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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운명 노벨6부 · 자미두수, 별들의 궁

EP.31 · 32 / 44

별들의 궁

별들의 궁. 자미두수 열두 궁의 구조 위에서 새로운 무대가 펼쳐진다.

한글 약 13,781자 · 읽는 시간 약 33분

왕좌의 어둠이 갈라지며, 그 안쪽에서 또 하나의 문이 열렸다. 별들의 궁의 진짜 심장부로 통하는 문. 연이가 그 문턱을 넘는 순간, 발밑의 검은 물이 사라지고, 세상이 통째로 뒤집혔다.

위와 아래가 없었다. 벽도 천장도 없었다. 사방이 별이었고, 그 별들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고 있었다. 연이는 마치, 우주의 시계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것 같았다.

연이—…여기가, 왕좌 너머의 진짜 방이구나. …아까 그 어두운 회랑이랑 완전히 달라. 여긴… 운명 그 자체 같아. 사람들 인생이 별이 되어서, 여기 다 돌고 있어.

연이는 손을 뻗어, 눈앞을 흐르는 별의 강에 손끝을 담가 보았다. 별들이 손가락 사이로 강물처럼 흘렀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무수히 많은 사람의 운명이었다. 그 감촉에, 연이는 잠시 숨을 죽였다.

연이—…이 별 하나하나가 다 누군가의 한평생이야. 태어나서, 사랑하고, 아파하고, 저무는. …이렇게 많은 인생 위에 서 있으니까, 함부로 발 디디기가 미안하다. …그래도 가야지. 저 끝에, 내가 구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연이는 별의 강에서 손을 거두고, 왕좌가 있는 명반 한복판을 응시했다. 이 광막한 운명의 방을 가로질러, 저 어둠의 심장부까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연이의 걸음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곳에는 낮도 밤도 없었다. 대신 발밑에서, 거대한 궤도가 돌고 있었다.

열두 개의 궁이 새겨진 별의 바퀴, 명반이었다. 세상 모든 운명의 설계도가 이곳에서는 곧 지면이었다.

자미두수의 세계. 별로 운명을 읽는 자들의 가장 깊은 방이었다.

연이는 발밑의 무한한 별들을 내려다보며, 자기가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 실감했다. 처음엔 그저 겁에 질린 꽃돼지 한 마리였다. 재성의 강가에 던져져, 시장에서 굴렀고, 도서관에서 본뜻을 배웠고, 사람이 되었고, 이제 온 우주의 운명이 도는 이 방 한복판에 서 있었다.

연이—…내가 여기까지 왔네. …삼각김밥 사 먹던 대학생이, 우주 운명 지도 위에 서 있어. …웃기다. 근데 무섭진 않아. 그동안 만난 사람들이, 다 내 안에 있으니까. 그 온기가, 이 차가운 별들 사이에서 나를 안 얼게 해.

연이는 손목의 물 조약돌, 목의 손수건, 품속의 붓과 종이 물고기를 차례로 매만졌다. 넷이 함께라는 그 감각이, 이 광막한 공허 속에서 유일하게 단단한 닻이었다. 연이는 그 닻을 꼭 붙든 채, 첫걸음을 내디뎠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발밑의 궁이 바뀌었다. 자미궁을 밟으면 별이 왕관처럼 돋았고, 파군궁을 밟으면 발밑이 무너질 듯 요동쳤다. 세상 모든 사람의 길흉이 여기서는 그저 지형이었다.

연이—…발 한 번 잘못 디디면 누군가의 인생이 통째로 흔들릴 것 같아. 여긴 조심조심 걸어야겠다.

연이가 재백궁(財帛宮)을 밟자, 발밑에서 금화의 환영이 쏟아졌다가 흩어졌다. 관록궁(官祿宮)을 밟자 관(冠)의 그림자가 솟았다. 궁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재물과 명예와 사랑과 병을 지형으로 빚어내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인생이, 여기서는 밟고 지나가는 땅이었다.

연이—…밟기가 무섭다. 이 땅 한 칸 한 칸이 누군가의 진짜 인생이잖아. 재물궁이 무너지면 누가 파산하고, 질액궁이 어두우면 누가 앓고. …이 궁의 주인은 이걸 그냥 '지형'으로 봤겠지. 근데 나는 못 그래. 나한테 이건, 다 사람이야.

연이가 명궁 자리를 지날 때, 발밑에서 낯익은 별 하나가 반짝였다. 을(乙)목 넝쿨에 임오(壬午)의 물불, 그리고 마지막 신미(辛未) 시주. 연이 자신의 사주였다. 백 년에 걸쳐 완성된, 이 궁이 그토록 탐내는 그 그릇이 여기, 발밑에 별로 새겨져 있었다.

연이—…내 별이다. 완성된 내 사주. …이게 저 여자가 백 년을 탐낸 마지막 수집품이구나. …근데 이상하지. 이 별을 보는데, 무섭기보단 오히려 든든해. 이건 뺏길 그릇이 아니라, 내가 쥔 무기니까. 이 별로, 나는 다 되살릴 거야.

그리고 그 곁으로, 다른 별들이 하나둘 반짝였다. 재성에서 만난 사람들, 도서관에서 구한 이야기들, 루나와 모카와 백문의 별. 연이가 이 여정에서 이은 인연들이, 명반 위에서 연이의 별과 조용히 이어져 하나의 성좌를 이루고 있었다.

연이—…봐. 내 별만 있는 게 아니야. 다들 여기 나랑 이어져 있어. 이게 내 진짜 사주야. 나 혼자가 아니라, 이 모든 인연이랑 같이 그린 성좌. …이 궁은 이걸 못 봐. 별을 하나씩 떼어서 셈만 하니까. 근데 나는, 이 이어짐이 보여.

네오—…그래서 네가 위험한 손님인 거야. 다른 그릇들은 여기 오면 이 위압에 눌려 자기를 잃었어. 근데 너는, 이 땅을 밟으면서도 자꾸 그 아래 사람을 봐. …그게 이 궁이 가장 두려워하는 눈이야.

연이—…두려워한다고? 이 거대한 궁이, 나 같은 학생 하나를? …하긴. 값으로 지은 세계는, 값으로 안 읽히는 눈을 제일 무서워하겠지. …좋아. 그럼 그 눈으로, 끝까지 읽어 줄게.

두 사람은 명반의 궤도를 따라 왕좌 쪽으로 나아갔다. 걸음마다 별자리가 바뀌고, 발밑의 운명이 출렁였다. 그 광막한 별의 벌판 위에서, 연이와 네오는 아주 작았지만,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연이—…근데 네오. 이 넓은 데를 계속 걸으니까, 좀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 우주 한복판에서 소풍 온 기분이야. 김밥이라도 싸 올걸.

네오—…운명의 심장부에 와서 김밥 타령을 하는 손님은, 아마 네가 처음일 거다.

연이—긴장하면 배고파지는 체질이거든. 이것도 다 살아 있다는 증거야. 이 차가운 데서, 배고픈 나 같은 인간이 제일 안 어울리잖아. 그래서 내가 여기 답이 될 수 있는 거고.

농담 같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온기도 허기도 없는 이 완벽한 셈의 세계에, 배고프고 실없고 따뜻한 인간 하나가 걸어 들어온 것. 그 부조화 자체가, 어쩌면 이 백 년의 얼음을 녹일 균열일지도 몰랐다.

네오—맞아. 여기선 걸음 하나가 운명 한 줄이야. 함부로 뛰지 마.

연이—별이 도는 소리가 들려. 시계 초침 소리랑 비슷한데, 훨씬 크고 훨씬 외로운 소리야.

연이는 명반 위를 조심스레 걸으며, 발밑의 별자리들을 하나씩 읽어 나갔다. 자미(紫微), 천기(天機), 태양(太陽), 무곡(武曲), 천동(天同), 염정(廉貞)… 열넷의 주성과 백여 개의 보좌성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사람의 운명을 촘촘히 쪼갠, 별들의 문법이었다.

연이—…아름답긴 해. 사람 하나하나가 이렇게 정교한 별자리 지도 위에 놓여 있다니. …근데 어딘가 슬퍼. 여기선 사람이, 이름이 아니라 '자리'야. 몇 궁의 몇 성. 그 사람이 뭘 웃고 뭘 우는지는, 이 지도에 안 적혀 있어.

네오—…맞아. 자미두수는 사람을 별의 좌표로 읽어. 정확하지. 근데 그 정확함이, 사람을 숫자로 만들어. 이 궁의 주인은 백 년째 그 좌표만 들여다봤을 거야. 사람은 안 보고, 자리만.

연이—…그래서 이렇게 차가운 거구나. …네오, 나 여기서 반대로 읽을래. 이 별들을 좌표가 아니라, 사람으로. 자미성 자리에 앉은 게 누구인지, 그 사람이 무슨 슬픔으로 여기 앉아 있는지. …그게 내가 이 궁에서 싸우는 방식이야.

연이가 그렇게 말하자, 발밑의 별 몇 개가 미세하게 밝아졌다. 오래 좌표로만 읽혀 온 별들이, 처음으로 '사람'으로 불린 것에 반응하듯. 이 차가운 명반 위에서도, 연이의 읽기는 통하고 있었다.

연이는 문득, 상승길에 지나온 열두 문을 떠올렸다. 명궁의 각오, 형제궁의 온기, 자녀궁의 소망이, 질액궁의 시들어 가는 별. 그 문들이 여기, 발밑에 궤도로 깔려 있었다. 이 궁 전체가, 연이가 지나온 그 열두 문의 심장부였던 것이다.

연이는 문득, 이 광막한 별의 벌판에 자기 혼자라는 걸 실감했다. 재성의 온기도, 도서관의 지혜도, 자취방의 평범함도, 전부 저 아래에 두고 왔다. 아무리 넷이 함께라 되뇌어도, 이 순간만은 사무치게 외로웠다.

연이—…혼자다. 진짜로. …괜찮아. 각오했잖아. 근데… 그래도. 누구 하나만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 이 차가운 데서, 손이라도 잡아 줄.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반 걸음의 간격이 먼저 느껴졌다.

네오—무사했구나. 늦어서 미안해. 침식이 어디서 시작됐나 쫓다 보니 결국 여기였어.

연이—네오! 고양이 세수는 잘 마치고 온 거야?

네오—…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연이—모르시겠지. 귀 끝 빨개진 것도 모를 거고.

연이의 실없는 농담에, 네오의 굳은 얼굴이 아주 잠깐 풀렸다. 그러나 이내, 네오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 재회의 온기 뒤에 감춰 둔,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었다.

네오—…들어. 저 아래 재성에서 별길을 타고 온 너랑 달리, 나는 세계의 문이 감지 못하는 작은 몸으로 몰래 건너왔어. 그렇게라도 안 하면, 이 궁의 주인이 내가 여기 온 걸 바로 알아채니까. …나는, 이 궁에서 도망친 자거든.

연이—…역시. 흰 고양이, 너 맞았구나. …네오. 너 여기 있는 거, 위험한 거지? 네 그 금빛 힘, 그거 쓰면 이 궁 주인이 널 감지한다며. …저 위 왕좌의 주인이랑, 너랑, 무슨 사이야. 왜 여기서 도망쳤어.

네오—…그건, 아직 말 못 해. 나도 다 기억 못 하니까. 별자리를 버리면서, 그 대가로 내 과거의 상당 부분도 흐려졌어. …다만 이것만은 알아. 저 왕좌 근처에 서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미치도록 그립고, 미치도록 무서워. 마치, 저기 내 일부가 앉아 있는 것처럼.

연이—(…또 그거야. 내 꿈속 얼굴 없는 남자. 은빛 사자. 네오. …저 왕좌의 주인이, 네오랑 갈라진 무언가일지도 몰라. 백문 님이 마지막에 '네오를 잘…' 하다 끊긴 것도. …여기서, 그 답을 알게 되겠지.)

연이—…네오. 네가 힘들면, 여기 안 있어도 돼. 나 혼자 할 수 있어. 네가 감지당하면서까지 무리할 필요 없어.

네오—…아니. 여기까지 와서 널 혼자 둘 순 없지. 감지당하면 당하는 거고. …대신 약속해. 정말 위험해지면, 내 힘을 아끼지 말고 다 쓸 거야. 널 지키는 일이라면, 남은 별자리 조각 하나까지 다 태워서라도.

연이—…바보. 누가 누굴 지켜. …알겠어. 근데 나도 약속할게. 너 혼자 다 태우게 안 둬. 이번엔 나도, 루나도, 다 같이 싸울 거야. …그러니까 너도, 혼자 사라질 생각 하지 마. 알았지?

연이는 방금 전까지 사무치던 외로움이, 네오의 등장으로 스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우주의 시계 한복판, 이 차가운 별의 벌판에서, 반 걸음 옆에 서 준 이 무뚝뚝한 파수꾼 하나가, 그 어떤 온기보다 든든했다.

연이—…있잖아, 네오. 나 방금 혼자라서 좀 무서웠거든. 근데 네가 딱 나타나 주니까, 하나도 안 무섭다. …고마워. 진짜로. 이 말은 농담 말고, 진심.

네오—…나도. 재성에서 네가 별길로 빨려 올라갈 때, 못 따라가서 애가 탔어. 작은 몸으로라도 먼저 건너오길 잘했지. …네 옆이, 내 자리 같으니까. 별자리는 잃었어도, 이 자리 하나는 안 잃을 거야.

연이—…어우, 무뚝뚝한 애가 이런 말 하니까 오글거려. 근데 좋다. 한 번만 더 해 봐.

네오—…한 번이면 충분해. 두 번은 안 해.

네오—…자, 농담은 여기까지. 내가 이 며칠 쫓은 걸 말해 줄게. 침식은 저 왕좌에서 시작돼. 검은 물이 궁을 타고 아래로 흘러, 재성의 강을 물들이고, 별을 하나씩 꺼뜨려. 그 물을 부리는 게 저 왕좌 곁 그림자, 무성이야.

네오—…그리고 봤어. 저 위 가장 높은 탑. 거기 시들어 가는 창백한 별 하나가 있어. 그 곁에 작은 청록빛 하나. 네가 되쓴 그 소망이야. 살아 있어. 무사해. 다만, 저 왕좌를 지나지 않으면 아무도 그 탑까지 못 가.

연이—…소망이,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그럼 길은 하나네. 저 왕좌 곁 그림자, 무성을 넘어야 소망이한테도, 저 시들어 가는 별한테도, 그 여자한테도 갈 수 있어. …네오. 저 그림자, 어떤 애야? 네가 본 느낌은?

네오—…강해. 그리고… 슬퍼. 힘은 지독한데, 그 힘을 쓰는 눈이 텅 비었어. 이기려는 자의 눈이 아니야. 그냥, 시키는 대로 삼키고 또 삼키는… 지친 눈이야. 조심해. 저런 상대가 제일 위험해. 잃을 게 없는 자니까.

연이—…잃을 게 없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잃은 거겠지. …알겠어, 네오. 힘으론 안 되겠다는 거, 알아들었어. 그럼 내 방식으로 가야지. 저 텅 빈 눈 속에, 뭐가 남아 있는지 읽어 볼게.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는 사이, 궤도 안쪽을 바라보던 네오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명반 한복판에서, 무언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반의 한복판, 자미성의 자리에 검은 왕좌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윤곽뿐인 실루엣이었다. 하지만 그 실루엣에서, 익숙한 검은 비의 냄새가 났다. 연이는 꿈속에서 맡던 그 비 냄새를, 이제 현실에서 맡고 있었다.

연이—…이 냄새. 내 꿈에서 나던 검은 비 냄새야. …저 그림자. 얼굴 없는 남자는 아닌데, 그 남자랑 같은 비를 두르고 있어. …저게, 별들의 궁 왕좌를 지키는 자구나.

네오—…조심해, 연이. 저 실루엣, 형태가 하나로 안 잡혀. 물이었다가, 깃털이었다가, 새였다가. 정해진 몸이 없어. …저런 건 베어도 소용없어. 벨 실체가 없으니까.

연이—…실체가 없다기보다, 너무 많은 걸 삼켜서 자기 형태를 잃은 것 같아. …불쌍하다. 원래 뭐였는지도 모르게, 이것저것 다 뒤집어쓴 모습이야. …인사부터 해 보자. 적인지 아닌지는, 얘기해 보면 알 테니까.

무성—왔구나. 왕좌의 손님. 그리고 시간 밖에서 온 파수꾼.

'파수꾼.' 그 단어에, 그림자가 잠시 멈칫했다. 검은 물이 미세하게 은빛으로 일렁였다. 무성은 네오를 알아보았고, 그 앎이 무성을 흔들고 있었다.

무성—…파수꾼. 네가, 돌아왔구나. 백 년 만에. …왕좌가 너를 알아본다. 나도, 너를 안다. …가엾은 것. 별자리를 버리고까지 도망쳐 놓고, 결국 제 발로 이 궁에 돌아오다니.

네오—…너, 나를 알아? 나는 너를 기억 못 하는데. …별자리를 버리면서 흐려진 그 기억 속에, 너도 있는 거야? 무성, 너랑 나랑… 백 년 전에 무슨 사이였어?

무성—…그건 왕좌에 앉은 자에게 물어라. 나는 그저 지켜본 새일 뿐이니. …다만 한때, 너와 저 왕좌는 하나였지. 지금처럼 둘로 갈라지기 전엔. …됐다. 옛이야기다. 삼켜진 지 오래야.

연이—(…또 나왔어. 네오랑 왕좌가 '하나였다'. 갈라지기 전엔. …내 꿈이 맞았어. 얼굴 없는 남자, 은빛 사자, 네오, 그리고 저 왕. 다 하나에서 갈라진 거야. …대체 백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오—무성. 강을 검게 물들이고 별을 어둡게 칠한 거, 네 짓이야?

무성—내 짓이지. 다만 내 뜻인지는 묻지 마.

연이—…내 짓이지만 내 뜻은 아니다. …방금 그 말, 되게 슬프게 들렸어. 자기가 한 일인데, 자기가 원한 건 아니라니. …그거, 백 년 동안 남의 손에 끌려다닌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잖아.

무성—…첫 마디부터, 남의 속을 파고드는군. …역시 완성된 그릇은 다르다. 허나 그 영민함이, 이 궁에선 독이 될 것이다. 너무 많이 읽는 자는, 너무 많이 아프거든.

이상한 대답이었다. 내 짓이지만 내 뜻은 아니다. 연이는 그 말의 결을 곱씹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에게 떠밀려 하는 사람의 말투였다.

연이—(…읽어 보자. 저 그림자. 겉은 검은 물, 검은 깃털. 근데 그 안이… 이상해. 분노가 아니야. 분노인 척하는, 아주 오래된 슬픔이야. 그리고 그 밑엔… 지쳐서 반쯤 포기한 마음. …이 새, 자기가 하는 짓을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있어.)

네오—(연이. 조심해. 저 녀석 몸 전체가 저주 계약 같은 걸로 묶여 있어. 내 눈엔 그게 보여. 검은 실이 저 새를 왕좌에 붙들어 매고 있어. 스스로 저러는 게 아니야. …누군가가, 저 새를 도구로 쓰고 있어.)

연이—…무성. 하나 물어도 돼? 넌 이 일이, 하고 싶어? …강을 검게 칠하고, 별을 어둡게 하고, 남의 이야기를 삼키는 이 일. …네가 원해서 하는 거 맞아? 아니면,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무성—…쓸데없는 걸 묻는군.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한다. 그게 이 하늘의 법이니까. 스물일곱 별자리를 짊어진 새에게,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사치야.

연이—…사치라. 그 말은, 원래는 하고 싶은 게 있었다는 뜻이잖아. 지금은 그걸 사치라고 부를 만큼, 포기했다는 뜻이고. …무성, 너 원래 뭘 하고 싶었어? 이야기를 삼키기 전엔, 뭘 하던 새였어?

그림자가 흠칫,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백 년 만에 처음 받아 보는 질문이었다. 적들은 늘 '멈춰라'라고 외쳤지, '원래 뭘 하고 싶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 질문은, 무성의 가장 깊고 오래된 상처를 정확히 건드렸다.

무성—…입 다물어라. 그 입, 왕좌의 손님치고는 너무 많이 움직여. …네가 뭘 읽어 내려는지 안다. 하지만 소용없어. 나는 이미, 나를 잃은 지 오래야.

하지만 연이의 눈은 이미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 물의 표면 아래, 아주 깊은 바닥에 가라앉은 한 줄기 맑은 빛. 오염되기 전, 무성의 본래 모습이었다.

연이—…보인다, 무성. 네 밑바닥. …너, 원래는 맑은 샘이었어. 스물일곱 별자리에서 솟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낳는 샘. 사람들이 네 물을 마시고 노래를 짓고, 소설을 쓰고, 사랑을 고백했어. 넌 이야기의 어머니였어. 삼키는 게 아니라, 낳는.

무성—…그만해.

연이—…근데 어느 날, 그 여자가 왔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손에 넣으려는 눈으로. 그리고 너한테 명했어. 이제부터 이야기를 낳지 말고, 삼켜라.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모든 인연을 거둬들여라. …너는 거부했겠지. 넌 낳는 존재지, 삼키는 존재가 아니니까.

무성—…거부했다. 백 년 전, 나는 그 명을 거부했다. 이야기를 삼키는 건, 나를 죽이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여자는, 내 근원에 검은 실을 걸었다. 거스를 때마다 내 깃털을 뽑아, 내 기억을 한 조각씩 지웠지. 나를 조금씩 없애 버리겠다고. …나라는 존재가 통째로 지워지느니, 나는 차라리 나를 오수로 만드는 쪽을 택했다.

연이—…기억을 지운다고. 거스르면 너를 조금씩 없앤다고. …그래서 넌 거부도 못 하고, 백 년을 삼켜 온 거구나. 사라지는 게 무서워서. …무성. 얼마나 외로웠어. 자기가 지워질까 봐, 하기 싫은 걸 백 년을 해 온 거잖아.

무성—…묻지 마라. 그건 내가 삼킨 이야기들 중, 가장 깊이 가라앉은 것이니. …다만 이것만 알아 둬라. 나는 백 년을 삼켜 왔다. 이제 삼키는 것 말고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잊었다. …그러니 너의 그 다정한 읽기도, 나에겐 너무 늦었어.

연이—…안 늦었어. 네가 방금 '거부했다'고 말했잖아. 백 년 전 일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잖아. 잊은 게 아니야. 억누른 거지. …네 밑바닥 그 맑은 샘, 아직 안 말랐어. 내가 봤어. …무성, 이 결투 끝나고, 내가 그 샘 다시 터뜨려 줄게. 약속해.

무성—…허황된 소리. …됐다. 말은 그만. 결투장에서, 네 그 입이 얼마나 버티나 보자. 완성된 그릇이, 별들의 궁의 문지기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

연이—…무성. 결투 시작하기 전에, 딱 하나만 더. …나는 널 부수러 온 게 아니야. 이 결투에서 내가 이기면, 네 근원에 걸린 그 검은 실을 끊어 줄게. 다시 맑은 샘으로 돌아가게. 이야기를 삼키는 새가 아니라, 낳는 새로. …그러니까 너도, 너무 세게 나오지 마. 다치면 나도 아프니까.

연이의 말에, 무성의 검은 물이 또 한 번 크게 출렁였다. 그 출렁임은 분노가 아니었다. 백 년간 아무도 건네지 않은 그 말 — '너를 다시 샘으로 돌려주겠다'는 말이, 오래 마른 무성의 바닥을 적신 것이다.

무성—…너는… 정말 이상한 아이다. 결투를 앞두고 상대를 걱정하는 그릇이라니. …백 년간 나를 멈추라 한 자는 많았으나, 나를 돌려주겠다 한 자는… 네가 처음이다. …허나 소용없어. 검은 실은, 끊으려 하면 나라는 존재가 통째로 지워져. 그러니 나는, 끝까지 삼킬 수밖에.

연이—…검은 실을 끊으면 네가 지워진다고. …그래서 넌 백 년을 억지로 검게 물들어 온 거구나. 사라지지 않으려고. …알겠어. 그럼 나는, 실을 끊는 게 아니라 그 실 자체를 없앨 길을 찾을게. 너를 안 지우면서. …그게 내 다른 길이야.

무성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검은 눈에,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아주 작은 빛 — 어쩌면 '혹시'라는 이름의 빛이 스쳤다. 그리고 그 빛을 애써 지우려는 듯, 무성은 거대한 새의 형상으로 몸을 벼렸다.

그때 궤도 바깥에서 별 하나가 깜빡였다. 아니, 별이 아니라 별 모양의 우리였다.

우리 안에 낯익은 빛 세 점이 갇혀 파닥이고 있었다. 하나는 루나의 맑은 물빛, 하나는 빵집 언니의 따뜻한 등불빛, 하나는 백문의 오래된 서가빛. 저 아래 재성과 도서관에서 빨아올려진, 세 사람의 '별'이었다.

연이—…저건 루나 빛, 언니 빛, 백문 님 빛…! 이 세계에서 빨아올린 세 사람의 이야기잖아! 무성, 사람 몸은 아래 뒀지만 그 별을 여기 가둬 놨구나. …이게 무슨 짓이야!

별빛 창살 안에서, 루나의 물빛이 가늘게 떨며 목소리의 잔향을 흘렸다. 「연이…! 오지 마…! 이거 함정이야, 우리 별은 미끼란 말이야…!」 저 아래 몸으로 물의 방패를 지키느라, 여기 갇힌 건 루나의 빛뿐이었다.

백문의 서가빛도 겹쳐 잔향을 냈다. 「…자네가 우리 별을 되찾아 오지 않으면, 저 아래 우리 몸도 오래 못 버티네. 저 왕좌 곁 그림자, 예사롭지 않아. 내 색인 어디에도 없는 존재일세. 부디 조심하게.」

연이는 저도 모르게 별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 빛을 당장 꺼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끝이 별빛 창살에 닿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창살은 왕좌의 법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힘으로는, 열 수 없었다.

연이—윽…! …안 열려. 힘으로는 안 되는구나. …그래. 왕좌의 법. 결투로 이겨야만 열리는 거지? 무성, 맞지? 내가 널 넘어야, 이 셋도, 저 아래 몸도 다 풀리는 거지?

무성—…그래. 왕좌의 법이 그러하다. 인질은 승자에게만 돌아간다. …그러니 그 손, 거둬라. 창살에 데어 봐야 소용없어. 너를 기다리는 건, 애원이 아니라 결투다.

연이—…알겠어. 손 거둘게. 대신 창살 안 셋한테 약속해. …루나, 언니, 백문 님. 조금만 참아요. 내가 이 결투 이겨서, 셋 다, 저 아래 몸까지 전부 되돌려 놓을게요. 힘으로 못 여는 문은, 마음으로 열면 되니까.

연이—…미끼인 거 알아. 근데 나는 미끼를 문 게 아니라, 친구를 데리러 온 거야. 그건 완전히 다른 거거든.

연이는 별 우리 앞으로 다가가, 세 점의 빛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루나의 물빛은 여전히 맑았고, 언니의 등불빛은 여전히 따뜻했고, 백문의 서가빛은 여전히 깊었다. 갇혀서도, 그 빛들은 자기 본질을 잃지 않고 있었다.

연이—루나. 네 물빛, 여기 갇혀서도 이렇게 맑네. 저 아래서 언니 지키느라 얼마나 애쓰고 있을까. …언니 등불빛. 죽음 문턱에서도 남 챙기던 그 온기 그대로예요. …백문 님 서가빛. 백 년의 지혜가 여기서도 안 흐려졌어요. …기다려요. 다 되찾아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낼게요.

연이는 이제 알았다. 별들의 궁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사람의 '별'을 —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이야기와 빛을 — 빨아올려 가두는 곳이었다. 몸은 아래 남아도, 별을 빼앗기면 사람은 시들었다. 재성이, 도서관이, 온 세계가 그렇게 시들고 있었다.

연이—…이제 알겠어. 넌 사람을 안 죽여. 대신 그 사람의 '별'을 뽑아. 그게 더 잔인해. 몸은 살아서, 자기가 왜 이렇게 텅 비어 가는지도 모른 채 시들어 가니까. …무성. 이 셋만이 아니지? 이 궁 벽에 걸린 그 수많은 이야기들. 다 이렇게 뽑힌 별이잖아.

무성이 대답 대신, 소매를 가볍게 들었다. 그러자 궤도 저편에서 이름 없는 별 하나가 스르르 떠올라, 검은 물에 닿는 순간 소리도 없이 삼켜졌다. 방금까지 누군가의 이야기였던 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연이었다.

연이—…방금. 별 하나가. …저건 누군가의 인생이었어. 누군가의 이야기였다고. 그걸 이렇게, 인사하듯 삼켜 버려…?!

무성—…이것이 내 힘이다, 손님. 백 년간 익힌, 삼키는 기술. 저 아래 세계가 지금 이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네가 나와 말장난을 하는 이 순간에도. …그러니 서둘러라. 네 다정한 읽기가 빠른지, 내 삼킴이 빠른지.

연이—…비겁해. 그렇게 서두르게 만들어서, 내가 실수하길 바라는 거지. …근데 무성. 방금 너, 그 별 삼킬 때 아주 잠깐 눈을 감았어. 보기 싫었던 거야. 네가 하면서도, 그게 싫은 거야. …그 마음까지 삼키진 못했구나.

무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검은 물이 미세하게 출렁였을 뿐. 연이의 말이, 또 한 번 정확히 그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다. 삼키면서도 삼키는 자신을 혐오하는, 백 년의 자기모순을.

네오—(연이. 놀랍네. 저 녀석, 너랑 말 섞을수록 물결이 흐트러져. 힘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는 거야. …어쩌면 네 방식이, 내 칼보다 저 녀석한테 더 치명적일지도 몰라.)

연이—(…그래. 저 새는 힘으론 못 이겨. 벨수록 커지고, 삼킬수록 강해져. 근데 마음은 흔들려. …그럼 내가 이길 길은 하나야. 저 새가 스스로, 삼키기를 멈추고 싶게 만드는 것. 그게 진짜 '이기는' 거야.)

무성—…시간이 없다 했지. 보여 주마. 네가 지체하는 동안, 저 아래가 어찌 되고 있는지.

검은 물이 거울처럼 펼쳐지며, 그 위로 아래 세계의 환영이 비쳤다. 재성의 시장이 회색으로 스러지고, 빵집에서 루나가 물의 돔을 지키며 안간힘을 쓰고, 모카가 겁에 질린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온 세계가, 조금씩 색을 잃어 가고 있었다.

연이—…루나. 모카. …다들 저렇게 버티고 있어. 내가 여기서 한마디 더 할 때마다, 저 아래 별이 하나씩 꺼지는구나. …무성. 너 이거, 나 조급하게 만들려고 보여 준 거지? 근데 역효과야. 나 이거 보니까, 더 침착하게 정확히 널 읽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환영 속에서, 루나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저 위의 연이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그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언니, 나 여기서 버틸게. 그러니 언니는, 언니가 할 일을 해. 그 무언의 응원이, 환영 너머로 전해져 왔다.

연이—…봤지, 무성? 저 아이, 너 때문에 저렇게 힘든데도 날 원망 안 해. 오히려 날 응원해. …저게 사람이야. 삼켜지지 않는 마음이야. 너도 원래 저런 걸 낳던 샘이었어. …자, 이제 정말 시작하자. 빨리 끝내고, 저 아래로 다들 돌려보내야 하니까.

환영이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연이의 눈에서는 조급함 대신, 오히려 더 단단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무성의 협박은, 연이를 흔들기는커녕 그 심지를 더 굵게 만들 뿐이었다.

무성—…그래. 백 년간, 이 세계의 무수한 별들이 이 궁으로 올라왔다. 왕좌의 주인이 그것들을 모은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리고 이제, 마지막 조각이 필요하지. 완성된 그릇. 바로 너.

연이—…또 그릇. …좋아. 그 얘기, 피하지 말고 하자. 이 모든 별을 모아서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왜 하필 백 년이야. 그리고 왜, 완성된 사주인 내가 마지막 조각이야. …다 말해 줘, 무성. 그럼 나도 생각해 볼게.

무성—…이 궁의 주인은, 세상의 모든 걸 제 것으로 긁어모으는 자다. 시간도, 운명도, 인연도, 이야기도. 백 년째 끝도 없이. …그리고 저 위 탑엔, 그 여자가 부숴서 가둔 어느 아이의 운명이 시들고 있지. 그 여자가 제일 아끼는 전리품. …이제 그 여자에게 남은 건, 마지막 조각 하나뿐이야. 백 년을 들여 완성될, 온전한 그릇. 바로 너.

연이—…저 탑의 창백한 아이. 그 여자가 부숴서 가둔 운명이라고. …근데 그 여자, 그 애를 살리려는 게 아니지? 그냥 전리품으로 가둬 두고, 시들어 가는 걸 지켜보는 거야. 자기가 부순 걸 곳간에 진열하듯. …그리고 나는, 그 컬렉션의 마지막 조각이고. …소름 끼쳐. 그게 탐욕가의 잔인함이구나.

무성—…나도 안다. 그 여자가 하는 게 미친 짓이라는 걸. 세상을 다 삼켜도 그 여자는 만족을 몰라. 가지면 더 갖고 싶어 하는 병이야. …나는 백 년을, 그 여자의 손발이 되어 그 탐욕을 채워 왔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여자.' 연이는 그 말을 붙들었다. 무성이 손발이 되어 섬긴 그 탐욕의 주인. 텅 빈 왕좌 뒤에서 모든 셈을 명하는 자. 그것이 누구인지, 연이는 이미 알 것 같았다.

연이—…그 여자. 세상의 모든 값진 걸 제 것으로 긁어모으는 탐욕가. …그 여자가, 박지은. 회장님. 그림자 여인. 내 시간을 훔쳐 간 그 여자. …맞지?

연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왕좌가 크게 술렁였다. 금 간 목소리가, 이번엔 무성이 아니라 왕좌 그 자체에서 흘러나왔다. 다정함과 잔인함이 한 몸에 깃든, 꿈에서 익히 들어 온 그 목소리였다.

「…영특하구나, 아이야. 무성이 몇 마디 흘렸다고, 벌써 그 뒤까지 읽어 내다니. …그래. 나는 이 별들의 궁의 왕. 허나 이 궁을 움직이는 뜻은, 내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셈에 매인 자일 뿐.」 왕좌의 목소리는, 명령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오래 갇힌 자의 것이었다.

네오—…이 목소리. …연이, 이 목소리야. 내가 왕좌 근처에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던. …이 왕. 나는 이 왕을 알아. 기억은 안 나는데, 내 몸이, 내 별자리의 빈자리가, 이 목소리를 알아.

왕좌의 어둠이, 네오의 목소리에 미세하게 반응했다. 마치 오래 잊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것처럼. 검은 물이 잠시 은빛으로 일렁였다가, 다시 검게 가라앉았다.

「…파수꾼. 너도 왔구나.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곁에 서면, 내 안의 무언가가 자꾸 깨어나려 한다. 그건… 위험해.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 여자가 알아채면, 우리 둘 다 무사치 못하니.」

연이—…'우리 둘'? 왕, 당신 방금 네오랑 당신을 '우리'라고 묶었어. …당신들, 무슨 사이야. 내 꿈에 자꾸 나오는 얼굴 없는 남자. 은빛 사자. 네오. …그리고 당신. 다 하나로 이어져 있는 거지? 하나였다가, 갈라진 거지?

왕좌가 침묵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아픈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연이는 확신했다. 이 왕과 네오 사이에는, 백 년의 슬픈 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이, 이 모든 비극의 가장 깊은 뿌리였다.

연이—…말하기 싫으면, 지금은 안 물을게. 근데 왕. 하나만은 알겠어. 당신, 이 셈을 원하지 않아. 당신도 무성처럼, 그 여자의 셈에 매여서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붙들려 있는 거야. …당신도, 갇힌 자야.

「…그래. 나는 갇힌 자다. 백 년째, 이 왕좌에. …허나 아이야, 나를 동정하지 마라. 나는 그 갇힘을, 스스로 택했으니.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그것이 옳았는지는, 이제 나도 모르겠다만.」

연이—…왕. 저 위 탑 꼭대기. 시들어 가는 창백한 별 곁에, 작은 청록빛 하나 있죠. 소망이. 백문 님의 딸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순한 이야기. …당신이, 아니 그 여자가, 왜 소망이를 저 부서진 운명 곁에 뒀어요? 삼킬 거면 삼키지, 왜 곁에 뒀냐고요.

왕좌가 오래 침묵하다, 아주 낮게 답했다. 「…그 아이는, 유일하게 삼켜지지 않은 이야기다. 너무 순해서, 어떤 어둠도 그 아이를 물들이지 못했지. …그래서 저 시들어 가는 운명 곁에 두었다. 꺼져 가는 것이, 마지막까지 곁에 둘 온기로. …잔인하다 여기느냐? 나도, 그리 여긴다.」

연이—…소망이가, 삼켜지지 않는 이야기라서. 그래서 저 부서진 운명 곁에 위로로 뒀다고. …그 여자, 정말 지독한 사람이네요. 남이 부서지는 걸 구경하면서, 남의 순한 딸까지 곁에 장식처럼 갖다 놓고. …왕. 저 시들어 가는 별, 원래 누구였어요? 그리고 그 여자는, 정말 세상을 다 삼켜서 제 곳간에 채우면 만족한대요?

「…그 정체는, 네가 그 여자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한다. 나는 말할 자격이 없어. …다만 이것만은. 그 여자도, 처음부터 온 세계를 긁어모으려던 건 아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갖지 못한 것을 향한 목마름이 여기까지 온 것뿐. …사랑이, 어쩌다 이런 탐욕이 되었는지. 나도 그 물음의 답을, 백 년째 찾고 있다.」

「…아이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일러 주마. 그 여자를 만나거든, 절대 그 상처를 얕보지 마라. 그 여자의 탐욕은, 온 세계를 저울에 올릴 만큼 무겁다. 허나 그 밑엔, 사랑받지 못한 텅 빈 자리가 있지. 어설픈 동정이나 설득으로는, 오히려 네가 삼켜질 것이다. …그 여자를 넘으려거든, 그 여자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법밖에 없다.」

연이—…그 여자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법. …알겠어요, 왕. 명심할게요. 얕보지 않을게요. 그 여자의 슬픔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도 조금은 알 것 같으니까. …근데 왕. 나한텐 그 여자한테 없는 게 하나 있어요. 나는 혼자 사랑하지 않아요. 여럿이, 같이 사랑해요. 그게 더 무거울걸요.

왕좌가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 아주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한숨 같기도, 웃음 같기도 했다. 백 년의 얼음 속에서, 무언가가 아주 잠깐 녹으려다 만 소리였다.

네오—(…연이. 방금 왕좌가, 웃었어. 백 년 동안 저 왕좌에서 저런 소리가 난 적 없을 거야. …네가, 이 궁을 진짜로 흔들고 있어. 결투도 하기 전에.)

연이—(…응. 나도 느꼈어, 네오. 저 왕, 웃고 싶어서 웃은 게 아니라, 웃음이 새어 나온 거야. 백 년을 얼어 있다가, 아주 잠깐 녹은 거지. …여기 있는 모두가, 사실은 녹고 싶어 해. 무성도, 왕도. 다들 이 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해. 방법을 모를 뿐이야.)

연이—(…그럼 내가 방법이 되면 돼. 이 얼어붙은 궁에, 온기를 흘려보내는 방법. …좋아. 무성부터야. 저 새의 검은 물에, 내 청록빛 물길을 섞어 보자. 오염된 물이라도, 결국은 물. 물끼리는 통하니까.)

연이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이것은 이기고 지는 결투가 아니었다. 백 년의 얼음을 녹이는 첫 불씨를, 이 차가운 명반 한복판에 지피는 일이었다. 그리고 연이는, 그 불씨가 되기에 충분히 따뜻했다.

연이—…사랑이 어쩌다 괴물이 됐는가. …그 답, 내가 찾아 줄게요. 그리고 그 사랑을, 다시 사람 살리는 사랑으로 되돌려 놓을게요.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니까. …왕, 조금만 버텨요. 나 저 아래 사람들처럼, 당신도 안 버릴 거예요.

연이—(…근데 잠깐. 무성이 자꾸 '그릇'이라고 했어. 완성된 그릇. 마지막 조각. …이제 알겠어. 그 여자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삼켜 모았고, 이제 그 전부를 담아 통째로 제 곳간에 거둬들일 '완벽한 그릇' 하나가 필요한 거야. …그리고 그 그릇이, 나야. 백 년을 들여 완성시킨 내 사주가.)

연이—(…소름 끼쳐. 내가 재성에서 언니 구하고, 도서관에서 본뜻 배우고, 사람이 되고, 사주를 완성한 그 모든 여정이… 이 그릇을 굽는 과정이었던 거야? 그 여자가, 처음부터 나를 이렇게 키운 거야? 마지막에 제 컬렉션의 정점으로 통째로 거둬들이기 위해서?)

무성—…거기까지 읽었느냐. …그 이상은, 왕좌에 올라 그 여자의 입으로 들어라. 네 사주가 그 여자에게 무엇으로 쓰일지는, 나조차 다 말할 자격이 없어. …다만 하나는 맞다. 너는, 백 년을 들여 구워진 마지막 조각이다. 우연히 이 세계에 온 게 아니야.

연이—…우연이 아니라고. …내 그 모든 여정이, 처음부터 짜인 거였다고. …소름 끼치네. 근데 무성. 설령 내가 무슨 '그릇'으로 구워졌든, 그릇을 어디에 쓸지는 그 여자가 아니라 내가 정해. 붓는 데 쓸지, 나누는 데 쓸지. …나는 나눌 거야. 삼켜진 이야기들을,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는 데.

연이의 대답에, 왕좌의 어둠이 다시 한번 미세하게 술렁였다. 백 년간 이 궁을 거쳐 간 모든 그릇들은, 자신이 그릇임을 안 순간 절망했다. 그런데 이 손님은, 그릇이라는 운명 앞에서 오히려 그 쓰임을 뒤집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성—…이상한 아이로군. 그릇이 스스로 쓰임을 정하겠다니. …백 년간 이 자리에서, 나는 수많은 완성된 사주를 삼켰다. 다들 울거나, 빌거나, 저주했지. 너처럼 웃으며 '나눈다'고 말한 그릇은… 없었어.

연이—…그 말투. 방금 너, 잠깐 궁금해했지?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지. …무성, 너 아직 안 죽었어. 궁금하다는 건, 살아 있다는 거야. 백 년을 삼켰어도, 네 안엔 아직 '혹시'라는 마음이 남아 있는 거라고.

무성—…착각하지 마라. 나는 그저… 곧 삼킬 그릇이 어떤 맛인지, 미리 재 볼 뿐이다. …됐다. 말이 길어졌군. 백 년 만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한 것도, 다 네 탓이야. 그 입, 정말 위험해.

네오—(연이. 저 녀석 목소리, 처음보다 훨씬 인간적이 됐어. 처음엔 기계처럼 삼킴만 말하더니, 지금은 자기 마음을 말하고 있어. …네 읽기가, 이미 저 검은 물에 균열을 내고 있는 거야.)

연이—(…응. 나도 느껴. 저 새, 결투 전부터 벌써 흔들려. …이건 힘 싸움이 아니라 마음 싸움이야. 그럼 나, 질 수가 없지. 마음 읽는 건 내 전공이거든.)

연이—…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당신도, 무성도. 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이 잔인한 셈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구나. …그리고 저 여자조차, 사랑받고 싶어서 이 탐욕에 스스로를 가둔 거고. …그래서 내가 온 거야. 사랑으로 시작한 일을, 사랑으로 풀려고. 셈이 아니라. …그러니까 왕, 나 당신도 꼭 꺼내 줄게.

연이는 고개를 들어, 궁의 가장 높은 탑을 올려다보았다. 그 꼭대기에서, 꺼져 가는 창백한 별 하나와 그 안에 포개진 작고 순한 청록빛이 보였다. 시들어 가는 그 부서진 운명과, 소망이. 결투장에서도, 그 겹친 빛은 연이의 시야 한구석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연이—…소망아. 저기서 보고 있지? 나 지금 네 아빠 별빛도 되찾고, 저 시들어 가는 별도 살릴 방법을 찾으러 왔어. …조금만 더 그 부서진 빛이랑 한 몸으로 붙어서 버텨 줘. 너 되게 착하다. 안 울고 그 자리 지키는 거. …언니가 금방 갈게.

그때, 연이의 손목에 감긴 물 조약돌이 은은하게 데워졌다. 저 아래 재성에서, 루나가 물의 방패를 지키면서도 언니에게 보내는 응원이 조약돌을 타고 전해져 온 것이다. 두 세계는 끊겼어도, 물은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

연이—…루나. 느껴져. 네 물, 여기까지 닿았어. …그래. 나 혼자가 아니지. 너도, 네오도, 다들 각자 자리에서 싸우고 있어. …좋아. 나도 여기서 내 몫을 할게. 이 지친 새를, 힘이 아니라 읽기로 넘어 볼게.

네오—연이. 각오한 얼굴이네. …좋아. 저 무성, 오행으로 붙으면 까다로워. 물의 새라, 금(金)인 나랑 상성이 최악이야. 내가 벨수록 저 녀석이 커져. …이 싸움은, 아무래도 네 판이야. 나무인 네가, 저 물을 마셔야 해.

연이—…수생목(水生木). 물은 나무를 키운다. 저 새 물이 아무리 검어도, 결국 내 양분이야. …맞붙어 보자, 무성. 대신 미리 말해 두는데, 나 널 이겨서 없애려는 거 아니야. 널 읽어서, 그 갇힌 데서 꺼내려는 거야.

무성—…듣기 좋은 말이군. 허나 말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왕좌의 법은 말이 아니라 결투로 정해진다. …손님. 네가 정말 이 셈을 무너뜨리고 싶다면, 먼저 나를 넘어라. 무성을. 별들의 궁의 문지기를.

연이는 별 우리에 갇힌 세 빛과, 왕좌의 갇힌 왕과, 눈앞의 지친 그림자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결투를 피할 길은 없었다. 왕좌의 법이 그러하니까. 하지만 연이에게 이 결투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지친 새를,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의 문제였다.

연이—무성. 결투 받을게. 근데 그 전에. 넌 아까부터 이상해. 강을 검게 칠한 것도, 별을 어둡게 한 것도 '내 짓'이라면서, 자꾸 '내 뜻은 아니다'라고 하잖아. 그거 완전히 다른 말이야. …너, 이 결투도 사실은 하기 싫지?

무성—…말이 많네, 손님. 그 입, 결투장에서도 그렇게 잘 돌아가나 어디 보자.

네오—(연이. 저 녀석, 우리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야. 화낼 대상을 못 찾은 얼굴이야. 저건 원망을 삼키다 지친 눈이라고.)

그때, 별 우리에 갇힌 세 빛이 동시에 밝아졌다. 갇혀서도, 연이에게 힘을 보내려는 것이었다. 루나의 물빛이 파르르 떨며 잔향을 흘렸다.

「연이 언니…! 무섭겠지만, 언니는 할 수 있어! 언니가 나한테 그랬잖아, 물은 흐르게 두면 안 부서진다고! 언니도 그래! 저 새 앞에서, 흐르게 둬! 나도 여기서 응원할게!」 — 루나의 물빛이었다.

「연이 학생. 빈속으로 싸우지 말랬는데, 이 상황엔 어쩔 수 없겠네요. …대신 이것만 기억해요. 저 새도 누군가의 자식이었을 거예요. 미워하지 말고, 안아 줘요. 언니가 여기서 지켜볼게요.」 — 빵집 언니의 등불빛이었다.

「연이. 자네의 붓은 진실을 쓰고, 자네의 눈은 뜻을 읽네. 저 새의 검은 물에 겁먹지 말게. 물 밑의 맑은 샘을 읽어. 그것이 자네가 이길 유일한 길일세. …소망이를, 부탁하네.」 — 백문의 서가빛이었다.

연이—…루나. 언니. 백문 님. …다들, 갇혀서도 나 응원하네. …고마워. 그 마음, 다 받았어. …봐, 무성. 이게 너랑 나의 차이야. 넌 혼자 삼키고, 나는 이렇게 나눠. …이제 시작하자. 나, 하나도 안 무서워.

무성—연이. 사주의 강을 거슬러 온 아이. 너한테 결투를 청한다. 왕좌의 법대로, 이 별 위에서.

무성—네가 이기면 인질도 별도 돌려주지. 내가 이기면 네 완성된 사주를 왕좌에 바친다.

네오—연이, 잠깐. 그 판돈은 너무 커. 네 완성된 사주를 바친다는 건, 저 여자가 원하는 걸 제 발로 내주는 거야. 지면, 저 여자 곳간에 네가 통째로 거둬들여져. 되돌릴 수 없어. …이건, 목숨보다 무거운 내기야.

연이—…알아, 네오. 무거운 거. …근데 어차피 안 싸우면 저 아래 세계가 다 시들어. 싸워서 이기면, 인질도 별도 다 돌려받고 이 그림자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어. …판돈이 큰 만큼, 이길 이유도 큰 거야. 나 안 져.

네오—…그 근거 없는 자신감. 여전하네. …좋아. 나는 네 등만 지킬게. 내 금(金)은 봉인해. 이 판은 네 나무의 판이야. 대신 정말 위험해지면, 봉인이고 뭐고 다 풀 거야. 그건 각오해.

연이—…근거 없는 자신감 아니거든? 나 이 여정 내내 한 번도 안 죽었어. 그게 근거야. …자, 무성. 네 조건 다 받아. 이기면 다 돌려받고, 너도 자유. 지면… 안 질 거라 그건 생각도 안 해.

연이—…받아들일게. 대신 하나만 물어볼게. 무성, 그 결투 정말 네가 원해서 하는 거야?

명반이 요동치며, 결투장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열두 궁의 별자리가 발밑에서 소용돌이치고, 검은 물이 사방에서 벽처럼 솟아올랐다. 저 어둠 속 빈 왕좌가 침묵한 채 도사렸고, 별 우리 속 세 빛은 숨죽여 떨었다.

네오—(온다. 연이, 준비해. 저 녀석 오행 상성이 지독해. 내 금(金)은 봉인한다. 이 판은 네 나무의 판이야. …그리고 명심해. 저 녀석은 적이 아니라, 갇힌 자야. 이기되, 부수진 마.)

연이—…알아, 네오. 나 이 결투,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야. 저 새 안의 맑은 샘까지 닿으려고 하는 거야. …무성. 다시 물을게. 이 결투, 네 뜻이야? 아니면 그 검은 실이 시키는 거야? …네 입으로 대답해 봐. 딱 한 번만.

그림자는 아주 오래 침묵했다. 별 도는 소리만이 초침처럼 외롭게 울렸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무성은 이 결투를, 원하지 않았다.

연이—…대답 못 하네. 그래. 그거면 됐어. 네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거, 확인했으니까. …그럼 이 결투, 내가 이기면 널 자유롭게 해 주는 거로 알게. 자, 와. 안 피할게.

명반 전체가 거대한 결투장으로 변모했다. 열두 궁의 별자리가 발밑에서 소용돌이치고, 검은 물이 사방을 벽처럼 둘러쌌다. 저 어둠 속 빈 왕좌가 침묵 속에 도사렸고, 별 우리의 세 빛은 숨죽였으며, 궤도를 돌던 무수한 별들마저 잠시 멈춘 듯했다.

무성의 윤곽이 서서히 짙어졌다. 검은 물과 검은 깃털이 한데 뭉쳐, 거대한 새의 형상으로 벼려졌다. 백 년간 삼켜 온 모든 이야기의 무게가, 그 어둠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결투장의 공기가, 납처럼 무거워졌다.

연이—…온다. …네오, 등 부탁해. 루나, 언니, 백문 님, 소망아. 다들 보고 있어. …좋아. 심호흡. …나무는 물을 먹고 큰다. 저 검은 물, 아무리 무거워도, 다 내 뿌리로 마셔 주지.

연이는 두 발을 명반에 굳게 딛고, 손에 본필을 고쳐 쥐었다. 등 뒤에는 네오가, 마음속에는 넷의 온기가, 눈앞에는 백 년의 어둠이 있었다. 우주의 시계 한복판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인간 하나가, 가장 크고 차가운 슬픔과 마주 섰다.

무성—…시작하자.

그 말과 동시에, 결투장 전체의 검은 물이 일제히 곤두섰다. 수천 개의 검은 창처럼, 사방에서 연이를 향해 밀려들었다. 백 년의 삼킴이 응축된 첫 일격이었다.

연이—…온다! 네오, 등! …나무는 물을 마신다. 이 정도 물, 다 마셔 주지! 자, 무성. 네 백 년이랑, 내 여정이랑,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겨뤄 보자!

연이의 손끝에서 청록빛 넝쿨이 폭발하듯 뻗어 나가, 밀려드는 검은 물과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우주의 시계 한복판에서, 나무와 물의, 사랑과 슬픔의, 그 긴 결투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제31화 · 별들의 궁 — 끝. 제32화 「검은 깃털의 주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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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목차자미두수 명반 읽는 법비주얼 노벨로 읽기

창작·집필 안내

『연이의 운명 노벨』은 Code Destiny가 직접 쓰고 그린 창작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재하는 인물·단체와 관계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사주 명리학의 십성, 자미두수의 열두 궁, 숙요 27수라는 실제 전통 체계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서사에 맞게 각색했으므로, 작품 속 묘사를 그대로 점술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각 체계의 실제 해석 규칙은 별도의 기능 가이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본문은 게시 전 편집자가 문장과 흐름을 다듬습니다. 오탈자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문의로 알려 주시면 확인 후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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