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투장은 명반 그 자체였다. 열두 궁의 별자리가 발밑에서 돌았고, 궁이 바뀔 때마다 지형도 함께 바뀌었다.
자미궁을 밟으면 발밑이 왕관처럼 솟았고, 파군궁을 밟으면 지반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결투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유리해지거나 불리해졌다. 무성은 이 변화무쌍한 지형을 백 년간 제 집처럼 다뤄 왔다.
연이—…지형이 계속 바뀌어. 저 새는 이 판을 훤히 아는데, 나는 처음이야. 불리하지. …근데 괜찮아. 나는 뿌리를 내리는 나무니까. 어디에 서든, 그 자리에 뿌리박고 버티면 돼. 흔들리는 땅에서도 안 넘어지는 게, 나무의 힘이야.
네오—연이, 방심하지 마. 저 새는 이 궁의 문지기야. 백 년간 이 자리를 지켜 온 자라고. 첫 수부터 전력으로 온다. …온다.
무성—침수.
그림자의 소매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와 명반을 적셨다. 별빛이 닿는 자리마다 검게 꺼졌다.
검은 물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발목을 휘감고, 무릎까지 차오르며, 연이의 사주를 끌어내리려 했다. 닿는 곳마다 힘이 빠지고, 온기가 스몄다. 삼키는 물이었다.
연이—윽…! 이 물, 그냥 물이 아니야. 닿으니까 힘이 쭉 빠져. 내 이야기를 빨아들이려고 해. …안 되지! 넝쿨아, 발밑부터 감아! 이 물에 잠기면 안 돼!
연이의 발밑에서 청록빛 넝쿨이 솟아, 스스로를 검은 물 위로 들어 올렸다. 나무는 물에 잠기는 게 아니라, 물을 딛고 자라는 법을 알고 있었다. 연이는 넝쿨 뗏목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네오—연이, 그렇게 버텨! 저 물, 계속 차올라. 내가 물길을 갈라서 흐름을 끊어 볼게. 검은 물이 한곳에 고이지 못하게!
검은 물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빠지길 반복하며, 조금씩 조금씩 결투장을 삼켜 갔다. 넝쿨 뗏목 위의 연이도 안전하지 않았다. 물보라가 튈 때마다 온기가 한 조각씩 빠져나갔고, 손끝이 시려 왔다. 무성의 물은 지치지 않았다.
연이—…끈질기다. 파도가 계속 와. 한 번 막아도, 두 번 세 번 계속. 백 년치 물이니까, 마르질 않아. …이거 장기전이야. 나 체력 관리 잘해야겠는데. 삼각김밥이라도 하나 먹고 시작할걸.
네오—…이 와중에 또 삼각김밥. …근데 그 실없는 소리가, 네가 안 무너졌다는 신호라 다행이긴 하다.
네오—단금.
백금의 참격이 물을 갈랐다. 그런데 갈라진 물이 오히려 더 두꺼워졌다.
네오—…아차. 금생수, 금은 물을 낳는다더니. 내 숨이 저 녀석 숨을 키우고 있어.
네오가 가른 물이, 갈라진 단면에서 오히려 두 배로 불어났다. 백금의 칼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 물이 샘솟았다. 오행의 상생(相生), 금생수(金生水). 쇠는 물의 어머니. 네오가 벨수록, 무성은 살쪘다.
네오—…최악의 상성이야. 내 칼이 저 녀석 밥이 되고 있어. 백 년을 벼린 이 백금이, 여기선 독이 아니라 약이라니. …이런 상대는 처음이야.
연이—네오, 자책하지 마. 상성이 나쁜 거지, 네가 약한 게 아니야. 재성에서 청토끼 금고 지킬 때 네 백금이 얼마나 든든했는데. …지금은 그냥, 이 판이 네 판이 아닌 것뿐이야. 다음 판엔 또 네 차례가 와. 오행이 원래 그렇잖아. 돌고 도는 거.
네오—…묘하게 위로가 되네. 적을 눈앞에 두고 이런 위로를 받는 것도 웃기지만. …그래. 이 판은 네 판이야. 나는 내 자존심 접고, 네 등을 지킬게.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무성—…훈훈하군. 결투장 한복판에서 서로 위로라니. …그런 온기, 백 년 만에 보는군. 눈이 부셔서, 삼키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 온기가 너희를 방심하게 할 거야. 자, 다음 파도다.
무성—해일.
검은 물이 두 겹, 세 겹의 파도가 되어 연이와 네오를 번갈아 덮쳤다. 하나를 넝쿨로 막으면 다른 하나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무성의 물은 지형까지 바꿔 가며, 두 사람의 발판을 계속 무너뜨렸다.
연이—윽…! 발판이 자꾸 무너져! 이 새, 지형을 마음대로 바꿔! …네오, 우리 자꾸 갈라지고 있어. 붙어! 등 맞대야 둘 다 안 쓸려!
네오—알아! 이쪽으로! …젠장, 파도가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해. 각개격파 하려는 거야. …연이, 무슨 수 없어? 이대로 계속 밀리면, 판 깔 시간도 없어.
연이—…있어. 발판이 무너지면, 안 무너지는 걸 만들면 돼. 나무는 원래 자기 땅을 만드는 애야. …뿌리로 이 명반을 통째로 붙들 거야. 무성이 지형을 못 바꾸게. 네오, 딱 조금만 더 버텨 줘!
연이가 무너지는 발판 사이로 뿌리를 깊이 내리꽂았다. 흔들리던 명반이, 뿌리가 닿은 자리부터 단단하게 굳었다. 무성이 아무리 지형을 흔들어도, 연이가 딛고 선 땅만은 더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무가, 자기 땅을 만든 것이다.
무성—…내 지형 조작이, 안 먹혀. 저 뿌리가 명반을 못 박아 버렸어. …이 아이, 싸울수록 이 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 홈그라운드를, 저 아이 숲으로 바꾸고 있어. …백 년간 내 판이었는데.
연이—…미안하지만 무성, 이제 여긴 내 숲이야. 흔들리는 별들의 판이 아니라, 뿌리내린 나무의 땅. …여기선 네가 손님이야. 자, 이제 내가 주도권 가져갈게. 반격 시작이야.
네오—…연이, 판을 뒤집었네. 좋아, 이제 내가 등 지키는 것도 훨씬 수월해. 발밑이 안 흔들리니까. …이 기세로 몰아붙여. 나는 네 뒤를 완벽하게 막을게.
굳어진 명반 위로, 연이의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결투장이 더는 무성의 검은 바다가 아니라, 연이의 초록 숲으로 바뀌어 갔다. 까마귀들이 앉을 검은 물이 줄어들자, 그 수도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판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무성—…줄어든다. 내 물이, 내 까마귀가. 저 아이의 숲이 내 바다를 밀어내고 있어. …백 년간 이 판에서 진 적이 없는데. 다들 여기서 내 물에 잠겨 사라졌는데. …저 아이는 대체 뭐지. 왜 이렇게, 안 지는 거지.
연이—…안 지는 게 아니야, 무성. 나는 너를 이기려는 게 아니라, 이 판을 바꾸려는 거야. 삼키는 바다에서, 피우는 숲으로.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야. 네 남은 물, 다 나한테 부어. 그거 다 마시고, 이 숲을 완성할 거야. 그럼 이 결투, 끝나.
무성—…아직 안 끝났어! 마지막 하나 남았어. 왕좌의 실이, 나한테 마지막 힘을 밀어 넣고 있어. …미안해. 이건 내 뜻이 아니야. 그 여자가… 너를 삼키라고, 나를 짜내고 있어. 피해, 연이! 이번 건, 진심으로 위험해!
무성—눈치가 빠르네, 파수꾼. 그래, 너는 나를 벨수록 나를 키운다. 그러니 이 결투에서 너는 구경만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성—…파수꾼. 백 년 전에도 그랬지. 너는 늘 칼로 다 해결하려 했어. 베고, 자르고, 끊고. …그래서 결국 그 사람도 못 지킨 거야. 어떤 건, 벤다고 지켜지지 않는데.
네오—…뭐? 그 사람이라니. 백 년 전에, 내가 못 지킨 사람. …너 방금, 내 기억 속 빈자리를 건드렸어. 무성, 너 나에 대해 뭘 알아. 말해.
무성—…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야. 이건 결투장이니까. …다만 이것만. 네 칼은 이 판에서 쓸모없어. 물러서. 저 아이한테 맡겨. 이 판의 답은, 쇠가 아니라 나무니까.
네오—…적이 나한테 물러서라고 조언을 하네. …이상한 결투야. 근데 맞는 말이라 더 짜증 나. 내 칼이 널 키우는 이 상성,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연이. 들었지? 이 판, 네 판이야.
연이—…응, 들었어. 근데 네오, 물러서는 거 아니야. 위치를 바꾸는 거지. 넌 내 등을 지켜. 저 까마귀들이 뒤에서 덮치는 거, 그건 네 백금이 딱이야. 벨 필요 없이 쳐내기만 하면 되니까. …정면의 물은 내가 맡을게. 우리, 역할만 나누자.
네오—…역할 분담이라. 좋아. 등은 내가, 정면은 네가. …근데 연이. 방금 저 녀석이 나한테 '물러서라'고 한 거, 그거 조언이 아니라… 부탁처럼 들렸어. 마치, 네가 이겨 주길 바라는 것처럼. …저 새, 정말 이상해. 이기려는 건지 져 주려는 건지 모르겠어.
연이—…나도 느꼈어. 저 새, 이 결투를 이기고 싶어 하지 않아. 그냥 시켜서 하는 거야. 마음속으론 누가 자길 멈춰 주길 바라는 거지. …그럼 내가 멈춰 줘야지. 부수는 게 아니라, 멈춰서 안아 주는 걸로.
네오가 이를 악물었다. 벨수록 커지는 상대라니, 백 년을 벼려 온 파수꾼에게도 처음 보는 상성이었다.
네오—…금이 물을 낳는다면, 나는 칼을 거둔다. 대신 저 물을 통째로 마셔 버릴 녀석이 하나 필요한데.
연이—불렀어? 나무는 원래 물 먹고 크는 거, 초등학교 자연 시간에 다 배웠거든.
연이—그럼 내 차례네. 나무는 물을 마시니까. 수생목, 네 물은 오히려 내 양분이야.
연이—…네오, 너는 뒤로 빠져. 네 말이 맞아. 이 판은 나무의 판이야. 저 검은 물이 아무리 많아도, 나한텐 다 마실 물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더 크게 자라. …자, 무성. 실컷 부어 봐. 네 백 년치 슬픔, 내가 다 마셔 줄게.
네오—…알겠어. 내 칼은 봉인한다. 대신 네 등은 내가 지켜. 까마귀가 뒤에서 덮치면, 그건 내가 막을게. 정면의 물은, 네가 마셔.
연이—덩굴 결박!
검은 물 위로 덩굴이 미끄러지듯 자라나 그림자를 향해 뻗었다. 물을 빨아들일수록 덩굴은 굵어졌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했다.
연이—잡았다! 이대로 통째로 감아서 결박하면 끝—
그런데 그림자는 피하지 않았다. 덩굴이 몸을 감는 순간, 그림자 전체가 흩어졌다. 물이 아니라 깃털로.
연이—…어?! 물인 줄 알았는데, 감는 순간 깃털이 됐어! 결박이 허공을 감았어! …이 새, 물이었다가 깃털이었다가, 형태가 자유자재야. 잡을 실체가 없어!
네오—…그래서 아까 내가 말했잖아. 저건 정해진 몸이 없다고. 물로 삼키고, 깃털로 흩어지고, 까마귀로 덮치고. 세 가지를 오가면서 절대 한 형태에 안 머물러. …이런 상대는, 힘으로 못 잡아. 붙박아야 해.
연이—…붙박는다. …그래. 흩어지는 걸 못 흩어지게. 물이든 깃털이든, 한 점에 못 박아 두면 돼. …나무한테 그런 기술이 있지. 근데 그건 판을 다 깔고 나서야 써먹을 수 있어. 그때까진, 저 깃털이랑 물이랑 계속 놀아 줘야겠네.
수백 장의 검은 깃털이 결투장에 눈처럼 흩날렸다. 연이는 그 깃털을 알고 있었다.
연이—이 깃털… 식상의 섬에서 봤어. 무대를 망치던 그 검은 깃털이잖아. 까마귀 빌런들의!
깃털이 소용돌이치더니 낯익은 형상을 빚어냈다. 까마귀 빌런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수십 마리.
까마귀—까악. 그리운 얼굴이군. 그때는 노래를 죽이러 갔고, 오늘은 별을 죽이러 왔다.
연이는 그제야 이해했다. 식상의 섬의 까마귀들, 검은 깃털, 검은 비. 전부 한 줄에 꿰여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 그림자의 깃털이었다.
연이—…그럼 식상의 섬에서 노래를 죽이던 그 까마귀들도, 다 무성이 부린 거였어. 무성은 이야기를 삼키는 새. 노래도, 이야기니까. …근데 잠깐. 너희, 원래 노래를 죽이러 온 게 아니었지? 삼키러 온 거지. 너희도 원래는… 이야기를 부르던 새 아니야?
까마귀 떼가 일순 멈칫했다. 부리를 세운 채, 연이의 말에 흠칫한 것이다. 그러나 이내 다시 검은 눈을 번뜩이며, 사방에서 부리를 쏟아 냈다. 무성의 명령에 매인 몸이었다.
까마귀—까악…! 쓸데없는 소리! 우리는 삼킨다. 그게 우리의 전부다. 그러니 너도, 삼켜져라!
까마귀 떼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연이의 넝쿨이 그물을 짜 막았지만, 검은 깃털은 그물코 사이로 흘러들어 연이의 팔과 어깨를 할퀴었다. 상처마다 검은 기운이 스며, 힘이 빠져나갔다.
연이—윽…! 많아, 너무 많아! 한 마리 막으면 세 마리가 와! …네오, 뒤!
네오가 몸을 돌려, 연이의 등을 노리던 까마귀 다섯 마리를 백금의 실로 쳐냈다. 베지 않고, 쳐서 튕겨 냈다. 물이 되지 않게, 날로 베는 대신 등으로 막았다. 약속대로, 연이의 등만 지켰다.
네오는 베지 않았다. 백금의 실을 채찍처럼 휘둘러, 까마귀들을 쳐서 밀어냈다. 벨수록 무성이 커지니, 날이 아니라 면으로 후려쳤다. 백 년을 벼려 온 살상의 칼을, 오직 방어에만 쓰는 것. 파수꾼에게는 그 자체가 뼈아픈 절제였다.
연이의 넝쿨과 네오의 금선이 등을 맞대고 원을 그렸다. 연이가 정면의 물을 마시면, 네오가 후방의 까마귀를 쳐냈다. 하나의 몸처럼 맞물린 공수. 재성에서부터 함께 싸워 온 두 사람의 호흡이, 이 우주의 결투장에서 완벽하게 겹쳤다.
연이—…역시 너랑 등 맞대니까 든든해. 네오, 우리 이거 완전 손발 척척 맞네? 나중에 재성 무대에 콤비로 서도 되겠어.
네오—…이 판국에 무대 걱정을. …근데, 나쁘지 않네. 등이 안 허전해. …자, 농담 그만. 근원을 쳐야 해.
네오—등은 내가 막는다! 너는 정면만 봐! …근데 연이, 이 수가 끝이 없어. 무성이 계속 깃털을 뽑아내는 한, 까마귀도 무한이야. 근원을 쳐야 해. 저 소용돌이 한복판, 무성의 진짜 몸을!
연이—…맞아. 이 까마귀들 하나하나 상대하면 끝이 없어. 근원을 붙잡아야 해. …근데 무성 본체는 자꾸 깃털로 흩어져서 못 잡아. …생각해, 연이. 흩어지는 걸 못 흩어지게 하려면? …그래. 붙박아 두면 돼. 뿌리로.
까마귀들이 다시 한번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연이를 통째로 삼키려 조여 왔다. 결투장 전체가 검은 날갯짓으로 뒤덮여, 별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연이는 그 어둠 한복판에서, 오히려 눈을 감았다.
연이—…무성. 이 많은 까마귀들. 다 네가 삼킨 이야기들의 껍데기지. 노래였고, 소설이었고, 누군가의 고백이었던 것들. …불쌍한 것들. 너희, 삼켜져서 이렇게 부리 세우는 신세가 됐구나. …괜찮아. 내가 너희도 풀어 줄게.
연이의 그 말이, 까마귀 떼의 공세를 아주 잠깐 흐트러뜨렸다. 몇 마리가 부리를 멈추고 연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성이 소매를 휘두르자, 검은 물이 그 까마귀들을 다시 삼켜 광기로 몰아넣었다. 흐트러졌던 공세가, 곱절로 사나워졌다.
검은 파도와 까마귀 떼가 한 몸이 되어 연이를 덮쳤다. 넝쿨 방패가 곳곳에서 찢겼다. 연이의 무릎이 검은 물에 잠기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연이—…힘이. 힘이 자꾸 빠져. 이 물, 내 이야기를 마시고 있어. …안 돼. 여기서 잠기면, 저 아래 다들… 소망이도, 루나도, 다.
네오—연이! 정신 차려! 그 물에 삼켜지면 끝이야! …젠장, 봉인이고 뭐고! 네가 위험하면, 나는 칼을 뽑는다고 했어!
네오가 봉인을 풀고 백금의 실을 뽑아, 연이를 삼키려던 검은 물을 통째로 걷어 냈다. 물은 다시 두 배로 불었지만, 그 순간 연이는 숨을 돌렸다. 네오가 자기 상성을 희생해서, 연이에게 한 호흡을 벌어 준 것이다.
연이—네오! 안 돼, 네 칼 쓰면 저 새가 커진다며! …근데. …고마워. 덕분에 숨 쉬었어. …이제 내 차례야. 네가 벌어 준 이 한 호흡, 안 헛되게 할게.
연이는 검은 물에 잠긴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문득, 루나가 떠올랐다. 물은 억지로 못 다룬다. 흐르게 두면, 안 부서진다. 무성의 물은 억지로 가두는 물. 그렇다면 연이가 할 일은, 맞서는 게 아니라 마시고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연이—…그래. 맞서면 잠겨. 근데 마시면 커져. …루나가 가르쳐 줬잖아. 물은 흐르게 두라고. …좋아. 무성. 네 물, 나한테 다 부어. 하나도 안 막을게. 대신 그거, 내 안에서 다 초록으로 바뀔 거야.
네오—연이?! 방패를 거두면 어떡해?! 그 물에 잠긴다고! …아니. …잠깐. 저거, 잠기는 게 아니야. 마시는 거야. 일부러 방패를 열어서, 그 물을 통째로 들이켜고 있어. …미친. 저런 발상을.
연이는 방패를 거두고, 오히려 두 팔을 벌려 검은 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넝쿨이 뿌리가 되어, 그 검은 물을 뿌리 끝까지 빨아들였다. 잠기는 대신 마셨고, 막는 대신 흘렸다. 연이의 온몸에서, 청록빛 잎이 폭발하듯 돋아났다.
검은 물이 연이의 뿌리를 타고 오를수록, 연이의 몸에서 초록이 번졌다. 오염된 물이 정화되어, 생명이 되었다. 무성이 백 년간 삼켜 온 슬픔이, 연이의 몸을 거쳐 잎과 꽃으로 피어났다. 결투장 한복판에, 검은 바다 위로 솟은 한 그루 초록 나무. 그것이 이 결투의 답이었다.
무성—…뭐지, 이건. 내 물이… 저 아이 몸에서 잎이 돼. 검은 물이, 초록으로. …백 년간 이런 건 본 적이 없어. 삼켜지지 않는 아이라니. 오히려 나를 양분 삼아 자라는 아이라니.
연이—…이제 알겠어, 무성? 네 슬픔은 나를 못 죽여. 오히려 나를 키워. …그러니까 이 결투, 네가 부으면 부을수록 네가 불리해져. …그만 부어도 돼. 아니, 그만 부어. 너 지금, 스스로를 다 쏟아내고 있잖아.
연이는 자기 곁을 맴도는 까마귀 한 마리에게 손을 뻗었다. 그 검은 깃털 속을, 본필을 든 손으로 가만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까마귀의 검은 몸 안에서, 오래 삼켜진 한 조각 이야기가 떠올랐다.
연이—「…이건, 어느 소녀가 부치지 못한 편지. '좋아한다고, 딱 한 번만 말할걸.' 그 후회의 노래.」 …너, 이런 이야기였구나. 삼켜지기 전엔. 부리 세우는 괴물이 아니라, 못다 한 고백이었어. …돌아가. 네 자리로.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연이의 본필이 청록빛으로 번지자, 까마귀 한 마리가 검은 깃털을 벗고 맑은 빛으로 풀려났다. 그 빛은 잠시 연이 곁을 맴돌다, 저 아래 세계를 향해 부드럽게 날아 내려갔다. 삼켜졌던 이야기 하나가, 백 년 만에 자유로워진 것이다.
무성—…너, 방금 뭘 한 거야. 내 까마귀를… 풀어 줬어? 삼킨 이야기를, 다시 살려서 돌려보냈어? …그건 불가능해. 한번 삼킨 건, 아무도 못 꺼내. 나조차도. …그런데 너는.
연이—…가능해, 무성. 너는 삼키는 새고, 나는 읽는 사람이니까. 네가 삼킨 이야기를, 나는 다시 읽어서 살릴 수 있어. …이 결투에서 내가 이기면, 네가 백 년간 삼킨 그 모든 이야기를, 하나씩 다 이렇게 돌려보낼 거야. 재성으로, 도서관으로, 사람들 마음속으로.
무성의 눈에서, 부러움을 넘어선 무언가가 일렁였다. 그것은 어쩌면, 백 년간 감히 품지 못한 희망이었다. 자기가 삼킨 것들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그래서 자기 죄가 씻길 수도 있다는, 아득한 가능성.
무성—…아니야. 헛된 희망 심지 마! 나는 죄가 씻길 자격 없어. 백 년간 삼킨 이야기가 몇인 줄 알아? 셀 수도 없어! 그걸 하나씩 돌려보낸다고? 몇백 년이 걸려도 못 해! …그러니까 희망 같은 거, 주지 마. 그게 제일 잔인해!
연이—…무성. 방금 너 화낸 거, 나한테 화낸 게 아니야. 희망이 무서워서 화낸 거지. 백 년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될 수도 있다'고 하니까, 그게 무서운 거야. 다시 기대했다가 또 무너질까 봐. …알아. 나도 그 마음 알아.
무성—…네가 뭘 알아. 넌 사주가 있고, 이름이 있고, 돌아갈 자리가 있잖아. 나는 아무것도 없어. 이름도, 자리도, 돌아갈 곳도. …그냥 삼키라고 만들어진 도구야. 도구한테 무슨 희망이 있어.
연이—…도구라니. 도구는 미안하다고 안 해. 도구는 삼키면서 눈 안 감아. 도구는 희망이 무섭지도 않아. …무성, 너는 도구가 아니야. 마음이 있는 아이야. 다만 아무도 그걸 안 봐 줬을 뿐이야. …내가 봐 줄게. 처음으로.
무성의 검은 물이 크게 요동쳤다. 분노인지 울음인지 모를 그 요동이, 결투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백 년간 '도구'로만 불려 온 존재가, 처음으로 '마음이 있는 아이'라 불린 순간이었다.
무성—…그만해! 그만하라고!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하지 마! 마음이 있으면, 내가 백 년간 한 짓이 다 죄가 되잖아! 도구는 죄가 없어. 시켜서 한 거니까! …근데 마음이 있으면… 내가 삼킨 그 모든 게, 다 내 죄가 돼! 그걸 어떻게 견뎌!
연이—…견뎌. 나랑 같이 견디자. 혼자 지면 못 드는 짐도, 둘이 들면 들려. …무성, 네가 마음이 있는 걸 인정하는 게 무서운 거, 알아. 죄를 마주하는 거니까. 근데 죄를 마주할 수 있는 게, 바로 네가 마음이 있다는 증거야. 도구는 죄책감 안 느껴.
무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이의 말은 백 년의 방어벽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나는 도구다'라는 그 방패 하나로 백 년을 버텨 왔는데, 연이는 그 방패가 사실은 감옥이었음을 일깨우고 있었다. 무성의 검은 물이, 조금씩 힘을 잃어 갔다.
연이—…그리고 무성. 네 죄는, 갚을 수 있어. 아까 봤잖아. 삼킨 이야기, 내가 하나 돌려보내는 거. 그거 너도 할 수 있게 될 거야. 죄를 짓는 것도 너였지만, 그 죄를 갚는 것도 너일 수 있어. …그러니까 도망치지 마. 마음을, 인정해.
무성—…네가 자꾸… 그런 말을 하니까. 백 년간 굳게 잠가 둔 게, 자꾸 열리려고 해. …무서워. 열리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올지 나도 모르니까. 백 년치 후회랑 그리움이랑… 다 쏟아지면, 나 무너질 것 같아.
연이—…무너져도 돼.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지으면 돼. 나도 재성에서 다 무너진 적 있어. 꽃돼지가 돼서, 아무것도 못 하고 울기만 했어. 근데 거기서 다시 일어났어. 사람들이 손 내밀어 줘서. …나도 지금 너한테 손 내미는 거야, 무성. 잡아.
무성의 검은 물이, 연이가 내민 손 쪽으로 아주 잠깐 기울었다.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붙잡기 위해서 뻗은 물결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왕좌의 어둠에서 서늘한 기운이 뻗어 나와, 무성의 근원에 걸린 검은 실을 홱 잡아당겼다.
무성—윽…! …안 돼. 그 여자가… 실을 당겨. 내가 흔들리는 걸, 그 여자가 눈치챘어. …멈출 수가 없어. 손을 잡고 싶은데, 이 실이 나를… 다시 삼키라고, 다시 침식하라고…!
까마귀 떼가 덮쳤다. 연이의 덩굴이 그물을 짰다. 네오는 금선을 쓰려다 멈췄다. 베인 깃털이 물이 되어 그림자를 살찌우니, 함부로 벨 수가 없었다.
까마귀들이 사방에서 부리를 세우고 쏟아졌다. 한 마리를 덩굴로 쳐내면, 그 자리를 두 마리가 곧장 메웠다. 결투장이 통째로 검은 날갯짓으로 뒤덮였다.
수적으로 밀리는 싸움이었다. 연이는 문득, 도서관에서 백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네가 읽는 모든 것이 진실을 드러내게 하라.' 눈앞의 이 까마귀들도, 결국은 하나하나가 삼켜진 이야기. 읽을 수 있는 텍스트였다. 숫자로 보면 절망이지만, 이야기로 보면 달랐다.
연이—…백문 님. 알았어요. 이 까마귀들, 적이 아니라 텍스트로 보면 되는 거죠. …그래. 다 쳐내려니까 끝이 없지. 근데 이건 싸워서 없앨 게 아니라, 읽어서 풀어 줄 거야.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누군가의 못다 한 이야기니까.
네오—연이!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야! 지금은 일단 버텨! …아니, 근데 네 그 눈. 뭔가 방법을 찾은 눈이네. …좋아. 나는 네 등을 지킬 테니, 넌 네 생각대로 해. 믿을게.
연이—…역시 네오. 말 안 해도 알아주네. …좋아. 이 까마귀 폭풍, 무작정 안 막아. 판을 깔 시간을 벌 거야. 뿌리내릴 판을. …네오, 딱 스무 걸음만 벌어 줘. 그동안 내가 명반 전체에 뿌리를 깔게.
네오가 연이 앞으로 나서, 백금의 실을 부챗살처럼 펼쳤다. 까마귀 떼가 그 은빛 그물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벨 수 없으니, 쳐서 밀어냈다. 백 년을 살상에 벼려 온 칼을, 오직 한 사람을 지키는 방패로만 쓰는 것. 그 절제가, 네오의 진짜 강함이었다.
그 사이, 연이는 넝쿨을 발밑으로 뻗어 명반의 열두 궁 홈을 따라 가느다란 뿌리를 심어 나갔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결투장 전체에. 겉으로는 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연이는 판을 짜고 있었다. 언제든 한순간에 조여들 수 있는, 거대한 뿌리 그물을.
연이—(…거의 다 됐어. 명반 열두 궁에 뿌리 다 심었어. 이제 무성이 진짜 몸을 드러내는 순간, 이 뿌리 전체를 한 번에 조이면… 아무리 흩어지는 새라도 못 빠져나가. …조금만 더. 무성이 힘을 다 쏟게 만들자.)
네오—연이, 준비됐어? 나 이제 슬슬 한계야. 까마귀가 너무 많아. …네 판, 다 깔렸으면 신호 줘. 마지막 한 번, 크게 열어 줄게.
연이—…거의. 조금만 더 벌어 줘, 네오. 이번 판은, 우리가 이겨. 확실하게.
연이—네오, 이거 완전 두더지 잡기잖아. 근데 두더지가 날아다녀! 반칙 아니야?!
네오—…이 판국에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버틸 만한가 보군.
연이—여유 아니고 허세거든? 근데 나 허세 하나는 프로급이야. 등만 잘 지켜 줘.
그때, 멀리 별 우리에 갇힌 세 빛이 힘껏 밝아졌다. 그리고 궁의 가장 높은 탑에서, 소망이의 작은 청록빛도 함께 깜빡였다. 갇히고 멀어도, 다들 연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 빛들이, 검은 결투장에 작은 등불처럼 켜졌다.
연이—…보여. 루나 빛, 언니 빛, 백문 님 빛. 그리고 저 위 소망이까지. …다들 나 보고 있구나. …그래. 나 혼자 싸우는 거 아니야. 이 많은 마음이 내 뒤에 있어. …무성, 너는 혼자잖아. 그게 너랑 나의 진짜 차이야.
무성은 그 등불 같은 빛들을 흘긋 보았다. 백 년간 자기 곁엔 아무도 없었다. 명령하는 그 여자와, 삼켜야 할 이야기들뿐. 연이의 뒤에 켜진 그 온기 어린 빛들이, 무성에게는 눈이 시리도록 낯설고, 사무치게 부러웠다.
네오—연이. 내 숨은 봉인할게. 이 판은 네 판이야. 나는 네 등만 지킬게.
연이—응. 등은 맡길게. 정면은 내가 뚫을 테니까.
연이는 두 발을 명반에 굳게 딛고, 밀려드는 검은 물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넝쿨을 뿌리처럼 뻗어, 그 검은 물을 통째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무성의 백 년치 슬픔을, 나무의 몸으로 받아들였다.
연이—…써. 네 물, 엄청 써. 백 년치 원망이랑 후회가 다 녹아 있어. …근데 나무는 쓴 물도 마셔. 마셔서, 잎을 틔워. …봐, 무성. 네 슬픔이 내 안에서 이렇게 초록이 돼. 삼키는 것보다, 마셔서 피우는 게 훨씬 세.
연이의 넝쿨이 검은 물을 마실수록, 그 줄기에서 청록빛 잎이 돋아났다. 무성이 부으면 부을수록, 연이는 더 무성하게 자랐다. 상성의 이치가 결투장을 지배했다. 물은, 나무를 이길 수 없었다.
무성—…말도 안 돼. 내 물을 마시고도… 오히려 자라? 백 년간 아무도 내 물을 견디지 못했는데. 다들 잠겨서 사라졌는데. …너는 대체.
무성—…아니. 아니야. 여기서 지면 안 돼. 내가 지면, 그 남자가… 왕좌의 그 사람이 더 큰 벌을 받아. 그 여자가 가만두지 않아. …그러니 나는, 이겨야 해! 너를 삼켜야 해! 미안하지만!
무성이 남은 힘을 모두 끌어올렸다. 결투장 전체의 검은 물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스물일곱 별자리의 무게가 실린, 백 년치의 마지막 일격이었다. 그 해일이 연이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내리꽂혔다.
네오—연이! 저 물, 지금까지랑 규모가 달라! 나 혼자 등으론 못 막아! …젠장, 이럴 때 루나라도 있었으면. 물엔 물로 맞서야 하는데!
연이—…괜찮아, 네오. 루나 없어도 돼. 루나가 나한테 물 다루는 법을 다 가르쳐 줬거든. …이 조약돌 속에, 루나 물이 있어. 그리고 내 안엔, 지금까지 만난 다들의 마음이 있어. …나 혼자 이 해일 맞는 거 아니야. 다 같이 맞는 거야.
연이의 손목에서 루나의 물 조약돌이 청록빛으로 빛났다. 별 우리의 세 빛이, 소망이의 빛이, 저 아래 재성 사람들의 응원이, 그 빛을 통해 연이에게 흘러들었다. 혼자였다면 무너졌을 해일 앞에서, 연이는 여럿의 마음으로 버텼다.
연이—…자, 무성. 네 백 년치 슬픔, 다 와. 나 안 피해. 다 마셔서, 다 초록으로 바꿔 줄 테니까. …이게 우리의 답이야. 혼자 삼킨 너랑, 다 같이 마시는 나의 차이!
해일을 마시며, 연이는 그 물줄기 너머로 무언가를 보았다. 무성의 근원에서 왕좌로 이어진, 가느다란 검은 실. 그 실이 무성을 조종하고 있었다. 무성이 부리는 물은 사나웠지만, 그 실을 통해 흘러오는 진짜 명령은 훨씬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그 여자의 것이었다.
연이—…보인다. 검은 실. 무성, 널 조종하는 그 실. …이 결투의 진짜 상대는 네가 아니었어. 저 실 끝에 있는 그 여자야. 넌 그냥, 그 여자 손에 쥐인 붓 같은 거였어. …그럼 내가 이겨야 할 건 너가 아니라, 저 실이네. …근데 그 실은, 지금은 못 끊어. 네 왕좌의 그 사람이 아프니까.
연이는 이를 악물었다. 검은 실을 끊으면 무성이 통째로 지워지고, 안 끊으면 무성이 계속 조종당한다. 힘으로 풀 수 없는 매듭이었다. 이건 결투로 이길 문제가 아니라, 이 궁 전체의 슬픔을 통째로 되쓰는, 훨씬 더 크고 아픈 과제였다.
연이—…무성. 지금은 그 실 못 끊어. 미안해. 근데 이 결투에서 내가 이기면, 최소한 이 순간만은 널 그 실에서 놓여나게 할 수 있어. 잠깐이라도, 네 진짜 마음으로 있게. …그거면 시작이야. 자, 이제 이 판을 닫자.
연이—…크다! 지금까지랑 차원이 달라! …근데 무성, 방금 너 '미안하다'고 했지? 삼키면서 미안하다니. …그 마음이, 네 물을 무디게 해. 진심으로 이기려는 물이 아니야. 이건, 울면서 휘두르는 주먹이야.
연이는 그 거대한 해일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을 벌리고, 온몸을 뿌리로 바꿔 명반에 깊이 박았다. 백 년치 슬픔이 쏟아져 내렸고, 연이는 그것을 뿌리 끝까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셨다.
거대한 검은 해일이, 연이의 뿌리 속으로 빨려들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리고 그 자리에, 청록빛 거목 한 그루가 우뚝 솟았다. 백 년치 슬픔을 다 마시고 자란, 눈부신 생명의 나무였다. 결투장을 뒤덮었던 어둠이, 그 나무의 그늘 아래 잦아들었다.
연이—…다 마셨어. 네 백 년, 내가 다 받아 냈어. …봐, 무성. 네 슬픔은 사라진 게 아니야. 내 잎이 됐어. 초록이 됐어. …이게 삼킴이랑 읽음의 차이야. 너는 없애고, 나는 피워. …이제, 네 진짜 모습을 볼 차례야.
네오—…이겼네, 연이. 저 백 년치 물을 통째로 마시고, 오히려 나무가 됐어. …나는 백 년을 칼로 벼렸는데, 너는 그 물을 마셔서 이겼어. …가끔, 네 방식이 무섭도록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수지 않고 이기는 거.
연이—…부수지 않고 이기는 게, 제일 어려운 이김이야, 네오. 부수는 건 쉬워. 근데 그럼 다시 못 돌려. …나는 무성을 이겼지만, 안 부쉈어. 저 애는 아직 저기 있잖아. …근데 이겼다고 인질이 풀린 건 아니야. 무성이 아직 저 여자 실에 묶여 있으니까. 왕좌의 법은, 문지기가 제 뜻으로 놓아줘야 열리거든. 무성이 스스로 저 실을 놓기 전엔, 별 감옥도 안 열려. …그러니까 진짜 할 일은 지금부터야. 무성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차례.
무성—…다, 쏟아 냈어. 이제 나한텐… 흩어질 물도 없어. …백 년 만에, 처음으로 텅 비었네. …이상해. 텅 비니까, 오히려 후련해. …아, 이게 지는 거구나. 지는 게… 이렇게 가벼운 거였나.
검은 물이 걷힌 자리로, 오래 꺼져 있던 별들이 하나둘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무성이 삼켰던 이야기들이, 연이의 잎이 되어 다시 궤도로 흩뿌려진 것이다. 결투장이 조금씩 밝아졌다. 침식이, 이 한 자리에서만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연이—…봐, 무성. 네가 텅 비니까, 별들이 다시 켜져. 네가 삼킨 게 사라진 게 아니라, 내 잎을 거쳐서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 있어. …지는 게 아니야, 이건. 되돌리는 거야. 네가 백 년간 하고 싶었던, 바로 그거.
무성은 다시 켜지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백 년간 자기 손으로 꺼뜨린 그 별들이, 지금 자기가 비워진 덕에 다시 빛나고 있었다. 그 광경 앞에서, 소년의 눈가에 오래 마른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연이—…무성. 너 지금 우는 거야? …그래. 울어. 저 별들, 네가 백 년간 그리워한 거잖아. 다시 켜지는 거 보니까, 눈물 나지. …울어도 돼. 나 안 볼게. 아니, 볼게. 대신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백 년 참은 눈물인데, 실컷 울어.
소년의 형상을 반쯤 되찾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어깨를 떨었다. 검은 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렸지만, 그 물은 더는 세상을 삼키지 않았다. 그저, 한 아이가 백 년간 참아 온 슬픔이 되어 조용히 흘러내릴 뿐이었다.
연이—…이제 됐어, 무성. 그만 싸우자. 너도 이 결투 이기고 싶지 않잖아. 나도 널 부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네 진짜 모습으로 나와. 그림자 뒤에 숨지 말고. 내가 널, 제대로 봐 줄게. 처음으로, 제대로.
연이—…이제 네 차례야, 무성. 네가 아무리 흩어져도, 이번엔 못 도망가. 나무의 진짜 힘은, 마시는 게 아니라 붙잡는 거거든. …간다!
연이—뿌리내림!
뿌리가 명반의 홈을 타고 번져, 깃털 소용돌이의 한복판을 붙들었다. 흩어질 수도, 숨을 수도 없게.
연이의 뿌리가 결투장 전체로 뻗어, 명반의 열두 궁을 하나로 꿰었다. 검은 물이 아무리 흩어지려 해도, 뿌리가 그 아래에서 그물처럼 붙들었다. 나무는 폭풍에 흔들려도, 그 뿌리만은 땅을 놓지 않는 법이었다.
무성—…놔. 놓으라고! 나는 흩어져야 해. 형태를 가지면 안 돼. 형태를 가지면… 내가 뭔지 들켜 버리니까. 백 년간 숨겨 온 걸, 네 뿌리가 다 끌어올리잖아…!
연이—…맞아, 무성. 나 지금 네가 숨긴 걸 끌어올리는 거야. 네 진짜 모습을. 백 년간 아무도 못 본, 그림자 뒤의 너를. …겁내지 마. 진짜 모습 들키는 거, 그거 지는 게 아니야. 이제야 누가 널 봐 주는 거야.
뿌리가 검은 소용돌이를 안쪽으로, 안쪽으로 조여 갔다. 흩어지던 깃털들이 한 점으로 모이고, 넘실대던 검은 물이 한 형태로 뭉쳤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둠의 핵심에서 무언가가 저항을 멈추고, 스스로 걸어 나왔다.
소용돌이가 강제로 걷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림자가 아닌 무언가가 끌려 나왔다.
뿌리가 마지막으로 조여들자, 검은 깃털과 물이 한 점으로 모여 형태를 갖췄다. 거대한 그림자가, 사람 하나 크기로 응축되었다. 백 년간 온 세계를 뒤덮던 어둠의 정체가, 마침내 뿌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까마귀 머리 모양의 후드에 검은 깃털 망토. 그 아래로 보랏빛 눈동자의 소년이 서 있었다.
연이—…사람이었어? 무성, 너 그림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거야?
네오—…저 보랏빛 눈. …잠깐. 나 저 눈, 어디서 봤어. 기억은 안 나는데, 가슴이 저릿해. …무성. 너, 왕좌의 그 사람이랑… 나랑… 셋이 무슨 관계야. 왜 너를 보는데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무성—…파수꾼. 너도 느끼는구나. …그래. 너랑 나, 둘 다 그 밤에 저 여자한테 붙들린 자야. 백 년 전, 그 검은 비 내리던 밤에.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이건 결투장이니까. 그 이야기는, 이 결투가 끝난 뒤에.
연이—…네오, 너랑 저 검은 비 속 얼굴 없는 남자. 하나였다가 둘로 갈라진. …내 꿈에 나오던 그 밤이야. 은빛 사자랑 그 남자가 자꾸 겹쳐 보이던. …그 남자가, 네오 너의 버려진 반쪽이야? 저 검은 비의 밤에, 네가 뭘 버려서 둘이 된 거야?
네오—…연이. 나 지금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저 애를 보는데, 기억이 나려다 안 나. 백 년 전 그 밤, 나도 거기 있었던 것 같은데, 뭘 했는지가 텅 비어 있어. …별자리를 버리면서, 그 밤의 기억도 같이 버린 거야. 제일 중요한 걸.
연이—…네오. 괜찮아. 기억 안 나도 돼. 이 결투 끝나면, 무성이 그 밤 이야기를 해 줄 거야. 그럼 네 빈자리도, 하나씩 채워질 거야. …지금은 이 결투에 집중하자. 답은, 그 뒤에 있어.
무성—…들켰네. 뿌리라는 건 참 무례한 기술이야. 숨겨 둔 것까지 다 끌어올리다니.
소년의 목소리는 그림자일 때보다 젊었고, 그리고 훨씬 더 지쳐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의 소년. 나이는 연이보다 조금 어려 보였다. 검은 깃털 망토 아래로 드러난 몸은 마르고 창백했고, 백 년의 피로가 그 어깨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의 위압은 온데간데없고, 지친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연이는 청록빛 거목에서 내려와, 힘을 다 쏟고 주저앉은 소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백 년간 아무도 다가가지 않은 그 어둠의 핵심으로, 겁 없이. 손에는 무기가 아니라, 그저 내밀 손 하나뿐이었다.
네오—연이, 조심해. 저 애 아직 왕좌의 실에 매여 있어. 그 여자가 언제 또 실을 당길지 몰라. …가까이 가면 위험할 수도 있어.
연이—…알아, 네오. 근데 위험해도 가야 해. 백 년간 아무도 저 애한테 안 다가갔잖아. 다들 무서워서, 미워해서, 멀리서 '멈춰라'만 외쳤지. …나는 다가갈래. 그게 저 애가 진짜로 필요했던 거니까. 무기가 아니라, 곁이.
연이가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소년은 움찔거리며 물러나려 했다. 다가오는 온기가 낯설고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도망갈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겁먹은 눈으로 연이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연이는 소년 앞에서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백 년간 모두가 이 아이를 올려다보며 두려워하거나,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같은 눈높이에서 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이—…무성. 나 여기 왔어. 안 때려. 안 미워해. 그냥, 너랑 눈 맞추려고 온 거야. …너 백 년 동안, 누가 이렇게 눈 맞춰 준 적 있어? …없지. 다들 무서워하거나, 부려먹거나. …나는 그냥, 너를 볼게. 지친 아이 하나로.
무성—…왜. …왜 그렇게까지 해. 나는 네 세계를 침식한 적이야. 네 친구들 별을 가둔 놈이야. 미워해야 정상이잖아. …근데 왜, 그런 눈으로. …그런 눈으로 보면, 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연이—…반응 안 해도 돼. 그냥 있어. …무성, 너 미움받는 건 익숙한데, 이해받는 건 처음이지? 그래서 더 무섭지? …괜찮아. 천천히 해. 백 년 얼었는데, 하루아침에 안 녹아. 나 안 급해. 네가 녹을 때까지, 기다릴게.
소년은 무릎을 끌어안고, 연이의 그 말들을 가만히 들었다. 반박도, 조롱도 하지 못했다. 백 년간 자신을 지켜 온 그 딱딱한 껍데기가, 이 이상한 손님의 따뜻한 말들 앞에서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그 금 사이로, 오래 갇혀 있던 진짜 무성이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려 하고 있었다.
네오—(…연이. 저 애, 이제 너한테 마음을 열려고 해. 백 년 문지기가, 대학생 하나한테. …참 신기해. 나는 백 년을 칼로 벼렸는데, 너는 말 몇 마디로 저 벽을 허물어. …네 곁에 있으면, 나도 자꾸 무뎌지는 것 같아. 나쁜 의미가 아니라.)
무성—…그만해. 자꾸 다정하게 굴지 마. …너 방금 이겼잖아. 그럼 승자답게 굴어. 인질도, 별도 가져가. 나는 그냥… 여기 있을 테니까. …그렇게 눈 맞추면서, 자꾸 내 마음 파고들지 말라고. 그거, 칼보다 아파.
연이—…칼보다 아프다니. 그럼 제대로 박히고 있네. …무성, 나 승자답게 안 굴 거야. 나는 인질이랑 별만 받고 널 버려두고 가는, 그런 승자 안 될 거야. …네가 자꾸 밀어내도, 나 안 가. 이상하지?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근데 너 보면, 그냥 두고 못 가겠어.
소년은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백 년간 아무도 자기를 두고 못 가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다들 이기면 떠났고, 지면 사라졌다. 곁에 남겠다는 그 말이, 무성에게는 가장 낯설고, 가장 무너뜨리기 쉬운 무기였다.
연이—…너, 이렇게 어렸구나. …그 거대한 검은 물이랑 까마귀 떼가, 사실은 이 마른 어깨 하나에서 나온 거였어. …무성. 얼마나 무거웠니. 이 백 년을, 이 작은 몸으로 온 세계를 삼키면서.
연이의 그 말에, 소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위협도 조롱도 아닌, 그저 자신의 무게를 알아봐 주는 말. 백 년간 누구도 건네지 않은 그 말에, 소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무성—…그런 말, 하지 마. …무겁냐고? …응. 무거웠어. 백 년 내내. 근데 아무도 안 물어봤어. 다들 나한테 '더 삼켜라, 더 침식해라'만 했지, '무겁냐'고 물은 건… 네가 처음이야.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자꾸… 마음이 이상해지잖아.
연이—…마음이 이상해지는 거, 그거 좋은 거야. 얼었던 게 녹을 때 그래. 시리고, 아프고, 이상하지. …무성, 너 지금 백 년 만에 녹고 있는 거야. …울어도 돼. 참지 마. 백 년 참았으면, 이제 좀 울어도 되잖아.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지 않으려고. 백 년간 굳어 버린 그 표정이, 연이의 말 앞에서 자꾸 무너지려 했다. 그리고 그 무너지는 얼굴 위로, 연이는 자기가 결투 내내 느낀 그 눈빛의 정체를 마침내 알아보았다.
네오—(…연이. 저 애, 이제 싸울 마음이 없어. 물도, 깃털도 다 흩어졌어. 남은 건 그냥… 지쳐서 울고 싶은 아이 하나야. …네가 이겼어. 힘이 아니라, 그 말들로.)
무성—그래, 이게 왕좌 곁 그림자의 정체야. 실망했어? 거창한 마왕이 아니라 그냥 깃털 뭉치 소년이라서.
소년은 애써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은 방어막이었다. 먼저 자기를 깎아내려서, 남이 실망하기 전에 상처를 덜 받으려는. 연이는 그 서툰 방어막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자기도 한때 그런 표정을 지었으니까.
연이—…그거, 나도 하던 건데. 먼저 나 별거 아니라고 깔아뭉개는 거. 그래야 남이 실망해도 덜 아프니까. …무성, 그 표정 안 해도 돼. 나 너한테 하나도 안 실망했어. 오히려, 이 마른 어깨로 백 년 버틴 게 대단하다 싶어.
네오—…나도. 솔직히 처음엔 거대한 그림자라 잔뜩 긴장했는데. 막상 진짜 모습은 지친 아이 하나라니. …무성, 너 안 미워. 백 년간 시켜서 한 거잖아. 그 마음, 나도 조금은 알 것 같아. 나도 도망친 자니까.
연이—실망은 무슨. 그것보다 무성, 너 아까부터 왜 그렇게.
연이는 소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결투 내내, 무성은 연이를 미워하는 눈으로 보지 않았다. 삼키려는 포식자의 눈도 아니었다. 그건 다른 종류의 눈이었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진 자를 보는, 아주 오래 굶주린 눈.
연이—…나를 부러워하는 눈으로 봐?
소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명반의 별들이 그 동요를 따라 일제히 깜빡였다. 백 년간 숨겨 온 그 마음이, 연이의 단 한마디에 들켜 버린 것이다.
연이—…부러운 거,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 부러운 게 있다는 건, 네가 갖고 싶은 게 있다는 거고, 그건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거야. …무성, 뭐가 그렇게 부러웠어? 내가 뭘 가졌길래, 백 년 문지기가 대학생 하나를 그런 눈으로 봐?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백 년간 목구멍 깊이 삼켜 온 그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 흔들리는 보랏빛 눈이, 어떤 말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도 갖고 싶었다고. 너처럼, 되고 싶었다고.
제32화 · 검은 깃털의 주인 — 끝. 제33화 「그릇」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