 연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연이의 목전에서 부들부들 떨며 멈췄다. 텅 빈 검은 눈 깊은 곳에서, 보랏빛 한 점이 필사적으로 실에 저항하고 있었다. 방금 되찾은 이름과 우정과 선택이, 여자의 명령에 맞서 소년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무성—크윽…! 안 돼…! 이 손, 연이 안 삼켜…! 나 방금 선택했어…! 사람으로 살기로! 연이 친구로 두기로! …그분, 이 손만은…! 이 손만은 안 움직여요…!

연이—…무성! 봐, 네 손 멈췄어! 너 이기고 있어! 여자 실보다 네 선택이 더 세! …조금만 더 버텨! 네오가 실 끊을 거고, 나는 네 그 보랏빛 한 점 붙잡을 거야! 너 혼자 아니야! 우리가 같이 이겨!

방금까지 눈물 흘리며 마음을 열던 아이가, 여자의 실에 묶여 다시 살육의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백 년간 저항 한 번 못 하던 그 도구가, 지금은 온몸으로 명령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러나 연이는 그 텅 빈 검은 눈 속에서, 아주 깊은 곳에서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보랏빛 한 점을 보았다. 무성은, 아직 지지 않았다.

연이—…박지은 씨. 당신 인형을 다시 당겼네요. 근데요, 소용없어요. 무성은 이미 자기 이름을 되찾았거든요. 무성(茂盛). 우거진 숲. …당신이 아무리 실을 당겨도, 한번 부른 이름은 못 지워요. …자, 그럼 이제 진짜로 해 봐요. 당신 실이랑, 우리 셋의 마음이랑. 뭐가 더 센지.

네오—연이, 붙어. 저 실, 이번엔 진짜 세. 세계의 실이야. …근데 나도 물러설 생각 없어. 무성은 이제 우리 친구니까. 친구를 인형으로 부리게 두진 않아. …내 백금, 오랜만에 진심으로 벼려 볼게. 저 검붉은 실, 내가 상대한다.

연이—…응. 무성, 조금만 버텨. 우리가 널 그 실에서 꺼낼게. 방금 네가 스스로 고른 그 선택, 사람으로 살겠다는 그 마음, 반드시 지켜 줄게. …자, 마지막 판이야. 네 이름을 돌려받으러 가자, 무성.

제33화 · 그릇 — 끝. 제34화 「이름을 돌려주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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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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